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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한국 프로 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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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병구 . . . . 359회 일치
         {{프로게이머 정보
         | 종족 = [[프로토스]]
         '''송병구'''(宋炳具, [[1988년]] [[8월 4일]] ~ )는 [[대한민국]]의 [[스타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 II]] [[프로게이머]]이자 [[프로게임단]] 코치로, 전 [[삼성 갤럭시 (프로게임단)|삼성 갤럭시]] 소속의 [[프로토스]] 유저이다. 아이디는 '''Stork''' 이다.
         2004년 삼성전자 칸에 입단하며 프로게이머 생활을 시작했고, 첫 진출한 CYON 2004 챌린지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스타리그#EVER 2005 스타리그|EVER 스타리그 2005]] 4번 시드를 따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주목받았던 신예 프로토스 [[오영종]](당시 [[화승 OZ]]), [[박지호]](당시 [[MBC게임 히어로]])가 각각 우승, 4강 진출로 이름을 알리는 동안, 송병구는 EVER 스타리그 2005에서 1승 2패, [[스타리그#2005 So1 스타리그|So1 스타리그]]에선 전패로 탈락하는 등 기대만큼의 성적을 내지 못했다. 또한 삼성전자 칸 소속의 많은 선수들이 개인리그에 진출했던 2006 시즌 중후반에도 유독 송병구는 하부리그의 벽을 넘지 못하였다.
         송병구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7년이었다. 첫 시즌부터 양대리그 4강에 동시에 올라 [[스타리그#2007 다음 스타리그|Daum 스타리그]] 3위, [[MBC게임 스타리그#곰TV MSL 시즌2|곰TV MSL 시즌2]] 준우승이란 호성적을 냈으며,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프로리그]]에서도 높은 승률로 삼성전자 칸의 광안리 우승을 이끌었다. 송병구는 2007년에 올해의 프로토스상에 최다승상까지 받으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2007년 당시 송병구는 대테란전 승률 70%에 달할 정도였으며 Daum 스타리그 2007 3,4위전에서 이영호를 3:0으로 셧아웃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스타리그 2연속 준우승이라는 흔치 않은 기록과 MSL에서도 1회 준우승을 기록하여 콩라인에 소속되었다. 2007년 10월엔 [[김택용]](당시 [[MBC게임 히어로]], 은퇴)을 제치고 [[KeSPA]] 랭킹 1위에 등극하기도 했다.
         인크루트 스타리그에서 16강에서 3승으로 가볍게 8강 티켓을 따낸 송병구는 8강에서 김택용, 4강에서 도재욱을 꺾으면서 결승에 진출했다. 이는 프로토스 최초 스타리그 4회 결승 진출이라는 대기록이다. 송병구는 도재욱, 김택용을 꺾으면서 최고조에 달한 기량을 선보였고 당시 결승상대는 김준영을 3:1로 꺾고 결승에 진출하여 로열 로더를 노리는 [[정명훈 (프로게이머)|정명훈]] (당시 [[SK텔레콤 T1]], 현 데드픽셀즈)이었다. 2008년 11월 1일, [[스타리그#인크루트 스타리그 2008|인크루트 스타리그]] 결승에서 정명훈을 3:2로 꺾고 우승함으로써 2년 가까이 따라붙었던 만년 준우승의 꼬리표를 떼어냈다. 이는 스타리그 최다 진출만에 우승이자, (9회 진출만의 우승이며, 종전까지의 기록은 7회 진출만에 Daum 스타리그에서 우승한 [[김준영 (프로게이머)|김준영]]) [[삼성전자 칸]] 선수 최초의 개인리그 우승이었다. 한편 이 경기들에서 송병구는 2경기, 5경기서 물량의 힘을 선보이며 승리를 성취했다. 이때 당시 송병구는 8강부터 결승까지 skt에 소속된 선수들을 꺾으며 skt 킬러의 이미지를 굳혀가고 있었다. 하지만 차기 스타리그인 바투 스타리그 8강에서 이제동에게 2:1 역전패를 당하며 우승자 징크스만은 깨지 못했지만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8 결승전에서는 박찬수를 꺾고 팀의 우승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국가대표로 출전했던 [[월드 사이버 게임즈|WCG 2007]] 그랜드 파이널 8강에선 진영수를 꺾고 결승에선 마재윤을 꺾고 결승에 진출했던 중국의 [[샤쥔춘]]을 꺾고 금메달을 따냈으며, WCG 2008 그랜드 파이널에서도 2회 연속 결승에 올라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8에서도 건재를 알리며 삼성전자 칸의 2연속 광안리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WCG 2009에서는 스타크래프트 부분 WCG를 최초로 3회연속 진출에 성공한 후 이제동과의 결승에서 안타깝게 패배해 은메달에 머물렀다. 하지만 IEF2008에서 결승에 오르는데 성공했고 준우승을 기록하였으며 IEF2009에서는 결승에 올라 우승을 차지하며 국제대회에서 '송순신'등으로 불리며 대활약을 벌였다.
         둘의 첫 만남은 2007년 5월 14일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이지만, 실질적인 라이벌 관계는 두 번째로 만난 [[곰TV MSL 시즌2]] 결승전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시까지 동일한 종족 간의 결승은 왠만해선 흥행이 힘들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두 선수는 5경기까지 가는 모든 경기를 명승부로 만들며 우승자 [[김택용]]도, 준우승자 송병구도 박수를 받는다. 이후 두 선수 모두 전성기를 이루면서 역대 [[스타크래프트]] 리그 판도에 전혀 없던 [[프로토스]]의 전성기를 만들고, [[김택용]]과 송병구의 '택뱅시대'를 만들게 된다.
         이 두 선수가 만난 다전제는 [[곰TV MSL 시즌2]] 결승, [[EVER 스타리그 2007]] 4강, [[인크루트 스타리그 2008]] 8강, IEF 2008 결승, [[WCG]] 2009 한국 대표 선발전 결승, IEF 2010 결승, IEF 2011 결승으로, [[EVER 스타리그 2007]] 4강, [[WCG]] 2009 한국 대표 선발전, 피디팝 MSL 16강을 제외한 모든 다전제는 최종전까지 이뤄졌다. 두 선수의 상대전적은 19:17로 송병구가 우위이다.
         온게임넷의 엄재경 해설위원과 김태형 해설위원은, 스타 뒷담화 방송에서 과거 [[박정석]]과 [[강민 (프로게이머)|강민]]의 라이벌 관계와 비교하여 [[박정석]]-송병구의 정파 [[프로토스]], [[강민 (프로게이머)|강민]]-[[김택용]]의 사파 [[프로토스]]라는 프로토스 계보로 분류하기도 하였다.
         이상하게도 프로리그나 개인리그(결승전 제외)에서는 송병구가 많이 이겼으나, 개인리그 결승전에서는 송병구가 김택용을 다전제전에서 이기지 못해 우승을 하지 못했다.
         10-11시즌 1라운드에서 송병구는 승보다 패가 많을 정도로 부진에 빠졌다. 당시 송병구는 조금씩 하락세를 타는 추세였으나 2라운드가 시작되면서 송병구는 회복세를 보였다. 승수를 차츰차츰 쌓아나갔고 팀의 에이스로서의 면모를 굳혀 나갔다. 2라운드와 비슷한 시기 개인리그에서도 송병구는 상승세를 타는 분위기였다. 3라운드 위너스리그서는 10-11시즌 MBC게임과의 경기에서 첫 역올킬을 달성하였고 본인의 첫 공식전 올킬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보다 조금 전에는 화승OZ와의 경기에서 팀의 에이스 이제동을 꺾으며 3킬을 달성하며 프로리그 8연승을 기록했다. 하지만 4라운드에 접어들면서 다시 패가 많아지게 되었다. 근근히 승리를 쌓는 송병구였지만 마침내 시즌 막판에 접어들면서 연패를 겪었고 택리쌍에 비해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10-11시즌에서 40승을 기록하며 본인의 첫 프로리그 40승을 돌파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2011년 1월 16일, MBC game Hero와의 경기에서 [[김재훈 (프로게이머)|김재훈]]이 3킬을 달성했으나 대장으로 나온 송병구가 '[[김재훈]], [[염보성]], [[고석현]], [[박수범]]'을 모두 잡아내는 괴력을 발휘하며 역올킬을 달성했다.
         * 1set - [[김재훈 (프로게이머)|김재훈]] 승 - [[유준희]] 패
         * 2set - [[김재훈 (프로게이머)|김재훈]] 승 - [[차명환]] 패
         * 3set - [[김재훈 (프로게이머)|김재훈]] 승 - [[유병준]] 패
         * 4set - [[김재훈 (프로게이머)|김재훈]] 패 - 송병구 승
         [[MBC 게임]]의 프로그램인 [[유저의 취향]]에 2011년 8월부터 추석특집까지 출연하였다. MBC 게임의 중계진인 [[박상현 (1981년)|박상현]], [[유대현]]과 함께 진행을 맡았으며, 멋진 스타 실력과, 재미있는 입담으로 시청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예능왕 송병구답다.' 라고 평가 받고 있다.
         송병구는 SK플래닛 프로리그에서 무려 13승 5패를 거두며 프로토스 다승 1위, 전체 다승 공동 2위에 올랐다.
         비록 팀은 접전끝에 아쉽게 플레이오프에 그쳤고 결승전 진출이 좌절됐지만 송병구는 2012년에 들어서며 자유의 날개와 병행된 프로리그에서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 김시진 . . . . 131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83년]]
         |드래프트 순위 = [[1983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1983년 1차 2순위]]([[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한국 야구 위원회|KBO]] / [[1983년]] [[5월 3일]] <br /> [[삼미 슈퍼스타즈|삼미]]전 구원
         |마지막 경기 = [[한국 야구 위원회|KBO]] / [[1992년]] [[5월 15일]] <br /> [[한화 이글스|빙그레]]전 구원
         * [[키움 히어로즈|넥센 히어로즈]] 감독 (2009년 ~ 2012년)
         |야구 월드컵 = [[1982년]] 서울
         [[1983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데뷔해 [[1992년]] [[롯데 자이언츠]]에서 은퇴할 때까지 10시즌 동안 통산 124승 73패, 16세이브, 3점대 평균자책점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남겼다. 은퇴 후 [[태평양 돌핀스]]를 시작으로 13년 동안 투수코치 생활을 하다가 [[2006년]] 시즌 후 [[김재박]]의 후임으로 [[현대 유니콘스]]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2007년]] [[현대 유니콘스]]의 마지막 감독이 되었다. [[2009년]]부터 [[키움 히어로즈|넥센 히어로즈]] 감독직을 맡아 [[2012년]]까지 재임하였다. 2013년부터 [[롯데 자이언츠]] 감독직을 맡았으나 2014년 10월 팀 성적 부진으로 자진사퇴하였다.<ref name="ohmynews">[[오마이뉴스]] - 2008년 4월 기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72861 "최동원 · 선동렬에 가려진 위대한 투수"]</ref>
         육군중앙경리단에서 병역을 마치고 [[1983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으며, 입단 첫 해에 17승(14선발승으로 [[장명부]](28선발승)에 이어 선발승 2위)(그 뒤 1986년 16선발승으로 [[선동열]](17선발승)에 이어 선발승 2위)을 올리면서 [[삼성 라이온즈]]의 에이스로 활약했는데 [[6월 15일]] 롯데전(대구)에서 완봉승을 거둔 후<ref>{{뉴스 인용
         | 제목 = 프로야구 三美(삼미), 「射程(사정)거리」고수
         | 제목 = 프로야구 MBC·해태 스타트 快調(쾌조)
         }}</ref> 순수신인 최초 2완봉승 도달 투수가 됐고 결국 그 해 5완봉승으로 마감했는데(당시 전구단 상대 완봉승) 이 기록은 아직까지 순수신인 최다 완봉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 프로 데뷔 이후 5년 만에 [[KBO 리그]] 사상 최초로 개인 통산 100승을 올렸다. [[1985년]] 25승(21선발승으로 최다 선발승이었는데 전년도(15선발승)에 이어 2년 연속 최다 선발승 1위) 5패, 10세이브, 201탈삼진으로 소속 구단 [[삼성 라이온즈]]의 전·후기 통합 우승을 이끄는 등 [[삼성 라이온즈]]에서만 111승을 올렸다.<ref name="ohmynews" />
         | 출판사 = 한국야구위원회
         | 제목 = [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 MVP 향배를 갈랐던 과거 속 요소들
         1980년대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 사건으로 인해 [[1988년 한국 프로 야구|1988년]] [[11월 23일]] [[전용권]], [[오대석]], [[허규옥]]과 함께 [[최동원]], [[김성현 (1963년)|김성현]], [[오명록]]을 상대로 [[롯데 자이언츠]]에 트레이드되었다. 그리고 한 달 뒤 두 팀은 [[장효조]]와 [[김용철 (야구인)|김용철]] 등의 트레이드를 성사했다. 이후 4년 간 [[롯데 자이언츠]]에서 13승 24패를 추가하는 데 그쳤고, [[1992년]]에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정규 리그 통산 124승을 올렸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승리없이 7패로 좋은 기록을 내지 못했다.
         == 야구선수 은퇴 후 ==
         [[롯데 자이언츠]]에서 은퇴하고 [[1993년]] [[태평양 돌핀스]]의 투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오랫동안 [[김재박]]과 같이 활동하였으며, [[2007년]] [[현대 유니콘스]]의 마지막 감독이 되기 전까지 투수 코치로 계속 활동했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아마추어 실업 야구 팀 [[현대 유니콘스|현대 피닉스]]에서 잠깐 코치 생활을 하기도 했었으나, 이내 곧 [[1998년]]에 [[현대 유니콘스]]의 투수 코치로 임명되어 프로에 복귀했고, 그 해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이래 첫 우승을 거두었다. [[현대 유니콘스]]의 투수 코치를 맡으면서 그는 [[김수경 (야구인)|김수경]], [[임선동]], [[조용준]], [[오주원]], [[황두성]], [[박준수]], [[장원삼]] 등 뛰어난 투수들을 조련하고 육성하는 데에 뛰어났으며 [[투수]]를 보는 안목이 탁월했다. 투수 코치를 맡은 기간 동안 그는 '명 조련사'로 불렸는데, [[1998년]] [[김수경 (야구인)|김수경]], [[2002년]] [[조용준]], [[2003년]] [[이동학]], [[2004년]] [[오주원]] 등이 [[한국 프로 야구 신인왕|신인왕]]을 수상했던 것을 예로 들면 그는 투수 코치로서 선수들을 키우는 데에 있어서 일가견이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는 감독 생활에도 이어져 [[키움 히어로즈|넥센 히어로즈]] 최초 1차 지명으로 선발한 좌완 투수 [[강윤구 (야구 선수)|강윤구]] 역시 [[2009년 한국 프로 야구|2009 시즌]]에 옥석으로 평가받았다.<ref>[[스포츠 서울]] -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073&article_id=0002013951 "히어로즈가 끝까지 지킨 강윤구는 누구?"]</ref> 시즌 전 트레이드로 홍역을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2010년]]에는 걸출한 신인 우완 투수 [[고원준]]을 배출하였으며, 트레이드로 영입한 [[금민철]]을 선발 투수로 자리매김하도록 했다. 그가 투수 코치로 있는 동안 [[태평양 돌핀스]]와 [[현대 유니콘스]]에서 뛰어난 [[투수]]들이 많이 배출되어 '투수 왕국'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2006년 한국 프로 야구|2006년]]까지 [[현대 유니콘스]]의 투수 코치를 역임하다가, 2006 시즌 종료 후 [[LG 트윈스]]의 감독이 된 [[김재박]]의 뒤를 이어 [[현대 유니콘스]]의 2대 감독이자 마지막 감독이 되었다. [[2007년]]에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은 [[현대 유니콘스]]에서 감독으로 생각 이상의 선전을 하여 시즌 56승 69패 1무로 시즌 6위를 기록하였다. [[2007년]] 고별전을 끝으로 시즌 후 재정난을 이겨 내지 못한 [[현대 유니콘스]]는 이듬해 3월 해체되었다.
         [[2008년]] 시즌 종료 후, 성적 부진을 이유로 [[키움 히어로즈|히어로즈]]에서는 [[이광환]]을 경질하고 그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구단과 계약 기간 3년, 계약금 2억원, 연봉 2억원 등 총 8억원에 계약을 맺으면서 [[키움 히어로즈|히어로즈]]의 2대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2008년 [[10월 10일]] 감독 취임식을 가졌다.<ref>《한겨레》, 2008, 10, 11.</ref> [[2009년]]에 6위를 기록하였지만, 시즌 후반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와 치열한 4위 다툼을 벌이기도 했고, 시즌 초반에는 한때 선두를 달리기도 했다. 특히 [[강윤구 (야구 선수)|강윤구]]와 [[강정호]], [[황재균]] 등의 젊은 선수들은 [[이택근]], [[이현승 (야구 선수)|이현승]], [[장원삼]]의 [[넥센 히어로즈의 트레이드 파동|트레이드 파동]] 때 "트레이드 불가"로 못박을 정도로 좋은 활약을 보여 주었다. [[2009년]] [[8월 6일]] [[SK 와이번스|SK]]전에서 감독 통산 100승을 기록했다.
         [[2010년 한국 프로 야구|2010 시즌]]에는 [[이현승 (야구 선수)|이현승]], [[장원삼]], [[이택근]], [[황재균]] 등의 이적 공백으로 인해 팀 전력에 큰 손상을 입으면서 하위권으로 쳐졌지만 어려운 팀 상황 속에서도 [[손승락]], [[고원준]], [[김성현 (1989년)|김성현]], [[김성태 (1982년)|김성태]], [[금민철]] 등 뛰어난 새 투수들을 키워 내 "투수 조련의 달인"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 때 갓 제대하고 마무리로 전향한 [[손승락]]이 [[이용찬 (야구 선수)|이용찬]]을 제치고 세이브왕을 차지하였다. 한편, 경북 포항 운영 면에 대해서 일부 팬들에게 "작전 능력이 미숙하다", "선수 교체 타이밍이 좋지 못하다" 등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 마재윤 . . . . 126회 일치
         {{프로게이머 정보
         '''마재윤'''([[1987년]] [[11월 23일]] ~ ) 은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로, 전 [[CJ 엔투스]] 소속의 [[저그]] 유저였다. 초창기 'ipxzerg'이라는 아이디를 쓰다가 'sAviOr'이란 아이디로 바꾸었다. 프로게이머로 활동하던 전성기 시절 별명은 '마본좌', '마신', '마에스트로'였다.
         2007년 3월 3일 [[김택용]]과의 MSL 결승전에서 0:3으로 완패한 이후 극심한 슬럼프 끝에 2008년 6월 2군으로 강등당했다가 다시 1군으로 복귀되기까지 했다. 2009년 이후 위너스리그 등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개인리그에서도 조금씩 과거 전성기 시절의 모습을 찾아가는 듯하였으나, 2009년말 다시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2010년에는 프로리그의 로스터에서 말소되었다. 이 가운데 불거진 승부조작 의혹을 받았는데, 5월에는 승부조작 혐의에 연루되었음이 검찰수사를 통해 발표되었고, 결국 CJ 엔투스에서 방출되었다.
         2010년 6월에 공판이 진행 되었고, [[KeSPA]]로부터 영구제명되었으며,<ref name="제명">{{뉴스 인용|url=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006070267|제목=승부조작 전·현직 프로게이머 11명, 전원 영구제명|날짜=2010-06-07|저자=교용준 기자|출판사=오센}}</ref> 2010년 10월 22일 최종적으로 징역 1년, 집행 유예 2년, 사회 봉사 120시간이 선고되었다.<ref name="징역">{{뉴스 인용|url=http://www.fomos.kr/board/board.php?mode=read&keyno=110028&db=issue&cate=&page=1&field=&kwrd=|제목= 속보 - 원모씨 징역 2년-추징금 300만, 마모씨 징역 1년 6개월 구형|날짜=2010-08-20|저자=심현 기자|출판사=포모스}}</ref> 현재는 [[아프리카TV]] BJ로 활동하고있다.
         2003년 12월 GO(현 [[CJ 엔투스]])팀에 입단하여 프로게이머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듬해 5월 [[Spris MSL 2004]]에 첫 데뷔이후 처음으로 진출하면서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당시 저그는 2해처리 빌드로 테란,프로토스와 경쟁을 했었다. 당시 공격형 저그 [[박성준]] 과 운영형 저그 [[박태민]] 두 부류가 있었다.
         Spris MSL 2004에 진출한 때와 비슷한 시기인 2004년 7월 13일, 마재윤은 [[KTF 매직엔스]]와의 [[팀리그]] 승자전 4강 경기에 선봉으로 출전한다. 당시 KTF 매직엔스는 주요 대회 우승, 준우승자 출신인 [[홍진호]], [[강민 (프로게이머)|강민]], [[박정석]], [[변길섭]], [[조용호]] 등이 포진한 최고의 팀이었으며, 이미 2004년 2월 팀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강팀이었다.
         마재윤은 이 첫 데뷔전에서 당대 최고의 선수들인 홍진호, [[김정민 (프로게이머)|김정민]], 변길섭, 조용호를 모두 꺾는 '올킬'을 기록하며 화제를 낳았다.<ref>([http://www.fomos.kr/board/board.php?mode=read&keyno=86509&db=issue Memories of 팀리그 5. 명승부 시리즈 - 어린 마재윤, KTF 올킬 사건] [[포모스]], 2008년 6월 27일)</ref>
         마재윤은 [[MSL]] 에서 크게 활약을 하였는데 [[강민 (프로게이머)|강민]],[[박정석]] 을 서바이버토너먼트에서 무찌르며 MSL에 진출하였고
         마재윤은 CYON MSL 결승전에서 [[조용호 (프로게이머)|조용호]] 에게 1:3으로 패배해 개인리그 첫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이후 프링글스 MSL Season 1 에서 [[강민 (프로게이머)|강민]] 을 꺾고 두번째 우승을 달성했고 또한 WEF 2006 스타크래프트 결승전에서 [[이윤열]]에게 승리해 우승했다. WEF 스타크래프트 부문 2연속 우승이었다. 이어서 프링글스 MSL Season 2 에서 [[심소명]]을 3:1로 이기며 MSL 3회 우승과 함께 금배지를 획득했다.
         프로토스전 21승 3패 승률 87.5% (프로토스전 9연승중)
         신한은행 스타리그 2006 Season 3의 우승 일주일 후인 2007년 3월 3일 마재윤은 5회 연속 진출한 MSL 결승에서 당시는 신예였던 김택용(당시 [[MBC게임 히어로]], 현 [[SK 텔레콤 T1]])과 맞붙게 된다. 마재윤의 2006 시즌 프로토스전 성적은 21승 3패, 승률 87.5%에 달했던 것은 물론, 대부분의 전문가와 시청자들은 마재윤의 압도적인 승리를 예상하였다<ref>[http://osen.freechal.com/news/view.asp?Code=G0703030023 [[OSEN]], 2007년 3월 3일]</ref><ref>[http://www.pgr21.com/zboard4/zboard.php?id=humor&no=46911 이러한 평가에 대한 팬들의 반응의 예]</ref>.
         그 후에도 블리즈컨 2007에서 강민을 2:0으로 꺾고 우승하는 등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WWI2007, IEF2007 결승에서 김택용에게 각각 1:2, 0:2로 패하면서 천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WCG 2007에서는 한국대표선발전 3위로 본선에 진출하였으나 중국의 샤쥔춘에게 1:2로 역전패당했으며, 2007년 말부터는 천적 이성은의 등장으로 마재윤의 부진은 더욱 심화되었다.
         마재윤의 기량 난조는 2008년 상반기까지 이어졌다. 양대 리그 조기 탈락에 이어 오프라인 예선까지 추락하는 것은 물론, 프로리그 08시즌에서도 부진에 부진을 거듭하면서 가끔씩 팀플에서만 활약하는데 그쳤다. 결국 2008년 6월, CJ 엔투스는 특단의 조치로 마재윤에게 2군 강등을 통보했다.<ref>[http://gmnews.afreeca.com:8109/app/index.php?board=news_esports&b_no=26292&c_no=5&control=view [[파이터포럼]], 2007년 7월 7일]</ref> 이후 3주간 2군 숙소에서 훈련을 소화한 마재윤은 그 성과와 태도가 인정되어 2008년 7월 21일부로 1군에 전격 복귀하였다.<ref>[http://gmnews.afreeca.com:8109/app/index.php?board=news_esports&b_no=26545&c_no=5&control=view [[파이터포럼]], 2007년 7월 21일]</ref>
         [[신한은행 프로리그 08-09]]시즌에서 선전하였으며, 로스트사가 MSL 2009에서도 택마록에서 완승을 거두고 8강까지 진출하였다. 이로써 부진을 조금 덜었고, 동시에 차기 MSL 시드를 확보함으로써 MSL 12연속 진출까지 달성했다.
         === 2008년 하반기 ~ 2009년 상반기까지의 재기 ===
         마재윤의 재기는 2008년 하반기에 시작된다. 2008년 블리즈컨 2연패를 달성함으로써, 부활의 전조를 알렸고, 프로리그에서도 3연승를 거두면서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천적 이성은에게 완패를 당하고 난 뒤, 계속 아쉬운 플레이를 보여주면서 6승 6패의 성적을 냈다.
         그러나 위너스리그가 시작되면서 마재윤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재윤은 스파키즈전 1:1 상태에서 차봉으로 나와 [[문성진]], [[신상문]], [[박명수 (프로게이머)|박명수]]를 연달아 물리치고 3킬을 기록하였고, 이스트로전에서는 1:2 상황에서 중견으로 출전해 [[박상우]], [[신상호]], [[신대근]]을 잡아내며 또다시 3킬을 기록, 마삼킬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 2009년 하반기 ~ 2010년 4월 ===
         [[신한은행 위너스리그 09-10|신한은행 위너스리그 08-09]]에서 마재윤은 2번 연속 3킬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어 마삼킬이란 별명과 함께 팬들에게 기대를 안겨주었고 로스트사가 MSL 2009 16강에서도 신희승에게 압승을 거두며 부활의 모습을 보였다. 또한 2009년 7월에는 e스타즈 스타크래프트 헤리티지 대회에서 이윤열을 2:1로 꺾고 우승까지 하였으나 위너스리그 종료 이후 점차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스타리그 예선을 계속 뚫지 못하며 본선 진출에 실패했으며, 저그전에서는 기량 난조를 보였다. 그러나 10월 29일 서바이버 토너먼트를 뛰어난 경기력으로 전승 통과하며 13시즌 연속 MSL진출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이어지는 [[NATE MSL 2009]]에서 32강 2패로 초반 탈락하며 오프라인 예선으로 떨어졌다. 그 이후 양대리그 예선에서 모두 탈락하였고, 프로리그에서도 출전할 때마다 어이없는 졸전을 펼치며 전부 다 연패하는 등 데뷔 이후 최악의 부진을 겪었다. 그리고 2010년 3월에는 로스터에서 말소 되는 등 최악의 분위기가 계속 이어졌다.
  • 김재박 . . . . 105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2, top1=야구 관련 인물(KBO), top2=대구광역시/인물)]
         || '''학력''' || 대구초-경북중[* 현 경운중]-[[대광고등학교 야구부|대광고]]-[[영남대학교|영남대]] ||
         || '''소속팀'''[* 실업야구 시절 포함.] || [[한국화장품 야구단|한국화장품]] (1977~1981) [br] '''[[MBC 청룡]]-[[LG 트윈스]] (1982~1991)''' [br] [[태평양 돌핀스]] (1992) ||
         || '''지도자''' || [[태평양 돌핀스]] 수석코치 (1993~1995) [br] '''[[현대 유니콘스]] 감독 (1996~2006)''' [br]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4, 2006) [br]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타격코치 (2006) [br] [[LG 트윈스]] 감독 (2007~2009) ||
         '''[[MBC 청룡]]-[[LG 트윈스]]의 원조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김재박]] - [[이종범]] - [[박진만]] - [[강정호]]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야구 간판 유격수 계보의 원조'''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 및 前 감독이자 前 [[KBO]]의 경기감독관. 2015년부터 새로운 독립야구단 [[연천 미라클]]의 코치도 겸임하고 있다.
         두 번에 걸쳐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2003년 제22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겸 [[2004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예선 대표팀 감독.
         2006년 제15회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야구대표팀 감독.
         하지만 결과는 좋지 못하였다. 2003년에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 이어 [[대만 야구 국가대표팀|대만]]에게도 패함으로써 '[[삿포로 참사(야구)|삿포로 참사]]'를 겪었고[* 덕분에 아테네올림픽은 본선에 나가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이듬해에 야구계를 뒤흔든 큰 사건이 터졌다.], 06년에도 대만에 이어서 주로 사회인리그 출신[* 프로에 준하는 선수들이었다고 쉴드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선수단 22명 중 프로에 진출한 선수는 8명이고, 프로에서 제몫을 한건 초노 히사요시 한 명 뿐이다. 1명 빼고 전원 프로였던 한국이 10점 주고 박살날 상대는 절대 아니었다.]으로 구성된 일본팀에게도 패함으로서 '[[도하 참사]]'이란 말을 들었다.
         쌓이고 쌓여서 2015년 6월 5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릴 경기를 비가 그쳤음에도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l&ctg=news&mod=read&office_id=241&article_id=0002414294&date=20150605&page=1|우천 취소를 때려버려]] 팬들의 원성을 샀고 급기야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kbotown2&mbsIdx=1284855&cpage=&mbsW=search&select=sct&opt=1&keyword=%C0%E7%B9%DA|SBS 스포츠]]에서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kbotown2&mbsIdx=1298498&cpage=&mbsW=&select=&opt=&keyword=|우천취소 메뉴얼]]까지 제안해가며 김재박을 깠다. 2015시즌 후반부 월요일 경기 및 더블헤더 임시 도입에 이 사람의 우천취소 남발이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도 있다.
         2016년 4월 4일, KBO사무국이 김재박 감독관에게 6경기 출장 정지를 내렸지만, 야구팬들은 솜방망이 처벌~~도 아니고 일주일 휴가~~이라는 평이 대다수이다. 이전에 [[최동원]] 감독관이 비슷한 사유로 똑같은 징계를 받은 만큼, 이번에는 최소 20~30경기 출장 정지는 받았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대구광역시]] 토박이이지만 딱 한 번 대구를 떠난 적이 있었다. 경운중학교를 졸업할 당시 [[경북고등학교]]를 중심으로 대구 지역의 고등학교들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신체가 작았던 김재박은 [[경북고등학교]] 입학에 실패하자 서울에 있는 [[대광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서울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하게 된다. 현재 [[대광고등학교]] 자체는 건재하지만 야구부는 폐지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LG감독 첫 해인 2007년 4월 22일 삼성전 2-3으로 뒤진 연장 12회말 2사 1루에서 [[이대형]]의 2루땅볼이 1루심의 오심으로 아웃 판정을 받자 엄청나게 분노해서 어필한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이후 며칠 내내 그 상황을 가지고 불만을 표출하다가 심지어는 '''"설사 볼과 주자가 동시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때로는 관중의 재미를 위해 세이프를 선언할 필요도 있지 않냐"'''[* 사실 한미일 통틀어 볼과 주자가 동시에 들어오면 [[http://news.donga.com/Sports/3/05/20150707/72336135/1|규정상 세이프]]다. 김재박 외에도 이 규정을 모르는 관계자 및 팬이 많은 편.]는 발언으로 빈축을 사기도 했다. ~~LG가 이기고 있고 삼성이 오심으로 져도 관중의 재미를 위해 세이프를 선언할 필요가 있다는 소리가 나올지 궁금하다 이 양반아.~~ 심판 판정은 모든 팀에게 공정해야 적용되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팀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오심도 불사하라는, 야구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망언이다.
          * [[추신수]]에 대한 검증 드립 또한 야구팬들에게 조롱의 대상. 도하아시안게임 최종엔트리에서 결국 추신수를 빼버리면서 '''"추신수는 검증이 되지 않았다"''' 는 드립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추신수가 아무리 본인이 원하는 스타일의 선수가 아니었다고 해도 타국에서 성공을 위해 몸부림치는 후배에게 덕담이나 위로는 커녕(당시 추신수는 군면제를 위해 국제대회 출전이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저런 말로 후배 기나 꺾는다며 대차게 까였다. 그 이후 추신수가 슬럼프에 빠지자 '''"거 봐, 아직 검증이 안 됐다고 했잖아."''' 라며 '''"추신수를 왜 안뽑았냐 하는 말은 야구를 잘 몰라서 하는 얘기."''' 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그야말로 욕을 사서 먹는게 뭔지를 온 몸으로 보여줬다. 거기에 마지막에 '추신수 출신 고교 사람들이나 그 지역 사람들이 유독 유난을 떠는 것 같다' 라고 하며 지역감정 탓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본인 말대로 검증된 선수들을 뽑아 치른 아시안게임은 대만전 뿐 아니라 아마추어로 구성된 일본전까지 패배를 당하며 [[도하 참사]]를 야기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반박도 존재한다. [[김인식]]감독도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44&article_id=0000025078|“기술적으로 국내 프로야구 정상급 타자보다 나을 게 없다”]]고 평가하며 대표팀 발탁에 반대한 만큼 [[추신수]]의 대표팀 탈락은 김재박의 독단적 판단이 아니었으며, 당시 대표팀에 최종선발된 외야수는 [[이병규]], [[이용규]], [[이진영]], [[이택근]], [[박재홍(야구)|박재홍]] 총 5명으로 [[김인식]]감독의 말대로 모두 국내 프로야구 정상급 외야수들로서, [[추신수]] 대신 이들이 대표팀에 선발된것이 대표팀의 전력을 약화시켜 승패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는 어렵다는것이다. 하지만 이는 타당하지 못한 반박으로서, 당시 추신수는 AAA에서 OPS .893 메이저리그에서 OPS .812를 기록했는데 이는 한국으로 온 어떤 용병타자보다 좋은 기록이었으며, 리그의 수준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OPS만 비교한다 해도 이택근을 제외한 다른 국가대표 외야수들보다 OPS가 더 높았다. 명백히 급이 다른 선수를 검증이 되지 않았다며 뽑지 않은것이 맞다.
          * 2009년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야구장]] 펜스거리 단축을 제안하고 구단 [[프런트]]가 이 요청을 들어주어 LG가 홈경기를 할 시에는 구장의 크기를 줄이는 [[X-존]]이 만들어졌다. 팬들 사이에서의 이름은 '''[[재박존]]''' 혹은 재박산성... 재빡존이라고도 언급한다. 근데 줄여도 웬만한 구장 사이즈 이상일 정도로 잠실이 넓긴 하다.
          말이 많긴 했지만 [[홈런]]도 그럭저럭 나오고 일부 팬들은 만족한 모양이긴 한데, 여튼 2009년 시즌 결과를 놓고 보자면 재박산성이 설치된 경기에서의 LG 트윈스의 각종 공격 수치가 2배 가량 상승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상대팀들의 공격력은 3배 정도 상승했다는 게 문제...''' 원정팀에 유리한 홈 어드밴티지였다는 비참한 결과를 낳은 희대의 쓰레기 전략으로 남고 말았다. 뭐, 거기엔 상대적으로 빈약한 LG투수진이 한 몫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만.
          * 역대 [[LG 트윈스]]의 감독 중에서도 매우 나쁜 성적~~[[666858766|587]]~~을 거뒀지만 나름대로 [[프랜차이즈]] 스타라서 그런지 경질론과 재계약론이 비등비등했던 뭔가 희한한 감독이다. ~~사실 재임 기간 동안 승률은 이순철보다 낮다. 하지만 그것도 모두 이순철이 말아먹어서 그렇다고 이유를 대면 된다. 지금까지도.~~ 결국 2009년 9월 26일을 끝으로 3년 계약이 만료되어 감독직을 떠났다. 그런데 그 전에 했던 인터뷰 내용이 알려지면서 '''엘지 팬...아니, 대한민국 야구 팬들한테 아주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까이고 또 까이고 있다.'''
          그 내용이 걸작인데, 정리하자면 '''난 잘했는데 [[프런트]]가 못했고, 선수들이 잘 안따라줬고, 구단이 안밀어줘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게 아쉽다. 하지만 어쩌겠나. 모든 책임은 내가 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issue&mod=read&issue_id=438&issue_item_id=8531&office_id=295&article_id=0000000306|이런 인터뷰]]. LG팬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팬들은 김재박이 앞으로 프로구단 감독을 맡기는 힘들다고 단언할 정도로 치를 떨었다. 이 와중에 묻힌 사실 중 하나는 [[이광은]] 전 감독 때부터 이어지던 LG 감독 임기 중 하차를 끝낸 인물이라는 것.
  • 박근혜 . . . . 101회 일치
         2017년 3월 10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헌법재판소]]에서 만장일치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탄핵 소추안을 인용]]하면서 박근혜는 대통령직에서 파면,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ref>{{웹 인용|url=https://www.ccourt.go.kr/cckhome/kor/event/adjuList.do|제목=선고목록 및 결정문 - 헌법재판소|확인날짜=2018-12-13}}</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oid=056&aid=0010429073|제목=[영상]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언어=한국어|확인날짜=2017-03-10}}</ref> 탄핵 후에는 곧바로 3월 21일 검찰에 소환되어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 중 [[전두환]], [[노태우]], [[노무현]]에 이어 네 번째로 검찰 수사를 받았고,<ref>{{뉴스 인용 |title=[박근혜 검찰 출석] 최순실 ‘곰탕’·이재용 ‘자장면’…박근혜는? 미리 준비한 ‘도시락’ |url=http://news.donga.com/3/all/20170321/83428508/2 |work=동아일보 |date=2017-03-21 |accessdate=2017-05-18}}</ref> 3월 31일에는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면서 전두환, 노태우에 이어 세 번째로 구속된 전직 대통령이 되었다.<ref>{{뉴스 인용 |title='최순실 국정농단 공범' 박근혜 구속…"혐의소명·증거인멸"(종합) |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3/30/0200000000AKR20170330171251004.HTML |work=연합뉴스 |date=2017-03-31}}</ref> 구속된 상태에서 수사와 재판을 진행하던 중에 2017년 10월 16일 6개월인 1심 구속기간이 만료되었으나 검사가 앞선 구속영장에 적시하지 않은 뇌물 공소사실에 대하여 다시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구속기간이 최대 6개월 연장되었다. 이에 대하여 박 전 대통령 측은 반발하였고 모든 변호인단이 사임하였다.<ref>[http://biz.heraldcorp.com/culture/view.php?ud=201710171022138598395_1
         재판 보이콧’ 박근혜 “나라 바로 세우는 게 중요” 판흔들기?]</ref> 한편 2017년 11월 3일 [[자유한국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제명했으며 역대 대통령 중 최초로 강제출당된 대통령이 되었다.<ref>{{뉴스 인용|저자1=안정원|제목=한국당, '1호 당원' 박근혜 출당조치…'20년 관계' 청산|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0&sid2=269&oid=001&aid=0009659037|날짜=2017-11-03|확인날짜=2017-11-03|뉴스=[[연합뉴스]]}}</ref>
         박정희는 소령이던 1949년, [[여순 사건]]에 따른 숙군 여파로 육군 [[특무대]](현재의 [[국군기무사령부]])의 가혹한 고문끝에 [[남조선로동당]] 가입 혐의로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파면되어 육군 정보국에서 직제에도 없는 문관으로 근무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의 발발로 인해 가까스로 복직하고 대구사범학교 후배이자 부하 장교인 송재천(육영수의 이재종오빠)의 소개로 만난 육영수와의 재혼에 따른 안정기를 구가하던 시절이 박근혜가 태어난 무렵이다. 한국 전쟁이 휴전에 들어가자 군인인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전라남도 광주시, 서울특별시에 거주하며 유년기를 보냈다.
         [[프랑스]] 유학 중이던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 행사에서 어머니 육영수가 재일 한국인 [[문세광]]의 [[육영수 저격 사건|저격으로 살해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였다. 육영수 사후 아버지 박정희는 재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대통령 배우자]] 역할을 대행하여야 하였다. [[1975년]]부터 박정희가 추진한 [[새마을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때 [[최태민]]이 그의 새마을 사업에 참여한 것이 후일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때 [[전두환]]에게서 아버지 박정희가 남긴 통치 자금 6억 원을 수령하였는데 이 사실은 박근혜의 정계 입문 이후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1980년]] [[한국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냈고, [[1982년]] [[육영재단]] 이사장, [[1994년]]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80년]] 구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인사들과 [[유신정우회]] 인사들이 [[한국국민당 (1981년)|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고, [[1987년]]에는 [[김종필]]을 중심으로 [[신민주공화당]]이 출범하였으나 박근혜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후 [[2000년]] 한나라당의 부총재로 선출되었지만 [[2002년]] 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회창]]을 비판하며 한나라당에서 탈당하였다. 이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ref>[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158351&ctg=10 한국미래연합 창당…대표 박근혜의원 - 2002-05-17 중앙일보]</ref> 하였으나 대선 전에 복귀하였다. [[2002년]] [[5월 1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 [[5월 1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회담을 하고<ref name="visit_NK">{{웹 인용 |url=http://www.voanews.com/Korean/archive/2002-05/a-2002-05-14-12-1.cfm |제목=박근혜 의원, 북한방문 마치고 서울로 귀환 - 2002-05-14<!-- 봇이 붙인 제목 --> |확인날짜=2009-02-10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60722010557/http://www.voanews.com/Korean/archive/2002-05/a-2002-05-14-12-1.cfm |보존날짜=2006-07-22 |깨진링크=예 }}</ref> [[5월 14일]] 서울특별시로 돌아왔다.<ref name="visit_NK"/>
         박근혜는 [[2009년]] 이명박 정부가 세종시 수정 의견을 내자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새누리당|한나라당]]의 친이계와 친박계의 계파 갈등이 더 확산되었다. 2009년 여론조사 결과 텃밭인 영남 지역, 중장년층, 보수층의 박근혜 지지 비중이 1 ~ 2% 낮아지고 진보층, 충청 지역, 기타 연령대의 지지 비중은 1 ~ 2% 높아진 걸 볼 수 있는데 이 까닭은 여권 주류가 마음먹고 세종시를 지원해 경상북도의 혁신도시가 기업을 유치하지 못하게 된다는 불안감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시]] 논란 이후, 지지율이 다시 회복되었다.<ref>{{웹 인용 |url=http://economy.hankooki.com/lpage/politics/200911/e2009111317515896380.htm |제목=親朴 일부의원들 박근혜에 반기? |확인날짜=2009-12-07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0928164146/http://economy.hankooki.com/lpage/politics/200911/e2009111317515896380.htm |보존날짜=2013-09-28 |깨진링크=예 }}</ref>
         박근혜는 [[2009년]] [[10월 31일]]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에서 기자들과 만나 "세종시는 국회가 국민과 충청도민에게 한 약속"이라며 "세종시 문제를 개인적인 정치 신념으로 폄하해선 안 된다"고 말하였다. [[정운찬]] 총리의 면담 제안에 대해서도 "국민과의 약속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 모르고 하는 말"이라며 "설득하고 동의를 구한다면 국민과 충청도민에게 해야지 내게 할 일이 아니다"라고 일축하였다. "[[행정복합도시]]라는 말 속에 문화시설과 교육, 과학 등을 다 포함한 자족기능이 들어가 있는 것"이라며 "약속을 지키고 부족하면 플러스 알파로 더 잘되게 해야지 약속을 어기면 안 된다"고 지적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공식 세종시 수정 발언에도 불구하고 [[11월 27일]] "할 말을 이미 다 했고, 입장(원안+알파(α))에 변함이 없다"며 기존 입장을 고수하였다.<ref>[http://www.daejonilbo.com/news/newsitem.asp?pk_no=854434 박근혜 "세종시 원안+α 변함없다"]</ref>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에서 2009년 12월 29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혼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결혼 이민자, 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거나, 우수 외국 인재로서 특별귀화한 자, 국적 회복 허가를 받은 자로서 특별한 공로가 있거나, 우수 외국 인재로 인정되는 자, 해외 입양 되었다가 우리 국적을 회복한 자, 그리고 외국에 장기 거주하다가 국내에 영주 귀국하여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한 65세 이상의 자들을 대상으로 [[복수 국적]]을 제한적으로 허용하기 위하여 발의한 국적법 일부개정법률안(의안번호 1807200)의 수정가결에 찬성하였다.<ref>[http://likms.assembly.go.kr/kms_data/record/data2/289/pdf/289za0008b.PDF "제 289회국회-제8차 (임시회) 국회본회의회의록"]</ref>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에서 2009년 2월 5일에 대한민국 헌법 제24조에도 불구하고 해외에 거주하는 약 240만명 대한민국 국민의 금지되었던 [[재외국민]] 참정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발의된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 (의안번호 1803725), 주민투표법 일부개정법률안 (의안번호1803724), 그리고 국민투표법 일부개정법률안(의안번호 1800737)에 모두 찬성하였다.<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2050342 재외국민 투표 허용 법안 국회 통과 ] <<[[동아일보]]>> 2009-05-25 작성</ref><ref>[http://likms.assembly.go.kr/kms_data/record/data2/281/pdf/281za0004b.PDF "제 281회국회-제4차 (임시회) 국회본회의회의록"]</ref>
         국회의원 재직 중 대선 경선을 맞이하게 된 박근혜는 대선 경선 캠프 선대위원장으로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 2항 '경제 민주화'의 입안자인 전 [[민주정의당]] 헌법개정위원 [[김종인]]을 임명하는 등 [[사회양극화]] 문제 해소에 적극적 의지를 보였다.<ref>[http://media.daum.net/politics/assembly/newsview?newsid=20120628031405843] 김봉기 기자, '경제 민주화' 원조 김종인… 내달 출범 박근혜 캠프 맡는다, 조선일보, 2012.6.28.</ref> 박근혜는 재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보다는 경제력 남용을 바로잡는 데 방점을 뒀다. 재벌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긍정적 역할은 인정하자는 쪽이었다.<ref>[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20820160408085] 이제훈, 재벌이 싫어하는 헌법 조항, 한겨레21,2012.8.20.</ref> [[사회양극화]] 해소가 목적인 경제민주화를 위해서는 세수확보가 중요한데 박근혜 의원은 2012년 7월 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법인세는 가능한 한 낮춰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을 야기했다. 우리나라 법인세 최고세율은 2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25.6%(지방세 포함)보다 낮은 편이다. 일본과 미국의 법인세 최고세율은 각각 39.5%, 39.2%에 이른다.<ref name="hani.co.kr">[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542826.html] 류이근, 성연철 기자, 박근혜 "법인세 인하"…친박서도 "경제민주화와 모순", 한겨레신문, 2012.7.17.</ref> 현재 법인세는 내국세 총액 가운데 부가가치세(33.0%) 다음으로 높은 비중(28.6%)을 차지한다.<ref name="hani.co.kr"/> 강병구 인하대 교수(경제학)는 “법인세를 낮추겠다면 소득세나 부가가치세 등에서 ‘박근혜식 복지’에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것인지 대안을 내놔야 하는데 그게 안 보인다”고 지적했다.<ref name="hani.co.kr"/> '법인세 인하와 경제민주화 간의 모순성' 및 '법인세 감소분에 따른 대체 세수 확보' 등의 논란은 대통령 선거일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였다.
         2013년 3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북불가침합의를 폐기하겠다고 발표하였다.<ref name="ReferenceB">{{웹 인용|url = 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3245396_5780.html|제목 = 北 "남북 불가침 합의 폐기"‥'전면전 준비' 언급|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2013-03-08|확인날짜 = 2013-04-03|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30311025446/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3245396_5780.html#|보존날짜 = 2013-03-11|깨진링크 = 예}}</ref> 북한은 또한 각종 미사일이 핵탄두를 장착한 채 대기상태에 있다고 위협했으며, 1991년 남북 불가침 합의 폐기와 판문점 남북 직통전화 단절을 선언하는 등 대한민국에 대하여 공개적인 적대행위의 의사를 밝히며 위협하였다.<ref name="ReferenceB"/> 이에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우리 한국을 공격한다면 인류의 의지,대한민국은 당연하고 인류의 의지로 김정은 정권은 지구상에서 소멸될 겁니다."라고 주장하였다.<ref name="ReferenceB"/> 국방부 또한 북한군이 대규모 훈련을 위해 집결한 상태라며, 만약에 공격할 경우 대응 규모와는 상관 없이 응징하겠다고 강조했다.<ref name="ReferenceB"/>
         박근혜는 2013년 4월 24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침략을 부인하는 등 우경화 노선을 취하려 하자, "역사 인식이 바르게 가는 것이 전제되지 않고 과거 상처가 덧나게 되면 미래지향적 관계로 가기 어렵다"고 말했다.<ref name="news.hankooki.com">{{웹 인용|url = 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1304/h2013042503401121000.htm|제목 = 박근혜 대통령 "일본 바른 역사인식 없이 미래지향 관계 어렵다"|저자 = 이동훈|날짜 = 2013-04-25|확인날짜 = 2013-04-27|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30425095012/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1304/h2013042503401121000.htm|보존날짜 = 2013-04-25|깨진링크 = 예}}</ref> 이후 한국일보를 비롯한 중앙 언론사 편집국장 및 보도국장단과의 오찬간담회에서 "일본이 우경화로 가면 동북아와 아시아 여러 국가들 간 관계가 어려워질 것이고, 일본에도 바람직한 방향이 아닌 만큼 깊이 신중하게 생각해 주기 바란다"고 말했으며, "우리 세대의 아픔과 걸림돌이 후세에 이어지지 않도록 정리하고 끊어야 한다"며 "정부는 항상 일관되게 원칙을 가지고 한일관계를 풀어나가겠다"고 덧붙였다.<ref name="news.hankooki.com"/> 이어 "미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기후변화와 테러방지, 원전 문제 등과 같은 비정치적 분야부터 신뢰를 구축하고 이를 토대로 다자간에 더 큰 신뢰를 구축하는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즉 '서울 프로세스'를 내달 미국 방문 때 논의할 계획"이라고 말했으며, "북한도 얼마든지 이에 참여할 수 있으며, 참여하지 않더라도 신뢰 쌓기 노력을 해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ref name="news.hankooki.com"/>
         2013년 4월 24일, 중국 외교부장이 윤병세 대한민국 외교부 장관을 만났으며, "관련국들이 적극적인 조치를 내놓아 문제를 대화와 협상의 궤도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ref name="news.sbs.co.kr">{{웹 인용 |url =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1754349|제목 = 중국 외교부장, 대화 통한 한반도 문제 해결 강조|저자 = SBS뉴스|날짜 = 2013-04-25|확인날짜 = 2013-04-27}}</ref> 이어 중국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공정하고 책임있는 역할을 해나갈 것이라며,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안정,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의 원칙을 견지할 것이라고 밝혔다.<ref name="news.sbs.co.kr"/> 나아가 중국은 박근혜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대한 지지 입장을 밝혔고, 대한민국이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노력을 기울이길 바란다고 밝혔다.<ref name="news.sbs.co.kr"/>
         박근혜는 취임사에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공식 언급<ref>[http://www.kyeonggi.com/news/articleView.html?idxno=652966 [박근혜 정부 출범_취임사로 본 국정운영] 경제부흥ㆍ국민행복ㆍ문화융성…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가동]</ref>한 이래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남북간 신뢰를 형성함으로써 남북 관계를 발전시키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며, 나아가 통일의 기반을 구축하려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ref>[http://www.korea.kr/celebrity/contributePolicyView.do?newsId=148757873 한반도 평화정착과 통일기반 구축]</ref> 가 대표적인 통일 정책으로 추진되었다.
         또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 대한 구체적인 실현방안으로 2014년 3월 28일 독일 통일의 상징 도시인 드레스덴에서 인도적 문제해결, 남북한 공동 인프라 구축, 남북 동질성 회복 등 평화통일 기반 구축을 위한 3대 제안을 북한에 제시하는 '[[드레스덴 선언]]'을 천명하였다.<ref>[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4032888471 朴대통령 '드레스덴 선언'이산상봉 정례화 등 인도적 문제부터 해결…核 버리면 經協 확대]</ref> 이어 제69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박 대통령은 "통일 준비는 시대적 소명"이라면서 북한에 대해 하천·산림 관리 공동 협력 사업, 이산가족 상봉, 남북한 광복 70주년 공동기념 문화사업 준비 등 남북이 실천 가능한 사업부터 행동으로 옮기자는 작은 통일론을 제안하였다.<ref>[http://www.fnnews.com/news/201408151515276744 박 대통령 8.15 경축사 행간에 담긴 의미]</ref> 2015년에 들어와서는 박 대통령이 신년사를 통해 광복·분단 70주년을 맞는 2015년에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통일 기반을 구축하겠다고 언급하였다.<ref>{{웹 인용 |url=http://economy.hankooki.com/lpage/politics/201412/e2014123117402393130.htm |제목=[박근혜 대통령 신년사로 본 새해 구상] 경제회복 최우선… 남북관계 개선 통해 통일기반 구축 |확인날짜=2015-02-14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50214093238/http://economy.hankooki.com/lpage/politics/201412/e2014123117402393130.htm |보존날짜=2015-02-14 |깨진링크=예 }}</ref>
         이와 관련하여 북한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대결 정책이며<ref>[http://www.ajunews.com/view/20140503193440291 북한 노동신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비난']</ref>하였고 드레스덴 선언에 대해서도 이산가족 상봉이나 지원에 따른 인도주의적 문제 해결이 북남관계 개선의 선차적인 고리가 아니라 정치군사적 대결상태 해소가 최우선이라며 맹비난하였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0029 북한 국방위 "박근혜 '드레스덴 연설' 공식 비난"]</ref> 또한 8.15경축사에서 제안한 대화 및 협력에 대해서도 금강산 관광객 총살이나 천안함 및 연평도 도발에 대한 사죄없이 5.24 조치 해제 등 대북정책 기조전환을 압박했다.<ref>[http://www.nocutnews.co.kr/news/4074931 北, 朴 8.15 경축사 비난…5.24 조치 해제 촉구]</ref>
         2015년이 되자 김정은은 탈상 3년을 계기로 고위급 접촉 재개는 물론 남북 정상회담도 못 할 이유가 없다고 신년사를 밝힌 데 이어<ref>[http://imnews.imbc.com/replay/2015/nwtoday/article/3591606_14782.html 김정은, 남북 정상회담 언급…南 "진전된 자세" 화답]</ref> 1.20 북한 정부·정당·단체 연합회의에서 채택한 남북 대화 촉구 호소문을 청와대, 대한적십자사 등에 보내면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대북전단 살포 중단 및 한미훈련 중단 등 한국 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걸었다<ref>[http://news1.kr/articles/?2057625 北 남북대화 촉구 호소문 청와대 등에 전달]</ref>
         그러나 박근혜는 첫판부터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북한과의 관계가 그것이었다. 북한은 첫판부터 남북불가침합의를 폐기하겠다고 발표했다.<ref name="ReferenceB"/> 북한은 또한 각종 미사일이 핵탄두를 장착한 채 대기상태에 있다고 위협했으며, 1991년 남북 불가침 합의 폐기와 판문점 남북 직통전화 단절을 선언했다.<ref name="ReferenceB"/> 이에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우리 한국을 공격한다면 인류의 의지,대한민국은 당연하고 인류의 의지로 김정은 정권은 지구상에서 소멸될 겁니다."라고 주장하였다.<ref name="ReferenceB"/> 국방부 또한 북한군이 대규모 훈련을 위해 집결한 상태라며, 만약에 공격할 경우 대응 규모와는 상관 없이 응징하겠다고 강조했다.<ref name="ReferenceB"/>
  • 박석민 . . . . 99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4, top1=NC 다이노스/선수단, top2=야구 관련 인물(KBO), top3=먹튀/야구, top4=돈 내놔라 먹튀야)]
         || '''학력''' || 대구율하초 - 경복중 - [[대구고등학교 야구부|대구고]] - ([[대구사이버대학교]]) ||
         || '''프로입단''' || [[한국프로야구/2004년/신인드래프트|2004년 신인드래프트 1차 지명]] ([[삼성 라이온즈|삼성]]) ||
         || '''군 복무''' || [[상무 피닉스 야구단]] (2006~2007) ||
         || '''응원가''' || '''삼성 시절''': 하늘 - 웃기네[* 나! 나! 나나나나! 나나나나나 '''박석민 [[짱]]!'''. 전주부분을 개사한 것이다.][* [[로티플스카이|하늘]]이 사망한 이후부터 쓰이지 않고 있다...가 [[2014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부터 본인의 요청으로 부활했다.][* 롯데 [[김상호(1989)|김상호]]와 곡이 같다만 사용한 부분이 다르다. 김상호 항목 보고 가수와 곡 제목이 다른데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웃기네가 Venus를 번안한 곡이며 Bananarama 곡 역시 중간에 박석민 응원가에 해당하는 멜로디가 있다.] [br] 타카피 - 케세라세라[* 날려버려 날려버려 삼성 박석민~ '''(어이!)''' 날려라 날려 삼성 박석민~ '''(어이!)''' 날려버려 날려버려 삼성 박석민~ '''(어이!)''' 날려라 삼성 박석민~ 워어~어어어~ 날려~라 박석민~ 워어~ 어어어~ 날려라 삼성 박석민~ 2014 시즌에 추가된 응원가. 현재는 앞에서 언급했던 웃기네의 원작자 로티플스카이가 사망한 이후 쓰이지 않으면서 이 응원가가 정식 응원가가 되었다가 현재는 웃기네와 같이 쓰이고 있다. 기존 응원가가 좋다보니 처음엔 반응이 좋지 못했으나 지금은 그럭저럭 호평을 받고 있다. 단적인 예로 이때 같이 바뀌었던 이승엽 응원가는 한시즌도 채 못가고 팬들의 반발로 용도폐기되고 흑역사화가 된것만 봐도..][br][[신해철]] -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워어어어어 박석민 워어어어어어 최!강!삼!성! 승리요정 박석민] [BR] '''현재''': 하늘 - 웃기네 [br] 타카피 - 케세라세라[* 삼성때 응원가에서 삼성을 NC로 바꾼 것외에는 동일하다. 박석민 본인이 삼성 시절 응원가를 그대로 써 주기를 희망했고 삼성 구단도 흔쾌히 승낙. ~~유일하게 [[임태현|임가놈]]의 응원가를 피했다.~~ ]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074ca1><:> '''[[2005년 한국시리즈|{{{#ffffff 2005}}}]]''' ||<#074ca1><:> '''[[2011년 한국시리즈|{{{#ffffff 2011}}}]]''' ||<#074ca1><:> '''[[2012년 한국시리즈|{{{#ffffff 2012}}}]]''' ||
         ||<#074ca1><:> '''[[2013년 한국시리즈|{{{#ffffff 2013}}}]]''' ||<#074ca1><:> '''[[2014년 한국시리즈|{{{#ffffff 2014}}}]]''' ||
         ||<-5> '''2012년 [[KBO 리그|한국프로야구]] 페어플레이상''' ||
         || [[김선우(야구선수)|김선우]]([[두산 베어스]]) || → || '''박석민'''([[삼성 라이온즈]]) || → || [[박용택]]([[LG 트윈스]]) ||
         ||<-5> '''2014, 2015년 [[KBO 리그|한국프로야구]] [[3루수]] [[KBO 골든글러브|골든글러브]] 수상자''' ||
         ||<width=30%><:> [[이종욱(야구선수)|이종욱]] [BR] (2015~2016) ||<:> {{{+1 →}}} ||<width=30%><#AF917B><:> '''{{{#00275a 박석민}}}'''[BR]'''{{{#00275a (2017)}}}'''[* 8월말 교체.] ||<:> {{{+1 →}}} ||<width=30%><:> [[손시헌]] [BR] (2017~2018)||
         [[대구고등학교 야구부|대구고등학교]] 시절부터 고교 정상급 타자로 주목을 받았으며, 2004년 [[삼성 라이온즈]]에 1차 지명으로 입단하게 된다, 당시 포철공고 포수 [[강민호]]와 저울질하다가 [[김한수]]의 대체재로 뽑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후 찾아온 [[한국프로야구/2004년/신인드래프트|2004년 신인드래프트]] 당시 [[강민호]]를 뽑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정식]]을 선택한 것을 생각하면 과연 삼성이 [[강민호]]를 지명하기를 원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아리송한 지명 결과를 낳았다. 물론 당시 삼성은 발전 가능성이 농후한 유망주 포수보다 [[진갑용]]을 대신할 즉전감 백업 포수를 원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긴 하지만--그리고 삼성팬들은 오늘도 삼성의 [[강민호]]를 부르고 있다-- 그리고 삼성의 [[강민호]]는 실현되었다!!.] 그만큼 당시 삼성이 박석민에게 기대했던 것은 공격보다 수비였으며 실제로 대수비요원으로서 1군 생활을 시작하게 되나 기대만큼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프로 첫 홈런은 2004년 5월 20일 대 KIA전에서 [[고우석]]을 상대로 기록하였다. 간간히 1군에 올라올 때마다 뜬금타를 터트리면서 타격 면에서도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덕분에 [[2004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도 포함되기도 했다. 2005년 4월 29일에는 1군에 복귀하자마자 선발 출장하여 당시 기아의 마무리였던 [[신용운]]을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치기도 했다.[* 참고로 신용운은 바로 다음 날인 4월 30일에도 심정수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음으로써 이틀 연속 패전투수가 되고 만다. 자세한 사항은 [[신용운]] 항목 참조.]
         2005년 시즌 종료 후 군복무를 위해 [[상무 피닉스 야구단|상무]]에 입대했으며 2007 시즌 종료 뒤 [[삼성 라이온즈]]에 복귀하였다.
         여담으로 7월 4일 대구 홈경기에서 [[이범석(야구선수)|이범석]]이 9회 2사까지 안타를 한 개도 허용하지 않은 가운데 인생주루를 선보이며 3루쪽 내야안타를 때려서 노히트노런을 저지한 경험이 있다. 당시 3루수는 [[김주형]].[* [[2017년 한국시리즈|그리고 9년 후]], 김주형은 생애 첫 출전한 한국시리즈에서 또다시 답이 없는 뇌수비로 KIA 팬들의 뒷목을 움켜잡았다. 다행히 [[양현종]]의 투혼으로 후속 타자들을 범타로 돌려세워 [[903 대첩|한국시리즈 역사에 길이 남을 대참사]]는 면했다.]
         유난히 1루 악송구를 많이 범해 [[채태인]]의 가랑이를 찢어지게 했으며,(…) [[양준혁]]의 은퇴 선언 및 손가락 부상의 악화로 인해 7월 말부터는 [[지명타자]]로서만 출장하여 시즌 끝까지 수비보다는 타석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행히도 그가 지명타자로 출장하면서 생긴 [[3루수]]의 공백은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야구|면제로이드]]로 인해 각성한 [[조동찬]]이 잘 메워 주었다.
         2010년 8월 13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4회말 2사 상황에서 [[강봉규]]가 안타를 기록할 때 2루 주자로 나가 있었는데, 3루를 돌아 홈으로 달려오면서 막판에 [[포수]] [[신경현]]의 태그를 피하다가 신경현과 홈 대치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이에 심판은 결국 박석민을 바로 아웃시켜 버린다.(...)[[http://yoonseokmin.tistory.com/650|관련 포스트]]
         2010년 10월 13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스코어 5:5이던 11회말 2사 만루에서 끝내기 결승 안타를 쳤다. --그리고 상대 투수 [[임태훈(야구선수)|임태훈]]은 [[송지선|멸망]][[그리고 세계는 멸망했다|했다.]]--[* 박석민은 내야 땅볼을 친후 살기 위해 1루로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했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고..~~카메라가 손시헌을 비춰서~~]
         박석민은 [[SK 와이번스]]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9타수 3안타 1홈런 1볼넷 4사구(死球) 2타점 1득점, 타율 .333, 장타율 .667, 출루율 .571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 안지만 . . . . 91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02년]]
         |드래프트 순위 = [[2002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02년]] 6차 5라운드([[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03년]] [[4월 15일]] <br /> [[수원야구장|수원]] 대 [[현대 유니콘스|현대]]전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16년]] [[7월 14일]] <br /> [[포항야구장|포항]] 대 [[롯데 자이언츠|롯데]]전 구원
         |아시안게임 = [[2010년 아시안 게임 야구|2010]], [[2014년 아시안 게임 야구|2014]]
         {{메달 스포츠|남자 [[야구]]}}
         {{금메달|[[2010년 아시안 게임|2010 광저우]]|[[2010년 아시안 게임 야구|단체전]]}}
         {{금메달|[[2014년 아시안 게임|2014 인천]]|[[2014년 아시안 게임 야구|단체전]]}}
         '''안지만'''(安志晩<ref>{{웹 인용|url= http://www.koreabaseball.com/file/ebook/pdf/2009KBO_guide.pdf|제목= KBO 프로야구 가이드북 2009|출판사=[[KBO (단체)|한국야구위원회]]|확인날짜=2017-01-10}}</ref>, [[1983년]] [[10월 1일]] ~ )은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이다.
         [[2002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02년]] [[삼성 라이온즈]]의 2차 5순위(전체 40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하였다. [[2005년]]에 [[오승환]]과 함께 불펜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2010년]]에 뛰어난 모습을 보여 주며 [[2010년 아시안 게임|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여 금메달을 획득했다. [[권혁]], [[정현욱]]과 함께 불펜의 '안정권' 트리오라는 별칭이 있다.<ref>[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008200005 오치아이 코치가 바라보는 안정권 트리오] - OSEN</ref>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 4홀드로 맹활약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2013년]] [[8월 17일]] [[넥센 히어로즈|넥센]]전에서 우완 [[투수]]로써 최초의 100홀드를 기록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2377859 삼성 안지만, 우완 투수 최초 100홀드 대기록] - 스포츠조선</ref> 그리고 [[2014년]] 프로 데뷔 12년 만에 FA 자격을 획득하여 계약금 35억, 연봉 7억 5000만원으로 총액 4년 65억에 [[삼성 라이온즈|삼성]]과 재계약하였다. 그 뒤 [[2015년]] [[6월 5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는 [[KBO 리그]] 최초 개인 통산 150홀드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하지만 [[윤성환]], [[임창용]]과 함께 해외원정 불법도박 혐의로 [[2015년 KBO 한국시리즈|2015년 한국시리즈]]에 승선하지 못했고 [[2015년 WBSC 프리미어 12|2015년 프리미어 12]]에도 탈락하였다. [[2016년]] [[7월 20일]]에 검찰로부터 불법 스포츠 도박사이트 자금 투자와 관련한 혐의를 받고 있다는 보도까지 나오면서 [[삼성 라이온즈]]는 다음날 계약 해지를 발표함에 따라서 유니폼을 완전히 벗게 되었고, 구단에서 퇴출되었다. 퇴출 이후에는 사회인 야구 선수들을 가르치며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다.
         [[송은범]]과 함께 불펜에서 맹활약하며 금메달에 기여하였고, 병역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다. [[조동찬]]과 함께 이미 [[상무 야구단]]에 합격하였으나, 금메달로 병역 특례를 받았다.
         * 힙지만 - 그는 시합에 나갈 때마다 [[모자]] 챙을 세우면서 나가는데, 이로 인해 '힙지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모자 챙을 세우게 된 이유로는 예전 [[삼성 라이온즈]] 소속이었던 [[강영식 (야구 선수)|강영식]](현재 [[롯데 자이언츠]])과의 내기로 모자 챙을 세웠다고 한다. 모자를 삐딱하게 쓰는 이유는 예전에 같은 팀 선배였던 [[양준혁]]이 "너는 인상이 선해서, 모자로 포인트를 줘봐라" 라고 한 후 쭉 그렇게 쓰고 있다고 한다. 몇 번의 예외가 있었는데, [[대구상원고등학교|대구상업고등학교]] 선배이자 [[삼성 라이온즈]]의 2군 감독으로 활동하였던 [[장효조]]가 [[2011년]] 시즌 중 암으로 갑자기 사망하자 그 무렵에는 경기에 나갔을 때 추모를 위해 모자 챙을 세우지 않았다. 그리고, 국제대회에서도 힙합모자를 쓰지 않았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2142945 삼성 안지만, 힙합 스타일을 버린 까닭은?] - 스포츠조선</ref>
         * 안순신 - [[2014년 아시안 게임]] [[야구]] 결승전 [[중화민국]]과의 경기에서 7회말 무사 1, 3루를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우승에 기여하자 나라를 구했다며 [[이순신]] 장군에게 빗대어 지어진 별명이다.
         [[삼성 라이온즈]]가 한국시리즈 경기를 앞두고 있었던 [[10월 15일]]에 팀의 [[스타]]급 플레이어로 평가받는 간판투수 3명이 마카오에서 바카라 도박을 즐겼다는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며칠 뒤 [[삼성 라이온즈]]는 [[윤성환]], [[임창용]]과 함께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 제외시켰다. 결국 팀은 [[두산 베어스]]에게 1승 4패로 패배하여 통합 5연패가 좌절되었다. 검찰 조사가 늦어지면서 같이 거론된 [[윤성환]]과 함께 [[삼성 라이온즈]] 전지훈련에 참가하였다. [[2016년]] [[4월 3일]] 1군에 재합류했다. 경찰은 "도박 혐의로 수사 중인 프로야구 선수들에 대한 수사를 마무리하려면 중요 참고인을 소환해야 하는데, (그들이) 외국에서 아직 안 들어오고 있으니 현재 상황이 계속될 경우 수사는 '참고인 중지' 결정으로 끝날 수 있다"라고 말하며 이들의 소재가 불분명하다고 수사 가능성을 낮게 봤다. 그러나 6월 초에 이들은 경찰 조사를 받은 것이 확인되었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08&aid=0002510793 '원정도박 혐의' 안지만-윤성환, 수사보류 가능성↑.. 복귀?] - 스타뉴스</ref> 이후 7월 중순에도 불법 도박사이트 개설에 연루되어 검찰 조사를 받았다. [[2016년]] [[7월 21일]]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그를 불구속 입건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으며, 이에 [[삼성 라이온즈]]는 [[KBO (야구)|KBO]]에 계약 해지 승인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사실상 퇴출됨으로써 유니폼을 벗게 되었다.<ref>[http://www.enews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50401 삼성라이온즈 안지만, 보류선수 명단 ‘제외’… ‘사실상 은퇴 수순’] -이뉴스투데이</ref>
         결국 지인의 도박 사이트 개설 자금 지원과 관련한 1심 재판에서 징역 8개월, 집행 유예 2년, 120시간의 사회 봉사 명령을 선고받았다.<ref>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468&aid=00002349</ref> 검찰은 수익금을 분배 약정을 했다는 점에서 안지만을 공범으로 판단했는데, 그나마 재판부에서 직접적으로 사이트 운영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은 데다 그동안 이로 인해 언론의 도마에 오르내리며 손해를 받은 점을 참작해 집행 유예 처분이 내린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안지만은 항소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001&aid=0009035460</ref> 안지만의 항소로 재판이 장기화되는 데다, 앞서 언급했듯이 재판부도 안지만을 도박 사이트의 공범으로 판단했기 때문에<ref>그동안 법원 판례에서 불법 도박 사이트에 돈을 댄 사람도 공범으로 인정해 왔다.</ref> 향후 야구계 복귀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년|연<br /><br />도]]!!소<br /><br />속!![[나이|나<br /><br />이]]!![[승리 투수|승<br /><br />리]]!![[패전 투수|패<br /><br />전]]!![[승률|승<br /><br />률]]!![[평균 자책점|평<br />자<br />책]]!!출<br /><br />장!![[선발투수|선<br /><br />발]]!![[완투|완<br /><br />투]]!![[완봉|완<br /><br />봉]]!![[세이브 (야구)|세<br />이<br />브]]!![[홀드 (야구)|홀<br /><br />드]]!![[이닝|이<br /><br />닝]]!![[안타|피<br />안<br />타]]!![[홈런|피<br />홈<br />런]]!![[볼넷|볼<br /><br />넷]]!![[고의 사구|고<br /><br />4]]!![[삼진 (야구)|탈<br />삼<br />진]]!![[몸에 맞는 볼|몸<br /><br />맞]]!![[보크|보<br /><br />크]]!![[폭투|폭<br /><br />투]]!![[실점|실<br /><br />점]]!![[자책점|자<br /><br />책]]!![[타자 (야구)|타<br />자<br />수]]!![[WHIP|W<br />H<br />I<br />P]]
         |style="text-align: center;"|[[2003년 한국프로야구|2003]]
         |style="text-align: center;"|[[2004년 한국프로야구|2004]]
         |style="text-align: center;"|[[2005년 한국프로야구|2005]]
  • 권혁 . . . . 86회 일치
         [include(틀:다른 뜻1, other1=한국의 R&B 가수, rd1=DEAN)]
         [include(틀:상위 문서2,top1=한화 이글스/선수 목록, top2=야구 관련 인물(KBO))]
         |||| '''한화의 수호신, 야구인생 2막을 연 한화 이글스 시절''' ||
         ||<:> '''학력''' || 대구수창초 - 성광중 - [[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포철공고]] ||
         ||<:> '''프로입단''' || [[한국프로야구/2002년/신인드래프트|2002년 신인드래프트 1차 지명]] ([[삼성 라이온즈]]) ||
         ||||||<tablealign=center><:>'''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074ca1><:> '''[[2006년 한국시리즈|{{{#ffffff 2006}}}]]''' ||<#074ca1><:> '''[[2011년 한국시리즈|{{{#ffffff 2011}}}]]''' ||<#074ca1><:> '''[[2012년 한국시리즈|{{{#ffffff 2012}}}]]''' ||
         ||<#074ca1><:> '''[[2013년 한국시리즈|{{{#ffffff 2013}}}]]''' ||<#074ca1><:> '''[[2014년 한국시리즈|{{{#ffffff 2014}}}]]''' ||
         [[한화 이글스]]의 [[투수]]. 포철공고 출신이며 2002년에 삼성 라이온즈에 1차 지명으로 입단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불펜 투수가 이렇게 화제성이 높은 경우는 최근 한국야구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김성근]] 감독의 엄청난 혹사를 꿋꿋히 버텨내면서 자신의 몸을 불살라내는 모습이, 꼴지를 전전하던 한화가 2015시즌 가을야구 싸움을 하면서 얻은 투혼의 팀컬러와 잘 맞았기에 가장 언급이 많은 선수중 한 명이 되었다. 기존의 한화 프랜차이즈 스타 [[김태균(1982)|김태균]]과 더불어 2015년 한화의 아이콘이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닐 정도.
         ||[[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포철공고]] 시절 ||
         수창초등학교 시절부터 야구를 시작하였으나, 성광중학교 2학년까지만 해도 키가 '''160cm'''정도에 그쳤기 때문에 결국 야구를 그만두게 되고 경상공업고등학고로 진학하였다.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키가 급속도로 자라기 시작하여 키가 30cm 이상 자라게 되었고''', 당시 [[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포철공고 야구부]]의 [[오대석]] 감독의 눈에 띄어, 고등학교 2학년부터 야구를 '''다시''' 시작할 만큼 남들에 비해선 출발이 늦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037776|#]]
         ==== 데뷔 후 2009년 시즌까지 ====
         2002년 연고구단 삼성의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한 뒤 2년차였던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1군에 등판하기 시작했다. 2003년 시즌 초부터 ~~덩치좋은 좌완파이어볼러 덕후 [[김응용|코감독]]의 눈에 들어~~ 불펜과 선발을 오가며 몇 차례 기회를 갖다가 9월 6일 수원 현대전에서 선발 등판해 5⅓이닝 1실점으로 프로 첫 '''선발승'''을 따냈는데,[* 프로 입단 후 첫 승은 2003년 8월 16일 불펜으로 등판해 거두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때도 수원 현대전이었다.] 상대 선발투수는 '''선발 21연승 행진'''을 이어가던 [[정민태]]였다.[* 우연의 일치로 정민태와 권혁은 12년 뒤인 2015년부터 한화에서 선수-코치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2004년에는 37경기 81이닝을 소화하면서 삼성 불펜의 한 축으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그해 9월 18일 두산전에서 156km/h의 구속을 찍으며 다시 주목을 받았지만, 시즌 후 [[토미 존 서저리]]를 받으면서 2005년 시즌은 등판하지 못했다. 2006년 후반 1군에 복귀한 뒤로부터 슬슬 완성형 투수로 자리잡는데, 선발보다는 계투진에 중심을 두는 [[선동열]] 감독의 방침에 따라 철벽 불펜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됐다. 2007년 평균자책점 2.79, 7승 1패 19홀드로 중간계투요원으로 100탈삼진을 달성했다.
         그러나 2009년에는 [[오승환]]이 뻗어버려서[* 이는 삼성의 2009년 포스트 시즌 진출 실패로 직결된다.] [[정현욱]]과 번갈아가면 마무리로 올라오게 되었으며, 올라오는 횟수가 늘어인지 갈수록 성적이 처참해져서 시즌 후반에는 심심하면 털리는 야라레 투수가 되어 버렸다. [[지못미]]. 그래도 어찌어찌 21홀드를 기록함으로서 홀드왕 타이틀은 차지하였다.
         2009년의 심각한 혹사의 여파로 2010 시즌에는 속구 구속이 140km/h대를 못 찍을때가 많아졌다. 반면 구속이 줄면서 2009년까지 약간 불안한 모습을 보이던 컨트롤이 상당히 개선되어, 예전만큼 끔찍한 강속구를 뿌려대지는 않지만 정교한 제구를 통한 코너웍을 이용해 타자를 처리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 주게 되었다. 오히려 안정감만큼은 지난 시즌 이상이라는 평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2010년 10월 7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2010년 플레이오프 1차전, 팀이 스코어 5:6으로 이기던 9회 초에 5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1사 1, 2루, 2S1B 상황에서 어처구니없게도 자기 혼자 실수로 투수판을 밟은 상태에서 공을 떨어뜨리면서 보크를 범하여 아이작 궈낵 경[*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의 패러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http://gall.dcinside.com/list.php?id=samsunglions&no=768365&page=3&bbs=|#]] [[http://gall.dcinside.com/list.php?id=samsunglions&no=768354&page=3&bbs=|#]] 보크를 저질러 1사 2, 3루가 되자마자 [[안지만]]으로 교체되었고, 안지만이 3번 타자 [[이종욱(야구선수)|이종욱]]을 유격수 플라이, 4번타자 [[양의지]]를 중견수 플라이로 아웃시키고 경기를 끝냈으니 망정이지, 기껏 이겨논 경기 말아먹을 뻔했다. 이날 권혁은 0.1이닝 12투구수 1피안타 1볼넷 무실점으로 홀드를 기록했지만, 보크를 기점으로 (본인 왈)멘탈에 심각한 문제를 안게 되어 이후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권혁은 2010 프로야구 플레이오프에서 3경기 ⅔이닝 1홀드 2피안타 4볼넷 2실점(2자책) '''ERA 27.00''', 1홀드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한국 시리즈에 진출했다.
         한국시리즈 1차전 : 1타자 상대하여 스트레이트볼넷 1실점(1자책) '''평균자책점 99.99, 패전'''[* [[오승환]]이 [[김재현]]에게 [[분식회계(야구)|2타점 적시타를 허용하며]] 결승점을 득점한 주자를 내보낸 권혁이 패전투수가 되었다.].
         좌완 중계로서 권혁의 역할은 삼성내에서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146015=|선감독 왈 '유일무이']]라고 불리운 그는, 10월 16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의 2010년 한국 시리즈 2차전, 팀이 스코어 1:3으로 지던 8회초에 3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첫 타자이자 7번타자인 [[박정권]]을 7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삼진으로 잡아냈지만, 다음 타자 [[박경완]]을 상대로 홈런을 맞았다. 이 피홈런 때문에 또 다시 멘탈이 붕괴했는지, 다음 타자인 [[나주환]]에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허용하고 [[정인욱]]으로 교체되었다. 권혁의 한계라고 보기엔 2010시즌 자체의 그의 성적은 그렇지 않았기에 삼성 선수단과 삼성팬들로서는 이해가 안 될 뿐이었다. 이날 권혁은 ⅓이닝 16투구수 1피안타 1피홈런 1볼넷 1실점(1자책)을 기록했고, 팀은 스코어 1:4로 패했다.
  • 배영수 . . . . 86회 일치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북구(대구) 출신 인물]][[분류:1981년 출생]][[분류:우완 투수]][[분류:우투우타]]
         [include(틀:상위 문서2,top1=한화 이글스/선수목록, top2=야구 관련 인물(KBO))]
         ||<:> '''학력''' || 대구칠성초 - 경복중 -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 ||
         ||<:> '''프로입단''' || [[한국프로야구/2000년/신인드래프트|2000년 1차 지명]] ([[삼성 라이온즈|삼성]]) ||
         ||||||||<tablealign=center><:>'''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074ca1><:> '''[[2002년 한국시리즈|{{{#ffffff 2002}}}]]''' ||<#074ca1><:> '''[[2005년 한국시리즈|{{{#ffffff 2005}}}]]''' ||<#074ca1><:> '''[[2006년 한국시리즈|{{{#ffffff 2006}}}]]''' ||<#074ca1><:> '''[[2011년 한국시리즈|{{{#ffffff 2011}}}]]''' ||
         ||<#074ca1><:> '''[[2012년 한국시리즈|{{{#ffffff 2012}}}]]''' ||<#074ca1><:> '''[[2013년 한국시리즈|{{{#ffffff 2013}}}]]''' ||<#074ca1><:> '''[[2014년 한국시리즈|{{{#ffffff 2014}}}]]''' ||
         ||||||||||||<:> '''2004년 [[KBO MVP|한국프로야구 MVP]]''' ||
         ||||||||||||<:> '''2004년 [[한국프로야구]] [[KBO 골든글러브|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
         ||||||||||||<:> '''2004, 2013년 [[한국프로야구]] 다승왕''' ||
         ||||||||||||<:> '''2005년 [[한국프로야구]] 탈삼진왕''' ||
         ||||||||||||<:> '''2004년 [[한국프로야구]] 승률왕''' ||
         ||||||||||||<:> '''2004년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올해의 선수''' ||
         [[대구광역시|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칠성초, [[경운중학교(대구)|경운중]]를 거쳐 대구의 야구명문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를 졸업했다.
         대표적인 별명으로는 삼성 시절의 {{{#blue 푸른 피의 에이스}}},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전에서 30년 발언으로 비록 오해지만 한국에서 밉상으로 찍힌 [[스즈키 이치로]]에게 빈볼을 던져 얻은 '''배열사'''가 있다.[* 모바일 게임인 [[게임빌 프로야구/2011]]에서도 배영수의 이름이 배열사로 나온다. 사족으로 본인의 의사보다는 고참이였던 구대성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4/26/2010042601473.html|입김]]이 있었다고 한다.] 또 한때는 "'''초'''절정'''미'''소년'''배'''영수"에서 따온 '''CMB'''로 삼성 팬들 사이에서 불린 적도 있다. 그리고 [[슬러거]] 유저 한정으로 배[[포크]][* 이거 때문에 배영수가 정통포크를 던질 줄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배영수의 포크는 반(半)포크성으로 스플리터에 가깝다. 떨어지는 각도는 적지만 스피드는 빠른.]란 별명도 있다. 물론 못할 때에는 얄짤없이 배영구,[* 왠지 모르게 순박해 보이는 외모에 초년생때는 영구와 비슷한 까까머리를 하고 다닌 데다가 이름이 비슷하기도 해서인지 평상시에도 애칭으로 배영구라고 불리는 일도 있다.] 더 내려가면 배민폐, 패영수, 배0승으로 격하되며 심할 경우엔 '''패왕'''[* 말 그대로 '''敗'''王. 특히 1승 12패를 기록한 2009년이 절정이었다. [[선동열|이 사람]] 때문이라는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그 때 배영수는 야구를 그만두려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다만 아래 이야깃거리를 읽어 보면 알겠지만 배영수의 부진 원인이 06시즌의 역투다 보니 삼성 팬들에게는 이래 저래 아픈 손가락이라 부진한 성적에 비해 옹호를 매우 많이 받았'''었'''다. 성적과 컨디션에 상관없이 '''[[참교육|영쑤]]'''라는 별명도 자주 쓰인다.
         배영수가 토미존 서저리를 받기 전까지의 플레이 스타일은 140km/h 중 후반 최고 155km/h 를 기록하는 강력한 속구,[* 특히 속구는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테일링이 걸렸을 정도다. 예를 들어 진통제를 맞고 등판했던 06년도 한국시리즈에서도 패스트볼 테일링이 걸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평균속도 130km/h 중후반의 슬라이더130km/h 후반에서 140km/h 정도의 평속이 나오는 스플리터 [* 잡는걸 보면 스플리터가 맞다. 배영수 본인도 스플리터를 던진다고 한다.] 로 타자를 윽박지르는 투구스타일로 [[존 스몰츠]] 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으로 평가되었다. 이닝 소화 면에서도 2004년 한국시리즈 10이닝 노히트노런을 비롯해 2005년도 최다이닝 4위, 2006년 팔꿈치 부상에도 선발과 불펜을 오가는 등의 연투능력이 있는 투수로서 강점을 보였다. 투구폼도 구속을 짜내기 위한 힘을 모으는 과정이 보이는[* 던지기 전에 힘을 모으기 위해 잠시 멈췄다가 투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스터프로 상대방을 압도하는 투수로 kbo 최정상급의 강속구 투수였다.
         하지만 팔꿈치 부상을 입고 토미존 서저리를 받고 난후 구속이 10km/h 가까이 줄어들었고[* 대략적으로 배영수 전성기의 평균구속이 145km/h 정도에서 형성되었고 최고구속도 155km/h 임을 감안할 때 2017년 패스트볼 평균속도 137km/h 최고구속 145km/h 에서 형성된다고 할때 시즌중 평균구속은 약 8km/h 최고구속은 10km/h 정도가 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 구위도 감소하면서 더이상 타자들을 압도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서 2008~2011 시즌을 말아먹고 말았다.[* 이는 플레이스타일의 급작스러운 변화로 해석될 수 있는데 [[팀 린스컴]] 의 경우에도 보듯이 갑작스러운 구속과 구위 저하로 인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플레이스타일이 먹히지 않았을 때 새로운 플레이스타일을 적용시키는데 린스컴이나 배영수 모두 제구력 보다는 구위와 구속으로 승부하던 스타일이었는데 둘다 급작스러운 구속 저하로 인해 타자들의 배트를 유도시키지 못하고 스트라이크존에 던지는 공이 맞아나가기 일쑤였기 때문에 시즌을 말아먹게 된 것 .] [* 이와 같은 현상을 겪은 선수는 kbo에도 있다 바로 [[정민철]] 그도 배영수나 린스컴과 비슷하게 구위와 구속으로 상대를 압박하는 선수였지만 데드암 증세 이후 자신의 스터프로는 상대를 압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제구력형 피쳐로 변신 2007년 2점때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부활에 성공했다. --다음시즌에 다시 망했지만-- .]하지만 새로운 플레이스타일에 완전히 적응한 2012년 부터는 리그예전처럼 리그에서 탑급 선발은 아니지만 최소한 리그에서 3~5 선발까지는 가능할정도로 회복이 되었다. 그리고 그 플레이스타일을 보자면 예전보다 구속이 떨어진데 기인하여 제구력으로 승부를 보는 스타일로 40% 초중반의 비율로 패스트볼을 던지고 그 이외에 슬라이더와 스플리터를 2:2 비율로 던지고 나머지 커브나 체인지업등을 던지는 스타일로 전성기 투구스타일에서 패스트볼의 비중이 많이 줄어들고 그 자리를 슬라이더와 스플리터의 변화구가 채우고 보여주거나 카운트를 잡는 용도로 커브와 체인지업등 기타 구종이 들어왔다고 보면 될 듯 하다.[* 부상 이후로 싱커(혹은 투심)과 서클 체인지업이 추가되었으며 커브도 구사비율이 조금 늘었다, 2011 시즌에는 커터 추가도 시도했으며.[[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09&aid=0002167949|#]] 이외에도 2008년 포스트시즌 때는 너클커브를 던졌고,[[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20&aid=0001997488|#]] 2013년 8월경에는 너클볼까지 선보였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56&aid=0000011149|#]]] 그에 맞춰 투구폼도 변화하여 조금 더 구위와 제구를 잡기 위해서 박수를 치는듯한 투구폼[* 정우람의 투구폼을 생각하면 될듯.]으로 예전의 투구폼보다 조금더 투구폼이 빨라졌으며 간결해졌다.[* 메이저리그에서 이와 비슷하게 투구폼을 고친 사례를 보면 [[잭 그레인키]] 가 있다.] 하지만 과거 스터프에 의존하던 선수였던 만큼 제구파 투수로 플레이스타일이 변경되었어도 과거 플레이스타일에 영향이 있는지 경기당 기복이 심해졌다 잘 던지는 날에는 호투, 컨디션 안 좋은 날에는 엄청나게 털리는 경향이 있는게 눈에 보일 정도 다만 제구력만큼은 2005년 이후로 줄곧 리그 상위권이었다. 시즌 볼넷이 40개를 넘은 시즌이 손에 꼽을 정도.[* 배영수가 컨디션 기복이 있는 것이 이에 대한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공격적인 스트라이크존 공략으로 볼넷도 적게 내주지만 그만큼 컨디션이 좋지 않을 경우에는 스트라이크존에 들어간 공이 정타를 많이 맞으면서 털리기 쉽다는 것.]
         그 전설적인 [[https://youtu.be/eXpj5w0AVm4|2004년 한국시리즈]] 4차전 당시의 모습.
         배영수의 최대 전성기 시절. 당시 최대 150km/h대 중반의 광속구와 140km/h를 넘나드는 슬라이더 두 구질만으로 리그를 평정했다.무엇보다 경기내내 평균 140키로후반대의 공을 꾸준히 던졌는데, 이는 당시 다른 선발들중 구속하나론 비교할만한 상대가 없었으며 최근 리그 수준을봐도 평균구속 최상위권에 랭크될만한 구속과 강인함을 지녔었다. 엄청난 기대를 받고 입단한 그는, 입단 첫 해에는 1군과 2군을 오가며 승리 없이 평균자책점 6점대를 기록하지만, 이듬해인 2001년부터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해 [[임창용]]과 함께 원투펀치로 활약하며 13승을 거두고, 삼성이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두었던 2002년에는 소모포어 징크스가 심하게 보이며 주춤했으나, 2003년 13승, 2004년 17승, 2005년 11승을 올리며 3년 연속 10승 이상을 거두며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특히, 2004년부터 2006년까지 기록했던 3년 연속 2점대 평균자책점을 찍기도 했다. 2006년 시즌엔 8승 9패로 비록 10승을 달성하진 못했다 하더라도, 팔꿈치 부상을 가진 상태로 평균자책점 2.92(...).[* 2007년 [[윤석민(투수)|윤석민]], 2008~2009년 [[봉중근]], 2012년 [[류현진]], 2015~2016년 [[메릴 켈리]]의 [[윤석민상|원조]]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팀 타선 지원을 받지 못했다. (2006년 득점지원율 0.97) 무려 1점도 되지 않는다!][* 뻥뻥 터지던 삼성의 타선은 이상하게도 배영수가 등판하던 날엔 버로우탔다. 문제는 현재까지도 그런다는 거. 그러나 2013년 드디어 타선지원을 받게 되는데 이번에는 평균자책점이...] 심지어 후술한 것 처럼 2006년에는 정규시즌 내내 팔꿈치 통증을 달고 뛴 선수의 기록이 저 정도라니... 아니, 이게 사람인가?
  • 김용국 (야구인) . . . . 69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85년]]
         |드래프트 순위 = [[1985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1985년]] 1차 5순위([[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1985년]]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1995년]]
         * [[삼성 라이온즈]] 수비코치 (2005년 ~ 2009년)
         * [[넥센 히어로즈]] 수비/작전/주루코치 (2009년 ~ 2010년)
         [[한양대학교]] 재학 시절 뛰어난 활약으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1984년 하계 올림픽|1984년 LA 올림픽]]에 참가하였다.<ref name="imaeil">[[매일신문]] - 2007년 7월 기사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9528&yy=2007 "최종문의 펀펀 야구 - 영어가 뭐기에"]</ref>
         [[한양대학교]] 졸업 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한 [[1985년 한국프로야구]]부터 주전 [[3루수]]로 뛰었지만 [[1987년 한국프로야구]]에는 [[류중일]]의 입단으로 설 자리를 잃어 [[유격수]]에서 전향했던 [[오대석]]과 병용으로 출전했다.
         그러나, [[류중일]]이 다음 해인 [[1988년 한국프로야구]] 때 팔꿈치 수술로 출장 입지가 줄어들어 [[오대석]]이 [[류중일]]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서 [[1988년 한국프로야구]]부터 [[1993년 한국프로야구]]까지 줄곧 팀의 주전 [[3루수]]로 활약했다. 또한 1991~1992년, 2년간 팀의 주장을 맡으면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였다.<ref name="imaeil" /> [[1루수]] [[김성래]], [[2루수]] [[강기웅]], [[유격수]] [[류중일]], [[3루수]] 그로 이어지는 내야 수비진은 리그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한편, 그는 뛰어난 수비 실력에 비해 타격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 때문에 아쉽게도 매번 [[해태 타이거즈]] [[3루수]] [[한대화]]에게 밀려 [[한국 프로 야구 골든 글러브 수상자 (3루수)|3루수 골든 글러브]]는 단 한 차례도 수상하지 못했다.
         [[1993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1993 시즌]]이 끝나고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되면서 삼성의 3루수 자리를 후배 [[김한수 (야구인)|김한수]]에게 물려 주었다.
         1994~1995 시즌 [[태평양 돌핀스]] 선수로 뛴 후, 돌핀스를 새로 인수한 [[현대 유니콘스]]가 기존의 선수단을 리빌딩하는 과정에서 [[1996년]]에 세대 교체의 명분 아래 현역 은퇴를 하면서 [[1996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1996 시즌]]을 맞이했다.<ref name="imaeil" />
         ==야구선수 은퇴 후==
         그는 은퇴하면서 [[현대그룹]]의 [[대한민국의 실업 야구|실업 야구단]] [[현대 피닉스]]에서 [[1996년]]부터 바로 수비 코치를 맡았다. 1년 뒤엔 프로 구단 [[현대 유니콘스]]로 발령나기를 기다렸으나 도리어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고, 실망감을 안은 채 어린 두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무작정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ref name="imaeil" />
         [[1997년]] 그는 무보수 방문 코치로서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의 루키 리그 야구단 [[헬레나 브루어스]] ([[:en:Helena Brewers|Helena Brewers]])에서 코치로 있다가 그해 9월 마이너 리그 내의 교육 리그, [[애리조나 폴 리그]] ([[:en:Arizona Fall League|Arizona Fall League]])에 속해 있던 야구단 [[메사 솔라 삭스|선 시티즈 솔라 삭스]] (Sun Cities Solar Sox; 現 메사 솔라 삭스 [[:en:Mesa Solar Sox|Mesa Solar Sox]])에서<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4255979 <프로야구>김용국, 애리조나 폴리그 코치 영광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한 달간 경험을 쌓은 뒤 다시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의 싱글A 야구단 [[스탁턴 포츠]] ([[:en:Stockton Ports|Stockton Ports]])에서 수비 및 주로 코치로 일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4294321 <프로야구> 김용국, 미국 프로야구 지도자로 데뷔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1998년 말, 1년간 그를 지켜본 [[스탁턴 포츠]]는 그에게 연봉 3만 달러를 제안함과 동시에 1999 시즌부터 정규 시즌 코치로 일할 것을 제안하였다. 1999 시즌이 끝난 뒤엔 연봉이 3만 5천 달러로 오르면서 트리플A 야구단 [[인디애나 인디언스]] ([[:en:Indianapolis Indians|Indianapolis Indians]])의 코치로 승격되었다. 2000 시즌 도중에는 [[스카우트]] 자격으로 한국에 2주 동안 출장을 오기도 했는데, 그때 한국의 4개 프로 구단으로부터 코치 제의를 받았다. 그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코치에 도전해 볼 생각도 있었으나 [[LG 트윈스]]의 강력한 러브콜로 인해 국내 복귀를 택했다.<ref name="imaeil" />
         [[대한민국]]에서 연봉 5천만원에 [[LG 트윈스]]의 코치로 활동하기 시작한<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4551908 <프로야구소식> LG, 김대진, 김용국코치 영입]</ref> 그는 추후 자리를 옮겨 [[2006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2006 시즌]]부터 [[2009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2009 시즌]]까지 친정 구단 [[삼성 라이온즈]]에서 수비 코치로 활동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09&aid=0000020171 삼성, 김용국·강성우 코치 영입]</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09&aid=0000060865 [사진]김용국 코치,'아픈 데는 괜찮나?'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09&aid=0000060876 [사진]김용국,'글러브 가볍고 괜찮네!'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2009년]] 친정 팀의 코치 재계약에 실패한 후 [[2010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2010 시즌]]엔 [[넥센 히어로즈]]에 자리를 옮겨 2군 수비·작전·주루 코치로 활동하다가<ref>''OSEN'' - 2009년 11월 기사 [http://www.osen.co.kr/news/Sports_View.asp?gisano=G0911190106 "히어로즈, 김용국 전 삼성 코치 영입"]</ref> [[류중일]]이 감독으로 부임한 후 부름을 받아 친정 팀의 코치로 복귀했다.
         [[2010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 올스타전]]에서 "[[삼성 라이온즈]] 레전드 올스타" 행사도 열렸는데, 그가 레전드 [[3루수]]로 선정되어 오랜만에 [[삼성 라이온즈]]의 옛 유니폼을 입고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ref>[[스포츠 서울]] - 2010년 7월 기사 [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857634.htm "올스타전, 팬들에게 추억을 선사한 레전드 행사"]{{깨진 링크|url=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857634.htm }}</ref>
         {{1983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대한민국 선수 명단}}
         {{1984년 하계 올림픽 야구 대한민국 선수 명단}}
         [[분류:196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태평양 돌핀스 선수]][[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KBO 리그 1루수]][[분류:KBO 리그 3루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대구수창초등학교 동문]][[분류:경상중학교 동문]][[분류:대구상업고등학교 동문]][[분류:한양대학교 동문]][[분류:김해 김씨]][[분류:1984년 하계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
  • 이정훈 (1963년) . . . . 67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87년]]
         |드래프트 순위 = [[1987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1987년]] 2차 1순위([[한화 이글스|빙그레 이글스]])
         * [[북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09년 ~ 2012년)
         * 청소년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2년)
         [[한화 이글스|빙그레]] 입단 첫 해였던 [[1987년]] 22게임 연속 안타 기록과 0.335의 타율을 기록해 신인왕을 수상하였다.<ref>[http://news.naver.com/sports/new/expertContents/read.nhn?category=baseball&expert_name=pdh&page=1&id=263 야구가 내게로 왔다, 빙그레 이글스 외야수 이정훈] 《박동희의 Mr.베이스볼》, 2009년 5월 14일 작성</ref> 정교한 타격과 빠른 발, 그리고 근성 있는 플레이 스타일로 '''악바리'''란 별명을 얻었고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2008년]] 시즌 후 [[LG 트윈스]] 코치에서 물러나 [[북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취임했고<ref> [http://osen.freechal.com/news/view.asp?code=G0811270041 이정훈 전 LG 코치, 북일고 야구부 감독 취임] 《Osen》, 2008년 11월 27일</ref>, [[2012년]] 친정팀인 [[한화 이글스]]의 2군 감독으로 선임되어 돌아와 유망주 육성을 담당하고 있다.
         == 프로 야구 선수 전 ==
         [[1987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1987년 신인 지명]]에서 [[삼성 라이온즈]]가 [[내야수]] [[강기웅]]과 [[류중일]]을 1차 지명해, 연고 팀의 지명을 받지 못하고 [[한화 이글스|빙그레 이글스]]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신인 첫 해 가장 많은 안타를 때려냈고, 신인상을 받았다. [[1991년]]과 [[1992년]] 2년 연속 타격왕에 올랐다.
         은퇴 후 도미하여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은 후 [[한화 이글스]]에서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코치로 활동했고,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보았다. [[2005년]] 시즌 후 [[LG 트윈스]]에 영입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9&aid=0000048264 한화 이정훈 주루코치 LG로] - 대전일보</ref> [[2008년]]까지 [[LG 트윈스]] 코치를 역임한 후, [[북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했다.
         [[2009년]] 제 63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준우승을, [[2009년]] 제39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북일고등학교]]를 우승으로 이끌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2587634 <고교야구> 이정훈 북일고 감독 "이제 시작이다"] 《연합뉴스》, 2009년 4월 2일 작성</ref>
         [[2012년]]에는 세계 청소년 야구선수권 대회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2012년]] 시즌 종료 후 [[북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직을 [[이강돈]]에게 넘기고, [[한화 이글스]]와 2군 감독 계약을 체결하여 2013 시즌부터는 2군 감독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년|연<br /><br />도]]!!소<br /><br />속!![[나이|나<br /><br />이]]!!출<br /><br />장!![[타석|타<br /><br />석]]!![[타수|타<br /><br />수]]!![[득점 (야구)|득<br /><br />점]]!![[안타|안<br /><br />타]]!![[2루타|2<br />루<br />타]]!![[3루타|3<br />루<br />타]]!![[홈런|홈<br /><br />런]]!![[타점|타<br /><br />점]]!![[도루|도<br /><br />루]]!![[도루|도<br /><br />실]]!![[볼넷|볼<br /><br />넷]]!![[삼진|삼<br /><br />진]]!![[타율|타<br /><br />율]]!![[출루율|출<br />루<br />율]]!![[장타율|장<br />타<br />율]]!![[OPS|O<br />P<br />S]]!![[누타수|루<br /><br />타]]!![[병살타|병<br />살<br />타]]!![[몸에 맞는 볼|몸<br /><br />맞]]!![[희생 번트|희<br /><br />타]]!![[희생 플라이|희<br /><br />플]]!![[고의 사구|고<br /><br />4]]
         |style="text-align: center;"|[[1987년 한국프로야구|1987]]
         |style="text-align: center;"|[[1988년 한국프로야구|1988]]
         |style="text-align: center;"|[[1989년 한국프로야구|1989]]
         |style="text-align: center;"|[[1990년 한국프로야구|1990]]
         |style="text-align: center;"|[[1991년 한국프로야구|1991]]
         |style="text-align: center;"|[[1992년 한국프로야구|1992]]
         |style="text-align: center;"|[[1993년 한국프로야구|1993]]
  • 류중일 . . . . 61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86년]]
         |드래프트 순위 = [[1987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1987년]] 1차 2순위([[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1987년]] [[4월 6일]] <br /> [[해태 타이거즈|해태]]전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1999년]] [[10월 20일]] <br /> [[롯데 자이언츠|롯데]]전
         *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 ([[2006년]], [[2009년]] - [[2010년]])
         *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13년 WBC]], [[2014년 아시안 게임 야구|2014년 AG]])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 [[1983년]] 서울
         [[1982년]] 3학년 재학 때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야구장]] 개장 기념으로 열렸던 와의 우수 고교 초청 대회 결승전에서 [[투수]] [[김종석 (1964년)|김종석]]을 상대로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야구장]] 개장 1호 홈런을 기록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410&aid=0000011188 류중일 감독, 손주인-강명구에게 특별한 선물] - 매일경제</ref> 1981년 봉황대기 미기상고 주장을 맡은 1982년 대통령배 감투상, 대붕기 최우수선수상을 수상. 초고교급 유격수로 발돋음하고. [[한양대학교|한양대]] 체육학과(1983학번) 시절 1985년 ~ 1986년에 3학년, 4학년 때 대학야구 올스타 [[유격수]]로 선정되었다.
         === 프로 시절 ===
         [[한양대학교]] 체육학과(1983학번) 졸업 후 [[1987년]] 1차 2순위 지명을 받아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계약금 2천만 원, 연봉 1천 2백만 원)하여 견고한 수비를 바탕으로 팀 성적에 기여했다.<ref name="obbest">[[일간 스포츠]] - 2010년 4월 기사 [http://isplus.joins.com/article/article.html?aid=1372186 "OB의 재구성 - 삼성 역대 최고 타선"]</ref> [[유격수]]로 주로 출장했고 골든 글러브([[유격수]] 부문)를 2번 받았다. 현역 시절에는 [[2루수]] [[강기웅]]과 함께하였던 키스톤 콤비가 막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현역 시절에는 단 한 번도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하지 못했고, 코치로 활동하면서 소속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보았다.
         == 야구선수 은퇴 후 ==
         [[2006년]]·[[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및 [[2010년 아시안 게임|광저우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 코치로 발탁되어 활동했다. [[1999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고 [[2000년]]부터 [[김용희 (야구인)|김용희]], [[김응용]], [[선동열]] 감독 밑에서 코치로 보좌한 후, [[2010년]] [[12월 30일]] [[선동열]]이 경질되자 [[선동열]]의 후임으로 [[2011년]] [[1월 5일]]에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ref>[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09&yy=2011 류중일 감독 "신인 패기로 KS 우승 데뷔 축포 쏜다" ] - 매일신문</ref> 그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삼성 라이온즈]]는 오랜만에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감독을 맞이하게 되었다.<ref>최초의 [[삼성 라이온즈|삼성]] 선수 출신 감독은 [[서정환]]이고, 류중일은 [[삼성 라이온즈|삼성]] 출신 선수 중 선수 및 코치로 활동하면서 단 한번의 팀 이동 없이 감독이 된 첫 번째 경우이다.</ref> [[2011년]] 감독 부임 첫 해에 정규 리그 우승과 [[2011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지으며, "야구 대통령"을 줄인 '''"야통"'''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고,<ref>[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id=201109280100191240017032&servicedate=20110927 류중일호, 우승을 가능케 한 키워드 4개] - 스포츠조선</ref> [[대한민국]]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한 [[2011년 아시아 시리즈]]에서 [[일본]] 챔피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소프트뱅크]]를 꺾고 [[대한민국]] 프로 야구 팀 최초로 [[아시아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ref>[http://osen.mt.co.kr/article/G1109325476 '야통' 류중일 감독, 야신도 못한 亞 정상 위업] - OSEN</ref> [[2012년]] 역시 정규 리그 우승과 [[2012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뤄 냈다. [[2013년]] 정규 리그 우승과 [[2013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 후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13 WBC]]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되었으나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2013년]] 시즌 후 계약 기간 3년의 조건으로 계약금 6억 원, 연봉 5억 원 등 총액 21억 원에 [[삼성 라이온즈]]와 재계약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672898 류중일 감독, 3년 재계약…총액 21억원 사상 최고 대우] - OSEN</ref> [[2014년 아시안 게임|2014 인천 아시안게임]]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되어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13 WBC]] 1라운드 탈락의 쓰라림을 딛고 우승을 이뤄냈다. [[2014년]]에 정규 리그 우승과 [[2014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면서 팀의 사상 최초 통합 4연패를 달성하였고, [[2015년]] 역시 정규 리그 우승으로 5년 연속 정규 리그 우승으로 새 역사를 썼지만, [[2015년 KBO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가 개최되기 전, 삼성 투수들의 해외 원정도박 파문으로 인해 [[2015년 KBO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을 [[두산 베어스]]에게 내주고 만다. [[2016년]]에는 [[박석민]], [[야마이코 나바로|나바로]], [[채태인]]을 잃었고, 외국인 선수 농사 실패, 선수들의 줄부상과 부진으로 팀 최초 정규리그 9위에 머물게 되자, [[2016년]] [[10월 15일]] 계약 만료로 [[김한수 (야구인)|김한수]]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기술고문을 맡게 되었다.
         |[[한국 프로 야구 골든 글러브 상|골든 글러브]] 유격수 부문 수상
         |[[한국 프로 야구 골든 글러브 상|골든 글러브]] 유격수 부문 수상
         |후임자 = [[김한수 (야구인)|김한수]]
         |직책 =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한국 시리즈 우승 감독}}
         |제목 =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1983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대한민국 선수 명단}}
  • 손승락 . . . . 60회 일치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달서구 출신 인물]][[분류:1982년 출생]][[분류:우완 투수]][[분류:우투우타]]
          * [[롯데 자이언츠/선수단]], [[야구 관련 인물(KBO)]], [[불교/인물]]
         ||<:> '''출신 학교''' || 내당초-[[경상중]]-[[대구고등학교 야구부|대구고]]-[[영남대학교|영남대]] ||
         ||<:> '''프로입단''' || [[한국프로야구/2001년/신인드래프트|2001년 현대 유니콘스 2차 3라운드]] (전체 25순위) ||
         ||<:> '''군복무''' || [[경찰 야구단]] (2008~2009) ||
         ||||||||||||<:> '''2013년 [[KBO 리그|한국프로야구]] [[KBO 골든글러브|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
         ||||||||||||<:> '''2014년 [[KBO 리그|한국프로야구]] 페어플레이상''' ||
         [[KBO 리그]] [[롯데 자이언츠]] 소속의 야구 선수.
         온몸을 던지는 다이나믹한 투구폼과 등판 시 울려퍼지는 [[퀸(밴드)|Queen]]의 명곡, [[News of the World|We will Rock you]]가 트레이드 마크. 별명이 많은 편인데 사실 좋은 쪽으로의 별명은 적다. 그나마 좋은 별명이 손승'''LOCK'''[* 스펠링이 다르다. 손승Lock이라고 한건 Lock이 '잠그다'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 We Will Rock You는 그냥 발음이 같아서(...)로 추정된다.], [[락앤락]][* 실제로 최훈은 손승락을 대체로 [[락앤락]]으로 그린다(...). 간혹 블론세이브 등 좋지 못한 경기를 펼쳤을때에는 '내용물 유출' 드립이 터지기도.]정도이며 나쁜 쪽으로는 손든락[* 2013 프로야구 포스트시즌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의 블론 세이브 때 타구가 중견수 플라이가 될 줄 알고 손을 치켜올려든 모습에서 유래.], 손트니코바[* [[김연아]]의 석연치 않은 금메달 획득 실패를 패러디해 골든글러브 수상을 비꼬는 별명이다. ~~그래도 [[임태훈(야구선수)|임태운]]보다는 훨씬 낫다~~], 손퇴물[* 사실 손퇴물이라는 별명은 손승락이 10시즌 좋은 모습을 보여주자 타팀으로 트레이드 될까봐 걱정하던 혀갤러들이 팔리지 말라는 뜻에서 지어준 별명으로서 좀만 못해도 장난스럽게 던지는 별명에 가까웠는데 14시즌에 별명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래서 별명은 잘 지어야 된다. [[유한준|우타거포 분유신]]이 좋은 예.~~ 15시즌에는 더욱 더 심각한 퇴물로 거듭나고 있다. ~~평균자책점은 FA 협상을 위한 눈속임일 뿐~~ ], 승락극장[* 엄밀히 말하면 이 별명은 [[타카츠 신고|이 선수]]의 별명에서 유래, 즉 깔끔한 세이브를 하지 못하고 주자를 내보낸 채로 세이브를 거둔다는 것에서 나온 비하적인 표현으로 시작된 말이다. 다만 2017년 현재는 어느 롯데 팬이 '''해피엔딩 전문 상영관'''이라는 배너를 들고 오면서 아예 하나의 별명으로 자리를 잡은 케이스.], SUN승NOT[* 투구폼을 바꾼 이후로 유독 일요일에 실점이 많고 블론세이브가 자주 벌어지자 붙여진 별명이다],족발극장 등이 있다. ~~[[키비]]닮았다.~~
         [[2015년]] [[10월 1일]], [[목동야구장]]에서 펼쳐진 [[넥센 히어로즈]] 대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 종료 이후 나온 뮤비이다.
         제구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구위가 매우 뛰어난 스터프형 강속구 투수다. 즉 강속구를 스트라이크 존에 넣을 줄 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공이 높게 제구돼도 워낙 구위가 좋아서 노리지 않았으면 배트가 밀려 커트되거나 혹 인필드되면 땅볼이 되는 상황이 많다. 커맨드가 안정적이고 구위 빨로 babip을 낮추는 하드쓰로워 스타일. 의외로 마무리투수의 최고 덕목이라 할수있는 삼진율이 높지는 않다. 인플레이상황을 많이 허용하기때문에 주자를 많이 내보낸다. 승락극장이라는 별명은 여기서 나온것. 사실 여러 구종을 구사할 수 있지만 위기상황이 되면 속구+커터 위주로 볼배합이 극히 단순해진다. 심지어 지켜보는 팬들도 직직커 커커직이라면서 손승락의 단순한 볼배합을 알 정도. 우투수임에도 좌타자에게 매우 강한 면모를 보이는데, [[http://www.kbreport.com/statBuzz/detail?seq=96|2014시즌에는 좌타자상대 피OPS 전체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근데 중요할 때 쳐맞는다. 그해 한국시리즈 5차전이라던지..~~~~8회말에 무사만루에 올라와 무실점으로 막는 역투를 펼쳤지만 9회말 끝내기허용에 다 묻쳤다~~ ~~물론 그 상황을 만든 [[강정호|놈]]보다는 덜 까인다.~~
         [[김광현]]과 함께 상당히 다이나믹한 투구 폼으로도 유명하다. 정확히는 던질때 역동적인것이 아니라 던지고 난 뒤의 모션이 역동적이다. 거의 온몸을 내던지는 듯한 특유의 투구폼은 손승락의 상징과도 같은데 공을 던진 이 후 몸이 붕 떴다가 다시 착지한다. 2011년 부상에서 돌아온 후 더 화려해졌다. 승리를 지켜내는 마무리 투수, 에이스의 상징인 등번호 1번[* 이전에는 레전드인 대도 [[전준호]]가 사용했으나 예상외로 영구결번되지 않아서 손승락에게 넘어왔다. 그리고 롯데로 이적해서도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410&article_id=0000296617&redirect=false|등번호 1번을 달게 되었다.]]],[* 손승락과 동갑내기인 [[이우민]]이 기존에 등번호 1번을 달고 있었으나 손승락에게 넘겨주고 17번을 달게 되었다.] 화려한 점프까지 정말 멋있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이 뛴다는 의식도 못 한다고. 또 후속 동작이 길기 때문에 수비하는 데도 영향을 미친다. 상당히 많은 야구 선수들이 저 폼을 따라하고 싶어하지만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고 한다.[[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277&article_id=0002906900|#]] 그런데 의외로 투수 쪽으로 오는 타구는 잘 잡는 편이다.~~고교 유격수출신~~
         고향 팀인 [[삼성 라이온즈]]에 상당히 약한 편. 삼성전에서 죽을 쑬 때마다 대구의 남자라고 까인다. ~~고향사랑~~ 게다가 히어로즈의 전신이였던 [[현대 유니콘스]]의 마무리가 '''[[조용준|누구]]'''였는지 생각하면... 손승락 필패 공식은 8승락+[[삼성 라이온즈]].[* 물론 마무리 투수가 9회 1이닝만 맡는 것과 8회부터 나오는 것은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다. 8승락이라는 별명은 약간 억울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 롯데 자이언츠 이적 이후는 불안한 롯데 불펜때문에 하도 8회에 많이 나오다 보니 8승락 = 필패 공식은 많이 적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2017년에 꾸준히 8승락을 해도 안정감 있게 막으며 8승락 = 필패 공식은 상당히 지워진 편.]~~덕분에 삼성팬들은 삼승락이라고 좋아한다 카더라~~ ~~그리고 2014년 일요일이라는 조건도 추가되었다~~ 데뷔 첫 KS인 [[2014년 한국시리즈]]에서도 [[강정호]]의 실책으로 [[최형우]]에게 끝내기를 맞으며 또 고향 팀에 약한 모습을 보였다.
         2013년 준플레이오프 5차전 4이닝 불꽃투, 2014년 한국시리즈 5차전 무사만루 방어 등 포스트시즌에서 인상적인 장면을 많이 남겼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특별히 가을에 강한 선수는 아니다. 당장 2013 준PO에서는 1차전 손든락 시전으로 팀 창단 이래 첫 포스트시즌 경기의 세이브투수가 아니라 블론세이브 겸 승리투수(...)가 되었고 2차전에서는 송구실책까지 하면서 패배의 원흉이 될 뻔했다가 끝내기로 구사일생했던 것을 5차전에서 세탁한 것에 가깝고, 2014 KS의 경우 바로 저 무사만루 방어에서 이어지는 장면이 수많은 넥센 팬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그 최형우의 끝내기다. ~~조상우 시리즈였던~~ 이듬해 준PO에서는 팀의 여느 투수들과 마찬가지로 미미한 모습만을 남겼다.~~롯데는 언제쯤 포스트시즌 갈 수 있을까~~ ~~그러나 2017시즌 포시에 진출했다~~ ~~9대0~~
         == 프로 생활 ==
         2001년 신인지명 때 [[현대 유니콘스]]에 2차지명 3라운드에서 지명되었으며, [[대구고등학교 야구부|대구고등학교]] 졸업 후 [[영남대학교]]에 진학했다. 고교 시절에는 유격수로 잘 알려져 있었는데, [[영남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성공적으로 투수로 전향[* 같은 사례로 [[정재복]], ~~[[최진호(야구선수)|최진호]](한화)~~가 있다. 반대로 동갑내기 입단 동기인 [[장민석]]은 좌완투수로 입단했다가 프로와서는 타자로 전향했다.]하여 대학 리그 최고의 강속구를 던지는 선수로 거듭났다.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295&article_id=0000000589|대학에 와서 변화구 등 투구 메커니즘을 습득할 수 있었다]]고. [[영남대학교]]를 졸업하고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했다.
         ==== 프로 입단 후 ~ 2009 시즌 ====
         재활을 마치고 2007년 말 [[경찰 야구단|경찰청]]에 입대했다. ~~대구고 선배 [[김진웅]]과 딱 비교된다~~ 그가 경찰청에 입대한 이듬해 현대 유니콘스는 해체되었고, 선수단은 [[넥센 히어로즈|우리 히어로즈]]로 인계되었다. 그 때문인지 손승락은 경찰청에 가서야 비로소 야구에 집중하고 재활에 전념하면서 구위를 회복했다.
         [[경찰 야구단|경찰청]]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넥센 히어로즈]]에 합류하여 4년 만에 1군에 올라왔다. 2010년 시즌이 시작하기 전 [[스프링캠프]]에서 부상이 재발하여 또 다시 이탈한 [[조용준]]을 대신하여 마무리 보직을 맡게 됐다.[* 결국 조용준은 시즌 후 방출되었다.] 처음에는 손승락에게 '오랜 기간 동안의 공백이 있는데 과연 잘 해줄까?' 이런 의문이 따르면서 팬들 사이에는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9월 24일 금요일, 두산과의 경기에서 6:3으로 넥센이 앞서 있던 8회 2아웃에 등판하여 네 명의 타자를 삼진 처리하며 26세이브를 기록, 세이브왕이 되었다. [[넥센 히어로즈]] 선수로서는 최초 타이틀 홀더. 그 해 [[오승환]]은 시즌 중 또 다시 찾아온 부상으로 재활 중이었고 이전까지 1위였던 [[이용찬]]이 불미스러운 음주운전 사건으로 시즌을 마감했기 때문에 손승락이 세이브 경쟁에서 낙승했다. 게다가 [[이용찬]]보다 [[평균자책점]]이 무려 1점이나 낮으며 블론 세이브도 2개 더 적다. 이닝 수는 말할 것도 없고. 아시안 게임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최종 엔트리에는 들지 못했다. 어차피 [[경찰 야구단|경찰청]]에서 갓 제대했기 때문에 병역으로는 별 상관 없기는 했다. 대신 같은 팀 내에서는 유격수 [[강정호]]가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국가대표 A팀에 발탁됐고 국가대표팀 투수코치로 선출된 [[김시진]] 감독과 함께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 병역을 면제하며 여러 모로 [[넥센 히어로즈]]에 경사를 안겼다.
  • 박승호 (야구인) . . . . 57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83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1983년]]
         |드래프트 순위 = [[1983년 한국프로야구 신인선수 지명회의|1983년 1차 2순위]]([[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1983년]] [[4월 4일]] <br /> [[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광주]] 대 [[해태 타이거즈|해태]]전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1992년]] [[9월 26일]] <br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 대 [[롯데 자이언츠|롯데]]전
         * [[1990년]] [[한국 프로 야구 골든 글러브 상|골든 글러브 지명타자]]
         * [[공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09년 ~ 2010년)
         [[대건고등학교]]와 [[건국대학교]]를 졸업한 뒤 [[병역|군복무]]를 위해 [[대한민국 공군|공군]] 소속의 성무 야구단에 입단하여 야구 선수 생활을 했다.
         === 프로 경력 ===
         군 복무를 마친 뒤 [[1983년 한국프로야구 신인선수 지명회의|1983년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하였다. [[1990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1990 시즌]]에는 [[지명 타자]]로서 110경기에 출전하여 0.307의 [[타율]], 75 [[타점]], [[홈런]] 20개, 0.505의 [[장타율]]을 기록하였고, [[한국 프로 야구 골든 글러브 수상자 (지명 타자)|골든 글러브 지명 타자 부문]]을 수상하며 자신의 선수 경력에 있어 커리어 하이를 찍었다. 하지만 [[1990년]]을 제외한 나머지 시즌에선 대체로 2할 중후반대의 타율과 4할대의 장타율을 기록하며 아주 뛰어난 선수로 기억될 만큼의 활약은 펼치지 못했다. 그는 비록 1980년대 함께 뛰었던 팀 동료 [[이만수]], [[장효조]], [[김성래]]와 같은 커다란 업적을 남긴 수퍼 스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팀에서 꾸준히 제 역할을 한 선수로서 통산 11시즌을 보내고 현역에서 은퇴하였다.<ref>[[매일신문]] - 2009년 8월 기사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7060&yy=2009 "삼성 ‘골고루 한방’이 4강권 이끈다"]</ref>
         [[삼성 라이온즈]]에서만 현역 생활을 하다가 은퇴한 박승호는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친정 팀에 계속 머무르며 타격코치로 일했다. 그는 5년 코치 생활을 하는 동안 [[1995년]] [[투수]]로 입단한 [[이승엽]]에게 타자로 전향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는데 당시 [[백인천]] 감독, [[박흥식 (야구인)|박흥식]] 코치와 함께 그가 대형 타자로 성장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ref>[[매거진 t]] - 2008년 9월 기사 [http://www.magazinet.co.kr/Articles/article_view.php?mm=002004000&article_id=48717 "t MAP - 이승엽"]</ref>
         [[2000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2000 시즌]]부터 박승호는 [[SK 와이번스]]로 팀을 옮겨 4년간 타격코치로서의 일을 계속 이어 나갔고, [[2004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2004 시즌]]부터는 팀을 옮겨 [[KIA 타이거즈]] [[김성한 (1958년)|김성한]] 감독, [[서정환]] 수석코치의 지휘 아래 타격코치 생활을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28&aid=0000027357 기아 김성한 감독 재계약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0481897 <프로야구소식> 박관용 국회의장, KS 1차전 시구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11&aid=0000009800 KIA, 서정환 2군감독 1군코치 임명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09&aid=0000009720 최하위 기아 코칭스태프 개편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2006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2006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는 [[KIA 타이거즈]] 코칭 스태프 개편을 통해 [[서정환]]이 감독으로, 박승호가 수석 코치로 승격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1190864 <프로야구소식> KIA, 코칭스태프 보직 확정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2007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2007 시즌]] 전반기에는 팀 성적이 최하위에 머물면서 6월에 대대적인 코칭 스태프 개편이 있었고, 수석 코치로 있었던 박승호는 2군 감독으로 보직이 이동되었다.<ref>[[마이 데일리]] - 2007년 6월 기사 [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0706181438192229 "KIA, 조범현 전 SK 감독 영입 등 코칭 스태프 개편"]</ref><ref>[[한겨레]] - 2007년 6월 기사 [http://www.hani.co.kr/arti/sports/baseball/216991.html "기아 1·2군 코치진 맞교체… “분위기 쇄신” 효과 관심"]</ref> 2007 시즌이 끝날 때까지 끝내 최하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KIA 타이거즈]]는 시즌 후 [[서정환]] 감독을 경질하였고, [[2007년]] 시즌 중 배터리 코치로 영입했다가 새로 선임한 [[조범현]] 감독이 코칭 스태프를 새로 구성하면서 그는 구단과 재계약하지 못했다.<ref>[[스포츠 칸]] - 2007년 10월 기사 [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0710212230173&sec_id=510201 "조범현 감독 KIA 코치진 물갈이"]</ref> 하지만 그가 키워냈던 [[이용규]]는 국가대표 외야수로 우뚝섰다.
         프로 야구계를 떠나 [[2008년]] 그는 [[공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하여 지도자 생활을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9&aid=0000137047 공주고 야구 감독 경질 논란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ref>[[한국일보]] - 2008년 8월 기사 [http://news.hankooki.com/lpage/sports/200808/h2008080802505591830.htm "북일 · 대전, 어깨가 든든"]</ref><ref>[[엑스포츠 뉴스]] - 2009년 8월 기사 [http://www.xportsnews.com/tabid/92/EntryID/103120/language/ko-KR/Default.aspx "봉황대기 고교 야구 - 안승민의 공주고, 8강행 확정"]</ref>
         이후 [[두산 베어스]]의 부름을 받아 프로에 복귀했다.
         [[2010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 올스타전|한국 프로 야구 2010 시즌 7월, 올스타전]]이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구장]]에서 치뤄지면서 "[[삼성 라이온즈]] 레전드 올스타" 행사도 열렸는데, 박승호가 레전드 [[지명타자]]로 선정되어 오랜만에 [[삼성 라이온즈]]의 고전 유니폼을 입고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ref>[[스포츠 서울]] - 2010년 7월 기사 [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857634.htm "올스타전, 팬들에게 추억을 선사한 레전드 행사"]{{깨진 링크|url=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857634.htm }}</ref><ref>엑스포츠 뉴스 - 2010년 7월 기사 [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123489 "이만수, 김성래… 삼성 레전드 등장에 대구 야구 팬 열광"]</ref>
  • 이수민(야구선수) . . . . 56회 일치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이 문서는 1995년생 야구선수 이수민에 대해 다룹니다. 동명이인, rd1=이수민)]
          * [[야구 관련 인물(KBO)]]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분류:구미시 출신 인물]] [[분류:1995년 출생]] [[분류:투수]] [[분류:좌완 투수]] [[분류:좌투좌타]] / [[삼성 라이온즈/선수단]]
         ||<:> '''학력''' || 도산초-대서중[* 단 중학교 시절은 구미중에서 보냈으며, 상원고 진학 전 대서중으로 전학갔다. 자세한 사항은 하단 참고]-[[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상원고]] ||
         ||<:> '''프로입단''' || 2014년 [[삼성 라이온즈]] 1차 지명 ||
         ||<:> [[박근홍(야구선수)|박근홍]](2012~2016) || → ||<:> '''이수민(2017~)''' || → ||<:> 현역 ||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한 신인 [[투수]]. 2009년 이후 5년만에 부활한 연고지 1차 지명의 대상자이면서, 같은 년도에 [[kt wiz]]에 1차 지명된 [[박세웅(1995)|박세웅]]과 함께 대구·경북 야구 팜에 오랜만에 등장한 투수 유망주이기 때문에 더욱더 많은 기대를 받고 있는 선수다. 고교 시절 별명은 [[이계인|모팔모]].
         구미 도산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하였으며, 구미중학교에서 야구를 하다가 3학년 2학기때 대구 [[달서구]]에 있는 대서중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특이하게도 이 대서중학교는 야구부가 없는 학교다. 이는 대구에 있는 [[대구 상원고등학교 야구부|대구상원고등학교]]로 진학하기 위한 것으로, 체육특기자 여부를 떠나 모든 중학교 졸업예정자는 다른 시도의 고등학교[* 거주지 제한이 없는 일부 특목고/자사고 등은 제외.]로의 진학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구미와 대구가 가깝긴 해도 엄연히 다른 시도다.] [[경북고등학교 야구부]]에 진학하기 위해서 구미중학교에서 대구시내 모 중학교로 전학을 온 이와 비슷한 사례의 어느 학생 말에 따르면 대구광역시교육청으로부터 체육특기자 지정을 받아 전학을 오게 되었다고 하며, 중학교 야구는 3학년 여름방학이 끝나면 모든 일정이 마치게 되어 푹 쉬기 때문에 전학을 가더라도 굳이 야구부가 있는 학교로 갈 필요는 없다고 한다. 사실 타 시도에 있는 고등학교 운동부로 스카웃 된다면 이런 식으로 중3 2학기때 미리 해당 시도내의 아무 중학교로라도 전학을 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많은 대구시내 중학교 중에서도 굳이 대서중으로 전학을 온 이유는 근처에 야구부가 있는 [[대구 상원고등학교 야구부|상원고등학교]]가 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 학기 잠시 거쳐간 학교이니 별 의미는 없다. 보통의 고등학교 운동부에서는 해당 학교로 진학예정에 있는 예비 신입생들을 겨울방학때 부터 미리 훈련을 시키는 경우가 많기도 하니, 아무래도 가까운 학교가 편리해서 였을 것이다.
         상원고등학교 1학년이던 2011년에는 '타 시도 전학생 출신은 1년간 경기에 출전할 수 없다'는 규정상 [* 동일학교급의 등록팀 수가 적은 시도로 이적하는 경우는 6개월이다. 그래서 전국체전을 제외한 정규 대회가 거의 마무리되는 9월을 전후해 선수들의 전학이 보통 이루어진다. 단 선수 수가 18명 미만인 팀으로 전학하거나, 창단 1년 이내의 신생 팀으로 전학하거나, 팀의 해체로 인해 부득이 전학한 경우에는 이 규정을 적용받지 않고 바로 출전이 가능하다.] 경기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량은 계속 성장하여 2012년 제25회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대표팀에 2학년임에도 불구하고 합류, 미국전과 캐나다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팀 내 유일한 2승 투수로 활약하였으며, 2013년 4월 7일 포항구장에서 열린 대구고와의 경기에서 '''9이닝동안 무려 24개의 탈삼진'''을 잡아내었으며, 10회에도 마운드에 등장, '''총 10이닝동안 26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한국 고교야구 한 경기 최다 탈삼진 신기록을 세우게 된다.[* 종전 기록은 진흥고 [[정영일(야구선수)|정영일]]이 2006년 4월 8일 동대문야구장에서 경기고를 상대로 13⅔이닝동안 기록한 23+2개]
         이 영향 때문이었을까, 2013년에 창단한 KT 위즈의 신인 우선 지명 대상자로도 잠시 거론되었으나, [[kt wiz]]가 [[개성고등학교 야구부|개성고]] [[심재민]]과 [[천안 북일고등학교 야구부|북일고]] 류희운을 지명함으로서 [[삼성 라이온즈]] 및 삼성 팬들은 한숨을 놓을 수가 있었으며--그리고 [[한화 이글스]]와 한화 팬들은 울었다--, 경북고 박세웅과 함께 누가 삼성의 1차지명 대상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선택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2013년 7월 1일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 대상자로 최종 선택되었다.[[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566963|#]]. 지명 이후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2013|2013 IBAF U-18 대회]] 대표팀에 발탁되어 활약하기도 했다.
         프로필상 180cm, 82kg의 투수치고는 다소 작은 체격에, 탈삼진 신기록을 세운 10이닝 완투 경기 이외에도 경기가 있을 때마다 선발 투수로 나서서 거의 모든 경기를 책임지며 2013년 5월 21일 당시 7경기에 나서서 평균 139개의 공을 던지는 등 혹사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았으나, 경기를 마치고 난 이후 '''[[삼성 라이온즈]]의 지정 병원'''인 세명 병원에서 마사지 및 회복 치료를 받는 등[[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539640|#]], 상원고 및 삼성에서도 관리를 해 주고 있는 점으로 볼 때, 삼성이 이수민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얼마나 큰 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일 것이며, 많은 삼성팬 역시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566981|지명 이후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는 이수민의 각오를 보고 난 이후 많은 관심과 활약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중이다.--뭐 그래도 불안하면 우리에겐 [[삼성 트레이닝 센터]]가 있잖아?--
         == 프로 시절 ==
         대신 다른 팀의 1차지명 선수들과 달리 계약은 좀 늦어져서, 1차 지명자의 입단 협상 기간인 9월을 넘겼다. 그래서 해를 넘긴 2014년 1월 8일 계약금 2억 원의 조건으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이수민의 계약이 늦어진 건 상원고 감독인 [[박영진(야구)|박영진]]이 제자를 위한답시고 계약을 질질 끌었기 때문이었다.[[http://sports.media.daum.net/sports/column/newsview?newsId=20140228230025367&gid=110341|#]]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 이수민 본인과 이수민의 부모님만 돈을 밝혀 계약을 질질 끌었다고 욕을 먹었다. 계약이 늦어지면서 다른 신인들과 달리 이수민은 개인훈련을 할 수밖에 없었고, 마무리 훈련은 물론이고 KBO에서 실시하는 신인선수 교육에도 불참했다.
         6월 18일 [[SK 와이번스]]전에서 10회에 등판해 1점차의 상황에서도 전날과 마찬가지로 [[볼질]]도 안 하고[* 볼넷을 1개 내줬는데, 좌투킬러 [[이재원(야구선수)|이재원]]을 고의사구로 걸렀다.] 선배인 [[김헌곤]]이 파울타구를 끝까지 쫓아다가 놓치자 괜찮다며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등, 신인답지 않은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0⅔이닝 동안 1피안타 1탈삼진 1볼넷을 기록한 후 [[김건한]]으로 교체됐고, 팀이 승리하면서 첫 홀드를 챙겼다.
         6월 20일 [[NC 다이노스]]전에서 3:3으로 맞선 6회말 2사 2루에서 [[김건한]]의 뒤를 이어 등판하여 [[박민우(야구선수)|박민우]]에게 볼넷을 주었으나 후속 타자 [[이종욱(야구선수)|이종욱]]을 플라이로 처리하였고 7회말 타선이 대폭발하며 상대 구원 [[이민호(야구선수)|이민호]]를 박살내버리며 승리투수 요건을 갖추었다. 여유 있는 점수차에서 기회를 주기 위함인지 [[류중일]] 감독은 이수민이 9회까지 경기를 책임지게 하였고 이수민은 9회 1실점하긴 했으나 감독의 믿음에 부응하며 경기를 마무리짓고 승리투수가 되었다. 이날 기록은 3.1이닝 1피안타 6볼넷 1사구 1탈삼진 1실점. 볼넷이 많긴 했으나 그 유명한 [[김풍기]] 주심의 괴악한 스트라이크존에 의한 것이라는 의견이 다수. 어지간한 베테랑 투수도 멘탈이 붕괴될 만한 상황에서 끝까지 자기 공을 던지며 실점을 최소화한 점은 칭찬할 만하다.
         2014 시즌 후 [[상무 피닉스 야구단|상무]]에 지원하였다. 구단에서 장래를 내다보고 일찌감치 군 팀에 입단시켜 군 복무를 마치게 하려는 듯. 11월 20일 최종 합격했다.
         그동안 수면 위에 떠올랐다가 가라앉았었던 문제인 고교야구 혹사 문제를 수면 위에 떠오르게 했던 선수다. 2013년 동안 프로야구의 하향 평준화와 순수 신인 육성 문제가 동시에 떠오르면서 이수민의 179개 투구수는 모든 야구팬들의 분노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게다가 고교를 졸업한 투수들 80%가 어깨, 팔꿈치 부상을 안고 있다는 충격적인 결과까지 나오면서 이에 2014년부터 고교 야구에도 투구수 제한이 도입되었다.[* 한 경기에서 한 투수가 던질 수 있는 최대 투구 수를 130개로 제한했다. 원래 130개를 초과하면 의무적으로 휴식일을 주도록 했으나 실제 경기에서는 129개쯤 되면 바로 투수 교체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휴식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상태.]
         [[박세웅(1995)|박세웅]]과는 구미 도산초등학교 시절부터 함께 야구를 한 친구다. 앞서 언급했듯이 대구·경북 야구 팜에 오랜만에 등장한 투수 유망주였기 때문에 삼성 팬들은 하필 같은 년도에 두 선수가 신인드래프트 지명 대상자에 오른 것에 대해 매우 아쉬워했다. 삼성라이온즈 역시 두 선수 중 누굴 1차지명 대상자로 삼을지 고민하다가 결국 이수민을 선택하였는데, 이유는 이수민이 왼손잡이인 점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삼성팬들은 대체로 이 결과에 만족하면서도 비슷한 체격[* 프로필 상의 키는 180cm로 나와 있으나 지명 당시 실제 키는 177cm 정도라고 한다.]을 지닌 [[박민규(야구선수)|2009년 지명 당시 희대의 망픽 지명 선수]]의 프로 행보를 생각해 볼 때[* 실제로 삼성 스카우트진 역시 2012년 신인드래프트 당시 다수의 예상과는 달리 비슷한 체격을 지녔던 [[박종윤(투수)|박종윤]]을 지명하지 않았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아무래도 [[박민규(야구선수)|박민규]]의 영향 때문이 가장 큰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으로 걱정하는 삼성 팬 역시 적지 않는 편이다.~~부디 장준관 거르고 [[배영수]]의 결과처럼 되게 해주세요~~ 다만 단순히 체격이 비슷하다고 비교하기는 곤란한 것이, [[박민규(야구선수)|박민규]]는 고교 당시 속구가 최고구속이 140km/h를 못 넘긴 것과 달리 달리 이수민은 최고 구속 144km/h로 고교 선수치고는 빠른 편이다. 또한 스타일도 전혀 다른데, [[박민규(야구선수)|박민규]]가 변화구와 제구로 승부하는 스타일이라면 이수민은 속구와 슬라이더의 투 피치로 타자를 잡는 스타일이다.
         [[임지섭]], [[이건욱]], [[한주성]]에 이어 [[한국프로야구/2014년/신인드래프트|2014년 신인지명 선수]] 중 네 번째로 항목이 개설된 선수다.
         [[한국프로야구/2014년/신인드래프트|2014년 신인 2차지명 회의]] 후 열린 신인 인터뷰에서 "마무리 훈련과 스프링캠프를 열심히 해서 '''왼손 투수가 없으니까''' 빨리 자리잡겠습니다."라고 말해, 본의 아니게 [[장원삼|팀]] [[권혁|선배]] [[차우찬|좌완]][[조현근|투수]][[백정현|들을]] [[박근홍(야구선수)|모조리]] 디스해 버렸다(…).
         2014년 퓨처스 올스타전 때 모습. 보다시피 상당한 [[노안]]이다. 이수민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은 같은 노안동지(...)인 동갑 [[조영우(야구선수)|조영우]]. ~~정우람????~~
  • 최준석 . . . . 55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 top1=야구 관련 인물(KBO))]
         || '''프로입단''' || [[한국프로야구/2001년/신인드래프트|2001년 신인드래프트 2차 6라운드 전체 49번]] ([[롯데 자이언츠|롯데]]) ||
         ||<-5><#151B54><:> [[파일:external/67.media.tumblr.com/tumblr_odywc2m8WK1sqk8veo4_r1_540.png|width=150]] [br] '''[[한국프로야구/2010년|{{{#ffffff 2010년}}}]] [[KBO 리그|{{{#ffffff 한국프로야구}}}]] [[1루수|{{{#ffffff 1루수}}}]] [[KBO 골든글러브|{{{#B8860B 골든글러브}}}]] [[KBO 리그 골든글러브 역대 수상자|{{{#ffffff 수상자}}}]]''' ||
         ||||||||<:> '''[[2013년]] 한국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MVP]]''' ||
         전 [[두산 베어스]], [[롯데 자이언츠]], [[NC 다이노스]] 소속의 야구선수.
         대단히 몸집이 크고 느린 선수.[* 사직구장 펜스 직격타에도 2루에 못갈 정도다.] [[KBO]] 프로필 상 187cm/130kg 라고 나와있지만, 최소 150kg~~[[김정은]]~~은 넘었다는게 중론이다. [[이대호]]와 옆에 있으면 이대호가 날씬해보일 정도. 이대호가 더 키가 크긴 하지만(194cm) 비슷한 키에 이대호가 125kg라는걸 생각하면 190cm 가까운 장신에 비대한 체격을 가진 최준석은 일반 체중계로 잴수있는 체중(150kg)은 훨씬 넘었을 확률이 높다. 야구선수 특성상 기본적인 체중만 해도 100kg에 가까울 테니...[* 삐쩍 마른 [[조승수(야구선수)|조승수]]조차 키가 192cm이다 보니 몸무게가 85kg이나 나간다. 최준석과 비슷한 신장에 같은 [[1루수]] 포지션을 맡고 있는 [[박병호]], [[오재일]], [[채태인]]등도 100kg 전후의 거구. 최준석과 비슷한 체형의 선수로 2017년 kt에 입단한 1루수 한기원이 있다. (지금은 살을 뺀 상태) 프로필 상으로는 182cm/130kg이지만 실제로는 141kg라는게 기사에 나온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뛰어난 장타력에도 불구하고 2차 9라운드에 지명되었다.(주말리그와 전국 대회 성적 편차가 큰 것도 있었지만.)]
         2006년 5월 [[트레이드]]를 통해 [[김진수(야구)|김진수]]와 함께 [[두산 베어스]]로 이적했다. 대신 [[최경환(야구)|최경환]], 이승준이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하였다.
         2010년 한국프로야구 1루수 [[KBO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수상 소감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이 영광을 돌린다."''' 라고 감동스러운 코멘트를 남겼다.
         2012년 4월 8일 넥센과의 경기에서 [[손승락]]을 상대로 결승 3루타를 기록, 김진욱 감독에게 첫 승을 선물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김진욱(야구)|김진욱]] 감독의 신임을 받았는데도 삽을 계속 푸면서 두산팬들의 욕을 들어 먹었고, 결국 2012년에는 기대와는 달리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였다. [[김동주(타자)|김동주]]가 부상으로 골골대면서 중심 타선이 빈약해졌고 [[김현수(1988)|김현수]]가 어떻게든 분투했지만 3할 언저리를 왔다갔다하며 역시 부진했던 탓이었다.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2년 팔도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1, 2차전에서는 출장하지 못했으나 10월 11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3차전 스코어 1:0으로 팀이 앞선 1회초 2사 1루 첫 타석에서 [[롯데 자이언츠|롯데]]의 [[선발 투수]] [[라이언 사도스키|사도스키]]를 상대로 투런 홈런을 쳐내며 팀의 스코어 7:2 승리에 공헌했다.
         군 문제가 남아 있었지만 아래에서도 언급할 무릎 수술 문제로 면제를 받았다. 문제는 수비위치인데, 1루에 붙박이로 들어가려고 해도 [[김진욱(야구)|수비 잘하는 선수를 좋아하는 감독 특성상]] [[오재원]]이나 김현수에게 밀리며, 지명타자 자리에는 [[홍성흔]]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지라 쉽지 않다.
         '''2013 시즌 두산 가을야구의 영웅'''
         시즌 종료 후 [[FA 제도|FA]]를 선언했으며 11월 16일까지의 두산과의 우선 협상에 실패하여 [[손시헌]], [[이종욱(야구선수)|이종욱]]과 함께 시장에 나왔다.나중에 롯데NC의 무상트레이드로 NC로 이적됬다.
         많은 두산 팬들이 최준석의 이적을 아쉬워했지만 한편으로는 고마워했다. [[손시헌]], [[이종욱(야구선수)|이종욱]]은 [[NC 다이노스]]로 이적해버리는 바람에 규정상 보상선수를 얻을 수 없었던 것에 비해 최준석은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한 덕분에 보상선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존의 1루수인 [[박종윤]]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굴욕인 것이, 누적 스탯을 보고 따질 것이 아니라 출루율을 비교하면 최준석은 커리어 .351, 13시즌 .376을 기록했다. 박종윤은 커리어 .294, 13시즌 .298로 규정타석을 채운 타자 중 NC의 대졸신인 [[권희동]]에 이어 뒤에서 두 번째이다. 거포라고는 불릴 수 없지만 [[대타]]로서는 확실한 일발장타력을 갖춘 박종윤이 1루수로는 노답이라고 평가되는 이유가 선구안임을 감안하면 둘의 타격은 레벨이 다르다. 한편 [[1루수]], [[좌익수]], [[지명타자]] 자리에 구멍이 뻥뻥 뚫린 롯데의 상황상 지명타자 자리 고정이 큰 문제는 아니므로 수비능력 또한 무조건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또 최준석의 통산 스탯이 거포라고 하기에 부족한 것은 최준석이 파워툴을 갖추기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늘 부상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건강한 최준석이 [[잠실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던 거포임을 부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결론적으로 최준석 영입이 상당히 비판받는 이유는 첫째도 둘째도 체중관리와 부상이다. '''분명히 건강하면 팀에 도움이 될 선수이지만 부상 위험이 정말로 큰 선수'''를 '''포스트시즌 반짝 성적'''과 '''FA시장의 과열'''로 인해 '''너무 비싸게 샀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어야 할 것이다.
         2018년 1월 24일 최준석이 야구만 할 수있다면 '''연봉 5,000만 원'''이라도 받겠다고 몸값을 스스로 낮췄다. [[http://v.sports.media.daum.net/v/20180124053014405|해당기사]] 하다 못해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109&aid=0003706356|독립리그에서 재기를 노리는 게 어떻겠냐]]라는 기사가 나올 정도다.
         결국 2018년 2월 11일, 이전에 했던 말을 번복하고 조건없는 사인 앤 트레이드로 NC행이 결정되었다. 연봉은 본인이 말했던 5천만에 근접한 5,500만 원.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311&aid=0000821910&redirect=false|김경문 감독의 요청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2014년 두산의 FA [[최준석|3]][[이종욱(야구선수)|인]][[손시헌|방]]이 모두 NC에서 김경문 감독과 재회하게 되었다. 허나 NC 팬덤은, [[리빌딩]]을 천명하면서 이종욱, 손시헌과 저렴한 금액에 재계약하고 [[조영훈]], [[김종호(야구선수)|김종호]]를 내쳐놓고는 최준석 영입이 말이 되느냐는 반응.
         컨택이 약간 아쉽지만 좋은 [[선구안]]과 강력한 장타율로 만회를 하고 있다. 실제로 15년 프로 생활 동안 타율이 3할을 넘었던 적이 3시즌밖에 없다. 하지만 워낙 공에 배트가 잘 안나가기 때문에 삼진도 많이 당하지만 볼넷의 비율이 높고, 덩치에 맞게 장타율 역시 타율에 비하면 높아 순출루율이 1할을 넘나들고, 순장타율 역시 2할을 넘나드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아쉽다는 컨택도 보통 최준석이 위치하는 클린업 타순 기준으로 리그최상급 클린업들에 비해 아쉬운 것이지 보통 타자들에 비하면 월등히 뛰어나다. 3할은 몰라도 2할 8푼은 기대할 수 있는 좋은 타자.
         타격에서의 단점은 바깥쪽 변화구에 취약하다는 것. 실제로 타석에서 가장 멀리 서서 타격을 하는 타자 중 한명이기도 하고, 지금은 꽤 나아졌지만 예전에는 바깥쪽 [[슬라이더]]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스트라이크 존을 상당히 좁게 가져가는 타격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전술했듯이 볼넷을 많이 얻어내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멀뚱하니 서서 삼진을 당하는 모습도 적잖이 나와 중심타자다운 적극적인 타격을 못한다고 욕을 먹기도 한다. 이 정도야 [[이병규|초구부터]] [[송광민|냅다]] [[김주찬|배트를]] [[이지영(야구선수)|내미는]] 대신 [[이병규(1983)|신중하게 볼을 골라내며]] [[김태균|타격을 하는]] 유형의 타자인만큼 감수할 수 있는 장점이겠으나...
         최준석의 가장 큰 단점은 '''[[똥차(야구)|발이 엄청나게 느리다는 것]].''' 주자로써 평균은 커녕 압도적 꼴찌 수준의 주력을 자랑해서 타격으로 벌어놓은 점수의 반쯤은 베이스 러닝으로 날려먹기 마련이다. 게다가 빠른 타구속도 덕에 넓은 [[잠실 야구장]]을 포함한 대부분의 구장에서 '''담장 맞추는 1루타''' 같은 경우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한마디로 '''주루에서는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타자다.''' 2017 시즌 종료 기준 통산 [[병살타]]도 162개로 은퇴선수까지 포함하면 10위, 현역선수 중에서는 4위를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통산 1위는 ~~당연히~~ [[홍성흔]]의 230개, 현역 1위는 [[정성훈]]의 211개.] 단순히 주루가 느려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는 것이, 대타 출장시나 경기후반에는 이 느린 발과 수비포지션이 없는 것 때문에 거의 반드시 [[대주자]]나 [[대수비]]를 대동해야 하는데, 보통 대수비를 겸하는 대주자까지 2명, 어쩌다 수틀리면 대주자 대수비 따로 해서 3명까지 한번에 쓰게 된다. 조원우 감독이 최준석의 기용을 꺼리고 결국 FA에서 잡지 않은 데에는 단순히 발이 느려서 점수 덜 먹는다는 것이나 병살 잘 치는 생산성 문제도 있지만 이 로스터 낭비 문제가 더 크다. 알다시피 프로야구 로스터는 매우 빡빡하게 돌아가는데, 최준석 때문에 좌완이나 사이드 원포인트 혹은 패전조급 릴리프를 타팀보다 한명 덜 써야 한다고 하면 확 와 닿을 것이다. 최준석의 타석에서의 생산성이야 전성기 때는 그걸 감안하고도 쓸 만큼 좋았고 노쇠화가 진행된 지금도 꽤 좋은 편이지만 릴리프 한명 덜 쓰는 단점을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특급까진 아닌지라.
  • 우규민 . . . . 52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4, top1=야구 관련 인물(KBO) , top2=삼성 라이온즈/선수단, top3=먹튀/야구, top4=돈 내놔라 먹튀야)]
         || [[최경환(야구)|최경환]](2000~2001) || → || '''우규민(2003)''' || → || [[안상준]](2004~2006) ||
         || '''투타''' || 우언좌타[* KBO에도 좌타자로 등록되어 있고, 2016년 [[희망더하기 자선야구대회]]에서 1번타자 2루수 좌타자로 출장.] ||
         || '''출신학교''' || 서울 성동초 - [[휘문중학교|휘문중]] - [[휘문고등학교 야구부|휘문고]] ||
         || '''프로입단''' || [[한국프로야구/2003년/신인드래프트|2003년 2차 3라운드 19순위]] ([[LG 트윈스|LG]]) ||
         || '''군 복무''' || [[경찰 야구단|경찰청]] (2010~2011) ||
         LG 트윈스에서 데뷔하여 [[중간계투]]를 거쳐 [[마무리 투수|마무리]]로 뛰다가 [[경찰 야구단|경찰청]]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선발 투수|선발]]로 전환했다. 2013년에 [[신정락]]과 함께 LG의 옆구리 원투펀치를 이루었다. 2016 시즌 종료 후 4년 65억을 받고 삼성으로 이적했다.
         서울 성동초등학교, [[휘문중학교]], [[휘문고등학교 야구부|휘문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휘문고등학교 야구부|휘문고등학교]] 시절 [[내야수]] [[지석훈]]의 2003년 졸업 동기생이며, 2003년 2차 3순위 지명을 받아 상당히 높은 기대를 받고 입단했다. 2군 퓨쳐스 리그로 활약했다가 2004년부터 1군에 올라와 [[중간계투]]로 활약했으나 [[진필중]]과 [[경헌호]]가 2004년과 2005년에 마무리로 심하게 부진했기 때문에 2006년부터는 주로 [[마무리 투수]]로 등판하여 75⅔이닝 동안 3승 4패 7홀드 17세이브 ERA 1.55라는 수준급 성적을 거두면서 차기 마무리로 낙점되었다.
         2007년에도 7월 10일 전까지는 1승 0패 24세이브 ERA 1.20, WHIP는 1도 되지 않는 호성적으로 [[오승환]]과 세이브왕 경쟁을 하고 있었는데, 8월 2일 [[채태인]]이 대타로 나와 ~~방망이가 나가다가 띵 하고 맞아서~~프로 첫 홈런을 때려낸 후부터는 어째 [[블론세이브]]의 왕이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816 대첩]]. 이후부터 부상으로 인한 [[스프링캠프]] 불참의 여파가 나타나 방화 비율이 높아지다가 결국 13블론세이브를 달성, 1시즌 최대 기록을 세우고 말았다. 이 시즌 30개의 세이브로 오승환의 뒤를 이어 세이브 2위에 올랐는데, 13블론의 임팩트가 너무 컸던지라 방화범 이미지가 확립되었다. ERA도 2.65로 크게 상승했다.
         하지만 2008년엔 시즌 초부터 2007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시즌 내내 흔들리며 3승 7패 10세이브 [[평균자책점]] 4.91의 초라한 성적을 남겼다.[* 여담이지만 2008 시즌의 야구 컨셉은 마무리 털리기였다. [[롯데 자이언츠|롯데]]의 [[임경완|임작가]], 국내 리그에서 선전하던 [[한기주]]가 베이징에 가서 털리는 등. [[오승환|부처님]]만 안 털렸다.--애초에 걘 털린 적이 거의 없잖아--]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 등판하여 2삼진을 잡아내고 깔끔한 세이브를 하며 2007년의 모습을 보여주려나 싶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4월 15일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9회말 [[LG 트윈스|LG]]가 4:3으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 포수 [[조인성(야구선수)|조인성]]과 함께 등판하여 9회말 2아웃에 [[정근우]]에게 동점타를 허용하고 만다. 시즌 첫 [[블론세이브|블론]]. [[정근우]]에게 맞은 공은 바깥쪽 어중간한 높이의 밋밋한 직구였다. 특히 이 블론세이브는 [[봉중근]]이 득녀한 날에 선발로 등판하여 8이닝 3실점 8삼진 호투를 한 뒤 저지른 블론세이브라 더욱 뼈아프다.[* 훗날 우규민이 삼성으로 이적하자 [[쥐갤]]에선 [[봉중근]]의 사진을 올려놓고 '규민아 어디가..?'하는 제목으로 글을 쓴 뒤 '니 자식 태어나는 날 내가 똑같이 지X하려고 했단 말이야...'라고 쓴 글도 올라왔다(...) --물론 [[임정우|현 시점 마무리]]는 [[봉중근]]이 아니다--]
         이 [[블론세이브|블론]]으로 빡친 야갤의 [[LG 트윈스|LG]]빠 신모갤러--신족지--[* 야구관련 갤러리 전체에서도 알아주는 찌질이었지만 [[LG 트윈스|LG]]에 대한 애정만큼은 대단했다.]가 우규민의 싸이에 남긴 일침은 우규민에 대한 [[LG 트윈스|LG]] 팬의 눈물 나는 애증을 그대로 보여줬다. 이에 우규민은 미니홈피 제목을 죄송합니다로 바꾸며 야갤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http://gall.dcinside.com/list.php?id=baseball&no=4060411|참고]]
         2009 시즌 초반에 잠시동안 [[김정민(야구)|김정민]]포수와 배터리를 이룰 땐 5⅔이닝 동안 삼진 5개, 피안타 2개, '''볼넷 0개''', '''[[평균자책점]] 0.00'''의 엄청난 성적을 냈으나, [[512 대첩|5월 12일]][[무박 2일 경기|과 13일 사이에 벌어진]] [[SK 와이번스|SK]]와의 잠실 경기에서, 12회초에 올라왔을 때, 주심 '''전일수'''의 대활약(?)으로 처절하게 망가졌다. 지못미.
         이후 완전 무너진 그는 [[블론세이브]]를 거듭하게 되고, 결국 시즌 중반 [[이재영(야구선수)|이재영]]으로 마무리 자체가 사실상 넘어갔다. 2군도 한 번 갔다 왔으나... 또 한 번의 '''[[방화|파이어]]'''로 LG팬들의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 [[경찰 야구단]] 시절 ====
         결국 2009년 시즌을 마치고 입대를 선언하여, 테스트 합격 후 [[경찰 야구단|경찰청]]에 입단했다.
         2010년 기초 군사 훈련을 마친 후 [[경찰 야구단|경찰청]]에 합류했는데, 투수로서 어울리지 않는 등번호 '''2번'''을 달았다. LG에서 마무리, [[중간계투]]로 뛰던 것과 다르게 [[선발 투수]]로 기용되었다.
         그리고 2011년에 대각성, 9월 18일까지 성적은 2군 18경기 15승 0패 [[평균자책점]] 2.34 123이닝(경기당 6.8이닝) 80탈삼진 29사사구 5피홈런으로 [[경찰 야구단|경찰청]]의 에이스 역할을 하였다. ~~이 스탯은 뭐 야구게임도 아니고~~
         [[경찰 야구단|경찰청]]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후 최우수 신인선수 시상식에서 투수상을 탔다.
         [[2011년]] 시즌을 마치고 [[경찰 야구단|경찰청]]에서 제대한 후 [[넥센 히어로즈|넥센]]으로 [[트레이드]]된 [[심수창]]의 등번호였던 남은 67번을 달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형은 갔어, 더는 없어! 하지만 내 등에, 이 가슴에, 하나가 되어 계속 살아가!~~ [[2011년]]에 입단한 [[임찬규]]의 1번을 [[http://osen.mt.co.kr/article/G1109319942|다시 달기로 했다.]] 대신 [[임찬규]]는 팀을 떠난 [[이택근]]의 배번인 29번으로 바꿨다.[* 그리고 임찬규는 우규민이 삼성으로 떠난 2017년 부터 다시 1번을 달고있다.]
  • 장태영(야구선수) . . . . 52회 일치
         ||<#eeeeee><:> '''학력''' || [[경남고등학교 야구부|경남중등학교]]-[[서울대학교]] ||
         ||<#eeeeee><:> '''포지션''' || [[투수]][* 고교야구 시절], [[외야수]][* 실업야구 시절] ||
         ||<#eeeeee><:> '''프로입단''' || - ||
         ||<#eeeeee><:> '''소속팀''' || [[상무 야구단|육군 야구단]](1954년~?)||
         [[경남고등학교 야구부|경남중등학교]] 청룡기 2연패, [[황금사자기]] 3연패의 주역이자 부산야구가 배출한 원조 슈퍼스타. 고교야구 통산 전적 32승 1패.
         165cm의 단신의 몸에서 뭄어져 나오는 140km/h[* 당시에 스피드건이 존재하진 않았지만 당시 야구 원로들이 회상하기로 140에 달하는 매우 빠른 공이었다고 회상한다.]빠른 직구와 칼같은 제구력으로 고교야구를 주름잡았던 인물이다.
         [[김양중(야구)|김양중]]과는 세기의 라이벌이었으며 [[고교야구]]에서 뛸 당시에는 부산의 장태영, 광주의 김양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런 맞수 대결은 어느 스포츠, 어느 선수에게도 있는 법이다. 이러한 대결의식이 스포츠에 활기를 불어 넣는 요인이다. 나와 태영이는 고향과 성장배경이 달랐어도 야구라는 세계에서 선의의 경쟁을 해온 맞수며 둘도 없는 친구다.'''
         1929년 경상북도 선산에서 장인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5살이 되던 해에 부산으로 내려가 살았다. 1944년에 경남중학교에 입학해 [[유도(스포츠)|유도]]부에 입부해 유도를 배우던 그는 1945년 [[해방]]과 동시에 경남중학교에 야구부가 생기자 야구부에 입부하면서 그의 야구인생이 시작되었다. 축산업을 하던 그의 아버지는 경남중 야구부후원회장까지 맡을 정도로 재정적으로도 풍족한 사람이었고 이런 환경속에서 그는 야구 하나만 보고 성장할수 있었다.
         처음 포지션은 유격수로 시작했고 그의 첫 고교무대 데뷔전이었던 1946년 제1회 [[청룡기|청룡기쟁탈 중등학교 야구선수권]]에서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왼손잡이 유격수로 출전해 허종만, 정상교, 조성일, 박정표, 송주창등과 함께 팀의 준우승에 일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1947년, 故 고광적 당시 경남중 감독은 당시 선발이었던 장갑영 대신 그를 [[투수]]로 기용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경남중등학교를 전국 최고의 팀 반열에 오르게 만들었다.
         투수로 전향한후 출전한 1947년 제2회 청룡기쟁탈 중등학교 야구선수권에서 140km/h의 매우 빠른 공을 던져 타자들을 꼼짝도 하지 못하게 하며 우승을 차지했고 이어 [[황금사자기]]에서도 팀의 우승을 이끌어 내자 세간에서는 그를 '''[[태양]]을 던지는 사나이'''라고 불렀다. 빠른 직구 뿐 아니라 제구력도 매우 좋았는데 당시 [[동래고등학교 야구부|동래중등학교]]의 에이스였던 [[어우홍]]은 그를 회고하며 "좌완에 아주 빠른 볼을 던졌다. 또한, 몸쪽, 바깥쪽 로케이션이 좋았고, 볼도 낮게 깔려 들어왔다"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064&article_id=0000002009|기사]]
         그의 활약으로 경남고등학교는 1947년 제2회 청룡기 부터 이듬해인 1948년 제2회 황금사자기 때까지 4개의 전국대회에서 파죽의 12연승을 기록했으며 1948년 제 4회 청룡기에서도 전주공업중, 춘천농업중, [[대구 상원고등학교 야구부|대구상업중]]을 연달아 꺾으며 연승을 15까지 늘리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결승전에서 김양중이 버티고 있던 광주서중과 대결을 펼치게 되었는데 이때 김양중과의 연장 11회에 걸친 대결은 고교야구 최고의 명승부중 하나로 꼽힌다.
         1949년 6월 13일, 뜨거운 태양 아래 5천명 수용가능한 [[동대문야구장]]에는 15,000명의 관객들이 발디딜 틈도 없이 들어차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눈은 두명의 투수가 그라운드에서 모든것을 쏟아 붓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경남중은 당대 최강의 야구팀이었고 그 누구도 우승을 하지 못할것이라는 생각을 가지지 못했다. 당시 결승전을 앞두고 1,311명을 대상으로한 현장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99.4%가 경남중학교 우승을 점쳤고 광주서중의 우승을 점친사람은 단 8명, 0.6%의 인원뿐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경남중은 2년간 15번의 경기에서 모두 승리했고 모든 트로피를 쓸어 담은 최강의 팀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장태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4회 청룡기에서도 1차전 전주공업을 상대로 13:1로 6회 콜드게임승, 2차전에서 춘천중학을 상대로 10:0 5회 콜드게임 승, 준결승에서 막강한 상대였던 [[대구 상원고등학교 야구부|대구상업중]]을 상대로 2:1 승리를 거둬 들였다.
         상대는 [[김양중(야구)|김양중]]이 이끄는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광주서중]]. 광주서중은 전라도 지역의 최고의 팀으로 불리긴했지만[* 이때 [[군산상고 야구부]]는 창단되기 전이다. 군산상고 야구부가 만들어 진것은 1968년이다.] 전국대회 수준에서는 미치지 못한 수준의 야구팀이었고 에이스 김양중의 분투에 [[부산고등학교 야구부|부산중학]]과 대전사범중을 상대로 힘든 승부끝에 결승전에 올라왔다. 언론들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경남중학교의 우승을 점쳤고 경남중학교 측에서도 이 분위기에 흠뻑 취해 이미 이긴것이나 다름 없다며 전날 미리 축하연을 펼쳤다. 반면 광주서중은 이기든 지든 김양중을 믿고 최선을 다하자는 다짐을 결의했다.
         8회말까지 장태영은 광주서중의 타선을 단 1안타로 꽁꽁 묶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김양중도 경남고의 타선을 철저히 틀어막으며 단 1점도 내주지 않는 투구를 선보였다. 스코어링에 0이라는 숫자가 사라진 것은 9회초, [[경남고등학교 야구부|경남중]]의 1번타자 허종만과 2번타자 정상규가 연속안타를 기록하며 2사후 1점을 기록하면서였다.
         그리고 가진 9회말. 광주서중의 문택영이 삼진으로 물러났고 김의석도 유격수 땅볼로 아웃. 그리고 타석에 이완재가 들어섰고 장태영이 던진 공을 쳐냈고 그것이 내야 땅볼이 되며 경남중학교 2루수 정상규의 품안에 안겼다. 모두가 게임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정상규의 송구가 1루수 뒤로 빠지며[* 이때 정상규는 게임이 끝났다고 생각해서 오버핸드로 던지지 않고 언더스로로 폼을 바꿔서 던진게 화근이었다.] 이완재는 2루까지 전력질주해 도달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타석에 3번타자이자 에이스 [[김양중(야구)|김양중]]이 들어섰다. 풀카운트 2:2의 상황에서 5번째 직구를 김양중이 그대로 받아치며 중전안타를 뽑아냈고 이완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홈으로 달려와 득점에 성공, 1:1 동점이 되버린다.
         참고로 이날 패배는 그의 고교야구 인생에서 유일한 패배다.
         ||[[박현식]](좌)과 [[장태영]](우).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정확히 말하면 당시 서울클럽이라는 야구팀 유니폼이다. 당시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데 나라에 돈이 없다보니(...) 유니폼을 따로 제작할수가 없어서 당시 국가대표팀 선수단 유니폼을 서울클럽에서 빌려서 출전했다.] ||
         경남중 재학시절 "운동선수도 공부를 잘할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코피가 날정도로 공부도 상당히 열심히 했던 그는 [[서울대학교]] 상과대에 진학했다. 대학교 졸업후 그는 [[육군]]에 입대해 [[상무 야구단|육군 경리단]]에 입단하게 되었고 고교시절 라이벌 이었던 김양중, [[박현식]]등과 함께 [[한국실업야구]] 무대를 누볐다.육군 시절에는 외야수로 출전하게 되었고 1954년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초대 멤버로 참가, 야구대표팀의 첫 국제대회 안타를 기록해 내기도 했다.[[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295&article_id=0000001259|기사]]
  • 박주영 . . . . 50회 일치
         ||<:> '''프로 입단''' ||<:> 2005년 [[FC 서울]] ||
         고등학교 때인 2001년 [[포항 스틸러스]]의 후원으로 1년간 브라질 축구유학을 다녀왔으며 각종 청소년 대회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한국축구를 이끌어갈 유망주가 되었다. 2005년 후원해준 [[포항 스틸러스]]가 아닌 [[FC 서울]]에 입단해 놀라운 득점력으로 그 해 올해의 선수상, 신인상, 인기상 등을 휩쓸었다. 2008년 9월 프랑스의 [[AS 모나코]]로 이적한 박주영은 첫 경기에서 1득점을 기록하는 등 매 경기마다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면서 10월에 팀 최우수선수로 선정되었다.
         동료를 이용하는 움직임, 빈 공간을 찾아 들어가는 날카로운 감각과 창의성 높은 플레이, 뛰어난 볼 컨트롤, 기존의 한국 공격수들에게서 보기 힘들었던 문전 앞에서의 침착한 볼처리와 정확한 슛으로 한국에서 '축구천재'로 불렸었다. 청구중학교, 청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시절인 2001년 프로구단 포항스틸러스의 후원으로 브라질에 1년간 축구유학을 다녀왔으며 2003년 대통령금배 전국고교축구대회 득점왕, 추계 중고축구연맹전 득점왕, 2004년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 득점왕과 MVP 등 각종 청소년 대회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한국축구를 이끌어갈 유망주로 기대를 모았다.
         2005년 FC서울에 입단해 32경기에 출장, 18골이라는 놀라운 득점력을 보였으며 그 해 프로축구 올해의 선수상, 신인상, 인기상, 득점왕 등을 휩쓸었다. 특히 프로축구 최초의 만장일치 신인상을 이끌었던 점과 당시 사기캐릭으로 불리던 고려대 선배 이천수와 MVP 경쟁을 했다는 점은 K리그 역사상 최고의 루키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청소년대표로 일찍부터 국가대표로 뛰던 박주영은 2005년 6월 정식 국가대표로 A매치에 출장해 첫 경기임에도 득점을 올렸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뚜렷한 활약을 보이지 못했으나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축구 국가대표, 2007년 아시안컵 국가대표, 2008년 동아시아연맹 축구선수권대회 등에서는 활발한 경기를 펼쳐 2008년 동아시아 축구선수권대회 득점왕을 수상했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 참가하여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서 1골을 넣어 2-2 무승부로 16강에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광저우 아시안 게임 동메달에 이어, 2012년 런던에서 한국 축구 역사 상 첫 메달을 획득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 14~15 || [[알 샤바브 FC|알 샤바브]] || [[사우디 프로페셔널리그]] || 7 || 1 || 0 || - || - || - || - || - || - || - || - || - || - || - || - || 7 || 1 || 0 ||
         ||<:> 2009년 6월 6일||<:> [[두바이]]||[[파일:아랍 에미리트 국기.png|width=30]] [[UAE]]||<:> 2–0||<:> 2010 FIFA 월드컵 남아공 예선||
         ||<:> 2009년 8월 12일||<:> [[서울특별시]]||[[파일:파라과이 국기.png|width=30]] [[파라과이]]||<:> 1-0||<:> 친선경기||
         ||<:> 2009년 9월 5일||<:> [[서울특별시]]||[[파일:호주 국기.png|width=30]] [[호주]]||<:> 3–1||<:> 친선경기||
          * 자황컵 체육대상 프로선수상 : 2005
          * 스포츠서울 올해의 프로축구 대상 올해의 신인상 : 2005
          * 스포츠서울 올해의 프로축구 대상 올해의 인기 선수상 : 2005, 2006
          * 스포츠서울 올해의 프로축구 대상 올해의 득점왕 : 2005
          * 스포츠서울 올해의 프로축구 대상 올해의 선수상 : 2005
          * 일간스포츠 - 아디다스 프로축구대상 신인왕 : 2005
          * 일간스포츠 - 아디다스 프로축구대상 골든슈 : 2005
          * 일간스포츠 - 아디다스 프로축구대상 골든볼 : 2005
         '''정상적으로 성장했다면 [[황선홍]] 이후 최고의 포스트 플레이어가 될 수 있었던 선수.'''[* 제대로 된 포스트 플레이가 가능했던 황선홍, 최용수, 김도훈이 시대가 겹쳤고 [[조재진]]은 부상으로 전성기가 짧았다. 그 이후를 이어갈 재능이었던 박주영이 2011년 아스날 이적으로 급격하며 몰락하면서 이 문제는 2010년 내내 한국의 발목을 잡혀 [[김신욱]] 같이 포스트 플레이 이해도가 전무한 선수에 계속 매달리게 만들었다. 그나마 2018년에 들어서는 [[황의조]]가 포스트 플레이어로 맹활약을 하고 있다.]
         지금은 폼이 많이 하락했지만 한때는 '천재'라는 수식어가 사실 부끄럽지만은 않은 선수였다. 특히, 이전까지의 한국 축구의 공격수들은 골대 앞에서 잔뜩 힘이 들어간 플레이를 하기가 일쑤였는데, 신인이던 당시 언론으로 부터 "한국 축구 최초로 골대 앞에서 침착함을 갖춘 천재"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골대 앞에서의 플레이가 여유있'''었'''다. 특히 팀 동료를 이용하는 플레이나 빈 공간으로의 쇄도, 2선에서의 침투는 대한민국에서는 발군의 능력을 자랑했다. 뛰어난 키핑력에 국대에서 차두리에 이은 2위에 랭크되는 스피드를 가지고 있으며, 점프력면에서도 뛰어나 (모나코 피지컬 테스트에서 점프기록 1M를 달성..~~마이클 조던 강백호와 동급이다~~) 180초반대라는 키를 생각해보면 상당한 제공권을 가지고 있다. 이 점프력을 이용한 정확한 떨구기도 수준급이었다. 이 당시 쉐도우 스트라이커로서의 능력을 바탕으로 판타지스타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초년병땐 한국 공격수의 평균보다 키핑력이 좋았지만, 세계레벨에서는 키핑력을 활용하는 면에서 약점을 보였다. 낮은 레벨에서는 시야와 패스 능력이 좋아서 공을 끌어도 별 상관이 없었지만 높은 레벨일 때는 약점으로 작용했던 것. 등진 상태나 회전하면서 다음 동작으로 전환하는 움직임을 자주 보여주었는데, 프리미어리그 레벨의 수비수들은 박주영보다 운동능력이 뛰어났기에 박주영의 다음 동작이 따라잡히면서, 결과적으로 공을 질질 끌면서 템포만 잡아먹는 결과가 나타났던 것이다.
  • 김강민 . . . . 49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3, top1=야구 관련 인물(KBO), top2=SK 와이번스/선수단, top3=먹튀/야구)]
         || '''학력''' || 대구본리초-대구중-[[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 ||
         || '''프로입단''' || [[한국프로야구/2001년/신인드래프트|2001년 2차 2라운드]] (전체 18번, [[SK 와이번스|SK]]) ||
         ||<-3>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
         ||<rowbgcolor=#E1002A> '''[[2007년 한국시리즈|{{{#FFFFFF 2007}}}]]''' || '''[[2008년 한국시리즈|{{{#FFFFFF 2008}}}]]''' || '''[[2010년 한국시리즈|{{{#FFFFFF 2010}}}]]''' ||
         || '''2010년 [[KBO 리그|한국프로야구]] [[KBO 골든글러브|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
         빠른 발과 뛰어난 판단력, 투수 출신답게 강한 어깨와 주자를 속일 수 있는 테크닉까지 외야수로서 수비면에서 갖춰야 할 모든 걸 갖추고 있는 선수. 타 선수들이 다이빙을 해야 잡는 타구를 뛰어난 타구판단과 스타트로 서서 잡아버린다. 현역 감독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한국 최고의 외야수비'''[* 외야수 중 최고 수비력를 놓고 경쟁구도를 펼쳤던 [[이우민]]과 [[이종욱(야구선수)|이종욱]]이 타격부진이나 부상 등의 이유로 경기에 출장하지 못하거나 수비력이 쇠퇴하는 반면, 김강민의 수비력은 꾸준히 좋아졌다. ~~아니 이우민은 뭐 경기를 나와야 수비력을 보지~~]로 뽑혔다. 타격에 대해서는 ~~플루크~~[* 2013,14년에 3할을 기록하며 2010년의 활약이 플루크라는 시각이 사라졌다.] 2010년 이후 2할7푼~3할대의 타격과 대충 10홈런을 넘기는 파워로 매우 준수하다. ~~이우민이 이 정도만 했어도...~~[* 세부적으로 말하자면 갖다 맞히는 능력은 좋으나 선구안이 많이 안좋아서 기복이 심하고 타율에 비해 출루율이 낮은 편이었으나 점차 나아지는 중. 장타력은 어느 정도 한방이 있는 수준은 된다.]
         별명은 인간을 넘어선 짐승같은 플레이라는 의미의 짐승강민, 짐강민이라 주로 불린다.[* 만화가 [[최훈]]의 프로야구 카툰에서는 늑대인간 비슷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런 탓에 못하면 별명이 가축으로 바뀐다.
         [[박재상]], [[조동화]]와 함께 2006년까지는 외야에 자리가 남으면 메꿔주는 백업 멤버 수준에 가까웠지만, 부상당한 [[이진영]]이 풀타임 주전을 하지 못하기 시작한 2007년부터 [[박재홍(야구)|박재홍]]이 우익수를 더 많이 보기 시작함에 따라 주전 중견수로 발돋움하게 시작했다.
         2009년에 홈런 12개를 치며 커리어 첫 두 자리수 홈런을 기록하여 2010년 연봉도 1억 2000만원으로 인상되었다. 김강민의 연봉이 1억을 돌파하면서 SK는 '''주전 야수 전원이 억대 연봉자'''에 오르게 되는 기염을 토했다. [[흠좀무]].
         그럭저럭 중견수 자리를 꿰차고 있었지만 오직 수비능력과 빠른 발을 가지고 중견수를 하고 있어 팬들이 불안불안했다. 타격에선 2할 6푼대로 좀 [[지못미]]. 플래툰으로 [[조동화]]가 있지만 '''조동화의 2009년 타율은 1할대'''로 더 [[안습]].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1, 3차전은 선발 중견수 겸 6번 타자, 2, 4차전은 선발 중견수 겸 1번 타자로 출장하여 13타수 4안타 1볼넷 2사구(死球), 타율 .308, 장타율 .462, 출루율 .438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승으로 우승했다.
         [[2010년]] [[12월 11일]], [[두산 베어스|두산]]의 김현수, [[이종욱(야구선수)|이종욱]]과 함께 2010 시즌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6월 20일 [[문학야구장]]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스코어 1:3으로 SK가 리드하고 있는 8회 초 2사 1, 3루 상황에서 [[엄정욱]]의 직구를 [[강민호]]가 받아쳐 좌중간 깊숙히 날렸으나 귀신같이 뛰어와서 잡아내면서 실점을 면하는 수비를 보여주었다.[* 이 타구를 못 잡았으면 순식간에 동점이 되고 선발투수 김광현의 승리는 날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날도 타격은 무안타.
         6월 28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전에서 스코어 0:2로 삼성이 앞서고 있는 3회 말 2사 만루 상황에서, [[조동찬]]의 뜬공을 제대로 잡지 못해[* 머리 뒤로 공이 떨어지고 말았다. 직접적인 원인은 조명탑 라이트인 듯. ~~[[정수빈#s-1|김명탑]] 등극~~] 이닝 종료 찬스를 날려먹고 3점을 허용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결국 김강민은 멘붕하고~~[[식빵]]!~~, SK는 0:6으로 패배했다. 공교롭게도 그날부터 7월 7일 한화전까지 SK는 6연패에 빠졌다. ~~조명탑의 저주?~~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2년 플레이오프 전 경기에서 선발 중견수 겸 6번 타자로 출장하여 19타수 4안타 1득점, 타율&출루율 .211, 장타율 .263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팀이 시리즈 전적 2패로 지던 [[1028 대첩|2012년 10월 28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2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팀이 스코어 7:8로 앞선 6회 말 2사 2루 상황에서, 삼성 배터리는 [[박정권]]을 거르고 김강민과의 승부를 이어갔으나 김강민은 좌측담장을 그대로 넘겨버리는 통렬한 스리런 홈런을 작렬했다. 이 홈런으로 승부는 완전히 SK쪽으로 넘어갔다. 9회 초에는 아웃 타구를 모두 김강민이 처리했다. 마지막 [[최형우]]의 타구는 날카로웠지만 김강민의 수비 범위가 더 넓었다. ~~김강민 짐승모드?~~ SK는 이날 스코어 8:12로 이겼고 김강민은 선발 중견수 겸 6번 타자로 출장하여 5타수 3안타 1홈런 4타점 1득점을 기록하여 이 날 경기의 '''MVP'''로 선정되었다.
         김강민은 2012년 한국시리즈에서 1, 3, 4, 5차전은 선발 중견수 겸 6번 타자, 2, 6차전은 선발 중견수 겸 5번 타자로 출장하여 22타수 6안타 1홈런 1볼넷 5타점 1득점, 타율 .273, 장타율 .409, 출루율 .304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4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5월 30일 현재 45경기에서 180타수 57안타 타율 .317, 출루율 .403, 장타율 .561로 3/4/5를 기록 중이며 도루 14개, 홈런 9개 타점 27개로 리그 탑급의 1번 타자 역할을 해주고 있다. ~~팀은 6위~~ 팀에서 야구 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선수다(...).
         8월 14일 삼성전에서 7회 초 무사 1루 상황에서 [[이지영(야구선수)|이지영]]의 중견수 앞 안타를 8-5-3 병살타로 둔갑시켰다.
  • 김보름 . . . . 49회 일치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대구문성초등학교|문성초등학교]], [[성화중학교]], [[정화여자고등학교]]를 거치며 쇼트트랙 선수로 활동하다가 [[2010년]]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전향하여 장거리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이후 [[한국체육대학교]]를 졸업하고 실업팀인 강원도청에서 활동하고 있다. 2010-11년 시즌부터 스피드 스케이팅 국가대표로 국내외 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했으며, [[2011년 동계 아시안 게임]] 3000m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며 주목받았다. 2011-12 시즌에도 다시 국가대표로 선발되었으며, 세계 주니어 선수권에서 종합 3위에 올랐고, 팀추월에서는 우승하였다.
         * [[한국체육대학교]] 체육학과
         *2017 MBN 여성스포츠대상 2월 최우수선수<ref>{{뉴스 인용|url=http://www.hankookilbo.com/v/3da45d241be44fc2905381405aa37dfc|제목='삿포로 영웅' 김보름-최다빈, MBN 여성스포츠대상 2월 MVP|뉴스=한국일보|언어=ko|확인날짜=2017-03-31}}</ref>
         |한국 최고 기록
         |한국 최고 기록
         {{인용 상자|"또래 선수들이 전국 대회에 나가 메달을 따고 할때 나는 걸음마 수준에 불과했다."<ref name=":23">{{뉴스 인용|url=http://www.hankookilbo.com/v/c55b872eb5d90e27a6b3a6760753f452|제목=[인터뷰] 김보름 스토리 '쇼트트랙→포기→스피드스케이팅→金?'|뉴스=한국일보|언어=ko|확인날짜=2017-03-27}}</ref>}}
         2009년 2월 10일 탄천종합운동장빙상장에서 열린 제90회 전국동계체육대회 1500m에서 김보름(정화여고 1학년)은 2분35초64로 5위를 차지했다.<ref>{{웹 인용|url=http://result.sports.or.kr/sk/schedule_result.jsp?classCd=2&toCd=200902&detailClassCd=04&rhCd=9&page=16&gameDate=&baseClassName=1500M&rhName=%EA%B2%B0%EC%8A%B9&kindCd=08&kindNm=%EC%97%AC%EC%9E%90%EA%B3%A0%EB%93%B1%EB%B6%80&pcntGbn=I&useGbn=|제목=정보제공 _ 대한빙상경기연맹|확인날짜=2017-04-04}}</ref> 11일 열린 3000m에서는 김보름이 6분19초03으로 동메달을 차지했다.<ref>{{웹 인용|url=http://result.sports.or.kr/sk/schedule_result.jsp?classCd=2&toCd=200902&detailClassCd=05&rhCd=9&page=16&gameDate=&baseClassName=3000M&rhName=%EA%B2%B0%EC%8A%B9&kindCd=08&kindNm=%EC%97%AC%EC%9E%90%EA%B3%A0%EB%93%B1%EB%B6%80&pcntGbn=I&useGbn=|제목=정보제공 _ 대한빙상경기연맹|확인날짜=2017-04-04}}</ref>
         초등학교 5학년 때 쇼트트랙 선수로 입문한 김보름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결국 고등학교 2학년 때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전향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1/31/2017013190223.html|제목=[테마 인터뷰] '노란 머리' 김보름 "머리 색 같은 메달 따고 싶어요"|언어=ko|확인날짜=2017-03-29}}</ref> "아무래도 올림픽에서 이승훈 선수가 활약했던 게 영향이 가장 컸죠. 하지만 2010년도 전부터 스피드를 타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어요."<ref name=":8" /> "스피드 스케이팅의 혼자만의 싸움이 매력적이라 전향 결심했습니다."<ref name=":25">{{웹 인용|url=http://sbssports.sbs.co.kr/news/news_content.jsp?article_id=S10006106689|제목='얼짱 스피드 스케이터' 김보름의 꿈|언어=ko|확인날짜=2017-03-14}}</ref> "딱히 계기라고 할 건 없고 운동을 그만두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스피드 스케이팅 한번 해보고 그만두자'해서 전향을 했는데 지금 여기까지 온 거죠. 쇼트트랙 할 때 그렇게 잘 탔던 선수도 아니었고 성적도 계속 안나왔고 대학에 가서 진로 결정을 확실히 해야 하던 시기여서 전향을 하게 됐어요.<ref>{{웹 인용|url=http://atmz.co.kr/?p=4474|제목=The Women Athlete {{!}} 김보름, 거침없이 멈춤없이 {{!}} athlete|성=athlete|언어=ko|확인날짜=2017-03-26}}</ref> "아무래도 시작이 늦다 보니 의욕과는 달리 또래 친구들과의 격차를 줄이기가 벅차더라고요. 결국엔 쇼트트랙에 흥미를 잃었고, 중학교 입학 후에는 운동을 그만 두게 됏죠. 다시 쇼트트랙을 시작하면서 이전보다는 확실히 괜찮았어요. 2009년 전국동계체육대회 쇼트트랙 1500m 부문에서 동메달을 딴 적도 있었거든요. 그렇지만 저는 쇼트트랙 선수로서의 가능성이 그렇게 큰 선수는 아니었죠. 쇼트트랙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ref>{{뉴스 인용|url=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64&aid=0000005293|제목=[매거진S] 김보름, 주저앉는 것이 꼭 실패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언어=ko|확인날짜=2017-04-18}}</ref> "전향에 대해 주위에서 반대를 많이 했어요. 열 명이면 열 명 다 좋지 않게 보시더라고요. 누군가 '그냥 쇼트트랙 타'라고 말했다면 오히려 괜찮았을 거예요. 그런데 다들 '네가 할 수 있을 것 같냐'고 하시더라고요. 스피드스케이팅에서도 그저그런 선수로 남으면 저를 비난했던 사람들의 생각처럼 되는 거잖아요. 뭔가 오기, 목표가 생겼어요."<ref>{{뉴스 인용|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1/26/2017012600349.html|제목=[스피드 인터뷰]금빛 질주 꿈꾸는 여제, 김보름의 반전 드라마|언어=ko|확인날짜=2017-03-27}}</ref> "쇼트트랙에 늦게 입문했고, 스피드스케이팅도 엄청나게 늦게 시작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했다. 마지막 궁지에 몰린 터라 더 그랬던 것 같다."<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1/03/0200000000AKR20170103089600007.HTML|제목=<평창유망주> ④ 쇼트트랙 꼴찌소녀 김보름, 스피드스케이팅 금메달 노린다|성=김경윤|날짜=2017-01-04|뉴스=연합뉴스|언어=ko|확인날짜=2017-03-29}}</ref> "이승훈은 쇼트트랙에서도 국가대표를 지냈지만 김보름은 다르다. 김보름은 쇼트트랙에서 크게 두각을 보이지 못하고 종목을 전환해 성공했다. 더 많은 선수들에게 희망을 주기도 한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1.kr/articles/?2887690|제목=[빙속] 이승훈-김보름이 가져온 매스스타트 붐 업…"긍정적 효과"|날짜=2017-01-17|뉴스=뉴스1|언어=ko|확인날짜=2017-03-29}}</ref> 실패했던 기간으로 보였던 쇼트트랙 경험이 훗날 주종목이 된 매스스타트를 위한 김보름의 가장 귀한 자산이 된다. "쇼트트랙 경험이 매스스타트에 많은 도움을 준다."<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11/21/0200000000AKR20161121135300007.HTML|제목=이승훈·김보름 이구동성 "쇼트트랙이 매스스타트 선전 비결"|성=이영호|날짜=2016-11-21|뉴스=연합뉴스|언어=ko|확인날짜=2017-03-27}}</ref>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실내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서 펼쳐진 제7회 아스타나-알마티 동계아시안게임 3000m에서 김보름이 4분10초54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차지했다. 김보름은 3000m 결승전에서 3조로 출발해서 앞서 출발한 1,2조 선수들에 비해 기록차를 크게 벌리며 1위에 섰지만 곧바로 4조 일본의 호조미 마사코에 2.72초 뒤졌다. 3위에 오른 중국의 왕페이는 4분19초77을 기록했다. 함께 경기에 나선 박도영(17, 덕정고)은 컨디션 난조로 아쉽게 5위에 머물렀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mt.co.kr/mtview.php?no=2011013118485662311&code=column91&vgb=column|제목=[동계AG]김보름, 스피드스케이팅 女3000m '깜짝'銀 - 머니투데이 뉴스|확인날짜=2017-03-06}}</ref> 2011년 2월 5일 열린 5000m에서는 한국의 박도영(18, 덕정고)이 3번째 조로 일본의 호즈미 마사코와 함께 레이스를 펼쳐 6초40 뒤진 기록으로 골인했으나, 전체 2위(7분15초63)를 차지했다. 김보름은 7분22초92의 기록으로 4위를 차지해 아쉽게 메달을 놓쳤다.<ref>{{웹 인용|url=http://m.cnbnews.com/m/m_article.html?no=128516|제목=[동계아시안게임] 박도영, 스피드스케이팅 5000m 은메달|확인날짜=2017-03-06}}</ref>
         김보름은 월드컵 팀추월 종목에서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사상 첫 메달을 수확했고 매스스타트에서도 개인 첫 메달을<ref name=":17" />
         2011년 11월 18일 러시아 첼랴빈스크에서 열린 2011-2012 국제빙상경기연맹 스피드스케이팅월드컵 1차 대회 3000m 디비전B에서 김보름은 4분12초38로 2위를 차지했다. 19일 열린 1500m 디비전B에서는 김보름이 2분01초39로 4위를 차지했다. 20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이주연, 노선영, 김보름이 3분05초79로 4위를 차지했다. 2011년 11월 25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2차 대회 3000m 디비전A에서 김보름은 4분13초61로 20위를 차지했다. 26일 열린 15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2분02초58로 20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27일 열린 매스스타트에서는 김보름(한국체대)이 7분26초85의 기록으로 첫 동메달을 따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1033550|제목=이승훈, 매스스타트 금메달|날짜=2011-11-28|뉴스=SBS NEWS|언어=ko|확인날짜=2017-03-06}}</ref> 2011년 12월 2일 네덜란드 히렌빈에서 열린 월드컵 3차 대회 5000m 디비전B에서 김보름은 7분26초10으로 12위를 차지했다. 3일 열린 1500m 디비전B에서는 김보름이 2분01초39로 5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4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이주연(동두천시청)-노선영(한국체대)-김보름으로 구성된 대표팀이 3분03초18의 기록으로 캐나다(3분00초01)와 러시아(3분02초38)에 이어 3위에 올랐다.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이 월드컵 시리즈 팀 추월에서 메달을 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ref name=":17">{{웹 인용|url=http://m.yeongnam.com/jsp/view.jsp?depth1=3&depth2=4&nkey=20111206.010260719320001|제목=한국 빙속 팀추월 사상 첫 메달|성=영남일보|확인날짜=2017-03-06}}</ref> 2012년 2월 12일 노르웨이 하마르에서 끝난 월드컵 5차 대회 팀추월 경기에서 이주연(25)과 노선영(23), 김보름(18)이 출전하여 3분05초65의 기록으로 폴란드(3분05초57)에 이어 동메달을 차지했다. 3000m에 출전한 김보름은 4분15초66의 기록으로 16위에 머물렀다.<ref name=":2">{{뉴스 인용|url=http://www.icenews.co.kr/entry/%EB%B9%99%EC%86%8D-%EC%9B%94%EB%93%9C%EC%BB%B5-5%EC%B0%A8%EB%8C%80%ED%9A%8C-%ED%8C%80-%EC%B6%94%EC%9B%94-%EB%82%A8%EB%85%80-%E9%8A%80-%E9%8A%85|제목=빙속 월드컵 5차대회, 팀 추월 남녀 銀, 銅|날짜=2012-02-13|뉴스=아이스뉴스|확인날짜=2017-03-06}}</ref> 15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2분00초24로 10위를 기록했다. 디비전B에서는 이주연(동두천시청)과 노선영(한체대)이 각각 1위(2분01초53)와 3위(2분01초82)를 차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icenews.co.kr/entry/%EC%9D%B4%EC%8A%B9%ED%9B%88-%EB%B9%99%EC%86%8D%EC%9B%94%EB%93%9C%EC%BB%B5-5000m-13%EC%9C%84-%EA%B9%80%EB%B3%B4%EB%A6%84-%EC%97%AC%EC%9E%90%EB%B6%80-1500m-10%EC%9C%84|제목=이승훈 '빙속월드컵' 5000m 13위... 김보름 여자부 1500m 10위|날짜=2012-02-12|뉴스=아이스뉴스|확인날짜=2017-03-11}}</ref> 2012년 3월 10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월드컵 파이널 1500m에서 김보름은 1분59초52로 12위를 차지하며 73점 22위로 시즌을 마쳤다. 11일 열린 매스스타트에서는 김보름이 8분53초69로 7위를 차지하며 110점 7위로 시즌을 마쳤다. 팀추월에서는 김보름, 이주연, 노선영이 3분03초29로 은메달을 차지하며 320점 3위로 시즌을 마쳤다.<ref name=":24" />
         2011년 제66회 전국남녀 종합스피드스케이팅 선수권대회 3000m에서 김보름은 2위를 차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m.blog.naver.com/woorikangsan/20201685972|제목=한국 빙상 유망주 - 김보름 선수,한국, 토렌티노 동계 U대회 종합 3위…빙속 김보름 최다 메달 획득,|뉴스=네이버 블로그 {{!}} 사진과 여행하기|언어=ko|확인날짜=2017-03-13}}</ref>
         2012년 3월 3일 일본 오비히로에서 열린 스피드스케이팅주니어세계선수권대회 3000m에서 박도영이 1위, 김보름이 2위를 차지했다. 1500m에서는 김보름이 2위, 박도영이 4위, 남예원이 33위를 차지했다. 1000m에서는 김보름이 6위, 김현영이 7위, 박도영이 10위, 임정수가 27위를 차지했다. 종합에서는 김보름이 3위, 박도영이 5위, 임정수가 14위를 차지했다. 4일 열린 팀추월 경기에서 김보름은 박도영(한국체대), 임정수(청학고)와 팀을 이뤄 출전하여 3분07초36의 기록으로 일본(3분13초67)과 러시아(3분14초41)를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ref name=":7">{{뉴스 인용|url=http://www.icenews.co.kr/entry/%EC%8A%A4%ED%94%BC%EB%93%9C-%EB%B0%95%EB%8F%84%EC%98%81-%EC%A3%BC%EB%8B%88%EC%96%B4-%EC%84%B8%EA%B3%84%EC%84%A0%EC%88%98%EA%B6%8C-2%EA%B4%80%EC%99%95-%EC%B0%A8%EC%A7%80|제목=스피드 박도영, 주니어 세계선수권 2관왕 차지|날짜=2012-03-05|뉴스=아이스뉴스|확인날짜=2017-03-11}}</ref>
         2012년 11월 4일 태릉국제스케이트장에서 열린 제47회 종목별 스피드스케이팅선수권대회 3000m에서 김보름은 4분18초60으로 박도영(4분21초18-한국체대)과 임정수(4분25초23-한국체대)를 여유있게 제치고 대회신기록과 함께 우승을 차지했다. 6일 열린 1500m 경기에서도 김보름이 2분02초98로 역시 한체대 출신인 노선영(2분05초00-용인시청)과 박도영(2분05초71)을 꺽고 대회신기록과 함께 금메달을 획득했다.<ref name=":6">{{웹 인용|url=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1799136|제목='빙속 질주' 스피드스케이팅 시즌 시작됐다|날짜=2012-11-07|확인날짜=2017-03-10}}</ref>
         2012년 11월 16일 네덜란드 히렌빈에서 열린 2012-2013 국제빙상경기연맹 스피드스케이팅월드컵 1차 대회 3000m 디비전B에서 김보름은 4분10초81로 1위를 차지했다. 17일 열린 1500m 디비전B에서는 김보름이 1분58초41로 1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매스스타트 부문에서는 김보름이 4위를 차지했다.<ref name=":8" /> 18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김보름, 노선영, 박도영이 3분03초13으로 5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2012년 11월 24일 러시아 콜롬나에서 열린 월드컵 2차 대회 매스스타트에 출전한 김보름은 8분40초77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따냈다. 박도영(20-한국체대)은 8분41초26으로 5위, 노선영은 8분41초82로 10위를 차지했다. 15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1분57초05로 전체 선수 20명 중 5위를 기록하며 한국 여자 장거리의 스타 탄생을 예고했다. 1500m 디비전B에서는 노선영이 2분00초74로 5위, 박도영이 2분02초34로 15위를 차지했다. 25일 열린 3000m 디비전A에서도 김보름은 4분06초13의 기록으로 7위에 오르는 등 장거리에서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였다. 박도영은 4분12초31의 기록으로 16명의 출전선수 중 최하위에 머물렀다. 3000m 디비전B에서는 노선영이 4분13초51로 16위를 차지했다.<ref name=":9">{{뉴스 인용|url=http://www.icenews.co.kr/entry/%EA%B9%80%EB%B3%B4%EB%A6%84-%EC%8A%A4%ED%94%BC%EB%93%9C%EC%8A%A4%EC%BC%80%EC%9D%B4%ED%8C%85%EC%9B%94%EB%93%9C%EC%BB%B5-%EB%A7%A4%EC%8A%A4%EC%8A%A4%ED%83%80%ED%8A%B8-1%EC%9C%84|제목=김보름, 스피드스케이팅월드컵 매스스타트 1위|날짜=2012-11-26|뉴스=아이스뉴스|확인날짜=2017-03-12}}</ref> 2012년 12월 1일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월드컵 3차 대회 5000m 디비전A에서 김보름은 7분11초19의 기록으로 전체 12명의 선수 중 5위를 기록, 메달권 진입에 실패했다. 5000m 디비전B에서는 박도영이 7분30초18로 16위, 노선영(23, 한국체대)이 7분35초47로 19위, 임정수가 7분39초23으로 21위를 차지했다. 2일 열린 15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2분00초38의 기록으로 17위를 차지했다. 1500m 디비전B에서는 노선영이 2분02초47로 9위, 박도영이 2분03초10으로 11위를 차지했다. 팀추월 경기에 출전한 김보름, 노선영, 박도영은 3분00초55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획득했다.<ref name=":14">{{뉴스 인용|url=http://www.icenews.co.kr/entry/%EC%9D%B4%EC%8A%B9%ED%9B%88-%EC%9B%94%EB%93%9C%EC%BB%B5-10000m%EC%84%9C-%E9%8A%85|제목=이승훈, 월드컵 10,000m서 銅|날짜=2012-12-03|뉴스=아이스뉴스|확인날짜=2017-03-13}}</ref> 2013년 2월 9일 독일 인첼에서 열린 월드컵 7차 대회 매스스타트에서 김보름은 8분13초80만에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이 대회에서 김보름은 월드컵 포인트 100점을 추가, 총점 260점으로 네덜란드의 마리스카 휘스먼(240점)을 제치고 여자 매스스타트 월드컵 랭킹 1위로 올라섰다. 함께 레이스를 펼친 박도영(8분16초82)과 노선영(8분17초64)은 각각 10위, 15위에 그쳤다. 1500m 디비전A에도 김보름은 출전했으나 1분58초43의 기록으로 10위에 머물렀다.<ref name=":10">{{웹 인용|url=http://sbssports.sbs.co.kr/news/news_content.jsp?article_id=S10002306875|제목=김보름, 빙속월드컵 매스스타트서 두 번째 金... 이승훈 부진|언어=ko|확인날짜=2017-03-13}}</ref> 10일 열린 30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4분13초04로 13위에 머물렀다. 2013년 3월 1일 독일 에르푸르트에서 열린 월드컵 8차 대회 5000m 디비전A에서 김보름은 7분41초22로 11위를 차지했다. 2일 열린 1500m 디비전A에서는 김보름이 2분02초80으로 18위를 차지했다. 2013년 3월 9일 네덜란드 히렌빈에서 열린 월드컵 파이널 3000m에서 김보름은 4분08초51로 8위를 차지하며 185점 10위로 시즌을 마쳤다. 10일 열린 1500m에서는 김보름이 2분00초58로 16위를 차지하며 133점 13위로 시즌을 마쳤다.<ref name=":24" /> 매스스타트에서는 김보름이 3위로 골인했지만 앞서 치른 2차와 7차 월드컵에서 1위를 한 바 있어 총점 365점으로, 330점에 그친 마리스카 후이스만(네덜란드)을 제치고 종합우승의 쾌거를 달성했다.<ref name=":12">{{뉴스 인용|url=http://m.blog.naver.com/woorikangsan/20201685972|제목=한국 빙상 유망주 - 김보름 선수,한국, 토렌티노 동계 U대회 종합 3위…빙속 김보름 최다 메달 획득,|뉴스=네이버 블로그 {{!}} 사진과 여행하기|언어=ko|확인날짜=2017-03-13}}</ref>
         2013년 1월 7일 태릉국제스케이트장에서 열린 제43회 회장배 전국남녀 스피드스케이팅대회 1500m에서 김보름은 2분02초34의 대회신기록으로 1위를 차지했다.<ref>{{웹 인용|url=http://result.sports.or.kr/sk/schedule_result.jsp?classCd=1&toCd=201216&detailClassCd=03&rhCd=19&page=14&gameDate=&baseClassName=1500M&rhName=%EC%A2%85%ED%95%A9&kindCd=09&kindNm=%EC%97%AC%EC%9E%90%EB%8C%80%ED%95%99%EB%B6%80&pcntGbn=I&useGbn=|제목=정보제공 _ 대한빙상경기연맹|확인날짜=2017-04-04}}</ref> 8일 열린 1000m에서는 김보름이 1분20초37로 1위를 차지했다.<ref>{{웹 인용|url=http://result.sports.or.kr/sk/schedule_result.jsp?classCd=1&toCd=201216&detailClassCd=02&rhCd=19&page=14&gameDate=&baseClassName=1000M&rhName=%EC%A2%85%ED%95%A9&kindCd=09&kindNm=%EC%97%AC%EC%9E%90%EB%8C%80%ED%95%99%EB%B6%80&pcntGbn=I&useGbn=|제목=정보제공 _ 대한빙상경기연맹|확인날짜=2017-04-04}}</ref> 팀추월에서는 박도영, 김보름, 임정수로 구성된 한국체육대학교팀이 3분11초86으로 1위를 차지했다.<ref>{{웹 인용|url=http://result.sports.or.kr/sk/schedule_result.jsp?classCd=1&toCd=201216&detailClassCd=08&rhCd=19&page=14&gameDate=&baseClassName=6%EC%A3%BC%20%ED%8C%80%EC%B6%94%EC%9B%94&rhName=%EC%A2%85%ED%95%A9&kindCd=09&kindNm=%EC%97%AC%EC%9E%90%EB%8C%80%ED%95%99%EB%B6%80&pcntGbn=T&useGbn=S|제목=정보제공 _ 대한빙상경기연맹|확인날짜=2017-04-04}}</ref>
         2013년 3월 21일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2013 국제빙상경기연맹 스피드스케이팅종목별세계선수권대회 3000m에서 김보름은 4분12초69로 9위를 차지했다. 22일 열린 1500m에서는 김보름이 1분59초15로 11위를 차지했다.<ref name=":24" /> 24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김보름-노선영(용인시청)-박도영(한국체대)로 구성된 팀추월 대표팀이 3분05초32의 기록으로 네덜란드(3분00초02), 폴란드(3분04초91)에 이어 3위에 올라 사상첫 팀추월 메달을 획득했다.<ref>{{뉴스 인용|url=http://sposworld.tistory.com/513|제목=2013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 이상화,모태범 2연패 달성|날짜=2013-03-25|뉴스=스포츠 월드|확인날짜=2017-03-13}}</ref>
         2013년 10월 23일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국제스케이트장에서 열린 제48회 전국남녀 종목별스피드스케이팅선수권대회 3000m에서 김보름(20)은 4분18초89로 결승선을 통과해 1위에 올랐다. 박도영(20-한국체대)이 4분21초30으로 2위에, 노선영(24-강원도청)이 4분21초37로 3위에 등극했다.<ref>{{웹 인용|url=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31023_0012457099&cID=10501&pID=10500|제목=::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성=NEWSIS|언어=ko|확인날짜=2017-03-13}}</ref> 25일 열린 1500m에서는 김보름이 2분02초44의 대회신기록으로 노선영(강원도청-2분02초77)을 제치고 우승했다. 5000m에서도 김보름은 이주연이 2008년 남긴 기존 대회기록(7분46초20)에 7초가량 앞선 7분39초14로 우승, 3광왕의 영예를 안았다. 여자 1500m 및 3000m에서는 팀추월 우선선발 대상자인 김보름과 노선영, 박도영(한국체대) 외에 양신영(전북도청), 전예진(한국체대)이 월드컵 엔트리에 포함됐다.<ref name=":11">{{뉴스 인용|url=http://www.segye.com/content/html/2013/10/25/20131025004859.html|제목=[종별빙속] 모태범·이승훈 나란히 2관왕…김보름 3관왕|성=세계일보|날짜=2013-10-25|뉴스=[종별빙속] 모태범·이승훈 나란히 2관왕…김보름 3관왕 - 세상을 보는 눈, 글로벌 미디어 - 세계닷컴 -|확인날짜=2017-03-13}}</ref>
         2013년 12월 13일 이탈리아 트렌티노의 바셀가디피네아이스링크경기장에서 열린 제26회 트렌티노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1500m 경기에서 김보름은 2분1초19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같은 경기에 출전한 양신영, 박도영은 각각 5위, 6위를 기록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newswire.co.kr/newsRead.php?no=728148|제목=제26회 트렌티노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스피드스케이팅, 대회 첫 메달 획득|날짜=2013-12-15|뉴스=보도자료 배포, 온라인 보도자료 등록, 홍보 대행 - 뉴스와이어|언어=ko|확인날짜=2017-03-13}}</ref> 15일 열린 3000m에서는 김보름이 은메달을 땄다. 18일 열린 5000m에서도 김보름이 7분17초82만에 결승선을 통과, 마르티나 사브리코바(체코, 7분05초17)에 이어 은메달을 획득했다. 동반 출전한 박도영(한국체대)은 7분26초58의 기록으로 3위에 올랐다.<ref>{{뉴스 인용|url=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3121810402676378|제목=김보름·박도영, 동계U 빙속 여자 5,000m 은·동메달|날짜=2013-12-18|확인날짜=2017-03-13}}</ref> 20일 열린 팀추월에서는 김보름과 박도영(20-한국체대), 양신영(23-전북도청)의 여자대표팀이 3분06초53으로 결승선을 통과, 일본(3분11초39)을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ref>{{뉴스 인용|url=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31221024004|제목=소치올림픽 금물결 꿈틀|뉴스=서울신문|언어=ko|확인날짜=2017-03-13}}</ref>
         2014년 2월 9일 러시아 소치 아들레르 아레나서 열린 소치 동계올림픽 3000m 부문에서 김보름(21)은 4분12초08의 기록으로로 13위를 차지했다. 이날 3조로 경기를 치른 김보름은 21초05로 200m 구간을 통과한 후 2분31초34로 1800m 구간을 지났다. 이후 2200m 구간 통과 순간부터 스피드를 올리며 후반 들어 스퍼트를 올렸고, 결국 하위권이 아닌 중위권 기록을 남겼다. 김보름의 순위인 13위는 지난 2006 토리노 올림픽, 2010 밴쿠버 올림픽 당시 노선영(25-강원도청)이 기록한 19위를 넘어 한국 여자 3000m 부문의 가장 높은 순위다. 5조의 노선영은 4분19초02를 기록했다. 노선영은 200m 구간에서 21초32의 기록으로 지난 이후 속도를 올리지 못한 채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결국 노선영은 전체 26위의 성적을 남기며 경기를 마쳤다. 6조에서 경기를 소화한 양신영(24-전북도청)은 4분23초67을 기록해 이날 대회를 뛴 28명 중 최저의 기록을 남겼다. 한편 이날 대회는 4분00초34의 이레네 부스트(네덜란드)가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이후 8년 만에 금메달을 다시 가져갔다. 대회 2연패를 노린 2위 마르티나 사블리코바(체코-4분01초95)와 3위 올가 그라프(러시아-4분03초47)에 앞선 기록이다.<ref>{{웹 인용|url=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441654|제목=(소치올림픽)김보름,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3000m 13위..금메달 부스트|확인날짜=2017-03-21}}</ref> 16일 열린 1500m에서는 네덜란드의 요리엔 테르모르스가 1분53초51의 올림픽 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은메달과 동메달도 네덜란드 선수들이 휩쓸었다. 은메달은 이레인 뷔스트(1분54초09)에게 돌아갔고 동메달은 하를로터 판바이크(1분54초54)가 주인이 됐다. 심지어 4위도 네덜란드 선수인 마리트 리엔스트라(1분56초40)가 차지했다. 김보름은 1분59초78로 21위에 올랐다. 노선영(25-강원도청)은 2분01초07로 29위, 양신영(24-전북도청)은 2분04초13으로 최하위인 36위에 그쳤다.<ref>{{웹 인용|url=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EB33&newsid=01079126605991504&DCD=A20402|제목=[소치올림픽]테르모르스, 전날 쇼트트랙 뛰고 빙속1500m 올림픽新 금|성=포털|이름=Ⓒ 함께 만들고 함께 즐기는 엔터테인먼트|성2=무단전재|이름2=‘이데일리 스타in’-|날짜=2014-02-17|확인날짜=2017-03-21|성3=금지|이름3=재배포}}</ref> 김보름은 무릎 통증이 있어 5000m를 기권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segye.com/content/html/2014/02/19/20140219004640.html|제목=빙속 김보름, 女 5000m 기권…팀추월 집중|성=세계일보|날짜=2014-02-19|뉴스=빙속 김보름, 女 5000m 기권…팀추월 집중 - 세상을 보는 눈, 글로벌 미디어 - 세계닷컴 -|확인날짜=2017-03-13}}</ref> 22일 열린 팀추월 파이널D(7-8위 결정전)에서 김보름, 노선영(25, 강원도청), 양신영(24, 전북도청)이 나란히 달린 여자 팀추월 대표팀은 노르웨이에 져 8위로 대회를 마쳤다. 전날 8강전에서 일본에 져 준결승 진출에 실패한 여자 대표팀은 이날 3분11초54만에 마지막 주자가 결승선을 통과해 3분8초35를 기록한 노르웨이에 패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newsway.co.kr/view.php?tp=1&ud=2014022223322278172|제목=김보름·노선영·양신영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팀추월 8위에 그쳐|뉴스=뉴스웨이|확인날짜=2017-03-13}}</ref>
  • 이강돈 . . . . 48회 일치
          * [[야구 관련 인물(KBO)]]
         || 학력 || 포항청림초 - 포항중 - [[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대구상고]] - [[건국대학교|건국대]] ||
         || 프로입단 || ~~[[한국프로야구/1985년/신인드래프트|1985년]] 1차 지명 ([[삼성 라이온즈|삼성]])~~ [br] [[한국프로야구/1985년/신인드래프트|1985년]] 지명권 양도 ([[빙그레 이글스|빙그레]]) ||
         || 지도자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연수코치 (1998) [br] [[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1999) [br] [[한화 이글스]] 2군 주루코치 (2002~2003) [br] [[롯데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2004) [br] [[청주기계공업고등학교 야구부|청주기계공업고등학교]] 감독 (2006~2008) [br] [[청주고등학교 야구부|청주고등학교]] 감독 (2008~2009) [br] [[롯데 자이언츠]] 2군 타격코치 (2010~2012) [br] [[천안 북일고등학교 야구부|북일고등학교]] 감독 (2013~2016) ||
         |||||||||||||||||| '''1988 ~ 1990년 [[KBO 리그|한국프로야구]] [[외야수]] [[KBO 골든글러브|골든글러브]] 수상자''' ||
         |||||||||||| '''1989, 1990년 [[KBO 리그|한국프로야구]] 최다 안타상''' ||
         |||||||||||| '''1990년 [[KBO 리그|한국프로야구]] 득점왕'''[* 최다 득점 부문은 1999년에 신설] ||
         |||||||||||| '''1993년 [[KBO 올스타전|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 미스터올스타''' ||
         오랫동안 빙그레-한화에서 선수 생활을 했기 때문에 대전 사람으로 아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포항 사람이다. [[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대구상고]](1978년~1981년 졸업)를 졸업하고 [[건국대학교]](1981학번)에 진학했는데, [[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대구상고]] 시절에 비해 [[건국대학교]]에서 기량이 일취월장하면서 [[1984 LA 올림픽]] 국가대표[* 이 당시에는 야구는 시범종목이었다.]로 발탁되는 등, 일약 대학 무대 최고의 톱 타자 중 한 명으로 성장했다.
         당시 드래프트 제도상 대구 지역의 선수는 [[삼성 라이온즈]]가 우선권을 가졌는데, 여기서 삼성이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지명해 놓고서는 이강돈에게 먼저 군대를 갔다 오면 입단시켜 주겠다고 한 것. 다른 선수에게는 관대하게 입단 조건을 걸고서, 유독 자신만 군대를 걸고 넘어지는 것에 화가 난 이강돈은 전격적으로 빙그레와 입단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드래프트의 질서를 해치는 이 행동은 '''그냥 넘어갔다.'''[* 그렇긴 한데, MLB에서 [[스캇 보라스]]의 유명세를 알린 loop hole FA사건 원인이 드래프트 지명 후 15일 안에 구두로든 서면으로든 계약하겠다는 의사를 선수에게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약 의무 불이행이므로 계약 무효를 주장한 것이 받아들여져서인 만큼, 삼성 측이 계약하지 않고 군입대를 제안한 것이 의무 불이행으로 해석될 가능성 때문에 법적 공방 들어가도 이강돈에게 승산이 있는 사안이었다. 한국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겠지만.]
         왜냐면 당시 빙그레는 막 생긴 신생팀으로서 기존의 6개 구단들보다 전력이 한참 빈약했기 때문이었다.[* 원년 참가 팀들을 제외하고, 1군 첫 시즌을 보낸 팀들 중 최저승률 기록을 갖고 있다.] 여기에 당시 빙그레의 초대 단장인 노진호는 바로 직전까지 삼성에서 [[프런트]]로 일하던 사람이었다. 결국 삼성은 전관예우 + 신생 구단에게 선심쓰는 차원에서 무상으로 그의 지명권을 양도했다. 그래서 이강돈은 빙그레에 입단할 수 있었고, 프로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드래프트 질서를 거부하고도 별 일 없는 선수가 되었다.
         빙그레에서 이강돈은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데뷔 첫 해 .297의 타율을 기록하면서 빈약했던 빙그레 타선의 희망으로 떠오른 것이다. 비록 신인상은 [[MBC 청룡]]의 에이스로 급부상한 [[김건우]]에게 내줬지만, 이강돈은 빙그레의 주축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정훈(1963년생)|이정훈]], [[장종훈]], [[강정길]], [[이중화]]같은 선수들이 합류하면서 신생 빙그레는 일약 다이너마이트 타선으로 불리며 프로야구를 풍미하기 시작했고, 막강 해태에 도전장을 내미는 팀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빙그레는 결국 해태의 벽을 넘지 못하며 1988, 1989, [[1991년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패했고, 1992년에는 정규시즌 1위를 차지하고도 3위로 올라온 [[롯데 자이언츠]]에게 패하면서 또 다시 한국시리즈에서 고배를 마셨다. 이 때 이강돈은 모두 출전했고, 그리고 이강돈이 은퇴한 시기가 1997년이니 이강돈은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한 채 선수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비록 한국시리즈 우승은 못 했지만, 선수 시절 이강돈은 1번 [[이정훈(1963년생)|이정훈]]의 뒤를 받치는 강한 2번 타자로서 맹활약했다. 1990년에는 .335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7사 차이[* 할푼리모 다음 오는 단위가 사. 1모 차이가 났다고 서술되어 있었지만 반올림하면 0.3349로 모 단위까지 똑같았다.]로 [[한대화]]에게 밀려 타격 1위를 놓쳤고,[* [[한대화]] 0.334928, 이강돈 0.334862.] 1992년에는 다시 .320의 타율을 기록했다.
         특이한 기록도 두 가지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1987년 8월 27일 [[OB 베어스|OB]]전에서 수립한 프로야구 통산 2번째 [[사이클링 히트]] 기록이다. 그런데 이강돈은 전날 저녁, 다음 날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만 믿고 밤새 술을 들이붓고 고주망태가 되었는데, 정작 경기 당일 비가 오기는 커녕 쨍쨍한 날씨인지라 정상적으로 경기가 거행되었다. 당연히 [[숙취]]에 찌들어 고통스러워하던 이강돈은 대충 휘두르고 죽자는 생각으로 출장했지만 뜻밖에도 홈런에 2루타, 번트 내야안타, 3루타를 차례로 때려내며 대 기록을 작성하였다. 나중에 이강돈은 사이클링 히트 기록에 대한 소감으로 "술기운이 남아서인지 공이 수박만하게 보이더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마찬가지로 술기운에 7타수 7안타 날린 [[오시타 히로시]]와 오버랩된다~~
         은퇴 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다이에 호크스]]에서 연수를 받고 한화의 코치로 부임했으나, 한화에서 롱런하지 못했다. 그 뒤 [[청주고등학교 야구부|청주고]] 감독도 잠시 역임했다가 [[롯데 자이언츠]]로 건너가서 타격코치로 재임했다. 그러나 프로구단 코치로서는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2 시즌 종료 후에는 [[이정훈(1963년생)|이정훈]] 前 북일고 감독이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에 선임되면서, 그의 후임으로 [[천안 북일고등학교 야구부|북일고]] 감독에 선임되었다.
         2013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북일고를 이끌고 결승까지 올라가 지역 라이벌인 [[공주고등학교 야구부|공주고]]와 맞붙었는데, 0:4로 끌려가던 중 상대 [[선발 투수|선발]]인 [[김훈호]]의 볼질로 한점차까지 따라간 상황에서 뜬금없는 스퀴즈를 지시했다. 결과는... 결국 준우승에 머물렀다.[* 공주고는 [[김경문]]이 활약하며 [[MVP]]로 선정됐던 1977년 이후 36년만의 대통령배 우승이었다. 이 날 경기는 월요일에 목동야구장에서 진행되었으며 공주고 동문인 손혁, 박정배, 조동화가 와서 관전했다. 박찬호는 아예 덕아웃 옆에 있었고...]
         2016년 10월 말에 북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에서 물러나고, [[대전MBC]]에서 프로야구 중계를 기존의 여정권[* 현직 체육교사(체육학 박사)] 해설과 로테이션으로 담당하게 되었다. 2013년 홈경기 임시 해설 이후 4년만.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분류:포항시 출신 인물]] [[분류:1961년 출생]] [[분류:타자]] [[분류:외야수]] [[분류:좌투좌타]]
  • 정형돈 . . . . 45회 일치
         정형돈은 경북 김천에서 출생하였고 한때 [[경상북도]] [[김천시|김천]]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아직 초등학교 입학하기 이전에 [[경상북도]] [[김천시]]으로 옮겨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보냈다.<ref>{{뉴스 인용|제목='불안장애' 정형돈은 누구? '웃기지 않은 개그맨'에서 '예능계 4대천왕' 섭렵|url=http://entertain.naver.com/read?oid=082&aid=0000550194|출판사=부산일보|저자=김상혁 기자|날짜=2015-11-12}}</ref> 고교 시절 '금강 소리 하나'라는 교내 연극부에서 학년 대표를 맡아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94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한예총]] 산하 6개 지부가 주관한 제8회 '부산 청소년 예술제'에 참가하여 '청소년 연극축전' 부문에서 '연기상'을 수상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부산시 고등학교 대표로 서울에서 개최된 '동랑 청소년 연극제'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2009년]] [[9월 13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컨벤션센터에서 [[SBS TV|SBS]] 미스터리 특공대에서 만난 [[작가|방송작가]] [[한유라]]와 결혼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정형돈-한유라, 동료 연예인 축복 속 웨딩마치(종합)|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100&g_serial=442470|출판사=조이뉴스24|저자=이미영 기자|날짜=2009-09-13}}</ref>
         [[2012년]] [[12월 11일]] 오전 6시11분, 13분에 태어난 두 딸(유주, 유하)의 아버지가 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단독] 정형돈, 쌍둥이 아빠 되다.. 딸부자 등극|url=http://cast.wowtv.co.kr/20121211/A201212110127.html|출판사=|저자=한국경제TV 기자|날짜=2011-12-11|확인날짜=2012-12-11|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21214052956/http://cast.wowtv.co.kr/20121211/A201212110127.html|보존날짜=2012-12-14|깨진링크=예}}</ref> [[2016년]] [[10월 5일]], [[주간 아이돌]]로 전격 복귀하였으며, [[신현준 (1968년)|신현준]]과 한중 합작 영화 시나리오 공동 집필을 시작으로 작가로서의 데뷔를 알렸다.
         === 현재 출연중인 프로그램 ===
         === 종영 또는 출연을 중단한 프로그램 ===
         ! 프로그램
         * [[KBS]] 《[[비타민 (텔레비전 프로그램)|비타민]] - 건강대장부》
         * [[MBC]] 《[[토요일 (텔레비전 프로그램)|토요일]] - [[무모한 도전]]》
         * [[MBC]] 《[[토요일 (텔레비전 프로그램)|토요일]] - [[무리한 도전]]》
         * [[MBC]] 《[[느낌표 (텔레비전 프로그램)|!느낌표]] - 위대한 유산 74434》
         ! 2009년
         * [[Mnet]]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텔레비전 프로그램)|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 [[스토리온]] 《소아비만 탈출 프로젝트 - 수퍼키즈》
         === 기타 출연 프로그램 ===
         ! 프로그램
         * [[MBC]] 《대국민 건강프로젝트 슈퍼맨 (8월 21일) : MC》
         * [[MBC]] 《일밤 958회 - 넌센스왕 : 파일럿 프로그램 (2월 10일) : 게스트》
         * [[MBC]] 《2008 베이징올림픽 - 女핸드볼예선 한국:헝가리 / 전반전 (8월 17일) : 해설 보조》
         ! 2009년
         * [[MBC]] 《제38회 한국방송대상 (9월 2일) : 오프닝무대 보컬 및 시상자》<ref>{{뉴스 인용|제목=파리돼지앵 정형돈-정재형 ‘순정마초’ 생방송 공연, ‘무도’ 이후 처음 방송(한국방송대상)|url=http://media.daum.net/entertain/enews/view?cateid=1032&newsid=20110902151739420&p=newsen|출판사=뉴스엔|저자=최신애 기자|날짜=2011-09-02}}</ref><ref>{{뉴스 인용|제목=한국방송대상 시상맡은 정재형-정형돈 ‘손잡고 입장~’|url=http://media.daum.net/entertain/enews/view?cateid=1032&newsid=20110902152349207&p=newsen|출판사=뉴스엔|저자=정유진 기자|날짜=2011-09-02}}</ref>
  • 표창원 . . . . 44회 일치
         || '''약력''' ||<(> [[대한민국 경찰청|경찰청]] 제도개선기획단 연구관[br][[경찰대학]] 행정학과 교수[br]한국경찰발전연구회장[br]아시아경찰학회장[br]표창원범죄과학연구소장[br]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 ||
         [[대한민국]]의 [[형사]] 출신[* 1989년 임용.] 경찰학자[* 프로파일러, 범죄심리학자로 흔히 알려져있으나 일선에서 범죄심리분석관으로 근무한 적은 없다. 주 전공은 사회학이고 그걸로 학위를 받은 [[경찰학]] [[박사]]이다. 실제 일선에서 근무했던 범죄심리분석관들의 여러 인터뷰에서도 범죄학자이지 프로파일러는 아니라고 하고 있다. 그의 주 전공은 경찰학이다. "Doctor of Philosophy in Police Studies in the Faculty of Social Studies" [[RISS]]에서 검색하는 내용을 봐도 경찰학 전문가가 맞으며 표창원이 낸 교양책을 봐도 경찰학 중심이다.], 정치인.
         정계입문 이전에 국내에서 가장 지명도 있는 프로파일러, 범죄학자로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오랫동안 [[경찰대학]] 교수로서 교편을 잡았다가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인재영입위원장의 영입 제안을 받아들여 민주당에 입당했다. 이후 그 동안 갈고 닦은 지명도로 [[20대 총선]]에서 [[경기도]] [[용인시]] 정 선거구에 출마해 51.6%의 비교적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박사학위청구논문의[* 'The police and crimewatch UK : a study of the police use of crime reconstruction and witness appeal programmes in Britain'] 주제만 놓고 보면 봤을 때, 표창원의 원래 전공분야는 미디어 매체[* [[http://www.bbc.co.uk/programmes/b006ppmq|Crimewatch UK]]는 우리나라의 [[경찰청 사람들]], [[공개수배 사건25시]]와 비슷한 TV 프로그램이다.]와 경찰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학위청구논문 이후의 연구 성과에 따라서 전공분야가 조금씩 바뀌기도 한다. 표창원 박사의 경우 형사사법분야의 전반에 걸쳐서 연구를 하는 편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경찰에서는 [[경찰대학]] 졸업생 중 유학한 경찰들을 통해서 내부역량을 높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유학을 갔다온 경찰대 졸업생들의 논문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대개 집회시위법, 행정법, 형사절차 or 형사법에 관한 논문이 많다. 물론 표창원 박사도 마찬가지였다.] 세간에는 범죄심리학(criminal psychology)이나 프로파일링(Profiling) 전문가로 유명하지만 그가 이 분야에 대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증거는 없고 이에 관한 전문적 연구 또한 미미하다.[* 여담으로 국내에서 활동하는 범죄심리학(Forensic psychology) 박사학위자는 [[숙명여자대학교]] 사회심리학과에 재직중인 [[박지선(교수)|박지선]] 교수가 있다.]
         경찰관 퇴직 범죄심리분석 자문위원으로 활동[* 일선 "범죄심리분석관"은 아니고 경찰관 시절에는 수사관으로, 교수 시절에는 범죄심리분석 지원을 위하여 파견된 형식으로 활동한 것이다.]하면서 본격적으로 [[강호순]] 사건, [[발바리]] 사건 등 많은 유명 주요 범죄사건 해결에 기여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014년 [[무한도전]] [[무도탐정사무소]]에 출연하여 멤버들에게 프로파일링을 짧게 강의하였으며, [[유재석]]을 무지막지하게 몰아붙이는 등 중년의 폭풍간지를 보여주었다. 다른 멤버들은 '드디어 유재석도 혼나는구나' 하고 좋아 죽는 중이었다고.
         JTBC의 [[크라임씬2]]와 [[크라임씬3]]에서는 탐정역으로 출연했다. 프로파일러 답게 용의자들을 들었다 놨다하며 수사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시즌 2의 크라임씬 PD 살인사건 1만 범인을 맞췄을뿐 PD 살인사건 2와 3 호텔 살인사건은 헛다리만 짚었다. 전문가답게 깊이 있게 생각했지만 맡은 사건이 그렇게 깊이 있는 내용이 아니여서 그런지 영 시원치 않았다.
         이 당시 나온 대중성 있는 저서로는 [[http://www.yes24.com/24/Goods/1506195?Acode=101|한국의 연쇄살인(2005年)]]이 있다. 살인 사건을 다루는 내용에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지만, 무척 흥미진진하다. 초심자도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가독성 좋고 간결하면서 유려한 문체[* 이는 글 쓰기, 잘 팔리는 책이 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어려운 법률 용어, 현장 용어나 한자말을 피하고 중학생 정도 학력이면 이해할수 있을만큼 정말 쉼게 썼다.] 로 한국 근 현대사에서 유명한 여러 연쇄살인 사례들을 다루었다. 단 유혈이 낭자한 당시 현장 사진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고 (다행히 컬러 사진은 아니다)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되어 있어 19세 미만 구입 불가 딱지를 붙여놓은 곳이 많다. 경찰 출신이다 보니 비슷하게 여러 사건 사례를 자세히 다루는 법의학 책과는 다른 시각으로 글을 써서, 보기에도 신선한 것이 그의 장점이기도 하다. 그 외에는 유제설 교수와 공저한 [[http://www.yes24.com/24/goods/6103472?scode=032&OzSrank=1|한국의 CSI(2011年)]] 또한 과학 수사에 대한 교양 서적으로 읽기 매우 좋은 책이다. 그의 책은 어디까지나 교양 서적이다 전문 서적 아니다. 그렇다고 재미를 추구한 책은 아니다. 내용이 실제 살인 사례이다 보니...
         방송 쪽으로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와 같은 범죄 관련 프로그램에 단골로 출연하여 유명해졌고, 케이블 채널의 <살인자는 말한다>등의 자기 이름을 걸고 나오는 프로를 진행한 적도 있다. 2012년 경찰대학 정교수 퇴직 이후에는[* 개인 [[블로그]] 및 [[트위터]]를 통해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의혹]]에 대한 견해를 표명하는 과정에서 돌연 "경찰대의 정치적 중립성을 침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경찰대학 교수직을 사퇴했다.] [[JTBC]] [[표창원의 시사 돌직구]]라는 프로그램에 MC로 발탁돼 방송인을 겸했으며, 범죄심리분석 전문가로서의 행보는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 대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면서 본 문서에서도 여러 차례 지적했던것 처럼, "저명성에 걸맞는 전문성을 갖추고 있냐."는 지적들이 나왔지만, 어쨌거나 [[대한민국]]에 프로파일 기법이나 범죄자에 대한 복합적 연구를 처음으로 대중화한 점에서 공로가 있다는 것은 인정 받고 있다.
         정계 입문 이후 여러 [[종편]]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민주당 변호인을 활약했다. 특히 2015년 12월 30일 '[[문재인]] 대표가 [[일본]]이 숨긴 금괴 1,000톤을 갖고 있다'는 루머를 맹신했던 어느 60대 남성이 문 대표의 [[사상구]] 사무실에 난입해 인질극을 벌인 사건을 두고 [[MBN]]의 [[김형오(1972)|김형오]] 앵커가 '문재인 대표에게 잘못이 있는 것 아니냐'며 [[답정너]]식으로 질문을 하자 "그럼 2006년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커터칼 피습을 당한 건 (그 피습범이 정신병자였기 때문이지) 박근혜 당시 대표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인가요?"라는 반문~~이건 몰랐지?~~으로 앵커를 [[역관광]]시켜--사실 [[마마무|음오아예]]를 부르게 한 거라더라-- [[더불어민주당|더민주]] 지지층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http://tvcast.naver.com/v/676104|네이버]] [[http://tvpot.daum.net/v/73446472|다음]] [[http://www.gomtv.com/view.gom?contentsid=14150137|곰TV]])[* 보도 자막이 포함된 인터뷰 전체 영상은 [[http://www.mbn.co.kr/pages/vod/programView.mbn?bcastSeqNo=1114977|MBN 홈페이지]]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57&aid=0000871698|네이버]],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51231111239813|다음]], [[http://news.nate.com/view/20151230n53189|네이트]] 등에 올라와 있다.]
         [[TV조선]]의 인기 시사 예능 프로그램인 [[강적들]]의 5월 5일자 방송에 특별 게스트로 출연하였다. 이날 출연한 다음에는 아예 고정 게스트로 계속 출연을 이어오고 있다가 의정 활동에 집중하기 위하여 하차하였다.
          * 범죄심리분석 더 프로파일러 (채널뷰)
          * [[비정상회담]] 70화 한국 대표
         [[종합편성채널]]의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종편 패널이나 사회자와 논쟁하는 경우가 많다.([[https://www.youtube.com/watch?v=FGzyjX9o2Ug|TV조선]],[[https://www.youtube.com/watch?v=OxhQGaozrkk|MBN]],[[https://www.youtube.com/watch?v=j4-rdDuIjkM|JTBC]])
         2015년에는 [[하이트진로]] [[맥주]] CF에 섭외되었으며 혼자 맥주 마시는 사람을 추적하는 프로파일러 역할을 했다.
          *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데, 범죄심리학은 경찰학(Police science)의 한 분파가 아니다. 정확히는 심리학에서 출발한 심리학의 응용분과이다. 물론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arity)가 학계의 추세이지만 경찰학과 범죄심리학은 엄연히 다른 분야다. 오히려 경찰학은 예방과 인권보호를 중심으로 하기에 형사절차(Criminal procedure), 범죄학(Criminology)과 관계가 깊다. 따라서 법학, 사회학에 영향을 크게 받았다. 한편 범죄심리학은 법정공방이나 피의자 및 피해자 증언. 그리고 데이터 베이스 구축을 통한 귀납적 추리를 하는 프로파일링과 연관되며 이들은 모두 인지심리학, 사회심리학 등 심리학을 기반으로 응용된 분과이다. 물론 이런 분류를 할 수도 있겠지만, 범죄학이라 하여서 심리학 부분이 없는 게 아니다! 즉, 범죄를 다루는 모든 분야가 범죄학 범주에 속한다 할 수 있다. 형법의 형벌론이라든가, 사회학의 일탈 이론이라든가, 심리학의 인지, 학습 분야라든가... 다만 현재 범죄학 중심이론들이 사회학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범죄학을 사회학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다.
         경찰대학 교수 시절까지만 해도 날카로운 분석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지상파 시사 프로그램에서 많은 인지도를 얻었으나 후술하게 될 사건들로 하여금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호불호]]가 극명으로 갈린다.
         >'매스미디아가 보여주는 범죄'에 대한 오랜 관심과 우려는 흥미거리만을 �는 매스미디아의 '선택적 특성'과 이러한 보도가 사회의 범죄문제에 끼칠 잠재적 영향력 때문인데, 그간의 숱한 미디아 프로그램 분석들은 거의 이구동성으로 미디아에 나타난 범죄가 특정한 범죄 - 강력사건 -에 편중되어 있으며 범죄문제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비판적 범죄학자들은 매스미디아가 범죄문제를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현상'으로 규정지으며 사회일반으로부터 격리시킴으로써 오히려 사회의 범죄문제를 악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중매체上의 폭력'은 오랫동안 학계와 일반대중의 관심과 우려의 대상이었다. 특히나 엽기적인 강력사건이 일어나는 상황을 생생히 보여주거나 재구성하여 보여주는 TV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1980년대 이후에는 '미디아 폭력'을 둘러싼 논란이 더욱더 뜨거워지고 있다. 영국에서는 1984년 BBC 방송국이 경찰의 도움을 얻어 미해결된 강력사건을 재구성하여 보여주며 목격자나 제보자를 찾는 'Crimewatch UK'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프로가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며 성과를 거두자 기타 민방들에서 유사한 프로그램들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런 유형의 프로그램의 原型은 1960년대에 시작된 독일 ZDF 방송국의 "미해결사건 XTZ..."이며 영국 BBC에서 도입한 이후 미국, 네덜란드, 핀란드, 러시아, 한국 등 세계각국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그러나, 지대한 대중적 관심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프로그램의 제작과정과 내용, 사회적 파급효과 등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아직까지 미미한 실정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의 제작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요소가 경찰이다. 경찰은 이 프로그램들에 범죄사건에 대한 자세한 정보와 경찰관 및 경찰장비를 제공해 준다. 경찰의 입장에서 보면 이 프로그램들은 사건해결의 유용한 도구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홍보매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범죄 재구성' 프로의 범람에 대해 "남의 불행을 보고 즐기는 일종의 '관음증'을 조장하며 독거노인, 여성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불필요한 공포를 확산시키고 강력범죄 피해자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며 일반대중의 범죄에 대한 공포를 확산시키고 강력범죄 피해자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며 일반대중의 범죄에 대한 공포심을 이용하여 시청률 올리기에만 치중하는게 아니냐"는 방송의 윤리에 대한 심각한 질문이 그간 심심찮게 제기되어 왔다. 방송사들은 이에 대해 "범죄퇴치에 협력한다는 공익에 이바지할 뿐"이란 논리로 대응해 왔다. 높은 시청률과 시청자의 신고가 주요범죄를 해결했다는 주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법집행의 대명사인 경찰의 걍력한 지지가 이러한 '공익논리'를 받쳐주는 주요요소이다. 본 논문은 영국전역에 산재한 28개 지방경찰청, 내무성 경찰국, BBC Crimewatch UK 제작팀, 민간기구인 Crimestoppers Trust 등 30여 관련기관을 방문, 60여명에 이르는 관계자와의 심도깊은 면담 및 관련자료 분석결과와 13편의 Crimewatch 프로그램 분석 결과를 종합분석하여 '범죄 재구성'프로그램인 Crimewatch UK를 통해서 본 영국경찰의 매스미디아관련 정책과 실행, BBC방송국의 다큐멘타리 제작 지침과 실태상의 불일치를 비판적으로 조명해 보았다.
         이후 한국에서 여러 논문을 냈다.
         >영국사례의 검토를 통한 한국 경찰의 가정폭력 대응능력 제고방안 = A Critical Review on the Capabilities of Korean Society in Dealing With the Problem of Domestic Violence-Centering on the Area of Policing, 2000
         >한국 사회의 가정폭력 대응능력 제고 방안 -영국사례의 검토를 통한 경찰상의 개선책을 중심으로-, 2001
  • 강영식 . . . . 43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 top1=야구 관련 인물(KBO))]
         ||<-2><table align=right><#000000> {{{#FFFFFF 경찰 야구단 No.74}}} ||
         || '''학력''' || 칠성초-경복중-[[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대구상고]] ||
         || '''프로입단''' || [[한국프로야구/2000년/신인드래프트|2000년 2차지명 2라운드]] [br] (전체 10순위, [[해태 타이거즈|해태]]) ||
         || '''지도자''' || [[경찰 야구단]] 투수코치 (2018~) ||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
         ||<#074CA1> '''[[2002년 한국시리즈|{{{#FFFFFF 2002}}}]]''' ||
         || [[신동주(야구)|신동주]](1994~2000) || → || '''강영식(2001)''' || → || [[임창용]](2002~2006) ||
         前 [[롯데 자이언츠]] 소속의 [[야구]] 선수. 포지션은 [[투수]].
         140km/h 중반대의 빠른 공을 던진다는 강점을 갖고 있지만, 제구력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주무기는 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인 사실상 투피치 투수. 커브나 체인지업도 장착했지만 그다지 위력적이지는 못하다. 그래서인지 좌완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좌타자한테 약점'''을 보였다. 덕분에 최훈의 프로야구 카툰에서는 '''위장좌완'''이라고까지 불렸다(…).
         거의 190cm에 육박하는 장신에 140km/h대 중후반에 육박하는 빠른 공을 던지던 좌완 파이어볼러였던 그는 ~~덩치 큰 [[왼손잡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김응용 감독은 왼손잡이, 그 중에서도 곰처럼 덩치큰 왼손잡이 선수를 매우 선호했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우승을 그렇게 많이 해봤어도 그 라인업에서 투타 막론하고 좌완이라곤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나마 꾸준히 활용할 수 있었던 선수가 [[김정수(1962)|김정수]] 말고는 가물가물할 정도니... ] [[해태 타이거즈]]의 감독 [[김응용]]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직접 거둬서 [[햄]] 구워서 [[밥]]을 해 먹일 정도로''' 애정을 보였으며, 김응용 감독이 2001년 삼성 감독으로 가자 삼성의 주전 외야수였던 [[신동주(야구)|신동주]]를 보내면서까지 그를 삼성으로 데려올 정도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김응용]] 감독이 이 정도로 대놓고 애정을 보여준 선수는 거의 없다. 후에 강영식도 롯데로 트레이드될 때 눈물로 [[김응용]]에게 작별인사를 고했고, 여전히 꼬박꼬박 연락을 드린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때의 생활이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kbotown&mbsIdx=733693&cpage=&mbsW=&select=&opt=&keyword=|방송 캡쳐]]로 떠도는데, 옆에서 같이 밥 먹던 어린 선수는 당시 전도유망했던 투수 '''[[채태인]]'''이다. ~~역시 좌완성애자 코감독!~~]
         투수 오타쿠 [[선동열]]이 버릴[* 강영식은 훗날 [[선동열]] 감독이 자신에게 '사람이 해선 안 될 말'까지 서슴없이 하며 인격적으로 모독을 당했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강영식은 적어도 '''[[선동열]]이 있는 삼성'''에겐 미련이 없었다는 걸 볼 수 있다. 즉 [[선동열]]과 강영식 둘 다 서로 딱히 같이 동업할 이유도, 동기도 없었던 것이다.] 정도라는 삼성 팬들의 말이 있을 정도로 불안한 투구를 보였다. 어느 날인가도 ~~평소처럼~~ 마운드에서 부진한 뒤 라커룸에서 개털렸다고 한다. 강영식은 이날 털리면서 "아 나는 정말 여기까지인가보다"하는 자괴감이 들어 남들 보는 앞에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딱한 처지를 보고 코치들이 트레이드를 권유했고, 마침 좌완 [[중간계투]]가 없는 롯데와 짝이 맞으면서 트레이드 되었다. [[신명철]] 역시 롯데에서는 [[박정태]]의 후계자로 점찍었으나 공갈스윙만 하고 영 궤도에 못 오르는 2루수였기에 [[트레이드]] 시점부터 ~~둘 중 하나만 터져도 되니까~~ 윈윈으로 평가받은 특이한 사례다. 결론적으로 신명철은 [[박종호]]의 노쇠화로 인해 삼성의 주전 2루수로 활약하며 2009년 [[20-20 클럽]]도 가입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고 강영식도 롯데 불펜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니 나름 서로 윈윈한 트레이드인 셈. 롯데에서는 [[강병철의 양아들]] 시리즈에 들면서 매우 자주 등판했다. 사실 당시 롯데에 쓸만한 좌완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여담으로 [[삼성 라이온즈]]의 창단 첫 KS 우승이자, 드라마틱했던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의 승리 투수가 바로 강영식이다. 삼성에서 나름 의미있는 기록을 남긴 투수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다.
         하여간 프라이머리 셋업맨으로 롯데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며,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랜디영식을 찬양하였다. 그 당시 팬 사이에서는 롯데의 차기 [[마무리 투수]]로 생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괴상망측한 '우타자 더 잘잡는 좌완'[* [[KIA 타이거즈]]의 [[박경태(야구)|박경태]]도 이런 성향을 가진 좌완투수다.] 이라는 딱지는 떼지 못했다. 수치를 보면 좌타자에게 약한 것도 아니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삼성이 친정팀이다 보니까 [* 원래는 해태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출신지가 대구인데다 대구상고를 졸업, 여담이지만 삼성리틀야구단 출신이다. 흠좀무] 삼성 선수들을 잘 알고 있으며 2008 준 플레이오프 시작하기 전에는 삼성이 1선발 공개를 빨리 안 하자, 휴일에 [[배영수]]의 집 에다가 전화 걸어서 미리 배영수가 1선발 이라는 걸 알아냈다. 어떻게 알았는가 하니 원래 배영수는 휴일에 집에 잘 없는데 전화를 받아서 그때 낌새를 쳤다고 한다(...).
         [[염종석]]이 은퇴한 2009 시즌을 기점으로 [[롯데 자이언츠]] 투수 중 유일하게 '''한국시리즈 승리투수''' 타이틀을 달고 있다.
         6승 2패 16홀드 2세이브, 56⅓이닝 소화 평균자책점 2.88, WHIP 0.85 로 입단 이후 최고의 성적을 올려, 연봉도 2008년 6,800만원에서 2009년 1억원으로 억대 연봉에 진입하였다.
         그리고 제리 로이스터의 무리한 투수 운용으로 이기는 경기, 지는 경기 구분없이 등판하다가 허리 부상이 왔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허리부상이 아니라 팔꿈치 부상이었다고... 허리부상이라고 속였다가 당시 강민호의 팔꿈치 부상 이후 팀 내 모든 선수들의 부상 여부를 조사하다가 드러났다. [* 팀 내 다른 불펜 투수들은 3일 이상 연투 금지에 왠만하면 휴식일을 지켜주고 불펜도 가능한 한 로테이션을 돌려 관리를 해주고 있지만 강영식은 당시 [[김이슬(야구선수)|김이슬]]을 제외하면 팀내 유일한 좌완 불펜이었다. 따라서 이닝은 많지 않은 데 비해 출장 경기수는 상당히 많은 편이다. 08시즌에 64경기, 56⅓이닝을 던졌으니 원 포인트 릴리프라도 어지간한 경기에서 거의 항상 등판해오다 시피 한 것에 대한 후유증이 없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김이슬(야구선수)|김이슬]], [[김유신(1986)|김유신]], [[하준호]] 등을 비상식적으로 투입--'''세 선수 합계 이닝이 30이닝 미만이라는건 함정'''--하여 계투진을 운용[* 로이스터는 좌완 원포인트로 써야할 선수인 김이슬을 좌타, 우타 가리지 않고 상대시켜서 --'''무려 13경기에 내보내서 8이닝씩이나 소화하게 하는 엄청난 혹사를 한 끝에'''-- --'''결코 80이닝이 아니다'''-- 망가뜨렸고 신인 하준호를 위급한 상황에 아무렇게나 투입하는 운용으로 난타당하게 만들었다.]하기보다는 [[이정훈(투수)|이정훈]] - [[이정민(야구선수)|이정민]] - [[김일엽(야구)|김일엽]] - [[임경완]] 등을 돌려가며 탄력적으로 필승계투조를 꾸려갔으면 훨씬 나았겠지만 [[로이스터]]의 투수 운용은 무조건 한놈만 팬다는 식으로 특정 투수 한명만 주구장창 기용한 다음 그 선수가 혹사로 나가 떨어지면 다시 다른 선수로 옮겨가는 식이라...[* 하지만 여기에는 당시 롯데의 좌완 불펜이 거의 전무했던 문제도 있다. 사실 [[로이스터]]의 불펜 운용방식은 로테이션을 돌리는 식으로 불펜투수들에게 여유를 주는 운용방식이었다. 다만 좌완투수의 경우 심각한 부족을 겪어서 이 방식이 지켜지지 않았는데 [[김이슬(야구선수)|김이슬]], [[김유신(1986)|김유신]], [[하준호]]는 좌완투수의 부재로 어거지로 1군에 올려서 기용하였을 뿐 수준미달의 투수들로 잠시 1군에 기용된 이후 대부분 2군에 머물러 있는 선수들이었다. 심지어 [[김이슬(야구선수)|김이슬]]은 구속이 130km대에서 상승하지 못해 결국 방출되기까지 하였다. 앞에서 이야기 한 [[이정훈(투수)|이정훈]], [[이정민(야구선수)|이정민]], [[김일엽(야구)|김일엽]], [[임경완]] 이 넷은 모두 우완투수로 당시 롯데 내에 쓸만한 좌완투수로는 사실상 강영식이 유일한 상황이었다.]
         1군에 올라온 이후로는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닌지라 1이닝을 소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원 포인트 릴리프]]로 뛰었는데, 7월 29일부터 무려 30경기 가까이 등판했음에도 '''자책점은 0'''이었다. --물론 [[분식회계(야구)|분식회계]]는 했었다--
  • 리그컵(K리그) . . . . 42회 일치
         [[K리그]]의 리그컵은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주관하는 프로축구구단을 위한 대회다. 1992년에 처음 시작되어 2011년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폐지라고는 했지만 2016년 기준,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는 아직 리그컵을 공식경기로 보고 있다. 이는 다시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재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셈이다.]
         == 프로축구선수권대회 ==
         리그컵의 전신은 1986년에 열린 [[프로축구선수권대회]]로 본다. 이 당시는 [[수퍼리그]]가 발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점으로, K리그 구단의 수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유럽과 같은 10개월 일정을 소화할 수가 없어 추가로 신설된 대회였다.[* 85년도 기준, 당시 8개 팀이 [[홈 & 어웨이]]로 3번씩 만나는 구조였기 때문에 21경기밖에 되지 않았다.]
         또한 축구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저조했던 것도 문제가 되었는데, 프로축구선수권대회를 시즌중에 따로 개최하여 팬들을 끌어 모으겠다는 계산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리그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흥행은 엄청난 대참패라서 2016년에 리뉴얼한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연혁에서도 이 대회는 전혀 이야기가 없다.[*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도 '''"1992년, 정규리그 이외 최초로 별도 컵대회인 아디다스 “컵” 신설"'''이라고 밝히고 있을 정도로 당시 대회는 그 누구도 관심갖지 않는 대회였다.] 연맹에서 K리그의 역사를 논할 때 프로-세미프로로 합동 운영했던 수퍼리그를 K리그의 일부로 보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http://www.kleague.com/kr/sub.asp?avan=1001124800|리뉴얼 이전 자료]에는 남아있다.]
         프로축구선구권대회가 흥행참패를 겪고나서 1992년에 와서야 리그컵이 열리게 된다. 당시 후원사가 아디다스를 한국에 판매하고 있던 제우교역이었기 때문에 통칭 아디다스컵으로 불린다.[* 잉글랜드의 칼링컵과 마찬가지로 스폰서가 원하는 타이틀을 달아주는 형식이다.] 이 시기에도 팀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단조로운 리그의 홈 & 어웨이의 연속보다는 리그 외에 별도로 경기 수를 채울 이벤트를 기획하였고, 제우교역을 스폰서로 구해 첫 리그컵으로 볼 수 있는 "아디다스컵"이 열리게 된다.
         다만, 여기에는 제법 잡음이 있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엉뚱하게도 [[아디다스]]가 해외상표이기 때문에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해외업체의 이름을 단 대회를 한국에서 치뤄야 하느냐?"라는 [[신토불이]]적 마인드가 표출화 된 것.[*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060400209217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92-06-04&officeId=00020&pageNo=17&printNo=21844&publishType=00020|당시 기사]를 보면 시대의 흐름을 알 수 있다. 기사만 보면 재정자립을 위해 해외업체와의 협력도 꼭 필요하다는 협회의 주장이 일견 타당해 보일 수는 있으나 완산 푸마의 7구단 합류 과정에서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3646721|외국 스폰서 이름이 붙었다는 이유]로 참가를 못하게 된 사례를 보면 한국축구계가 왜 이렇게 이상하게 굴러가는지 수긍된다.]
         || 7 || 1997 || 후반 || 프로스펙스컵 ||
         = 한국 축구사에 끼친 영향 =
         리그컵이 갖는 의의는 제법 큰데, 한국프로축구계에서 돌아가는 상업시스템과 現 한국프로축구연맹의 "공격축구를 향한 도전정신"(...)의 기반은 어느 정도 이 리그컵에 시행되었던 부분들을 다수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축구사에서 운영을 위한 타이틀 스폰서가 붙은 건 공식적으로 리그컵이 최초다. 공식적으로 최초의 리그컵으로 볼 수 있는 92' 아디다스컵은 대회 스폰서인 제우교역의 요구에 의해 붙여진 명칭이다. 지금이야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축구에 있어 스폰서가 붙었다는 사실은 상당한 의미를 지닐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스포츠사에서 해외업체의 이름을 대회명에 붙인 최초의 사례가 되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말이 많았다.
         스폰서가 붙었기 때문에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3652307|한국프로축구 역사상 최초로 상금이 걸린 대회]가 될 수 있었으며, 이 때문에 리그컵은 충분히 각 팀에게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요건이 되었다. 당시 아디다스 제품을 수입/판매하던 제우교역이 10만달러를 스폰함으로써 최초로 상금을 줄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된 셈.[* 92년도 여름을 기준으로 당시 환율이 1달러당 800원 정도였으므로 총상금 규모는 대략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3616060|8000만원선]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상금이 생겼기 때문에 팀에 대한 시상뿐만 아니라 우수선수에 대한 시상도 이루어졌다. 이 당시에 시상하던 기준이 2016년 시점에서 바라본 K리그에 통용될 정도로 한국프로축구사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K리그외에도 별도로 운영되는 대회가 태어났기 때문에 팀에서는 이를 위한 별도의 스쿼드를 꾸릴 필요가 생기게 되었으며, 이는 각 구단들이 선수층을 보다 두껍게 만드는 결과로 나타났다. 또한 협회 입장에선 FA컵을 대체하는 대회로 여길 수 있었으며, 좋게 표현하면 구단들은 프로무대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신인들을 테스트해 볼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되어주기도 했다.
         KFA가 구단들과의 의견조율이 실패하여 리그컵과 관련한 협조를 구하지 못했던 것도 리그컵에 크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구단들은 10만 달러를 전액 상금화를 생각하였는데, KFA는 이걸 일부만 상금으로 쓰고 나머지는 KFA에서 아마추어를 지원할 자금으로 돌릴 생각을 갖고 있어서 1회 아디다스컵은 "상금은 있는데 금액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당초에 이는 아디다스컵이 열리게 된 이유가 구단들과 제우교역측과의 논의에서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3650363|스폰금액은 전액 상금으로 쓸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갔는데 KFA가 이를 계약서를 찍을때 "협회에 일임함"으로 이야기를 바꿔버려서 협회와 구단사이에 골이 생기게 만들어버렸다. 해당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아디다스컵의 창설을 주도한 건 협회가 아니라 구단이며, 이는 구단의 수익을 위한 상금배분을 협회가 개입함으로써 제대로 수틀린 것. 제우교역측은 명백히 "프로구단을 위해 사용하길 바람"인데 KFA는 프로리그를 위한 돈을 멋대로 아마추어 사업에 쓰겠다고 나섰으니 구단들이 이 대회를 심정적으로나마 보이콧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버린다.
         아디다스컵이 처음 열렸던 시점만 하더라도 K리그와 사실상 동등한 수준의 대우를 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많은 상금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와서 과거 한국프로축구와 관련된 기사를 살펴봐도 리그컵이 처음 열렸을 당시에는 정규리그보다는 아디다스컵 관련기사를 찾기가 더 쉬울 정도다. 10만달러 규모의 상금은 당시 국가대표 대회로 간주할 수 있었던 대통령배 대회를 빼면 축구계 최고액이었으니 당연히 화제를 몰고 올 수 밖에 없었고 일반인들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던 상황. 물론 이건 총 상금규모고 실제로 우승팀은 3000만원, 준우승팀은 1500만원을 받았지만 이것만으로도 이런 사실은 명백히 K리그와 차별할 수 있는 위상을 심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K리그도 상금제도를 대폭 개선하면서 이 위상이 바뀌게 되었다.
         [[AFC 챔피언스 리그]]의 개편과 함께 FA컵의 위상이 리그컵을 명백히 넘어서게 됨은 물론이고, 이 두 대회의 흥행과 함께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는 리그컵을 구태여 운영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최초에 리그컵을 기획하게 된 이유가 한국프로축구의 발족과 함께 늘 대두되었던 부족한 경기수를 채우고 흥행을 도모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리그컵이 탄생하고 10여년이 지나니 팀 수가 3배가량 늘어나 경기 수가 부족하지도 않고, 상금은 그다지 오르지도 않아 팀이 리그컵에 참가할 때마다 주전선수를 대폭 기용하지도 않아 흥행을 기대하기도 어려워졌다. 오히려 비주전 선수들은 R리그에서 뛰면 되기 때문에 리그컵이 초창기에 갖고 있던 이점들을 하나 둘씩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리그컵은 K리그 팬들 사이에서도 외면받고 있었던 것도 사라지게 된 이유가 되었다.
         2009년 AFC의 ACL 참가기준 발표에 따라 첫 승강제가 이루어졌던 2012시즌은 정규 라운드만 치룬게 아니라 스플릿 시스템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16개팀 44라운드라는 살인적인 일정이 잡혀있었다. 이 밖에도 A매치기간에 리그를 운영할 수 없는 기간, ACL, FA컵 등과 겹치는 일정을 고려하면 도무지 리그컵을 넣을 수 있는 여력이 안 되었던 것. 단순히 16개팀이 1판씩 토너먼트를 치뤄도 최대 4라운드에 해당하는 일정을 치뤄야 하는 수준이었다.
         K리그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지만 어쨌거나 현재로써는 공식 기록을 찾기가 가장 어려운 대회가 되었다. 리뉴얼 이전 한국프로축구연맹 홈페이지에서도 이 대회에 대한 정보를 찾는건 상당히 어렵다. 비교적 협회보다 자료정리가 더 잘 되어 있고, 일반에 공개하는 자료양이 훨씬 많은 연맹임에도 그 자료를 찾기란 쉽지 않다.[* 협회쪽은 FA컵의 위상이 상당함에도 경기 관중 수나 카드 이력등을 별도로 공개하고 있지 않다. 협회가 비판받는 대표적인 부분.]
  • 정재학 (1856년) . . . . 42회 일치
         '''정재학''' (鄭在學, 1858~1940)은 [[대한민국]] [[금융업계]]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민족자본은행]]의 [[개척자]]이자 일제 강점기 한국은행산업의 대부다 .<ref name="ReferenceA">고승제, <<끝없는 도전 세기의 기업-기업가 이야기>> (한국경제신문, 1991), 제7편 2. 정재학/은행업의 개척자 p.351~367</ref><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8일~19일 9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1~19편"</ref> 조선 말기부터 일제 치하에서는 [[은행]] 경영진들이 [[관료]]나 [[왕실]] 지방 토호 가운데에서 배출됐지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맨주먹으로 일군 자금으로 55세 무렵 [[은행장]]에 오른 경우는 그가 유일하다.<ref name="ReferenceB">고승제, <<끝없는 도전 세기의 기업-기업가 이야기>> (한국경제신문, 1991), 제7편 2. 정재학/은행업의 개척자 p.351~363</ref><ref>서광운, <<한국금융백년 >> (창조사, 1970) p667~670</ref>
         27년 간 이어진 그의 은행경영 노하우는 아들과 손자에게 넘겨졌다. 숱한 합병 과정을 거치면서 [[민족계은행]] 자본의 총집결지였던 [[조흥은행]]에서 같은 가문의 한국인 행장을 두 명이나 배출했다. 5대 [[정종원]] 행장과 해방 후 첫 한국인 행장에 오른 2대 [[정운용]] 행장이 각각 그의 3남이고 장손이다. [[정재학]]이 [[대구은행]]과 [[경상합동은행]]에 투입한 민족자본은 정씨 가문 지분으로 상속되면서 고스란히 [[조흥은행]]에 남겨졌다.<ref name="ReferenceC"><<조흥은행 90년사>>, (조흥은행, 1987), p.83~87</ref><ref><<조흥은행 90년사>>, (조흥은행, 1987) p.412~431쪽 역대임원</ref><ref>서광운, << 한국금융백년>> (창조사, 1970) p.684 조흥은행 계보도</ref>
         국내 경제학계의 원로였던 [[고승제]]박사<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Contents?contents_id=E0003779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명사전 고승제(高承濟)]</ref> 는 1991년 펴낸 저서에서 "정재학의 그림자는 조흥은행에서 사라지지 않은 채 아직도 살아있다. 그의 3남 정종원은 1974년 11월 [[조흥은행]] 상무 [[취체역]](상무이사), 1952년에는 전무 취체역 (전무이사)을 거쳐 1956년부터 1961년 4월30일까지 그 자리에 머물렀다. [[정재학]]의 그림자가 [[조흥은행]]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흥미로운 지표로 볼 수 있다" " 정재학의 후손 20여명이 아직 조흥은행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 한국에서 처음으로 지방은행 창설했던 정재학의 후손답게 그들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표현해도 큰 잘못이 없겠다" 고 적었다.<ref>고승제, <<끝없는 도전 세기의 기업-기업가 이야기>> (한국경제신문, 1991), 제7편 2. 정재학/은행업의 개척자 p.369</ref>
         [[정재학]]은 [[낙동강]] 뱃길을 이용한 [[어염무역]]에 진출한다. 1886년 여름 콜레라가 전국을 휩쓸었는데 이 괴질에 소금물이 좋다는 소문이 확 퍼졌다. 소금은 불티나게 팔렸고 값도 폭등했다. 정재학은 이를 바탕으로 대구 3대 부호로 급부상하며 1892년 대구 중심가인 남일동에 99칸 기와집을 세웠다. 1921년 간행 된 '대구일반'에는 그의 재산규모에 대해 "100만 원 이상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현미 8000~3000석 규모의 연 수입을 거두고 있다. 하녀하남은 각각 30~40명에서 50~60명에 이른다."고 기술하고 있다.<ref name="ReferenceB"/><ref>고승제,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p.211</ref>
         일본인 지인의 참여는 조선총독부의 간섭에 대한 방패막이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일본인 고객들을 끌어들이는 역할도 했다. 사카모토가 오구라 다케지스케 (小倉武之助 <ref>동아일보 1995년 11월 9일 1면</ref> 에 의해 대구에 설립된 일본계 남선은행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대구은행]]에 기꺼이 참여한 것은 정재학의 경륜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14일 7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편 -14</ref><ref>고승제,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p.213</ref>
         경상합동은행에서도 정재학의 경영권 장악력이 다시금 발휘되면서 [[경남은행]] 출신 인사들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졌다. 1939년 그는 맏손자 [[정운용]]을 이사 겸 부장으로 발탁하여 경영 수업을 받게 했다.<ref>고승제,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p.215</ref><ref name="ReferenceB"/>
         국내 경제학계의 원로로 꼽히는 [[고승제]] 박사는 "한일합방 이후 수많은 민족자본은행이 설립됐지만 정재학처럼 30년 가까이 시종 은행경영의 실권을 장악한 사례는 찾아볼 수가 없다"며 "그는 [[대구은행]]의 자본금을 7년 만에 4배나 증액하는 등 경영자로서의 총력을 다 바쳤다"고 밝혔다. 아울러 "다른 부호들이 한 우물을 파지 않고 다방면으로 사업을 넓혀가는 데 비해 정재학은 오로지 [[대구은행]]에만 전심전력을 다했다"고 강조했다.<ref>고승제,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p.214~215</ref><ref>고승제,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p.210~226</ref><ref name="ReferenceB"/>
         [[정재학]]의 손자이자 해방 후 처음으로 한국인으로서 2대 조흥은행장에 오른 [[정운용]]은 1921년 결혼, 여아를 뒀지만 1930년 아내가 사망했다. 이듬해인 1931년 그는 대구 남산동 거주 김분조와 재혼했다. 그런데 김분조의 부친 [[김진만]]은 1915년 대구를 떠들썩하게 했던 ‘[[대한광복단]] [[대구권총사건]]'의 핵심인물이었다.<ref>경향신문 1963년 3월 1일 3면 대한광복단 사건</ref><ref>경향신문 1966년 10월 8일 정인택 수기 겨자씨한알 =2</ref><ref>독립기념관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의 전개 4. 대한광복회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456</ref>
         [[정재학]]은 [[조선총독부]]와 타협하기도 했지만 부당한 요구에 대해서는 끝까지 맞섰다. [[조선총독부]]와 [[조선은행]]이 [[경남은행]]과 통합하라고 강요했을 때 그는 전심전력을 다해 저항했다.<ref>고승제, <<끝없는 도전 세기의 기업-기업가 이야기>> (한국경제신문, 1991), 제7편 2. 정재학/은행업의 개척자 p.371~372</ref>
         그는 일본인들의 경영권찬탈 시도가 이어지자 경찰 출신의 일본인 지배인을 선임하는 등 경영권 방어전략으로 맞섰다. 또한 총독부와 일제강점기 중앙 은행이었던 조선은행이 자신을 행장 자리에서 줄기차게 몰아내려 했지만 그들의 시도는 번번히 실패했다. 주주총회에서 한국인 주주들이 정재학 행장에게 표를 몰아줬기 때문이다,<ref>경향신문 1981년 6월 15일 9면 경제인록 = 금융계 일제하의 금융인</ref><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17일 9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17편</ref> 31년간 민간은행장 자리를 유지한 사례는 전 세계 어디 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일제 치하에 설립된 수많은 [[민족계은행]]이 있었지만 일제의 강제합병 과정에서 사라져갔지만 정재학 행장은 생의 마감 직전까지 저항했다.<ref>서광운, <<한국금융백년>>(창조사, 1970) P.674 "조흥은행 되기까지"</ref>
         이 같은 일본인 임원의 침투전략이 수차례 반복되면서 한국인은행은 일본인은행으로 탈바꿈했다. 정태헌 [[고려대]] 교수는 "어미새(국가)가 둥지를 틀고 품어줘야 새끼(자본주의)가 알을 깨고 나와 먹을 공급(은행)받아 성장할 수 있지만 남의 둥지를 독점한 뻐꾸기(총독부 산하 특수은행과 일본인은행)는 둥지의 원주인(조선인은행)을 하나하나 떨어뜨려 죽인다. 식민지자본주의 조선인은행의 모습이었다."고 강조했다.<ref>정태헌, <<한성은행의 경영권 대주주 구성추이와 일본인은행화과정>> 한국사연구 P148~149 2010년</ref>
         묘민 [[임호연]](1920~ 2009)은 일본대 전문부 경제학과를 나온 엘리트였지만 귀국 후 항일 지하 조직 활동을 하다가 2년간 옥고를 치른 항일 투사 경력의 경제부문 대기자다.<ref>동아일보 온라인판 2009년 7월 28 일 애국지사 임호연 선생 별세 http://m.donga.com/List/3/70060000000002/20090728/8760617/1</ref> 그는 1982년 [[매일경제신문]]에 [[대구은행]] 관련 연재기사 19편을 집필했다.<ref>매일경제 1981 년 4 월 21 일 1면 재계산맥 연재 사고</ref>
         임 대기자는 [[정재학]]에 대해 " 거리의 일개 건달에서 수만금의 재산가가 되고 군수라는 관직에 오르기도 했고 풍운아인데 [[대구은행]] 설립을 통해 일제의 대항 세력이 되어 지체를 높인 특이한 존재 "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의 대구은행 설립은 대구를 [[봉건시대]]에서 [[자본주의]]경제로의 이행으로 이끄는 혁명이자 국권회복을 위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정재학]]이 설립했던 [[대구은행]]은 일제에 대한 커다란 저항세력으로 한국 사람들의 저항의식을 길러주는데 큰 몫을 했다"고 강조했다.<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8일 9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10편</ref>
         [[대구은행]]의 출범은 일본인 오구라 다케지스케 (小倉武之助)에 의해 1912년 설립된 대구 최초의 민간은행인 [[선남은행]]에 대한 대구 지역 내 한국인 재계의 경계심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부산과 대구에서 활동 중인 일본인 재력가들의 자본을 끌어 모아 [[선남은행]]을 설립했다. 앞서 1907년에는 대구 인근 밀양에 일본인 은행인 [[밀양은행]]이 설립됐다. 오구라 다케지스케는 이미 대구에서 다양한 상업 제조업을 운영하면서 은행자금을 사금고로 이용하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대구은행]]은 [[민족계은행]]답게 [[한국인]] 대출비중이 컸다 . 대출 가운데 한국인 비중은 77%, 일본인 비중은 23%에 그쳤다 . 비록 1인당 대출액은 일본인에 비해 적었지만 가능한 동포들에게 더 대출혜택을 주기로 한 [[정재학]]의 경영 방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ref>고승제,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p.225</ref>
         [[대구은행]]의 이 같은 [[민족자본]] 수호 의지는 해방직후 [[조흥은행]]의 자본구성에서도 드러난다. 1948년 [[미군정]]이 우리 정부에게 넘겨준 주요 은행 주식분포를 보면 [[조흥은행]]의 경우 한국인 지분비율이 54%에 달한 반면 [[상업은행]] (36%) [[저축은행]](6.3%) [[신탁은행]] (9.4%) [[상호은행]](9.5%) [[조선은행]](3.5%) [[식산은행]](6.7%) 등 나머지 은행들은 대부분은 일본인 소유에서 미군정 관리에 이어 우리 정부로 귀속됐다. 일제 당시 총독부 등이 민족자본 기반의 은행들을 수탈, 국유화시키거나 일본인에게 주식을 넘겼기 때문이다.<ref>경향신문 1978년 1월12일 5면</ref>
         특히 [[조흥은행]]의 경우 1948년 현재 일본인소유주(귀속주) 비율이 5%에 그친 반면 은행상호보유주 41%, 한국인소유주 54%이었다. 나머지 은행들의 일본인 보유비중은 26~80%에 달했다. [[조흥은행]]이 민족자본의 적통을 이어받았음을 입증하는 대목이다.<ref><<조흥은행 90년사>>, (조흥은행, 1987), p.113</ref> 또한 광복 당시 조흥은행의 인적 구성 역시 총 2000명 행원 가운데 일본인 직원은 139명에 불과해 혼란 없이 은행을 운영할 수 있었다.<ref><<조흥은행 90년사>>, (조흥은행, 1987), p.115</ref>
         [[조흥은행]]은 1997년 발간한 [[조흥은행100년사]]를 통해, 조흥은행의 출범에 대해 민족계은행의 대동합병이라고 규정했다. 조흥은행은 1943년 10월1일 최초의 민족은행인 한성은행과 동일은행이 합병하여 출범했다. 한성은행은 1938년 1월 29일 해동은행을 흡수했고, 그리고 1941년 경상합동은행을 합병했다. 조흥은행 출범에 앞서 일본 총독부는 다단계 인수합병을 거쳐 민족자본을 와해시키거나 통폐합시켰다. 한성은행 계열 5개은행(한성은행, 해동은행,구포은행, 주일은행,대구은행)과 동일은행 계열 4개은행(한일은행,호서은행,동래은행,호남은행)은 조흥은행으로 최종 통합된 것이다.<ref><<조흥은행 100년사>>, (조흥은행, 1997), p.133</ref> <br>이 가운데 경상합동은행은 한성은행과 합병되기 직전인 1941년 6월말 현재 한국인 주주 비중이 더 컸다. 일본인 주주 비중은 33%였고 일본인보유 지분은 총 4만5000주 가운데 45.4%인 2만409주에 그쳤다.<ref><<조흥은행 100년사>>, (조흥은행, 1997), p.173</ref> <br>조흥은행 출범 당시 한성은행 10만5000주와 동일은행 8만주를 합쳐 조흥은행 주식 수는 18만5000주였다. 한성은행 총주식10만5000주에는 대구은행을 설립한 정재학이 이끌어온 경상합동은행 4만5000주도 포함됐다. 경상합동은행은 1941년 9월30일 한성은행에 흡수 합병된 바 있다. 조흥은행 총주식 18만5000주는 경상합동은행 4만5000주, 한성은행 6만주, 동일은행 8만주 등의 융합으로 구성됐다. 정재학 가문은 경상합동은행 주식 가운데 1만여 주를 보유한 최대주주 자리에 오른 바 있다.<ref><<조흥은행 100년사>>, (조흥은행, 1997), p.222</ref>
         [[조흥은행]]은 1943년 10월 1일 민족자본에 기반을 둔 9개은행( [[한성은행]] [[대구은행]] [[한일은행]] [[호서은행]] [[호남은행]] [[동래은행]] [[주일은행]] [[구포은행]] [[해동은행]])의 다단계 합병에 의해 탄생했다.<ref>서광운 <<한국금융백년>> (창조사, 1972) p684쪽 조흥은행계보도</ref> 해방직후 [[조흥은행]]의 지분구성을 보면 일본인 5.1%, 한국인 53.7% 그리고 은행상호보유주 41.0%로 나타났다.<ref><< 조흥은행90년사 >> (조흥은행, 1987) p113~114</ref> 한국인지분 가운데 [[대구은행]]을 설립한 [[정재학]] 가문과 [[한일은행]]의 경영권을 장악한 [[민대식]] 가문 등 두 가문의 비중이 가장 컸다.<ref>경향신문 1955년 10월22일 3면</ref>
         최대주주 자리를 잃은 [[정재학]]은 1940년 4월2일 8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ref>동아일보 1940년 4월 9일 4면 합은두취사거</ref> [[정재학]]의 장례식은 1940년 4월8일 거행됐다. 당시 20대의 자동차가 영구차를 뒸따랐다고 한다. 전국 각지의 부호들이 대거 영면을 빌기 위해 찾아들었다고 전해진다. [[고승제]] 박사는 " 당시 그의 영구차 행렬 가운데 '고통정대부연일정씨재학공지구 ( 故通政大夫 延日鄭氏在學公之柩 )란 [[영건]](靈巾)이 내걸렸고 이는 상민으로 태어난 정재학이 양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상징"이라고 평가했다.<ref>고승제, <<끝없는 도전 세기의 기업-기업가 이야기>> (한국경제신문, 1991), 제7편 2. 정재학/은행업의 개척자 p.370</ref>
  • 김형준(배우,가수) . . . . 41회 일치
         [[분류:SS501(아이돌)]] [[분류:한국 남배우]] [[분류:뮤지컬 배우]] [[분류:1987년 출생]] [[분류:중구(대구) 출신 인물]] [[분류:아이돌 막내]][[분류:2005년 데뷔]][[분류:라디오 스타의 역대 게스트]]
         [[대한민국]]의 [[가수]]이자 [[배우]], 명예 [[프로게이머]].[* 명백히 케스파 공인 ''''명예'''' 프로게이머이다.] 같은 그룹 멤버 [[박정민(SS501)|박정민]]이랑 [[단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를 나왔으며 5인조 [[보이그룹]] [[SS501(아이돌)|SS501]], 3인조 유닛 [[Double S 301]] 멤버다. 동생으로는 [[유키스]] 전 멤버인 [[알렌기범]]이 있다. 친구이자 톰과제리의 톰인 [[박정민(SS501)|박정민]]과는 앙숙이자 절친이다.
          * 2005년 3월 6일 리얼리티 프로그램 M! PICK을 통해 제일먼저 얼굴을 알렸다.
          * 2010년 3월 10일 [[SS501김형준 프로게이머되다]] 마지막 방송에서도 울었다.
          * 작은 얼굴에 오똑한 코, 큰 눈 때문에 인형준 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동양인 답지 않게 높은 코는 어머님과 할머니, 사촌누나인 [[http://i.imgur.com/mS7AYGr.jpg | 장엘리]], 친동생인 [[알렌기범]]을 보면 빼박 유전이다. --사촌누나도 연예인 뺨치게 이쁘시다-- --오오 우월한 유전자-- 또 [[http://i.imgur.com/CfGoYyP.jpg | 16세에 찍은 여권사진]]과 18세에 찍은 옥주현의 뮤비 Catch를 보면 지금이랑 똑같다. --sm에서 길거리 캐스팅 받은 것만 봐도...-- [[http://i.imgur.com/H770qjj.jpg | 외모가 오해할 만하다.]] [[http://i.imgur.com/mM0Y8Zz.jpg | 김형준이라 쓰고 인형준이라 읽는다.]] 얼굴이 너무 하얘서 한국 화장품 중에는 피부톤이 맞는 게 없어 코디네이터들이 외국 제품으로 화장을 해줬다고 한다.
         ==== 2009년 ====
          * 2월 13일부터 2009년 8월 17일까지 [[소녀시대]] 멤버 [[써니(소녀시대)|써니]]와 함께 MTV THE M 진행을 맡았다.
          * 3월 6일 허영생, 김규종과 함께 [[웃찾사]]에 출연했다. [[꽃보다 남자(2009년 드라마)|꽃보다 남자]]의 패러디를 했는데 김형준은 허영생과 함께 배우 [[박영규(배우)|박영규]]의 ‘장모님 왜 그러세요?’라는 멘트로 성대모사로 관객들을 폭소케 했다.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어느 한 쪽]]에서는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는데...
          * 1월 27일 게임 전문 공중파 방송인 [[MBC GAME]]에서 [[SS501김형준 프로게이머되다]]라는 프로그램이 첫 방송 됐다. 제목이 곧내용으로서 김형준이 프로게이머가 되기위해 노력하는 프로그램인 것이다. 이때 김형준이 들어가는 팀은 방송국에서 운영하는 [[MBC GAME HERO]]. 처음에는 다소 무개념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스갤러]]들에게는 오히려 그런 가식없는 모습이 어필 되어 좋은 호응을 얻었고 결국 3월 4일에 감독 추천으로 공인 프로게이머 자격을 얻게 되었다. 방송을 하면서 뮤탈 짤짤이의 창시자인 [[서경종]]과 매우 친해졌고 서경종은 이를 계기로 해설자로 성공적인 전향을 하게 되었다.[* 훗날 서경종은 트윗 인터뷰[[http://esports.dailygame.co.kr/news/read.php?id=57529|#]]에서 김형준과의 친분은 100% 설정이었으며 실제로는 전혀 친하지 않았고 방송 이후엔 연락도 안 했다고 밝혔다.][* 서경종의 트윗문답때문에 김형준의 빠순이들은 서경종한테 악플을 날리고 [[스갤러]]들은 [[빠가 까를 만든다]]면서 [[병림픽]]을 했다. ~~트리플S도 [[카시오페아(동방신기)|카시오페아]]나 [[엘프]]와 [[드림콘서트 침묵 사건|함께하기도 했을 정도로]] 무서운 사람들이라..~~] 그리고 유독 [[러커]]에 집착하는 모습이 보인다. 게임할때 말버릇이 암요 까시까시맨~이라든지 자기를 가시저그라고 불러달라는 모습도 나왔다. 스갤에서는 주로 까시맨이라고 불린다. 결국 3월 31일을 마지막 방송으로 SS501김형준 프로게이머되다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렇게 스타 팬들에게 신선한 프로그램으로 기억에 남았다.
         || 2009년 || KBS2 || [[꽃보다 남자(2009년 드라마)|꽃보다 남자]][* 허영생, 김형준이랑 게스트로 출연해 U R Man을 불렀다.] ||
          * 2009년 3월 9일 [[강인]]을 대신해서 [[태연]]과 함께 [[친한친구]] 일일 DJ를 진행했다.
          * 2009년 4월 14일부터 2014년 4월 14일까지 김형준의 뮤직하이의 DJ를 진행했다.
          * 2009년 2월 9일 허영생과 함께 [[강인]], [[태연]]의 [[친한친구]] 출연
          * 2009년 12월 9일 [[김창렬]]의 올드스쿨 출연
          * 2005년 11월 8일 한국외대 헤럴드미디어 취업설명회에 참석했다
          * 2009년 3월 27일 서울 학여울 서울무역전시장(SETEC)에서 열린 '09/10 F/W 서울패션위크 디자이너 송지오 컬렉션 패션쇼에 참석했다.
          * 2009년 6월 7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대 두산 베어스의 경기 시작 전 시구를 선보였다.
          * 2012년 2월 27일 KBS 드라마 자체발광 그녀 프로모션차 일본으로 출국했다.
          * 2013년 12월 14일 ~ 16일까지 타일랜드 코리아 프렌드십 페스티벌 2012에 한국대표에 참석했다.
  • 서유리 . . . . 39회 일치
         [[분류:달서구 출신 인물]][[분류:라디오 스타의 역대 게스트]][[분류:맥심의 역대 표지 모델]][[분류: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역대 출연자]][[분류:트위치 스트리머]][[분류:한국 여성 성우]][[분류:1대 100 역대 1인]][[분류:1985년 출생]][[분류:2008년 데뷔]]
         [Include(틀:상위 문서3, top1=성우/한국, top2=대원방송 성우극회, top3=광역계)]
         [[2017년]] 현재 성우계, 연예계 모두에서 인지도를 쌓고 있는 한국에서 몇 안 되는 성우.[* 일본 성우들과 비교되는 경우가 많다. [[성우/현황]]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 성우들은 단순히 성우가 아닌 '배우' 그리고 '연예인'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한 편. 오프라인 행사에 섭외된다거나 라디오, 지상파 방송에 출연하는 건 기본이고 배우로서 연기를 선보인다거나, 가수 등 음악쪽 아티스트로 데뷔하여 본인 명의로 앨범 발매, 콘서트를 여는 성우들도 많다.] 방송 활동을 통해 가장 널리 알려진 성우라고 할 수 있다.
         2015년 6월 28일 [[성우 갤러리]]에 직접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radio_actor&no=239427&page=1&exception_mode=recommend|글]]을 남겼다. 미국에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당일에 서유리가 동성결혼에 찬성하는 뜻으로 무지개색이 씌워진 프로필 사진으로 바꿨는데 그게 서유리의 후배 성우 [[이유리(성우)|이유리]]가 당일에 동성애를 비판하는 트윗을 올린 것을 까기 위해서 바꿨다는 루머 글이 쓰여졌기 때문이다.
         2016년 한국 PD대상 성우상[* [[http://entertain.naver.com/read?oid=438&aid=0000008916]] ]을 수상하였다.
         [[원펀맨]] 애니메이션 블루레이 버전의 한국 정식 발매분에서 [[지옥의 후부키]] 성우를 맡기도 했다.
         2018년 출시되는 [[문명 6]]의 확장팩 흥망성쇠에 나오는 [[문명 6/등장 문명/한국|선덕여왕]]의 성우를 맡았다.[[https://www.youtube.com/watch?v=ZN0EhQRs86I|인터뷰 영상]]
         또한, 한국 성우로서는 흔치 않게 연예인으로서의 활동도 적극적으로 하는 편. 사실 성우로서 방송에 출연한 경우는 [[장정진]]을 제외하면 그리 흔치 않은 편이라 더빙까들을 비롯하여 더빙에 별 관심이 없는 [[일반인]]조차 성우가 무슨 직업인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였는데, 서유리는 [[SNL 게임즈]]의 나레이션과 [[마이 리틀 텔레비전]]의 미스 마리테를 통해 성우로서의 연기력을 방송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등 한국 방송계의 [[블루 오션]]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보통 성우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서유리와 "지금 그 분의 머릿속엔 인터넷, 지상파, 미디어장악, 성공적."을 읊조리는 미스 마리테로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연기력은 마리텔 특유의 B급 코드다운 재미와 공중파 방송의 균형을 잡아주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 "무조건 게임하는 남자"가 이상형이라고 한다.[[http://entertain.naver.com/read?oid=415&aid=0000001391|#]] 박학다식한 잡식남들의 토크 m16 케이블 방송 xtm의 한 프로에서는 이상형은 '바쁜 사람'이라고 했다.
          *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 방송을 할때는 파티원을 구하는데 그 중에 항상 꼬박꼬박 파티신청을 하는 사람 중 한 명이 프로게이머다.
         이후 4월 20일 온게임넷의 토크 프로그램 '728호 아저씨의 게임이야기 1화'에 전용준, 엄재경과 함께 출연했다.
         북미의 롤 프로게이머 [[피터 펭|더블리프트]]와의 열애설이 돈 적 있다. 영어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와 자주 대화를 했고 식사도 몇 번 했으며 그를 피터라고 부르는 등 친근하게 대했기 때문에 이야기가 커진 모양… 이 아니고 더블리프트는 서유리와 대화하기 위해 한국어 교재를 사며, 평소 보여주는 쿨시크한 모습이 아니라 첫사랑하는 어린애 마냥 헤벌쭉한 표정으로 일관, 바탕화면이 서유리인 적도 있을 정도로 누가 봐도 서유리를 좋아하고 있다.
         더블리프트가 서유리에게 쓴 SNS 글에는 "넌 쓰레기" 라고 적혀있는데 누군가 한국어를 알려준다면서 장난친 듯. 이후 크리스마스 축하 메세지로 이어졌다.
         === [[프로야구매니저]] 부매니저 발탁과 [[NC 다이노스]] [[시구(야구)|시구]] ===
         프야매의 부매니저로 발탁되었다. 하지만 대대적인 티저광고를 하는 등 프야매 측에서 너무 과대광고를 하는 바람에 "그렇게 광고 해놓고 서유리냐?"라는 반응이 대다수 프야매 측과 한 인터뷰에 따르면 본인이 원래 응원하는 야구단은 [[삼성 라이온즈]]로 추측되나[* 인터뷰 내용 중 서유리가 어느 팀 팬이냐는 질문에 직접 언급하진 않고 본인이 대구 사람이며 아버지를 따라 야구장에 자주 갔다고 답변 했으며 카드깡 이벤트에서 위시 카드를 전부 삼성 선수들로 골랐다.] 이번 부매니저 발탁 이벤트와 연계, [[NC 다이노스]]의 시구를 맡았다. 다만 시구는 [[티파니(소녀시대)|패]][[제시카(가수)|대]][[낸시랭|기]]시구. 그러자 프야매 측에서는 서유리가 시구연습을 열심히 했는데도 시구 결과가 안 좋았다며 연습 영상이 담긴 위로글을 올렸다.[[http://bm.gametree.co.kr/Community/View.aspx?BoardType=4&BoardNo=4741749|공지 하단에 영상이 있다.]]
         [[프로야구 매니저/운영 및 각종 사건들#s-3.22|그리고 그것은 신의 한 수가 되었으니…]]
          * 당시 파일럿 프로그램이었던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 정규편성 되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정확히 프로그램 이름을 밝히진 않았으나[* 정식으로 프로그램 이름이 정해지지 않아서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파일럿에서 정규편성으로 넘어가면서 프로그램 제목이 바뀌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 설 연휴때 했던 프로그램이 봄부터 정규편성 되니 많이 시청해달라고 언급했다. 설 연휴 파일럿 프로그램 중 서유리가 출연한 프로그램은 마리텔 하나 뿐이었으니 자동으로 확정.
          * [[별을 쫓는 아이]] - '''와타세 아스나'''[* [[신카이 마코토|본작 감독]]의 작품 [[너의 이름은.]]이 한국에서 대흥행하여 재조명되었다.]
          * [[스타프로젝트]] - 유애리
          * [[프로야구매니저]] - 부매니저 유리
  • 김성현 (1989년) . . . . 38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08년]]
         |드래프트 순위 = [[2008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08년]] 6차 1라운드([[현대 유니콘스]])
         * [[넥센 히어로즈|히어로즈]] (2008년 ~ 2009년)
         |대륙간컵 (야구) = 2010 대만
         '''김성현'''(金聖賢<ref>한국야구위원회, 2011 가이드북</ref>, [[1989년]] [[1월 3일]] ~ )은 전 [[KBO 리그]] [[LG 트윈스]]의 [[투수]]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줄곧 초등학교와 중학교 야구부에 들어 활동했고, 대구고 1학년 재학 중이던 2005년, 대구고를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청룡기 전국 고교 야구 선수권 대회]] 결승으로 이끌면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당시 맞상대가 프로 야구를 주름 잡는 괴물 투수 [[류현진]]이 이끌던 [[동산고등학교|인천 동산 고등학교]]. 결승전에서 대구고는 먼저 8점을 내지만, 경험 부족으로 9점을 내주면서 대역전패하게 되어 준우승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게 된다. 1차 지명이 있던 시기라 오랜만에 나온 유망주에 대구를 연고로 하는 [[삼성 라이온즈]] 팬들도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대구고 1학년을 마치고 전격적으로 제주 관광 산업 고등학교(현 [[제주고등학교|제주 고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당시 제주관산고의 감독인 [[성낙수]] 감독의 스카웃 및 설득으로 옮겨갔다고 하는데, 후에 고등학교 스승의 인터뷰에 따르면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제주특별자치도]]로 전학을 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전학생 출전 정지 규정에 묶여 1년을 쉬게 된다.<ref>[[빠른 생일]]이지만 다른 1989년생들과 같은 년도에 입단한 이유.</ref> 그리고 이때 [[경상남도]] [[김해시|김해]]에서 같이 제주관산고로 건너와 친하게 된 친구가 바로 전 [[두산 베어스]]의 투수 [[김수완 (야구 선수)|김수완]]. 그 뒤 2년 동안 제주관산고에서 공을 던지지만 특별히 대구고 1학년 시절처럼 주목받지는 못했다.
         == 프로 야구 선수 시절 ==
         이후 소속 팀이었던 현대가 해체되고, 선수단은 우리 구단으로 인수되면서 부임한 [[이광환]] 감독은 그의 강속구를 보고 과감하게 그를 주전 마무리 투수로 발탁한다. 하지만 겨우 21살이었던 투수에게 마무리는 너무 큰 중압감이었고, 결국 마무리 결정은 실패로 돌아간다. 투수 [[황두성]]에게 마무리를 넘겨 준 후, 줄곧 2군에서 던지면서 활동한다. 간간히 1군에 올라왔지만 성적은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2009년의 [[방어율]]은 65⅔이닝을 던져 7.13.
         [[2010년]]에 본격적으로 선발진에 들어왔고 [[2010년]] [[5월 2일]] [[잠실야구장|잠실]] [[두산 베어스|두산]]전에서 시즌 첫 선발승을 기록했다.<ref>[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11&article_id=0000186576 첫 선발승 김성현, "부모님께 큰 선물 됐다" 첫 선발승 김성현, "부모님께 큰 선물 됐다"] - 조이뉴스24</ref>
         2011년 8월 6일 [[한화 이글스]] 전에 드디어 LG 소속으로는 처음으로 선발 등판하였다. 한화 전에서 좋은 모습을 많이 보여서 기대되는 대목이었지만 5⅓이닝 동안 4실점하면서 그날 패전 투수가 되었다. 하지만 이걸 자세히 들여다 보면 김성현보다 [[박경수 (야구 선수)|박경수]], [[김태완 (1981년)|김태완]] [[키스톤 콤비]]의 생각은 수비 때문에 벌어진 일이며 실책을 줘도 할 말 없는 게 두 개나 있었지만 웬일인지 실책으로 기록이 안 되고 고스란히 그의 자책점으로 연결된 것이다.
         2012년 초, 투수 [[박현준 (야구 선수)|박현준]]과 함께 [[2012년 한국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2012년 한국 프로 야구 승부 조작 사건]]의 당사자로 밝혀졌다. 박현준과 마찬가지로 혐의를 부인했지만 검찰 수사 결과 2012년 2월 28일, 국민 체육 진흥법 위반으로 [[대구지방검찰청|대구 지방 검찰청]]에 체포되었고, 3월 1일 범죄 사실이 소명되고 증거를 없애거나 도주할 염려가 있다는 이유에서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다. 김성현은 8시간 가량 조사를 받았고, 넥센 시절이던 2011년 시즌 4~5월 브로커와 짜고 두 차례에 걸쳐 일부로 '1회 첫 볼넷'을 던져 승부를 조작하고 이에 따른 사례금 1,000만 원을 챙긴 혐의를 받았다. 2012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대구 지방 법원]]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집행 유예]] 2년, 추징금 700만 원을 선고하고 사회 봉사 활동 120시간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2012년 3월 6일, 박현준과 함께 같이 LG 구단에서 웨이버 공시되고 [[KBO (단체)|한국 야구 위원회]](KBO) 상벌 위원회는 4월 18일자 재판 결과를 근거로 김성현을 영구 제명했다.<ref>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5588057</ref>
         재판 이후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막노동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인터넷 야구 커뮤니티에서 돌았으나 출처는 불분명하다. 그 이후에는 군대 문제를 해결했을 가능성이 있다.
         [[프로야구 매니저|프로 야구 매니저]]에서는 본명에서 '신성수'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게이머들 중에는 차라리 신조작이라고 하지 그랬냐는 의견도 있다. [[마구마구]]에서는 장유엽으로 카드명이 변경되었다.
         컴투스 프로 야구 매니저에서는 김설민이라는 가명으로 나왔으며, 이사만루 2014에서는 김신홍이라는 가명으로 나왔다.
         어째 이상하게도 컴투스 프로 야구 2011에서는 업데이트가 되어 있는데도 본명으로 존재하는 이 선수가 아직도 남아있다.
  • 안기효 . . . . 38회 일치
         ||||<#A9A9A9> '''{{{#white 前 스타크래프트 1 프로게이머}}}''' ||
         ||<#F157FF> {{{#ffffff '''종족'''}}} ||<bgcolor=#ffffff> [[프로토스]] ||
         [[대한민국]]의 前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現 [[아프리카TV]] [[BJ]]. 본명은 안준호.[* [[개명#s-1|개명]]한 지 몇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다들 안기효라로 부르고 개명한 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 심지어 본인도 방송할때 안기효 이름으로 방송 중.]
         2003년 4차 Ghem TV 스타리그 5조 8강 (VS[[이운재(프로게이머)|이운재]] 1:2)
         2006년 WCG 2006 한국예선 B조 4강 (VS'''[[박성준]]''' 1:2)
         2008년 WCG 2008 한국대표선발전 24강 (VS'''[[박성준]]''' 0:2)
         2009년 곰TV 클래식 시즌3 64강 (VS[[안상원]] 0:2)
         2003년 데뷔한 올드 프로게이머로 판짜기 능력과 전략성이 탁월해 2005년경에는 [[박지호]], [[오영종]], [[송병구]]와 함께 '신 4대 프로토스'의 물망에 오르내릴 정도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단점도 뚜렷했는데 매크로/마이크로 콘트롤과 멀티태스킹 능력, APM 등 게이머로서의 기본기가 전반적으로 모두 부족했다. 그와 함께 투나 - 팬택의 주축 멤버였던 [[심소명]]과도 비슷한 특성. 어쨌든 이것이 그의 성장을 가로막게 되어 결론적으로는 그를 제외한 프로토스 신예 3인이 신 3대 토스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래서 그의 전략마저 뒤떨어지기 시작한 2008년 이후로는 프로리그 16연패 등 끝이 보이지 않는 추락을 경험했다.
         특징적인 플레이 스타일 때문에 멋진 승리도 많았지만 [[OME]]급 패배도 많이 보여 준 선수다. 다전제에서 [[이영호]]와 [[이제동]]을 잠재우는 위엄을 선보이다가도, [[윤종민]]에게는 패러사이트 걸린 셔틀로 계속 견제를 다니고[* 더 웃긴 점은, '''이 견제에 윤종민이 당했다'''는 거다.(...)] [[변길섭]]에게는 마린에 캐리어를 헌납했으며, 피터 네이트와의 팀리그 경기에서는 리버 한 기에게 프로브를 55기나 폭사당하는 등 아이러니컬한 모습이 특징.
          * [[이재호(프로게이머)|이재호]] / 듀얼토너먼트에서 승
          * [[전상욱(프로게이머)|전상욱]] / 듀얼토너먼트에서 승
          * [[박지수(프로게이머)|박지수]] / 스타챌린지에서 승
         또한 [[이영호]]를 이기고 올라간 스타챌린지 1위 결정전에서는 [[이제동]] 마저 이기고 [[스타리그]] 본선 4번 시드를 쟁취했다.[* 시드를 따낸 후 안기효는 목 긋기 세레모니를 시전한다.] 안기효는 [[스타크래프트]] 리그가 끝날때까지, '''[[스타크래프트]] 공식전에서 [[이제동]]을 다전제(5판 3선승제)에서 이긴 유일무이한 [[프로토스]]로 남았다.'''[* 당시 [[이제동]]은 [[역대 스타리그 일람#s-23|해당 스타리그]]에서 [[로얄로더]]를 달성했던 시절이였다. [[토막]]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촉망받던 신예란 점을 생각해보면 안기효의 당시 실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첫 우승이 [[EVER 스타리그 2007|토스 잡고 한 우승]]이긴 했지만 사실 이때는 이제동이 잘했다기 보단 송병구가 [[옛날토스|너무 못했다]](...) 토스전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 하고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밀고가다 지는 경우가 많았고 송병구와의 결승전에서도 송병구가 우승할 것이란 예상이 훨씬 많았는데, 이걸 이제동이 우승하면서 토스전을 극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당 [[스타리그]]에서는 3패로 [[광탈]]하는 아쉬운 모습을 선사한다.
          * 피씨방의 괴물 [[이학주(프로게이머)|이학주]]
          * 피씨방의 마에스트로 [[김남기(프로게이머)|김남기]], [[주영달]]
         투신 [[박성준]]에게 천적 관계[* 사실 [[박성준]]에게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프로토스]]는 '''아무도 없다.''' [[박성준]]은 '''대 [[프로토스]]전 5전 3선승제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걸 넘어서, 5전제를 치를 때 2패째를 허용한 적도 없다.''' 전성기가 한참이나 지났다고 평가 받던 [[EVER 스타리그 2008]] 결승전에서도 당시에 잘나갔던 [[도재욱]]을 상대로 3:0 떡실신을 먹였을 정도. 전무후무한 저그전 최강이라던 [[김택용]]에게도 3대3의 상대전적을 보유하고 있다. 박성준을 상대로 전적이 앞서는 프로토스는 비공식 포함 7승6패의 [[송병구]] '''뿐.''' 이도 호각세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공식 전적만 볼 때는 오히려 2승 5패로 송병구가 [[김준영]]만큼 고배를 마신 저그가 박성준이다. 안기효가 유난히 자주 만났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즉, '''그냥 재수없는 거다.'''(...)]이며, 두 번의 16강, 두 번의 8강, 그리고 [[WCG]] 대표선발전에서 에서 고배를 마셨으며, [[라이드 오브 발키리즈]]에서 유명한 미니맵 [[관광]]을 당한다. 실은 안기효가 첫 온겜 [[스타리그]] 데뷔전 당시 꺾었던 상대가 다름아닌 전대회 우승자였던 [[박성준]]이었다. 리버+캐논으로 인한 조이기 라인으로 체면이 팍 깎인 [[박성준]]이 그 후 안기효만 보면 잡아먹으려 든다는 이야기.(...) 아무튼 안기효의 개인리그 상위 라운드 진출은 번번이 [[박성준]]에게 막혔다. 전략성을 감안하면 개인리그에서도 4강 한 번쯤은 노려볼 수 있는 선수였기에 매우 아쉬운 일.
         사람들이 안기효가 엄청 못했던선수로 알고있는사람이 꽤 있는데 그건 2008년 이후 실력이 급 막장화된 탓이 크지 그 전에 팬택시절에는 이윤열 다음으로 믿을만한 카드에다 위메이드 창단 초창기시절엔 [[에결]]에도 자주 나가서 꽤 많이 이겼다. 그리고 안기효만큼 스타리그 16강 8강 많이 찍어본 프로토스선수는 명예의전당에 들어간 프로토스 선수들 말고는 거의 없다시피하다.
         2007년 6월 26일 프로리그, 팬택vs온게임넷 스파키즈 5세트 [[팔진도(스타크래프트)|팔진도]]에서 [[이승훈(프로게이머)|이승훈]]과 맞붙었는데 초장기전 끝에 무승부가 나오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 상황이 답답했는지 안기효는 부스 유리벽을 쿵쿵 치는 행동을 보였는데 그 후...... [[히어로센터 유리창 파손 사건]] 참고.
         개인리그에서는 16강 ~ 8강을 왔다갔다했지만 팬택 앤 큐리텔 큐리어스 - 팬택 EX 팀에서는 [[심소명]]과 더불어 [[이윤열]] 다음가는 2, 3번째 카드로 손꼽혔다. [[심소명]]과 팀플을 하면 '안심'조합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 한때 양대 PC방까지 내려가기도 했지만 EVER 스타리그 2007에서는 챌린지리그에서 1위를 차지하며 4번시드를 확보했다. 하지만 [[위메이드 폭스]]로 재창단된 후엔 새로운 신인들이 자리를 차지해 점점 팀 내에서의 비중이 떨어졌다.[* 2007년 후기리그까지 잘 해주다가 2008시즌부터 [[박세정]]이 세로운 프로토스 에이스로 등극하게 된다.]
         [[위메이드 폭스]]팀이 별로 인재가 없어서 그랬는지(...) 프로리그에 가끔씩 얼굴을 비췄다. 근데 매번 [[OME]]급 경기를 선보이고 져버렸다.(...) 팀 에이스 자리도 나중엔 [[박세정]] 차지가 됐다.
  • 정동진 (1946년) . . . . 38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 [[대구상원고등학교|대구상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1977년 ~ 1978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 1969, 1971 서울
         {{메달 스포츠|남자 [[야구]]}}
         {{메달 경기|[[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금메달|1971 서울|야구}}
         '''정동진''' (鄭東鎭, [[1946년]] [[4월 23일]] - )은 [[대한민국]]의 야구 감독이다.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으로 국가대표팀 [[포수]]로서 이름을 알렸다. [[대구상원고등학교|대구상고]]를 졸업하고 실업 야구 팀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제일은행]]을 거쳤다. 현역에서 은퇴한 후 [[1977년]]부터 [[1978년]]까지 모교의 감독을 역임하였지만 물러나고 잠깐 야구계를 떠나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제일은행]]의 평범한 은행원으로 7년 간 종사했다.
         이후 [[1984년]]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의 수석코치로 영입되어 [[김영덕 (야구인)|김영덕]], [[박영길 (야구인)|박영길]] 감독을 보좌하였다. [[1989년]]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선임되어 전력이 약화된 팀을 4위까지 올렸고, [[1990년]]에도 정규 시즌 4위로 마감하여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그동안 번번이 삼성의 우승을 가로막았던 난적 [[해태 타이거즈]]를 3연승으로 스윕하고 [[1990년 한국시리즈]]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990년 한국시리즈]]에서 [[LG 트윈스]]에게 스윕을 당해 우승에 실패하여 [[삼성 라이온즈|삼성]]의 고질병이었던 [[한국시리즈]] 징크스를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었다.(이 징크스는 [[2002년 한국시리즈|2002년]]에 깨졌다.)
         [[1990년 한국시리즈]] 우승 실패의 책임을 물어 삼성의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미국]]으로 야구 연수를 떠났다가 [[1992년]] [[태평양 돌핀스]]의 감독으로 영입되었다. [[1992년]] 6위, [[1993년]] 최하위로 마감했지만, [[1994년]]에는 그동안 부상으로 신음했던 투수들이 복귀하여 정규 시즌 2위로 마감하는 선전을 하였다. 그 해 [[태평양 돌핀스]]가 [[LG 트윈스]]에게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스윕당해 [[LG 트윈스]]가 우승했지만, 그 해 성적은 [[1998년]] [[현대 유니콘스]]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기 전까지 [[인천광역시|인천]] 연고 야구단 최고의 성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감독으로 2번 경험한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모두 [[LG 트윈스]]를 상대로 스윕당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1995년]]에는 정규 시즌 7위로 마감했고, [[태평양 돌핀스]] 야구단이 [[현대그룹]]에 매각되었을 때 잔여 계약 기간 1년을 남긴 시점에서 팀 개편에 따라 수석코치 [[김재박]]에게 감독직을 넘겨 주고 물러났다.
         이후 야구 해설가, [[KBO (야구)|KBO]] 규칙위원, [[KBO (야구)|KBO]] 경기감독관으로 일하고 있다.
         |전임자 = [[박영길 (야구인)|박영길]]
         |전임자 = [[김영덕 (야구인)|김영덕]]
         |후임자 = [[박영길 (야구인)|박영길]]
         |전임자 = [[박영길 (야구인)|박영길]]
         |후임자 = [[김성근 (야구인)|김성근]]
         {{1971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대한민국 선수 명단}}
         {{1969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대한민국 선수 명단}}
  • 강원도 . . . . 37회 일치
         [include(틀:한국의 지역구분)]
         ||<:><bgcolor=#C9151E>[[파일:libertykorealogo.jpg|width=20]] '''[[자유한국당|{{{#FFFFFF 자유한국당}}}]]''' {{{#FFFFFF 11석}}}||
         ||<:><bgcolor=#C9151E>[[파일:libertykorealogo.jpg|width=20]] '''[[자유한국당|{{{#FFFFFF 자유한국당}}}]]''' {{{#FFFFFF 7석}}}||
         ||<:><bgcolor=#C9151E>[[파일:libertykorealogo.jpg|width=20]] '''[[자유한국당|{{{#FFFFFF 자유한국당}}}]]''' {{{#FFFFFF 5석}}}||
         [[고려시대]] 초기 [[10도]]에선 삭방도(朔方道)로 영동과 영서지역이 모두 포함된 적이 있었으나, [[현종(고려)|현종]] 때 [[5도 양계]]에서 다시 영동은 [[동계]] 영서는 [[교주도]]로 분리되었다. 동계의 병마사 치소는 당시 안변도호부[* 현재 강원도(북한) [[안변]]군]에 있었으며 교주도의 안찰사 치소는 교주[* 현재 강원도(북한) [[회양]]군]에 있었다. 그러나 강릉과 춘천 모두 영서와 영동지역의 거점의 지위를 계속이어가, 강릉의 경우엔 동계의 치소로 옮겨지고 고려 말기엔 '''강릉도'''로 개편되었다. 춘천의 경우에도 교주도의 치소로 옮겨졌고, 교주도를 당시 춘천의 지명이었던 춘주에서 딴 '''춘주도'''라고도 불렀다. 사실 교주도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던 기간이 아주 길지는 않았고 그 명칭은 춘주도, 동주도, 회양도 등으로 계속 바뀌었는데 한국사 교과서의 지도 등에는 대표적으로 교주도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원주의 경우는 동계도 교주도도 아닌 [[충주]]와 [[충청도|양광도]]에 속했다.
         1910년 관찰부를 도청으로 개칭하면서 춘천시는 다시 강원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으나, 1930년대에는 [[철원군|철원]]으로 도청소재지가 다시 옮겨질 뻔했다. 자세한 내용은 [[경춘선]] 문서 참조. 일제시대를 거쳐 남북분단 및 6.25 전쟁으로 한국 강원도랑 북한 [[미수복 강원도]]로 나뉘어 현재에 이르렀다. [[미수복 강원도]]의 도청(강원노동당사) 소재지는 해방 이후 잠깐 철원이긴 했다. 그러나 북한에서 함경남도에 있던 [[원산시|원산]]을 강원도로 편입해 현재는 원산에 강원노동당사를 두었다. 참고로 [[6.25 전쟁]] 당시에는 원주에 도청임시출장소로 옮기게 되었으나 어디까지나 '출장소'적 성격이었다.[* 1953년 8월 2일 경향신문 2면 기사] 과거에는 간혹 도지사 선거때마다 [[원주시]]로의 도청이전 떡밥이 나돌았다가 선거종료와 동시에 잠잠해지기를 반복하기도 하였으나, 2010년 선거 이후로는 따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조금이나마 해결하고자 2006년 폐광촌 발전을 위해서 한국에서 유일하게 합법으로 내국인이 들어갈 수 있는 [[카지노]] 시설인 '''[[강원랜드]]'''를 강원도 [[정선군]] [[사북역|사북읍]]에 만들었다. [[애초에]] 강원랜드는 시장논리가 아닌 정치적 고려로 인해 생긴 것이기 때문에 관계자들도 성공할지 반신반의였는데, 생각 외로 [[대박]]이 나서 지역경제에 꽤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과장 좀 보태면 강원랜드가 있는 [[정선군]] 뿐만 아니라 그 [[태백시|주변]] [[영월군|시]][[평창군|군]]에도 상당히 큰 영향력을 미친다고. 물론 강원랜드 지분의 51%는 강원도, 나머지 49%는 민간자본[* 민간자본이라니 일견 굉장히 사악해보이는 용어지만, 49%의 지분이 주식시장에 상장되있을 뿐이고 상장을 통해서 자본 증대를 하였기에, 단순히 지역 경제만이 아닌 주주의 이익 역시 보장해야 한다. 한국은 이렇게 공영을 담당하면서도 주식시장에 상장되어 주주 이익을 극대화해야한다는 모순에 휩싸인 주식들이 여럿 있긴 한데, 이를 해결할려면 당장 모든 공기업 주식을 정부가 사들여 공영화하거나, 아예 민영화를 하거나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알다시피, 한국 정치인중에 이 문제를 주장할려고 나서는 사람은 없고 무작정 공기업에 대한 가치만이 널리 퍼진채 민영 자본은 무슨 사악한 단어처럼 퍼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의구심을 품는 사람도 있긴 하다. 하여튼 그럼에도 지역 주민들이 상당히 좋아하는 시설이라(...) 도박중독에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부작용도 생기고 때때로 [[너 고소|소송도 걸리고]] 사업의 특성상 그리 순탄치는 못한 길을 걷고 있으나 한동안 폐업은 안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아이다호 주]]~~
         산과 눈(雪)이 많은 지리적 여건 상 동계 스포츠의 메카로 볼 수 있겠지만, 야외에서 치르는 하계 스포츠의 경우에는 불모지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애초에 인구도 적은 데다 야외 스포츠를 할 수 있는 인프라가 다른 지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특히 [[야구]]는 심각한 불모지에 가깝다.[*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 만큼이나 강원도 출신 유명 야구선수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 그 증거. [[원주고등학교 야구부|원주고]] 출신의 [[안경현]], 프로야구 최다 대타홈런 1위(20)개를 가지고 있는 강릉고 출신의 [[이재주]]가 그나마 제일 유명하고 [[설악고등학교 야구부|속초상고/설악고]] 출신의 [[조영훈]]이나 [[양훈]] 정도가 최근 들어서 그나마 이름값을 높인 강원도 출신 야구선수들이다. 최근에는 속초에서 초·중학교를 나온 [[김재환(야구선수)|김재환]]과 [[김기태(1987)|김기태]]가 이름을 내고 있다. 참고로 [[김재환(야구선수)|김재환]]과 [[김기태(1987)|김기태]]는 나란히 [[인천광역시]]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축구]]는 [[강릉 정기전]]이라는 전통의 더비 경기가 있을 정도로 영동지역에서 인기가 매우 높다. 그리고 [[강릉 정기전]]의 열기는 훗날 [[강원 FC]]의 창단으로 연결됐다.
         2016년 현재 강원도 내 지방자치단체를 연고지로 삼고 있는 스포츠 팀으로는 [[K리그]]의 [[강원 FC]][* 메인 연고지는 [[강릉시]]이며 가끔 [[춘천시|춘천]]과 [[원주종합운동장|원주]]는 물론 [[알펜시아 리조트|평창]]에서도 홈경기를 치른다.]와 [[한국프로농구]]의 [[원주 DB 프로미]] 등이 있다. [[KBO 리그]]의 경우 과거 [[삼청태현|인천광역시를 제1연고지로 삼았던 팀들]]의 광역연고권에 강원도가 포함된 적이 있고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수원야구장]]이 세워지기 전인 1980년대 초·중반에는 [[삼청태현|삼미, 청보, 태평양]]의 홈경기가 춘천야구장에서 분산 개최된 적도 있다.[* [[삼미 슈퍼스타즈]]가 1982년 창단 이후 처음으로 치른 공식 홈경기 장소도 [[숭의야구장|인천]]이 아닌 춘천이다. 물론 이 때는 [[숭의야구장]]이 공사 중이어서 춘천에서 경기를 연 것이다. 이 때 야구 경기가 열렸던 춘천야구장은 철거되었고 [[의암 야구장]]이 그 대체 성격으로 완공되었다.] 현재는 [[한화 이글스]]와 [[삼성 라이온즈]]가 각각 영서지역 고등학교(강원고, 원주고)와 영동지역 고등학교(설악고, 강릉고)들을 대상으로 신인 1차 지명권을 갖고 있지만 홈경기 개최 권한과 신인 지명권 관할 지역은 엄연히 별개의 사안이다. [[WKBL]]에서는 [[아산 우리은행 위비|우리은행 농구단]]이 오랫동안 춘천 연고팀으로 있었지만 2016~2017 시즌부터 돌연 [[아산시]]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강원도 연고의 농구팀은 [[원주 DB 프로미]]만이 남게 됐다.
         아이스하키는 2005년부터 춘천 [[의암 빙상장]]에 [[하이원(아이스하키팀)|하이원]]이 자리잡고 있고[* 경기도 고양시와 공동연고지라 홈경기가 나뉘어 열린다.], 2016년 강릉 하키센터를 홈구장으로 [[대명 킬러웨일즈]]가 창단해[* 평창 올림픽까지 인천 선학국제빙상경기장을 임시 홈구장으로 사용] 프로 아이스하키팀이 2팀이 되었다. 2팀 모두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에 참가 중이다.
         '''4계절 상관없이 하는''' [[바둑]]팀이 있다. [[한국여자바둑리그]]에 [[인제군]]이 참가하여 인제 하늘내린이 있다. [[한국시니어바둑리그]]에는 [[삼척시]]가 참가하여 삼척 해상케이블카 팀이 있다.
         전문대학으로는 [[강릉영동대학교]], [[강원관광대학교]], [[강원도립대학]], [[상지영서대학교]], [[세경대학교]], [[송곡대학교]], [[송호대학교]], [[한국골프대학]], [[한림성심대학교]] 등이 있으며, 폴리텍대학은 각각 강릉, 원주, 춘천에 캠퍼스를 두고 있다.
  • 실업팀 . . . . 37회 일치
         [[스포츠]] 팀의 구성 구조. 영어로는 Works team 혹은 factory team이라 불리는 형태. 일본어로는 실업단(実業団)이라고 부른다. [[아마추어]] 스포츠의 한 형태[* 대한민국의 경우, [[세미프로]]까지는 아마추어의 성격을 분명히 가지고 있으므로 넓은 의미에서 아마추어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다.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종목을 불문하고 각 지역을 대표하여 [[전국체육대회]](이하 전국체전)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
         실업팀의 운영 실태는 모 회사나 운영단체의 성향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다. 일반 종업원과 똑같이 업무를 하고, 잔업 시간이나 여가 시간에만 연습과 시합을 하며 어디까지나 부가 활동으로서 하는 경우도 있으나, 사실상 실업팀 활동이 주가 되며 활동이 거의 프로 스포츠 [[클럽팀]]과 같은 수준으로, 형식만 실업팀일 뿐이지 종업원으로서의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스포츠 활동에만 노력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는 해당 종목을 관할하는 협회의 기준에 따라 준프로 내지는 세미프로로 규정되기도 하며,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는다.[* 축구의 경우, KFA에서는 세미프로로 규정된 실업팀들은 대학팀 같은 완전한 아마추어 팀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팀으로 규정된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FA컵]]에서 1라운드 예선을 면제받고 2라운드부터 참가할 수 있는 등의 혜택을 받는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군부대나 공공기관 단위로 실업팀이 조직되었으며, 이 같은 실업팀들이 높은 명성을 누렸다. 일본에서는 쇼와 초기에 실업단이라는 명칭으로 실업팀을 창설하였으며, 일본 만이 아니라 한국, 대만에도 이러한 문화가 퍼져서 실업팀 중심의 스포츠 문화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프로 스포츠]]의 발전과 함께 각국에서 실업팀은 문제점이 드러나서 쇠퇴하는 추세에 있다.
         == 한국의 실업팀 ==
         [[한국]]에서는 국민체육진흥법에 따라서 지자체, 공공기관이 의무적으로 운동경기부(실업팀)을 두도록 하고 있는데, 지자체는 실업팀을 '1팀 이상'을 두도록 되어 있으며, 공공기관의 경우는 상시 근무하는 직장인이 1천명 이상인 경우에 설치하여 운용하도록 한다. 이 의무는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 신청을 거쳐서 면제될 수 있다.
         [[야구]], [[축구]], [[농구]], [[배구]]에서는 [[프로 스포츠]]화가 진행되기 전 까지 기업 실업팀 실업리그가 '최상위 리그'로서 명성을 누렸다. 야구와 축구는 1980년대 프로가 출범하기 전 까지, 농구와 배구는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프로가 시작되기 이전까지가 실업리그의 전성기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종목에서 프로 리그 출범 이후로 많은 실업팀 선수가 프로선수로 전환했다. 축구의 경우는 [[중공업]], [[조선]], [[석유화학]] 등 제조업 팀이 많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한국축구를 이끌어 나간 중심은 금융팀이 금융단 축구를 박정희의 비호 아래 육성하면서 본격적인 세미프로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야구는 한 때 실업리그가 존폐 상태에 놓일 정도로 쇠퇴했으나 2010년대에는 [[프로야구]] 붐을 타고 아마추어 야구단이 새롭게 설립되면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농구, 배구는 실업팀이 고사 위기에 놓인 상태이다.
         지자체 실업팀(운동경기부)는 주로 [[전국체전]]과 그에 이은 [[올림픽]]을 목표로 육성되고 있다. 프로화가 활성되지 않은 종목에서는 지자체 팀은 사실상 예비 [[국가대표]]라고 할 수 있다.
         그냥 경영진이 해당 스포츠를 좋아해서 실업팀을 꾸리는 경우도 있다. 농담인 것 같지만 진짜다. 삼성그룹의 회장인 이건희의 경우 원래 럭비를 좋아해서 럭비 실업팀을 운영한 것으로 유명하다.[* 프로축구팀 성남은 아예 일화가 운영하던 시절, 일화가 창단한 이유중 하나가 통일교 문선명 총재의 취미가 강하게 작용했다고 보기도 한다. 프로팀도 취미로 운영할 수 있는데 실업팀 쯤이야(...)]
         프로 스포츠가 없는 곳에서는 지자체가 실업팀을 운영하여 경기를 통해 지역주민들에게 여가활동을 제공하거나, 지자체의 명예와 시민의 고양을 위해 전국체전에서의 활약을 노리고 실업팀을 운영하거나 유치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전국체전의 활약은 시민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독립된 조직이 아닌, 상부 조직의 일개 부서이기 때문에 실업팀은 외부 압력에 독자적인 생존능력이 약하다. 이는 지자체 팀에서도 마찬가지이며, 한국에서 여러 지자체는 실업팀을 너무 쉽게 해체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게다가 프로 스포츠는 전 세계적으로 "지역밀착형 중심의 운영"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에 실업팀은 기업에 종속되었기 때문에 "기업이 주소지를 이전하면 그 지역과는 관계청산"이라는 한계가 있다. 일례로 코레일이 본사를 옮기자 팀도 같이 움직이면서 [http://www.fnnews.com/news/201401161713584684|인천 연고였던 팀은 어느새 대전으로 가게 되는] 것.
         === 프로 스포츠의 활성화 ===
         안토니오 사마란치 위원장 시기에 올림픽의 상업화가 추진되면서, 프로 선수의 출전을 용인하는 흐름이 되었다. 이 때문에 올림픽이라는 세계 무대가 프로 선수에게 전면적으로 개방되면서, 많은 스포츠 단체가 굳이 실업팀 같은 형태로 아마추어 신분을 유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프로 스포츠로서 활성화된 종목에서는 실업팀이 대부분 고사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축구는 아예 "프로화"를 FIFA와 대륙급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권장함은 물론이고 [[AFC 챔피언스 리그]]와 같은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인화가 완료되었으며 프로선수로 구성된 "완전한 프로팀"만이 참가가 가능하도록 규정하는 등, 사실상 프로와 아마추어의 간극을 넓게 만들고 있다.
         20세기에는 '사내'에 조직을 두는 것을 우선시 하던 한국, 일본에서도 21세기에는 스폰싱과 그로 인한 홍보 성과 계산이 일반화 되었다. 이로 인하여 조직이 분리되는 것이 실업팀의 쇠퇴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일본의 경우는 과거의 실업팀들은 법인화를 통해 독자적인 클럽팀으로 전환하고, 기존의 실업 모체는 스폰서로 전환되어 조직이 아예 분리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 이소선 . . . . 37회 일치
         이소선은 1929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대구시]] [[대구광역시]] 에서 빈농인 이성조와 김분이 사이의 1남 2녀 중 막내 딸로 태어났다. 호적에는 1930년에 올렸다.<ref name="오마이뉴스연재8">[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5085 이소선의 어린 시절, 그녀는 빈농의 둘째 딸],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8), 2014.06.12</ref> 아버지는 "딸 아이를 보니 무릉도원에 온 것 같이 마음이 편안해 지고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며 이름을 소선(小仙)이라고 지었다.<ref name="경향신문기획연재2">[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07174239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2) - 이 아이 이름은 작은 선녀], 경향신문, 2009년 1월 7일</ref> 이소선이 서너살 때 아버지 이성조는 항일 농촌 운동을 하다 일제에게 발각되어 끌려갔다.<ref name="오마이뉴스연재8" /> 이소선은 아버지가 산으로 끌려가 학살되었다고 회고하였지만<ref name="경향신문기획연재2" />, 관련 기록은 [[한국 전쟁]]을 거치며 소실되었다.<ref name="경향신문기획연재3">[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08175244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3) - 네 살 때 멈춘 ‘아버지 기억’], 경향신문, 2009년 1월 8일</ref> 아버지가 죽은 뒤 소작할 땅마저 떼이자 가족들은 감천리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다. 어머니는 가족을 대리고 나오며 집에 불을 질렀다. 이소선은 평생 아버지가 없는 외로움을 느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111829475&code=210100&s_code=af077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4) - 금지된 말이 된 ‘아버지], 경향신문, 2009년 1월 11일</ref> 이소선의 가족은 산 속 상엿집에 머무는 등 이곳 저곳을 전전하다 [[와룡산]] 기슭의 홀어미 집에 더부살이를 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141753535&code=210000&s_code=af077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5) - 와룡산 아래 더부살이], 경향신문, 2009년 1월 14일</ref>
         어머니 김분이는 이미 열넷이었던 장녀는 친정으로 보내고 아홉살 아들과 이소선을 데리고 이웃 마을인 [[박서면]]으로 후처 살이 재가를 하였다.<ref name="오마이뉴스연재8" /> 어머니는 해어진 이후로 큰 딸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이소선의 언니는 이미 시집을 갔기 때문에 어머니가 재가했다는 소문이 나면 좋지 않을 것 같아 그리하였다고 한다. 이소선의 언니는 1남 3녀를 낳고 살다 1964년에 사망하였고, 이소선은 언니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 언니가 있었다는 것은 전태일의 동상 재막식 이후에 조카들이 찾아와 알게 되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29175914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11) - 목걸이로 부활한 ‘언니’], 경향신문, 2009년 1월 29일</ref>
         새아버지는 어머니 보다 20살이 많았다. 이소선은 어머니의 재가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한번도 새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151815325&code=210100&s_code=af077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6) - 오빠 살리려 개가한 어머니], 경향신문, 2009년 1월 14일</ref> 일제 말기에 오빠는 징용으로 끌려갔고 이소선은 공출을 위한 관솔가지 꺾기 등을 하며 어렵게 지냈다.<ref name="오마이뉴스연재8" /> 이소선은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집에서 허락하지 않아 다닐 수 없었다. 한글은 어머니가 재가한 집안에 시집 온 분에게 배웠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6888 밤새 구구단 외워, 고무신을 상으로 받은 이소선],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9), 2014.06.12</ref> 이소선은 집안 몰래 일본이 세운 간이 학교(오늘날의 [[대구서재초등학교]])를 다니는 친구들 틈에 섞여 들어가 구구단을 배웠지만 곧 들켜 매를 맞고 그만두게 되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05175804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14) - 대물림 된 ‘못배운 한’], 2009년 2월 5일</ref> 헤어진 오빠와는 해방이 되어서도 다시 만나지 못했고 36년 만에야 다시 만날 수 있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22174404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9) - 일본으로 떠난 오빠], 2009년 1월 22일</ref>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5년 늦봄 열다섯살 이소선은 정신대에 끌려간다며 결혼을 재촉받았지만 결혼할 마음이 없었다. 결국 면사무소 직원이 명령서를 가져왔고 대구에 있는 방직공장으로 끌려갔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5089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안 그러면 정신대에서..."],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10), 2014.06.12</ref> 방직공장은 대마로 베를 짜서 군복을 만드는 곳이었다.<ref name="오마이뉴스연재1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5090 한밤 중 토마토 몰래 따 먹으며 배고픔을 달래다],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11),2014.06.12</ref> 이소선은 콩깻묵과 옥수수에 밀가루를 섞은 주먹밥을 먹으며 하루 14시간씩 일했다. 일은 방적기가 쉼 없이 돌아가도록 실을 이어주는 것이었고, 공장 안은 먼지가 뿌옇고 햇빛도 들지 않아 불결하였다. 함께 작업하던 여성이 기계에 빨려 들어가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22173503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21) - ‘근로 정신대’의 슬픈 기억], 경향신문, 2009년 2월 22일 </ref>
         이소선은 매일 매를 맞고 죽을 위험을 겪으며 공장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도망을 쳤다. 공장 감시자가 쫓아왔지만 숨겨 주는 사람이 있어 도망칠 수 있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25182343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22) - ‘정신대 탈출], 경향신문, 2009년 2월 25일</ref> 도망쳐 고향에 돌아온 이소선은 잠시 동안 산 속에 숨어 살았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5091 "에라 모르겠다" 소선은 눈 딱 감고 뛰어 내렸다],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12), 2014.06.12</ref>
         이소선은 1947년 전상수와 결혼하였다. 전상수의 아버지는 대구시 남산동에서 포목상을 하였다. 전상수는 의류 제조 공장에 다니다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사건]]에 가담하였다. [[미군정]]과 경찰의 잔혹한 탄압으로 사건이 마무리 된 후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재봉틀을 마련하여 직접 옷을 만들어 팔았다. 이소선은 중매로 결혼하였고 결혼 전에야 신랑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04180521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25) - 결혼하기 싫어 사흘 굶어], 경향신문, 2009년 2월 25일</ref> 이소선은 남편에게 그리 정이 가지 않았다. 1948년 음력 8월 24일 첫 아들 [[전태일]]을 낳았다. 전태일을 갖을 때 잉어가 구슬을 가슴에 안겨주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5093 "시집가기 싫어"... 아버지 산소로 도망가다],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14), 2014.06.12</ref>
         전상수는 여러 사업을 크게 벌리다 일이 어렵게 되자 가족을 데리고 부산으로 갔다. [[한국 전쟁]] 직전이었다. 이소선은 둘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자갈치시장]]에서 지냈다. 1950년 6월 15일 둘째 [[전태삼]]을 낳았다. 집도 없이 시장에서 지내다 전상수가 포목점에 취직하여 지낼 곳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93137 자갈치시장서 둘째 낳은 소선, 고생은 계속됐다],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15), 2014.06.12</ref> 부산에서 피란 생활을 하면서 잠시 장사가 잘 되어 비교적 평온한 삶을 산 적도 있지만 공장을 크게 늘린 일이 잘못되어 가세가 기울었다.<ref name="경향30">[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15182422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30) - 아득한 행복했던 순간], 경향신문, 2009년 3월 15일</ref> 장마철 큰 비에 창고 지붕이 무너져 재료를 모두 못쓰게 된 것이다.<ref name="오마이뉴스18">[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94490 "말짱한 젊은 년이 뭐가 아쉬워 구걸을 다녀"],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18), 2014.06.12</ref> 전상수는 점점 술에 취해 폭력적으로 변해갔고, 일이 풀리지 않아 빚을 지면 가재를 모두 팔아 정리하고 가족을 길바닥에 둔채 자취를 감추기 일쑤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10175112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27) - 지우고 싶은 남편의 기억], 경향신문, 2009년 3월 10일</ref> 1953년 셋째 [[전순옥]]이 태어났다.<ref name="경향30" />
         전쟁이 끝나고 남편 전상수는 사업 기회를 보려 서울로 상경하였고 그 사이 시아버지가 사망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22183009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33) - ‘버팀목’ 시아버지 별세], 경향신문, 2009년 3월 23일</ref> 아이들을 끌고 무작정 상경한 이소선은 [[염천교]] 근처에서 가족과 노숙하였다. 남편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자 이소선은 고등어의 배를 따는 일을 하고 얻은 품삯으로 시래기를 사서 국을 끓이고 아이들을 먹였다. 집이 없어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잤고, 일을 구하지 못할 때에는 걸식을 했다.<ref name="오마이뉴스18" />
         {{인용문2| 내가 밥을 구해오면 태삼이가 이런다. 엄마, 우리 밥은 왜 색깔이 뻘겋고 까맣고 여러 색깔이냐고 물어. 이집 저집에서 얻어오니 콩밥도 있고, 보리밥도 있고 하니 울긋불긋 하지 않았겠냐. 그 말을 들으니 막 설움이 치받아 올라오는 거야. 여기 가슴에서. |이소선<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251755255&code=210000&s_code=af077#csidx9d453f1619bfab5b3362c807fe859ba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34) - 걸식·행상 ‘힘겨운 서울살이’], 경향신문, 2009년 3월 25일</ref>}}
         전상수는 어렵사리 다시 자리를 잡고 술도 끊고 일을 했다. 남편이 남대문 시장에서 일하는 사이 이소선은 아이들을 데리고 미아리 공동묘지 앞이며 도동으로 옮겨다니며 살았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94532 전쟁과 가난이 어린 전태일을 조숙하게 만들었다],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21), 2014.06.12</ref> 열심히 일을 해서 1년 만에 판잣집을 장만했고 다시 공장을 차렸다. 이 즈음 막내 [[전순덕]]이 태어났고 전태일은 초등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하였다. 그러나 [[4.19 혁명]] 즈음 있었던 큰 규모의 학교 체육복 납품 과정에서 브로커가 대금을 가로채 잠적하자 집안은 다시 주저 앉았다. 전상수는 도망다녔고 이소선은 신경 쇠약에 걸려 밤마다 집 밖을 헤맸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26175629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35) - 소년가장 된 전태일], 경향신문, 2009년 3월 25일</ref>
         아버지가 사라지고 어머니가 병약해지자 집안의 살림은 전태일이 꾸려야했다. 전태일은 초등학교를 그만두고 신문팔이며 삼발이 장사를 했지만 시원치 않았다. 받아온 삼발이 값을 치뤄야 하는 월말이 되자 어찌 할 바를 모르게 된 전태일은 무작정 가출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29174009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36) - 전태일의 가출], 경향신문, 2009년 3월 25일</ref>
         이소선이 서울에 올라와 일을 알아보는 사이 대구에선 아버지의 매질에 견딜 수 없던 전태일이 동생 순덕이를 데리고 상경하였다. 전태일은 순덕을 버리려고 하였으나 차마 그러지 못하고 시청 미아보호소에 맡겼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409175249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41) - 태일이 막내동생과 생이별], 경향신문, 2009년 4월 9일 </ref> 그 사이 이소선은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예전 서울 살 때 알았던 남산 판자촌의 지인에게 얹혀 살았다. 전태일이 그 집을 물어 물어 찾아와 이소선이 일하는 식당 앞에 나타났다. 모자는 다시 만나게 되어 끌어 안고 울었다. 식당에서 고되게 일하던 이소선은 어느날 심하게 하혈을 하였고 그 길로 식당일을 그만 두게 되었다.<ref name="경향42">[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413175032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42) - 다시 만난 母子의 다짐], 경향신문, 2009년 4월 13일 </ref>
         하혈 때문에 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식당에서 번 돈은 모두 병원비로 쓰였다.<ref name="오마이뉴스27">[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04699 애들 부끄럽지 않게... 미군 지프차를 돌려보내다],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27), 2014.06.12</ref> 이소선은 병원을 나온 뒤 시장에서 우거지를 주워 삶아 팔았다.<ref name="경향42" /> 이소선과 함께 살게 된 전태일은 남대문시장을 돌며 구두닦이며 신문팔이를 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거지들 틈에서 동생 전태삼을 발견하였다. 전태삼은 어머니와 형을 찾아 무작정 서울로 온 뒤 거지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후 전태일은 남대문에서 돈을 벌고 태삼은 달동네의 물지게를 지어 생계를 도왔다. 전태일은 아동보호소에 맡긴 순덕이를 찾아오기 위해서라도 집을 마련하고 싶었고 [[평화시장]]의 미싱 보조가 되었다.<ref name="오마이뉴스27" /> 가족은 지인 집 마루에 자리를 마련하고 지내고 있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419181908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44) - 봉제공장‘시다’로 첫 출근], - 다시 만난 母子의 다짐], 경향신문, 2009년 4월 26일</ref>
         당국은 이재민에게 천막 하나를 주고 [[도봉동]] 개울가로 내몰았다. 이소선의 가족은 [[쌍문동]] 공동묘지 근처 208번지로 이사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422175815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45) - 판자촌에 다시 모인 가족], 경향신문, 2009년 4월 22일</ref> 이소선이 살던 쌍문동 집은 무허가 판잣집이었다. 간혹 단속반이 와서 헐고 갔기 때문에 시멘트 블럭만을 쌓아 올려 벽을 만들었다가 헐리면 다시 세웠다. 전태일은 단속반이 집을 헐며 블럭을 부수면 다시 사야하기 때문에 단속반이 온다는 소리를 들으면 미리 집을 헐어 두었다고 한다.<ref name="경향46">[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423174542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46) - 쌍문동 208번지], 경향신문, 2009년 4월 23일</ref> 이 무렵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미싱사가 되었으며 동생 순옥이 만한 어린 소녀들이 퀴퀴한 다락방에서 쉴 새 없이 일하다 폐병을 앓는다고 안타까워 했다. 전태일은 공장에서 있었던 일을 어머니께 자세히 말하곤 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4261859022&code=2101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47) - 춥고 배고픈 어린 시다들], 경향신문, 2009년 4월 27일</ref>
         전태일은 평화시장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친구들과 자신의 집에 모여 앉아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여러 사람이 앉아야 해서 전태일은 단속반 때문에 집을 헐었다 지을 때 마다 방을 조금씩 넓혀 지었다.<ref name="오마이뉴스31" /> 쌍문동 판잣집은 1980년 재개발 때 철거되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4291847202&code=2101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48)], 2009년 4월 29일</ref> 1969년 6월 남편 전상수는 지병으로 사망하였다.<ref name="연표">[http://www.chuntaeil.org/?r=home&c=1/12/18 이소선 어머니 걸어오신 길], 전태일재단</ref>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아들 [[전태일]]이 평화시장 앞 거리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엔 쉬게 하라"와 같은 구호를 외치며 분신하였다.<ref>[[조영래]], 《전태일 평전: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돌베개, 1991) 283페이지</ref><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59640 전태일 분신 순간 오갔던 긴박한 대화들],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3), 2014년 6월 12일</ref> 이소선은 구역 예배를 돌고 있다 동네 주민이 건내준 라디오에서 나오는 뉴스를 듣고 이 사실을 알았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59623 아들이 죽었는데... 버스 타고 간 이 여인],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1), 2014년 6월 12일</ref> 전태일은 메디컬 병원에서 성모병원으로 옮겨졌고 이미 가망이 없었다. 전태일은 달려온 친구들과 어머니에게 자신이 못다한 일을 다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전태일은 이소선에게 거듭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말고 자신의 부탁을 들어달라 간청하였고 큰 소리로 대답하게 하였다. 이소선은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니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라고 크게 대답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5211752042&code=210100&s_code=af077#csidxf48d2d357d2bfa4844d69c179a524c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59) - 문학 보수화, 예술적 성취 다양한 분석], 경향신문, 2009년 5월 21일</ref> 그날 오후 10시 전태일은 "배가 고프다"는 말을 남기고 사망하였다.<ref>조영래, 《전태일 평전: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돌베개, 1991) 289페이지</ref>
         이소선은 노동운동가들이 《전태일평전》을 읽고 그 길에 뛰어들었다는 말을 하면 무척이나 마음 아파했다. 이후로도 계속 되는 노동자의 분신과 자살이 있을 때 마다 마치 자신이 죄가 있어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ref name="오픈아카이브">[http://db.kdemocracy.or.kr/contents/view/165 어머니 이소선], 오픈아카이브</ref> 그래서 어디를 가서 이야기를 하던 제발 살아서 싸워라 살아서 싸우고 살아서 바꾸라고 이야기 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50468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씨 "죽지 말고 살아서 싸워라"], 오마이뉴스, 2009년 6월 5일</ref> 1986년 신흥정밀 노종자 [[박영진]]이 분신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소선은 병원으로 달려갔다. 중환자실을 막고선 형사들에게 내 아들이라고 소리치며 들어가 손을 잡고 "죽지 말고 살아서 싸워야지 왜 그랬냐"고 하여 주위의 사람들을 숙연케 하였다.<ref name="오픈아카이브" />
         이소선은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수 많은 사람들의 장례위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2003년 두산중공업의 노동자 [[배달호]]가 분신 사망하였을 때에도 장례위원을 지냈고<ref>[http://news.hankyung.com/article/2003031462508 분신 고 배달호씨 전국노동자葬 거행], 한국경제, 2003년 3월 13일</ref>,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에도 장례위원을 지냈다. 이소선은 [[원진레이온]] 사태 때부터 노무현과 인연을 맺었고, [[이석규 장례투쟁]]에서는 함께 장례위원을 지내기도 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5271756105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61) - “살지, 살아서 싸우지 왜 죽어”], 경향신문, 2009년 5월 27일 </ref>
         이소선은 80세의 고령에도 계속하여 부르는 곳이면 마다 않고 참석하였다. 그러나 부른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을 하지는 않았다. 2006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전태일노동상의 시상을 마치고 내려가다 다시 마이크를 붙잡고 "입으로만 노동자는 하나라고 외치면 뭐 하냐. 가장 밑바닥에서 소외받고 고통당하는 비정규직을 나 몰라라 해서 어찌 민주노총이라 할 수 있냐 …… 손잡고 싸우지 않으면 얼마 못 가 정규직도 비정규직 신세가 될 것"이라고 소리쳤고<ref>[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25965.html 노동자 어머니 이소선 “지금 정규직이라고 천년만년 할것 같냐”], 한겨레, 2008년 12월 5일</ref> 늘 노동자의 하나된 단결을 강조했다. 2009년 전태일 39주기 추모식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함께 플래카드에 이름을 올리자 이제 되었다며 무척 기뻐하였다.<ref name="연합_전순옥">[http://klsi.org/content/%EC%9D%B4%EC%86%8C%EC%84%A0-%EC%96%B4%EB%A8%B8%EB%8B%88%EC%99%80-%EB%85%B8%EB%8F%99%EC%9A%B4%EB%8F%99 이소선 어머니와 노동운동], 한국노동사회연구소</ref>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이소선은 늘 일자리 나누기와 노동시간 단축으로 위기를 고용문제를 극복하자고 주장하였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9/03/0200000000AKR20110903057900004.HTML "이소선 여사는 따뜻한 마음의 노동운동가"], 연합뉴스, 2011년 9월 3일</ref>
         이소선은 2011년 7월 18일 심장마비로 입원하였다. 바로 그 때까지도 이소선은 [[김진숙]]의 고공농성을 지지하기 위한 [[희망버스]]를 타고 창원으로 내려가려고 하였다. 그해 1월에는 김진숙에게 보내는 영상 편지를 통해 살아서 싸워야지 죽으면 안된다고 당부하기도 하였다. 2011년 9월 3일 이소선은 결국 회복되지 못하고 별세하였다.<ref>[http://worknworld.kctu.org/news/articleView.html?idxno=240677 이소선 어머니 3일 오전 한일병원서 별세], 노동과 세계, 2011년 9월 3일</ref> 장례는 9월 7일 유가족과 노동계를 비롯한 많은 시민이 함께 하는 가운데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ref>[http://nodong.org/statement/642547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 민주노총, 2011년 9월 4일</ref> 마석 모란공원에 있는 전태일 묘소의 뒷편에 묻혔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23409 이소선, 41년 만에 아들 전태일과 함께 잠들다], 오마이뉴스, 2011년 9월 7일</ref> 이소선의 민주사회장에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모두가 장례위원으로 참여하였다.<ref>[http://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6263 양대 노총 “어머니 마지막 길, 노동자들이 함께”], 매일노동뉴스, 2011년 9월 6일</ref>
  • 강동우 . . . . 33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2, top1=야구 관련 인물(KBO), top2=두산 베어스/선수단)]
         || '''생년월일''' || [[1975년]] [[4월 20일]] ([age(1975-04-20)]세)[* 네이버 등에는 [[4월 20일]] 출생으로 1974년생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호적상 생일로 주민등록상에만 이렇게 올라와 있고, 실제로는 1975년생이라고 한다. ~~태어나기도 전에 출생신고를?~~ 그래서 1974년생 [[이병규]]를 단국대 1년 선배로 취급하고 1975년생 [[조인성(야구선수)|조인성]], [[김동주(타자)|김동주]]와 친구로 지내는 듯.] ||
         || '''학력''' || 칠성초-경상중-[[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단국대학교|단국대]] [* 1994학번] ||
         || '''프로입단''' || [[한국프로야구/1998년/신인드래프트|1998년 1차 지명]] ([[삼성 라이온즈|삼성]]) ||
         ||<-2><table align=center>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
         ||<rowbgcolor=#074CA1> '''[[2002년 한국시리즈|{{{#FFFFFF 2002}}}]]''' || '''[[2005년 한국시리즈|{{{#FFFFFF 2005}}}]]''' ||
         || [[김영진(야구)|김영진]](1995~1997) || → || '''강동우(1998~1999)''' || → || [[진갑용]](2000~2015.8.6) ||
         [[대한민국]]의 전직 [[프로야구]] 선수이자 '''비운의 선수'''로 꼽히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한 명. 2018년 현재는 [[두산 베어스]]의 1군 타격코치.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 - [[단국대학교|단국대]]를 졸업하고 [[1998년]]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당시 삼성의 외야에는 [[최익성]], [[신동주(야구)|신동주]], [[양준혁]]이 주전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전년도 맹활약했던 최익성-신동주 우타 외야 라인에 부진 및 부상이 닥치자 데뷔 첫 해 주전 자리를 꿰차며 맹활약했다. 그 해 신인왕 후보에까지 올랐으나 고졸로 12승을 거둔데다 우승 프리미엄까지 누린 당시 [[현대 유니콘스]]의 고졸 신인 [[김수경(투수)|김수경]]에게 신인왕 자리를 내줬다. 또한 그 해 개최된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야구|방콕 아시안게임 대표팀]] 엔트리에 선발되어 있었다. 삼성의 연고지인 [[대구광역시]] 토박이인지라 프랜차이즈성도 탁월하여 향후 삼성의 주전 [[외야수]]가 될 것으로 기대받으며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해 [[10월 16일]] 벌어진 사건으로 인하여 강동우의 지독한 불운이 시작되었다.'''
         [[LG 트윈스]]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 때 [[이병규]]의 큼지막한 홈런성 타구를 뛰어올라 잡아내는 과정에서 왼쪽 다리가 펜스 사이의 틈새에 끼면서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구장]][[개미를 죽입시다 개미는 나의 원수|을 주깁시다 대구구장은 우리의 원쑤]]~~ '''정강이뼈가 뒤틀리며 골절되는 중상'''을 입고 바로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이때 [[이병규]]가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던 도중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제스처를 취한 것이 방송을 타면서 '후배(강동우는 [[이병규]]의 단국대 1년 후배)가 부상당한 게 그렇게도 고소하냐'며 무한 까임을 당했다. [[이병규]]는 강동우가 부상당한 것을 모르고 홈런성 타구가 잡힌 것이 아쉽다는 표현을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판단은 알아서.][* 이후 베이스볼 긱에서 [[이도형]]과 함께 한 인터뷰에서 [[이도형]]이 이 사건을 언급하였다. 강동우는 '병규형이랑 단국대 다니면서 참 친하게 지냈는데'라는 말부터 꺼냈는데 그 후엔 계속 [[이병규]]를 '''그 사람'''이라고 하였다. 끝에는 [[이병규]]와 오해를 풀었다는 말을 했지만 대학 1년 선배를 '''그 사람'''이라고 칭한 것 자체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2017년 시점에서는 강동우가 은퇴하고 두산 코치로 합류하고 이병규도 은퇴한 뒤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던 시절엔 서로 웃으며 연락처도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076&aid=0003097584|주고받는 등]] 지금은 그다지 나쁜 사이는 아닌 듯.] 이 부상 탓에 강동우의 인생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부상만 아니었다면 강동우는 트레이드되지 않고 마지막까지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의사의 소견으로는 '야구 선수로는 물론이고 정상인으로서의 생활도 힘들다'고 했을 정도로 심한 부상이었다. 당연히 대표팀에서도 탈락되었으며[* 어쨌거나 이 부상으로 인해 군 면제를 받기는 했다.][* 대신 드림팀 막차에 승선한 [[심재학]]은 1998 시즌을 마치고 공익 입대가 예정되어 있어 군대로 끌려갈 뻔했던 상황이었는데, 강동우의 대타로 합류해 병역특례를 받는데 성공했다.] 2년 간의 재활이 시작된다.
         피나는 노력으로 재활을 마치고 2000년 시즌 막판에 겨우 복귀해서 다시 삼성의 주전 [[외야수]]로 활약하지만, 신인 시절의 성적은 다시 나오지 않았고 평범한 선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류중일]] 코치가 선수 시절에 달던 1번을 달고 뛰며 타격에서는 나름대로 제몫을 하며 삼성의 주전 외야수로 활동했고, 2002년 [[김응용]] 감독 아래에서 타율 0.288, 9홈런으로 어느 정도 부활에 성공하였다. [[2002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는 2001년 데뷔하여 삼성의 붙박이 타자가 된 왕년의 좌타 [[라이벌]] [[박한이]]와 함께 [[테이블 세터]]를 이뤄 활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 타율이 2할 중후반에 머무르는 바람에 '비운의 톱타자'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후 [[선동열]] 감독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외야진 보강 차원에서 2006년 3월 [[두산 베어스]]의 [[강봉규]], [[김창희(야구)|김창희]]를 상대로 [[트레이드]]되고 말았다. 당시 삼성 팬들은 격분하여 난리를 쳤다. 이는 훗날 [[양준혁]]의 등떠밀기식 은퇴, [[이승엽 와도 자리없다]]는 발언 등과 함께 [[선동열]]의 삼성 프랜차이즈 내치기 사건 중 하나다.
         이미 [[삼성 라이온즈]]를 떠난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삼성 팬들에게 [[강기웅]], [[박충식]]과 함께 여전히 안타까움으로 가슴에 남는 선수다.[* 다만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을 때는 까였던 적도 있다.] 강동우와 관련된 신문기사의 리플을 보면 '''[[한화 이글스|한화]] 팬들보다 삼성 팬들의 응원이 더 많을 때도 있다.'''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삼갤]]에는 간간히 '은퇴식만큼은 삼성에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이 올라온다. 이미 [[마해영]]의 사례도 있고.
         [[트레이드]]를 통해 [[두산 베어스]] 유니폼을 입기는 했지만, [[저니맨|이후 한 팀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여러 팀을 전전하게 된다.]] 2006 시즌에는 두산에서 그럭저럭 주전 경쟁을 했지만, 2007년 [[김경문]]이 직접 키운 [[외야수]] [[이종욱(야구선수)|이종욱]], [[김현수(1988)|김현수]] 등등이 펄펄 날아다니기 시작하면서 1군에서 탈락, 줄곧 2군에 머물게 된다. 결국 2007 시즌 종료 후 다시 좌완 투수 이윤학[* 2018년부터 KIA에서 뛰는 우완투수 [[이윤학]]과는 동명이인. 이쪽은 좌완투수였다.]을 상대로 [[KIA 타이거즈]]에 트레이드됐다.
         2009년 12월 의지노력상을 수상한 강동우.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 체력적으로 힘든 [[테이블 세터]]를 다른 선수가 맡아주길 바랬으나... [[고동진(야구선수)|개막전에서 시범으로 다른 선수를 1번으로 기용했다가 쫄딱]] [[망했어요]]. 그래서 이 해도 1번타자로 활약했다.(...) ~~그나마 포지션은 주로 [[우익수]]로 뛰는게 다행...인가?~~
         이후 꾸준히 제몫을 해냈으나 허리 미세통증으로 인해 6월 26일자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회복기간을 거쳐 7월 10일 1군에 복귀. 한화는 강동우가 2군에 내려가 있는 동안 [[고동진(야구선수)|고동진]], [[양성우(야구선수)|양성우]] 등을 1번 타자 자리에 기용하였으나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실제로 강동우가 2군으로 내려가 있는 동안 한화는 2승 7패로 부진을 면치 못했다. 마지막에는 '''[[장성호]]가 1번 타자'''로 기용될 정도였으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지? 1군으로 올라왔으나 별 활약을 하지 못하고 8월 2일 이후로 다시 2군행. 다행히 1번 구멍은 [[오선진]]이 각성하면서 메울 수 있게 되었다.
         [[2015년]]에는 2군 주루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는데, 기동력 강화 차원에서 [[4월 7일]]에 1군 1루 주루코치로 콜업되었다. 대신 [[장원진]] 타격코치가 말소되고 기존의 1루 주루코치이자 수비코치 겸임이었던 [[강석천]]은 수비코치만 맡는다. [[장원진]] 타격코치는 [[박철우(야구)|박철우]] 타격코치를 보조하기로 했다.
         여러 팀을 전전하는 [[저니맨]]이었다. 은근히 1990년대 중후반에 [[삼성 라이온즈]]에서 활약했던 저니맨들이 많다. 그의 전임 1번타자였던 [[최익성]]과 [[이동수(야구선수)|이동수]], [[신동주(야구)|신동주]] 등.
         O형 수염 자국이 선명한, 살짝 [[마초]]적인 매력이 느껴지는 상당한 [[미중년]]이다. 2014년 4월 19일까지 미혼(!!)이었다. 2011 시즌 중반부터 굉장한 활약을 펼치던 때의 스포츠신문 인터뷰 중 '체력 관리의 비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친구가 보내 주는 [[인삼]]을 꾸준히 먹고 있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팬들은 '저런 건 친구가 아니라 와이프가 챙겨줘야 되는데...'라며 심히 안타까워했다. 어느새 '동우햄 장가 보내기'는 새 시즌 한화팬들의 중요한 목표가 되어 가고 있다. 실제로 2013년에는 [[류택현]] 바로 다음으로 나이 많은 미혼의 프로야구 현역 선수였다. 위의 사례에서 팬들이 안타까워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결국 2013 시즌 종료 후 은퇴하면서 이제는 노총각 코치(...). ~~삼성에서 뛰던 소싯적에 선배였던 [[양준혁]]을 그렇게 잘 따랐다더니 엉뚱하게 노총각 운명까지 따르는 걸까~~
         2012년 말 암 투병 중이었던 후배 야구선수 [[이두환]]에게 후원금을 전달해 스토브리그를 훈훈하게 달구었다. ~~이제 장가만 가면 된다~~
  • 구자욱 . . . . 32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2년]]
         |드래프트 순위 = [[2012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2년 2라운드]]([[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5년]] [[3월 28일]] <br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 대 [[SK 와이번스|SK]]전
         * [[상무 야구단]] (2013년 ~ 2014년)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 = [[2017년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2017년]]
         {{메달 스포츠|남자 [[야구]]}}
         {{은메달|[[2013년 동아시아 경기 대회|2013 톈진]]|[[야구]]}}
         '''구자욱'''(具滋昱<ref>한국야구위원회, 2012 가이드북</ref>, [[1993년]] [[2월 12일]] ~ )은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외야수]]이다. [[이승엽]]이 '포스트 [[이승엽]]'으로 지목한 선수이다.
         [[2012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로 고향팀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으나 초기에는 주로 2군에만 머물러 있었으며 시즌 후 곧바로 [[상무 야구단]]에 입대하였다.
         ==[[상무 야구단]] 시절==
         [[2013년]]에는 3번이나 5번 타자로 출장하면서 시즌 중반에는 3할 중반대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시즌 후반 부상으로 결장하면서 3할대의 타율로 시즌을 마쳤다. 그래도 장타율이 늘었고 볼넷/삼진 비율도 꽤나 개선된 모습을 보였다. 2013 시즌 말 동아시아컵에 [[상무 야구단|상무]]-[[경찰 야구단|경찰]] 연합팀의 일원으로 출전했는데, 거기서 좌익수로 전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U-21 야구 월드컵에 참가해서 4할이 넘는 타율과 6번의 도루를 기록하며 절정의 타격감을 보여주었고 도루왕 타이틀까지 차지했다. 이 대회서는 2루수와 중견수로도 나왔는데([[상무 야구단]]에서는 1루수, 3루수, 좌익수, 우익수로만 나오고 중견수를 본 적은 없었다), [[2014년]] 시즌에 투수, 포수, 유격수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소화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스프링캠프와 시범 경기 때 맹활약하며 기대를 받았으나, 외야의 [[최형우 (야구 선수)|최형우]], [[박해민]], [[박한이]], 내야의 [[채태인]], [[박석민]]을 제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시범 경기 때 부상을 당한 [[채태인]]을 대신해 개막전 엔트리에 들어갔으며, 3월 28일 [[SK 와이번스]]와의 개막전에 선발 출전하게 되었다. 데뷔 첫 타석에선 유격수 땅볼로 물러났으나, 두 번째 타석에서 우측 펜스를 직격하는 2루타를 쳐, 데뷔 첫 안타와 타점을 기록하였다. [[4월 1일]] [[kt 위즈|kt]]전에서 [[정대현 (1991년)|정대현]]을 상대로 솔로 홈런을 기록하며 데뷔 첫 홈런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시즌 초반 아쉬운 1루 수비를 보여주었다. 두 번째 홈런을 기록한 [[4월 3일]]을 기점으로 타격감이 안좋아지자, [[강봉규]]가 한동안 1루수로 출전하게 되었다. [[4월 9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강봉규]]의 대타로 타석에 나와 [[김승회]]를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기록하며 데뷔 첫 끝내기 안타를 기록하였다. 다음날 경기에서 부상당한 [[채태인]]이 1군에 올라와 시즌 첫 선발 출장을 했으나, 한 타석만에 그와 교체되었고, 그는 홈런 포함 3타수 2안타로 맹활약하였다. [[채태인]]이 다시 2군으로 내려가며 주전 자리를 이틀만에 꿰찼지만, 다시 타격감이 안 좋아져 [[김정혁 (야구 선수)|김정혁]]이 주전으로 나섰다. 그러나 [[김정혁 (야구 선수)|김정혁]]도 기대 이하의 실력을 보여주었고, [[4월 29일]]에 그는 다시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면서 데뷔 첫 3안타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 뒤로 꾸준히 타격감을 끌어올린 그는 [[채태인]]이 부상에서 돌아오자, 타격 부진에 빠진 [[박해민]]을 대신해 중견수로도 출장하며 꾸준히 경기에 나섰다. [[5월 21일]] [[두산 베어스|두산]]전에서 [[윤명준]]을 상대로 홈런을 기록하였고, 이 홈런은 [[삼성 라이온즈]]의 4000번째 홈런이 되었다. [[6월 3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이승엽]]의 [[KBO (야구)|KBO]] 최초 400호 홈런이 터지던 날, 대수비로 출전한 그도 나란히 홈런을 기록하며 자신이 포스트 [[이승엽]]의 자격이 있다는걸 증명했다. 꾸준히 타격감을 올린 그는 [[6월 18일]] 경기에서 3타수 2안타를 치며 3할고지를 돌파하였고, 시즌 끝에는 3할 4푼 9리의 좋은 성적을 보여주었다. 그 뒤 그는 부상으로 빠진 [[박석민]]과 [[박한이]]를 대신하여 3루 수비와 우익수 수비도 소화하며 수비에서의 재능도 보여줬다. 그는 전반기 0.329의 타율과 9개의 홈런으로 [[2015년]] [[올스타전]] 드림 올스타의 1루수로 뽑히게 되었다. 그는 [[8월 4일]] [[kt 위즈|kt]]전에서 [[저스틴 저마노|저마노]]를 상대로 안타를 기록하며 신인 최다 경기 연속 안타인 22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였고, 다음 날 경기에서도 안타를 기록하며 23G 연속 안타로 기록을 늘렸다. [[8월 22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5타수 5안타 5득점 1홈런으로 맹활약하며 생애 첫 5안타, 5득점에 두 자릿수 홈런까지 달성하였다. [[9월 20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타격 후 옆구리 통증으로 시즌을 아쉽게 마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대 신인 최고 타율을 갱신하였다. 최종 성적은 11홈런, 17도루, 57타점, 97득점이었다. 이는 타율 3위, 득점 10위, 출루율 10위의 대단한 성적이였다. 비록 [[2015년 KBO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에서는 0.286의 타율로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며 팀은 준우승을 하였으나, [[김하성]]과 [[조무근]]을 제치고 신인왕에 오르게 되었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11/24/0200000000AKR20151124125600007.HTML?input=1195m '타격 3위' 삼성 구자욱, 2015 신인왕 수상] - 연합뉴스</ref>
         {{2011년 아시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 대한민국 선수 명단}}
         {{2017년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 대한민국 선수 명단}}
         [[분류:199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KBO 리그 1루수]][[분류:KBO 리그 외야수]][[분류:KBO 리그 우익수]][[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분류:대구본리초등학교 동문]][[분류:경복중학교 동문]][[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분류:능성 구씨]][[분류:상무 야구단 선수]]
  • 백정현 . . . . 32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2, top1=야구 관련 인물(KBO) , top2=삼성 라이온즈/선수단)]
         ||<:><#fff>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074ca1><:> '''[[2014년 한국시리즈|{{{#ffffff 2014}}}]]'''||
         ||<:> '''학력''' || 옥산초 - 대구중 - [[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상원고]] ||
         ||<:> '''프로입단''' || [[한국프로야구/2007년/신인드래프트|2007년 2차지명 1라운드 (전체 8번, 삼성)]] ||
         [[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상원고등학교]] 재학 시절 [[한국프로야구/2007년/신인드래프트|2007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삼성 라이온즈]]의 2차 1라운드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별명으로는 '백작가'[* [[작가(야구)|마운드 위에서 작품활동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여행 사진의 퀄리티가 사진작가급이라는 것에서 유래. --[[랜디 존슨]]?-- '이야깃거리' 항목 참조. ], 오키나와 전지훈련에서만 잘하는 것에서 따온 '오키나와 에이스', '오키나와 커쇼', 이름에서 따온 '백정', 그리고 못할 때는 '[[백린탄]]'이라고 불리며 까인다. 팀내 별명은 '말순이'인데, 과거 드라마 [[육남매]]에서 말순이 역할을 맡은 송은혜와 비슷해서 붙은 별명이다. 2017년 지금은 삼성 선발진에서 에이스나 다름 없는 활약을 하며 '백쇼'(백정현+커쇼)라는 별명이 거의 정착된 상태.
         2009년 8월 27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데뷔 이후 처음으로 구원승을 거두었다.
         6월 16일 아침에 목욕탕을 갔다온 후 갑자기 허리 통증을 호소해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고, 대신 [[김현우(야구선수)|김현우]]가 올라왔다. [[이병훈(야구)|이병훈]] 해설위원 말로는 이날 목욕탕에서 자빠졌다고 한다. 6월 26일 1군에 복귀했다. 그러나 허리 부상의 여파로 밸런스가 무너진 모습을 보이면서 7월 17일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고, 7월 30일 1군에 복귀했다. 7월 31일 두산전에서 1이닝 2실점, 8월 10일 넥센전에서 0⅓이닝 2실점 등 2경기 연속 부진했다. 8월 13일 다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고, [[권오준]]이 대신 올라왔다.
         이후 [[류중일]] 감독의 지시로 [[김현우(야구선수)|김현우]]와 함께 BB아크행. 하지만 한화 2군과의 연습경기에서도 부진했다. 퓨처스리그 일정이 끝난 후에도 별다른 소식이 없다가 9월 29일 1군에 올라왔다. 30일 한화전에서 1이닝 3실점을 했고, 10월 2일 [[알프레도 피가로]]가 복귀하면서 대신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2015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1.1이닝을 퍼펙트로 틀어막으며 개인 포스트시즌 첫 승을 올렸다.
         한국시리즈에서 핵탄두를 맞은 마운드에서 그나마 차우찬 다음으로 잘 던졌으나 팀의 준우승을 막지 못했다.
         오키나와에서의 연습경기에서 잘 던지더니 한국에 돌아와서 치른 시범경기에서는 아니나 다를까 맞아 나가면서 4경기에 등판해 1홀드 ERA 11.25를 기록했다. 일단은 개막전 엔트리에는 포함됐지만 올해도 그냥 오키나와 에이스로 남지 않을 지 걱정되는 부분.
         9월 27일 NC전에서 5⅔이닝 2피안타 3탈삼진 3사사구 1실점을 기록하면서 '''프로 데뷔 10년만에 첫 선발승'''을 거뒀다.
         그런데 팔꿈치가 생각보다 안좋은 듯 하다. 사실상 작년이 프로 첫 선발 시즌이었던지라 [[버두치 리스트|향후 철저한 관리가 필요할 듯]].
         5월 25일 '''두산전에서 8이닝 5k 무실점'''[* 무려 2018시즌 크보를 지배했던 두산을 두산의 홈인 '''잠실'''에서 완벽투를 선보였다.]으로 본인 야구인생 최고의 투구를 펼치며 2승을 수확, 2015년 9월 이후 32개월 만의 팀 5연승을 이끌었다. 위력적인 공을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 꽂아넣는 완벽한 투구내용을 보여줬다. 완봉도 가능했지만 100구를 넘기는 등 많이 던졌기에 관리차원에서 8이닝만 던지게한듯. 이날의 호투로 본인의 평균자책점을 3.86으로 끌어내렸다.
         후술할 몇 가지 일화 때문에 개그캐릭터 이미지가 강하지만 훈련이나 연습할 때는 성실한 자세로 임해 코칭스태프로부터 평가가 좋다.
         여담으로 유급자의 1차지명 불가 조항을 만든 당사자이기도 하다. 2005년 고3 시절에 백정현이 무릎 십자인대 파열 (이것으로 인해 군 면제 판정을 받았다.) 로 유급했는데 하필이면 발표 시점이 [[한국프로야구/2006년/신인드래프트|2006년 신인 드래프트]]를 앞둔 때라 다른 구단에서 유망주 빼돌리기가 아니냐며 태클을 걸었다. 즉 백정현이 유급함으로써 [[삼성 라이온즈]]에서 다음 해에 백정현을 1차지명하지 않겠냐는 뜻. 당시 백정현은 2차지명 1라운드 상위 지명이 충분히 가능한 선수였다.
         결국 회의 끝에 이후로 유급자의 1차지명이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백정현은 그 첫 번째 수혜자가 되었고~~ 십자 인대 파열이라 선수로서 재기가 힘들지 않겠냐는 말도 있었지만 [[삼성 라이온즈]]는 [[한국프로야구/2007년/신인드래프트|2007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2차 1라운드에서 백정현을 지명했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것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진 것으로 평가된다.
         인스타를 하고 있는데 여행가며 찍은 사진을 올리는 용도로만 쓰는 듯. [[https://www.instagram.com/baek_junghyun/|보러가기]] 그 사진이 굉장히 높은 퀄리티라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선 야구 선수가 안 됐으면 사진작가가 됐을 거란 얘기가 종종 나올 정도. 아예 '백작가'라고 부르며, 그가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들이 종종 개념글로 올라온다. 일부는 반농담으로 [[라팍]]에서 백정현이 찍은 사진을 넣은 달력이나 엽서를 팔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김성민 (1994년) . . . . 31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7년]]
         |드래프트 순위 = [[2017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7년]] 2차 1라운드([[SK 와이번스]])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7년]] [[4월 2일]]<br/>[[문학야구장|문학]] 대 [[kt 위즈|kt]]전 구원
         [[대구옥산초등학교]]와 [[경복중학교]]를 거쳐 [[대구상원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제66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2011년 청룡기]]에서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그는 3승, 평균자책점 0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고, 대회 MVP에 선정되었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09&aid=0002239733 청룡기 MVP 김성민, "류현진 같은 선수 되고 싶다"], 《OSEN》, 2011년 8월 11일.</ref> 이러한 활약을 기반으로 고교야구 아시아 시리즈 대표에 선정되었고 [[2012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2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NC 다이노스]]의 특별지명 선수로도 거론됐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8&aid=0002694959 성탄절, 고교야구아시아시리즈와 함께...일본·대만과 격돌], 《머니투데이》, 2011년 12월 21일.</ref> 이러한 활약을 기반으로 국외 스카우트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2012년]] [[1월 31일]] 계약금 55만 달러를 받고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체결하였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5489936 고교 2학년 선수, 미국프로야구 입단 논란], 《연합뉴스》, 2012년 1월 31일.</ref>
         이 과정에서 엄청난 논란이 발생하였는데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그와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KBO (야구)|KBO]]에 신분조회를 요청하지 않아 [[KBO (야구)|KBO]]에서도 그의 계약을 몰랐다. 왜냐하면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선수와의 계약은 금지였기 때문이었다. 2001년 7월에 개정된 한·미 선수계약협정서에는 메이저 리그 구단이 선수를 영입할 때는 신분 조회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선수와의 접촉도 불가능했다. 이러한 비난 속에서 [[일구회]]는 [[2월 2일]]에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행동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18&aid=0002553523 일구회, MLB 무분별 스카우트 규탄 성명], 《이데일리》, 2012년 2월 2일.</ref> [[2월 8일]]에는 [[대한야구협회]]에서 상벌위원회를 열고 그에게 무기한 자격 정지 처분이라는 중징계를 내렸고 이어 [[2월 9일]]에는 [[볼티모어 오리올스]] 스카우트의 경기장 출입금지 조치를 내렸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396&aid=0000007832 야구협회, MLB 볼티모어 입단 김성민 무기한 자격정지 중징계], 《스포츠월드》, 2012년 2월 8일.</ref><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18&aid=0002557063 대한야구협회, 볼티모어 스카우트 출입금지 조치], 《이데일리》, 2012년 2월 9일.</ref> 이러한 과정에서 볼티모어의 단장인 [[댄 듀켓]]은 그와의 계약이 문제가 없다고 항변하였고 그도 인터뷰를 통해 '본인의 인생을 건 선택'이라고 언급하며 실력으로 모든 걸 이겨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11&aid=0000268235 볼티모어 단장 "김성민 계약 뭐가 문제냐?"], 《조이뉴스24》, 2012년 2월 3일.</ref><ref>[http://sports.news.naver.com/wbaseball/news/read.nhn?oid=382&aid=0000031009 <nowiki>[단독인터뷰]</nowiki> 미국 진출 논란 김성민 “내 인생을 건 선택”], 《스포츠동아》, 2012년 2월 9일.</ref>
         이후 [[KBO (야구)|KBO]]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 측에 공식적인 항의 서신을 보내자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도 이러한 규정 위반에 대해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였고 [[2월 15일]]에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 사무국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벌금 징계를 부과하였고 그와의 계약을 30일 간 잠정적으로 승인하지 않겠다고 밝혔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382&aid=0000031426 美볼티모어 부사장 “김성민 계약 파문 공식 사과”], 《스포츠동아》, 2012년 2월 13일.</ref><ref>[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112&aid=0002272362 MLB 사무국, 김성민 영입 볼티모어에 벌금 징계], 《해럴드POP》, 2012년 2월 16일.</ref> 이러한 과정에서 그의 계약은 미루어졌고 결국 [[6월 12일]]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그와의 계약 불발을 보도하면서 [[7월 7일]]에 공식적인 계약 포기를 선언함에 따라 그는 국제 미아가 되었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76&aid=0002196271 볼티모어, 김성민 계약 위해 MLB 승인 기다려], 《스포츠조선》, 2012년 3월 23일.</ref><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09&aid=0002364872 '스카우트 파동' 김성민,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재계약 실패], 《OSEN》, 2012년 6월 13일.</ref><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09&aid=0002377999 댄 듀켓, “김성민과 계약하고 싶지 않다”], 《OSEN》, 2012년 7월 8일.</ref> 결국 한국에서의 선수 생활이 불가능해진 그는 2013년 초에 일본의 [[후쿠오카 경제대학]]에 입학하였다. <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214&aid=0000227125 고교야구 유망주 김성민 일본 대학 입학 왜?], 《MBC》, 2013년 1월 11일.</ref>
         [[2014년]] [[2월 26일]] [[대한야구협회]]가 그에 대한 자격 정지를 해제함에 따라 차후 국내에서의 선수 활동이 가능해졌다.<ref>[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14&aid=0003103089 KBA, ‘선수등록 규정 위반’ 김성민 자격정지 징계 해제], 《파이낸셜뉴스》, 2014년 2월 26일.</ref>
         2016년에 대학교 4학년 때 [[KBO (야구)|KBO]]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하였고 [[2017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를 앞두고 [[8월 2일]]에 실시한 트라이 아웃에 참여하였다. 트라이 아웃에서 좋지 않은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SK 와이번스]]에 2차 1라운드 전체 6순위라는 높은 순위에 지명되었고 1억 3,000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하였다.
         [[2017년]] [[4월 2일]] [[kt 위즈]]와의 개막시리즈 마지막 경기에 구원 투수로 첫 등판을 하였고 [[4월 13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는 프로 데뷔 첫 홀드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4월 29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1.1이닝 4실점으로 부진한 이후 2군으로 내려갔다.
         *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529&aid=0000001214 <nowiki>[팩트체크]</nowiki> '국제미아' 김성민, 프로지명 가능할까?] - 엠스플뉴스
         [[분류:199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넥센 히어로즈 선수]][[분류:대구옥산초등학교 동문]][[분류:경복중학교 동문]][[분류:대구상원고등학교 동문]][[분류:SK 와이번스 선수]]
  • 오대석 . . . . 31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 top1=야구 관련 인물(KBO))]
         || '''학력''' || 남도초 - 경구중 - [[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대구상고]] - [[한양대학교|한양대]] ||
         || '''프로입단''' || 1982년 ||
         || '''지도자''' || [[태평양 돌핀스]] 수비코치 (1992~1995)[br][[현대 유니콘스]] 1군 수비코치(1996)[br][[롯데 자이언츠]] 1군 수비코치 (1997~1998)[br][[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포항제철고등학교]] 감독 (2000~2001)[br][[롯데 자이언츠]] 1군 주루·작전코치(2002)[br][[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대구상원고등학교]] 감독 (2004~2008)[br][[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포항제철고등학교]] 감독 (2011)[br][[한화 이글스]] 1군 수비·작전코치 (2013)[br][[한화 이글스]] 2군 수비코치 (2013)[br][[한화 이글스]] 육성군 수비코치 (2014) ||
         ||<:><-5><#151B54>'''[[한국프로야구/1982년|{{{#ffffff 1982년}}}]] [[KBO 리그|{{{#ffffff 한국프로야구}}}]] [[유격수|{{{#ffffff 유격수}}}]] [[KBO 골든글러브|{{{#B8860B 골든글러브}}}]] [[KBO 리그 골든글러브 역대 수상자|{{{#ffffff 수상자}}}]]''' ||
         '''[[KBO|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사이클링 히트]]기록자'''
         [[삼성 라이온즈]]와 [[롯데 자이언츠]]에서 활동했던 야구선수. 등번호는 삼성에서 16번.[* 많은 사람들이 16번하면 김원형, 김종국, 박정태를 떠올리게 하지만 원조 16번이었던 오대석도 무시할 수 없다.], 롯데에서는 6번을 달았다.
         1982년 삼성의 원년 멤버로 프로에 입문했다. 당시 대학을 갓 졸업했음에도 [[김재박]] 다음 가는 유격수 2인자 [[함학수]], 상업은행의 주전 유격수 [[장태수(1957)|장태수]], 포철의 주전 유격수 [[서정환]] 등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주전 유격수를 차지하며[* [[함학수]]는 타격을 살리기 위해 1루수로 기용되었고, 장태수는 빠른 발을 살려 외야수로 전향해 주전 중견수로 기용되었고, [[서정환]]은 경쟁에 밀려 백업 내야수로 출전했다. 그리고 1년 뒤 해태로 트레이드되며 한국 프로야구 트레이드史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 ~~준 국가대표 수준이던 삼성의 위엄~~], [[류중일]]이 입단하기 전까지 삼성의 대표 유격수로 활약했다. 1982년 6월 12일에는 구덕 삼미전에서 최초로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고, 그 해 유격수 부분 [[KBO 골든글러브]] 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류중일]]이 입단하기 전까지 몇 년간 유격수를 거의 혼자서 도맡다시피 해서 였는지 성적에 기복이 있었다. ~~[[서정환|아무래도 괜히 보낸 거 아닌가 싶다.]]~~
         선수 은퇴 이후로는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롯데 자이언츠]]에서 코치를 했고 2000년부터 2년간 포철공고에서, 2004년부터 4년간 [[대구 상원고등학교 야구부]]의 감독으로 재직했다. 2011년에 다시 포철공고 야구부의 감독으로 복귀했으나 2011년 말 포철공고의 마이스터고 전환[* 마이스터 고등학교에서는 운동부 운영을 할 수 없다.]으로 야구부 해체가 불가피해지며 계약이 해지되었다.[* 그러나 포철공고 야구부는 다행히 해체되지 않고, 포항제철고등학교로 인계되어 현재는 [[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다. 참고로 경주고, 구미전자공고의 야구부의 잇따른 해체로 2011년 부로 대구 소재의 고교야구팀을 제외하고 [[경상북도]] 소재의 고교야구팀은 포철공고가 유일하며, [[경주고등학교 야구부]]도 2013년 12월에 재창단했다. 구미전자공고 야구부도 포철공고처럼 마이스터고 전환 때문에 해체된 것.]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남구(대구) 출신 인물]][[분류:1960년 출생]][[분류:타자]][[분류:내야수]][[분류:우투우타]]
  • 이수진(치어리더) . . . . 31회 일치
          * 상위 문서 : [[야구 관련 인물(KBO)]], [[치어리더]]
         '''원조 야구장 [[김연정|3대]] [[박기량(치어리더)|여신]] [[이수진(치어리더)|막내.]]이자 치어리더계 유연성 끝판왕.'''[* 현재 활동중인 치어리더 중 이수진만큼 유연한 사람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유연성이 좋다.]
         프로야구 2013 시즌 중반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치어리더팀인 블루팅커스에 합류해서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으며, 프로배구 2013-14 시즌부터 2016-17 시즌까지 [[화성 IBK기업은행 알토스]]에서도 치어리더 활동을 했다. 보통 [[박기량(치어리더)|박기량]], [[김연정]] 등과 함께 손꼽히는 치어리더.
         [[구미시]]에 위치한 [[현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경대학교]][* [[경상북도]] [[경산시]]에 있는 2/3/4년제 전문대학.] 모델과를 졸업했으며, 여러 직업캠프 다니면서 힙합, 한국무용, 현대무용 등의 댄스 수업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그 후, 모델 일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춤을 추고 싶던 도중 [[치어리더]] 모집글을 보고 지원하면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키는 모델과 출신답게 174cm이다.
         2014년 야구 매니지먼트 게임인, [[프로야구매니저]]에서 2주 가량 진행한 '가장 예쁜 한국프로야구 치어리더' 설문조사에서 박기량, 김연정, [[강윤이]]에 이어 '''4위'''에 이름을 올렸다.[* 총 7,682명이 설문에 응했으며, '''1위'''인 박기량은 2,518명(32.78%), '''2위'''인 김연정은 1,925명(25.06%), '''3위'''인 강윤이는 1,075명(13.9%).] 해가 바뀌닌 2015년 [[프로야구매니저]]에서 7월 1일부터 10일까지 진행한 '2015 프로야구 대표 여신 치어리더는?'라는 설문조사에서 박기량[* 2013년, 2014년에 이어 3연패 달성], 김연정에 이어 '''3위'''에 뽑혔다.[* '''1위'''인 박기량은 33.70%, '''2위'''인 김연정은 27.10% 득표][* 참고로, '''4위'''는 [[KIA 타이거즈]]의 엄지, '''5위'''는 [[한화 이글스]]의 임수연, '''6위'''는 [[LG 트윈스]]의 이애수.]
         야구장 응원 [[직캠]] 영상이 많이 올라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https://youtu.be/qqLCgWlgP3c|동영상 링크1]][[https://youtu.be/K0T3QgfeD0o|동영상 링크2]]
         2013년 말에, [[TBC]]에서 제작한 '공간다큐 그 안에'의 '라이온즈의 역전드라마 2013 한국시리즈''에서 잠깐 잠깐씩 출연도 하고 인터뷰도 하였다. 한국시리즈 응원이 처음이냐고 묻는 제작진의 질문에 엄청 떨린다고 대답하였으며, 이어 "기대도 많이 되고 한 마음으로 응원해서 우승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답했다.동영상 링크는 [[https://youtu.be/qEFx8TF21nA|여기]].
         2014년 1월 31일에 [[SBS]] 설특집 프로그램, '스타VS국민도전자, 페이스오프'에 치어리더 연합팀[* [[삼성 라이온즈]]의 이수진, [[롯데 자이언츠]]의 [[박기량(치어리더)|박기량]], [[SK 와이번스]]의 오지연, [[LG 트윈스]]의 [[강윤이]].]으로 출연하여 걸그룹 [[걸스데이]]와 댄스 대결을 펼쳤다. [[걸스데이]]는 '[[엄정화]]의 초대', 치어리더 연합팀은 상대편 '[[걸스데이]]의 기대해'와 '[[미쓰에이]]의 허쉬(HUSH)' 춤을 췄다.
         [[한국프로야구/2014년 포스트시즌]]을 맞아 [[XTM]]의 [[베이스볼 워너B]]에서 제작한 치어리더 배틀 영상에 출연했다. 동영상 링크는 [[https://youtu.be/30M67wdL7Fw|여기]]. 당시 [[삼성 라이온즈]]는 한국시리즈에서 [[넥센 히어로즈]]와 경기를 했는데, 각 팀 치어리더들이 나와서 댄스 배틀을 펼치는 방식이었다. 이수진은 넥센 치어리더 임경미와 대결을 했다. 여기서 자신의 키만큼 발차기를 하고 다리 찢기를 하는, 놀라운 유연성을 선보였다.
         2014년 12월 6일에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 치어리더 특집편[* 타이틀은 '야구여신 최강전'][* [[삼성 라이온즈]], [[NC 다이노스]], [[기아 타이거즈]], [[한화 이글스]]의 치어리더들만 출연.]에서 [[삼성 라이온즈]] 치어리더 대표 3인[* [[이연주(치어리더)|이연주]], 이수진, 장혜원.] 중 한 명으로 출연하여, '셰어 로이드의 Swagger Jagger, [[트랜스픽션]]의 Get Show, [[크레용팝]]의 어이(Uh-ee)'에 맞추어 치어리딩을 선보였다.[* 치어리더 네 팀의 단체곡은 '[[타카피]]의 치고 달려라 2014', [[현아(가수)|현아]]의 '빨개요', [[갓세븐]]의 '하지하지마'.]
          * 9월 22일자 기사 (“야구장서 써먹기 딱!” 치어리더 이수진에게 배우는 응원 동작 3) [[http://samsungtomorrow.com/4YC3i|기사 링크]]
          * 9월 29일자 기사 ('야구장 여신'의 변함없는 인기 비결은? 삼성 라이온즈 치어리더 이수진과의 데이트) [[http://samsungtomorrow.com/8Tm1q|기사 링크]]
         보통 [[박기량(치어리더)|박기량]], [[김연정]]과 함께 야구장 3대 여신으로 불린다. 방송과 매스컴으로 유명해진 2명과 달리 이수진은 대구 아재들의 인기가 대중들에게 확산된 케이스이다.
          * ~~풋풋한 3년차 치어리더이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치어리더의 아이콘인 '''[[롯데 자이언츠|롯데]]의 [[박기량(치어리더)|박기량]] 치어리더보다 우승 경험이 많다.'''[* 박기량은 [[롯데 자이언츠|롯데]]에서만 7년을 보냈는데도 우승은커녕 한국시리즈에도 진출하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 롯데가 장기적 암흑기가 확정이라서 박기량이 치어리더를 그만둘 때까지도 [[우린 안될꺼야 아마|우승하긴 영...]]]
          * 삼성 라이온즈의 팬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구사하다보니 [[한화 이글스]]의 [[김연정]], [[롯데 자이언츠]]의 [[박기량(치어리더)|박기량]]과 더불어 야구장을 대표하는 치어리더로 불린다. 그리고 [[1992년|92년]]생으로 가장 어리다. 그리고 [[2015년]], 마침내 위에 서술했던 대로 인기투표에서 3위를 차지하며 인기를 입증했다. 오오 이수진 오오.
          * [[이승엽]]을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어렸을 적부터 야구장에서 이승엽을 보며 응원을 했다고.
  • 이윤열 . . . . 31회 일치
         {{프로게이머 정보
         '''이윤열''' (李允烈, [[1984년]] [[11월 20일]] ~ )은 [[한국]]의 전 [[스타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 II]] [[프로게이머]]다. 현재 아프리카티비 BJ이다. '''NaDa'''라는 아이디를 사용했다.
         2000년도 경 iTV 고수를 이겨라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최인규를 격파한 것이 데뷔전이었으며 이후 2001년 상반기, Game-i(이후 [[화승 OZ]]의 전신인 IS와 합병)에 입단하면서 프로게이머 활동을 시작하였다. 2002년 12월엔 KTF 매직엔스(현 [[KT 롤스터]])로 임대 이적했고, 이듬해 2003년 12월 24일 투나 SG(현 [[위메이드 폭스]])로 복귀한 이후 2010년까지 활동했다.
         2001년부터 2012년 현재까지 온게임넷 스타리그 3회 우승, KPGA(MSL의 전신) 3회 우승 등 역대 프로게이머 중 [[이영호]]와 함께 가장 화려한 커리어를 보유중이며, 준우승 경력을 포함, 양대 개인리그 10회 결승 진출, 6회 우승과 4회 준우승으로 역대 최고의 위엄을 보여준다.
         |대 프로토스
         * 2001년 iTV 한게임배 서바이벌 프로구단 리그 1위
         * 2001년 한국통신 메가패스배 서바이벌 프로리그 1위
         * 2003년 Stout MSL 2003 준우승 (0:3 [[강민 (프로게이머)|강민]])
         * 2004년 SKY 프로리그 2004 2라운드 우승 (팬택앤큐리텔 큐리어스)
         * 2004년 당신은 골프왕 MSL 2004 준우승 (2:4 [[박태민 (프로게이머)|박태민]])
         * 2006년 SKY 프로리그 2005 후기리그 개인전 다승왕
         * 2006년 SKY 프로리그 2006 전기리그 개인전 다승왕
         '''2009년 ~ 2012년'''
         * [[2009년]] 로스트사가 MSL 2009 8강 (2:3 [[허영무]])
         * 2009년 아발론 온라인 MSL 2009 32강
         * 2009년 e스타즈 서울 2009 스타크래프트 헤리티지 준우승 (1:2)
         * 2009년 블리즈컨 2009 스타크래프트 부문 4위
         * 2009년 곰티비 TG삼보-인텔 클래식 시즌3 64강
         * 2009년 IeSF 스타 인비테이셔널 클래식 우승 (3:1 [[홍진호]])
         *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중 최초로 공식전 500경기 출전 (2007년 8월 3일)
  • 프로 스포츠 . . . . 31회 일치
         프로 스포츠에서는 [[경기]]를 보러 오는 [[관객]]에게 징수하는 입장료 수익이나, 선수나 해당 스포츠를 주제로 한 상품의 판매, [[스포츠 마케팅]] 광고 효과를 노리는 광고 스폰서 등으로 수익을 얻어, 영리적으로 스포츠 단체를 운영한다.
         ==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 ==
         프로 스포츠 선수는 전통적으로 해당 종목에 전업함으로써 주 소득을 얻는 사람을 일컫는 단어이다. 반면 아마추어 스포츠에서 선수란 [[취미]]로서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로 규정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과거에 아마추어 스포츠는 상당히 생활에 여유가 있는 상류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 무렵에 아마추어를 프로 스포츠와 구분한 이유는 프로선수는 돈 받고 전념하니까 잘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고, 아마추어와 프로가 같은 틀에서 경쟁하는 것을 '무의미'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당시는 '경제적 이득'을 추구하는 프로 선수를 낮게 보았고[* 일종의 '사회적 차별'로서, '유산 계급'의 전유물로 여겨진 스포츠에서 '노동자 계급'과 같이 여겨진 프로 선수를 배제하는 움직임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올림픽에 '아마추어' 규정이 들어가게 되었다.
         [[냉전]] 시기에는 [[국가]]의 개입으로 아마추어리즘이 퇴색하게 되었는데, 공산권을 중심으로 사실상 국가에서 아마추어 스포츠를 전문적으로 하면서 생계까지 책임져주면서 국위선양을 위하여 아마추어 스포츠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스포츠 선수 군단'을 육성함으로서 '프로나 다름없는 아마추어'가 나타나게 되었기 때문. 이러한 전략으로 [[동독]] 등은 많은 메달을 따냈고 [[국위선양]]을 이루었다. 그러나 공산권 붕괴와 냉전 종식으로 이 같은 흐름은 크게 퇴색하였다.
         소련의 CSKA 모스크바는 당시 소련군이 육성하던 엘리트 스포츠의 한 단면으로 평가될 수 있었으며, 소련군 소속이지만 이는 소련의 대외적인 체육성과를 보여주기 위한 한 장으로써 사실상 세미프로 스포츠클럽으로 봐도 무방하다.
         자유주의 진영에서도 이런 공산권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기도 했다. 대한민국도 한국축구사에 전설을 남긴 [[양지 축구단]]은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의 강력한 푸쉬를 받아 등장한 케이스였고, 이는 북한의 1966년 월드컵 8강진출에 자극받아 탄생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런 국가의 개입에 따른 아마추어리즘이 훼손된 사례는 확실한 트렌드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모습은 냉전시대가 낳은 대표적인 산물임이 확실하다.
         현대에는 [[스포츠 마케팅]]의 발전으로, 아마추어 스포츠 대회에도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면서 이 경계가 상당히 애매해졌다. 준프로라는 개념도 잘 살펴보면 프로선수와 별반 다를게 없기 때문. 가령 [[K리그]]에 뛰는 선수들은 명백히 해당 종목에 전업함으로써 구단으로부터 급여를 받음은 물론이고 성적에 따라 연맹에서 추가적인 상금을 얻을 뿐만 아니라 스포츠 용품 회사로부터 스폰받는 돈도 있다. 하지만 세미프로리그인 [[한국 내셔널리그]]만 봐도 이런 면에서 K리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전통적인 분류는 상당히 무의미해 진 상황이다.
         또한 아마추어 리그인 K3도 K리그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생각하면, 적어도 인기 종목에서는 프로와 아마추어를 나누는 경계는 사실상 전통적인 방식으론 더 이상 경계를 가르기가 어려워 졌다고 볼 수 있다.
         권투의 경우도 권투경기를 주관하는 주요 단체에 소속되지 않았다 뿐이지, 올림픽 권투경기를 보기 위해서 올림픽 관람료를 내야함은 물론이고 올림픽 성적에 따라 각 국가의 올림픽 관계 단체로부터 상금이 나오는 경우가 대다수다. 개중에는 스폰서가 붙는 경우까지 생각하면, 이전과는 달리 단순히 '돈을 번다'는 것 만으로는 프로 스포츠와 아마추어 스포츠를 구분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각 종목과 대회를 주관하는 단체가 규정하는 바에 따른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종목에 따라서 상황이 상당히 다르지만, "흥행"을 목적으로 하는 대회와 그렇지 않은 대회는 어느 정도 방향성에서 차이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프로 스포츠 종사자들은 상업적 이득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대회를 유치하려 한다. 그리고 이 대회에 참가 가능한 인원들을 "거르는 작업"이 필연적이다. 이렇게 거르는 행위를 통과한 인원들만 모아 대회를 열 준비를 하며, 이 대회에 참가하는 팀에 소속될 자격이 있는 "최상급 선수"의 자격을 갖춘 자들을 프로라 보는게 바람직이다. 축구를 제외한 대한민국 4대구기종목은 드래프트(=최상급 선수라는 판단을 협회와 구단이 동시에 판단)를 통해 이루어지고, 바둑같은 경우는 단위제(=최상급 선수라는 판단을 전적으로 협회를 통해 판단)를 통해, 축구의 경우는 구단이 영입과 이적이라는 행위를 통해(=최상급 선수라는 판단을 법과 협회의 규정 안에서 구단이 자체적으로 판단) 프로냐 아니냐가 결정된다.
         이런 사례를 생각해보면 종목을 불문하고 "명백히 최고의 경기를 제공하려는 자세"를 갖추고, "상업적인 이득을 추구"하며, "최고의 수준을 경기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 증명된 선수와 팀"이 보여주는 스포츠가 프로스포츠로 규정할 수 있다.
         특히 미국식 프로 스포츠에서는 '신규 참가자=새로운 경쟁자'의 등장을 매우 경계하여 경기 리그를 매우 독립적, 폐쇄적으로 운영한다. 이것이 프로 스포츠의 본질을 보여주는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프로 스포츠 마케팅에서 강한 선수, 강한 팀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관객들이 강한 선수나 강한 팀에 열광하기 때문이다. 다만 반대로 강한 선수나 강한 팀이 흥행에 악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는데, 오히려 "누구누구만 나오면 이기니까 재미가 없다.", "어디 팀만 무조건 이기니 재미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 스포츠 시장에서는 이러한 '흥행'을 고려하여 리그에 영향을 미치는 규칙을 변경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프로 종목은 흥행 때문에 규칙을 변경하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같은 경기의 아마 종목과 차별성이 생기기도 한다. 예를 들어 프로 복싱과 아마 복싱은 프로 단체와 아마 단체에서 스포츠의 '규칙'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기본적인 공통점은 있으나 동시에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경기가 되어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보호구로 헤드기어를 장착하는 아마 복싱은 프로복싱처럼 흥행에 도움을 주는 '화끈한 [[KO]]'를 내놓기가 현실적으로 어렵고, 그 때문에 포인트와 기술 위주의 운영을 강요받게 된다. [[농구]]의 경우 [[NBA]]는 [[쿼터제]]나 [[덩크슛]] 같은 흥행 요소를 도입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프로 스포츠 대회에 참가하는 구단과 선수들은 영리를 추구하지만, 정작 이를 운영하는 단체들은 대개가 비영리조직인 경우가 대다수다. 매년 열리는 대회중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UEFA 챔피언스 리그]]라든가 [[NFL]] [[슈퍼볼]]등은 모두 비영리단체가 운영한다.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같이 영리단체가 운영하는 대회가 최근에는 매우 드문 편.
  • 박기혁 . . . . 30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00년]]
         |드래프트 순위 = [[2000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00년]] 2차 2라운드([[롯데 자이언츠]])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00년]]
         * [[2008년]] [[KBO (야구)|KBO]] 골든 글러브 (유격수)
         |월드베이스볼클래식 =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06년]]
         {{메달 스포츠|남자 [[야구]]}}
         {{동메달|[[2006년 아시안 게임|2006 도하]]|[[야구]]}}
         [[2000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0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롯데 자이언츠]]의 2차 2라운드 지명을 받고 입단하였다.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1군에서 활동했다. [[2008년]] 시즌 113경기에 출장해 2할대 타율, 1홈런, 36타점, 47득점, 16도루로 데뷔 이후 최고의 활약을 펼쳤고, [[박계원]] 이후 14년 만에 [[롯데 자이언츠]]에 [[유격수]] 부문 [[한국 프로 야구 골든 글러브 상|골든 글러브 상]]을 안겼다.<ref>[http://osen.freechal.com/news/view.asp?code=G0812110172 박기혁, 데뷔 첫 황금장갑 수상] 《Osen》, 2008년 12월 11일</ref> [[2006년 아시안 게임|도하 아시안 게임]]에서는 동메달에 그쳤고, [[2008년 하계 올림픽 야구|베이징 올림픽]]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2009년에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에 참가하여 [[박진만]]을 대신해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였으나 병역 특례를 받지 못했다. [[2010년]] 시범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본격적인 시즌 개막 이후 무릎 부상과 경기력 저하로 [[강정호]]와 [[손시헌]]에게 밀려 야심차게 노렸던 목표인 [[2010년 아시안 게임|광저우 아시안 게임]] 엔트리 진입에 실패하였다. 시즌 종료 후 입대를 1주 앞두고 음주운전으로 물의를 일으켜 결국 [[2010년]]을 쓸쓸히 마무리하고 그 해 [[11월 15일]]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여 [[2012년]] 소집 해제하였다. [[2013년]]에 복귀한 뒤 [[문규현 (야구 선수)|문규현]]을 밀어내고 주전으로 자리잡으려 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결국 프로 2년차인 [[신본기]]에 밀리고 말았다.
         ==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활약 ==
         * [[2009년]]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 2008년 [[KBO (야구)|KBO]] 골든 글러브 유격수 부문
         {{2006년 아시안 게임 야구 대한민국 선수 명단}}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한민국 선수 명단}}
         [[분류:198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KBO 리그 유격수]][[분류:KBO 리그 2루수]][[분류:롯데 자이언츠 선수]][[분류:KT 위즈 선수]][[분류:대구수창초등학교 동문]][[분류:성광중학교 동문]][[분류:대구상원고등학교 동문]][[분류:KBO 골든글러브 수상자]][[분류:2006년 아시안 게임 야구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야구 참가 선수]][[분류:2006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분류:아시안 게임 야구 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동메달리스트]][[분류: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 봉준호 . . . . 30회 일치
         '''봉준호'''([[1969년]] [[9월 14일]] ~ )는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영화감독]], [[영화 각본|각본가]]이다.<ref>[http://www.cine21.com/do/person/detailView?person_id=3778 씨네21 프로필]</ref><ref>[http://movie.naver.com/movie/bi/pi/basic.nhn?code=9479 네이버영화 프로필]</ref>
         1993년 6mm 단편 영화 《백색인》을 연출하여 영화계에 데뷔했으며, 2번째 단편《지리멸렬》은 큰 화제가 되었다. [[배두나]]가 출연하였던 첫 장편 《[[플란다스의 개 (영화)|플란다스의 개]]》가 흥행에 실패했으나 이후 [[송강호]]와 김상경이 출연한 《[[살인의 추억]]》을 개봉하였는데 크게 흥행하였고, 작품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잡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2006년 7월에 3번째 장편 영화 《[[괴물 (2006년 영화)|괴물]]》을 개봉했다. 2008년 그는 [[미셸 공드리]], [[레오 카락스]] 감독과 함께 [[도쿄도|도쿄]]를 주제로 한 옴니버스 프로젝트 영화 《[[도쿄!]]》에 참여하였다. 3편의 영화 중 "흔들리는 도쿄"에서 [[카가와 테루유키]], [[아오이 유우]]와 호흡을 맞췄다. 이 영화를 통해 멜로적 감수성 또한 인정 받았다.
         2009년 5월 4번째 장편 《[[마더 (2009년 영화)|마더]]》를 개봉했다. 살인 사건에 연루된 아들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의 이야기이며, [[김혜자]]의 파격적인 연기 변신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소를 배경으로 비현실적이고,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장면을 포착하고, 영화 속 주인공들의 난감한 행동에 웃음을 터뜨리도록 유도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서늘한 풍자를 심어 놓는 특유의 영화 감각을 가지고 있다.<ref>[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0805071055411120 봉준호 감독 '무(無)평에 상처받은 적 있다'], 마이 데일리, 2008년 5월</ref>
         영화 《[[마더 (2009년 영화)|마더]]》가 한국 영화 최초로 [[미국]] 비평가 협회에서 받은 외국어 영화상만 무려 7개로 보스톤평론가협회, 남동부비평가협회, 샌프란시스코 영화비평가협회 등에서 수상했다. 뿐만 아니라, 여주인공인 [[김혜자]]는 헐리우드 톱배우들을 제치고 LA 평론가협회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해외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봉준호 감독은 2011년 미국 최고 독립영화제인 [[선댄스영화제]]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프랑스]] 만화를 각색한 《[[설국열차]]》를 준비한후,<ref>[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050627 네이버 책 '설국열차'], 뱅자맹 르그랑, 장 마르크 로셰트, 자크 로브 저, 김예숙 역, 현실문화, 2009년 8월 5일</ref> 2012년 초 크랭크인하여 2013년 7월 31일에 개봉하였다.<ref name="설국열차">[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6&cid=307165&iid=364668&oid=020&aid=0002268463&ptype=011 프랑스 만화 각색한 ‘설국열차’ 400억대작 이끄는 봉준호 감독], 동아일보, 2011년 8월 16일</ref>
         * 봉준호의 외조부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유명한 [[소설가]] [[박태원 (1909년)|박태원]]으로서, [[한국전쟁]] 당시 장녀를 데리고 [[월북]]했고, 봉준호의 어머니를 포함한 그 외 2남 2녀는 서울에서 자랐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2&aid=0001951696 '천변풍경'의 구보 박태원, 청계천변서 다시 만나다] 프레시안. 2009년 06월 15일</ref> 2006년 6월 제14차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에서 이들 모녀가 재회화여 화제가 되었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1988703 호랑이가 고양이 낳으랴..3대 이은 예술명문가] 스타뉴스. 2009년 06월 30일</ref>
         ! 배우 !! [[플란다스의 개 (영화)|플란다스의 개]] !! [[살인의 추억]] !! [[괴물 (2006년 영화)|괴물]] !! [[마더 (2009년 영화)|마더]] !! [[설국열차]] !! [[옥자]]
         ! width=75 | 프로듀서
         | style="text-align:left;"| [[마더 (2009년 영화)|마더]]
         | {{small|*}} 《[[마더 (2009년 영화)|마더]]》|| ||2009년
         | {{small|*}} 《불 좀 주소》||단편영화||2009년||기타 남 역
         | {{small|*}} 《거장, 한국 최고의 흥행 영화 감독》||다큐멘터리||2013년||에피소드2. 봉준호 감독 편
         * [[2017년]] 제3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국제영화비평가연맹한국본부상
         * [[2013년]] 제3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마더 (2009년작)
         * [[2009년]] 제30회 [[청룡영화상]] 최우수 작품상
         * [[2009년]] 제5회 [[대한민국 대학영화제]] 감독상
         * [[2009년]] 제29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작품상, 각본상
         * [[2009년]] 제10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 작품상
         * [[2009년]] 제18회 [[부일영화상]] 최우수 작품상
  • 슈가(방탄소년단) . . . . 30회 일치
         [include(틀:프로젝트 문서, 프로젝트= 나무위키 보이그룹 프로젝트)]
         ||<:><#00CED1>{{{#fff '''신체'''}}} ||<(> 174cm[* 정확히는 173.8cm. [[방탄소년단]] 멤버들과 다 같이 병원을 갔었는데, [[지민(방탄소년단)|지민]]과 키가 [[https://twitter.com/ah1069111/status/836601297583419392|2mm가 차이난다고 밝혔다.]] --[[정국(방탄소년단)|전루살이]]: 본인은 지민이 형보다 크다고 하지만 보기엔... 팀에서 제일 작아 보이죠--], 57kg[* [[LOVE YOURSELF 承 `Her`]] 활동 당시 바뀐 공식 홈페이지 프로필에서 확인.], O형, 265mm ||
         직설적인 가사로 인해 심의에 통과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명 '''프로 불통러'''. 특히 [[WINGS]] 앨범에 수록된 슈가의 솔로곡 First Love의 경우 [[방탄소년단]] 멤버의 솔로곡 중 유일하게 심의에 통과하지 못했다. 매 앨범마다 심의에 통과하지 못하는 곡들이 나오는데 팬들의 반응은 '''윤기가 또?''', '''역시...'''가 다반수이다. 심의에 통과하지 못해 걱정하기보단 이젠 즐기는 수준. 본인도 딱히 심의에 관해 별 상관을 안 하고 자유롭게 가사를 쓰는 것 같다. 필요할 때는 서정적이고 섬세한 가사도 잘 쓰는데, 이 역시도 독특한 어투와 어휘 사용, 특유의 날카로운 래핑 등으로 인해 슈가만의 감성이 느껴진다.
         === 프로듀싱 ===
         [[LOVE YOURSELF 承 'Her']] 컴백 기념 [[엠넷]]의 특집 방송 BTS COMBACK SHOW에서 본인이 천재인 걸 인정하냐는 말에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며 부끄러워했지만, Agust D 믹스테이프로 공개된 슈가의 개인 작업실 이름은 '''Genius Lab'''으로 천재 연구소라는 뜻이다. [[https://youtu.be/7uSf-b9x7N8|4:25~ 작업실 작명 일화]] 솔직히 본인도 천재임을 아는 듯하다. --민슈가, 천재. 뭐 이 두 마디면 될 것 같아요--
         두 번째 미니 앨범인 <[[SKOOL LUV AFFAIR]]> 때부터 본인이 프로듀싱한 곡을 꾸준히 트랙리스트에 올리고 있다. 본래 진로를 [[프로듀서]], [[작곡가]]로 잡은 적도 있었던 만큼 [[싱어송라이터]]가 많은 [[방탄소년단]] 내에서도 작사, 작곡에 많은 공을 들이는 멤버 중 하나이다.[* 3년 전 방시혁 프로듀서의 [[https://youtu.be/8XKDXHdj95s|'상대방의 기썬을 제압해']]라는 홍보 영상으로 알려진 오디션에 참가하여 2등 수상, 그 후 연습생으로 발탁되었다. 사실 아이돌이 되는 줄 모르고 참가했다고 한다. 프로듀서로 자리를 잡아서 작곡가 등으로 활동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이 말을 들은 팬들은 우스갯소리로 사기 계약을 당했다고 말한다.] 연습생 시절 '1DAY 1VERSE'라 하여 하루에 한 곡씩을 꼬박꼬박 쓰며 실력을 쌓는 등의 작업도 했었고, 데뷔 후인 현재에도 음악 작업을 즐기고 또 열심히 한다. 1년에 한 200곡은 만드는 것 같다고.
         슈가의 프로듀싱 곡으로는 다음과 같다.
          * First Love (공동 프로듀싱)
         Let Me Know의 경우 가이드도 '''직접''' 했다고 한다. [[제이홉]]의 말에 의하면 듣기 힘들다고 한다. (...) 그래도 프로듀서와 퍼포머를 병행하고 있기 때문에 디렉션이 디테일하고, 작업 분위기는 다른 프로듀서들에 비해 편하고 재미있는 편이라고 한다. 다만 디렉션을 모두 직접 보여 주는데, [[진(방탄소년단)|진]]은 슈가의 디렉션을 보고 "그래... 저런 느낌이겠구나. 저건 아니고... 저런 느낌." 이라고 생각한다고. 그 디렉션은 [[https://youtu.be/200b2XBYNQk|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데뷔 전 언더 활동 시절 gloss[* 한국어로 본명인 윤기(...)]라는 예명을 쓴 적이 있다. 대표적인 활동으로 ADV 크루의 리플로우 곡 중 Who am I의 비트를 찍었다.[* 참고로 이때 슈가의 나이는 19세,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다만 이때는 gloss란 예명을 쓰지 않고 본명을 그대로 사용했었다고.
         본인의 믹스테이프의 마지막 트랙인 "So Far Away" 피처링으로 참여했던 가수 [[SURAN|수란]]의 디지털 싱글 "오늘 취하면(Feat. [[창모]])"을 작곡 및 프로듀싱하여 2017년 4월 27일 음원이 발매되었다.[*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프로듀서인 슬로우 래빗과 공동 작곡, 프로듀싱이다.] [[http://m.sportschosun.com/news.htm?id=201704220100204200014681&ServiceDate=20170421&f_url=#_adtep|기사]] [[방탄소년단]]과 본인이 아닌 타 아티스트의 프로듀싱에는 처음 참여한 곡으로, 슈가와 수란에게는 꽤나 의미가 큰 곡인데, 수란의 경우 언더 가수에서 대중들에게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슈가는 발매 이후 각종 음원 사이트 순위 1-2위를 다투고 멜론 [[http://www.melon.com/chart/month/index.htm#params%5Bidx%5D=1¶ms%5BrankMonth%5D=201705¶ms%5BisFirstDate%5D=false¶ms%5BisLastDate%5D=false|5월 월간 차트 1위]]에 오르는 등 리스너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성적과 함께 뛰어난 곡 퀄리티로 큰 호평을 받으며 본인의 프로듀싱 역량을 인정받았다.[[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2&aid=0002915269|#]] 멜론 [[http://www.melon.com/chart/age/index.htm?chartType=YE&chartGenre=KPOP&chartDate=2017#params%5Bidx%5D=1|2017년 연간 차트 9위]]를 달성하였다.
         직설적인 랩 가사와 강렬한 랩 스타일과는 상반되게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느낌의 미남이다. 그렇기에 얼굴만 보고 '얘는 당연히 보컬이겠지' 했다가 후에 래퍼임을 알고 깜짝 놀라는 경우도 많다. 멤버들 중에서 가장 피부가 하얀데, [[방탄소년단]] 안에서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한국인 평균 피부색과 비교해 봤을 때도 매우 하얗다. 슈가의 실물을 접한 사람들 말로는 '너무 하얘서 혼자서 조명을 3개는 더 켜 놓은 것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 하얀 피부 덕에 화려한 색상의 헤어가 잘 어울린다. 때문에 그룹 안에서 머리색이 가장 자주 바뀌는 멤버이다. --여담으로 너무 염색해서 탈모 오면 빅히트에 청구할 거라고...--[* 워낙 피부가 하얗고 깨끗한 탓에 어떤 색의 헤어든 다 소화해내서 팬들 사이에선 퍼스널 컬러 파괴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실제로 슈가의 퍼스널 컬러를 따지자면 데뷔 초의 주황, 붉은빛이 도는 브라운보다는 톤 다운된 자몽, 애쉬, 노란끼 섞인 민트, 자연 흑발 등이 잘 어울리는 것으로 볼 때 가을 뮤트(소프트 or 라이트 그레이시)로 추정된다. 팬들 사이에서도 최애 머리를 고르라 하면 의견이 갈린다.]
         아기어피치뿐만이 아니라 찹쌀떡스러운 얼굴에 점처럼 박힌 눈, 웃을 때 커다란 입인 캐릭터와 대체적으로 닮았다. 예를 들자면 [[지방이]], [[포켓몬스터]]의 [[우파]], [[누오]], [[메타몽]]. 이는 [[방탄소년단]] 멤버들 피셜로 증명된 것인데 2017년 슈가의 생일에 올라온 사진에 있는 멤버들이 그린 [[https://imgur.com/sMAY6qG|그림]]을 보면 지방이와 우파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한참 한국에 [[포켓몬 GO]]가 유행했을 때 같은 멤버인 [[RM]]이 누오에게 온순한 슈가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https://twitter.com/BTS_twt/status/836489701561356288|#]] 또한 한때 팬들 사이에선 메타몽짤과 함께 야 호바 대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슈가와 싱크로율 100%인 메타몽과 말투가 잇 포인트다. [[https://twitter.com/JIMINLOVE1o13/status/905450603551137792|야]] [[https://twitter.com/URBlossomStar/status/901760359660265473|호바]]
         한국의 폐쇄적인 정서상 정신적인 문제에 대해 여전히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음에도 단지 팬이라는 이유만으로 솔직하게 자신의 속내를 밝힌 것은 충분히 리스펙할 만한 부분이다. 한국의 분위기상 정신적인 문제를 밝힐 경우 부정적인 시선이 따르기 마련이며 때문에 가족은 물론이고 친한 친구에게도 이를 꺼내기 어려워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들에게, 어쩌면 당장에라도 자신에게서 돌아설 수도 있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이들에게 이 사실을 밝히는 것은 연예인이자 아이돌로써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가사를 보고 너무 많은 걱정 혹은 동정의 시선은 삼가길 바란다. 그는 곡에서 '''나 이젠 정말 괜찮아'''라고 말할 뿐더러 되려 팬들에게 '''고개를 떳떳이 들라, 누가 나만큼 하느냐'''며 팬들을 다독이기까지 한다. 이러한 본인의 어두웠던 속내를 밝히는 것 자체가 자신은 그 힘든 나날들을 넘어 마침내 극복해냈음을 뜻하는 것일 터이다.
          * 데뷔 전 [[5.18 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한 곡을 프로듀싱한 경력이 있다. 곡의 제목은 [[https://youtu.be/elmH5rBKD-M|518-062]]이며, 이 곡을 프로듀싱하던 당시 슈가는 고등학교 2학년이였다.[[https://youtu.be/uA9I9pE0IbM|#]][* 518은 말 그대로 5.18 민주화운동을, 062는 광주의 지역번호이다. 참고로 슈가는 대구 출신으로, 지역별 정치적 성향과 당시 곡을 작업하던 당시의 나이를 감안하는 사뭇 놀랍다는 반응이다. [[방탄소년단]] 멤버 중 실제로 광주에서 나고 자란 멤버는 [[제이홉]]이며, 그 또한 "Ma City"에서 "모두 다 눌러라 062-518"이라는 가사를 통해 5.18 민주화운동을 언급한 바 있다.] [[http://m.pann.nate.com/video/213092772|당시 글]] 참고로 당시에는 gloss라는 예명을 썼다.
          * 고등학교 시절 농구부의 부원이었다. 농구로 대회에서 우승도 여러 번 하고, 연습생 때도 매주 일요일에는 농구를 했다고 한다. 포지션은 대개 [[포인트 가드]]나 [[슈팅 가드]]. 발이 빠르고 공격보단 수비를 잘한다고 한다.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농구로 활약상을 펼치고, 농구공을 튕기는 일에 능한 모습으로 보아 아직도 농구 실력과 농구에 대한 애정은 여전한 듯하다. 슈가의 학창 시절 동창들은 슈가가 커서 농구선수가 될 줄 알았다고 한다. 무기력한 평소 모습과 농구할 때의 갭이 심해 팬들이 농구공 잡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2015년 9월 추석 특집 [[아이돌스타 육상 선수권대회|아육대]]에서 농구선수로 나갔다. 그리고 4골[* 2점 슛 3개, 자유투 1개.]을 기록했다. 최근 [[아는 형님]]에 나가서 농구공을 한 손가락으로 돌리기도 했다.
          * 또한 어린 시절 꽤나 열성적인 [[프로레슬링]] 팬이었다. 팬카페 운영까지 생각했을 정도. 좋아하는 레슬러로는 [[존 시나]], [[더 락]], [[스톤 콜드 스티브 오스틴]]을 꼽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1mHiwNO0sc4|영상]]
          * 애창곡은 [[김현식]]의 '내사랑 내곁에'. 방탄밤을 비롯한 여러 영상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음이 올라가면 힘들어하는 듯. 그리고 [[https://youtu.be/yh9L9skRGqs|피아노를 칠 줄 안다!]] 매우 짧은 영상이지만 연주한 곡은 [[말할 수 없는 비밀]]의 [[흑건]]. 원래 미디과를 준비하던 터라 화성학 쪽도 공부를 했다고 한다.[* 음대 교수인 친척분이 페이스북을 통해 화성학이나 컴퓨터 음악장비, 프로그램에 관한 지식이 대학 교수인 자기 수준이었다고 인증했다.] 그리고 [[가요대제전]] 무대에서에서 짧게나마 [[https://youtu.be/ZKibO8tZyZw|'I NEED U']]를 연주했다. 본 무대에선 핸드 싱크를 했지만 [[https://twitter.com/BTS_twt/status/682607618355941377|트위터에 본인이 직접 연주한 버전을 공개했다]]. 그리고 스타쇼 360에 나온 ‘꽃미남 방탄고등학교’에서 음악 선생님으로 나와 피아노를 쳤다. [[https://youtu.be/DhZuscK4FkM|영상]] [[방탄소년단]]이 광고 모델인 [[푸마(브랜드)|푸마]] 광고 영상에서도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피아노 칠 때 고개를 앞으로 내미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또한 BTS COMEBACKSHOW에서 즉석 연주를 보였다.
  • 이만섭 . . . . 30회 일치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서울)|신촌동]] [[세브란스병원]]<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12/14/0200000000AKR20151214171000001.HTML?input=1195m '한국정치 산 증인' 이만섭 전 국회의장 별세...향년 83세]</ref>
         그 해 11월에는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6대 국회의원에 비례대표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하였고,<ref name="경향_6311">共和黨,過半數線넘어, 《경향신문》, 1963.11.27</ref> 그 후 제7·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ref name="동아_67">當選確定者, 《동아일보》, 1967.6.9</ref><ref name="경향_78">10代總選당선154人의얼굴들, 《경향신문》, 1978.12.13</ref> [[1968년]]에 개최된 국제의원연맹 제5차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국회에 사사건건 간섭하던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갈등을 겪었고 [[대한민국 제4공화국|제4공화국]] 후반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중앙정보부]]장으로 권력을 휘두른 [[이후락]]과 [[김형욱]]을 연이어 탄핵하였고 [[박정희]]가 그의 의견을 수용하여 이들을 낙마시키기도 했다. [[1979년]] 제10대 총선에서 [[대구 중구의 국회의원|대구시 중구]]·[[대구 서구의 국회의원|서구]]·[[대구 북구의 국회의원|북구]]에서 당선되었고 그해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의 당무위원이 되었다.
         [[1980년]]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이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자 과거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출신과 [[유신정우회]] 출신 인사들을 주축으로 한 [[한국국민당 (1981년)|한국국민당]]의 창당에 참여하였다. 제11·12대 국회의원에 연속으로 당선되었고 [[1985년]]에 [[한국국민당 (1981년)|한국국민당]]의 총재를 지냈다.
         하지만 [[한국국민당 (1981년)|한국국민당]]은 [[1987년]] [[10월]]부터 소속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여 [[신민주공화당]]에 입당하며 점차 와해되기 시작했고 다음 해 [[대한민국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제13대 총선]]에서 본인을 비롯하여 모두 낙마하였다. 이후 [[3당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에 합류하였고 이후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의장을 지내기도 하였으며, 그 후 [[민주자유당|민자당]]의 상임고문을 거쳐 [[신한국당]]의 제15대 국회의원으로 다시 당선되었다.
         [[신한국당]]의 총재서리로 임명되었고, [[1997년]]에 [[이인제]]를 지지하면서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 (대한민국)|국민신당]]의 총재가 되었으며,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와 합당을 추진하고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을 지내기도 했다.
         * [[2011년]] 제6회 자랑스러운 한국인상
         |[[대한민국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제11대 총선]]||[[대구 중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경북 대구시 중구]]·[[대구 서구의 국회의원|서구)]]||11대||[[한국국민당 (1981년)|한국국민당]]||{{막대|자민|3|0|9|9}} 30.99%||74,176표||1위||[[파일:국회의원당선.png|25px|대구 중구 국회의원 당선]]
         |[[대한민국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제12대 총선]]||[[대구 중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대구 중구]]·[[대구 서구의 국회의원|서구)]]||12대||[[한국국민당 (1981년)|한국국민당]]||{{막대|자민|2|3|4|2}} 23.42%||78,305표||2위||[[파일:국회의원당선.png|25px|대구 중구 국회의원 당선]]
         |[[대한민국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제13대 총선]]||[[대구 달서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대구 달서구)]]||13대||[[한국국민당 (1981년)|한국국민당]]||{{막대|자민|3|3|0|4}} 33.04%||44,742표||2위||낙선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제15대 총선]]||[[틀:제15대 비례대표 신한국당|국회의원(전국구)]]||15대||[[신한국당]]||{{막대|신한|3|4|5}} 34.5%||6,783,730표||전국구 3번||[[파일:국회의원당선.png|25px|전국구 국회의원 당선]]
         |직책 = [[한국국민당 (1981년)|한국국민당]] 총재
         |직책 = [[신한국당]] 대표권한대행
         |소속정당 = [[한국국민당 (1981년)|한국국민당]]
         |소속정당 = [[한국국민당 (1981년)|한국국민당]] → [[신민주공화당]]
         {{제15대 비례대표 신한국당}}
         [[분류:대한민국의 국회의장]][[분류:대한민국의 신문 기자]][[분류:대한민국의 작가]][[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 제3공화국]][[분류:대한민국 제4공화국]][[분류:최규하 정부]][[분류:대한민국 제5공화국]][[분류:김영삼 정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김대중 정부]][[분류: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분류:대구수창초등학교 동문]][[분류:대륜중학교 동문]][[분류:한국국민당 (1981년) 당원]][[분류:민주자유당 당원]][[분류:신한국당 당원]][[분류:국민신당]][[분류:새정치국민회의]][[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열린우리당 당원]][[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대통합민주신당 당원]][[분류:윤치영]][[분류:김종필]][[분류:동아일보]][[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1932년 태어남]][[분류:2015년 죽음]][[분류:합천 이씨]]
  • 이정호 (1982년) . . . . 30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01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01년]] ([[삼성 라이온즈]])
         |드래프트 순위 = [[2001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01년]] 1차 지명 ([[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KBO (단체)|KBO]] / [[2001년 한국프로야구|2001년]] [[4월 6일]] <br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 대 [[한화 이글스|한화]] 전 [[구원 투수|구원]] <br /> (4이닝 4피안타 1피볼넷 2탈삼진 1세이브)
         |마지막 경기 = [[KBO (단체)|KBO]] / [[2010년 한국프로야구|2010년]] [[5월 14일]] <br /> [[목동야구장|목동]] 대 [[삼성 라이온즈|삼성]] 전 [[구원 투수|구원]] <br /> (3이닝 1홀드)
         * [[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10년 ~ 2011년)
         * [[대구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2015년 ~ 현재)
         '''이정호'''(李正鎬<ref>한국야구위원회, 2009 가이드북</ref>, [[1982년]] [[4월 27일]] ~ )은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 [[넥센 히어로즈]]의 투수이자, 현재는 [[대구고등학교]]의 투수코치이다.
         [[대구상원고등학교|대구상업고등학교]] 시절 에이스로 활동하여 기대를 모은 [[투수]]였다. [[2001년]] [[삼성 라이온즈]]에 그 당시로는 파격적인 계약금 5억 3,000만원을 받고 1차 지명으로 입단했다. 그러나 프로 적응에 실패해 고향 팀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부상까지 겹쳐서 [[2004년]]까지 19경기에 등판해 1승 1세이브, 평균자책 5.55에 그쳤다. 설상가상으로 [[2004년]]에는 병역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그 해 9월에 시즌 아웃되었다.<ref>[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926815.htm 프로야구, 역대 1순위 지명 선수 실패 사례는?] - 스포츠서울</ref>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현대 유니콘스]]에 패해 준우승에 그친 [[삼성 라이온즈]]는 시즌이 끝나고 그 해 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얻게 된 [[박진만]]과 [[심정수]]를 잡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이정호가 보상 선수로 지명되어 그는 고향 팀을 떠나게 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3&aid=0002545786 히어로즈 이정호 힘찬 부활의 날갯짓] - 뉴시스</ref> 현대에 이적한 후에도 병역을 이행해야 했기 때문에, 팔꿈치와 어깨 수술 등으로 [[공익근무요원]]으로 군 복무와 재활을 병행하여 현대에서의 활동은 없었다.
         소집 해제 이후 바뀐 팀에 복귀했다. [[2008년]] [[8월 26일]] [[목동 야구장]]에서 친정 팀과 맞붙었을 때 [[마일영]]의 뒤를 이어 등판, 1군에 복귀했다.<ref>[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0808271130302225&ext=na '잊혀졌던 유망주' 이정호의 반가운 복귀] - 마이데일리</ref> 이 날은 [[삼성 라이온즈]] 투수 [[이상목]]이 100승을 거둔 날이기도 했다. 복귀 후 주로 불펜으로 활동했다. 2010년에도 부상으로 4경기에만 등판하여 1홀드만 기록했다. 기회를 잡지 못하게 되자 시즌 후 해외 진출에 도전하겠다고 선언, 구단에 임의탈퇴 공시를 요청하여 현재는 [[넥센 히어로즈]]에서 임의탈퇴된 상태이다.<ref>[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011270006 '해외도전' 이정호, "추신수에 자극받은 것 아니다"] - OSEN</ref>
         이후 잠시 모교인 [[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의 투수코치로 생활을 이어가다가, [[2011년]] 말 독립 야구단 [[고양 원더스]]의 프런트로 입사하였다. 프런트로 꾸준히 활동하던 중 [[2014년]] [[9월 11일]] 구단주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KBO에 의해 구단 해체를 선언한 후, 그 날 프런트직에서 물러났다.
         [[2014년]] [[12월 16일]] [[한화 이글스]]의 3군 투수코치로 부임받았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17&article_id=0002548544&date=20141216&page=1 '비운의 천재' 이정호, 한화 코치로 제2의 야구인생 개척] - 마이데일리 2014년 12월 16일 확인.</ref> 하지만 2015 시즌 후 사임하고 [[대구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ref>[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380&aid=0000000943 그 신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1> 고졸 최고 대우, 삼성 이정호] - 이영미 칼럼</ref>
         {{2000년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 대한민국 선수 명단}}
  • 정찬성 . . . . 30회 일치
         ||<#000002> '''{{{#white 신체}}}''' || 175cm[* ufc 버뮤데즈전프로필상으로 170cm로 나왔지만 이는 표기오류다 ] / 65kg[* 평소 체중은 77kg] / '''189cm'''[* 정찬성 본인이 파이트 캐스트에서 189cm라고 밝힘. 심지어 그 맥그리거보다 2cm 길다.] ||
         '''[[MMA]] 역사상 해외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얻은 한국 선수.'''
         '''UFC 타이틀 매치를 치른 유일한 [[한국]] 선수'''
         [[2018년]] 9월 1일 기준으로 [[한국인]]중에서 유일하게 UFC 공식 랭킹 15위 안에 들어가는 파이터
         오미가라 미치히로, 손환진 등 이 외에도 한국, 일본의 단체에서 얻은 8승
          * '''[[조제 알도]]''' - 4라운드 '''[[어깨]] [[탈골]]으로 인한 TKO패.''' 이 경기는 '''한국인 최초의 UFC 타이틀전'''이다. 1, 2라운드를 알도에 내준 정찬성이 3라운드에 기세를 잡으면서 한국 팬들의 기대를 받는 순간 어깨가 빠져버리며 한국인 첫 UFC 타이틀 도전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 경기 후 정찬성은 군복무를 하며 고질적인 어깨 문제를 치료하고 부족한 근력 강화에 집중하게 된다.
         2007년 6월 SSF로 [[종합격투기]] 무대에 데뷔, 2007년 12월 판크라스 한국대회와 2008년 5월 횡성 한우배에서 연달아 우승을 차지하며 전적을 쌓아갔다.[* 다만 현 시점에 와서 SSF에 대한 기록은 어딜 봐도 찾아볼 수가 없는 실정이다. Q채널에서 방영한 리얼격투 스트리트파이터 라는 격투기 토너먼트 프로그램에 2007년 6월경 출연한 기록이 있는데, 아마도 SSF는 그 프로그램을 통칭하는 것으로 추정할 뿐. 당시 토너먼트 규칙은 3인 1팀으로 팀전이었는데, 정찬성 선수는 계속 이기며 결승까지 올라갔으나 결승에서 합기도 선수에게 판정패당한다.][* 참고로 정찬성 선수는 해당 토너먼트에 킥복서 베이스를 가지고 참가했는데, 대회 룰 자체가 연속니킥 금지에 링도 없어서 펀치 러쉬가 이어지질 못하는 등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상당히 괴랄한 대회였다.]
         2009년 3월 [[센고쿠]] 7진 페더급 토너먼트에서 신성 이시와타리 신타로를 맞아 리어네이키드 초크로 승리를 거두며 [[메이저]] 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1라운드 거친 타격전에서 레프트를 적중시키며 신타로를 주저앉혔으나 신타로는 다시 회복했고 클린치 싸움으로 이어진다. 레프리의 '스탑 돈 무브'가 선언되며 링 중앙에서 재개된 공방에서 다시금 라이트를 안면에 적중시켰고 등을 보인 신타로에게 스탠딩 백마운트에서 초크를 성공시키며 승부에 쐐기를 꽂았다.
         한국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말이 많았는데 시기상 [[료토 마치다]] vs [[마우리시오 쇼군]]의 UFC 104, 프랭키 에드가 vs [[BJ 펜]] 의 UFC 112 등 판정논란으로 시끌시끌한 때였기에 더욱 그랬다. UFC 해설자인 [[조 로건]]은 심판들의 자질을 혹평하며 현재의 판정체계에 개선을 요구했고 파이트 메트릭의 분석에서도 정찬성의 압도적인 승리가 선언되었다.
         2015년 11월 28일 UFC 최초의 한국 대회가 열리게 되었고, 정찬성의 참가 여부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정찬성 본인 또한 참가 의지를 표명하며 병무청에 참가가 가능한지 문의했으나 영리활동이라는 이유로 아쉽게도 불발되었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9630107&code=61161111&cp=nv|뉴스링크]]
         [[2016년]] 10월 19일로 소집해제되었고 복귀전으로 [[BJ 펜]]을 원한다고 했다.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409&aid=0000006100|#]] 하지만 2월 5일(한국시간) 미국 휴스턴 도요타 센터에서 열리는 UFN 104의 메인이벤트에서 페더급 랭킹 9위 데니스 버뮤데즈를 상대로 복귀전이 확정됐다. 비록 원하던 BJ 펜은 아니지만, 부상 치료와 군복무 등으로 인한 장기간 공백에도 불구하고 복귀전이 메인이벤트로 잡히면서 미국내 정찬성의 인기는 여전함을 볼 수 있다.
         현장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데이나 화이트도 #ufckorea라는 해쉬태그와 함께 코리안 좀비가 돌아왔다며 트윗을 올렸다. 이후 인터뷰에서 정찬성은 3년이상 경기를 뛰지 못했는데 역사상 그 어떤 선수보다 멋지게 복귀했다며 칭찬을 아끼지않았다. 말미에 한국대회를 기대하겠다는 기자의 말에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2017년 5월 13일, 정찬성이 SNS에 본인과 [[최두호]]가 2017년 7월 29일(한국 기준 30일)에 열리는 UFC 214에 출전한다고 밝혔다! 최두호의 상대는 15위 바로 아래 수준의 안드레 필리. 그리고, 정찬성의 상대는 '''페더급 랭킹 3위의 [[리카르도 라마스]]'''이다. 정찬성과 라마스의 경기는 4월부터 각종 해외 종합 격투기 소식에서 추진되고 있다는 말이 나와서 어느정도 예상되었었다. [[UFC]]에서 공식으로 정찬성의 상대가 라마스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각종 해외 격투기 소식에서 정찬성 vs 라마스가 성사되었다는 뉴스가 나왔고, 정찬성 본인도 라마스와 잘 싸우고 오겠다고 한 것으로 보아 둘의 경기도 확정인 듯 하다. 드디어 5월 말, UFC에서 공식적으로 '''정찬성과 라마스의 경기'''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정찬성이 이번 경기에서 이길 경우 한 경기를 더 치루고 다시 다시 타이들전에 도전할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다만 [[댄 핸더슨]]같이 상대가 한 방에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파워가 있거나 [[앤더슨 실바]], [[코너 맥그리거]], 한국 선수 중에서는 [[최두호]]처럼 상대를 정확하게 요격하는 정확도를 가지고 있진 않다. 콤비네이션은 다소 엉성하고, 핸드스피드도 빠른 편이 아니며 [[니킥]]의 활용은 좋지만 킥의 활용도 뛰어나지 않다. 하지만 버뮤데즈나 호미닉같이 방심한 상대를 마무리할 정도의 결정력과 한방은 가지고 있다.
         한국과 아시아에서 활동하던 시절에는 한국의 [[반달레이 실바]]라고 불릴 정도로 화끈한 난타전을 벌였다. 사실 어렸을 적부터 [[합기도]]를 배웠고 18세에 [[킥복싱]]을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격투기 무대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만큼, 타격으로 격투기 생활을 시작하기도 했다.
         이 좀비 스타일이 가장 돋보인 경기는 역시 레오나드 가르시아와의 미친 듯한 타격전. 맷집이 좋은 선수끼리 붙은 이 경기는 확실히 MMA 라기 보다는 싸움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줬고 이 광기어리기까지 한 경기에 북미 팬들이 열광하며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인기 좋은 한국 MMA 선수에 등극했다.
         프로가 되기 전 리얼격투 스트리트 파이터 라는 아마추어 선수들이 대결을 벌이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경험이 있다.
         경기마다 명장면을 만들어 내는 초특급 슈퍼스타다. WEC 48의 난타전, UFN 24의 트위스터에 이어 UFC 140에는 최단시간 KO까지 만들어내는 등 그가 싸우는 곳에는 언제나 화제가 끊이지 않는다. 경량급에는 스타가 확실히 적은걸 보면 정말 의미있는 일이다. 마치 BJ 펜이 라이트급의 서막을 열었듯이. 이미 한국 안에서 뿐 아니라 Zuffa 페더급의 흥행을 책임지는 스타 플레이어. 한국에서의 MMA의 인지도를 생각하면 오히려 북미에서의 인기가 더 높을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 연이은 명경기로 한국에서의 인지도가 급상승했지만 북미의 찌를듯한 인기에 비하면 아직은 국내인기는 약한 편이다. 실제로 코리안 좀비 티셔츠는 2010년 MMA 티셔츠 판매량 1위를 차지했다.
         UFN 24 이후 해설자인 [[조 로건]]이 이 서브미션을 보고 트위스터로 유명한 주짓떼로 '에디 브라보'가 기뻐할 거라 이야기 했는데, 정말로 기뻐해 주셨다. 친히 '코리안 좀비' 티셔츠를 입고 유튜브에 10 여분 가까이 되는 트위스터에 대한 교육용 비디오를 올렸다. MMA형 트위스터, 레슬링형, 주짓수 공방용, 스웨덴 스타일 등 온갖 화려한 트위스터를 다 올려 놨다. 정찬성 보라고 올린 것은 아니지만 에디 브라보가 내놓은 컴비네이션들을 보면 트위스터가 백을 잡은 상황에서 MMA의 새로운 공격 방도가 될 가능성도 있다. 물론 충격적인 기술이었으나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 트위스터를 잡으려면 하프로 내려와야 하는데 기껏 백을 잡아놓고 하프를 타는건 상당한 손해를 감수하는 일이다. 00년대 이후로는 점점 섭밋보다도 파운딩이 대세이기도 하고. 에디 브라보의 동영상 역시 MMA 형 트위스터의 경우 트위스터로 기술을 완성시키기 보다 트위스터를 밟아가는 와중 늑골 파운딩이나 안면 파운딩으로 이어지는 컴비네이션을 설명해 준다. 정찬성의 경우처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경우에는 백을 잡은 상황에서 RNC와의 한방 이지선다를 노릴 수도 있다. 그리고 브라보는 트위스터 동영상 말미에 정찬성 보고 '친구들 데리고 술이나 한잔 하자' 라고 발언했다.
         2011년 12월 MMA 위클리 랭킹에서 페더급 10위에 랭크되었다. 한국인 파이터가 체급별 랭킹 TOP 10 안에 진입한 것은 2007년 김종만 선수가 랭킹 8위에 랭크된 이후 두 번째다. 2013년 2월 만들어진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410&aid=0000355574|UFC 첫 공식 랭킹]]에서 '''페더급 3위'''에 올랐다.
  • 이승현(농구선수) . . . . 28회 일치
          * [[농구 관련 인물(한국)]]
         ||<:> '''신체사이즈''' || 197cm, 105kg[*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공식 프로필] ||
         ||<:> '''프로입단''' || [[2014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 |2014 드래프트]] 전체 1순위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오리온스]]) ||
         ||<#34007f><:> '''[[2015~2016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ffffff 2016}}}]]''' ||
         ||||||||||||<#DDDDDD><:> '''2015~2016 [[한국프로농구]] [[KBL 챔피언결정전|플레이오프 MVP]]''' ||
         ||||||||||||<#DDDDDD><:> '''2015~2016, 2016~2017 [[한국프로농구]] 최우수 수비상''' ||
         ||||||||||||<#DDDDDD><:> '''2014~2015 [[한국프로농구]] [[KBL 최우수 신인|최우수 신인]]''' ||
         ||||||||||||<#DDDDDD><:> '''2015 [[프로-아마 농구 최강전]] MVP''' ||
         ||||||||||||<#DDDDDD><:> '''2014 [[한국대학농구리그]] 정규리그 MVP''' ||
         ||||||||||||<#DDDDDD><:> '''2014 [[한국대학농구리그]] 챔피언결정전 MVP''' ||
         ||||||||||||<#DDDDDD><:> '''2011 [[한국대학농구리그]] 신인상''' ||
         4년간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면서 이종현과 함께 트윈타워를 형성하며 고려대학교 농구부의 전성기를 이끈 주역으로, 고려대의 2013년 농구대잔치, MBC배, 프로-아마 최강전, [[한국대학농구리그]] 챔피언 결정전 우승과 2014년 MBC배, 아시아-퍼시픽 대학농구 챌린지, 대학농구리그 정규리그 전승 및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달성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런 활약으로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농구 예비 엔트리에도 진입하였으며 [[유재학]] 감독이 높게 평가하는 것을 볼 때 발탁 가능성도 적지 않았지만, 결국 최종 엔트리 진입에는 실패했다.
         한편 이승현이 프로에 와서는 대학시절의 파괴력 넘치던 인사이드 플레이를 보여준다기보다는 오히려 공격시 슈터가 아니냐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외곽 플레이의 비중을 늘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승현은 현재 오리온스에서 공격시 외곽과 인사이드의 조합을 1:1정도로 가져가며 [[파워 포워드|4번]]보다는 3.5번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팬들이 기대했던 파괴력 있는 모습과는 차이가 있지만 팀에서 궂은일을 하고 외곽에서 필요할때 3점슛을 넣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플레이에 대한 팬들의 변명으로 농구에서 [[포인트 가드]] 외에는 포지션의 엄격한 구별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추일승]] 감독에 의해 그렇게 플레이하도록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제기되기도 한다.
         장점 중 타고난 체력이 꼽히기도 하는데, 대학리그를 마치고 휴식기 없이 바로 프로 데뷔 시즌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팀내 평균출장시간 1위(2014-15 시즌) 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동시에 대학 말년에 장착한 3점슛이 일취월장하여 허일영(50%)에 이은 시즌 3점슛 성공률 2위(42.9%)를 기록하였다.
         2014-15 시즌 한국프로농구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기자단 투표수 99표중 74표를 획득하였다. 참고로 2위 김준일은 25표를 받았다.]
         2015 시즌 개막을 앞두고 열린 2015 [[프로-아마 농구 최강전]]에서 MVP를 수상하였다. 특히 결승전에서 모교 후배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기량차이를 보여주었다.
         대학 선배인 김동욱이 우월한 피지컬을 이용해 2번에서 좋은 활약을 하는 것을 보고, 이를 본받아 매치업이 딸리거나 파워에서 우위가 있다고 판단하면 인사이드 플레이를 시도하고 있다. 프로 지명 이후 골밑에서의 역할이 수비나 리바운드에 한정되었다면, 이제는 공격옵션 다각화를 위해 골밑 공략도 수행하는 등 나날히 발전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에서 열린 2019 FIBA 농월 예선에서는 발목 수술때문에 결장하였다. 대체선수로 들어온 최부경의 현기증나는 플레이를 본 농구팬들이 김선형과 함께 가장 그리워했던 선수.
         신장은 197cm로 아주 큰건 아니지만 웨이트가 105kg이기 때문에 버티는 힘이 상당하다. 대학때는 포스트업을 곧 잘 쳤지만 프로에서는 조금은 버거워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2년차때는 좀 더 힘도 좋아져서 포스트업도 비교적 잘 먹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주 득점은 외곽 3점슛, 롱2가 주력이고 속공 참여로 받아먹는 모습도 능하다.
         '''국내무대에서 자신이 소속했던 모든 팀을 우승시켰다. 그것도 주역으로'''[* 다만 국대에선 우승경력이 없다. 최근 한국농구의 유일한 국제대회 우승인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선 최종엔트리에서 탈락했으며, 15년 가을에 열린 아시아농구선수권에선 국가대표로 선발됐지만 우승시키진 못했다.]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 . . . . 27회 일치
         지도가 세세해졌다. HOI2에서는 프로빈스 하나였던 [[이오지마]]가 이오지마, 수리바치 산, 모토야마의 세가지 프로빈스로 나뉘었다던가, [[쿠바]]에 [[관타나모 해군기지]]가 추가되었다던가. 하지만 세세해지기만 한 건 아니라서 [[제주]]가 [[광주]]에 통합되었다.
          특정한 전쟁, 전역을 배경으로 한 시나리오. 배경이 될 지역 외의 프로빈스는 잠겨 있으며, 전투를 제외한 모든 기능들이 잠겨있다.
          핵무기를 개발하고 원자로도 충분히 크면 생산되는 자원. 전략폭격기에 탑재해 적 프로빈스를 쑥밭으로 만드는데 쓰인다. "소형화된 원자폭탄"을 연구하면 비행폭탄과 로켓에도 탑재 가능. 핵공격을 받은 프로빈스는 건물과 자원 수급에 영구적인 피해를 입으며, 해당 프로빈스에 주둔하던 병력들도 괴멸적인 타격을 받는다. 불만도는 덤. 영국과 일본[* 영국은 본토에 핵을 맞으면 항복하며, 일본은 본토에 두번 핵을 맞으면 항복한다.]을 제외한 메이저 국가들의 경우 수도에 핵을 맞으면 최대 두번까지 수도 이전 이벤트가 뜬다.
         말 그대로 건물들. 건설 시간이 오래 걸리는게 많다. 또한 해당 프로빈스에 건물을 지으려면 해당 프로빈스에 보급이 이루어져한다.
          공업력(IC) 수치를 1 올려주는 건물. 무에서 공업력을 만들어 내는건 아니고 하루에 2 에너지와 1 금속 0.5 희귀금속을 처먹는다. 못 먹으면 공업력을 제공 안하니 주의. 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게임 시작에는 이걸 짓는다. 33% 이상의 기반시설이 지어져 있는 프로빈스에만 지을 수 있다.
          해당 프로빈스에서 벌어지는 상륙전에서 방어측에게 보너스를 주는 건물. 그런데 이런거 없어도 상륙전은 방어측이 우세하다.
          해당 프로빈스에서 벌어지는 지상전에서 방어측에게 보너스를 주는 건물.
          해당 프로빈스에서 공중전이 벌어지면 적기를 격추시키는 건물. 미리 생산하고 원하는 프로빈스에 배치할 수 있다.
          공군 유닛이 주둔하는 곳. 공군 기지의 사이즈에 따라 보급&증원&업그레이드 효율이 높아지고, 주둔한 공군 유닛의 수에 따라 효율이 낮아진다. 공군기지가 위치한 프로빈스가 적에게 넘어가면 그곳을 거점으로 삼던 공군 유닛들은 모두 전멸 처리된다. 미리 생산하고 원하는 프로빈스에 배치할 수 있다.
          해군 유닛이 주둔하는 곳. 크기 1 짜리 해군 기지(항구)는 해군 유닛의 모항으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점에 주의. 병력 수송용 정도로나 사용할 수 있다. 해군 기지의 사이즈에 따라 보급&증원&업그레이드 효율이 높아지고, 주둔한 해군 유닛의 수에 따라 효율이 낮아진다. 해군기지가 위치한 프로빈스가 적에게 넘어가면 그곳을 거점으로 삼던 해군 유닛들은 바다로 탈출, 보급 부족으로 피가 깎여가며 제일 가까운 아군 해군 기지로 이동한다. 미리 생산하고 원하는 프로빈스에 배치할 수 있다.
          주변 프로빈스의 시야를 밝혀 주며, 해당 프로빈스에서 공대공 전투를 벌이는 자국 항공기의 효율을 늘려준다. 미리 생산하고 원하는 프로빈스에 배치할 수 있다.
          원자 관련 연구 속도를 가속시켜주는 건물. 핵무기 관련 연구가 완료되고, 충분한 크기의 원자로가 있으면 핵무기를 자동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한다. 핵무기 생산 속도는 원자로의 크기에 비례한다. 에너지를 생산하지는 않는다. 매뉴얼에 따르면 "핵 실험 시설"이라고 하는게 더 나았을 거란다. 미리 생산하고 원하는 프로빈스에 배치할 수 있지만, 한 프로빈스 밖에 지을 수 없다. 병신같은 곳에 배치해서 뺏기거나 하지 않게 하자. 적국에게 빼앗기면 그 즉시 파괴된다.
          로켓 관련 연구 속도를 가속시켜주는 건물. 비행 폭탄, 전략 로켓의 생산 속도를 가속시키기도 한다. 미리 생산하고 원하는 프로빈스에 배치할 수 있지만, 한 프로빈스 밖에 지을 수 없다.
          자원, 청사진, 군사 유닛, 프로빈스를 두고 일발적 거래를 제안한다. 프로빈스는 국민지역이 아닌 지역만 거래할 수 있다. 또한 청사진, 군사 유닛, 프로빈스 거래는 동맹국끼리만 가능하다.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유닛 . . . . 27회 일치
         Early Construction Engineering(초기 건축 공학)을 연구했다면 한 프로빈스에서 움직이지 않는 육군 부대는 참호를 파기 시작한다. 참호는 해당 부대의 방어 능력에 보너스를 준다. 하지만 부대가 이동을 시작하면 지금까지 판 모든 참호가 사라진다.
          * Move(이동): 제일 간단한 임무. 해당 프로빈스로 이동한다. 도착 시간은 현재 위치한 지역의 기반시설 수준, 지형, 날씨, 부대의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
          * Attack(공격): 적이 점령한 프로빈스에 이동 명령을 내리면 하는 임무. 해당 프로빈스로 이동해 점령한다. 만약 목표 프로빈스에 적군이 있다면 전투가 벌어진다.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계속 공격을 진행하지만 패배한다면 그대로 정지한다. 도착 시간은 현재 위치한 지역의 기반시설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
          * Support Attack(공격 지원): 근처 적이 점령한 프로빈스에 내릴 수 있는 임무. 다른 부대가 지정된 프로빈스에서 전투를 벌이면 자동적으로 전투에 참가한다. 하지만 승리한다고 해도 해당 프로빈스로 진격하지 않고 원래 있던 곳에 머물러 있는다.
          * Support Defense(방어 지원): 근처 아군이 점령한 프로빈스에 내릴 수 있는 임무. 적 부대가 지정된 프로빈스를 공격하면 자동적으로 해당 프로빈스로 이동, 전투에 참가한다.
          * Reserves(예비): 방어 지원과 비슷하다. 차이라면 지정 대상이 인근 프로빈스 전부라는 것.
          * Retreat(후퇴): 방어전에서 패배한 육군 부대가 하는 행동. 근처의 아군 프로빈스로 이동한다. 만약 졌는데 근처 아군 프로빈스가 없다면 그대로 전멸 처리된다. 후퇴 도중에는 어떠한 명령도 내릴 수 없으며, 적 공군의 공격 등에 취약해지므로 주의. 만약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목적지에 적 병력이 있다면 전멸 처리된다.
          * Strategic Redeployment(전략적 재배치): 기차를 이용한 병력수송. 잠시동안 사라졌다가 지정한 아군 프로빈스에 나타난다. 조직력이 약간 깎인다. 부대를 먼 곳에서 불러올 때 쓰인다. 전략적 재배치 도중 목적지에 갈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수도로 목적지가 변경된다. 이를 이용해 먼곳에 있는 부대를 수도로 워프시킬 수 있다.
          * Rebase(주둔지 변경): 지정된 프로빈스로 주둔지를 변경한다. 조직력이 깎인다.
          * Ground Attack(지상 공격): 1913년 연구인 "폭탄 투하 전술"을 연구하면 해금. 목표 지역의 적 육군 부대를 공격, 전력을 깎는다. 공격 대상은 목표 지역 내 제일 적은 적군이 주둔한 프로빈스다. HOI2 바닐라 때는 이걸로 행군중인 사단을 몰살시키거나 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 Ground Support(지상 지원): 1916년 연구인 "근접 항공 지원 발상"을 연구하면 해금. 목표 지역의 적 육군 부대를 공격, 조직력을 깎는다. 공격 대상은 목표 지역 내 제일 적은 적군이 주둔한 프로빈스다.
          * Strategic Bombardment(전략 폭격): 1917년 연구인 "전략 폭격기 발상"을 연구하면 해금. 목표 지역의 적 공장을 폭격해 공업력을 일시적으로 떨어뜨린다. 공격 대상은 목표 지역 내 제일 적은 적군이 주둔한 프로빈스다.
          * Logical Strike(병참 타격): 1916년 연구인 "전술 폭격기 발상"을 연구하면 해금. 목표 지역의 적 산업기반을 폭격해 레벨을 일시적으로 떨어뜨린다. 공격 대상은 목표 지역 내 제일 적은 적군이 주둔한 프로빈스다.
          * Installation Strike(시설 타격): 1916년 연구인 "전술 폭격기 발상"을 연구하면 해금. 목표 지역의 대공포, 레이더 기지, 원자로, 로켓 시험소를 폭격해 레벨을 일시적으로 떨어뜨린다. 공격 대상은 목표 지역 내 제일 적은 적군이 주둔한 프로빈스다.
          * Strategic Redeployment(전략적 재배치): 기차를 이용한 병력수송. 비행폭탄과 전략로켓은 이 방법으로 주둔지를 바꿔야 한다. 잠시동안 사라졌다가 지정한 아군 프로빈스에 조직력이 깎인채로 나타난다. 부대를 먼 곳에서 불러올 때 쓰인다. 전략적 재배치 도중 목적지에 갈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원래 있던 공군기지로 목적지가 변경된다.
         싸고 생산 시간도 짧지만 일회용이니 짭잘하지는 않다. 전략폭격 밖에 할 수 없으며 이동도 전략적 재배치로만 가능하다. 비행폭탄과는 달리 격추가 불가능하다. 속도가 엄청나서 공중전이 벌어져도 순식간에 해당 프로빈스를 벗어나기 때문.
          * Rebase(주둔지 변경): 지정된 프로빈스로 주둔지를 변경한다. 조직력이 깎인다.
          * Move(이동): 제일 간단한 임무. 목표 프로빈스로 이동한다. 도착 시간은 날씨, 부대의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
          * Shore Bombardment(해안 포격): 목표 프로빈스에서 전투를 벌이는 아군 지상 부대에게 보너스를 준다.
          * Sneak Move(잠복 이동): 목표 프로빈스로 이동한다. 적 함대를 피해가느라 일반 이동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적 함대와 전투를 벌일 확률이 낮아진다.
  • 의성군 . . . . 27회 일치
         [include(틀:프로젝트 문서,프로젝트=나무위키 대경권 프로젝트)]
         ||<-2><bgcolor=#FFB6C1> {{{#FF0080 '''군수'''}}} ||<bgcolor=#FFFFF0> [[김주수(정치인)|김주수]]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br]재선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2><|3><bgcolor=#FFB6C1> {{{#FF0080 '''군의회'''}}} ||<:><bgcolor=#CA252B>'''[[자유한국당|{{{#FFFFFF 자유한국당}}}]]''' {{{#FFFFFF 9석}}}||
         ||<bgcolor=#FFB6C1> {{{#FF0080 '''2'''}}} ||<bgcolor=#FFFFF0> 김수문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 ||
         ||<-2><bgcolor=#FFB6C1> {{{#FF0080 '''국회의원'''}}} ||<bgcolor=#FFFFF0> [[상주시·군위군·의성군·청송군]]:[br][[김재원(정치인)|김재원]]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br]3선 ([[2017년 4월 재보궐선거]]) ||
         2016년 ‘중앙 이코노미스트’가 이상호 한국고용정보원 부연구위원과 국내 252개 기초단체의 인구 현황(2015년)을 분석한 결과 노인 인구 100명 당 20~30대 여성 인구 17명으로 30년 뒤 사라질 가능성이 가장 큰 지역으로 선정되었다. [[http://news.joins.com/article/19968138|# 젊은 여성 없는 의성·고흥·군위…30년 뒤 내 고향 사라진다]]. 참고로 [[고흥군]], [[군위군]]이 뒤를 이었다. 또한 2015년 인구총조사에 의하면 한국에서 평균연령이 가장 높은 기초자치단체이기도 하다. 평균연령 55.3세, 중위연령 59.2세.
         국내 최초의 [[컬링]] 전용 빙상장 [[경북컬링훈련원]]이 의성읍 충효로 104에 위치해 있으며, 의성군 내의 중, 고등학교의 방과 후 활동엔 [[컬링]]이 포함되어 있을 정도다. 이는 의성군 출신의 체육인이자 국내 컬링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김경두]] 전 대한컬링연맹 부회장의 노력이 컸다. 전직 레슬링 선수 출신이었던 김 회장은 컬링이라면 동양 선수와 서양 선수의 체격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종목이라 생각해서 의성군에 컬링훈련원을 개설했고 실제로 그의 예상은 거의 들어맞아서 한국은 단기간[* 1994년에 컬링 연맹 설립, 곧바로 세계 연맹에 가입했으며 2001년 아-태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이 정도면 단기간이 아니라 초단기간 급성장이라고 봐야할 지경(..)] 내에 세계 랭킹에서 경쟁하는 선수들을 배출하는 나라가 되었다.[* 물론 선수들의 수준과는 무관하게 컬링은 오랜 기간 비인기 종목이었고, 결정적으로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지 못해 외면 받았다. 이 시기를 거쳐간 지도자나 선수들도 하나 같이 아직 우리 컬링은 멀었다는 말을 한다. 처음으로 출전권을 따낸 소치 올림픽을 준비하던 2013년 당시에도 컬링 선수들은 태릉선수촌에서 식사도 못할만큼 인지도나 후원이 열악했다.]
         || '''정당''' ||<:><bgcolor=#1870B9>{{{#FFFFFF 더불어민주당}}}||<:><bgcolor=#C9151E>{{{#FFFFFF '''자유한국당'''}}}||<:><bgcolor=#046240>{{{#FFFFFF 국민의당}}}||<:><bgcolor=#00B1EB>바른정당||<:><bgcolor=#FFCC00>정의당||<:>격차||<:>투표율||
         || {{{#C9151E '''상주·군위[br]·의성·청송'''[* 지역구 국회의원 : [[김종태(1949)|김종태]]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재선) → [[김재원(정치인)|김재원]] (자유한국당, 3선)]}}} ||<:>14.69%||<:><bgcolor=#C9151E>{{{#FFFFFF 63.35%}}}||<:>12.72%||<:>5.25%||<:>2.79%||<:>{{{#808080 ▼48.66}}}||<:> 75.10 ||
         ||<:><tablealign=center><bgcolor=#1870B9><-6> {{{#FFFFFF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bgcolor=#C9151E><-5> {{{#FFFFFF '''새누리당→자유한국당'''}}} ||
         || [[정창화(정치인)|정창화]]/4선 [br] 한나라당 || 김재원/3선 [br] [[자유한국당]] ||
         TK 안에서도 보수정당이 강세를 보이는 지역이다. 생활권이 비슷한 이웃 [[군위군]], [[영덕군]]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수성향이 강한 TOP3''' 지역으로,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86.1%를 득표하여 군위, 영덕에 이어 전국 3위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최순실 게이트를 일으키고 결국 탄핵이 된 이후에 치뤄진 [[19대 대선]]에서도 [[홍준표]] 후보가 63.3%를 득표하여 군위 다음으로 전국 2위를 기록했다. 또한 대선 한 달전에 있었던 [[2017년 4월 재보궐선거]]에서도 의성 출신+강성친박 성향의 김재원 후보 역시 67.13%의 몰표로 가볍게 당선되는 데에 일조했을 정도로,[* 합산 득표율은 47.5%]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외의 다른 정당은 발을 붙이지 못할 수준이었다.
          * [[김성래]] : 야구코치, 전 야구선수
          * [[김용달]] : 야구 관련 인물
          * [[류한국]]
          * [[박상익]] : 전 프로게이머.
          * [[이범호]] : 야구선수
          * [[조범현]] : 야구감독
  • 임혁주 . . . . 27회 일치
         1975년 [[연극]][[배우]] 첫 데뷔하였고 1980년 [[한국방송공사|KBS 한국방송공사]] 공채 7기 [[배우|탤런트]] 정식 데뷔하였다. 이후 [[텔레비전 드라마]]와 [[연극]] 부문에서 활동하였다.
         * 1982년 [[한국방송공사|KBS]] - 《[[고향]]》
         * 1983년 [[한국방송공사|KBS]] - 《[[개국 (드라마)|개국]]》 - [[조선 태종|조선 태종 이방원]] 역
         * 1983년 [[한국방송공사|KBS]] - 《[[고교생 일기]]》
         * 1984년 [[한국방송공사|KBS]] - 《[[독립문 (1984년 드라마)|독립문]]》
         * 1985년 [[한국방송공사|KBS]] - 《[[새벽 (드라마)|새벽]]》
         * 1985년 [[한국방송공사|KBS]] - 《[[광장 (드라마)|광장]]》 - 이명준 역
         * 1986년 [[한국방송공사|KBS]] - 《[[님의 침묵 (1986년 드라마)|님의 침묵]]》
         * 1987년 [[한국방송공사|KBS]] - 《[[토지 (1987년 드라마)|토지]]》 - 장연학 역
         * 1988년 [[한국방송공사|KBS]] - 《[[조선백자 마리아상]]》
         * 1989년 [[한국방송공사|KBS]] - 《천명》
         * 1991년 [[한국방송공사|KBS]] - 《[[황혼에 피는 꽃]]》
         * 1995년 [[한국방송공사|KBS]] - 《[[한명회 (드라마)|한명회]]》 - [[구치관]] 역
         * 1995년 [[한국방송공사|KBS]] - 《[[서궁]]》 - [[임해군]] 역
         * 1995년 [[한국방송공사|KBS]] - 《[[찬란한 여명]]》 - [[김홍집 (1842년)|김홍집]] 역
         * 1996년 [[한국방송공사|KBS]] - 《[[스타트 (드라마)|스타트]]》
         * 1996년 [[한국방송공사|KBS]] - 《[[용의 눈물]]》 - [[맹사성]] 역
         * 1998년 [[한국방송공사|KBS]] - 《[[종이학 (드라마)|종이학]]》
         * 2000년 [[한국방송공사|KBS]] - 《[[태조 왕건 (드라마)|태조 왕건]]》 - [[박영규 (후백제)|박영규]] 역
         * 2001년 [[한국방송공사|KBS]] - 《[[꽃밭에서]]》
  • 박경석(1933) . . . . 26회 일치
         그후 박경석 소위는 여러 전투에서 생사를 넘나들었으며, 한 번은 북한군에 잡혀 포로가 되었지만 포로 수용소에서 탈출했다, 사실 박경석 소위가 포로로 잡힌 북한군 내에서는 박경석 소위를 비롯한 많은 한국군 장교포로들을 해방군관이라는 이름으로 전향시키려 했지만, 그게 안 되었고, 포로 생활도 도망가든 말든 자유로웠다고 한다. 박경석 장군은 포로 시절을 회고하며, 포로로 잡힌 북한군 사단의 사단장이 적이었지만, 그의 리더쉽에 감명 받았다고 한다. 부대에 식량이 떨어지면 사단장도 부하들과 함께 굶는 등의 리더쉽에 영향을 받아 뒷날 한국군내 정치군인이 판을 칠때도 그들의 회유와 압력에 굴하지 않고 참군인으로써 군인의 본분과 사명을 다하는데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1950년대 후반부터 위관, 영관급 등 연간 100명의 장교들이 미국 [[포트 베닝]] 보병학교에 군사학 유학을 떠나는데, 여기서 배운 자유진영의 선진 군사학은 귀국 후, 전술 교관으로서 후배 장교들의 군사 지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한국군의 현대화에 있어 양적 팽창에 이어 질적 성장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후에 월남전에 대대장으로 참전하면서 전승 행진을 하는데 있어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국군 위관, 영관 장교들의 미국 군사 유학은 한국군의 현대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 전쟁 전후, 전쟁으로 인한 양적으로 급성장한 한국군은 1950년대 장교들의 미국 군사 유학으로, 질적 성장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영향도 있었지만, 미국의 선진 교육문화를 배워 온 일부 장교들의 엘리트심 발동으로 5.16이라는 쿠데타를 잉태하기도 하였다.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 [[사선을 넘어]]와 [[박정인]] 장군의 회고록 풍운의 별에서도 1950년대 한국군 장교들의 미국 군사 유학 도미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1965년 한국 정부는 미국의 요청과 월남의 파병 요청 형식으로 [[조문환]] 장군을 단장으로 하는 [[주월 한군군]] 군사원조단 비전투부대 [[비둘기부대]]가 파병되었고, 뒤이어 미국의 대 한국 군사원조 약조인 [[브라운 각서]] 체결과 야당의 반대 등 진통 끝에 전투병력의 파병이 이루어졌다. [* 야당과 여당의 일부 소장파 국회의원들은 월남 파병에 있어 한국군의 처우에 대해 많은 불만을 나타내었다. 특히나 집권 여당 공화당의 초대 당 의장을 지낸 [[정구영]]변호사는 "이 장관 엄밀히 따지면 호지명의 월맹은 민족주의 운동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왜 우리가 그들과 총칼을 맞대야 하는거요. 내가 보기엔 그간 프랑스는 자신의 식민지 정책의 일로 싸웠고, 지금 미국은 제국주의 위세를 떨치려 월남에서 군사적 시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도와주어야할 이유가 없지 않소. 물론 이 장관 말대로 우리는 가난하오. 월남전 파병으로 우리 경제를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소. 그러나 더러운 전쟁에다가 피를 뿌리며 돈을 벌기보다는 궁핍하지만 깨끗하게 사는것이 옳다는 생각이오."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의 회고록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328576|[[대통령을 그리며]]]]에서 발췌. [[http://gyuraeman.blog.me/110018127454|(대한 군사 원조의 약속인 브라운 각서)]]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를 포함한 경제적 원조와 월남이라는 특수 시장 개척에 한국 기업을 포함한다는 파병의 조건으로 협상하였다.]
         [[재구대대]][* 초대 대대장 [[박경석]] 중령에 이어 정치군인 [[노태우]], [[박희도]] 등이 줄줄이 이 자리에 앉앗다]는 강원도 홍천에서 월남 파병 군사 훈련을 받던 중 부하가 잘못 던진 수류탄을 온몸으로 막아 중대원을 살린 살신성인의 모습을 보여준 [[강재구]] 대위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대대이다. [[재구대대]]는 그 이름답게 월남전에서 용감무쌍하게 싸워 세계 만방에 자랑스러운 한국군의 용맹을 빛내었다. 그런 재구대대의 초대 대대장에 박경석 중령이 임명되었다.[[http://cafe.daum.net/pks6464/MnHf/114|재구대대를 포함한 월남에 파병된 한국군의 활약상은 파병부대를 지휘한 장군들의 각종 수기에 나와 있지만 박경석 장군의 재구대대장 시절의 회고부분은 월남전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한국군은 월남 파병에 있어 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독자적인 한국의 작전지휘권과 기타 수송분야의 한국업체의 참여를 미국에 정식 요청하였고, 협상 끝에 월남전에서 한국군의 자체적인 작전지휘권을 얻어냈다. 이에 탄생한 것이 바로 [[http://panzercho.egloos.com/2765059|중대기지전술]]이다. [[주월한국군]] 전투부대는 각 마을마다 중대별로 기지를 세워, 민간인과 월맹군.베트공의 민간 침투를 차단하는 이른바 물과 물고기를 분리한다는 전술을 통해 지역 민간인의 지지를 얻으면서, 전투부대가 작전을 수행하는데 있어 수월해졌다. 나중에 이 작전이 성공하자 대만과 기타 자유진영의 군사고문단이 배우고 가는 등 대단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월남전]]에 있어, 초대 [[주월 한군군]] 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의 회고에서도 "장교 이하 모든 장병이 누구하나 우리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다. 국가의 명령으로 갈수 밖에 없었다"[* "나를 지금 억르누고 있는것이 고엽제 문제와 고엽제를 앓고 있는 전우에요. 내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방문도 하고 격려도 하고 그러는데. 그 사람들은 월남에 간 것은 국가의 명령에 의해서 간 것이지, 나나 우리 장병들이 가고 싶어서 월남에 간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국가를 위해서 월남에 갔고, 실지 국가의 경제 발전에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다면, 그것이 없어더라도 국가의 명령에 의해서 갔다면 국가가 거기에 대한 보상을 해야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문화방송 1993년 정치드라마 [[제 3공화국]] 22회 월남파병 편에서 인터뷰 전문]을 하는 등 국가의 월남파병 장병들의 고엽제 문제와 국가 차원의 보상 문제가 남아있고, 일말의 강제적 파병의 성격을 띄었지만, 용병이다, 돈을 받고 군대를 보낸것이다,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에 동조한다는 일각의 생각은 매우 잘못되고 편협한 것이다. 분명 [[월남전]]은 우리 스스로 원해서 파병을 결정한 전쟁이 아니었지만, 당시 기성세대가 목숨 걸고 싸워주었기에 그에 상응한 군사원조와 경제적 원조 및 이익을 바탕으로 1970년대 공업화를 이루어 우리 아들, 딸들이 적어도 풍요롭게 사는데 있어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주지없는 사실이다.[* 2000년 일부 진보적인 학자라 자처하는 성공회대 교양학부 [[한홍구]] 교수 등이 월남전 파병 기간 동안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하자 [[채명신]] 장군, [[박경석]] 장군, [[지만원]] 예비역 대령 등 월남전 참전 원로들이 나서서 이에 반박하는 글과 함께 학살 주장에 무게를 잡는 학자들을 상대로 토론을 제안했다. 동년 한겨례 신문에서 이와 관련된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의 신문을 기고하자, [[채명신]] 장군, [[지만원]] 예비역 대령--[[5.18광주 민주화 운동]]을 북한군이 광주에 침투하여 일어난 내란이며, 5.18 희생자와 시민군들을 광수1, 2로 지칭하며 현재 북한의 고위층과 비슷하다며 개드립을 쳤던 그 지만원 박사가 맞다. 삼만원도 안되시는 그분--이 [[문화방송]] [[100분 토론]]에 나와 이 주장에 반박하며, 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등 학자들과 토론을 했다. 이와 동으로 월남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http://book.naver.com/search/search.nhn?query=%ED%95%98%EC%96%80%EC%A0%84%EC%9F%81|[[하얀전쟁]]]]의 원작자 [[안정효]] 작가는 월남전에 참전한 병사로써, 당시 한국군의 학살이 있었다며 자신의 소설에 실화를 밝혔는데, 적과 민간인의 구별과 식별이 어려웠던 현대전 특히 민간인 복장으로 게릴라전이 빈번했던 월남전에서 총기 오발 또는 오폭으로 민간인을 살해했을 가능성은 있다. 이것은 월남전에 대대장으로 참전했던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이나, [[유학성]], [[우종림]], [[전성각]] 장군들의 회고록에도 기술되어 있다. 일단 월남전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관련 논의는 충분한 시간과 자료 수집, 그에 근거한 증언이 더 필요하다. 성급히 주장해서는 안된다.][* 다만, 이러한 것들을 이유로 베트남 전쟁을 무조건 긍정하는 것도 금물이다. 원하지 않았더라도 우리나라가 타국의 전쟁에 정당한 명분 없이 개입한 것은 사실이며 민간인 학살 역시 아예 없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기 때문. 또한 [[라이따이한]] 문제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이 전쟁은 보다 더 신중한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월남에서 귀국 후, 1970년 8월 육군 제 [[1사단]] [[12연대]]의 연대장으로 부임하여 1사단 내 [[DMZ]]와 [[GOP]]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당시 휴전선 부근을 담당하던 미국 [[2보병사단]] 예하 [[4보병여단]]의 근무 지역을 인수 받았다. 이는 그동안 휴전선 지역을 관할하고 수비하던 미군의 임무를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계기와 선례가 되었다. [[http://cafe.daum.net/pks6464/MnHf/109|DMG내 미군 관할 지역을 인수받은 육군 1사단 12연대와 연대장 박경석 대령이 말하는 비화]]
         1972년 10월, 육군본부 인사운영감실 대령과장으로 있던 박경석 대령에게 당시 실세 중에 실세 육군 수경사령관 [[윤필용]] 사령관의 참모장 [[손영길]] 대령이 찾아왔다. 육사 12, 13기 출신의 신참 대령들의 연대장 가용 청탁 쪽지였는데, 박경석 대령은 이 쪽지의 명단의 인물들을 대차게 거절했다. 그에 대한 대가는 참혹했다. 한달 뒤, 박경석 대령은 거의 확실시 되던 준장 진급에서, 진급에 한참 밀리던 윤필용 사령관의 직속인 김성배 대령 준장 진급자 명단이 바뀌었다. 그후 2번이나 연거푸 준장 진급 누락끝에 진급이 된 박경석 준장의 첫 보직은 [[6사단]] [[부사단장]] 겸 [[DMZ]] 내에서 발견된 땅꿀 특수개척팀장이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092300209105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3-09-23&officeId=00020&pageNo=5&printNo=22296&publishType=00010|박경석 장군의 준장 진급 비화]][* 여기에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면 창군 및 초창기 한국군의 고질적인 병폐 중 하나였던 진급문제에 관해서다. 물론 후자에 기술하겠지만, 이 고질적인 진급문제가 [[5.16]]과 [[12.12]] 일어났던 원인이기도 했다. 창군과 한국전쟁으로 군은 양적 성장에 힘입어 장교들의 진급이 빠른편이었다. 소위 달고 몇개월 후에 대위, 소령 더구나 전쟁으로 인해 단숨에 영관급에서 장성으로 진급하는 일이 많았는데, 전쟁이 끝나자 이러한 초고속 진급은 멈춰졌으며, 특히나 [[군사영어학교]] 출신 70여명 대부분이 장성으로 진급했고,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 자리를 계속하여 번갈아 앉는 사태가 생겼다.--대표적인 인간들이 [[정일권]]과 [[백선엽]]이다. 이들은 대장 진급 후에 육군 참모총장과 합참의장 자리를 번갈아 2번씩 그 자리에 앉았다. 이러니 아래 후배 장교들의 불만과 원성이 쌓여갔으며, 특히나, [[육사 5기]]의 대령급과 [[육사 8기]]의 중령급에서 그 불만이 많았다.--특히나 이런 경향은 1970년대 이후 정규 육사 출신들과 단기 육사 및 비육사 출신간의 진급문제가 두드러졌다. 박경석 장군 같은 경우에도 1950넌에 소위 임관후 전쟁이 끝나자 대위로 있었는데. 1955년 갓 소위 임관한 정규 육사 11기생들이 1970년 후반 영관급 대 장성급으로 진급이 역전되었다. 이 같은 내용은 이등병에서 장군까지 지낸 [[최갑석]] 장군의 증언과 그의 회고록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 영천시 . . . . 26회 일치
         [include(틀:프로젝트 문서,프로젝트=나무위키 대경권 프로젝트)]
         ||<-2><bgcolor=#4C0B5F> {{{#FFFFFF '''시장'''}}} ||<bgcolor=#BDBDBD> [[최기문(1952)|최기문]] ([[자유한국당|{{{#000000 무소속}}}]])[br]초선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bgcolor=#C9151E>[[파일:자유한국당.png|width=60]] '''[[자유한국당|{{{#FFFFFF 자유한국당}}}]]''' {{{#FFFFFF 6석}}}||
         ||<|2><bgcolor=#4C0B5F> {{{#FFFFFF '''도의원'''}}} ||<bgcolor=#4C0B5F> {{{#FFFFFF '''1'''}}} ||<:><bgcolor=#BE342C>[[파일:자유한국당.png|width=60]] {{{#FFFFFF 이춘우}}}||
         ||<bgcolor=#4C0B5F> {{{#FFFFFF '''2'''}}} ||<:><bgcolor=#BE342C>[[파일:자유한국당.png|width=60]] {{{#FFFFFF 박영환}}}||
         ||<-2><bgcolor=#4C0B5F> {{{#FFFFFF '''국회의원'''}}} [br] [[영천시·청도군|{{{#FFFFFF {{{-1 (영천시·청도군)}}}}}}]] ||<bgcolor=#E3CEF6> [[이만희(정치인)|이만희]]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br]초선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
         2009년 9월부터 천연가스버스가 운행 중이나, 영천시 관내에 CNG충전소가 없어서 금호읍 인근에 있는 [[경산시]] 와촌면 용천리의 하양CNG충전소를 이용한다. 하지만 용천리CNG충전소는 영천 시내에서 10km 넘게 떨어져 있다.
         참고로 야구단은 연고지가 [[대구광역시]]인 [[삼성라이온즈]]를 대부분 응원하는 편이다.
         || '''정당''' ||<:><bgcolor=#1870B9>{{{#FFFFFF 더불어민주당}}}||<:><bgcolor=#C9151E>{{{#FFFFFF '''자유한국당'''}}}||<:><bgcolor=#046240>{{{#FFFFFF 국민의당}}}||<:><bgcolor=#00B1EB>바른정당||<:><bgcolor=#FFCC00>정의당||<:>격차||<:>투표율||
         || {{{#C9151E '''영천·청도'''[* 지역구 국회의원 : [[이만희(정치인)|이만희]]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초선)]}}} ||<:>16.77%||<:><bgcolor=#C9151E>{{{#FFFFFF 58.43%}}}||<:>12.94%||<:>7.44%||<:>3.27%||<:>{{{#808080 ▼41.66}}}||<:> 73.80 ||
         ||<:><tablealign=center><bgcolor=#1870B9><-6> {{{#FFFFFF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bgcolor=#C9151E><-5> {{{#FFFFFF '''새누리당→자유한국당'''}}} ||
         ||<|2> [[정동윤(정치인)|정동윤]]/재선[br][[민주정의당]] ||<|2> [[박헌기]]/초선[br][[민주자유당]] ||<|2> 박헌기/재선 [br] 신한국당 ||<|2> 박헌기/3선 [br] 한나라당 || --이덕모/초선--[* 05.2.19 의원직 상실(선거법 위반)] [br] --한나라당-- ||<|2> 정희수/재선 [br] 새누리당 ||<|2> 정희수/3선 [br] 새누리당 ||<|2> [[이만희(정치인)|이만희]]/초선 [br] 새누리당 ||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때 선거구 유권자 수 10만622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적은 선거구였다. 여담으로 제일 인구수가 많은 선거구였던 [[인천광역시]] [[서구(인천)|서구]]·[[강화군]]갑의 유권자 수는 34만7611명. 결국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인구부족으로 인해 [[청도군]]과 선거구가 통폐합되었다. 민자당 계열(한나라-새누리-자유한국)정당이 압도적인 지지율을 받고 있지만 의외로 역대 민선시장 대부분이 초선때는 무소속으로 당선된 특이한 이력이 있다. 제7회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최기문 시장이 무소속으로 당선되었고 3선 연임한 김영석 시장, 중간에 낙마한 정재균, 박진규 시장 또한 초선때는 정당 공천을 받지 않고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제1117공병단]], [[제50보병사단]] 122[[연대(군대)|연대]]와 [[육군3사관학교]] 등의 군사시설이 있어 대구의 위성도시이자 보조 군사도시의 기능을 한다.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 라인의 "최후저지선"에 포함되었던 지역으로 곳곳에 추모 동상이 있으며 [[6.25 전쟁]] 추모 행사를 매우 공들여서 하는 편이다.[* 이것은 [[칠곡군]]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칠곡군은 [[다부동 전투]] 때문에 영천보다 더 알려져 있는 편이다.] 영천을 잠시 내주고 나서 [[미군]]에서 [[서사모아]]에 '''신한국'''을 건설하고 후퇴하려고 했는데, 어느 국군 장군이 영천만 찾으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던 일화가 있다.
         이런 일이 있었어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밀리터리 소설가--를 가장한 국군 찬양 [[국뽕]] [[양판소]]-- 소설가인 [[김경진(소설가)|김경진]]의 처녀작 [[데프콘(소설)]] 한미 전쟁편에서는 '''대구로 가는 길목이라는 이유'''로 진짜 '''개박살이라는 말도 표현하기에 부족할 만큼 박살난다.'''--여기 주민들 지못미....-- 심지어 여기를 지키던 인민군 6군단 때문에 미군이 '''[[기화폭탄]]마저 쓴다(!!!).'''[* 당연히 국군도 여기 전역('전투지역'의 줄임말.)에 보복으로 기화탄을 포격으로 날려 버렸다. 보고에 의하면 ''''보복 기화탄 공격'''으로 생긴 '''화상 환자들 때문'''에 '''미군 병원선이 미어터질 지경' '''이라나 뭐라나... 근데 여기서 오류가 하나 있는데, '''기화탄을 무슨 소형 핵 취급한다(실제로도 '[[기화폭탄]]은 소형 핵폭탄이나 다름없다.'라고대놓고 표현할 지경이니...).''' '''기화폭탄 따위는 핵에 비교하면 폭발 규모나 후유증에서 비교가 안될정도로 넘사벽이다!!''' 다만 '''인류가 만든 화약무기 중'''에서 '''그나마 핵에 제일 근접'''해서 그렇지...] 물론 ''''경상북도의 중심지' '''이자 ''''서울로 가는 길목에 있는 (부산을 제외한)첫 번째 대도시'라는 이유'''로 '''통일한국군과 미군 쌍방이 정말 박 터지게 싸운 [[대구광역시]]'''가 입은 피해와는 '''비교도 안되지만(...).'''[* 물론 여기에는 ''''대구 비행장의 존재감'도 컸다.''' 아무래도 '''(경상남북도를 다 합쳤을 때) 제 1의 비행장'''이니...(''''대한민국에서의 제1 비행장'이라고 하면...''' 뭐 다 '''[[인천국제공항|알지]]?''')]
          * [[김진욱(야구)|김진욱]] : 현 [[kt wiz]] 프로야구 감독.
          * [[박헌기]] : 前 국회의원, 자유한국당 상임고문, 변호사
          * [[손재범]] : 전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 울릉군 . . . . 26회 일치
         [include(틀:프로젝트 문서,프로젝트=나무위키 대경권 프로젝트)]
         ||<bgcolor=#01A9DB> {{{#FFFFFF '''군수'''}}} ||<bgcolor=#CEECF5> [[김병수(1954)|김병수]]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br]초선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2><bgcolor=#01A9DB> {{{#FFFFFF '''군의회'''}}} ||<:><bgcolor=#C7242B>[[파일:libertykorealogo.jpg|width=20]] '''[[자유한국당|{{{#FFFFFF 자유한국당}}}]]''' {{{#FFFFFF 5석}}} ||
         ||<bgcolor=#01A9DB> {{{#FFFFFF '''도의원'''}}} ||<bgcolor=#CEECF5> 남진복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 ||
         ||<bgcolor=#01A9DB> {{{#FFFFFF '''국회의원'''}}} [br] [[포항시 남구·울릉군|{{{#FFFFFF {{{-1 (남구·'''울릉군''')}}}}}}]] ||<bgcolor=#CEECF5> [[박명재]]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br]재선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
         [[신라]] [[지증왕]] 때인 512년 [[이사부]] 장군이 '''입에서 연기나는 목각 [[사자]]상'''을 섬에 풀어 놓겠다는 [[야바위]]를 시전하여 울릉도에 있는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했다는 사실은 유명. 이후 신라에게 꾸준히 조공을 바쳤고, [[후삼국시대]]인 930년 완전히 한반도에 귀속되어 이 때부터 공고히 한국령으로 자리잡는다. 이후 1454년 강원도 울진현에 편입되어 1900년 울릉군이 설치되기 전까지 그대로 유지된다.
         역사적으로 줄곧 그래왔듯이 한국 본토에서 어떤 급변상황이 터지더라도 일단 멀찍이서 지켜볼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기도 하다. 다만 러시아나 일본과 시비가 붙는다면 가장 위험해지는 위치이다. 실제로 과거 일본이 독도뿐 아니라 울릉도도 자국땅으로 삼으려 하기도 했고...자세한 것은 [[울릉군/역사]]를 참조.
         그 외에도 세무서는 포항세무서가 2009년 울릉도에 세정 업무를 돕기 위해 포항세무서 울릉지서가 울릉군을 관장하며, 일반적인 세정 사무는 포항까지 나가야 하며, 관세 부문은 포항세관이 울릉도를 책임지고 있다. 또한 케이블TV는 [[현대HCN]] 경북방송이 울릉군도 관할하게 된다.
         || '''정당''' ||<:><bgcolor=#1870B9>{{{#FFFFFF 더불어민주당}}}||<:><bgcolor=#C9151E>{{{#FFFFFF '''자유한국당'''}}}||<:><bgcolor=#046240>{{{#FFFFFF 국민의당}}}||<:><bgcolor=#00B1EB>바른정당||<:><bgcolor=#FFCC00>정의당||<:>격차||<:>투표율||
         || {{{#C9151E '''포항 남구·울릉'''[* 지역구 국회의원 : [[박명재]]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재선)]}}} ||<:>21.88%||<:><bgcolor=#C9151E>{{{#FFFFFF 46.80%}}}||<:>16.20%||<:>9.12%||<:>5.44%||<:>{{{#696969 ▼24.92}}}||<:> 73.09 ||
         ||<:><tablealign=center><bgcolor=#1870B9><-6> {{{#FFFFFF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bgcolor=#C9151E><-5> {{{#FFFFFF '''새누리당→자유한국당'''}}} ||
         [[자유한국당]]의 텃밭[* 사실 강원도도 군인 인구가 많고, 높은 인구비중을 차지하는 노인들이 그들과 접하기 쉬운 환경특성상 ~~안보팔이가 잘 먹혀서~~ 준텃밭에 해당한다. 다만, 도지사나 교육감 등 도 단위 선거에서는 영서와 영동간 갈등, 강릉,춘천,원주의 자존심싸움 등으로 변수가 만들어진다.]인 [[경북]] 및 다수의 영남지역의 특성상 이 곳에서도 예외없이 자유한국당의 텃밭에 포함되어 있다. 경북 본토도 그렇지만 이 지역도 경북 지역에 속하는 영향 때문에 국회의원 출신정당이 대부분 [[자유한국당]] 소속이다. 선거구가 [[포항]] 남구와 묶여서 포항 남, 울릉 선거구에 속하기 때문에 포항 남구 지역과 함께 자유한국당의 밭으로 불리고 있다. ~~어차피 국회의원 선거 때 후보 유세도 못 한다~~
         ||<|2> [[이상득]]/초선[br][[민주정의당]] ||<|2> 이상득/재선[br][[민주자유당]] ||<|2> 이상득/3선 [br] 신한국당 ||<|2> 이상득/4선 [br] 한나라당 ||<|2> 이상득/5선 [br] 한나라당 ||<|2> 이상득/6선 [br] 한나라당 || --[[김형태(정치인)|김형태]]/초선--[* 13.7.25 의원직 상실(선거법 위반)] [br] --새누리당-- ||<|2> [[박명재]]/재선 [br] 새누리당 ||
         == 한국지리 관련 ==
         국정과목 [[한국지리]]에서는 유독 독특하게 취급하는 지역으로 몇가지 필수 암기사항이 있다.
         독도리에 [[http://news.hankyung.com/article/2009112042921?nv=o|2009년]]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88954.html|국회도서관 독도분관]]이 설치되었다. 시기상 [[지곤조기]]와 관련된 영향이 있지 않았나 하는 추정도 가능하다.
         항공편이 없다. 다만 군인이라면 군 비행장인 [[강릉공항]]에서 격주로 1대씩 다니는 공군 수송헬기를 이용할 수는 있고, 응급환자 발생시에는 [[포항공항]]에서 UH-60 헬기가 출동한다. 때문에 뭍에서 울릉도로 민간인이 이용할수 있는 이동수단은 사실상 배가 유일하다. 때문에 외국인들이 가장 찾아가기 힘든 [[대한민국]] 땅으로 현지에서 외국인을 보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2009년 울릉도를 방문한 관광객 272,555명 중 외국인은 838명으로, 전체 관광객의 0.3% 수준이다. 참고로 같은 해 [[제주특별자치도]]에는 6,523,938명의 관광객이 찾았고, 이중 9.7%인 634,354명이 외국인이었다. [[미군|지구방위군]] 경계구역의 극서북단 코너에 위치한 현실상 여객선 타면 발에 채이는 게 외국인[* 미 '''해병대''', '''제7함대''' 간부, '''정치안보''' 외신 기자들 등.]인 [[백령도|국토 반대편의 섬]]과 대조된다.
  • 권희동 . . . . 25회 일치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분류:경주시 출신 인물]] [[분류:1990년 출생]] [[분류:개신교 신자]] [[분류:타자]] [[분류:포수]] [[분류:외야수]] [[분류:우투우타]] [[분류:상무 피닉스 야구단/전역]]
         || [[최재원(야구선수)|최재원]](2014~2015) || → || '''권희동(2016)''' || → || [[최성영]](2017) ||
         || '''학력''' || 경주동천초 - 경주중 - [[경주고등학교 야구부|경주고]] - [[경남대학교|경남대]] ||
         || '''프로입단''' || [[한국프로야구/2013년/신인드래프트|2013년 신인드래프트 9라운드 전체 86번]]([[NC 다이노스|NC]])[* [[http://youtu.be/uvuodHYib-8|XTM 워너비 담벼락토크]]에서 출연했을 때, 4라운드까지 지명이 안되자 친구한테 '군대 말뚝 박을까?'하고 말했다고 한다.(...) [[임용수]]가 그때 심정이 암담했겠다고 위로하니 돌아온 대답이 ''''중계방송 끝나고 그냥 잤어요''''(...) 그런데 자는 도중에 전화로 9라운드 지명소식을 들었을 때 '''"아 진짜?"하고 다시 잤다고 한다'''(...) 인터뷰했던 임용수는 포복절도.] ||
         || '''군 복무''' || [[상무 피닉스 야구단]](2015~2016) ||
         == 프로 경력 ==
         팀 내에 똑딱이 좌타자는 많고 우타거포 스타일의 타자가 [[이호준]]을 제외하면 없었기 때문에 입단하고 나서 바로 팀의 전지훈련에 합류해서 훈련을 뛰게 되었다. 그리고 확실히 거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표팀과의 연습경기에서 9회말 동점 솔로 홈런을 기록하기도 하고, WBC 대만 대표팀과의 연습경기에서도 3점 홈런을 기록하는 등 확실히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타순도 어느새 5번까지 상승했다. 더불어 원래 김경문 감독은 1루수인 [[조영훈]], [[조평호]]를 번갈아 쓰기 위해 둘 중 한명은 좌익수로 출장시킬 생각도 있었지만 권희동이 활약하자 좌익수를 권희동으로 박았다.
         4월 13일 SK전에서 3점홈런을 날리며 자신의 프로 첫 홈런이자 팀의 홈경기 첫 홈런을 기록했다.
         8월 14일 [[한화 이글스]]전에서 3점 홈런을 쳐냈다. 시즌 10호 홈런. 같은 날 1회에 투런 홈런을 쳐낸 [[나성범]]과 함께 올 시즌 둘 뿐인 두자릿수 홈런을 달성한 신인 타자가 되었다. 특히 권희동의 경우, 2009년 [[안치홍]] 이후 4년만에 프로 입단 시즌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한 거라 더 의미가 컸다.
         9월 13일 [[한화 이글스]]전에서 프로 첫 만루홈런을 쳐냈다! 타율은 0.199로 더 떨어졌지만 홈런은 벌써 시즌 13개째. 타율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선수라는 것을 재입증해냈다.
         2014년 초반에는 백업으로 시작하게 되었으나 [[김종호(야구선수)|김종호]]의 어깨 부상과 부진으로 5월달부터 좌익수 주전으로 출장하였다. 김종호가 돌아온 뒤에는 좌투수 선발 시 주전 출장중.
         시즌 최종 성적은 101경기 출장 221타수 63안타 0.285 7홈런 36타점 39득점을 기록했다. 13 시즌에 비해 홈런 갯수는 줄었으나 이는 이종욱의 영입으로 주전에서 백업으로 밀려나 많이 출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오히려 13 시즌에 지적받았던 선구안이나 타격 면에서는 더욱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규 시즌 종료 후 [[상무 피닉스 야구단]]에 지원해 합격해 15시즌과 16시즌을 퓨쳐스리그에서 보내게 되었으며 팬들도 크게 성장하여 차기 NC 다이노스의 클린업 트리오를 맡아주길 바라는 상황. 그런데 2015년 2월 24일 NC 다이노스의 연습 경기에서 권희동이 등장했다. 어찌 된 상황인지는 이후 위키러의 [[수정바람]]
         시즌 초부터 [[김경문]] 감독이 리빌딩을 공언하면서 베테랑인 [[이종욱(야구선수)|이종욱]], [[김종호(야구선수)|김종호]]를 대신하여 주전 좌익수로 나섰다. 그 결과 팀 내 야수 중 가장 많은 141경기에 나서 타출장 .286/.371/.458 135안타 19홈런 86타점 wRC+ 111.3 sWAR 2.43을 기록하면서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수비는 코너 외야수로서는 좋은 편. [[경남대학교|경남대]] 시절 외야 수비 능력은 낮다고 평가받았었지만 프로에 와서는 집중력이 있고 실책이 적어 오히려 수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의 호수비가 아주 인상적이다. 코너 외야수뿐만 아니라 [[중견수]]로도 상당히 안정적인 수비를 보여주며, 정말 급할 때는 [[포수]]도 가능하다. 주력/송구 능력은 보통.
          * 경남대 야구부의 김용위 감독은 권희동이 대학 시절에 선수와 목회자의 길에서 방황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저 야구를 하기 싫은 마음에 둘러댄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 집안에서 [[http://www.ncdinos.com/ncboard/storyview?seq=2346&board_id=story|자랐다고 한다.]]
          * 대신 2014년부터 [[한화 이글스]] 상대로 강했는데 2014년에는 0.413의 타율과 0.739의 장타율을 기록했을 정도. 역시 풀타임으로 처음 뛴 2017년에는 타율이 떨어졌지만 5홈런 19타점으로 본인의 팀 상대 최다 홈런&타점을 한화 상대로 올렸다. 특히 [[청주종합운동장 야구장|청주 야구장]]에서는 5할대의 타율로 당시 NC가 한화와의 시리즈 스윕을 하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 2015 ||<-13> 군 복무([[상무 피닉스 야구단]]) ||
  • 김준영 (프로게이머) . . . . 25회 일치
         {{프로게이머 정보
         '''김준영'''(金俊永; [[1985년]] [[12월 5일]] ~ )은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로, 아이디는 '''GGPlay''' 또는 '''KT.MGW)Never'''이다.
         [[2004년]] 하반기 한빛 스타즈(현 [[웅진 스타즈]])에 입단하며 프로게이머 생활을 시작했다.
         [[2005년]] [[SKY 프로리그 2005]] 전기리그 공동 다승왕을 차지했다. ([[강민 (프로게이머)|강민]](당시 [[KTF 매직엔스]]), [[박지호]](당시 [[MBC게임 히어로|POS]]), [[박성준 (1986년)|박성준]](당시 [[MBC게임 히어로|POS]]), [[송병구]](당시 [[삼성전자 칸]]), [[오영종]](당시 [[화승 OZ|Plus]]와 공동 기록 보유)
         [[2005년]] [[10월 5일]]부터 [[2006년]] [[11월 25일]]까지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프로리그]] 저그 대 저그전 연승 타이 기록인 9연승을 달성했다. ([[이제동]](당시 [[화승 오즈]]), [[김윤환 (1989년)|김윤환]](당시 [[STX SouL]])과 공동 기록 보유)
         [[2008년]] [[10월 29일]], 친정팀이었던 웅진 스타즈로 다시 이적하였다. 그 이후 프로리그에서 자주 승리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2009년부터 다시 조금씩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손목 부상까지 생기며 거의 출전 기회를 상실하다시피 했다.
         [[2009년 8월]] 손목 터널 증후군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은퇴의 뜻을 밝혔으며, 팀의 프로리그 09~10 시즌 첫 경기가 열린 [[2009년]] [[10월 10일]] 용산 e스포츠 스타디움에서 은퇴식을 가졌다.<ref>{{뉴스 인용
         이후 김준영은 우승자 징크스에 시달리며 [[EVER 스타리그 2007]]에서 1승 2패로 16강 탈락하였고, 두 시즌의 공백과 이적 이후 진출한 [[EVER 스타리그 2008]]에서도 3패로 16강 탈락하였다. 그러나 다음 대회인 [[인크루트 스타리그 2008]]에서는 2승 1패로 16강 그룹을 통과했으며, 8강에서 이영호를 상대로 2:1로 승리하는 당시로서는 이변을 연출하면서 4강에 올랐다. 4강에선 신예 [[정명훈 (프로게이머)|정명훈]]([[SK 텔레콤 T1]])의 메카닉 전략에 무너지며 1:3으로 분패했고, 같이 결승 진출이 좌절된 [[도재욱]]([[SK 텔레콤 T1]])보다 대회 승률(인크루트 스타리그 16강부터 4강까지의 승률)이 낮아 4번시드를 획득하였다.
         시드보유자로 참여한 [[바투 스타리그]]에서는 1승 2패로 16강 탈락, 차기 대회 36강 시드를 부여받았으며, 다음 대회인 [[박카스 스타리그 2009]]에서는 36강 2차전에서 과거 팀동료였던 [[한상봉 (프로게이머)|한상봉]](당시 [[CJ 엔투스]], 현 [[SK 텔레콤 T1]])에게 2:0으로 패배하였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스타리그 참여가 되었고 이후 김준영은 은퇴를 선언하며 차기 예선에 참가하지 않았다.
         |대 프로토스
         * [[2005년]] SKY 프로리그 2005 전기리그 개인전 다승왕 (공동)
         * [[2009년]] 박카스 스타리그 2009 36강
         * 과거 리그를 선도하던 저그 플레이어들의 이름을 줄여 부르는 게임팬들의 전통에 맞춰, 2006~2007 시즌 저그를 이끌었던 마재윤, 김준영, [[이제동]] 세 선수를 일컬어 '마준동'이라 불렀다. 이전 세대에는 '조진락([[조용호 (프로게이머)|조용호]], [[홍진호]], [[박경락]])', '변태준([[변은종]], [[박태민 (프로게이머)|박태민]], [[박성준 (1986년)|박성준]])'이 저그 진영을 대표하는 플레이어였다.
         * 김준영은 학창 시절 문학 과목에서 전교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학업 성적도 우수한 모범생이었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고, 당장 돈을 벌 수 있었던 [[프로게이머]]의 길을 선택했다.
         * 김준영은 [[체리필터]]의 〈느껴봐〉 뮤직비디오에 노 개런티로 출연한 적이 있다. 평소 김준영의 열혈팬이었던 그룹 멤버의 추천으로 출연이 이뤄지게 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체리필터 연윤근, 프로게이머 김준영과 한판 승부 |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100&g_serial=285873|출판사=조이뉴스24|저자=|쪽=|날짜=2007-10-02|확인날짜=}}</ref>.
         * [http://www.cjentus.com/cjentus/player_detail.asp?selectCode=300128 김준영 CJ 엔투스 프로필]
         * [http://www.wjstars.com/member/gamer.asp?race=Z&idx=414 김준영 웅진 스타즈 프로필]
         * [http://www.e-sports.or.kr/teams/player1.kea?m_code=team_24&pGame=1&pCode=657 김준영 KeSPA 프로필]
         [[분류:198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e스포츠 선수]][[분류:스타리그 우승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분류:저그 선수]][[분류:웅진 스타즈의 선수]]
  • 손담비 . . . . 25회 일치
         소속사에 들어가서는 트레이닝을 받았고 2002년에는 MBC의 시트콤 《[[논스톱3]]》에 단역으로 출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 준표도 담비도 출발은 단역 아이돌 스타 무명 시절 살펴보니 |url = http://www.sportsseoul.com/news2/entertain/hotentertain/2009/0503/20090503101040100000000_6928737571.html |출판사 = 스포츠서울 |저자 = 나지연 |날짜 = 2009-05-03 |확인날짜 = 2009-09-02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91011100530/http://www.sportsseoul.com/news2/entertain/hotentertain/2009/0503/20090503101040100000000_6928737571.html# |보존날짜 = 2009-10-11 |깨진링크 = 예 }}</ref> 이처럼 원래 손담비는 가수보다 배우가 꿈이었으며 기획사에 들어간 계기도 사실은 배우가 되기 위해서였다.<ref name="news">{{뉴스 인용|제목=손담비 “원래 배우가 꿈, 연기 욕심 많다”(인터뷰③)|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04161748501002|출판사=뉴스엔|저자=유현진, 정유진|날짜=2009-04-17}}</ref> 2004년부터 가수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춤을 배우기 시작했고, 2005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크럼핑을 배웠다.<ref>{{뉴스 인용 |제목 ="내 이름은 손담비, '몸치'였던 나의 이야기 들어볼래?"|url =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DCD=A606&newsid=02086086583165328&OutLnkChk=Yl |출판사 =이데일리|저자 =박미애|날짜 = 2007-06-25|확인날짜 = 2009-09-02}}</ref> 크럼핑을 배울 당시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미국의 안무가 브라이언 프리드먼과 크럼핑 댄스의 창시자 릴C 등 유명인사들에게 배웠다.<ref>{{뉴스 인용|제목=미쓰에이 연습생 시절 보다 더 파워풀한 '손담비 연습생 시절' 영상|url=http://ens.vop.co.kr/A00000350063.html|출판사=ENS|저자=뉴스팀|날짜=2010-12-31|확인날짜=2010-12-31}}{{깨진 링크|url=http://ens.vop.co.kr/A00000350063.html }}</ref> 당시 릴C는 손담비에게 "너는 예쁘니까 그냥 연기나 해라"라고 할만큼 재능이 부족했지만, 오랜 연습끝에 춤을 잘 출 수 있게 되었다.<ref name="10아시아"/> 같은 해 2005년에는 CJ 뮤직이 글로벌 프로젝트로 에스블러쉬라는 그룹을 결성해 초창기 멤버로 발탁되었다.<ref name="머니투데이">{{뉴스 인용 |제목 =손담비, 빌보드 톱 랭크 에스-블러시 멤버였다 |url =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7050618490436796&type=1&outlink=1|출판사 =머니투데이|저자 =김원겸|날짜 = 2007-05-06 |확인날짜 = 2014-05-15}}</ref> 2007년 5월에는 [[가희]]와 함께 에스블러쉬 멤버로서 〈It's My Life〉를 발매했고, 미국 [[빌보드]] 핫 댄스 클럽 플레이 차트 2위까지 진입했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빌보드 톱 랭크 에스-블러시 멤버였다|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7050618490436796&type=1&outlink=1|출판사=머니투데이|저자=김원겸 기자|날짜=2007-05-06|확인날짜=}}</ref> 하지만 팀 내부 사정으로 솔로로 전향하게 되었다.<ref name="머니투데이"/>
         이후 [[플레디스 엔터테인먼트]]에서 한국 데뷔를 준비했는데, 데뷔 전 바람의 〈사랑하다〉, [[메이비 (가수)|메이비]]의 〈다소〉와 같은 뮤직비디오와 [[삼성전자]], [[SK 텔레콤]]과 같은 대기업 광고에 출연했다.<ref>{{뉴스 인용|제목=[담비가 온다1]MSN 재팬이 주목한 거물 신인|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300&g_serial=260493|출판사=조이뉴스24|날짜=2007-05-04|확인날짜=2014-05-15}}</ref><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데뷔전부터 잇달아 대기업 모델 '톱스타 예약'|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7050507444112344&type=1&outlink=1|출판사=머니투데이|저자=김원겸|날짜=2007-05-05|확인날짜=2014-05-15}}</ref> 또한 비보이 대회 'R16 코리아 스파클링 서울'에 출전했다.<ref name="seg1"/> 그리고 2007년 6월 14일, 손담비는 데뷔 싱글 〈[[Cry Eye]]〉를 발매했다. 〈Cry Eye〉는 손담비의 뛰어난 춤실력을 보여주는데는 충분했지만, 대중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Cry Eye〉의 안무 중 [[크럼핑]]이라는 장르를 안무로 삼아 이 때문에 '여자 비'라고 불렸다.<ref name="seg1">{{뉴스 인용| url = http://www.segye.com/Service5/ShellView.asp?TreeID=1052&PCode=0007&DataID=200707091012000004| 제목 = '여자비' 손담비, 댄스로 뜨고 가창력까지 장착| 날짜 = 2007-07-08| 저자 = 한준호 기자| 확인날짜 = 2007-08-07| 뉴스 = 세계일보|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70930152416/http://www.segye.com/Service5/ShellView.asp?TreeID=1052&PCode=0007&DataID=200707091012000004#| 보존날짜 = 2007-09-30| 깨진링크 = 예}}</ref> 또한 크럼핑은 고난이도 댄스로 꼽혀 아시아에서도 몇 안되는 춤꾼으로 인정받았다. 한국에서 3개월 동안 활동한 뒤, 미국으로 떠나 L.A 밀레니엄 스쿨에서 발레, 재즈, 크럼핑 댄스 등을 배우고 보컬 트레이닝을 받는 등 연습에 매진했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이효리 여름 컴백 환영. 내 인생 최대의 도전” |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805191720201002|출판사=뉴스엔|저자=이현우, 정유진|날짜=2008-05-20}}</ref>
         2009년 〈토요일밤에〉 공연중인 손담비.
         2008년 2월 29일 게임 [[프리스톤테일2]]의 주제가 "Change the World"를 불렀다.<ref>[http://music.naver.com/album/index.nhn?albumId=136656 네이버 뮤직 - Change The World (프리스톤테일 2) O.S.T] 《[[네이버]]》</ref> 같은 해 4월 29일 손담비는 첫 미니 앨범 ''[[Mini Album Vol.1]]''을 발매하며 컴백 했다. 앨범의 타이틀 곡 "Bad Boy"로, 전 에스블러쉬 멤버로 함께 활동했던 [[가희]]가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이 때 손담비는 주로 여성스러운 이미지로 활동했다. "Bad Boy"는 발표한지 2주만에 음원 사이트 1위를 차지했고, 지상파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할때마다 검색어 순위는 1위를 차지하는 등 관심을 모았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배드 보이', 29일 미니앨범 공개 후 '대박 조짐' |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100&g_serial=327079|출판사=조이뉴스24|저자=박재덕|날짜=2008년 4월 20일|확인날짜=2011-02-06}}</ref> 뮤직비디오가 공개된 후에는 조회수가 20만 건이 넘었고, 무대에서 입고나온 코르셋 스타일의 파격적인 의상도 많은 관심을 받아 홈페이지가 폭주하기까지 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손담비 코르셋패션 "열기"...홈페이지 또 "혼수상태" |url=http://www.hkn24.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63|출판사= 깜뉴스|저자=신명희 기자|날짜=2008년 5월 25일|확인날짜=}}</ref>
         5달 후인 2008년 9월 17일 두 번째 미니 앨범 ''[[Mini Album Vol.2]]''의 타이틀곡 〈미쳤어〉의 티저 영상을 온오프라인을 통해 공개하였는데, 티저 영상은 공개후 각종 동영상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하는 등 관심을 받으며 컴백을 알렸다.<ref>{{뉴스 인용|제목= 손담비 '미쳤어' 티저 영상에 팬들의 반응 뜨겁네~ |url=http://www.consumernews.co.kr/news/view.html?gid=main&bid=news&pid=111539|출판사= 소비자가 만드는 신문 연예|저자=스포츠연예팀|날짜=2008-09-19|확인날짜=}}</ref> 이어 18일에는 음반을 발매하였다. 타이틀곡인 〈미쳤어〉 열풍이 한국에 불었는데, 특히 처음 후렴구부분의 의자춤이 인기를 끌었다. 각종 연예인들은 의자춤 패러디를 했는데, 재일 먼저 배우 [[허이재]]가 패러디를 했고,<ref>{{뉴스 인용|제목= 허이재, 손담비 ‘미쳤어’ 의자춤 깜짝공개 눈길 확~|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810191843251001 |출판사= 뉴스엔 연예|저자=이현우|날짜=2008-10-20|확인날짜=}}</ref> 계속해서 김효진, 신봉선, 양정아, 현영, 노홍철 등이 예능에서 따라했으며, 《[[내 사랑 금지옥엽]]》의 유인영, 《[[수상한 삼형제]]》의 오지은 등 드라마에서도 패러디를 했다. 또한 일반인들도 UCC를 통해 많은 패러디 동영상을 올렸다. 너도나도 다 따라한탓에 급기야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미쳤어〉 금지령까지 내려졌다.<ref>{{뉴스 인용|제목= 방송가, 손담비 '미쳤어' 이제 그만! |url= 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100&g_serial=380986|출판사= 조이뉴스24 연예|저자=박재덕 기자|날짜=2008년 12월 22일}}</ref> 2008년 11월 17일에는 [[마이티 마우스 (음악 그룹)|마이티 마우스]]의 싱글 〈[[Family (Special Edition)|패밀리]]〉에 피처링으로 참여했다.<ref>{{뉴스 인용|제목=마이티마우스, 이번에는 손담비‥'패밀리'|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3&aid=0002372273|출판사=네이버|저자=유상우|날짜=2008-11-11|확인날짜=2012-05-20}}</ref> 가수 활동 이외에 MBC 예능 《[[우리 결혼했어요|우리결혼했어요]]》에 [[마르코 (배우)|마르코]]와 함께 가상 부부로 나와 [[MBC 방송연예대상]] 특별상/베스트커플상 수상했다.<ref name="2008MBC"/> 또한 각종 CF에서도 러브콜이 쇄도했는데, 1년만에 몸값이 3배가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손담비 몸값, 1년만에 3배 이상 높아져 '미쳤어' |url= http://www.maxmovie.com/movie_info/ent_news_view.asp?mi_id=MI0080966034|출판사= 조이뉴스24 연예|저자=|날짜=2008-11-12|확인날짜=}}</ref>
         EP 활동의 끝난 뒤인 2009년, 첫 정규 음반 ''[[Type-B]]''의 발매로 컴백을 준비했다. 음반 발매와 음원 공개에 앞서 총 3차에 걸친 티저를 선공개하였는데, 2009년 3월 19일 타이틀곡인 〈토요일밤에〉 1차 티저를 공개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토요일밤에’ 티저영상, 팬들 반응 뜨거워|url=http://www.maxmovie.com/movie_info/ent_news_view.asp?mi_id=MI0083262026|출판사=맥스뉴스|날짜=2009-03-19 |확인날짜=2010-12-29}}</ref> 이어 20일에는 롤러스케이트 장으로 꾸며진 곳에서 1980년대 디스코풍의 2차 티저를 공개하였는데, 마지막에 '토요일 밤에'라는 문구가 등장에 더욱 궁굼증을 자아냈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토요일밤에' 2차 티저 공개 이번엔 '롤러걸'|url=http://www.maxmovie.com/movie_info/ent_news_view.asp?mi_id=MI0083284482|출판사=맥스뉴스|날짜=2009-03-20 |확인날짜=2010-12-29}}</ref> 23일에는 백발의 손담비가 등장, 마지막 3차 티저를 공개하여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ref>{{뉴스 인용|제목='백발' 손담비, '토요일 밤에' 3차 티저 영상 공개 |url=http://www.maxmovie.com/movie_info/ent_news_view.asp?mi_id=MI0083340682|출판사=맥스뉴스|날짜=2009-03-23 |확인날짜=2010-12-29}}</ref> 다음날인 24일 타이틀곡 〈토요일밤에〉 음원이 공개된 후, 폭발적인 상승세로 바로 음원사이트 10위 권에 진입하며 또 다른 손담비 열풍을 예고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손담비 '토요일밤에' 컴백, 그녀의 '인기몰이' 이미 예견된 수순|url=http://www.maxmovie.com/movie_info/ent_news_view.asp?mi_id=MI0083410074|출판사=맥스뉴스|날짜=2009-03-26|확인날짜=2010-12-29}}</ref> 〈토요일밤에〉는 80년대 디스코 복고풍으로 후렴구부분의 '하늘 찌르기춤'으로 인기를 얻었다.<ref name="하늘찌르기춤">{{뉴스 인용|제목= 손담비, 의자춤 이어 하늘찌르기춤 신드롬 일으킨다 |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05032208311001|출판사=뉴스엔|저자=김형우 기자|날짜=2009-05-04}}</ref> 26일에는 첫 정규 음반 ''[[Type-B]]''가 발매되었다. 한편, 〈토요일 밤에〉가 발표된 뒤, 뜨거운 인기몰이를 하고있던 손담비는 2009년 4월 10일, [[KBS]] 《[[뮤직뱅크]]》에서 첫 1위를 하였고 《[[엠 카운트다운]]》,《[[인기가요]]》 등에서도 1위를 해 그 인기를 실감케하였다. 또한 CF계에서도 러브콜이 쇄도하여 광고 섭외순위가 0순위라는 말까지 떠돌았고,<ref>{{뉴스 인용|제목=이승기, 손담비…광고모델 섭외 0순위 드러내|url=http://www.obsnews.co.kr/EnterNews/316308|출판사=OBS 연예뉴스|저자=김광선 에디터|날짜=2009-10-23|확인날짜=}}{{깨진 링크|url=http://www.obsnews.co.kr/EnterNews/316308 }}</ref> 연말에는 MTN 2009 방송광고 페스티벌에서 여자 CF 모델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으며, 〈토요일밤에〉로 [[골든디스크]], [[서울가요대상]] 에서 수상을 하였다. 정규 앨범 활동이 끝나자 손담비는 [[2009년]] 7월부터 방영된 SBS 월화 드라마 《[[드림 (드라마)|드림]]》에서 박소연이라는 여자 주연으로 출연했지만, 상업적으로 큰 실패를 거두었고, 연기력 논란까지 일어났다. 하지만, [[SBS 연기대상]]에서 뉴 스타상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드림' 시청률 울상 손담비, 뉴스타상에 웃었다|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001011306221001|출판사=뉴스엔|저자=김소희 기자|날짜=2010-01-21 |확인날짜=}}</ref>
         한편, 손담비가 무대에서 특유의 표정을 지어 '업신담비'로 불리며 인터넷상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 손담비 업신 표정 화제 "니가?" … 본인도 쿨하게 인증|url=http://www.hkn24.com/news/articleView.html?idxno=57743|출판사=이슈프리즘 깜뉴스|저자=인터넷뉴스팀|날짜=2010-10-16|확인날짜=2010-12-22}}</ref> 2010년 10월부터는 MBC의 새 예능 프로그램 《여우의 집사》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저조한 시청률로 인해 방영된지 2개월만에 폐지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 = 여우의 집사 폐지…불과 2개월만, 잘나가던 뉴스후 폐지하더니|url = http://www.newsprime.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7604|출판사 = 프라임 경제|날짜 = 2010-12-17|확인날짜 = 2010-12-29|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40729055321/http://www.newsprime.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7604#|보존날짜 = 2014-07-29|깨진링크 = 예}}</ref> 한편 손담비는 대만에서 큰 인기를 얻었는데, 〈미쳤어〉와 《드림》의 인기로 '2010 [V] CHINESE TOP 연도 시상식 콘서트'에서 아시아 최고 아티스트상을 수상했다.<ref name="대만">{{뉴스 인용|제목=‘섹시 퀸’ 손담비, 대만진출 나선다|url=http://news.donga.com/3//20110117/33997010/1|출판사=donga.com|저자=김원겸 기자|날짜=2011-01-17|확인날짜=2011-01-17|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728204248/http://news.donga.com/3//20110117/33997010/1|보존날짜=2014-07-28|깨진링크=예}}</ref> EP 음반 ''The Queen''역시 대만에서 음반 차트 등 각종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ref name="대만"/> 한편, 2011년 1월에 제20회 서울가요대상에서 본상을 수상하며 3년연속 본상을 수상받았다.<ref name="20회 서가대">{{뉴스 인용|제목=손담비, '서울가요대상' 3년 연속 본상 수상|url=http://www.newsway.kr/news/articleView.html?idxno=101847|출판사=뉴스웨이|저자=최가람 기자|날짜=2011-01-21|확인날짜=2011-01-21}}</ref> 이어 아시아모델시상식에서도 BBF 인기가수상을 수상했다.<ref name="BBF">{{뉴스 인용|제목=권상우ㆍ소녀시대ㆍ옌청쉬, '아시아 스타상'|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4878908|출판사=네이버뉴스|저자=연합뉴스 임은진 기자|날짜=2011-01-21|확인날짜=2011-01-22}}</ref> 2011년 5월부터는 피겨스케이팅 예능 프로그램 《[[김연아의 키스 & 크라이]]》에 출연했고, TOP4에 진출했다.<ref>[http://wizard2.sbs.co.kr/w3/template/tpl_freetype.jsp?vVodId=V0000349432&vProgId=1000708&vMenuId=1014807 김연아의 키스앤크라이 출연진 및 MC 소개] 《[[SBS]]》. 2011-05-21 확인.</ref> 2011년 11월부터는 MBC의 드라마 《빛과 그림자》에서 가수 유채영 역으로 출연했고, 미디엄 템포 장르의 드라마 OST "Everything"을 불렀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빛과 그림자’ OST 참여 ‘호소력 짙은 목소리 뽐내’|url=http://artsnews.mk.co.kr/news/188777|출판사=아츠뉴스|저자=김세영|날짜=2012-01-04|확인날짜=2012-01-05}}</ref> 《빛과 그림자》는 동시간대 드라마 시청률 1위를 유지했고, 손담비는 연기력을 인정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발연기'한다던 손담비, 어느덧 '배우'가 됐다|url=http://news.sportsseoul.com/read/entertain/1047784.htm|출판사=[[스포츠서울]]|저자=오영경|날짜=2012-06-12|확인날짜=2012-06-18|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20616025258/http://news.sportsseoul.com/read/entertain/1047784.htm#|보존날짜=2012-06-16|깨진링크=예}}</ref> 2011년 12월 1일에는 [[애프터스쿨]]과 함께 해피 플레디스 2012 시리즈인 ''[[Happy Pledis 2012 'Love Letter']]''를 발매했고, 수익금 일부를 [[유니세프]]의 "아우인형" 프로젝트에 기부했다.<ref>[http://music.naver.com/album/index.nhn?albumId=304689 네이버 뮤직 - Happy Pledis 2012 `Love Letter`] 《네이버》. 2012-01-05 확인.</ref> 2012년 8월, 《빛과 그림자》가 종영되었고, 손담비는 가수로서 컴백을 준비했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런던올림픽과 한판|url=http://sports.donga.com/3/all/20120612/46956635/3|출판사=[[스포츠동아]]|저자=김원겸|날짜=2012-06-13|확인날짜=2012-06-18}}</ref>
         손담비는 가수와 배우로 활동하면서 많은 상을 받았다. [[서울가요대상]]에서는 2009년,<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서울가요대상 본상 수상 ‘미쳤어’ 열풍 과시|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02121717531002|출판사=뉴스엔|저자=지형준|날짜=2009-02-12|확인날짜=2014-05-15}}</ref> 2010년,<ref>{{뉴스 인용|제목=아이돌, 그들을 위한 잔치! 서울가요대상 이변은 없었다(종합)|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002032026191002|출판사=뉴스엔|저자=이언혁|날짜=2010-02-03|확인날짜=2014-05-15}}</ref> 2011년에 이은 3년 연속으로 본상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3년 연속 본상 수상… “내겐 너무 특별한 상”|url=http://sstv.hankyung.com/?c=news&m=v&nid=98214|출판사=뉴스엔|저자=양나래|날짜=2011-01-20|확인날짜=2014-05-15|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517130014/http://sstv.hankyung.com/?c=news&m=v&nid=98214#|보존날짜=2014-05-17|깨진링크=예}}</ref> 2009년에는 제24회 [[골든디스크상]]에서 디지털음원부문 본상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골든디스크 본상’ 손담비 “이렇게 큰 무대에서 큰 상을 받다니…”|url=http://bnt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4&c1=04&c2=04&c3=00&nkey=200912102051543&mode=sub_view|출판사=한경닷컴 bnt뉴스|저자=박영주|날짜=2009-12-10|확인날짜=2014-05-15}}</ref> 2009 [[SBS 연기대상]]에서는 《[[드림 (드라마)|드림]]》으로 뉴스타상을 받았으며,<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김범-이민정 등 12명, SBS 연기대상 뉴스타상|url=http://osen.mt.co.kr/article/G0912310257|출판사=OSEN|저자=봉준영|날짜=2009-12-31|확인날짜=2014-05-15}}</ref> 2012년에는 《빛과 그림자》로 [[MBC 연기대상]] 특별기획 우수상,<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MBC 연기대상 ‘우수상’ 수상, “숟가락 얹은 것 뿐”|url=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36379|출판사=뉴데일리|저자=신성아|날짜=2012-12-31|확인날짜=2014-05-15}}</ref>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 신인상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신인상 수상...인증샷 공개|url=http://osen.mt.co.kr/article/G1109511163|출판사=OSEN|저자=정유진|날짜=2012-12-06|확인날짜=2014-05-15}}</ref> 배우, 가수 이외에도 예능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를 통해 2008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특별상 베스트 브랜드상을 받았다.<ref name="2008MBC">{{웹 인용|url=http://www.imbc.com/broad/tv/ent/event/2008entertain/awards/|제목=2008 MBC 방송연예대상 수상자 목록|출판사=[[MBC]]|웹사이트=[[MBC 방송연예대상]]|확인날짜=2011-02-16}}</ref>
         2009년 데뷔한 [[NS윤지]]는 비슷한 장르와 외모때문에 제2의 손담비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NS윤지는 직접 "더 많이 노력해 무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나 연기력 등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고,<ref>{{뉴스 인용|제목=NS윤지 "제2의 손담비? 다양한 모습 보여드릴게요"(인터뷰)|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100&g_serial=495794|출판사=조이뉴스24|저자=박재덕|날짜=2010-06-02|확인날짜=2011-08-13}}</ref> 프로듀싱을 맡은 [[용감한 형제]]는 "프로듀서로서 제2의 손담비, 차세대 섹시디바로 만들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만든 가수이다"라고 했다.<ref>{{뉴스 인용|제목=용감한형제, ‘제2의 손담비’로 NS윤지 찜!|url=http://www.eto.co.kr/news/outview.asp?Code=20101020181020513&ts=163735|출판사=경제투데이|저자=심재걸|날짜=2010-10-20|확인날짜=2011-08-13|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808194946/http://www.eto.co.kr/news/outview.asp?Code=20101020181020513&ts=163735#|보존날짜=2014-08-08|깨진링크=예}}</ref> 같은 플레디스 소속이었던 [[헬로비너스]]는 "저희 롤 모델은 손담비 선배님이에요. 일본 등 해외 활동도 하고 계시고, 무대 위에서 카리스마와 퍼포먼스가 정말 멋지세요. 선배님들의 장점만을 모아 저희 것으로 만들고 싶어요"라며 롤모델로 꼽았다.<ref>{{뉴스 인용|제목=헬로비너스 “머리가 불에 타도 족발이 먼저!”…신개념 ‘털털 아이돌’ 등장|url=http://news.donga.com/3/all/20120615/47030992/2|출판사=[[동아닷컴]]|저자=박영욱, 오세훈|날짜=2012-06-15|확인날짜=2012-06-15}}</ref>
         | 예능 프로그램
         | 예능 프로그램
         | 예능 프로그램
         [[분류:손담비]][[분류:1983년 태어남]][[분류:밀양 손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키이스트 소속]][[분류:골든디스크 본상 수상 음악가]][[분류:하이원 서울가요대상 본상 수상 음악가]][[분류:SBS 인기가요 뮤티즌송 수상자]][[분류:KBS 뮤직뱅크 1위 수상자]][[분류:Mnet 엠카운트다운 1위 수상자]][[분류:2010년대 가수]][[분류:2000년대 가수]][[분류:2007년 데뷔]][[분류:한국어 가수]][[분류:포항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팝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댄스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뮤지컬 배우]][[분류:비디오 자키]][[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
  • 최채흥 . . . . 25회 일치
         || [[이지영(야구선수)|이지영]](2012~2018) || → ||<#c0c0c0> '''최채흥(2019~)''' || → || 현역 ||
         ||<:> '''학력''' || 경주 동천초 - 포항중[* 경주중에서 전학] - [[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대구상원고]] - [[한양대]] ||
         ||<:> '''프로 입단''' || [[KBO 리그/2018년/신인드래프트|2018년 1차지명 (삼성 라이온즈)]] ||
         상원고 시절 동기인에 가려져 투수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한양대 진학 후 본격적으로 투수로 전업하였고, 대학 야구 최고의 투수로 군림했다.
         암울했던 고교선수생활을 청산하고 대학야구 그리고 연령대대표팀의 에이스가 되다.
         [[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상원고]] 시절에는 동기에 밀려 주로 1루수로 출장했고 고등학교 3학년때 3할 4푼 5리의 타율을 기록한 적이 있다.[* [[http://www.hsbaseball.kr/player/daesang25]]] 그러나 1루수로는 특출난 성적을 내지 못하여 지명받지 못하고 한양대로 진학한다.[* 고교야구 팬이 아니라면 의아함을 느끼겠지만, 경기수가 적어 0.345의 타율도 높은 성적은 아니다. 그 해 [[http://www.hsbaseball.kr/record/batter_unity.htm|타율 40위이고]], 파워도 있는 편이 아니다.]
         한양대학교 진학 후, [[김한근]] 한양대 감독에게 투수가 아니면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고, 이에 김한근 감독은 너를 투수로만 생각하고 있다고 화답했다. 그러면서 투수로 전업하여 1학년 때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춘계리그]]에서 팀의 마무리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67.2이닝 동안 피홈런 없이 54삼진 6사구 16볼넷 평균자책점 0.93을 기록했다. 1학년이던 2014년부터 팀의 에이스로 자리를 잡아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에서는 팀을 17년만의 대통령기 우승으로 이끌며 우수투수상을 수상했고 바로 U-21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 국가대표로 승선했다. 투수 전업 첫 해에는 평균구속이 130km/h 중반대에 불과했지만, 빠른 성장세로 평균구속을 10km/h 가까이 끌어올리면서 탈삼진 능력도 늘어나 꾸준히 좋은 성적을 기록하고 2015년에는 27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로 뽑히면서 활약했다. 2016년에는 학점 관리한다고 8월 이후에는 경기에 나오지 않았음에도 [[대한민국 U-23 야구 국가대표팀]]에서 [[임지섭]]과 원투펀치로 많은 이닝을 소화하면서 혹사 논란까지 일었을 정도.
         이렇듯 엄청난 퍼포먼스로 뛰어난 커리어를 쌓으면서, 대졸 선수들의 연속된 실패로 대학 졸업반 선수들에 대한 팬들의 여론이 굉장히 부정적임에도 [[KBO 리그/2018년/신인드래프트|신인드래프트]]에 참가 예정인 투수 중에서는 [[휘문고등학교 야구부|휘문고]] [[안우진]]과 함께 전체 1번을 겨룰만한 선수로 거론되었다. 거기에 삼성이 이 해 1차지명 후보로 최채흥 외에 강력한 후보가 없었던 만큼, 지명 전부터 최채흥의 1차 지명은 기정 사실 수준의 평가를 받았고 2017년 6월 26일, 2018년 1차 지명에서 고향팀 삼성의 선택을 받았다.
         2017년 8월 20일 신베이 신창 야구장에서 열린 체코와의 타이페이 하계유니버시아드 A조 예선에서 7.1이닝 3실점의 퀄리티스타트와 탈삼진 9개를 기록했다. [[http://sport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569&aid=0000000033|해당기사]]
         === 프로 시절 ===
         10월 13일 대구에서 열린 넥센과의 시즌 최종전에서는 선발 [[아델만]]이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또 다시 3회 2사만에 강판되면서 분위기가 이번 시즌 넥센전의 전철을 밟는 것은 아닌가 우려했으나, 중간계투로 올라온 양창섭이 4회에는 [[김혜성(야구선수)|김혜성]]과 [[김재현(1993)|김재현]]을 연속 탈삼진까지 잡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7회에는 [[이정후]]에게 3루타를 허용했고, 후속타자인 [[임병욱]]을 상대로는 투수 땅볼을 유도했으나 비디오판독 결과 [[임병욱]]의 발이 조금 더 빠른 것으로 판정되어 내야안타로 바뀌면서 1타점을 내주고 말았다. 그래도 기록은 3⅔이닝 동안 3탈삼진 4피안타 1볼넷 1실점으로 충분히 잘 던져주면서 2018 시즌을 마무리했다.
         부상으로 빠진 [[양창섭]], 그리고 [[윤성환]]을 대신해 개막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했다. 그리고 3월 28일 [[사직야구장]]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 선발 등판해 5이닝 96투구수 (S:60, B:36) 4피안타 2사사구 8삼진 4실점 3자책을 기록하며 시즌 첫 경기에서 첫 승을 신고했다.
         4월 14일 역시 [[kt wiz]]를 상대로 홈경기에 출전, '''7이닝 104투구 (S:71,B:33) 6피안타 1피홈런 (1회 유한준 3점) 1볼넷 7삼진 3실점 3자책'''을 기록해 [[QS+]]를 기록했다. 타선이 간만에 터지며 3:14까지 점수를 벌렸으나 이후 올라온 [[이승현(야구선수)|이승현]], [[김대우(1988)|김대우]], 최충연을 상대로 [[kt 위즈]] 타선이 9점씩이나 뽑아내며 12:14까지 좁혀져 승을 날려 먹을 위기에 놓였었다. 역전 주자까지 내보낸 상황에서 [[장필준]]이 두 명을 삼진으로 잡으며 어찌어찌 2승에 성공. 이때 덕아웃을 비춘 카메라에 잡혔는데, 볼 카운트 하나하나에 고개를 푹 떨어뜨리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보여 많은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투수 전향 후 가장 도움이 된 선배 선수 이야기가 나오면 와 [[이용찬]]을 꼽는데, 2015년 27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 때 같이 대표팀에 뽑혔었다.
         프로 입단 초기까진 투구폼이 왼손 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거의 흡사했었다.
         오해들을 하는 것이, 최채흥을 단지 흙수저 출신의 깜짝 활약 선수로 많이 인식하고 있는데 이 부분이 틀린 것이 최채흥은 [[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고교]]시절 에게 밀린 것은 사실이나, [[한양대학교|대학]]야구의 에이스 투수였고 대학야구 3대명문중의 하나인 한양대를 나왔으며, 대표팀 역시 아시아선수권 우승,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 동메달, 23세 이하 세계선수권 3위 등을 이끌고 대표팀 역시 u-18,u-21,u-23 등 연령대 대표팀을 단계적으로 밟았을 뿐만 아니라 핵심투수로 활약하며 엘리트 코스는 차근차근 밟은 선수다. 오히려 대표팀 경력만 보면 또래인 95년생 동기들보다 화려하다.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분류:1995년 출생]] [[분류:투수]] [[분류:좌완 투수]] [[분류:경주시 출신 인물]]
  • 한상덕 . . . . 25회 일치
         | 소속 = [[한국방송 성우극회]] (프리랜서)
         *[[프로젝트 A]](KBS)
         * [[한국화장품]] (스피클 등)
         *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공익광고협의회]]
         * 한국전화번호부 (슈퍼페이지 등)
         * [[유한양행]] (유노,타가메트,그랑페롤,생위천,삐콤,폰탈,디프로겐타,리카바,어린이폰탈시럽,유코판,맥생,콘택600,원방우황청심원,알마겔,오랄비)
         * 한국얀센 (니조랄,후루버말,타이레놀 등)
         * [[화이자|한국화이자제약]] (마터나,센트륨 등)
         * [[한국GM|대우자동차]] (맵시나, 프린스 등)
         * [[한국야쿠르트]] (야쿠르트, 헬리코박터 프로젝트 윌)
         * [[한국닌텐도]] (와리오 랜드 쉐이킹)
         * [[알보젠코리아]](구,한국센트랄제약,근화제약) (로레이드, 알카셀처)
         * [[한국타이어]] (오로라 818, 스터트레스908)
         * [[글락소스미스클라인]]구,한스제약,한국글락소,노바티스 (오돌,까스파파,오트리빈,잔탁)
         * [[후지필름|한국후지필름]]
         * [[사노피|한국베링거인겔하임]]
         * [[바이엘코리아]]구,한국바이엘약품 (탈시드,바이엘아스피린어린이용,카네스텐)
         * [[CJ헬스케어]] (투벤시럽캅셀,화이투벤,식카린S,프로헤파룸골드)
         * 경농 (바로매,아프로밧사,트리달엠,키타진,사란,바스타,포룸만)
         * [[SBS 프로덕션]] 비디오
  • Europa Universalis 4/공략/유럽 . . . . 24회 일치
         그리고 독일계 문화권국가[* 그러니깐 신롬안에서 보헤미아,실레지아를 제외한 모든 국가들]들은 특정한 프로빈스들 [* 뮌헨, 프랑크푸르트, 아우구스부르크, 헤센, 브라운슈바이크, 함부르크, 록스톡, 베를린, 작센, 쾰른, 팔츠, 알자스혹은 쾨니히스베르그]에 코어가 박혀있으면 독일제국을 형성할 수 있다. [* 다만, 이경우엔 신롬에서 탈퇴된다. 주의.]
         ==== 프로이센 ====
         엄밀히 말해서 프로이센은 독일민족의 땅이 원래 아니었기에 신성로마제국 소속이 아니었지만, 영역이 제 1제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여기에 서술한다.[* 사실 본래 '독일 민족의 땅'으로 한정한다면 메클렌부르크나 포메른일대도 신성로마제국 영역이 아니긴 하다. 독일 동방원정과 관련되어 복속된 경우.]
         주문화권이 프러시아 문화권이거나, [* 시작지점에서 이걸 만족하는 국가는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 그리고 리가 정도다.] 아니면 자신의 국가가 브란덴부르크일경우에, 쾨니히스베르그를 가지고 있고, 국교가 개신교(protestant)나 개혁교회(reformed)일경우, 프로이센을 형성할 수 있다. [* 브란덴부르크는 어차피 국가이념이 프로이센이랑 같기 때문에 취향따라 그냥 브란덴부르크로 가도 상관없다 ~~대신에 프뽕을 못느낀다.~~]
         엄밀히 말하자면 튜튼기사단은 당시 신롬소속이 아니었지만, 프로이센을 형성할 수 있고 신롬내부영역(노이마르크)가 있으므로 여기 기재.
         폴란드-튜튼 전쟁에 참여할때 주의해야 할 점은 땅 점령을 폴란드가 아닌 브란덴부르크가 하는 방향으로 가야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안하면 폴란드가 프로이센 지방을 전부 먹어버려서 오히려 프로이센 성립도 못하고 프로이센지방을 다먹어버린 폴란드가 러시아와 보헤미아를 패면서 우주승천해버릴 수 있기 때문(...) 이후에는 오스트리아와 동맹해서 황제국의 땅내놔 시전을 봉인시킨뒤에, 포메른(포메라니아)를 쳐서 힌터포메른 일대를 빼앗은 뒤 메클렌부르크를 먹고 뤄벡에 공세를 취하자. '마레 노스트럼'DLC이후로 뤄벡이 근처 자유도시와 OPM[* one province major, 프로빈스 하나짜리 국가]국가들과 방어연합을 취하는 경우가 많아서 공격을 나가기전에 폴란드가 참전하는지는 꼭 확인하도록 하고, 싸우도록 하자. 1대1로는 어지간해선 못이기니(...)
         플레이어의 국가의 주문화권이 이탈리아 지방 문화권에 속해있을경우, 필요 프로빈스를 다먹었을때 이탈리아를 형성할 수 있다.[* 단, 교황령은 불가능. 실제 역사에서 이탈리아 독립운동가들이 교황을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독립을 추진한 적이 있었으나, 교황청은 세속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거부하여 무산되고 사보이 왕국을 중심으로 독립을 추진한 것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을듯.] 추천되는 국가는 사보이,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제노바, 나폴리 정도. 본래 나폴리나 교황령등의 비 신롬소속 이탈리아 국가들은 확장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1.12패치이후 그림자 왕국(shadow kingdom)이벤트로 1490년이 지나면 이탈리아지방 국가들은 신롬에서 탈퇴하니 조금 나아졌다.
         초반에 저지대 국가 셋(플랜더스, 홀란드, 브라번트)을 동군연합휘하에 두고 있다. 그리고 느베르를 속국으로 가지고 있으며, 브로타뉴랑 동맹이다. 이것때문에 전통에 외교관계+1이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그나마 시작지점 군주인 선량공 필리프의 능력치가 555로 [* 이게임에서 군주의 최대 능력치는 666이다. 일단 여기에 시작지점에서 가장 근접한 군주는 [[세종]]과 알바니아의 스칸데르베그 정도.] 좋다만 그다음 후계자인 샤를의 능력치가 204(...) 이것때문에 외교테크 올리기 꽤나 힘들다. 다만 그렇다고 못올리는 수준은 아니니 외교관계수에 주의하면서 적절한 동맹을 구하자. 일단 시작지점에서 좋은 동맹으로는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역사적 라이벌이기에 가끔 시작지점에서 라이벌로 찍지 않는 이상은 동맹하기 어렵지 않다.], 카스티야, 아라곤등이 있다. 그뒤 교황령이 제발 빨리 프로방스에 파문에 걸기를 기대하면서 기다리자. 아비뇽때문에 백프로 이둘은 사이가 좋지 않을것이고, 교황령은 프로방스에 파문을 걸것이다. [* 파문이 걸린 국가의 땅을 먹으면 AE가 50퍼센트 더 적게 늘어난다.] 교황령이 프로방스에 파문을 걸면 바로 프로방스에 그걸 명분으로 공세를 취해서 로레인에 속하는 지방[* 메프, 로트링겐, 바]를 모두 먹어두자.[* 시작지점에서 프로방스와 프랑스가 동맹상태일텐데, 어차피 프랑스 시작부터 프로방스에 왕위주장을 걸기때문에 동맹은 풀린다. 동맹 푼 틈타서 먹으면 됀다.]
         통칭 역설국. 제작사가 스웨덴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상당히 강력하다. 국가 이념도 전투쪽에 몰려있어서 스웨덴이 모스크바를 뜷고 러시아화가 되버리는 경우도 자주 있는편. 초반에 덴마크한테 동군연합되버린 상태로 시작하므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하게 독립하는게 가장 중요한데, 스웨덴이 아무리 북유럽 삼국중 가장 강력해도 덴마크+노르웨이를 1대1로 이기기 힘들다는게 문제다(...) 그러므로 덴마크가 라이벌로 지정한 국가에게 독립지원을 받는게 가장 중요하다. 추천조합은 잉글랜드+스코틀랜드, 혹은 잉글랜드+모스크바등. 폴란드의 지원을 받는것도 좋지만 마레 노스트럼(1.16)패치이후에 리투아니아 개발도 너프가 상당히 뼈아파서 그냥 폴란드가 들고 있는 프로이센지방을 뺏어서 발틱노드나 장악하는게 더낫다.
         후자의 경우가 조금 어려운데, 우선은 적절히 프랑스와 사이가 안좋으면서 잉글랜드의 부족한 육군을 보충해줄수 있는 나라가 필요하다. 아라곤, 오스트리아, 카스티야정도가 물망에 오르는데 문제는 얘들이 잉글랜드를 라이벌지정하는 경우가 있다는것(...) 스코틀랜드는 얼마 안가 프랑스와 동맹하면서 귀찮게 할 가능성이 높으니 초반에 공격해서 속국화 시키고, 이베리안 웨딩이 뜨길 기대하며(...) 프랑스가 오스트리아랑 동맹하기전에 미리 오스트리아와 동맹해서 막는것도 좋다. 프랑스보다 프로빈수 수가 많고, 병력이 더많을경우에 왕위주장 미션이 뜨는데, 이것만 성공시키면 그때부터 두려울게 없다. 오스트리아고 스페인이고 다 날려버리자.
         1.19 패치 이후에 '메인 할양'이벤트가 생겼다. 헨리 6세가 앙쥬의 샤를로트와 혼인하는 대신 메인을 프랑스에 할양하는 실제 역사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이벤트로, 이를 거절하면 프랑스에 잉글랜드가 '왕위주장'명분으로 공격하게 됀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건 프랑스가 방어측이기에 프랑스는 동맹들 다끌고 올 수 있지만 잉글랜드는 공격측이기에 못그런다는거(...) 1대1로도 못이기는걸 1대다로 싸우면 절대로 못이기니 얌전히 주거나 아니면 프로방스에 팔아버리거나(...)하자.
         프로빈스 3개[* 속국인 아테네 프로빈스까지 합치면 4개] 짜리 제국(...)국가. 이게임에서 초반 최강국인 오스만의 바로 옆에 붙어있다는것과, 그 오스만한테 상대도 안된다는게 가장 문제인 국가다(...) ~~시기상 당연하긴 한데...~~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건 어떻게든 쓸만한 동맹을 얻는것. 우선 오스만을 라이벌 지정하고 헝가리가 오스만을 라이벌지정하길 빌자(...) 폴란드가 리투개발도 너프이후로 약화된 이후 비잔티움이 살기위해선 헝가리와 헝가리의 초반 장군인 ~~갓노슈~~ 야노슈 후냐디에게 모든걸 맡기는 수밖에 없다(...) 다만 헝가리만으론 아무래도 무리가 있으므로 그외에 발칸 소국들이 필요한데, 세르비아나 왈라키아를 끌어들이는걸 추천한다. [* 다만 왈라키아는 가끔 헝가리를 적국으로 지정하는 경우가 있다. 뭔 깡인지는 불명(...)] 오스만과의 초반싸움에서는 어떻게든 그리스지방 코어를 얻어둬야 한다. 그외에 한개 땅정도는 추가로 얻어낼 수 있을텐데, 아나톨리아지방을 먹어서 이후 아나톨리아 탈환에 써먹든, 불가리아 코어가 있는곳을 먹어서 재정복 명분을 얻어내든, 어느쪽이든 크게 상관은 없다. 취향따라 뺏어라. 로마나 니코메디아, 알레포,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탈환 이벤트라던가 비잔티움 전용 이벤트가 상당히 많으므로 고생한 보람이 상당히 있는 국가. 참고로 로마제국 최대판도를 복원하면 로마제국 형성을 할 수 있는데, 이게 크킹 컨버터로 만드는 로마제국을 그냥 복사+붙여넣기 한거라(...) 정작 비잔티움관련 문화권은 전부 수용불가능 문화권이 되버린다는 가장 큰 문제점이 있다(...)~~그냥 비잔티움으로 하자. 애초에 비잔틴이 로마다.~~
         확장방향은 우선은 노보고로드 정복미션을 얻어내서 노보고로드를 치고, 그 이후에 폴-리투 동군연합이 뜨면 폴란드를 라이벌 지정후에 폴란드랑 사이가 안좋은 국가랑 동맹을 해둔뒤 폴란드를 치는것. [* 폴란드가 동군연합을 거절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경우엔 리투아니아를 패면 된다.] [* 다만 중간중간 틈틈히 골든 호드(킵차크 칸국)과 카잔등을 패면서 남진역시 해두어야 한다.] 이 경우엔 오스트리아랑 헝가리, 오스만정도가 물망에 오른다. 그이후 확장방향으론 스웨덴을 쳐서 북유럽쪽으로 확장하거나, 폴란드에게서 단치히등 프로이센지방을 뜯어내 발트해노드를 장악하는 방향, 그리고 오스만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뺏어 진짜 [[제3의 로마]]가 되는 방향(...)등이 있다.
  • 강구열 . . . . 24회 일치
         {{프로게이머 정보
         '''강구열'''([[1988년]] [[2월 23일]]~ )은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로, [[테란]] 유저이다. 아이디는 '''910[Ete]'''로, 이는 이름 중 구(9), 열(10)을 숫자로 풀어쓴 것이다.
         프로리그에서 팀플레이 전담 선수로 활약하였고, 2007년엔 [[곰TV MSL 시즌2]] 8강에 진출하며 화제를 낳았다. 당시 MSL 작가진에서 붙여준 '날카로운 빌드의 귀재(약칭 날빌귀)'란 수식은 그대로 그의 별명이 되었으며, 이후론 소위 '강라인'의 수장이라 불리고 있다.
         정작 이슈를 불러일으킨 이후엔 1년 가까이 부진한 모습으로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으나, 최근 [[BATOO 스타리그 08-09]] 오프라인 예선에서 [[변형태]](CJ 엔투스)를 꺾는 이변을 일으키며 36강 본선에 진출했으나 조기탈락했다. 여담으로, 그무렵에 [[신한은행 프로리그 09-10]]을 벼르고 있다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으나, 정작 그렇게는 못 됐다. 그 후, 프로리그와 개인리그에서 이렇다할 성적을 크게 내지 못한 채로 [[2009년]] [[9월 10일]] 소위 '날일' 에 날카롭게 은퇴를 선언했다.
         대한민국 공군 사병으로 복무한 그는 2009년 11월 23일 공군 현역으로 입대했고, 2011년 12월경 제대했다.
         현재는 역시 전직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 프로게이머인 [[안기효]]와 함께 [[나우콤]]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두 선수의 첫 인연은 곰TV [[MSL]] 시즌2 조지명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조지명식에선 [[김창희 (프로게이머)|김창희]](당시 [[온게임넷 스파키즈]] 현 영구제명)와 [[박성훈 (프로게이머)|박성훈]]([[삼성전자 칸]])의 신경전이 한창이었는데, 이는 서바이버 토너먼트에서 일어난 '버그 사건' 때문이었다. 시종일관 박성훈은 "벌레(버그)테란과 맞붙고 싶다" 등의 공격적인 멘트로 김창희를 자극하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같은 강구열의 행보를 그대로 답습한 선수가 이후에도 계속 나타났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CJ 엔투스의 [[주현준]], [[한상봉 (프로게이머)|한상봉]] 등이 '시드 확보→졸전→광속 탈락'의 전례를 밟은 것. 팬들은 이들을 한데묶어 '강라인'이라 칭하기 시작했고, 이는 커뮤니티 사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며 '대세'로 자리잡았다.
         * 강구열([[MBC게임 히어로]]) : 2009년 9월 은퇴. 강라인의 수장. [[곰TV MSL 시즌2]] 8강에 오르며 시드 획득. 8강에선 송병구에게 0-3으로 완패하며 탈락.차기 시즌 32강에서 손주흥과 김윤환에게 패하며 탈락. 또 차기 시즌 서바이버 토너먼트에서도 [[오영종]]과 [[한동훈 (프로게이머)|한동훈]]에게 연패하며 탈락.
         * [[주현준]]([[CJ 엔투스]]) : 2009년 6월 은퇴. [[곰TV MSL 시즌3]] 8강에 오르며 시드 획득. 8강에선 당시 신예였던 [[박성균]]([[위메이드 폭스]])에게 1-3에게 완패하며 탈락. 차기 시즌에 Face Off의 저주에 걸리면서 32강에서 신희승, 박찬수에게 패하며 탈락. [[아레나 MSL 2008]]에서도 손주흥에게 패한뒤 김윤환(STX)을 잡아냈으나 박성균에게 패하며 탈락. [[클럽데이 온라인 MSL 2008]]에서도 16강에서 허영무에게 패배하며 탈락. 차기 시즌 서바이버 토너먼트에서도 1승 2패로 탈락.
         * [[신희승]]([[이스트로]]) : 2010년 6월 영구제명. 신희승의 강라인 가입은 험난(?)했다. [[EVER 스타리그 2007]] 4강 2007에서 [[이제동]]([[르까프 오즈]])에게 0-3으로 완패, 3,4위전에서 김택용과의 졸전 끝에 2-3으로 패배했지만 시드가 없었다. 당시에는 스타 챌린지를 통과한 선수가 D조의 시드권을 잡았기 때문에 신희승은 시드를 잡지 못했다. (스타챌린지가 없어지면서 시드권은 박카스 이후 공동 3위에게 넘어감) [[곰TV MSL 시즌4]] 8강에서 마침내 시드를 딴 이후 [[허영무]](삼성전자 칸)에게 0-3으로 완패하는 '삼고초려' 끝에 강라인의 일원이 되었다. 항간엔 "신희승의 네임밸류는 기존의 강라인과 다르다"는 반론이 일어 논쟁에 휩싸였으나, 신희승 본인이 "나는 강라인이다"고 인정하면서 '공인' 강라인이 되었다. 팬들은 전략가 이미지가 강한 그에게 '와룡희승'이란 애칭을 붙였다. 이 후 [[EVER 스타리그 2008]] 1차 본선에선 [[안기효]], [[김민제 (프로게이머)|김민제]]에게, 아레나 MSL에서 고인규, [[박찬수]]에게 패배하면서 탈락했고, [[클럽데이 온라인 MSL 2008]]에서도 최종전에서 이제동에게 발목을 잡혔다. 이후 [[로스트사가 MSL 2009]]와 [[아발론 온라인 MSL 2009]]에서는 각각 16강에 진출하였다. 차기 시즌 서바이버 토너먼트에서는 1승 2패로 탈락하며 본선 진출에 실패했고, 또 차기 시즌 서바이버 토너먼트에서도 2패로 탈락했다.
         * [[손찬웅]] (현 [[화승 OZ]]) : 2011년 7월 은퇴. 손찬웅의 행보는 강라인이 되는 데 정말 완벽했다. 2007 스타챌린지 S2에서 손찬웅은 [[변길섭]]과의 최종전에서 변길섭을 꺾고 박카스 [[스타리그]]에 올라가 김동건, 박명수, 박영민에게 패하며 탈락했고, 그 다음 시즌 [[에버 스타리그 2008]] R1에서 [[이제동]]과 [[한동욱]]을 떨어트리는 충격적인 대진으로 2R에 진출했다. 그 후 R2에서 [[김택용]], [[박성균]], [[박영민 (1984년)|박영민]]과 같은 조가 되어 김택용과 박영민을 이기고 박영민과 8강에 진출하며 김택용과 박성균의 진출을 기대하였던 관계자에게 충격을 주었다. 또 8강에서는 강력했던 로얄로더 후보 [[허영무]]를 2:1로 역전시키며 4강에 진출하여 시드를 얻었다. 하지만 4강에서 [[프로토스]]전을 제일 잘 하기로 유명한 [[박성준 (1986년)|박성준]]에게 3:1로 패하는 무력한 모습을 보여주며 탈락하였으며, 끝내 [[인크루트 스타리그 2008]] 16강에서도 [[송병구]], [[염보성]], [[정명훈 (프로게이머)|정명훈]]에게 전패를 당하고 광속 탈락, 강라인의 일원이 되고 말았다. 인크루트 스타리그 3패 탈락의 영향으로 [[클럽데이 온라인 MSL 2008]]에서도 김택용, 박영민에게 2패를 당하고 광속 탈락, 이 후에도 서바이버 시즌 3에서도 [[박태민]]과 STX의 저그 신예 [[조일장]]에게 연패하며 탈락, 강라인의 일원임을 입증했다. 이후 [[박카스 스타리그 2009]]에서는 [[박태민]]과 [[서기수]]를 이기고 16강에 진출은 하나 [[문성진]], [[송병구]], [[정명훈 (프로게이머)|정명훈]]에게 무난한 3패로 광탈하며 강라인임을 다시 한번 입증한다. 차기 시즌에서는 36강에서 탈락하며 본선 진출 실패. 그 뒤로는 스타리그에도 MSL에도 복귀하질 못하였고, 계속 탈락만 하다가 2011년 7월 은퇴.
         * 그밖에 [[박카스 스타리그 2008]] 4강에서 완패한 [[박찬수]]([[KTF 매직엔스]], 현재 영구제명), [[네이트 MSL 2009]] 8강에서 셧아웃당한 [[김대엽]]([[KT 롤스터]]), [[빅파일 MSL 2010]] 8강에서 [[김택용]]에 1대3으로 패해 탈락한 [[염보성]]([[제8게임단]]) 역시 강라인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네임밸류가 높다는 이유로 인해 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박찬수는 [[로스트사가 MSL 2009]]에서 우승함) 최근 [[로스트사가 MSL 2009]]에서 박찬수에게 셧아웃당한 [[김명운]]([[웅진 스타즈]])등이 신규 멤버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8강에 진출하면서 광속 탈락을 피해가 가입 실패하고 말았다. 이중 1명은 영구제명, 1명은 사실상 은퇴. 또한 [[박카스 스타리그 2010]] 4강에서 [[송병구]]에 셧아웃당한 [[김현우 (프로게이머)|김현우]]([[STX 소울]])도 차기 [[진에어 스타리그 2011]] 8강에 진출해 강라인 가입에 실패했다. [[유병준 (1993년)|유병준]]([[삼성전자 칸]])도 [[ABC마트 MSL 2011]] 8강에서 [[이제동]]에게 3대1로다가 패하면서 다음 MSL에서 광탈하면 강라인이 될 뻔했으나, MSL이 없어지면서 유병준도 강라인 가입은 면했다. 유병준도 2012년 6월 은퇴. [[진에어 스타리그 2011]] 4강에서 [[허영무]]에 셧아웃당한 [[어윤수]]([[SK Telecom T1]])도 강라인이 될 뻔했으나 [[티빙 스타리그 2012]] 8강에 진출하면서 강라인 가입은 면했으며, [[김정우 (프로게이머)|김정우]]도 본래 강라인이었으나 [[대한항공 스타리그 2010 시즌1]]에서 우승하면서 탈퇴가 확정됐고, 영구제명된 [[박명수 (프로게이머)|박명수]]도 [[박카스 스타리그 2009]]에서 준우승하면서 탈퇴, 임의탈퇴한 [[한상봉 (프로게이머)|한상봉]]도 [[아발론 온라인 MSL 2009]]에서 준우승하면서 탈퇴, [[이영한]]도 8강에 3전전승으로 진출하면서 강라인에서 탈퇴하게 되었다.
         * [http://www.cyworld.com/believekky 프로게이머 강구열의 미니홈피]
         [[분류:198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e스포츠 선수]][[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분류:테란 선수]][[분류:MBC게임 히어로의 선수]]
  • 김구현 (프로게이머) . . . . 24회 일치
         {{프로게이머 정보
         | 종족 = [[프로토스]]
         '''김구현'''(金久鉉, [[1990년]] [[10월 18일]] ~ )은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2]] [[프로게이머]]이다. [[프라임 (E스포츠)|프라임]] 소속이었다. '''GooJila'''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며, 종족은 [[프로토스]]이다.
         2006년 상반기 드래프트에서 SouL(현 STX SouL)의 3차 지명으로 입단해 그 해 프로리그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다.
         현존하는 프로토스 유저들 중 전략적인 플레이를 가장 잘 구사하는 선수들 중 한 명이다. 2008년 최고의 활약을 펼쳤던 여섯 명의 프로토스 선수들을 가리키는 '육룡'의 일원이다 (김구현, [[송병구]], [[김택용]], [[도재욱]], [[허영무]], [[윤용태]]). 2009년 후반기에 저그의 강세로 인한 육룡의 총체적인 부진 때문에 그 의미가 퇴색된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MSL에서는 김구현, 도재욱 스타리그에서는 송병구 등이 활약하며 반전을 꾀하고 있다. 리쌍에게는 매우 약하나 택뱅을 상대로는 강한 면을 보이고 있다.
         [[신한은행 프로리그 10-11]] 4,5R에서 연패를 하며 부진에 빠져있다가 6R에서 김구현 자신만의 플레이로 [[차명환]]을 잡아내고 환상적인 셔틀리버 플레이로 상대전적에서 0:6으로 밀리는 [[김명운]]을 잡아내며 부진을 털어내는듯 했으나 그 후 연패는 계속되었고, 김구현은 6강 PO에서까지 부진을 털어내지 못하며 [[STX Soul]]의 준PO 진출은 다시 좌절되었다.
         2011년 9월 22일, 단 한 명만을 모집하는 2011년 8회차 공군 e스포츠병 전형의 최종 합격자로 선정됐다. [[SK플래닛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 시즌1]] 1R 중반부터 [[공군 ACE]]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SK플래닛 프로리그 12-13부턴 공군 에이스의 해체로 프로리그에 참가하지 않게 되면서 프로리그에 출전하지 못하게 됐다.
         |대 프로토스
         * 2009년 - 32전 16승 16패 (50.0%)
         * [[2006년]] 스카이 프로리그 2006 후기리그 신인왕
         * [[2009년]] 로스트사가 MSL 2009 32강
         * [[2009년]] 박카스 스타리그 2009 36강
         * [[2009년]] 곰TV TG삼보-인텔 클래식 2008 시즌3 16강
         * [[2009년]] 아발론 MSL 2009 16강
         * [[2010년]] 2010 대한민국 e-스포츠 대상 프로토스 최우수 선수상
         [[분류:199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e스포츠 선수]][[분류:스타크래프트 II 프로게이머]][[분류:SouL (e스포츠)의 선수]][[분류:공군 ACE의 선수]][[분류:프라임 (e스포츠)의 선수]][[분류:프로토스 선수]][[분류: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 이성민 (야구선수) . . . . 24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3년]]
         |드래프트 순위 = [[2013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3년]] 특별우선지명([[NC 다이노스]])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3년]] [[4월 2일]] <br /> [[마산종합운동장 야구장|마산]] 대 [[롯데 자이언츠|롯데]]전 구원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16년]]
         대구중학교, [[경북고등학교]]를 거쳐서 [[영남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영남대학교]]에 입학한 이후에 직구 스피드가 147 km/h에 이르고 변화구 제구도 수준급이어서 스카우트 사이에서 [[2013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13년 신인드래프트]] 이전 부터 대졸 최대어라는 평가를 받았다.[[2012년]] [[8월 20일]]에 열린 [[2013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13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윤형배 (1994년)|윤형배]]와 함께 특별 우선지명을 받아 [[NC 다이노스]]에 입단하였다.<ref>[http://news.hankooki.com/lpage/sports/201208/h20120820204711111960.htm "4할 승률 위하여" 발톱 드러낸 NC] - 한국일보</ref> [[2012년]] [[12월 5일]]에 열린 2012 [[야구인의 밤]]에서 우수 선수상을 수상하였다.<ref>[http://star.fnnews.com/news/index.html?no=149144 '야구인의 밤' 영남대 이성민, 우수 선수상 수상 ] - 스타N뉴스</ref> [[대한민국의 대학 야구 대회|대학리그]] 4년 동안 17승 15패, 252 1/3이닝, 222탈삼진, 89볼넷, [[평균자책점]] 2.00을 기록하였다.
         [[2013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13년]] 특별우선지명을 받아 [[NC 다이노스]]에 입단하며 즉시 전력감 [[투수]]로 주목받았으나, 기대와 달리 시즌 초에는 별로 좋지 않았다. [[2013년]] [[4월 2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개막전에서 선발 [[애덤 윌크|아담]]을 대신하여 7회에 구원 등판하였으나 [[박종윤 (1982년)|박종윤]]에게 2점 홈런을 허용해 구단 첫 패전 [[투수]]가 됐다.<ref>[http://sports.donga.com/3/all/20130402/54154104/1 ‘제 9구단’ NC, 1군 데뷔전에서 롯데에 영봉패] - 스포츠동아</ref> 이후 필승계투로 활동하였으나 기대에는 못 미치는 부진한 투구와 팔꿈치 통증까지 겹쳐 잠시 C팀(2군)에 내려가기도 했으며, 자신감을 되찾은 후 [[7월 14일]] 올스타 휴식기를 맞아 [[이재학 (야구 선수)|이재학]]을 대신해 1군에 등록된다.
         [[7월 27일]] [[KIA 타이거즈|KIA]]전에서 구원 등판해 1 2/3이닝 무실점 호투로 프로 데뷔 첫 승을 기록하였다. [[애덤 윌크|아담]]이 선발진에서 부진하고 부상과 팀 내 융화 문제까지 겹쳐 C팀 강등 후 [[트위터]]에 불만을 표시하자, [[김경문]] 감독은 [[애덤 윌크|아담]]을 대신해 그를 선발진에 넣었고 [[애덤 윌크|아담]]을 퇴출했다. [[2013년]] [[8월 31일]] [[KIA 타이거즈|KIA]]전에서 첫 선발승을 거두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17&article_id=0002370496 ‘1피안타’ NC 이성민, 선발 데뷔전에서 깜짝 승리] - 마이데일리</ref>
         * [[2012년]] 2012 [[야구인의 밤]] 우수선수상(대학)
  • 임기영 . . . . 24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2년]]
         |드래프트 순위 = [[2012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2년 2라운드]]([[한화 이글스]])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2년]] [[10월 1일]]<br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대전]] 대 [[SK 와이번스|SK]]전 구원
         * [[상무 야구단]] (2015년 ~ 2016년)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 = [[2017년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2017년]]
         {{메달 스포츠|남자 [[야구]]}}
         {{금메달|[[2018년 아시안 게임|2018년 자카르타-팔렘방]]|[[야구]]}}
         '''임기영'''(林起映<ref>한국야구위원회, 2012 가이드북</ref>, [[1993년]] [[4월 16일]] ~ )은 [[KBO 리그]] [[KIA 타이거즈]]의 [[투수]]이다.
         2012년에 입단하였다. 2014 시즌 후 [[송은범]]의 FA 보상 선수로 지명되어 [[KIA 타이거즈]]로 이적하였다. [[상무 야구단]] 제대 후 합류할 예정이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311&article_id=0000417696 KIA, FA 보상선수로 투수 임기영 지명] - 엑스포츠 뉴스</ref>
         ==[[상무 야구단]] 시절==
         {{2017년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 대한민국 선수 명단}}
         {{2018년 아시안 게임 야구 대한민국 선수 명단}}
         [[분류:199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한화 이글스 선수]][[분류:KIA 타이거즈 선수]][[분류:대구수창초등학교 동문]][[분류:경운중학교 (대구)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상무 야구단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야구 참가 선수]][[분류:2018년 아시안 게임 야구 참가 선수]]
  • 전태일 . . . . 24회 일치
         [[1963년]] [[3월]] 대구 청옥 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지만<ref>1971년 문교부 시책으로 중학교, 고등학교가 분리되기 전까지 한국의 학교들은 중고등학교가 함께 운영되었다.</ref>, 가정 사정으로 1학년 재학 중 그해 [[12월]] 자퇴하였다. 1963년 겨울 그의 아버지 전상수는 아들에게 자퇴를 강요하였다. 아버지는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전적으로 [[재봉]]일만 돌보라고 강요했다.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된 것에 좌절하여 한때 가출, 집을 뛰쳐나갔다가 3일만에 귀가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돈을 벌어야 공부도 할 수 있는 것이라며 그를 발길질로 차고 구타하여 강제로 학교를 그만두게 했다.
         그는 밤이 새도록 [[근로기준법]] 조문을 찾아 암기하며 현장에서 발생하는 노동자 불이익에 저항하였다. 그는 [[동대문구청]]을 찾아가 열악한 환경에 대해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근로기준법]]상의 감독권 행사를 요청하기 위해 시청 근로감독관실을 찾아갔지만, 근로감독관은 평화 시장의 참혹한 얘기에 관심 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노동청]]의 문을 두드렸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ref name="chungg">한국정치연구회 정치사분과, 《한국 현대사 이야기 주머니, 2권》 (녹두, 1993) 265페이지</ref> 가뜩이나 어려운 조건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던 전태일에게 그것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노동이나 근로 기준법조차 사업주들의 편이라는 현실은 그를 한동안 허탈 상태로 몰아 넣었다.<ref name="chungg"/> 그는 청계천 일대의 노동 실태를 직접 조사, 설문하여 이를 토대로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노동청]]에 냈으나 돌아온 답변은 경멸과 비웃음 뿐이었다. 처음에 약간 말투가 어눌했던 그는 부랑자로 몰리거나, [[노동청]] 공무원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의 노동자 권리 청원은 언론들도 외면했고, [[경향신문]] 등에만 간략하게 보도되었다.
         그는 매일 일기를 썼다. 한 일기에서 그는 [[북한]]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한국 전쟁]]은 [[북한]]이 먼저 도발해서 일으킨 전쟁이라고 기록해 두기도 했다.
         {{인용문2|존경하시는 대통령 각하 옥체 안녕하시옵니까? 저는 제품(의류) 계통에 종사하는 재단사입니다. 각하께선 저들의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혁명 후 오늘날까지 저들은 각하께서 이루신 모든 실제를 높이 존경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길이길이 존경할 겁니다. 삼선개헌에 관하여 저들이 알지 못하는 참으로 깊은 희생을 각하께선 마침내 행하심을 머리 숙여 은미 합니다. 끝까지 인내와 현명하신 용기는 또 한번 밝아오는 대한민국의 무거운 십자가를 국민들은 존경과 신뢰로 각하께 드릴 것입니다.<br><br>...(이하 중략)...<br><br>저의 좁은 생각 끝에 이런 사실을 고치기 위하여 보호기관인 노동청과 시청 내에 있는 근로감독관을 찾아가 구두로써 감독을 요구했습니다. 노동청에서 실태조사도 왔었습니다만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1개월에 첫 주와 삼 주 2일을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썬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 버립니다. 일반 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일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 여공들은 6년 전후의 경력자로써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한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 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br><br>응당 기준법에 의하여 기업주는 건강진단을 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을 기만합니다. 한 공장의 30여명 직공 중에서 겨우 2명이나 3명 정도를 평화시장주식회사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상의 진단을 마칩니다. X레이 촬영 시에는 필림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 지시나 대책이 없습니다. 1인당 3백 원의 진단료를 기업주가 부담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전부가 건강하기 때문입니까?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하루 속히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한 여공들을 보호하십시오. 최소한 당사들의 건강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정도로 만족할 순진한 동심들입니다.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 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 아픈 곳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br><br>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br>1일 10시간 - 12시간으로, 1개월 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br>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br>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이상 인상하십시오.<br><br>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ref>권태억, 《근현대 한국 탐사》 (역사비평사, 2007) 398~400페이지</ref>}}
         회사의 [[착취]]와 [[해고]]를 당하면서도 단결하여 투쟁할 생각을 못하던 [[노동자]]들이 [[죽음]]으로써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한 전태일 열사를 보면서 각성한 것이다. [[1970년]] [[11월 25일]] [[조선호텔]] 노동자 이상찬의 분신 기도, [[1971년]] 9월 한국회관(음식점) 노동자 김차호의 분신 기도, 8월 [[신진자동차]] 노조 조합원과 가족 1900여명의 [[파업]]투쟁, [[한진상사]] 파월 노동자 400여명의 [[대한항공]] 빌딩 옥상 방화 농성 등이 주요한 사건들이었다. [[1971년]]의 노동자의 단결투쟁은 1600여건에 이르렀는데, 이는 전년도 165건에 비해 10배가 넘는 규모였다.<ref>지명관, 《한국을 움직인 현대사 61장면》 98~ 101쪽, 다섯수레, 1996년; 한국정치연구회, 《한국정치사》 352~ 353쪽, 백산서당, 1990년; 역사학연구소, 《강좌 한국근현대사》 347쪽, 풀빛, 1995년</ref>
         [[11월 22일|22일]] [[새문안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예장통합]])대학생부 신도 40여명은 전태일의 죽음에 사회가 책임이 있고 자신들도 공모자라며 속죄를 위한 금식 기도회를 열었다. [[11월 23일|23일]]에는 [[기독교]]계에서 [[개신교]]와 [[천주교]]의 공동집전으로 추모 [[예배]]를 거행하였는데, 고(故) 장공 [[김재준]] [[목사]]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위해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게 아닙니다.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라고 하였다.<ref>《[[전태일 평전]]》/[[조영래]] 지음/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은 돌배게에서 출판되었으며,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개정하여 다시 출판하였다.)</ref>
         [[서울 성모병원]] 응급실에 후송되었으나, 그는 3~4시간 동안 방치되었다. 그는 치료다운 치료를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채 응급실 한 구석에 방치되었다.<ref>대구사학회 편, 《영남을 알면 한국사가 보인다》 (푸른역사, 2005) 430페이지</ref> 그는 병원 도착 직전까지 사망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전태일은 구급차로 인근 병원에 후송되었다가 다시 서울 성모병원으로 후송된 뒤에도 3~4시간 정도 방치되었다고 한다. 성모병원에서는 전태일을 응급실에 얼마간 두었다가 입원실로 옮겼는데, 이미 회생할 가망이 없다고 의사는 진단했다.<ref name="chock289"/> 의사는 전태일에게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3~4시간 가량 그를 진료하지 않았다.
         [[2002년]] [[11월 28일]] 그는 보상금 930만원을 받았다. 1970년 분신자살한 전태일(全泰壹)에 대한 보상금은 930만원에 불과한 반면 91년 분신자살한 노동운동가 [[윤용하]]는 2억 3천만원을 받게 돼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었다.<ref name="boboss">[http://www4.hankooki.com//nation/200211/h2002112817562214510.htm 전태일씨 보상금 930만원 지급] 한국일보 2002/11/28</ref> 위원회는 이에 대해 "[[국가배상법]]은 희생 당시 월급액을 기준으로 [[보상금]]을 정하도록 돼 있어 당시 월급이 2만원에 불과한 전태일씨와 90년대 들어 노동자의 월급이 급격히 오른 후의 대상자와 보상금이 수십 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ref name="boboss"/><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0128215 민주화 보상금 첫 지급…형평성 논란] 국민일보 2002.11.28</ref>
         그의 어머니 이소선(李少線) 등 민주화운동 관련자 유가족 8명이 [[12월 31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 보상금 지급을 현실화해 줄 것을 요구하며 재심을 청구했다.<ref name="hjaeshims">[http://www4.hankooki.com//nation/200212/h2002123116132714510.htm "민주화운동 보상금 현실화" 전태일씨 유족등 재심청구] 한국일보 2002/12/31</ref> 어머니 이소선은 "태일이가 보상금으로 930만원으로 받는데 비해 [[1991년]] 분신 자살한 [[윤용하]]씨는 2억 3천만원을 받는다"며 "이는 태일이의 보상금을 물가상승률을 고려하지 않고 당시 임금만을 단순 반영한 [[호프만식 계산법]]으로 산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ref name="hjaeshims"/> 재심청구를 주선한 전국민주민족유가족협의회(유가협)도 보상금심의위원회가 당시 전문 기술자였던 전씨를 [[단순일용직 근로자]]로 분류해 [[보상금]]을 지급한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ref name="hjaeshims"/>
         결국 [[2005년]] [[4월]] 1억 4천만원의 추가 보상금을 지급받았다. 정부는 4일 국무회의를 열어 이같은 보상이 가능하도록 규정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법률 일부 개정령'을 의결했다.<ref name="yubbo">[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society/200504/h2005040421021222100.htm&ver=v002 전태일 열사 1억 4천만원 추가보상] 한국일보 2005/04/04</ref> 이에 따라 전태일 열사의 유족들에게 1억 4천여만원이 추가로 보상되었다.<ref name="yubbo"/>
         성서학자 정승우에게 "전태일이 없었다면 한국 노동자들의 [[인권]]은 수십 년 뒤에나 존중받았을 것"<ref>《인류의 영원한 고전-신약성서》/정승우 지음/아이세움</ref> 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는 대한민국의 노동 인권과 [[민주주의]]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노동계에서는 전태일을 부를 때 흔히 '[[열사]]'나 '동지'<ref>동지 호칭은 아직 통용되는 건 아니지만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은 유언처럼 남긴 말에서 열사 호칭을 극구 사양하고, 언제나 함께하는 노동자라면서 '동지'로 불러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었다.:오도엽,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후마니타스, 287쪽. 예:“전태일'동지'가 그처럼 장렬하게 죽었고, 그에 뒤이어 우리 모두 엄청난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 무수한 투쟁을 전개했으며”-[[장기표]]의 글에서</ref> 호칭을 붙인다.
         한편 이후 노동운동과 반정부 운동의 상징이 되면서 대단히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인물인 것처럼 이미지가 만들어졌다<ref name="sangcahm">함규진, 《역사법정:한국사 인물논쟁》 (포럼, 2006) 330페이지</ref> 는 시각도 있다. 역사학자 함규진에 의하면 "노동운동과 반정부 운동의 상징이 되면서 대단히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인물인 것처럼 이미지가 만들어어졌지만, 그가 쓴 글은 아주 소박하고 온건하다. '대통령 전상서'의 내용을 보면 골자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악덕 기업주들을 단속해 달라는 것이다. 마지막은 이렇게 맺고 있다. '각하께서는 국부이십니다. 곧 저희들이 아버님이십니다. 소자 된 도리로서 아픈 곳을 알려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주십시오. 아픈 것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ref name="sangcahm"/>"라는 것이다. [[전태일 평전]]을 읽어보면, 전태일은 급진적이거나 생각이 편향된 사람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양심으로써 노동인권운동에 헌신했다고도 볼 수 있다. 전태일 평전에 전태일이 쓴 일기가 실려있는데, [[십계명]]으로써 하나님이 [[안식일]]을 정하셨으니 [[노동자]]들은 휴식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 [[한국의 진보정당]]
         * 조현민, 《역사를 다시 본다 : 한국 현대사가 말하는 아리랑 여덟 고개》(만민사, 1989)
         * 안승천, 《(전태일에서 민주노총까지)한국 노동자 운동, 투쟁의 기록》 (박종철출판사, 2002)
         *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 100년의 기록》(한국노동사회연구소, 2005)
         * 함규진, 《역사법정:한국사 인물논쟁》 (포럼, 2006)
         {{한국의 노동쟁의}}
  • 창원시 . . . . 24회 일치
         [include(틀:프로젝트 문서,프로젝트=나무위키 동남권 프로젝트)]
         ||<:><bgcolor=#C7242B> [[파일:libertykorealogo.jpg|width=20]] '''[[자유한국당|{{{#FFFFFF 자유한국당}}}]]''' {{{#FFFFFF 21석}}}||
         ||<:>[[자유한국당|{{{#!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C9151E; font-size: .8em"
         {{{#FFFFFF '''한국'''}}}}}}]] ⑧ 박옥순 ||
         ||<:>[[자유한국당|{{{#!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C9151E; font-size: .8em"
         {{{#FFFFFF '''한국'''}}}}}}]] ⑩ 박삼동 ||
         || [[창원시 의창구|의창]]: [[박완수]]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br]초선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
         || [[창원시 마산합포구|마산합포]]: [[이주영(1951)|이주영]]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br]5선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
         || [[창원시 마산회원구|마산회원]]: [[윤한홍]]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br]초선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
         || [[창원시 진해구|진해]]: [[김성찬(군인)|김성찬]]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br]재선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
         마산 지역에서는 시 명칭, 청사 소재지, 야구장 등 어느 하나도 얻지 못했다는 박탈감과 소외감이 고조되어 분리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마산합포구 국회의원이 국회에 마산 분리 법안을 발의한 바 있다. 하지만 국회에서는 제대로 논의가 진행되지 않고 다시 논의할 가망도 없어 사실상 무산된 상태.[[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3547176&ctg=1213|#]]
          * [[무학(기업)|무학소주]] : 진짜 [[마산야구장]]에서 보면 지역특산물 같아 보인다.(...) [[마산아재]] 문서를 참조. 구 마산시 시절에는 9경 5미라고 해서 나름 밀던 컨셉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일제시대 현재의 두월동 인근에 있었던 시미즈 양조장의 명맥을 계승한다.
         창원은 야자수가 자랄 수 있을 정도로 온난한 지역이다. 따뜻한 지역이기에 고구마가 한국에 제일 처음 도입 되었을 때도 기후가 맞는 곳을 찾아 현 진해구(옛이름 웅천)에서 실험재배했을 정도다. 그래서 아열대과일도 잘 자랄 수 있다.
         프로스포츠 구단으로는 야구의 [[NC 다이노스]], 농구의 [[창원 LG 세이커스]], 축구의 [[경남FC]]가 있다. 경남FC는 엄밀히 따지면 창원만의 연고 구단은 아니지만 주경기장으로 [[창원축구센터]]를 사용한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창원시/스포츠]] 항목 참조.
         창원기계공업단지에는 [[장갑차]] 등 무기를 직접 생산하는 [[현대로템]]을 필두로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방산업체들이 몰려있어 전시에는 가장 중요한 군수물자 생산기지가 되는 도시다. 이 때문에 전쟁 발발시 서울 다음 폭격 지역으로 지목받기도 한다. ~~그래서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전쟁나면 일단 창원을 뜨라고들 말한다~~ 만약 전시에 이곳이 단기간에 박살나게 되면, [[스타크래프트]]에서 본진 군수공장이나 관문을 장악당했을 때와 똑같은 상황을 현실에서 겪게 될 확률이 높다. 게다가 한국은 땅이 좁은 까닭에, 2차 대전 때 [[소련]]이 [[독일]]한테 진창 두들겨 맞아 막장이 된 상황에서도 생산 시설을 저 머나먼 [[우랄 산맥]]으로 옮겨, [[독일]]군이 진군해 오는 동안 그 새로 만든 생산 시설에서 화기를 뽑아서 막아내는 그런 무리한 일을 하는 게 불가능하므로, 그 방어가 상당히 중요할 수 밖에 없는 도시이다.
          * [[마산 야구장]]
  • 한용덕 . . . . 24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87년]]
         |첫 출장 = [[KBO (야구)|KBO]] / [[1988년]] [[7월 1일]]<br />[[숭의야구장|인천]] 대 [[태평양 돌핀스|태평양]]전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04년]]
         * [[한화 이글스]] 투수코치 (2006년, 2009년 ~ 2010년)
         [[대구광역시|대구]]에서 태어났으나 [[대전광역시|대전]]으로 이주하였다. 대전천동초등학교에서 처음 [[야구]]를 시작하여 충남중학교를 거쳐 [[북일고등학교]]에서 당시 감독이었던 [[김영덕 (야구인)|김영덕]]과 인연을 맺게 된다. [[북일고등학교]] 시절 포지션은 [[유격수]]로 [[북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아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학년 때 어려워진 가정 환경과 무릎 관절염으로 인해 [[야구]]를 포기하고 대학도 자퇴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9&aid=0000101109 사회인 선수 → 프로 무대‘연습생 신화’] 《대전일보》, 2007년 4월 23일 작성</ref>
         [[동아대학교]] 중퇴 이후 병역을 마쳤으나 [[야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선수로서의 꿈을 이어 가던 중 [[북일고등학교]] 시절 은사이자 당시 감독이었던 [[김영덕 (야구인)|김영덕]]의 주선으로 [[1987년]] 9월 [[빙그레 이글스]]에 [[신고선수]]로 입단하였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62553 무관의 투수왕 '한용덕'] 《오마이뉴스》, 2006년 9월 27일</ref> 선수들에게 배팅볼을 던져 주는 힘겨운 [[신고선수]] 시절을 보내고 2년 뒤에서야 비로소 정식 선수로 승격되었다.
         [[1990년]] 시즌을 앞둔 [[일본]] 전지 훈련지에서 [[일본]]인 인스트럭터의 도움으로 여러 가지 [[변화구]]를 익혔고, 그 해 13승을 거두면서 [[빙그레 이글스|빙그레]]의 주축 [[투수]]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로도 활약했다.
         ==야구선수 은퇴 후==
         [[2009년]] [[6월 22일]], [[한화 이글스]] 2군 [[투수]]코치에서 1군 [[투수]]코치로 이동하였다.<ref>[http://osen.freechal.com/news/view.asp?code=G0906220140 위기의 한화, 1-2군 코치진 대폭 교체 단행]《Osen》, 2009년 6월 22일 작성</ref> [[2012년]] 시즌 중 수석코치로 승격되었다.
         [[2014년]] [[12월 4일]] [[두산 베어스]]에 2군 총괄 코치로 영입되었다. [[2015년]] [[김태형 (야구인)|김태형]]이 감독으로 부임한 후 1군 투수코치로 승격하였다. 2018년부터 [[한화 이글스]]의 감독으로 활동한다.
         * [[2000년]] [[8월 23일]] : 개인 통산 100승 달성 (프로 통산 14번째)<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38&aid=0000019931& 프로야구 - 한용덕 100승. 구대성 150S] 《한국일보》, 2000년 8월 24일 작성</ref>
         [[분류:196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빙그레 이글스 선수]][[분류:한화 이글스 선수]][[분류:한국 프로 야구 100승 클럽]][[분류:대전천동초등학교 동문]][[분류:충남중학교 동문]][[분류:북일고등학교 동문]][[분류:청주 한씨]]
  • K리그 . . . . 23회 일치
         K리그(K league)는 한국 프로축구 리그를 가리킨다.
         역사적으로 K리그는 1983년 탄생한 [[수퍼리그]]를 전신으로 한다. 이 당시에는 아직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없었기 때문에 대한축구협회(이하 KFA)의 주도로 대회가 탄생하였으며 완전한 프로리그는 아니었다. 총 5개 팀이 참가하였고, 이 중에서 완전한 프로팀은 유공(現 제주 유나이티드), 할렐루야 두 팀 뿐이었고, 나머지 세 팀은 실업팀이었던 국민은행, 포항제철(現 포항 스틸러스), 대우(現 부산 아이파크). 물론 이 세미프로팀들도 당시에는 프로전환을 고려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실업팀(=세미프로)이 더 많았던 리그임은 사실이다. 또한 참가팀 자체가 적었기 때문에 승강제는 애초에 구성하기도 불가능했다.
         시작은 5개 팀이었지만 어쨌거나 참가팀 수는 꾸준히 증가하였으며, 1994년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조직되고나서부터 KFA가 운영하던 때보다 좀 더 세심하게 "프로"리그를 구성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상당한 잡음이 생기긴 했으나 본격적인 지역연고정착에 대한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월드컵 유치와 관련하여 축구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기 시작한다. 또한 대우 로얄스와 성남 일화, 포항 스틸러스, 수원 삼성이 ACL의 전신인 아시아 클럽 챔피언쉽(ACC)를 돌아가며 제패하는 등, 아시아 최상위 리그임을 증명하기 시작했다.
          * [[상주 상무 프로축구단]]
          * [[안산 무궁화 프로축구단]]
          * [[충주 험멜 프로축구단]]
         해당 축구단은 과거 수퍼리그를 포함하여 K리그에는 참가한 전적이 있는 구단들이다. 하지만 한국프로축구연맹의 기준에 따라 현존 구단으로 역사가 계승되지 아니한 구단들이다.
          * [[상무 축구단]][* 현재 상주 상무 프로축구단과는 연맹의 기준으론 "연속성이 없는" 관계다. 여기에 대해서는 별도 항목으로 소개]
         해당 구단들은 다소 역사상으로 논란이 컸던 축구단으로, 한국프로축구연맹의 규정상으론 현존 K리그 구단들이 역사를 계승하고 있으나, 팬들의 인식으로는 같은 구단으로 인식하지 않는 부분을 별도로 서술한다.
         이와 관련하여 당연히 기존 K리그 회원들의 반발이 거셌고, 특히 강등할 가능성이 높은 시민구단들이 가장 거셌는데 이에 대해 연맹이 내 놓은 해결책은 사실상의 세미프로인 군경팀을 일단 확정적으로 강등시키며, 군경팀을 제외한 최하위 팀을 추가로 강등하는 1+1 강등안을 발표한다. 때문에 군경팀인 상주 상무는 자동으로 강등되었으며, 추가로 상주를 제외한 팀들 중 최하위를 기록한 광주가 사상 첫 강등이라는 아픔을 겪게 된다.
          * [[http://www.kleague.com/KOR_2016/kleague/history.asp|한국프로축구연맹 연혁]]
  • 강기웅 . . . . 23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89년]]
         |드래프트 순위 = [[1987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1987년]] 1차 3순위 ([[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1989년]] [[4월 9일]] <br /> [[사직야구장|사직]] 대 [[롯데 자이언츠|롯데]]전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1996년]]
         * 한국화장품 (실업야구단)
         ===[[한국화장품]] 시절===
         2루수 부문 [[한국 프로 야구 골든 글러브 수상자 (2루수)|골든 글러브]]를 세 차례(1989, 1990, 1993) 차지했다. [[유격수]] [[류중일]] - 2루수 강기웅의 키스톤 콤비는 [[KBO 리그]] 역사상 가장 좋았던 콤비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거꾸로 쳐도 3할이라는 천재적 타격을 자랑했으나, 약한 체력이 단점이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66872 5연타석 홈런의 천재 2루수 강기웅] - 오마이뉴스</ref> 통산 타율 0.292로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실업야구한국화장품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었던 [[1988년]] [[10월 25일]]에 [[우리은행|상업은행]]과의 경기에서 세계 최초 5연타석 홈런을 기록한 적이 있다. [[1995년]] [[5월 13일]] 대전에서 [[한화 이글스]]와의 대구에서 1루수 [[이승엽]]과 충돌하여 입은 발목부상이 악화되어 내리막길을 걸었고, 부상 등의 이유로 [[백인천]] 감독과 불화를 일으켜 [[백인천]] 감독이 그를 [[1996년]] 시즌 후 외야수 이희성, 투수 최광훈을 상대로 [[현대 유니콘스]]에 트레이드했으나, 그는 삼성이 아닌 다른 팀에서는 뛸 이유가 없다고 의사를 밝혀 트레이드를 전격 거부하고 [[1997년]] 2월에 현역에서 물러났다.<ref>[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SH.php?url=baseball/201102/sp2011020917031657360.htm&cd=2101&ver=v002 명품 2루수 강기웅] - 한국일보</ref> 은퇴 후 유통업에 종사했다. 은퇴 때 그는 “심장에 푸른 피가 도는데 어떻게 유니콘스 옷을 입을 수 있었겠느냐”라는 말을 남겼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356 천재 강기웅의 인생 유전] - 박동희 칼럼</ref> [[2011년]] [[8월 10일]]에 타격코치로 선임되어 친정 팀에 돌아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5206016 삼성, 2군 타격코치로 강기웅 씨 영입] - 연합뉴스</ref>
         {{1983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대한민국 선수 명단}}
         {{1984년 하계 올림픽 야구 대한민국 선수 명단}}
         {{1988년 하계 올림픽 야구 대한민국 선수 명단}}
         [[분류:1984년 하계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분류:1988년 하계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분류:대구수창초등학교 동문]][[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분류:영남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 김명신 (야구선수) . . . . 23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7년]]
         |드래프트 순위 = [[2017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7년]] 2차 2라운드([[두산 베어스]])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7년]] [[4월 1일]]<br/>[[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 대 [[한화 이글스|한화]]전 구원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 2015년 타이중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 = [[2017년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2017년]]
         [[2017년]]에 입단하였다. 2차 1라운드에 지명된 [[박치국]]과 스프링캠프에 참가하였으며, 신인 투수가 캠프에 참가한 것은 5년 만이다. [[박치국]], [[함덕주]]와 5선발 경쟁을 하였으나, [[함덕주]]가 5선발로 낙점되었다. 그래서 불펜으로 나와 배짱투로 신인답지 않은 투구를 펼쳤다. [[4월 15일]]에 데뷔 첫 선발 등판을 하였다. [[4월 25일]] [[넥센 히어로즈|넥센]]전에서 [[김민성 (1988년)|김민성]]이 친 타구가 그의 안면을 강타하여 안면 광대뼈가 골절되면서 선발진에서 하차하였다.<ref>[http://www.enews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49187 두산베어스 김명신, 넥센히어로즈 김민성 타구에 '부상'… 야구팬 "빨리 완쾌되길"] -이뉴스투데이</ref>
         * 2016년 전국 대학 왕중왕 야구 대회 최우수 선수상
         * 2016년 전국 대학 야구 춘계 리그전 최우수 선수상
         * 2015년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 최우수 선수상
         * 2015년 전국 대학 야구 추계 리그전 수훈상
         * 2012년 [[고교야구]] 광역 리그(경상권) 우수 투수상
         {{2015년 하계 유니버시아드 야구 대한민국 선수 명단}}
         {{2015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대한민국 선수 명단}}
         {{2017년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 대한민국 선수 명단}}
         {{토막글|야구인}}
  • 김태우(god) . . . . 23회 일치
         한국의 [[가수]] 5인조 보이 그룹 [[god]]의 멤버 '''메인보컬'''을 말고 있으며 아이돌 메인보컬 출신들 중에서 최장신이자 가장 가창력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가수이자 탈아이돌을 넘어 한국 가수계에서도 인정받는 성공한 사람이자 가장 모범적인 첫 사례다.
         처음에는 '인기가수 [[박진영]]'이 심심풀이로 만든 그룹인 줄 알았던 god가[* 사실 그룹 멤버 자체를 구성한 건 싸이더스였고 박진영은 여기에 김태우를 추가하고 프로듀싱을 맡았던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 프로듀싱의 비중이 상당했던 지라...] [[SM엔터테인먼트]]가 기획한 신화와 맞짱을 뜨는 상황이 되면서, 메인보컬 김태우 역시 큰 인기를 얻게 되며 주로 '''어린이와 어르신들의''' 귀여움을 샀다. 물론 여성팬들의 인기는 [[손호영]], [[윤계상]], [[데니 안]]이 차지.그러나 god가 신인가수시절에는 박준형과 함께 인지도는 높은편이었다. 손호영 윤계상 데니안은 비슷비슷한 비주얼에 랩만하였지만 누가봐도 아재얼굴인 박준형과 덩치크고 뚱한 체형에 안경까지 쓴 튀는 비주얼로 인해 god내에서는 이 2명이 인지도가 높았다. god 내에서 호불호가 갈린 멤버. 외모도 별로인 데다 오버하는 성격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다만 인기 지분과는 다르게 김태우가 압도적으로 보컬을 책임졌기 때문에 사실상 중요 역할을 맡기도 했다. [[핑클]]의 [[옥주현]]을 떠올리면 될 듯.
         [[염천교 리턴즈]] 방송에서 짱세가 자신의 군생활 이야기를 하면서 밝힌 바로는 이기자 부대 수색대대 소속은 맞는데 보직은 전투병과가 아니라 PX병이었다고 한다. 그 뒤 [[리얼입대 프로젝트 진짜 사나이|진짜사나이]] 출연 당시 자신이 PX 병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며 2중대 1소대 유탄사수다라고 밝혔다.[[http://m.chosun.com/svc/article.html?sname=news&contid=2013090900184#Redyho|#]]
         2009년 2월 25일 제대 후 그 해 9월 3일 EP 'T-Virus'를 발매하고 활동을 시작했으며 타이틀곡은 '[[사랑비(김태우)|사랑비]]'. 곡도 세련된 멜로디와 김태우의 목소리와 창법에 잘 어울리는 곡으로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가요 프로그램에서 여러 번 1위를 차지했고, 또 앨범 전체적으로도 [[박진영]]의 느낌이 아닌 김태우 자신만의 음악 색깔을 찾은 앨범이라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190cm이 넘는 키로 곡과 잘 매치되지 않는 ~~군인 냄새 나는~~ 춤을 추는 바람에 '춤만 좀 빼달라'는 부탁을 많이 들었음에도 꿋꿋이 춤을 췄다. ~~god 때도 춤은 못 췄다~~[* 김태우는 춤을 못추지 않고 오히려 잘 추는 편이다. [[문희준]]도 [[20세기 미소년]] 방송분에서 김태우에게 "190 넘는 사람 중에 가장 춤을 잘 춘다"고 평가해준 바 있다.]
         실제로 2009년에 출연한 [[라디오 스타(황금어장)|라디오 스타]]에서도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가수가 스티비 원더며 세상에서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 가수는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다만 주위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세계 최고 보컬 TOP 10에 자신을 빼놓지 않는다고. 한 예능에서 직접 세상에서 열 손가락에 든다고 말한 적도 있다. [[해피투게더(KBS 2TV)|해피투게더]]에선 그마저도 철회. [[문희준]]과 [[은지원]]이 그 발언을 가지고 놀리자, 그때는 자기가 군대에서 나온지 얼마 안돼서 군대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라는 말을 했다.
         2011년 3월 29일 정규 2집 앨범 'T-School'을 발매했다. 타이틀곡은 '메아리'. 노래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2009년에 발매했던 '사랑비'보다는 뭔가 아쉽다는 평을 받고 있다. 안타깝게도 '사랑비'의 반응이 상당히 좋아서 기대치가 높았던 데다 이 시기 [[8eight|이현]], [[휘성]], [[케이윌]] 등의 남자 솔로 가수들이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던 탓에 조금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다만 저 세 가수의 경우는 정말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기 때문에 이들과 비교할 때 부족해 보일 뿐, 타이틀곡 자체는 음원 사이트에서 [[씨엔블루]]나 [[걸스데이]], [[포미닛]] 등 아이돌들 사이에서 상위권에 랭크되기도 하는 등 꽤나 선전했다. 또 앨범의 수록곡 'Brothers&me'는 [[박진영]]과 [[비(연예인)|비]]가 참여해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타이틀곡 '메아리'의 뮤직비디오에서 김태우의 1인 2역 연기를 볼 수 있다... ~~곰 두 마리가 한 집에 있어!~~
         === 프로듀싱 활동 ===
         == 활동 프로그램 ==
         그러다 보니 제대 당시에도 여기저기 예능 프로에서 러브콜을 보냈고, 얼굴도 여기저기 내밀었는데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KBS2 [[청춘불패 시즌1|청춘불패]]. 당시 잘 나가는 여자 아이돌 7명과 함께 프로그램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공동 MC가 [[노주현]], [[남희석]]이었던 터라 사실상 청일점이었는데, 금방 제대해서 군인 냄새가 풀풀 나는 거한에게 아이돌을 맡겼다는 것 자체가 너무 위험한 발상이라는 농담이 있었을 정도.
         프로그램 중에서 [[소녀시대]]의 [[유리(소녀시대)|유리]], [[한선화]]와 러브라인을 만들고, 아이돌들과 스킨십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져(예를 들어 1:7 씨름을 했다) 전국 수 많은 아이돌 팬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게 만들었다. 대놓고 사심 방송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청춘불패 출연으로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추진력을 얻은 건지]] SBS 2011년 설 특집 프로그램이었던 <스타맞선-유쾌한 스캔들>에서는 [[아이유]]와 러브라인을 만들었다...이와 같은 일 때문에 남자들에게 ''''해방 이래 [[연정훈]] 이후 제일 나쁜 놈''''이라며 지탄의 대상이 된다. 본인도 이 사실을 아는 듯, [[상상플러스]]에서 청춘불패 출연 이후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라는 말을 듣는다고 했다.[* 옛날옛적 god 시절 그 레드썬 교수의 전생 체험에서 밝혀졌던 전생이 '[[관우]]'. 다만 최근에 [[삼국지]]를 읽어서 최면이 잘못 들어갔다는 분위기이긴 했다.]
         === 음악 경연 프로그램 ===
         쥬비스는 2015년 9월 김태우와 1년 동안 체중 관리 프로그램 홍보 모델 계약을 맺고 출연료 1억 3000만원을 지급했다. 당시 113kg이었던 김태우는 85kg까지 감량 목표를 정하고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 결과 2016년 4월 목표 체중에 도달했고, 쥬비스는 여러 홍보 기사를 내고 마케팅을 진행했다.
         하지만 그는 목표 체중에 도달한 후 스케줄 등의 이유로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았고, 4달 만에 다시 체중이 95.4kg까지 불어났다. 계약 기간이 종료되더라도 감량된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 매주 한 번씩 요요 방지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한 번도 관리를 받지 않았던 것. 이에 쥬비스는 “계약 의무를 위반해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김태우의 체중이 다시 증가하면서 쥬비스의 체중 관리 프로그램 효과를 의심하며 환불 신청을 요청하거나 상담을 취소하는 사례가 발생했다”며 “체중 감량에 성공해 쥬비스가 얻은 광고 효과도 있는 만큼 광고 모델료의 50%를 지급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결했다.
         [[분류:god]][[분류:한국 남가수]][[분류:대한민국의 남성 방송인]][[분류:프로듀서]][[분류: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역대 출연자]][[분류:라디오 스타의 역대 게스트]][[분류:구미시 출신 인물]][[분류:1981년 출생]][[분류:아이돌 막내]][[분류:1대 100 역대 1인]][[분류:1999년 데뷔]][[분류:히든 싱어 역대 출연자]]
  • 이인 . . . . 23회 일치
         '''이인'''(李仁, [[1896년]] [[10월 26일]] ~ [[1979년]] [[4월 5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법률가, 정치인이다. 자(字)는 자옥(子玉), 호(號)는 애산(愛山). [[일본]] 유학 후, [[1923년]] 변호사시험에 합격, 변호사를 개업하고 이후 [[일제 강점기]] 당시 [[김병로]], [[허헌]]과 함께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 사회저명인사들을 상대로 무료변호를 하여 등과 함께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고, 해방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에 가담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정부수립 이후 국회의원과 법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49년]] 7월에 [[반민특위]] 위원장에 임명되어 반민특위를 와해, 해체시켰다.<ref>{{서적 인용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붕괴 이후에는 군사정권에 맞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야당 원로로서 범 야당통합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1960년]]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었다. [[1962년]] 유엔인권옹호한국연맹 이사에 임명되었고, 1972년 민족통일촉진회장 ·[[국토통일원]] 고문 등을 역임했다. 자(字)는 자옥(子玉), [[호 (이름)|아호]]는 애산(愛山)이며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慶州)이다. [[대구광역시]] 출신.
         [[1945년]] 광복이후 [[백관수]],[[김병로]]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던 [[안재홍]]과 협상을 적극적으로 벌으나, 건준위원장 [[여운형]]이 [[안재홍]]과 이인의 협상결과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1945년 9월 [[한국민주당]]이 창당되자 창당에 참여, 당무부장이 되었다가 10월 미군의 한반도 주둔 이후 [[미군정]] 특별범죄심사위원회 수석대법관(首席大法官) 겸 심사위원장이 되었다. 군정청 특별범죄심사회 수석대법관이 되면서 그는 [[한민당]]을 탈당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피신하여 납북 위기를 모면하였다.
         * 해방 후 [[한국민주당]] 총무 겸 당무부장
         * 1963년 [[8월 1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국민의 당 창당발기인대회를 가졌을 때 참석하였다.<ref name="이영1">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이영훈 지음 | 에디터 | 2006) 61페이지</ref> 이날 대회는 민정당 대표위원 김병로, 신정당 위원장 허정, 민우당 고문 이범석을 당 공동대표로, 김도연, 이응준, 이인, 안호상, 전진한을 당 지도위원에 선출했다.<ref name="이영1" />
         * [[한국민주당]]
         *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 한국국회인물사편찬회, 《역대국회의원총람》 (조세공론사, 1983)
         |[[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선거|제3대 총선]]||[[서울 영등포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서울 영등포구)]]||3대||[[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막대|자|3|5|7|5}} 35.75%||8,420표||1위||[[파일:국회의원당선.png|25px|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 당선]]
         |소속정당 = [[무소속]] →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
         |소속정당 =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 → [[무소속]]
         [[분류:1896년 태어남]][[분류:1979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반일 감정]][[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19세기 한국 사람]][[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제국의 유학자]][[분류:유교 신자]][[분류:일제 강점기의 대학 교수]][[분류:일제 강점기의 법조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조선어학회 사건]][[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관련자]][[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국민당 (1948년) 당원]][[분류:한국독립당]][[분류:신민당]][[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분류: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분류:이승만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분류:대한민국 제2공화국]][[분류:대한민국 제3공화국]][[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대한민국 제4공화국]][[분류:이승만| ]][[분류:메이지 대학 동문]][[분류:니혼 대학 동문]][[분류:경주 이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한받 . . . . 23회 일치
         2002년 10월에 대구의 집에서 첫 앨범 《2/9/Y/O/M/C/(29세의 자위대)》를 제작했다. 곧 대학 졸업 즈음 일어난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에 충격을 받아 대구를 탈출하려 했고, 졸업과 동시에 직장을 구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그리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기자재 조교로 취직하게 된 후 2003년부터 '아마츄어증폭기'라는 이름으로 [[홍대 (지명)|홍대 앞]]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영화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몇 번 응시하였으나 모두 탈락하였다. 2004년에는 독립레이블에서 2집 앨범 《극좌표》를 발매하였으나 곧이어 레이블은 도산하였다.
         이후에는 '레이디피쉬팝홀(Ladyfish Pop Hall)'이라는 공연장의 매니저로 활동하면서 홍대 앞 인디씬에 대하여 고민을 하기 시작하였다. 2006년에는 3집 《소년중앙》을 발매하고서 한국영화아카데미의 기자재 조교로 일하기도 했다. 2009년 중순에는 [[프랑스]] [[릴]]의 [[:fr:Le Fresnoy|프레누아 국립현대예술 스튜디오]]에 응시하여 포트폴리오까지 합격하였으나 면접에서 낙방하고 만다. 이 때에 비로소 영화 때문에 음악을 소외시키지 말고 음악에 매진하기로 결심하였다.<ref name="tam"/>
         2010년에는 수유시장 공공예술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상인들을 위한 노래들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 활동을 통해 '돈만 아는 저질'이라는 민중댄스음악을 시작하였다.
         이 노래는 2009년 강제철거 위기로 홍대 앞의 '작은 용산'으로 여겨졌던 동교동 칼국수 식당 두리반의 농성에 연대하는 자립음악회에서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한편 고등학교 시절 부터 이빨이 부서져서 2003년 무렵에는 앞니의 절반이 없는 상태로 공연을 하고 있었으나, 이후 아마츄어증폭기의 팬인 치과의사의 도움으로 [[이식물|임플란트 수술]]을 통해 이빨을 되찾았다.<ref name="tam"/> [[2008년]] [[한대수]] 헌정 음반《물 좀 주소》에 참여했으며<ref>{{뉴스 인용|제목=인디밴드들이 변주한 12색 '물 좀 주소'|url=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276350.html|출판사=한겨레|저자=이재성 기자|쪽=|날짜=2008-03-17}}</ref>, [[2009년]]에는 남성지 [[GQ]]의 '올해의 남자'로 선정되었다.<ref>[http://www.style.co.kr/magazine/view.asp?menu_id=01020204&c_idx=011005010000068 "2009 지큐가 선정한 올해의 남자 part. 1", 《GQ》2009년 12월호.]</ref>
         2013년 4월에는 [[클럽 빵]]에서 여러 팬들과 [[김일두]], [[쾅프로그램]], 위댄스 등의 게스트를 초청하여 데뷔 10주년을 기념하는 기획 공연 '한받십년의미'를 열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에는 한받과 [[회기동 단편선|단편선]] 등이 출연한, 2009년 당시 두리반 강제 철거 반대 농성과 자립음악생산조합 음악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파티51'(감독 정용택)이 개봉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칼국수집 두리반 지키기, 그들이 하면 저항도 경쾌|url=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062130|출판사=오마이스타|저자=강성국 기자|날짜=2014-12-12}}</ref><ref>{{뉴스 인용|제목=한받-단편선 '두 사람만으로 꽉 차는 존재감' - 영화 '파티51' 언론시사회|url=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417426740809270017|출판사=티브이데일리|저자=권영민 기자|날짜=2014-12-01}}</ref>
         [[2016년]] [[3월]]에는 일본의 [[펑크|펑크 밴드]] 래핑 노즈([[:ja:LAUGHIN' NOSE|LAUGHIN' NOSE]])의 챠미(Charmy, [[:ja:チャーミー|チャーミー]])가 "K-POP과 한류 드라마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고 진화하는 한국의 독립 음악"을 일본에 알리기 위해 기획한 컴필레이션 음반 《대한불법집회(大韓不法集会)》에 참여하였다.<ref>{{웹 인용|url=http://natalie.mu/music/news/178585|제목=「パンク以来の衝撃」LAUGHIN' NOSE・Charmyが韓国インディーのコンピCD発売|출판사=|날짜=2016-03-04|언어=ja|번역제목="펑크부터 충격" LAUGHIN 'NOSE · Charmy가 한국 인디 컴필레이션 CD 발매}}</ref>
         '아마츄어증폭기'(Amature Amplifier)는 [[2003년]]부터 [[2008년]]까지 활동하였다. '아마추어(amateur)'가 아닌 '아마츄어'라는 명칭은, '프로페셔널'의 반대 개념을 뜻할 뿐 아니라 일본 포르노 장르 중 '아마츄어(amature)'라는, 일반인을 섭외하여 제작하는 방식을 뜻하는 단어에서도 따왔다.<ref name="tam"/> 처음에는 [[2001년]] 대구에 있던 한받의 방 안에서 스스로 기타를 연주하면서 우연히 구성되었다. 클래식 기타를 단순한 주법으로 반복 스트로킹하는 진행을 주로 하고 있다. [[펑크 록]]에 영향을 받아 [[최소주의]]의 원칙에 따라 [[코드]]를 적게(보통 3~4개) 사용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이화여대]] 후문에 위치하고 있던 모던록 클럽 빵(현재는 홍대 앞 산울림소극장 근처에 위치)에서 오디션을 통과한 이후, 2003년 4월 20일 첫 공연을 시작으로 2008년 2월까지 약 350여회의 공연을 했다. 음악 웹진 [[weiv]]와의 인터뷰<ref>[http://www.weiv.co.kr/archives/16684 "아마츄어 증폭기 - 나는 성실한 음악을 하고 싶다", 《weiv》2007년 4월 8일.]</ref> 에서 밝힌 바 있듯이 [[강병철과 삼태기]], [[펫 샵 보이스]], 스트레인지러브, [[피쉬만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생활에서 포착된 감정을 가사로 승화시켜 노래하였다. 공연할 때에는 가발을 쓰고 형형색색의 공연의상을 입고 노래하였는데, 또 다른 인터뷰에서는 거리의 노숙자들의 패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였다. 멤버는 인간인 본인 '한받'이 노래하고 기타를 연주하며, '황보리타'라는 클래식 기타 본체가 또 다른 멤버라고 칭하고 다녔다.
         [[2002년]] 10월에 대구에서 홈레코딩 제작방식으로 첫앨범 《2/9/Y/O/M/C/(29세의 자위대)》를 제작하였다. 이 앨범에 수록된 '고무인형'의 음원이 인터넷을 통해 알려져 소수의 팬들이 생겨났다. 2003년 여름, 독립음반사 '핑퐁사운드(Ping Pong Sound)'와 계약하게 된다. [[2004년]] 2월에 핑퐁사운드를 통해 2집 음반 《극좌표》를 발매하였다. 그러나 핑퐁사운드는 곧 도산하였고 소속 음반사가 없게 되자 다시 홈레코딩 제작방식으로 세 번째 음반 《소년중앙》을 [[2006년]] 12월에 발매하였다. 아마츄어증폭기는 [[2008년]] 2월 17일 라이브클럽 "쌤(Ssam)"에서의 공연을 끝으로 한받의 결혼을 계기로 은퇴하였다. 그러나 2009년 8월 8일, 네 번째 음반 《수성랜드》를 발매하였다.
         '야마가따 트윅스터(Yamagata Tweakster)'는 무산층의 좌절된 일상을 짝수비트의 [[댄스 음악]]에 맞추어 춤추고 노래하는 한받의 또다른 1인 프로젝트 밴드이다.
         2005년 봄, 우이동에 거주하던 한받은 [[매킨토시]] 노트북으로 단순한 비트의 전자음악을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열린 어느 파티에 우연히 '야마가따 트윅스터'라는 이름으로 참가하면서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제대로 된 펑크음악을 하고 싶었던 한받은 2006년 여름부터 최윤성과 함께 백재중, 김남윤을 모아 '스트레칭 져니(Stretching Journey)'를 결성하였다. 거기에서는 [[베이스 기타]]를 맡았으며 2009년 4월에 앨범을 발매하였다. 그러나 2009년 이후 최윤성의 유학을 계기로 밴드는 활동이 잠정 중단되었다.<ref name="tam"/>
         그리고 결혼 이후 2009년 무렵 조용한 노래들의 포크 음악장르를 기반으로 한 1인 프로젝트 '눈의 피로(Nune-Piro)'로 잠시 활동하였다.
         * 발매일: [[2009년]] [[8월 8일]]
         * [[2009년]] [[5월 1일]]《45일간의 한정앨범》 (Customer Demand Compilation)
  • 김정혁 . . . . 22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2, top1=야구 관련 인물(KBO), top2=삼성 라이온즈/선수단)]
         || '''학력''' || 포항초 - 포철중 - [[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포철공고]] - [[동국대학교|동국대]] ||
         || '''프로입단''' || [[2011년]] [[육성선수|신고선수]] 입단 ([[삼성 라이온즈|삼성]]) ||
         || '''소속팀''' || [[상무 피닉스 야구단|상무]](2008 ~ 2010)[br][[삼성 라이온즈]] (2011~2017) ||
         전 [[삼성 라이온즈]] 소속의 내야수이자 현재는 [[삼성 라이온즈]]의 전력분석원. 주 포지션은 3루수.[* [[상무 피닉스 야구단|상무]] 복무 시절에는 1루수나 좌익수로 더 많이 나왔다. 이 때문에 같이 복무하던 [[모상기]]와 포지션이 겹쳤다.]
         [[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포철공고]]와 [[동국대학교|동국대]]를 졸업하고 [[상무 피닉스 야구단|상무]]에서 복무를 마친 후 [[삼성 라이온즈]]에 [[육성선수|신고선수]]로 입단했다.
         === 프로 입단 전까지 ===
         동국대 시절이나 [[상무 피닉스 야구단|상무]] 복무 시절에 그리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다. [[상무 피닉스 야구단|상무]] 복무 첫 해에는 51경기에 출장해 46안타 4홈런 25타점 24득점 타율 0.317을 기록했고, 두번째 해에는 78경기에 출장해 59안타 6홈런 27타점 28득점 타율 0.278을 기록했다.
         시즌 초반에는 3루수로 출장하다가 [[정현(야구선수)|정현]]의 3루 출장 비율이 늘면서 1루수로 출장했다. 8월 초반부터 결장하면서 2군 시즌을 마쳤지만, 0.302의 타율로 2011년 이후 3년 만에 3할대 타율을 기록했다. 10월 8일 [[조동찬]]이 허리 부상으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면서 정식선수로 재전환됨과 동시에 3년 만에 1군에 올라왔다.
         그리고 두 번째 출장 경기인 4월 28일 LG전에서는 [[임지섭]]을 상대로 안타를 기록했다. 만 서른살에 나온 프로 첫 안타. 이후로는 [[구자욱]]이 다시 주전 1루수로 복귀하면서 대타나 대수비로 나오다가 [[채태인]]과 [[김태완(1981)|김태완]]의 복귀가 다가온 5월 11일에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개막전 엔트리에 들지 못하면서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고, 4월 11일 1군에서 빠진 [[정인욱]]을 대신해 12일 1군에 등록됐다. 4월 22일 [[정인욱]]이 1군에 올라오자 1군에서 제외됐다. 5월 28일 [[김현우(야구선수)|김현우]], [[최선호(야구선수)|최선호]]와 함께 1군에 올라왔다.
         6월 4일 한화전에서 [[조동찬]] 대신 3루 대수비로 출장해 7회 말 [[송창식(야구선수)|송창식]]을 상대로 데뷔 첫 홈런을 쳤다.
         그러나 조동찬이 ~~유리몸답게~~ 2일 만에 부상으로 빠지며 다시 주전 자리를 차지했지만 [[아롬 발디리스]]와 [[구자욱]]이 차례대로 복귀하면서 백업으로 밀려났다. 7월 22일 선발로 내정된 [[아놀드 레온]]이 복귀하면서 대신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8월 19일 전날 얼굴에 공을 맞아 시즌 아웃된 [[최재원(야구선수)|최재원]]을 대신해 1군에 올라왔다. 9월 10일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고, 대신 [[이성규]]가 등록됐다. 10월 3일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조동찬]]을 대신해 1군에 올라왔다.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다가 4월 26일 [[나성용]], [[박근홍(야구선수)|박근홍]]과 함께 1군에 올라왔다.
         2군에 간 [[다린 러프]]를 대신해 1루수로 나와, 4월 27일 KIA전에서 5타수 4안타 2타점 2득점으로 팀은 패배했지만 입단 후 처음으로 1경기 4안타를 기록했다. 그러나 28일 SK전에서는 안타 없이 삼진만 2개를 당했고, 이후 [[조동찬]]이 1루수로 나오면서 백업으로 밀려났다. [[다린 러프]]의 복귀를 앞두고 5월 1일 [[박근홍(야구선수)|박근홍]]과 함께 1군에서 제외됐다. 5월 중순부터 6월 초까지 3주 가량 결장했다가 6월 4일 복귀했다.
         9일 대전 한화전에서 선발 6번타자로 출장해서 5타수 3안타 3타점 2득점을 기록하면서 맹활약을 펼쳤다. 이날 압권은 9회 초였는데, 1사 만루 상황에서 팀이 4-5로 한점 뒤진 가운데 [[정우람]]과 상대하게 된 김정혁은 정우람의 6구를 타격해서 좌중간쪽의 기적의 역전 2타점 적시타를 만들어내면서 팀의 승리를 이끈 히어로가 되었다. 그 날 수훈선수가 되었는데 본인 프로 데뷔 첫 수훈선수 인터뷰에서 '''정새미나 리포터가 한화 김정혁이라고 하는 엄청난 실수를 범했다.''' 하지만 김정혁 본인은 넘어갔다.
         시즌 후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됐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이유는 팔꿈치 부상이라고 한다. 그를 진료했던 의사는 야구는커녕 일상 생활을 어떻게 했냐고 할 만큼 팔꿈치 통증이 심했다고 한다. 재능이 부족하면 피나는 연습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보여준 안타까운 케이스.[* 현역 시절 코칭스태프가 쉬면서 하라고 말릴 정도로 훈련을 열심히 했었다고 한다.]
          * [[강민호]]와 [[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포철공고]] 때 친구로, 김정혁이 고교 시절 1년 유급하는 바람에 동기는 아니다. 고교 때의 유급으로 1살 어린 [[배영섭]]과 대학 동기가 되었다. 또한 김정혁도 [[배영섭]] 못지 않게 타격폼이 특이하다. 그래서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삼갤]]에서는 [[사무라이]]라고 불린다.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포항시 출신 인물]][[분류:1985년 출생]][[분류:타자]][[분류:내야수]][[분류:우투우타]]
  • 예천군 . . . . 22회 일치
         [include(틀:프로젝트 문서,프로젝트=나무위키 대경권 프로젝트)]
         ||<-2><bgcolor=#5EBFED> {{{#FFFFFF '''군수'''}}} ||<bgcolor=#FFFFFF> [[김학동]] ([[자유한국당|{{{#CA252B '''자유한국당'''}}}]])[br]초선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2><|2><bgcolor=#5EBFED> {{{#FFFFFF '''군의회'''}}} ||<:><bgcolor=#CA252B>'''[[자유한국당|{{{#FFFFFF 자유한국당}}}]]''' {{{#FFFFFF 7석}}}||
         ||<bgcolor=#5EBFED> {{{#FFFFFF '''1'''}}} ||<bgcolor=#FFFFFF> 도기욱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 ||
         ||<-2><bgcolor=#5EBFED> {{{#FFFFFF '''국회의원'''}}} [br] [[영주시·문경시·예천군|{{{#FFFFFF {{{-1 (영주시·문경시·예천군)}}}}}}]] ||<bgcolor=#FFFFFF> [[최교일]]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br]초선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
         예천(醴泉)의 이름을 풀어보면 '''단술 례'''와 '''샘 천'''이다. [[정유재란]] 때 참전한 [[명나라]]의 장수 [[양호]]가 지나가다가 마신 샘물이 너무 달고 맛나 중국 예천(醴泉)과 같아 이름이 붙여졌다는 지명유래설화가 있는데 이설로는 '크고 넓은 땅'을 의미하는 고대 한국어인 '단슬얼'로 불렸던 이곳의 지명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정착된 지명이라고도 한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2&dirId=121117&docId=147391514&qb=7JiI7LKcIOyngOuqhSDsnKDrnpg=&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SGmGBlpySEZssb4QN7wsssssstl-014086&sid=A4deAbPXJdB8Y7c9w/egHw%3D%3D|관련 링크]] 간혹 醴'川(내 천)'이나 '禮(예도 례)'川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주의하자.
         || '''정당''' ||<:><bgcolor=#1870B9>{{{#FFFFFF 더불어민주당}}}||<:><bgcolor=#C9151E>{{{#FFFFFF '''자유한국당'''}}}||<:><bgcolor=#046240>{{{#FFFFFF 국민의당}}}||<:><bgcolor=#00B1EB>바른정당||<:><bgcolor=#FFCC00>정의당||<:>격차||<:>투표율||
         || {{{#C9151E '''영주·문경[br]·예천'''[* 지역구 국회의원 : [[최교일]]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초선)]}}} ||<:>17.61%||<:><bgcolor=#C9151E>{{{#FFFFFF 56.82%}}}||<:>14.05%||<:>6.98%||<:>3.59%||<:>{{{#808080 ▼39.21}}}||<:> 75.68 ||
         ||<:><tablealign=center><bgcolor=#1870B9><-6> {{{#FFFFFF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bgcolor=#C9151E><-5> {{{#FFFFFF '''새누리당→자유한국당'''}}} ||
         ||<|2> [[유학성]]/재선[br][[민주정의당]] || 유학성/3선[* 93.3.31 의원직 사퇴][br][[민주자유당]] || [[황병태]]/재선[* 97.12.26 의원직 상실(뇌물수수)] [br] 신한국당 ||<|2> 신영국/3선 [br] 한나라당 ||<|2> [[신국환]]/초선 [br] 무소속 ||<|2> [[이한성]]/초선 [br] 무소속 ||<|2> 이한성/재선 [br] 새누리당 ||<|2> [[최교일]]/초선 [br] 새누리당 ||
         김진호 선수를 기리는 예천진호국제양궁장도 있다. 예천진호국제양궁장은 국내 최대 규모의 양궁전용경기장으로 2003년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 양궁경기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곳으로 전지훈련을 오기도 한다. 이곳에서 국내, 국제 경기가 열리고 여행자들을 위한 양궁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고 한다. 2015년 예천은 대통령기 전국 남녀 양궁대회를 비롯해 14개 대회를 유치하기도 했다.
          * [[김창호]] : 한국인 최초 황금피켈상 수상 산악인
          * [[이형걸]] : [[한국방송공사|KBS]] [[아나운서]]
          * [[황병태]] : 전 [[주중대사]], 전 신한국당 국회의원, 전 [[대구한의대학교]] 총장
          * [[임이자]] : 현 자유한국당 국회의원(비례대표)
          * [[장석춘]] : 현 자유한국당 국회의원(경북 구미시 을)
  • 이창동 . . . . 22회 일치
         [[경상북도]] [[대구시]](現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했다. [[신일고등학교]] 국어 [[교사]]를 하다가 1983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 중편 소설〈전리(戰利)〉가 당선되면서 [[소설가]]로 등단하여 여러 편의 소설을 썼다. 1993년 영화《[[그 섬에 가고 싶다]]》의 시나리오를 쓰고 조감독을 맡으면서 영화계에 뛰어들었다. 영화계로 들어선 이후에는 소설보다 영화에 주력하게 되었다. [[1997년]] 이스트 필름의 창립 작품이기도 한 [[한석규]] 주연의 영화 《[[초록물고기|초록 물고기]]》를 통해 [[영화 감독|감독]]으로 데뷔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년 뒤 내놓은 영화 《[[박하사탕]]》은 1999년 [[부산 국제 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며 [[설경구]]란 걸출한 배우를 탄생시켰다. 2002년 설경구, [[문소리]]와 다시 호흡을 맞춘 영화 《[[오아시스 (영화)|오아시스]]》로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ref>{{뉴스 인용|제목=‘오아시스’ 이창동―감독상·문소리―신인상 등 5관왕…베니스 영화제 쾌거|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5&aid=0000118051|출판사=국민일보|저자=이광형 기자|날짜=2002-09-09}}</ref> 2003년부터 2004년까지 [[대한민국 문화관광부|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교수를 맡고 있다. 2009년 열린 [[칸 영화제]]에서 [[중화민국|타이완]]의 영화 배우 [[수치 (배우)|수치]](서기)와 함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이창동 감독 장편 부문 심사위원 위촉… “칸에서 나의 국적은 영화”|url=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EntCulture/Article.asp?aid=20090514004092&subctg1=15&subctg2=00|출판사=[[세계일보]]|저자=김용호 기자|날짜=2009-05-14}}</ref> 2010년에 열린 50회 칸 영화제에서는 영화 《[[시 (영화)|시]]》로 각본상을 수상했다.
         *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2005년) 출연
         * 《[[여행자 (2009년 영화)|여행자]]》(2009년) 제작
         * 제62회 칸 영화제 장편경쟁부문 심사위원장([[2009년]])
         *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2001년]]~)
         * 1992년 [[한국일보문학상]] 《녹천에는 똥이 많다》
         * 1997년 제1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각본상
         * 1997년 제1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작품상
         * 2000년 제1회 한국영화축제 영화인이 선정한 각본상
         * 2000년 제1회 한국영화축제 관객들이 뽑은 감독상
         * 2000년 제1회 한국영화축제 영화인들이 뽑은 감독상
         * 2000년 제2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작품상
         * 2000년 제2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감독상
         * 2000년 제2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각본상
         * 2002년 제2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작품상
         * 2010년 제3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각본상
         * 2010년 제3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최우수작품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감독}}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감독}}
         [[분류:195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영화 제작자]][[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각본가]][[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감독]][[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1993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문화관광부 장관]][[분류:노무현 정부의 국무위원]][[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새정치국민회의]][[분류:경북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레지옹 도뇌르 오피시에 훈장 수훈자]]
  • 청도군 . . . . 22회 일치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이 문서는 한국의 지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중국의 도시, rd1=칭다오)]
         [include(틀:프로젝트 문서,프로젝트=나무위키 대경권 프로젝트)]
         ||<-2><bgcolor=#ACDB67> {{{#0B3B17 '''군수'''}}} ||<bgcolor=#CEF6CE> [[이승율]]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br]재선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2><|3><bgcolor=#ACDB67> {{{#0B3B17 '''군의회'''}}} ||<:><bgcolor=#CA252B>'''[[자유한국당|{{{#FFFFFF 자유한국당}}}]]''' {{{#FFFFFF 5석}}}||
         ||<bgcolor=#ACDB67> {{{#0B3B17 '''2'''}}} ||<bgcolor=#CEF6CE> 박권현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 ||
         ||<-2><bgcolor=#ACDB67> {{{#0B3B17 '''국회의원'''}}} [br] [[영천시·청도군|{{{#0B3B17 {{{-1 (영천시·청도군)}}}}}}]] ||<bgcolor=#CEF6CE> [[이만희(정치인)|이만희]]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br]초선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
         2009년에는 화양읍 삼신리에 [[청도 소싸움 경기장]](그것도 돔형!)을 지어놓고 거기서 경기하고 있다. 이 때문에 [[소싸움]] 특유의 전통적인 풍취가 사라져서 까는 사람도 있지만 길(25번 국도) 건너가 용암온천이니.(...) --같이 즐기라고 대놓고 밀어줬다-- 한국우사회와 청도지역공사간 마찰로 휴무를 하기도 했으나 2014년 12월에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3602&yy=2014#axzz3Lwc9vpcz|다시 개장하였다]].
         매년 일정기간 청도 소싸움 축제를 하고 그외엔 주말에만 보통 경기를 여는데 입장료는 공짜고 대신 소싸움에 배팅을 걸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근처에 '용암웰빙스파'와 '[[프로방스#s-2.3|청도 프로방스 포토랜드]]'가 있어 온천과 빛축제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도 꽤 많다. 때문인지 주변에 [[펜션]]들과 음식점들도 몰려있다.
         특산물인 감으로 와인을 만드는 청도 와인터널도 가볼만하다. [[http://www.gamwine.com/company/main.php|홈피]]. 경부선 철도로 쓰던 터널을 개조한 와인 터널로 안에는 감 와인이 숙성되어 가고 있는데, 판매도 하고 시음도 가능하다. 이 감와인은 덜익은 쓴 감을 사용해 주조한 것으로, 특유의 독특한 풍미로 유명하다. 첫맛은 쓴데 입에 조금만 머금고 있으면 단맛이 돈다. 이곳에서 감으로 만든 와인과 초콜릿 등을 맛볼 수 있으며, 살 수도 있다. 과거 SBS드라마 떼루아의 촬영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청도 소싸움 경기장에서 그리 멀지 않기 때문에 와인터널과 용암온천, 프로방스, 소싸움을 한꺼번에 즐기러 오는 경우도 많다. --이거 노리고 소싸움 경기장까지 옮긴걸테지만--
         || '''정당''' ||<:><bgcolor=#1870B9>{{{#FFFFFF 더불어민주당}}}||<:><bgcolor=#C9151E>{{{#FFFFFF '''자유한국당'''}}}||<:><bgcolor=#046240>{{{#FFFFFF 국민의당}}}||<:><bgcolor=#00B1EB>바른정당||<:><bgcolor=#FFCC00>정의당||<:>격차||<:>투표율||
         || {{{#C9151E '''영천·청도'''[* 지역구 국회의원 : [[이만희(정치인)|이만희]]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초선)]}}} ||<:>16.77%||<:><bgcolor=#C9151E>{{{#FFFFFF 58.43%}}}||<:>12.94%||<:>7.44%||<:>3.27%||<:>{{{#808080 ▼41.66}}}||<:> 73.80 ||
         ||<:><tablealign=center><bgcolor=#1870B9><-6> {{{#FFFFFF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bgcolor=#C9151E><-5> {{{#FFFFFF '''새누리당→자유한국당'''}}} ||
          * ~~[[칭다오|青岛 / Qingdao]]~~ [[한국어]] 발음이 두 곳 모두 '청도'로 동일하고, [[중국어]]로도 성조에서 차이가 있지만(岛 3성, 道 4성) 역시 '칭다오'로 동일하다. 이 때문에 칭다오와 자매결연을 맺었다는 개그가 있다. 그런데 칭다오와 자매결연을 맺은 도시는 윗동네 [[대구광역시]]다.
          * [[윤필용]](1927~2010) : 전 수도경비사령관, 전 [[한국도로공사]] 사장
  • 청송군 . . . . 22회 일치
         [include(틀:프로젝트 문서,프로젝트=나무위키 대경권 프로젝트)]
         ||<bgcolor=#04B486> {{{#FFFFFF '''군수'''}}} || [[윤경희]]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br]초선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3><bgcolor=#04B486> {{{#FFFFFF '''군의회'''}}} ||<:><bgcolor=#CA252B>'''[[자유한국당|{{{#FFFFFF 자유한국당}}}]]''' {{{#FFFFFF 4석}}}||
         ||<bgcolor=#04B486> {{{#FFFFFF '''도의원'''}}} || 신효광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 ||
         ||<bgcolor=#04B486> {{{#FFFFFF '''국회의원'''}}} || [[상주시·군위군·의성군·청송군]]:[br][[김재원(정치인)|김재원]]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br]3선 ([[2017년 4월 재보궐선거]]) ||
         한때 [[호랑이]]가 21세기에도 사는 동네라 알려져 유명했다. 그 이유는 2001년 [[대구 MBC]]에서 취재한 보도기사였는데, 무인 카메라에 의문의 대형 [[고양이]]과 동물[* 몸길이 120cm에 꼬리가 [[호랑이]], [[표범]]과처럼 긴꼬리의 짐승이었다고 한다.]이 찍힌뒤로, 주변에서도 인근주민들의 호랑이 목격담을 취재하며, 호랑이가 맞다고 연일 보도를 해댔었다. 그 당시 MBC는 사활을 걸고 특별 취재팀까지 동원해서 이 사건을 계속 수사했고, 진짜 호랑이가 맞다 vs 아니다의 결론이 이어지는 가운데 보도 이후 6개월만에 [[대한민국 환경부|환경부]]에서 공식적으로 '''이건 호랑이가 아니다.'''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청송에서 취재된 사진이 [[호랑이]]가 아니다 뿐이지 뭔가 고양이과 야생동물이란것은 확실했고[* [[담비]]라는 설도 있으나 담비치고는 꽤 큰 덩치라 의견이 분분한 상태.], 아직까지도 이게 무슨 동물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고양이과 야생동물중 가장 작은 [[삵]]만 하더라도 천연기념물인 한국에선 지금의 청송이 희귀 야생동물이 사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곳일듯. 참고로 이 야산 인근 주민들은 아직도 호랑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삼'''자현 '''남'''쪽의 현동면, 안덕면, 현서면의 세개 면을 묶어 삼남지역이라고도 하는데, 여기는 청송읍을 가려고해도 삼자현이라는 고개를 넘어야 하고, 포항, 안동, 의성, 영천 모두 고개를 넘지 않고는 나갈 수 없다. 대신에 35번 국도 버프로 안동과 영천방면으로는 각각 마사터널, 노귀재터널이 완공되어 있고, 삼자현 고개에는 터널 공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산지가 많다는 점을 이용해 [[MTB]]나 산악 모터사이클 경기도 열린다. 청송 국제모터사이클 챔피언십은 개최한지는 꽤 오래 되었지만, 홍보탓인지 아는사람이 많이 없다. 온로드 대회가 아닌 오프로드 대회로, 청송사과공원 야영장 옆 공터에 트랙을 만들어 대회를 진행한다. 매년 10~11월중 하루 일정으로 진행된다. [[http://hyosang.kr/518|2015년도 대회 사진]]모터사이클은 2015년대회이후 시행돼지않고 있다
         || '''정당''' ||<:><bgcolor=#1870B9>{{{#FFFFFF 더불어민주당}}}||<:><bgcolor=#C9151E>{{{#FFFFFF '''자유한국당'''}}}||<:><bgcolor=#046240>{{{#FFFFFF 국민의당}}}||<:><bgcolor=#00B1EB>바른정당||<:><bgcolor=#FFCC00>정의당||<:>격차||<:>투표율||
         || {{{#C9151E '''상주·군위[br]·의성·청송'''[* 지역구 국회의원 : [[김종태(1949)|김종태]]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재선) → [[김재원(정치인)|김재원]] (자유한국당, 3선)]}}} ||<:>14.69%||<:><bgcolor=#C9151E>{{{#FFFFFF 63.35%}}}||<:>12.72%||<:>5.25%||<:>2.79%||<:>{{{#808080 ▼48.66}}}||<:> 75.10 ||
         ||<:><tablealign=center><bgcolor=#1870B9><-6> {{{#FFFFFF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bgcolor=#C9151E><-5> {{{#FFFFFF '''새누리당→자유한국당'''}}} ||
         ||<|2> [[황병우]]/3선[br][[민주정의당]] ||<|2> [[김찬우(1933)|김찬우]]/재선[br][[통일국민당]] ||<|2> 김찬우/3선[br][[신한국당]] ||<|2> 김찬우/4선[br][[한나라당]] ||<|2> [[김재원(정치인)|김재원]]/초선[br]한나라당 ||<|2> [[정해걸]]/초선[br]무소속 ||<|2> 김재원/재선[br][[새누리당]] || --[[김종태(1949)|김종태]]/재선--[* 17.2.9 의원직 상실(선거법 위반)][br]--새누리당-- ||
         || 김재원/3선[* 17.4.12 재보궐선거][br][[자유한국당]] ||
          * 야송(野松) 이원좌 (1939~ ): 한국화가
          * [[정병곤]] : [[삼성 라이온즈]] 야구선수
  • 김기창 (법학자) . . . . 21회 일치
         |언어 = [[한국어]], [[영어]]
         영국 유학 시절 [[리눅스]] [[운영 체제]]를 사용하면서 [[오픈 소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마이크로소프트]]의 국내 독점에 대항하는 [[오픈웹]]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모든 운영 체제에서 [[공인인증서]]를 사용해야 한다며 [[금융결제원]]을 상대로 2007년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제1심과 항소심에서 패소하고<ref>[http://m.ddaily.co.kr/view.php?uid=48223 오픈웹, 금결원과의 민사소송 2심서 패소]{{깨진 링크|url=http://m.ddaily.co.kr/view.php?uid=48223 }}</ref>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2009년에 기각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40&oid=001&aid=0002906855 대법 "익스플로러만 공인인증 위법 아니다"]</ref> 2009년에 《한국 웹의 불편한 진실》이라는 서적을 저술하였다. 오픈웹은 2013년에 [[사단법인]] [[오픈넷]]에 통합되었고 현재는 오픈넷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에서 행정 심판 위원을 역임한 바가 있고, [[서해안 기름 유출 사고]]와 관련하여 《서해안기름유출사고와 삼성중공업의 배상책임》에 대한 논문을 저술하였다. 2008년 10월에는 언론소비자주권 국민캠페인에 대한 형사 소송 사건에서 언론소비자주권 국민캠페인의 무죄를 주장하는 취지의 증언을 하였고, 2009년 6월에는 [[2009년 대한민국의 시국 선언|법률가 시국 선언]]에 참여하였다.
         전문 분야 저술과 일상 생활이 가능한 언어로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가 있고 전문 서적 독해가 가능한 언어로 [[라틴어]], [[독어]], [[일본어]]가 있다.
         * 배아와 복제배아에 대한 한국법의 입장 -생명과학연구의 법적 허용 한계-, 人權과 正義 340號, 2004.12
         * 영국의 법조인 양성 및 선발제도 개관, 한국법학교육과 법조실무의 국제경쟁력: 도전과 대응, 한국법학교수회, 2004.12
         * 법적담론 전개 양식의 차이 -성문법 국가와 판례법 국가의 비교-, 세계화지향의 사법: 그 배경과 한국과 프랑스의 적응, 세창출판사, 2006
         * 컴퓨터 프로그램 보호법제, 安岩法學 25號, 安岩法學會, 2007.11
         * ''Legal education and legal profession changes and challenges'' (법학교육과 법률가 : 변화와 도전), 세계화 시대의 법과 한국법의 발전, 고려대학교 개교 백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2005.11.19
         * ''Les diff?rents techniques de l'?laboration de la loi: le code et les "cases"'' (법적담론 전개 양식의 차이: 성문법 국가와 판례법 국가의 비교), 세계화지향의 사법: 그 배경과 한국과 프랑스의 적응,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100주년 프랑스민법전 20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2005.12.03
         * 컴퓨터 프로그램 보호법제, 제44회 안암법학회 춘계학술발표회: 최근의 법적 쟁점과 과제, 2007.5.12
         * 인터넷을 통한 네트워킹: 소수자의 견해를 알리는 수단으로서", 한국법사회학회 연구모임회: 정보민주화와 인권, 2007.10.20
         * 서해안 기름유출사고와 삼성중공업의 배상책임에 관하여, 한국비교사법학회 제56회 정기(춘계)학술대회, 2008.5.23
         * 자주점유의 기원과 종말, 한국법사학회 제84회 정례학술대회: 서양법사의 쟁점들, 2008.6.28
         * 법조인의 전문화 및 국제경쟁력 강화, 건국 60주년 기념 한국법률가대회: 선진국 조건으로서 법치주의, 한국법학원, 대법원, 헌법재판소, 법무부, 대한변호사협회, 한국법학교수회, 2008.8.26
  • 우동균 . . . . 21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08년]]
         |드래프트 순위 = [[2008년 한국프로야구 신인선수 지명회의|2008년]] 1차 지명([[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08년]] [[6월 14일]] <br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 대 [[두산 베어스|두산]]전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17년]] [[6월 11일]] <br />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대전]] 대 [[한화 이글스|한화]]전
         * [[경찰 야구단]] (2010년 ~ 2011년)
         |대륙간컵 (야구) = 2010 대만
         '''우동균'''(禹東均, [[1989년]] [[12월 3일]] ~ )은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이자, 일본 독립 야구 [[가가와 올리브 가이너즈]]의 [[외야수]]였다.(5월 1일 퇴단하였다.)
         ==한국 프로야구 시절==
         ===[[경찰 야구단]] 시절===
         [[2009년]] [[12월 17일]]에 입대<ref>[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2009770 우규민-연경흠-우동균 등 24명 경찰청 입대] - 스포츠조선</ref> 하여 [[2011년]]에 제대했다.
         ==일본 독립야구 시절==
         {{2007년 아시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 대한민국 선수 명단}}
         [[분류:경일대학교 동문]][[분류:단양 우씨]][[분류:경찰 야구단 선수]]
  • 울진군 . . . . 21회 일치
         [include(틀:프로젝트 문서,프로젝트=나무위키 대경권 프로젝트)]
         ||<-2><|2><bgcolor=#04B431> {{{#FFFFFF '''군의회'''}}} ||<:><bgcolor=#CA252B>'''[[자유한국당|{{{#FFFFFF 자유한국당}}}]]''' {{{#FFFFFF 3석}}}||
         ||<bgcolor=#04B431> {{{#FFFFFF '''2'''}}} ||<bgcolor=#CEF6CE> 방유봉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 ||
         ||<-2><bgcolor=#08088A> {{{#FFFFFF '''국회의원'''}}} ||<bgcolor=#CEE3F6> [[영양군·영덕군·봉화군·울진군]]:[br][[강석호]]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br]3선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
         울진의 경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원자력발전소이다. 울진군 북면 부구리에 [[한울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데, 워낙에 교통이 불편한데다 그나마 근처에 대도시(울산,부산,광주)가 있는 다른 원자력발전소와 달리 근처에 도시다운 도시도 없다. 인구 15만 이상 도시를 기준으로 삼으면 강릉이 북쪽으로 110km, 안동이 남서쪽으로 117km, 포항이 남쪽으로 120km 떨어져 있다. 대신 근처에 큰 도시가 없다는 건 만약 방사능이 유출될 시에 위험지역 안에 들어있는 사람이 그만큼 적다는 뜻이니 국가적 차원에서는 오히려 좋은 거라고 봐야 한다. 때문에 근무 지원자가 적어서 한국수력원자력에서는 10년 이상 한울원전에서 계속 근무할 것을 전제로 하는 특별채용도 실시하고 있다.
         2013년 5월 한국수력원자력의 비리와 관련하여 울진군와 영광군에서 발전소 명칭 변경을 요청함을 받아들여 울진 원자력 발전소는 한울 원자력 발전소로, 영광 원자력 발전소는 한빛 원자력 발전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북면에 위치한 온천관광지. 한국 온천 중에서 유일하게 자연용출되는 온천이다. 이 때문에 초창기에는 노천탕도 운영했을 정도. 관광지 개발은 1980년대로 좀 늦은 편인데, 온천 위치가 산골짜기라서 개발이 어려웠기 때문. 이 때문에 용출되는 곳에는 개발을 못하고, 용출지에서 4 km 떨어진 지금의 위치에 관광지를 개발하고 파이프로 온천수를 끌어오고 있다. 규모는 제법 큰 편이며, 자체운영호텔과 스파월드라는 이름의 온천수 수영장이 온천탕과 별개로 운영되고 있다.--노천탕도 있다!-- 온천탕은 남,녀 대온천탕과 가족온천탕이 있다.
         특산물로는 [[대게]]와 [[지리적 표시제/대한민국]]에 등록된 울진 [[송이]]가 있으며 [[2005년]]과[[2009년]]엔 친환경 농업 [[엑스포]]가 개최 되었다. 이웃한 [[영덕군]]과는 대게 문제로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다. 그것도 원조 분쟁이었는데 한국산 대게의 원조 분쟁을 놓고 [[영덕군]]과 대립중이며 대게 생산에 있어서도 [[영덕군]]과 경쟁중이다.
         실상 잡는곳은 둘다 크게 차이가 없으나 과거 울진이 교통이 너무 안좋아서 잡은 대게들을 대부분 영덕에서 출하를 했다. 이때문에 영덕대게가 유명했으나 요즘은 교통도 괜찮아져서 울진 대게 홍보도 만만치 않게 하는중이다. [[SBS]]의 목요일 심야 예능프로인 [[자기야 - 백년손님]]의 남재현과 그의 장인부부의 활약으로 울진 대게의 홍보를 제대로 해서 요즈음 들어서 [[영덕군]] 부럽지 않게 효과를 보고있다고 한다.
         ||2|| ||[[한국원자력마이스터고등학교]][* 2011년 원자력발전설비분야 [[마이스터고]]로 지정, 2013년부터 개편, 신입생을 모집했다.]||평해읍 월송정로 422||
         || '''정당''' ||<:><bgcolor=#1870B9>{{{#FFFFFF 더불어민주당}}}||<:><bgcolor=#C9151E>{{{#FFFFFF '''자유한국당'''}}}||<:><bgcolor=#046240>{{{#FFFFFF 국민의당}}}||<:><bgcolor=#00B1EB>바른정당||<:><bgcolor=#FFCC00>정의당||<:>격차||<:>투표율||
         || {{{#C9151E '''영양·영덕[br]·봉화·울진'''[* 지역구 국회의원 : [[강석호]]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3선)]}}} ||<:>16.72%||<:><bgcolor=#C9151E>{{{#FFFFFF 59.73%}}}||<:>13.29%||<:>5.65%||<:>3.33%||<:>{{{#808080 ▼43.01}}}||<:> 73.48 ||
         ||<:><tablealign=center><bgcolor=#1870B9><-6> {{{#FFFFFF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bgcolor=#C9151E><-5> {{{#FFFFFF '''새누리당→자유한국당'''}}} ||
         || [[김중권]]/3선[br][[민주정의당]] || 이학원/초선[br][[통일국민당]] || [[김광원]]/초선 [br] 신한국당 || 김광원/재선 [br] 한나라당 || 김광원/3선 [br] 한나라당 || [[강석호]]/초선 [br] 한나라당 || 강석호/재선 [br] 새누리당 || 강석호/3선 [br] 새누리당 ||
  • 이갑성 . . . . 21회 일치
         그의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이고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아호는 연당(硏堂).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1931년]] [[신간회 사건]]으로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 시|상하이]]로 망명,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귀국하였다. [[1940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7개월간 복역하다가 [[윤치호]]의 신원보증으로 풀려났다. [[1945년]] 독립촉성국민회의 조직에 참여하여 회장이 되고 [[1947년]]에는 [[남조선 과도입법위원회]] 의원을 지냈으며 단정 수립론을 지지하였다. [[1950년]] [[제2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뒤 [[1952년]] [[이승만]]의 친위조직이 된 [[대한인 국민회]] 회장을 지냈고, 그해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에 입당, [[1952년]] [[10월]] [[한국 전쟁]] 중 전시내각(戰時內閣)의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임시 국무총리]](國務總理)를 역임했다. [[1953년]] 자유당의 최고위원, 정무부장을 역임하였다. 4.19 혁명 후 야인으로 생활하다 [[1963년]] [[2월]]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위원이 되었다. [[1965년]] [[광복회]] 회장을 지냈다.
         석방 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에 가입하여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4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재단 이사, 세브란스의약(醫藥) 지배인이 되었다. [[1925년]] [[2월]] 이창제(李昶齊), 현신덕(玄信德), 조철호(趙喆鎬), 배집(裵執), 변성옥(邊成玉) 외 5인과 함께 [[공산주의]] 계열의 [[반기독교 운동]]에 저항하기 위해 [[시사구락부]](時事俱樂部)를 조직하여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주장에 저항하였다.<ref>김준엽, 김창순 공저, 《한국공산주의운동사 2》(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 1969)</ref>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를 영접하는데 참석하였다. 그뒤 [[1946년]] [[4월 18일]] [[한독당]]. [[국민당]](國民黨)과 신한민족당의 3당 통합에 참여하였으나 곧 [[한국독립당]]에서 [[안재홍]] 등이 제명되자 그도 탈당하였다. [[1946년]] [[정당통일기성회]] 위원장에 선출되었으나 갈등이 계속되면서 결국 1947년 해산하게 된다.
         [[1951년]] [[5월 16일]] [[이시영]] [[부통령]]의 사퇴로, [[부산 피난지]]에서 열린 [[제2대 국회]]에서 실시한 제2대 부통령선거에서 여당격인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 소속 [[부통령]] 후보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했다. 재적 국회의원 210명 중 재석의원 151명에 의해 선출된 부통령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 소속 [[김성수 (1891년)|김성수]]와 경합했는데, 1차 투표와 2차 투표에서 당선표수 미달, 3차 투표에서 73표를 얻어 낙선, 78표를 얻은 [[김성수 (1891년)|김성수]]가 부통령으로 선출됐다.
         [[한국 전쟁]] 중이던 [[1952년]] [[10월]] 이승만(李承晩)대통령으로부터 전시내각(戰時內閣)의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국무총리]](國務總理)에 임명되기도 했다.<ref>[https://search.i815.or.kr/Indeman/Indeman.jsp?tid=ma&c1=%ED%9B%88%EA%B2%A9 ::: 독립기념관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 봇이 따온 제목 -->]</ref> [[11월]]에는 정식 [[국무총리]]로 국회에 인준하였으나 부결되었다.<ref>대통령비서실, 《한국정치 이대로는 안 된다》 (역사비평사, 2008) 74페이지</ref>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 보궐선거|제2대 부통령 보궐선거]]||[[대한민국 부통령|부통령]]||2대||[[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막대|자|4|8|7}} 48.7%||73표||2위||낙선
         [[3·1 운동]] 당시 [[한국]]의 독립운동 장면을 사진으로 촬영해달라는 [[석호필]](스코필드)의 부탁을 받고 [[경성부|경성]] 시내에서 학생들의 만세 장면을 카메라 사진으로 여러장 촬영해서 주기도 했다. 학생들의 만세 장면과 [[조선총독부]] 헌병들의 사격장면 등을 담은 이 사진들은 [[스코필드]]와 [[조선총독부]] 치하 [[조선]]에 와 있던 [[미국인]] [[기독교]] [[선교사]]들을 통해 서방세계로 알려지게 되었다.
         * [[한국 전쟁]]
         * [[한국독립당]]
         *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유신사, 1920)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2》 (국사편찬위원회, 1966)
         * 한국국회인물사편찬회, 《역대국회의원총람》 (조세공론사, 1983)
         * 송남헌, 한국현대정치사 1(성문각, 1980)
         [[분류:1889년 태어남]][[분류:1981년 죽음]][[분류:병사한 사람]][[분류:한국의 약학자]][[분류:한국의 약사]][[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종교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의학자]][[분류:일제 강점기의 약사]][[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관련자]][[분류: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분류:민족대표 33인]][[분류:대한민국 임시 정부]][[분류:한국의 군정기]]
         [[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분류:대한민국 제3공화국]][[분류:이갑성|*]][[분류:허정숙]][[분류:김규식]][[분류:윤치호]][[분류:윤치영]][[분류:경성경신고등보통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단국대학교 명예박사학위 동문]][[분류:자유당]][[분류:한국독립당]][[분류:민주공화당 (대한민국)]][[분류:경주 이씨]][[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
  • 정성룡(야구선수) . . . . 21회 일치
          * [[야구 관련 인물(KBO)]]
         ||<:> '''학력''' || [[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포철공고]] ||
         ||<:> '''프로입단''' || [[한국프로야구/1984년/신인드래프트|1984년 삼성 라이온즈 1차 지명]]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ff0000><:> '''[[1993년 한국시리즈|{{{#ffffff 1993}}}]]''' ||
         || [[박영진(야구)|박영진]](1982~1983) || → || '''정성룡(1984)''' || → || [[이해창(1953)|이해창]](1985~1986) ||
         [[삼성 라이온즈]]와 [[해태 타이거즈]]에서 뛰었던 야구선수. ~~골키퍼 [[정성룡]]과 이름이 같다.[* '''한자까지''' 똑같다., 심지어 출신고교도 같다!]~~
         [[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포철공고]] 재학 시절 김성범[* 1982년 [[이영민 타격상]] 수상자.], [[류명선]], 염창무, [[정윤수]], 최해명 등의 동기들과 팀의 첫 전국대회 진출을 이끌었지만 전국대회에서 준우승만 3번 하는 데 그쳤다. 이들 중 정성룡은 '''제2의 [[장효조]]'''라 불릴 정도로 타격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이면서 당시 매서운 타격으로 정평난 포철공고 타선의 선두에 있었다. 이 때문에 고교 졸업 후 삼성에 1차 지명되어, 바로 프로에 입단했다. 이로 인해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고졸신인 3인''' 중 한 명이 되었다.[* 다른 두 명은 해태의 [[문희수]]와 롯데의 [[조용호]]. 84년 이들이 지명되기 전까지 신인드래프트에서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가 지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쟁쟁한 선배들이 자리 잡은 상태였기에 결국 백업이나 2군[* 당시 [[KBO 퓨처스리그|2군 리그]]가 있기 전이었지만 삼성에서는 이미 2군을 운용하고 있었다.]을 전전해야 했다. [[장효조]]가 1989년 롯데로 이적한 후 그의 10번을 물려받을 정도로 여전히 기대받는 유망주였으나, 그동안 정성룡은 오랜 2군 생활 속에 제2의 장효조가 아닌 제2의 [[정동진]]이라 불릴 정도로 살이 쪘다.
         1992년 시즌 종료 뒤 ~~왼손 유망주라면 사족을 못쓰는 [[김응용|코감독]]에 의해~~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되었는데, 그해 해태가 삼성에게 완봉을 당한 경기가 있었는데 그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쳤기 때문인 것이 유력하다. 즉 그 시즌 홈런 3개중 2개를 코감독 앞에서 그것도 연타석으로 쳤으니 [[인생경기]]를 한 셈.[* 다음 해에 김성래와 양준혁이 괴물활약을 한 것을 보면.. 프로생활을 3년이나 연장하고 한국시리즈 우승반지도 꼈으니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 1993~1995년까지 해태의 몇 안되는 좌타자로 활약하다가 은퇴했다. 원조 10번이었던 [[장효조]]에 대한 올드 삼빠들의 대한 그리움과 그 이후 10번을 단 [[양준혁]]의 인기에 의해 지금은 거의 잊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해태에서 10번을 물려받은 선수는 당시 신인이였던 [[장성호]]였지만 1년만에 1번으로 갈아탔다. 공교롭게도 그 이후 10번을 단 선수가 [[최훈재]] 그리고 [[양준혁]].
         김응용 감독은 정성룡의 스윙을 보고 "저 스윙으로 3할을 못 치는 건 말이 안 된다."며 큰 기대를 했으며, 1993년 시즌에는 해태 타선의 몇 안 되는 좌타자로서 원포인트 대타나 지명타자로 쏠쏠한 활약을 하여 해태의 우승에 공헌했다. 이 해 타율은 0.246이고 홈런은 10개. 타율은 별로였지만 전반기에는 규정타석만 채우면 [[양준혁]]과 [[강기웅]] 등을 위협할정도로 3할1~2푼 수준을 유지했으나 후반기에서 까먹은 것. 홈런을 심심찮게 터뜨렸으며[* 1993년이 126경기 체제에서는 가장 적은 18명의 두자릿수 홈런 타자를 배출했다.] 경기를 승리로 이끄는 한방이 많았다. 프로 데뷔 후 최다 출장인 107경기에 출장했다. 그리하여 당시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도 유력했으나 [[김기태(1969)|김기태]]의 지명도에 밀려[* 팀 성적은 물론이거니와 김기태 본인의 성적이 별로였던 점을 감안하면..] 타지 못했다.
         고교 시절 그에 대한 평가를 생각해 본다면 졸업 후 바로 프로 입단한 게 독이 됐다. 만약 [[류명선]]이나 정윤수 등의 동기들처럼 대학에 진학했었더라면 1980년대 말 삼성 외야진이 세대 교체를 할 즈음에 입단해, 입단하자 마자 많은 기회를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위안거리라면 당시 정성룡과 같이 포철공고의 타선을 이끌었던 김성범과 염창무는 아예 프로 지명조차 받지 못했다.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분류:포항시 출신 인물]] [[분류:1964년 출생]] [[분류:타자]] [[분류:외야수]] [[분류:좌투좌타]] [[분류:해태 타이거즈]]
  • 창원시/인물 . . . . 21회 일치
         * [[김민식(야구선수)|김민식]] - 마산회원구
         * [[김시훈(야구선수)|김시훈]] - 마산회원구
         * [[김창혁(야구선수)|김창혁]] - 마산회원구
         * [[김창희(야구)|김창희]] - 마산회원구
         * [[김헌곤(야구선수)|김헌곤]] - 마산회원구
         * [[박영태(야구코치)|박영태]] - 마산합포구
         * [[박상혁(야구선수)|박상혁]] - 마산회원구
         * [[박정준(야구코치)|박정준]] - 마산회원구
         * [[박성준(야구선수)|박성준]] - 성산구
         * [[변진수(야구선수)|변진수]] - 성산구
         * [[박영완(야구선수)|박영완]] - 진해구
         * [[신명철(야구선수)|신명철]] - 성산구
         * [[유두열(야구선수)|유두열]] - 마산합포구
         * [[이동학(야구선수)|이동학]] - 마산회원구
         * [[이승재(야구선수)|이승재]] - 마산회원구
         * [[이상백(야구선수)|이상백]] - 성산구
         * [[임지섭(야구선수)|임지섭]] - 성산구
         * [[조정훈(야구선수)|조정훈]] - 마산회원구
         * [[장원삼(야구선수)|장원삼]] - 성산구
         * [[주성욱(프로게이머)|주성욱]] - 진해구
  • 태종무열왕 . . . . 21회 일치
         |출생일 = [[진평왕]](眞平王) 25년([[603년]])<ref>고운기,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2057 김춘추] 네이버캐스트 인물한국사</ref>
         [[661년]] 재위한지 8년만에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며, 묘호(廟號)는 태종(太宗)이다.<ref name="김영하">김영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D%83%9C%EC%A2%85%EB%AC%B4%EC%97%B4%EC%99%95&ridx=0&tot=42 태종무열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아버지는 [[진지왕]](眞智王)의 아들 [[김용춘]]<ref group="주">김용수(金龍樹)라고도 한다.</ref>,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이었던 [[천명부인]]이다. 그가 사료에 '진골'로 기재된 것에 대해서는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재위 4년 만에 국인에 의해 폐위당한 점이나 [[김춘추]] 자신이 진골이자 옛 [[금관가야]]의 왕족 출신인 [[김유신]](金庾信)의 누이인 문희를 아내로 삼은 점 등이 이유로 지적되고 있다.<ref>주보돈(2009), [http://www.riss.kr/link?id=A77046838 〈신라 骨品制 연구의 새로운 傾向과 課題〉] 《한국고대사연구》 54권 5-41쪽. 한국고대사학회</ref>
         * 한국과 중국, 일본을 누빈 외교가로서, 《일본서기》에는 [[고토쿠 천황]] 3년인 다이카 3년(647년)에 사신으로 왔던 김춘추에 대해 “용모가 아름답고 쾌활하게 담소하였다(美姿顔善談笑)”<ref name="일본서기-647"/>고 평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삼국유사》에도 무열왕이 병사를 청하러 당에 들어갔을 때, 당의 황제(태종)가 무열왕의 풍채를 보고 칭찬하여 "신성한 사람(神聖之人)"이라 부르며 그를 붙잡아두어 시위(侍衛)로 삼으려 했지만 극구 청하여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ref name="유사-기이1"/>
         무덤 앞 동북쪽에는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가 있는데, [[일제 강점기]] 이전에 이미 비석의 몸돌 부분은 사라지고 귀부와 이수 부분만 남아있었으며,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어 묘의 주인이 무열왕임을 확실히 규명할 수 있다.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의하면 비는 무열왕이 사망한 [[661년]]에 건립되었고, 비문의 글씨는 무열왕의 아들인 김인문이 썼다.<ref>이은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AC%B4%EC%97%B4%EC%99%95%EB%A6%89&ridx=1&tot=165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그러나 20세기 초, 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되고 식민지배하에 놓이면서, 기존의 한국 역사에 대한 비판과 함께 태종 무열왕은 외세를 끌어들어 민족사적 강역을 축소시켰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을사늑약]]을 비판하여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기고하기도 했던 [[장지연]]은 김춘추가 당병을 이끌어 동족(백제와 고구려)을 친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한국 역사는 천여 년을 외국의 사상에 이끌려 다니며 자국의 위풍을 멸하고 타인의 위세가 늘어나게 되었다고 비판하였고 이것이 한국이 하나로 뭉치지 못한 요인의 하나라고 주장하였다.<ref>"新羅武烈王及金庾信이 能討滅麗濟고 統合邦土니 其 功烈이 可謂嵬矣나 驅唐兵而狀吾同族이 豈足謂能事哉아 因此而啓千餘年依賴外國之思想야 滅自國之威風고 增他人之勢力니 嗚乎라 此ㅣ 依賴之癮이 所以爲不能團合之第三病根也오." [[1906년]] 11월 25일자 《대한자강회월보》 제5호, 「團體然後民族可保」</ref>
         [[신채호]]는 민족주의적 견지에서 고구려와 백제, 신라를 다 똑같이 '신성한 부여족', 즉 '조선 한민족의 형제'라 부르며, 당과 손을 잡고 고구려와 백제를 친 김춘추(태종 무열왕)의 행동을 “도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죽인” 격으로, “다른 민족을 끌어들여 동족인 고구려, 백제를 없앤 역사의 죄인”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특히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4천 년간의 민족사는 [[부여족]] 소장성쇠(消長盛衰)의 역사라 하여 [[부여족]]이 주족이라는 인식하에 긍정적으로 평가되던 ‘[[삼국통일]]’의 대업에 대한 역사적 의의를 비판해 [[김유신]](金庾信)·[[김춘추]](金春秋) 및 [[김부식]](金富軾)의 공죄(功罪)를 논하였다. 이것은 [[한국]]의 고대사를 반도 중심으로 보았던 종래의 [[역사]] 인식 체계를 [[만주]] 중심과 [[단군]], [[부여족]]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이다.<ref>신채호, [[:s:ko:독사신론#제9장 김춘추의 功罪|〈독사신론〉 제9장 김춘추의 功罪]] 《대한매일신보》</ref>
         해방 후에도 이러한 인식은 고스란히 이어졌다. [[한국]] [[민속학]]의 원조이기도 한 [[손진태]]는 [[김유신]]이나 [[김춘추]]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동족을 공격하기 위해서 이민족과 연맹하는 것은 민족적으로 최대의 죄악"이며, 신라가 당과 손잡은 것을 "귀족 국가의 비민족적 본질"이라 비난하였고,<ref>〈한국민족사개론〉, 1948년</ref> 한국역사연구회에서 편찬한 <한국역사>(1992)는 '통일'이라는 용어를 쓰면서도 그 통일의 '불완전함'과 '남북국 시대'라는 그 다음 시대의 성격을 강조했다.
         [[642년]] 김춘추와 연개소문 사이의 교섭은, 신라에게 [[죽령]] 이북의 [[한강]] 유역 전체를 내놓고 현재의 [[영남]] 지역에 국한된 약소국으로 남기를 요구하는 고구려의 제국주의적 태도와 한강 유역<ref group="주">현재의 [[경기도]], [[강원도 (남)|강원도]] 및 [[충청북도]] [[충주]]권</ref>을 잃으면 패망을 면할 수 없다는 신라 지배자들의 인식이 타협의 여지 없이 상충되어 결렬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당시의 현실에서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김춘추의 선택은 그가 현대 [[한국인]]이 아닌 고대 [[신라]]인, 그것도 신라의 지배자였다는 점을 냉정하게 인식하는 바탕 위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 《[[선덕여왕 (드라마)|선덕여왕]]》([[MBC]], [[2009년]], 배우:[[유승호]], 아역: [[정윤석]])
         * 이종욱, 《춘추:신라의 피 한국 한국인을 만들다》 (효형출판, 2009)
  • 김태한 . . . . 20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92년]]
         |드래프트 순위 = [[1992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1992년]] 1차 지명 ([[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1992년 한국프로야구|1992년]]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03년 한국프로야구|2003년]] [[6월 20일]] <br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 대 [[삼성 라이온즈|삼성]] 전 [[구원 투수|구원]]
         *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2009년)
         [[1992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1992년]]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하였으며, [[삼성 라이온즈]]의 좌완 [[투수]] 중 드물게 [[1993년]] ~ [[1994년]] 2년 연속 10승대를 기록하였다.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11691 야구의 추억, 여든 네 번째] 93년 각별한 울림을 줬던 이름, 김태한
         * [http://www.koreabaseball.com/Record/PitcherDetail1.aspx?pcode=92401 김태한] - [[KBO (야구)|KBO]]
  • 영양군 . . . . 20회 일치
         [include(틀:프로젝트 문서,프로젝트=나무위키 대경권 프로젝트)]
         ||<bgcolor=#FA5858> {{{#FFFFFF '''군수'''}}} ||<bgcolor=#F8E0E6> [[오도창]]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br]초선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3><bgcolor=#FA5858> {{{#FFFFFF '''군의회'''}}} ||<:><bgcolor=#CA252B>'''[[자유한국당|{{{#FFFFFF 자유한국당}}}]]''' {{{#FFFFFF 4석}}}||
         ||<bgcolor=#FA5858> {{{#FFFFFF '''도의원'''}}} ||<bgcolor=#F8E0E6><:> 이종열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
         ||<bgcolor=#FA5858> {{{#FFFFFF '''국회의원'''}}} ||<bgcolor=#F8E0E6> [[영양군·영덕군·봉화군·울진군]]:[br][[강석호]]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br]3선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
         [[경상북도]] 동북부에 있는 군. 면적은 815.14㎢ , 서쪽은 [[안동시]], 북쪽은 [[봉화군]], 남쪽은 [[청송군]], 동쪽은 [[영덕|영덕군]], [[울진군]]과 접하고 있으며 인구는 2018년 2월 기준 약 1만 7천 명. 영양군보다 인구가 적은 [[기초자치단체]]는 [[경상북도]] [[울릉군]]뿐이다. 그나마도 울릉군은 자그마한 섬이라는 특수성이 있으니, 이 영양군이 (섬을 빼고) [[육지#s-2|육지]] 중엔 사실상 한국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셈이며, 이는 [[팔라우]] 전체 인구와 거의 비슷하다. 아울러 인구 밀도 21명/㎢로 전국에서 [[강원도]] [[인제군]]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밀도가 낮은 시군이다. 참고로 인제군의 인구밀도는 20명/㎢. 그러나 주민등록을 옮기지 않고 인제군에서 군 복무를 하는 대다수 군인들을 감안하면, 실제 인구밀도는 오히려 영양군이 인제군보다 더 낮을 수도 있다.
         || '''정당''' ||<:><bgcolor=#1870B9>{{{#FFFFFF 더불어민주당}}}||<:><bgcolor=#C9151E>{{{#FFFFFF '''자유한국당'''}}}||<:><bgcolor=#046240>{{{#FFFFFF 국민의당}}}||<:><bgcolor=#00B1EB>바른정당||<:><bgcolor=#FFCC00>정의당||<:>격차||<:>투표율||
         || {{{#C9151E '''영양·영덕[br]·봉화·울진'''[* 지역구 국회의원 : [[강석호]]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3선)]}}} ||<:>16.72%||<:><bgcolor=#C9151E>{{{#FFFFFF 59.73%}}}||<:>13.29%||<:>5.65%||<:>3.33%||<:>{{{#808080 ▼43.01}}}||<:> 73.48 ||
         ||<:><tablealign=center><bgcolor=#1870B9><-6> {{{#FFFFFF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bgcolor=#C9151E><-5> {{{#FFFFFF '''새누리당→자유한국당'''}}} ||
         || [[오한구]]/3선[br][[민주정의당]] || 강신조/초선[br][[민주자유당]] || [[김광원]]/초선 [br] 신한국당 || [[김찬우]]/4선 [br] 한나라당 || 김광원/3선 [br] 한나라당 || [[강석호]]/초선 [br] 한나라당 || 강석호/재선 [br] 새누리당 || 강석호/3선 [br] 새누리당 ||
          * 고전 [[한국 애니메이션]] [[꿀벌의 친구]]는 영양 일월산이 배경이다.
          * [[이재오]] - 프로필에는 [[강원도]] [[동해시]]라고 되어있지만 그것은 태어난 것뿐이고 실제 어려서부터 영양에서 살았고, 심지어 영양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왔다. --프로필 바꾼것도 TK이미지 벗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다.--[* 실제로 [[매일신문]]이 이재오가 네이버 프로필 출생지를 영양에서 동해로 바꾼 것을 비판한 적이 있다.] [[이명박 정부]]의 2인자였으니 영양 출신 중에서는 가장 잘 나간 사람이다.
  • 이보림 . . . . 20회 일치
         [[충청남도]] 연기군(현 [[세종특별자치시|세종시]]) 조치원읍 출신으로,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95867|2012년 연기군이 세종시로 출범하기 직전에 열린 ‘복사꽃 아가씨 선발 충남대회’에서 진으로 선발된 적이 있다]]. 2014년에는 제23회 [[SBS]] [[슈퍼모델]] 선발대회[* 여담으로 [[프로듀스 101]] 시즌1에 출전한 [[성혜민]]도 여기에 출전하여 투어 2000상을 받았다. 즉, 대회 동기인 셈.]에 참가, 본선에 진출해 MTP MALL상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에 '[[미스코리아 충북]]'에 참가하여 이즈치과상을 수상했다.
         2017년 10월에는 [[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 더 유닛]]에 참가했다.
         == [[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 더 유닛]] ==
         [include(틀: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 더 유닛/참가자)]
         ||<#2D73FF><:>'''{{{#fff 특기}}}'''||한국무용||
         ||<#202020> {{{#FFF '''구분'''}}} ||<#202020> {{{#FFF '''RESTART'''}}} ||<#202020> {{{#FFF '''셀프 프로듀싱'''}}} ||<#202020> {{{#FFF '''음원 발매'''}}} ||
         '''[[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 더 유닛]] 최고의 [[졌지만 잘 싸웠다|졌잘싸]]'''
         [[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 더 유닛/5~6회|6회]] 참가자들과의 첫 만남에서는 대부분 현역 아이돌들인 다른 참가자들과 달리 배우/[[모델]] 출신인지라 아는 사람이 없어서 위축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잠깐 사이에 [[의진(소나무)|의진]]과 친해졌는지 의진이 [[멜로디데이]]와 [[DIA(아이돌)|다이아]] 연합에 들어갈 때 같이 데리고 들어가서 빨강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이후 [[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 더 유닛/7~8회|첫 미션]] 준비 과정에서 이보림은 춤에 익숙하지 못해 중간 점검 때 안무가 김화영으로부터 블랙홀 멤버라는 지적을 받았고, [[의진(소나무)|의진]]과 함께 다른 방에서 연습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로 인해 의진에게 "의진 센세"라는 별명이 붙었다.
         [[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 더 유닛/9~10회|포지션 배틀]] 중 댄스 부문에 가장 먼저 [[http://tv.naver.com/v/2366699|참가]]해서 43부트를 받았는데, 뒤에 나온 [[박지원(1997)|박지원]]이 48부트를 받아 밀려났다. [[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 더 유닛/9~10회|RESTART 미션]]에서는 빨강팀에서 'Gee'를 공연했는데, 막내 [[한비(립버블)|한비]]에게 안무를 배우면서 연습에 매진했다. 초보자인지라 안무 중간 점검에서는 김화영에게 주시당했는데, 팀원들의 커버를 잘 받아서 '팀복은 타고났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래도 많이 늘었다'는 칭찬도 받을 수 있었다. 마지막에는 '그래서 네가 틀리면 안 된다'라는 말도 덧붙였는데... 본 경연 도입부분에서 혼자 틀리는 실수를 범해 무대가 끝난 다음에는 이에 대한 자책감에 눈물을 보였고 이에 [[우희(달샤벳)|우희]]와 팀원들이 첫 실수 이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무대를 마친 것을 칭찬해 주며 격려했다. 현장 투표에서는 113표로 7위를 기록했다. 첫 미션에서 보여 준 [[의진(소나무)|의진]]과의 케미와 성장이 좋은 평가를 받았는지, 방송 종료 후 공개된 중간 개인 순위에서는 무려 19계단이나 상승해 25위에 올랐다.
         [[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 더 유닛/13~14회|1차 유닛 발표식]]에서는 8계단 상승한 17위를 기록했다.
         [[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 더 유닛/17~18회|셀프 프로듀싱 미션]]에서는 검정팀으로 참가해 또 다시 [[의진(소나무)|의진]]과 같은 팀이 되었다. 중간 평가에서 갑자기 코피가 터진 의진을 리더인 [[세리(달샤벳)|세리]]와, 의진과 친한 보림이 화장실로 데려다 주었다. 그 외의 방송 분량은 별로 없었지만 본 경연에서 맡은 역할을 잘 해냈고 현장 투표에서 팀 내에서 딱 중간인 5위를 기록했다.
         [[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 더 유닛/19~20회|2차 유닛 발표식]]에서는 [[비(연예인)|비]]가 '유닛G의 대표 비주얼'이라고 소개한 16위를 기록했다. 이에 '고비가 많았었는데 한 단계 순위를 높여주신 만큼 더 열심히 하겠다'고 소감을 이야기했다.
         [[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 더 유닛/21~22회|21~22회]] 방송 종료 후 공개된 중간 개인 순위는 8계단 떨어져 24위를 기록, [[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 더 유닛/27~28회|파이널]] 진출에 적신호가 켜졌다.
         [[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 더 유닛/23~24회|음원 발매 미션]]에서는 노랑팀에서 'Cherry On Top'을 공연하게 되었다. [[의진(소나무)|의진]]과는 3번째 같은 팀인데 의진은 개인 인터뷰에서 언니가 하면 하더라며, 이번에도 함께하면 더 발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데리고 왔다고 이야기했다. 포인트 안무를 배울 때는 이보림이 계속해서 김화영에게 지적을 받았고, 의진에게 그만 의존하라는 소리도 들었다. 이보림은 개인 인터뷰에서 요즘 화영 선생님 그림자만 봐도 떨린다며, 그래서 화영 선생님한테 칭찬 들을 때까지 열심히 해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마지막 점검에서는 김화영이 이보림에게 다리를 들어 쭉 뻗는 동작을 추가하자고 했고, 본 경연에서도 이를 멋지게 성공시켰다. 현장 투표에서는 팀 내 3위를 기록했지만, 팀은 아쉽게 2위에 그쳤다.
         [[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 더 유닛/25~26회|3차 유닛 발표식]]에서는 [[비(연예인)|비]]가 '누구보다 습득력이 대단한 노력형, 실전에 강한 반전 매력의 소유자'라고 소개한 18위 후보에 올랐으며, 지난 순위 대비 6계단이나 상승해서 [[효선]]을 밀어내고 18위 막차를 타고 파이널 진출에 성공했다. 자신의 순위 발표에 놀라서 주저앉기도 했으며, '제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한 그 절실함이 유닛 메이커분들한테도 통한 거 같아서 정말 감사드리고 열심히 한 번 해보겠습니다.'라고 소감을 이야기했다. 파이널 무대 준비 과정에서는 빨강팀에서 'You&I'를 준비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도 [[의진(소나무)|의진]]과 같은 팀이 되었고, 안무 연습에서도 의진의 리드로 큰 문제없이 연습을 마칠 수 있었다.[* 설 특집 스페셜 방송에서 이 때 [[예빈]]이 이보림의 안무 연습을 도와주는 장면이 나왔다. '팀원들이 다 잘 해서 자신이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고, 예빈은 자신도 처음 데뷔했을 때 파트가 1줄이었는데 하다 보니까 파트가 점점 늘어났다며 팀에서 이보림보다 다리 길고 키 큰 사람은 없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격려해 줬다.]
         [[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 더 유닛/27~28회|파이널]]의 [[킬링파트]]를 위한 안무 오디션 시작 전에는 항상 지적만 해왔던 김화영이 이보림에게 '여기까지 살아남았는데 솔직한 말로 너무 잘해 줬다'고 이야기했다. 안무를 마치고 난 다음에는 김화영이 '이제 [[의진(소나무)|의진]]이 없어도 돼?'라고 물었고 이보림은 '서서히 독립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의진도 '좋아, 얼른 가!'라고 이야기했다. 제작진이 예고 없이 보여준 가족들의 영상에서는 따로 이보림의 가족 영상은 방송에 안 나왔지만, 합숙소를 찾아와 준 가족들과 만나는 장면은 나왔다. 마지막을 앞두고 참가자들에게 남기는 말에서는 '같이 하는 협동심을 너무 많이 배운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본 경연에서는 'You&I'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치긴 했는데 맡은 파트가 적어서 무대에서 모습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남녀 합동곡인 'PRESENT'에서는 엔딩 파트를 맡았다. 최종 유닛 발표식에서는 17위를 기록하면서 데뷔조 합류에는 실패했지만, [[연습생]] 경력도 없고 예술고등학교 출신도 아닌 비 가수 출신 참가자가 그 많은 전현직 걸그룹 멤버 및 연습생 및 솔로 가수들과의 경쟁에서 최종 라운드까지 올라온 것은 분명 대단한 것이다.
  • 이상훈 (1971년생 우완 투수) . . . . 20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90년]]
         |드래프트 순위 = [[1990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1990년]] 고졸우선지명 ([[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1990년]] [[5월 19일]] <br />[[대구시민야구장|대구]] 대 LG 전 (DH2)<br />1이닝 6타자 2피안타 1피홈런 0볼넷 0탈삼진 2실점 1자책점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04년]] [[7월 8일]]<br />[[마산야구장|마산]] 대 두산 전<br />1이닝 3타자 1피안타 0피홈런 0볼넷 0탈삼진 0실점 0자책점
         * [[경북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14년 ~ 2016년)
         '''이상훈'''(李相勳, [[1971년]] [[3월 21일]] ~ )은 [[KBO 리그]]에서 뛰었던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이다.
         1990년 고졸우선지명으로 삼성 라이온즈에 지명되어 주로 중간 계투로 뛰었다. 1999년 7월 31일, 트레이드 마감 기한에 포수 [[진갑용]]을 상대로 현금 4억원과 함께 [[두산 베어스]]로 트레이드 되었다.<ref>{{뉴스 인용|url=https://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4408061|제목=프로야구,진갑용-이상훈+4억 트레이드|날짜=1999-07-31|출판사=연합뉴스}}</ref> 2002년에 70경기 동안 133.2이닝을 소화하며 4승 10패 2세이브 6홀드와 93탈삼진 평균자책점 3.91의 커리어하이를 기록하였지만 2003년 기량 하락으로 방출되었다. 이후 2004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였지만 단 2경기 출장에 그치고 시즌 후 은퇴하였다.
         은퇴 이후 삼성에서 함께 뛰었던 [[신동주 (야구인)|신동주]]와 함께 스크린골프장을 개업하여 티칭 프로로 활동하였고 2014년부터 2016년까지 3년 동안 모교인 경북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로 활동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s://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09&aid=0000078459|제목=전 프로야구 선수 신동주, 스크린 골프장 오픈|날짜=2007-06-28|출판사=OSEN}}</ref> 2017년에는 삼성에서 함께 뛰었던 [[전병호 (야구인)|전병호]]와 함께 피칭 아카데미를 개설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s://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016&aid=0001187340|제목=전병호-이상훈, 피칭 아카데미 개설...'길잡이 되어주고 싶다'|날짜=2017-01-21|출판사=헤럴드경제}}</ref>
         {{토막글|야구인}}
  • 장세용 . . . . 20회 일치
         ||<bgcolor=#1870B9> '''{{{#FFFFFF 경력}}}''' ||<(> 전국대학강사협의회 공동의장[br]열린우리당 중앙위원[br]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정교수 대우)[br]더불어민주당 정책위 부의장[br]대구경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
         [[대한민국]]의 역사학자,사회운동가, 정치인. [[경상북도]] [[구미시]]의 21대 시장이며, 소속 정당은 [[더불어민주당]]이다.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인문한국 교수)를 지냈으며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과 [[대구경북]] 민주화 운동 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구미공단으로 인해 청년 인구가 대거 유입되면서 [[더불어민주당|민주당]] 지지세가 조금씩 강해지기 시작했고 [[남유진|그 전 시장]]의 여러 구설수와, [[구미시]] 항목에도 서술되어 있는 경제 문제, 즉 [[삼성]], [[LG]]공장의 이탈로 인해 지역 경제가 치명타를 맞는 동안 1,000억 원대에 달하는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곤 하던 [[박정희]] 기념 사업을 강행한데 대한 불만이 폭증하였고, 무엇보다 [[바른미래당]] 후보(7.5% 득표)와 [[자유한국당]]의 공천에 반발해서 뛰쳐나온 보수 성향 무소속 후보(9.5% 득표)들이 '''총합 17%'''나 득표하면서 --[[홍준표|모 대표]]의 [[트롤링]]으로-- '''보수 표가 세 갈래로 분열'''되는 역대급 행운과 함께[* 단, 바른미래당과 무소속 후보들의 득표율이 무조건 보수 성향 지지자가 던졌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진보 성향의 지지자나 부동층이라도 자유한국당이 너무 노답으로 나오지만 그렇다고 장세용 시장의 공약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더불어민주당에게 표를 주기 싫어서 투표 자체를 하지 않았거나 사실상 무효표로 던졌을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된다. 물론 진짜로 국민의당이나 바른정당 시절부터 응원한 바른미래당 지지자들이 찍어줬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만...] 젊은 구미 시민들이 바꿔야 된다는 공감대가 함께 형성되면서 결국 민주당 소속으로 구미시장에 당선 된 첫 번째 인물이라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실제로 장세용 시장이 당선된 직후 [[남유진]] 문서는 구미시민의 분노로 점철되어 가고 있다고(...) --돌이켜 보면 남유진이 어떻게 구미에서 내리 3선을 그것도 모두 과반 득표로 당선되었는지 정말 의문이다..--
         새벽까지 이어진 개표 때 [[자유한국당]] 이양호 후보와 초접전 박빙 대결을 펼치며 "구미시장" 검색어가 [[네이버]], [[다음]] 두 곳에서 실시간 검색 1위를 찍는 기염을 토했고, 근접하긴 했으나 단 한 번의 역전을 허용하지 않은 채 40.8%의 득표율로 38.7%의 득표율을 기록한 이양호 후보를 끝내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하지만 ‘[[박정희]] 기념사업’을 전면 재검토하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그렇지는 않다. 박 전 대통령을 존경하는 분들이 계시기에 그 자체로는 인정한다”라고 발언하고 또한 전임 시장인 [[남유진]]이 '박정희 타운'을 만드는데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붇고도 내리 3선을 그것도 모두 과반 득표에 성공해서 당선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전임 [[구미시]] 시장인 [[남유진]] 문서에는 남유진에 대해서 대부분 구미 시민들이 악평을 하는 것으로 묘사돼 있지만 엄연히 남유진은 구미에서 '''내리 3선을 과반 득표로 모두 당선'''된 인물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4~6회 지선 광역비례에서 한나라당-새누리당 표가 76.5%, 48.7%, 71.5%로, 이 표가 남유진 전 시장표(75.9%, 53.1%, 52.6%)로 이어졌다.(단, 6회는 새누리당 표가 분열되었다.) 그래서 3선. 그리고, 2016년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50.4%로 하락했고, 2018년 지선에서는 자유한국당 41.3%로 더불어민주당 43.3%에 졌고, 이에따라 시장직도 자유한국당이 더불어민주당에 넘겨주게 되었다. 만약, 1:1로 대결하였더라면 기초의회 비례득표를 기준으로 계산하였을 때, 진보vs보수 구도에서는 48.2%vs51.8%로 보수측이 승, 반자유한국당vs자유한국당(+대한애국당) 구도였다면 57.5%vs47.5%로 반자유한국당측이 승리하였을 것이다. 바른미래당 지지층이 어느쪽을 선택할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진보(더불어민주당+정의당)가 48.2%로, 보수(자유한국당+대한애국당, 42.5%)보다 좀 더 유리했을 것이다.] 여전히 구미시에서 [[박정희]]의 존재감과 위치란 [[목포시]]에서의 [[김대중]] 이상의 위치이고 또한 '[[박정희]] 기념사업' 축소에 대한 보수파들의 반발도 상당할 것이기 때문에 과연 '[[박정희]] 기념사업'들을 어디까지 축소할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위에도 언급하였지만 그 당시에는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강하였기 때문이고 현재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헌정 사상 최악의 국정농단 부패 스캔들 사태]]와 마약, 사기 등 박근혜와 박지만, 박근령 등 박정희와 육영수의 자식들이 박정희 사망 이후에 저질러온 악행으로 인해 그 신화는 치명상을 입었다.[* 현재 박근혜가 정치적으로 파멸해버린 상황에서 박정희를 추종하는 친박 등 한국내 보수 우익 세력들이 박근혜의 친동생들이자 나머지 박정희와 육영수 부부의 자녀들인 박지만이나 박근령을 새로운 친박 세력의 지도자로 정계로 영입하거나 세우지 못 하는 것도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박근령과 박지만 모두 사기, 마약 등 범죄 전과를 가진 전과자의 신분에다 과거에 행실이나 성품 등 여러 부분에서 정치를 하기에는 부적합한 인물들로 박근혜가 몰락하기 이전부터 드러났기 때문에 친박계로서도 이들을 정계로 불러들이는 것은 오히려 정치적 자살 행위에 가깝다. 그렇다고 나머지 박정희-육영수 일가의 다른 일가족이나 친척들은 언제 오늘 내일 할지 모를 정도로 나이가 너무 많거나 인지도가 워낙 낮아서 박근령이나 박지만보다 내세우기 더 힘든 실정이다. 현재 대한애국당이나 신 새누리당, 박사모, 어버이연합 등 주류 친박 단체들과 친박 성향의 극우 원외 정당들이 박지만과 박근령을 기피, 거부하며 박근혜의 석방과 사면을 요구하고, 정치인으로서의 생명이 끝장나버린 박근혜와 70년대 총탄에 암살당한 그들의 부모인 박정희와 육영수 부부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특정 정당이 6선이나 한 지역이었지만 민주당 소속의 장세용 시장이 당선되며 그 신화도 마침표를 찍었다고 볼 수 있다. 후술되어 있지만 선거 구조가 민주당계로 유리하게 진행되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민주당계의 시의원이 전원 당선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박정희]] 신화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 현실적으로 1000억 넘게 들어가는 박정희 예산은 구미시에 엄청난 부담이 되기 때문에 줄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구미시의 18년 기준 1년 예산은 1조다. 비록 1000억이 1년만에 집행된건 아니지만 적어도 1년에 수백억씩 사용되기는 했고 실제 구미시에 상당한 부담이 되고 있다.]
         시장에 당선은 성공했으나 도지사, 국회의원 2명, 시의회의장 · 부의장 · 상임위원장 모두 자한당 소속으로 홀로 더민주당인 장시장으로 대립시 시정에 많은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자치단체장-기초의회의장 소속이 [[수성구|어디]]하고 대비된다.-- [[http://www.dk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50307|야당 의원에게 포위된 장세용 구미시장 고민 깊어지나]] [[http://www.h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62459|구미시의회, 8대 원구성 한국당 일당체제로 완료]]
         그나마 시의회의장 · 부의장의 지역구가 더민주 접전, 강세인 지역[* 시의회의장 선거구는 마 선거구(인동동, 진미동)로, 여기서 장세용 시장은 여기서 49.84%의 득표율을 올렸다. 부의장 선거구는 가 선거구(선주원남동, 도량동)로, 여기서는 38.96%로, 이양호 후보(39.80%)와 0.84%p로 접전을 벌였다. 광역의회 비례 득표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이 각각 47.47%, 39.74%로, 자유한국당과 각각 +15.25%p, -0.26%p의 격차를 보였다.]이라 이론상으로는 주민소환제로 날릴 순(...) 있다. 둘 중 한 명이라도 의원직을 상실하면 자유한국당이 절반, 두 명 모두 상실시 자유한국당 과반이 무너진다. 게다가 도지사가 새마을운동 사업 축소에 반대하는 의견을 밝혀, 이 문제로 한동안 대립할 것으로 보인다. --국회의원은 [[21대 총선|2020년]]을 기대해보자--
         9월 11일, 자유한국당 지도부가 구미를 방문하였다. 하지만, 장 시장은 10일부터 4박 5일로 자매 결연 20주년 행사를 위해 중국 창사시에 출장갔기에 만나는 일은 없었다.
         9월 20일, [[이철우(1955)|이철우]] 경상북도 도지사가 새마을운동 테마파크를 경상북도에서 직접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http://www.ksmnews.co.kr/default/index_view_page.php?idx=220851&part_idx=274#09HT|“경북, 새마을테마파크 직접 운영”]]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425991|879억 애물단지 ‘새마을공원’ 운영비, 결국 경북도가 부담]] 이로써 연간 20~30억원의 운영비 부담은 덜었지만 역사자료관 명칭 변경에서 보수측은 박정희 지우기라면서 반발하고 있다. ~~[[남유진|지난 시장]]이 저러다가 이번 지선에서 뒤집혔는데, 국회의원도 [[더불어민주당|파랗게]] 뒤집고 싶을 듯, 이 동네에서 [[정의당|노란색]]이나 [[바른미래당|민트색]]은 안 뽑힐 듯 하니~~[* 구미 갑은 원도심(원평, 도량, 형곡)vs공단+신시가지(공단/비산+선주원남/오태 등) 싸움이고, 구미을은 읍면vs동지역+공단(인동/진미/양포/산동)의 싸움인데(갑을 모두 앞쪽이 보수 우세 뒤쪽이 진보 우세), 구미 갑은 양쪽 인구 수는 비슷하지만, 자유한국당vs더불어민주당이 아니라 범보수vs범진보로 본다면, 선주원남동, 비산동, 상모사곡동이 경합으로 넘어간다. 구미을은 동지역+산동면이 읍면 지역 인구의 1.5배 정도 되지만, 범진보가 8~22%p 우세를 보이는 동지역+공단과 달리 읍면지역은 범보수가 19~'''66'''%p 우세를 보여 읍면지역이 투표율이 더 높은 것과 함께 구미을 선거에서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 TK에서, 그것도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비록 기초자치단체장이라고 해도 '''민주당 당적으로 한 번만에 당선된 기적을 일으켰다.''' TK 지역 타파의 아이콘인 [[김부겸]] 장관도 두 번의 낙선 이후 세 번째 도전만에 대구에 민주당 당적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주 놀랄 만할 일이다.[* 물론 상대가 경기도지사에서 도지삽니다 발언을 쏟아낸 김문수였고, 당시 새누리당이 대구를 자기들의 표밭이라고 대충신경쓴 덕분이기도 하지만.] 물론 자유한국당의 공천에 반발해서 무소속으로 뛰쳐나온 보수 성향 김봉재 후보가 9.5% 정도, 범야권인 [[바른미래당]] 유능종 후보가 또다시 7.5%를 들고 나르면서 (비록 TK긴 해도) 1여3야라는 역대급 꿀조건이 형성되었다는 것도 고려하긴 해야 한다. 참고로 '''[[김해영|본인도 당선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 황병일(1960) . . . . 20회 일치
          * [[야구 관련 인물(KBO)]], [[LG 트윈스/선수단]]
         || '''프로입단''' || 1983년 1차 지명 ||
         1983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 때부터 타격 재능이 뛰어나고 정평났으나,[* 한국 야구 사상 기록된 것으로는 최초의 [[사이클링 히트]] 기록 보유자이다. 1980년 대학야구 춘계연맹전 원광대전] 워낙 두터웠던 당시 삼성 선수진 때문에 대개 백업으로 출전했다. 1986년 [[빙그레 이글스]]에 전력보강선수로 이적한 후 1990년에 은퇴하고 빙그레의 타격코치를 맡으며 일찌감치 지도자로 전향했다.
         프로필상 포지션은 외야수였지만 내야수로도 활약했었다. ~~나름대로 전천후 선수?~~ 눈이 나빠서 야간 경기에는 거의 나서지 못했다고 한다.--[[니우라 히사오|김일융]]과 극과 극--
         [[1988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최종 6차전의 마지막 타자로 타석에 나와, 해태 투수 [[문희수]]에게 삼진을 당하며 해태의 3년 연속 우승을 확정지어주는 제물이 되었다. ~~허용타자~~
         은퇴하자마자 빙그레의 타격코치로 부임해 한화 이글스로 바뀐 후에도 2002년까지 12년 간 [[한화 이글스]]에서 타격코치로 재임했으며,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도 경험했다. 이 때 [[장종훈]], [[송지만]], [[이영우]], [[김태균(1982)|김태균]], [[이범호]] 등을 발굴하거나 성장시켜 2000년대 초중반까지 삼성의 [[박흥식(야구)|박흥식]] 코치, 현대의 [[김용달]] 코치, 두산의 [[송재박]] 코치와 함께 [[대한민국]] 최고의 타격코치 중 하나로 손꼽혔다. 이후 LG, SK 타격코치를 거쳤는데 SK 시절에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선수 시절에는 그저 그런 선수였지만, 과거 아마추어 시절에 뛰어난 타격 재능으로 유명했던 것만큼 코치로서는 거포형 타자를 발굴하여 그 기량을 발전시키는 데 뛰어났다는 것이 중평. 코치로서 권위를 내세워 일방적으로 선수를 지도하기보다는 선수들과 직접 소통하며 선수 스스로가 문제점을 찾아 해결해 가도록 이끌어 가는 능력이 탁월해, 팀을 옮겨도 그를 따르는 선수들이 많다. [[송지만]]은 현대에 이적한 후로도 슬럼프에 빠졌을 때 황병일에게 조언을 구했고, 자신의 롤 모델로 [[장종훈]]과 황병일을 꼽았다. [[이범호]]도 한화에 있었을 때, 황병일이 한화를 떠난 후에 슬럼프에 빠지면 황병일을 제일 처음 찾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2010년에 수석코치가 되었음에도 KIA 타자들은 타격에 대해 타격코치가 아닌 황병일을 찾았다고 한다. ~~[[최경환(야구)|하긴 당시 KIA 1군 타격코치를 생각해보면 그럴 만하다]]~~
         2008년부터 SK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조범현]] 감독을 따라 KIA에 타격코치로 부임해 2009년 우승의 공로로[* 무엇보다도 [[김상현(1980)|김상현]]의 포텐을 터뜨리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2010 시즌부터는 수석코치로 승격되었다. 2010 시즌 20홈런 타자 5명을 배출하는 게 목표라고 공언했지만, 오히려 KIA 타선의 성적이 하락하자 그에 대한 비난이 증가했다. ~~이 때 황붕어라는 별명도 생겼다~~ 수석코치가 된 후로는 [[조범현]] 감독을 보좌하는데 전념했다지만, 타격 쪽에 아예 손대지 않은 것은 아니다. 특히 2010 시즌에는 경험이 부족한 [[최경환(야구)|최경환]]이 타격코치를 맡아 실질적으로는 황병일이 타격코치도 겸했다고 보는 쪽이 많다.[* [[삼성 라이온즈]]에서도 [[김한수]] 타격코치의 경험이 부족해 [[김성래]]가 수석코치로 승격된 첫 해에는 타격을 겸임한 바 있다.]
         [[2012년]] [[11월 4일]] [[두산 베어스]]의 수석코치로 선임되었다. 애초에 삼성의 마무리훈련 명단에서 제외된 걸 보면 보다 전에 팀에서 재계약을 포기했다든가, 스스로 사의를 표하고 나온 것으로 보인다. [[김진욱(야구)|김진욱]] 감독에 대한 [[두산 베어스]] 팬들의 평가가 안 좋으면서, 상대적으로 황병일에 대한 평가는 좋은 편. 한 때는 [[김진욱(야구)|김진욱]]을 경질하고 황병일을 감독 대행으로 앉히자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후반기 두산의 성적이 좋아지고 한국시리즈에도 진출하게 되어 그런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2013 시즌이 끝나고, [[송재박]] 타격코치가 수석코치로 승격되고 [[송일수]] 2군 감독이 [[김진욱(야구)|김진욱]]의 후임으로 신임 감독이 되자 공석이 된 [[두산 베어스/2군|2군]] 감독을 맡았다.
         10월 12일 [[조범현]] 감독의 재계약이 불발되면서 후임 감독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되었으나, [[김진욱(야구)|김진욱]] 감독의 부임 이후 수석코치에서 사임했다. 후임 수석코치는 [[이광길]].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분류:야구감독]] [[분류:포항시 출신 인물]] [[분류:1960년 출생]] [[분류:타자]] [[분류:외야수]] [[분류:우투우타]]
  • 황치열 . . . . 20회 일치
         | 학력 = [[한국폴리텍6대학]] 구미캠퍼스 기계공학과 전문학사
         * 2009년 스물 여덟 살부터 생계를 위해 보컬 트레이너로 일을 시작함.
         * 2010년 남성 듀오 가수 '한국'과 함께 《[http://www.melon.com/artist/song.htm?artistId=471643 웬즈데이(Wednesday]》라는 프로젝트 팀을 구성하여 잠시 활동하였고, [[박경림]]의 라디오 방송 [[별이 빛나는 밤에]]'에 수요일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함.
         * 2015년 3월 5일 케이블 방송 [[Mnet]]의 음악 예능 프로그램 [[너의 목소리가 보여]] 2회에 자칭 '[[임재범]]이 인정한 보컬트레이너, 황치열'로 참가, '[[고해]]'를 불러 개성 강한 허스키한 보이스로 방청객과 시청자들을 매료시켜 큰 반향을 일으킴. 이후 일반 참가자에서 가수 '황치열'로 패널로서 동일 프로그램에 다수 출연함.
         * 2015년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 가족특집에서 [[인순이]]의 '아버지'를 불러 첫 우승을 차지함. 이후 각종 라디오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2015년 슈퍼루키특집'에서 [[신승훈]]의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을 부르며 공식적인 '2015년 슈퍼루키' 타이틀과 함께 우승을 거머 쥠.
         * 2015년 명실상부한 대세남으로 매력적인 허스키 보이스와 남성미 넘치는 춤, 구수한 경상도 억양을 담은 사투리 입담으로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종횡무진 출연 중이며, 2015년 9월 KBS [[위기탈출 넘버원]]의 인턴 MC로도 자리매김 함. 그 외 각종 음악 행사에서 다양한 모습을 선보이며 가수로써도 인지도를 높이며 활약 중임.
         * 2016년 한국의 대세를 넘어서 중국 진출을 확정, [[후난위성텔레비전]] ([https://zh.wikipedia.org/wiki/%E6%B9%96%E5%8D%97%E5%8D%AB%E8%A7%86 湖南卫视])의 '나는 가수다' 시즌4 《[https://zh.wikipedia.org/wiki/%E6%88%91%E6%98%AF%E6%AD%8C%E6%89%8B#.E6.88.91.E6.98.AF.E6.AD.8C.E6.89.8B.E7.AC.AC.E5.9B.9B.E5.AD.A3 我是歌手第四季]》 출연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중국 활동을 시작함
         * 2016년 1월 15일 중국 '나는 가수다' 시즌4 첫방송에서 한국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 OST로 중국에 알려진 [[이승철]]의 '그 사람'을 한국어로 부르며 8명의 가수 중 '''2위'''를 차지, 처음 가수 황치열을 선보인 이 무대를 통해 웨이보 팔러워 수가 50만에 육박. 황쯔리에 신드롬을 일으키며 중국 대륙의 가장 핫한 블루칩으로 부상함.
         * 중국에 이름을 알린 후 [[후난위성텔레비전]] [https://zh.wikipedia.org/wiki/%E5%A4%A9%E5%A4%A9%E5%90%91%E4%B8%8A 天天向上]을 통해 중국 첫예능에 도전, 한국의 [[김치]]를 소개하고 직접 만든 김치를 판매하는 모습을 선보였다.
         * 2017년 5월 14일, 5월 21일 문화 방송 [[문화방송|MBC]]의 음악 예능 프로그램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111회 ~ 112회에 '짐승남 강백호'로 참가, 1라운드부터 2라운드, 3라운드까지 [[정혜성]], [[Y2K (음악 그룹)|고재근]], [[이예준 (가수)|이예준]] 등을 상대로 이김. 56대 복면가왕 선발전까지 진출하였으나 '노래 9단 흥부자댁'([[소향]])에게 석패.
         * [[한국폴리텍6대학]] 구미캠퍼스 기계공학과 전문학사
         * 2015년 11월 11일 -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 Part 4 (박준하/에메랄드 캐슬 편) - 〈너를 처음 만난 그때〉 with [[백아연]]
         * 2016년 6월 03일 한국 서울 롯데면세점 팬미팅
         === 가요 프로그램 1위 ===
         * 2016년 3월24일 주상하이한국문화원의 한중문화홍보대사로 임명<ref>[http://s.kocenter.cn/www/public.jsp?_page.id=Page0144b47dcdfe0001&news.id=News0153a8738793004f 주상하이한국문화원 소식]</ref>
         [[분류:198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2006년 데뷔]][[분류:구미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한국어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발라드 음악가]][[분류:KBS 뮤직뱅크 1위 수상자]][[분류:너의 목소리가 보여 참가자]]
  • 김민수 (1991년) . . . . 19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4년]]
         |드래프트 순위 = [[2014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4년]] 2차 2라운드([[한화 이글스]])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4년]] [[3월 30일]]<br>[[사직야구장|사직]] 대 [[롯데 자이언츠|롯데]]전
         * [[상무 야구단]] (2015년 ~ 2016년)
         {{메달 스포츠|남자 [[야구]]}}
         {{은메달|[[2013년 동아시아 경기 대회|2013 톈진]]|[[야구]]}}
         '''김민수'''(金珉秀<ref>한국야구위원회, 2014 가이드북</ref>, [[1991년]] [[3월 2일]] ~ )는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포수]]이다.
         [[영남대학교]]를 졸업하고 [[2014년]] [[한화 이글스]]의 2차 2라운드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시즌 후 [[상무 야구단]]에 지원하여 합격하였다.
         ==[[상무 야구단]] 시절==
         [[상무 야구단]] 입대를 앞두고 [[2014년]] [[12월 5일]] [[권혁]]이 FA를 통해 이적하며 그가 보상선수로 지명되어 이적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311&article_id=0000415691 삼성, FA 권혁 보상선수로 포수 김민수 선택] - 엑스포츠뉴스</ref> [[상무 야구단]] 전역 후 합류하였다.
         {{토막글|야구인}}
         [[분류:199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포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한화 이글스 선수]]
         [[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분류:대구옥산초등학교 동문]][[분류:경복중학교 동문]][[분류:대구상원고등학교 동문]][[분류:영남대학교 동문]][[분류:상무 야구단 선수]]
  • 영덕군 . . . . 19회 일치
         [include(틀:프로젝트 문서,프로젝트=나무위키 대경권 프로젝트)]
         ||<bgcolor=#F781F3> {{{#FFFFFF '''군수'''}}} ||<bgcolor=#F8E0F7> [[이희진(정치인)|이희진]]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br]재선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1><|3><bgcolor=#F781F3> {{{#FFFFFF '''군의회'''}}} ||<:><bgcolor=#C9151E>'''[[자유한국당|{{{#FFFFFF 자유한국당}}}]]''' {{{#FFFFFF 5석}}}
         ||<bgcolor=#F781F3> {{{#FFFFFF '''도의원'''}}} ||<bgcolor=#F8E0F7> 조주홍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 ||
         ||<bgcolor=#F781F3> {{{#FFFFFF '''국회의원'''}}} ||<bgcolor=#F8E0F7> [[영양군·영덕군·봉화군·울진군]]:[br][[강석호]]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br]3선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
         그런데 대게 생산지로 알려진 주변지역인 [[울진군]]과는 대게 문제로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한국산 대게의 원조가 영덕이냐, 울진이냐를 놓고 두 지역간의 갈등이 빚어지기도 하였으며 지금도 두 지역 사이에서는 대게를 놓고 한 판 경쟁을 벌이는 수준. 정치적으로도 소지역주의로 약간 갈등 소지가 있으니 [[울진군]] 항목 참조.
         || '''정당''' ||<:><bgcolor=#1870B9>{{{#FFFFFF 더불어민주당}}}||<:><bgcolor=#C9151E>{{{#FFFFFF '''자유한국당'''}}}||<:><bgcolor=#046240>{{{#FFFFFF 국민의당}}}||<:><bgcolor=#00B1EB>바른정당||<:><bgcolor=#FFCC00>정의당||<:>격차||<:>투표율||
         || {{{#C9151E '''영양·영덕[br]·봉화·울진'''[* 지역구 국회의원 : [[강석호]]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3선)]}}} ||<:>16.72%||<:><bgcolor=#C9151E>{{{#FFFFFF 59.73%}}}||<:>13.29%||<:>5.65%||<:>3.33%||<:>{{{#808080 ▼43.01}}}||<:> 73.48 ||
         ||<:><tablealign=center><bgcolor=#1870B9><-6> {{{#FFFFFF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bgcolor=#C9151E><-5> {{{#FFFFFF '''새누리당→자유한국당'''}}} ||
         || [[황병우]]/3선[br][[민주정의당]] || [[김찬우]]/재선[br][[민주자유당]] || 김찬우/3선 [br] 신한국당 || 김찬우/4선 [br] 한나라당 || [[김광원]]/3선 [br] 한나라당 || [[강석호]]/초선 [br] 한나라당 || 강석호/재선 [br] 새누리당 || 강석호/3선 [br] 새누리당 ||
         '''TK는 물론 대한민국에서 [[군위군]], [[의성군]]과 쌍벽을 이루는 보수성향이 강한, 자유한국당의 텃밭 중의 텃밭'''
         보수 성향 정당의 지지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경상북도에서도 보수 정당 지지율이 유독 압도적으로 높은, '''전국에서 [[자유한국당]] (구 새누리당) 지지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 2007년 대선 당시에는 [[이명박]] 후보가 여기서 '''84%'''를 득표해서 앞섰고, 또다른 보수 후보인 [[이회창]] 후보의 득표율을 합하면 표가 무려 '''90%'''에 달했다. 2012년 말의 18대 대선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무려 '''87.11%'''를 득표해 '''대구경북권 2위이자 전국에서 2위'''[* 근소한 차이로 [[군위군]]이 1위.]를 기록했다. 이는 경상북도에서의 박근혜 후보 평균 득표율(80.82%)보다 무려 6.29%나 높고, 경북에서 가장 낮은 [[영주시]]와는 9.14%나 차이가 날 정도로 매우 압도적인 수치이다. 이윽고 열린 2014년 제 6회 지방선거에서도 [[김관용]] 새누리 경북도지사 후보의 득표율이 의성에 이은 2위를 차지했고[* 의성도 경북 평균보다 6~7% 높은, 전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보수 정당 강세지역이다.], 가장 최근에 열린 [[20대 총선]]에서도 '''전국에서 유일하게 새누리당 득표율이 70%를 넘겨(70.83%)''' 경북 평균(58.11%)보다 무려 12.72%나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 평균(33.50%)의 무려 '''2배가 넘는 수치를 기록한 유일한 지역'''이었다.
          * [[류중일]] : 전 [[삼성 라이온즈]] 감독, 전 야구선수. 강구면 출신.
  • 영주시 . . . . 19회 일치
         [include(틀:프로젝트 문서,프로젝트=나무위키 대경권 프로젝트)]
         ||<-2><bgcolor=#04B486> {{{#FFFFFF '''시장'''}}} ||<bgcolor=#EFFBEF> [[장욱현]]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br]재선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2><|3><bgcolor=#04B486> {{{#FFFFFF '''시의회'''}}} ||<:><bgcolor=#C9151E>'''[[자유한국당|{{{#FFFFFF 자유한국당}}}]]''' {{{#FFFFFF 7석}}} ||
         ||<bgcolor=#04B486> {{{#FFFFFF '''2'''}}} ||<bgcolor=#EFFBEF> 임무석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 ||
         ||<-2><bgcolor=#04B486> {{{#FFFFFF '''국회의원'''}}} [br] [[영주시·문경시·예천군|{{{#FFFFFF {{{-1 (영주시·문경시·예천군)}}}}}}]] ||<bgcolor=#EFFBEF> [[최교일]]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br]초선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
         || '''정당''' ||<:><bgcolor=#1870B9>{{{#FFFFFF 더불어민주당}}}||<:><bgcolor=#C9151E>{{{#FFFFFF '''자유한국당'''}}}||<:><bgcolor=#046240>{{{#FFFFFF 국민의당}}}||<:><bgcolor=#00B1EB>바른정당||<:><bgcolor=#FFCC00>정의당||<:>격차||<:>투표율||
         || {{{#C9151E '''영주·문경[br]·예천'''[* 지역구 국회의원 : [[최교일]]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초선)]}}} ||<:>17.61%||<:><bgcolor=#C9151E>{{{#FFFFFF 56.82%}}}||<:>14.05%||<:>6.98%||<:>3.59%||<:>{{{#808080 ▼39.21}}}||<:> 75.68 ||
         ||<:><tablealign=center><bgcolor=#1870B9><-6> {{{#FFFFFF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bgcolor=#C9151E><-5> {{{#FFFFFF '''새누리당→자유한국당'''}}} ||
         19대 대선에서는 ~~당연히~~ 홍준표가 압도적으로 이겼으나, 영주시청과 [[영주역]]이 인근에 있고 한국폴리텍 영주캠이 있는 시내 지역인 가흥 1동에서는 문재인 후보가 26.77%를 기록했고, 시내 지역에서는 그리고, 재외투표에서는 문재인이 압도적으로 승리. 여기다가 이 지역은 택지지구 개발로 인해, 김천시처럼 도시-농촌 간 지지도 격차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 작은 지방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플라모델]] 매니아가 많았다. 영주시 거주 플라모델 동호인들 자체적으로 전시회를 열기도 했고 잡지 [[취미가]]의 정기적인 취재가 있기도 했다. ~~한국의 [[시즈오카]]~~ 하지만 2010년대로 접어든 지금은 [[플래툰]]을 갖다 놓는 서점도 없다.
          * 김좌기 : 前 [[한국기원]] [[바둑]]기사
          * [[이성은]] : 전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 [[최효빈]] : 프로게이머.
  • 이철우(1955) . . . . 19회 일치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C8242D><-5><bgcolor=#C8242D><:>[[자유한국당|[[파일:libertykorealogo.jpg|width=30px]]]] {{{#FFFFFF '''[[자유한국당|{{{#FFFFFF 자유한국당}}}]] 사무총장'''}}}||
         ||<height=40><bgcolor=#C9151E> {{{#FFFFFF ''' 소속 ''' }}} ||<(><bgcolor=#FCFEFE>[[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 ||
         ||<height=40><bgcolor=#C9151E> {{{#FFFFFF ''' 경력 ''' }}} ||<(> 화령중·고등학교 교사[br][[국가정보원]] 국장[br][[경상북도]] 정무부지사[br]새누리당 원내대변인[br]제18~20대 국회의원[br][[국회]] [[정보위원회]] 위원장[br][[자유한국당]] [[사무총장]][br][[자유한국당]] 최고위원 ||
         '''자유한국당의 단 둘뿐인 광역단체장'''
         [[자유한국당]] 소속이며 [[김천시(선거구)|김천시]] 지역구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현재는 민선 7기 제32대 [[경상북도지사]]를 지내고 있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화령중학교 교사 때의 제자이던 [[임이자]]도 해당 선거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제|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2016년]] 6월 13일 [[대한민국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간사이자 자유한국당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17년 4월 1일 [[자유한국당]] [[사무총장]]에 임명됐고, 제19대 대통령선거 자유한국당 선거대책위원회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대선 이튿날인 5월 10일 사무총장 직을 스스로 사퇴했다.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한 유일한 당직자였다. 이후 2017년 7월 3일 전당대회에 출마하여 최다득표로 자유한국당 최고위원에 당선됐다.
         2018년 1월 31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상북도지사]] 경선 전에 의원직을 사퇴하겠다는 계획을 돌연 철회했는데, 당에서 국회의원직 사퇴를 강력히 만류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국회의원 사퇴로 인해 다른 광역단체장 출마를 희망하는 국회의원들의 줄사퇴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고, 경북지사 선거 경쟁 후보자들이 국회의원 사퇴에 대해서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2020년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자유한국당 김천당협위원장을 사퇴했다. 사실상 배수진을 친 셈이다. 4월 9일 경선에서 32%로 1위를 했다. 자유한국당의 경선은 결선투표를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경북도지사 후보로 확정됐다. 당원 투표에서는 김광림 후보에 밀렸지만 여론조사에서 우위를 점하면서 1위가 됐다.
         2018년 8월 29일, 뜬금 없이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 찾아 왔다. 회의가 열린 구미의 경제에서 초당적 협력에 관해서 언급하였다. --지역예산 배정문제를 언급한 것을 보아, 자유한국당 소속이지만 지역 국회의원이 못 미더웠나보다.-- ~~이점은 당연해 보인다 현재 정부 예산 편성안을 쥐고 있는 대통령이 어느 당인지 생각하면~~
         [[2017년]] [[6월 20일]] 제주도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전당대회 타운홀미팅에서 문재인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며 "얼마 못 갈 것"이라는 발언[* 당 최고위원에 당선되기 위해 지지층 결집용으로 격한 말을 던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으로 파문이 일었다. 내년 지선과 총선에서 당이 승리를 결의한 것과 달리, 문재인의 현재 하는 행동이 박근혜처럼 탄핵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면서 비난을 한 것. 이에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측에서는 야당의 막말이 점점 도를 지나치고 있다며 정부 흔들기를 그만하라고 비판했다. [[http://m.news.naver.com/rankingRead.nhn?oid=001&aid=0009348444&sid1=100&date=20170620&ntype=RANKING|연합뉴스]] 본인은 이 사태를 단순히 문재인이 경각심을 가지기 위한 것으로 해명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2830754|한국당 이철우 '문 대통령 탄핵 암시 발언' 논란에 "경각심 차원의 말"]]
         || 2018 ||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상북도지사) || [[자유한국당]] || '''732,785 (52.11%)''' || '''당선 (1위)''' || '''초선''' ||
  • 김상조 . . . . 18회 일치
         || '''약력''' ||<(> [[한성대학교]] 교수[br][[참여연대]] 재벌개혁감시단장[br]재정경제원 금융산업발전심의회 위원[br]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초빙연구원[br][[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br]경제개혁연대 소장[br]한국금융연구센터 소장 ||
         한국의 경제학자이자 [[문재인 정부]] 초대 공정거래위원장이다. 한국내 대표적인 좌파 경제학자로 꼽으며, [[삼성그룹]]의 지배구조를 비판해 "삼성 저격수", "삼성 저승사자"라는 별명이 있다.
         2010년 한국경제에 영향력을 끼친 인물 3위에 꼽히기도 [[http://www.economyinsight.co.kr/news/articleView.html?idxno=66|했다]].[* 1등은 당연히 [[이건희]]였다. 2위는 당시 기재부장관 윤중현. '없다'를 포함시키면 4위이다.]
         공정거래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 내정되며 대중적인 인지도가 급속도로 올라갔지만[* [[최순실 국정조사]]에서 참고인으로 나와 재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최순실 특검]]에게도 도움을 주는 모습을 보여 대중에게 조금씩 그 이름을 인식시켰다.] 이력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듯 아주 오랫동안 재벌개혁 시민운동을 계속한 인물로 한국 재벌과 관련해서 학문적인 관심이 있어 이런저런 자료를 찾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이름을 접할 수 있었다. TV 토론에도 종종 얼굴을 비췄고 언론 기고 또한 활발했으며 독자적인 저술은 한 권밖에[* 제목은 '종횡무진 한국경제'. 책을 읽어보면 통계적 근거와 [[경제학]]적 통찰을 근거로 한국 경제 전반에 대해 담백하게 논하는 대중 서적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진보인사라고 하면 거리를 둘 법한 주장도 많이 보인다.] 없는 듯하지만 [[알라딘]]에서 [[http://www.aladin.co.kr/search/wsearchresult.aspx?SearchTarget=All&SearchWord=%b1%e8%bb%f3%c1%b6&x=0&y=0&|김상조]]를 검색해 보면 확인할 수 있듯 한국 경제, 재벌과 관련해서 다양한 저술에 저자로 참여해왔다. 공정위 위원장으로 내정되기 이전 소장으로 적을 두고 있던 경제개혁연대에서 수많은 저작물을 쏟아낸 것은 물론이다.
         김상조 후보자의 청문회에 참여했던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당에서 시킨 일이라면서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797432.html?_ns=t0|김상조 후보자에 대한 사과를 표했다.]][* 그러나 이 기사 내용은 다분히 정치 공세적인 면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한다. 원래 상임위장에서는 막말과 고성이 오가더라도 마칠 때에는 의례적으로 서로 악수하며 덕담을 나누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 청문회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을, 자극적인 기사로 내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6월 6일 기준, 7일로 예정되어 있는 김상조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 보고서 채택이 진통을 겪는 중이다. 자유한국당, 바른정당은 반대, 국민의당은 의원총회 후 당론 결정 이라고..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493128&ref=A|관련기사]] 결국 [[http://www.fnnews.com/news/201706121657206165|청문보고서 채택이 무산되면서]] [[자유한국당]]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6월 12일 결국 자유한국당의 반대로 보고서 채택이 무산되었지만, 청와대에서 임명을 진행하여 문재인 정부 첫 공정거래위원장이 된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브피링에서 길어진 국정 공백을 메우기 위해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으며, 각종 여론조사 등을 통해 이미 국민의 청문회를 통과했다는 발언을 하며, 공정거래의원장으로 임명했다. 이에 원래부터 찬성 입장이었던 정의당을 제외한 야 3당인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이 모두 [[http://www.joseilbo.com/news/htmls/2017/06/20170613327266.html|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자유한국당은 "앞으로 문재인 대통령에 맞서 투쟁해나가겠다"며 맹렬하게 비난하였으며, 바른정당은 "오만한 문 대통령의 브레이크 없는 질주"라 비판하였다. 국민의당은 당초 김상조 후보자의 임명 자체에는 반대가 없었던 터라, "국회 청문회 보고서 통과없이 임명되는 것에는 유감스럽지만, 이는 여당의 고집과 야당의 아집이 빗어낸 것이다"며 공동책임론의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한 여론의 반응은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01&aid=0009334195&date=20170613&type=1&rankingSectionId=100&rankingSeq=9|대체적으로 야당에 대해 비판적이다]]. 특히 자유한국당은 [[http://www.enews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73741|문 대통령의 연설 중 조는 모습]]이나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18&aid=0003847763&date=20170612&type=1&rankingSectionId=100&rankingSeq=24|원내대표 회담에 불참]]하는 등 애초에 협치를 바라지 않는 듯한 행동을 지속적으로 보이면서 애초에 협치를 바란 것이 맞느냐는 지적이 많다.
         국무총리 청문회에 이은, 사실상 2번째로 청문회를 겪은 인물이기 때문에 야당의 집중공세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의혹들이 제기되면서, 마치 김상조가 '논란이 무척 많은' 자질이 의심되는 사람으로 비춰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김상조 임명을 강행하고 이뤄진 한국갤럽 조사에서 문재인 정부 지지율이 83%를 기록했을 정도로 국민여론은 오히려 김상조 임명을 환영하는 편이었다.
         김상조 아내도 부정 취업 의혹을 받고 있다. 아내 조 씨는 서울의 한 공업고등학교의 계약직 영어회화 전문 강사로 취직하여 5년 정도를 재직하였다.[* 참고로 영어회화 전문 강사는 임용고시를 통하여 채용되는 것이 아니라 계약직으로, 연봉은 현재 시점으로 약 2500만 원 수준이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311261849211&code=115|#]]] 자유한국당 측의 주장으로는 현재 취직 조건이 토익 901점인데 아내의 점수는 토익 900점이었으며, 채용 응시자는 조 씨 1명뿐이었고, 조 씨가 합격이 확정된 이후에야 지원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동시에 재임용 과정에서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30/2017053090046.html|관련기사]]
  • 박근영 (야구인) . . . . 18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97년]]
         |드래프트 순위 = [[1996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1996년]] 2차 18순위 ([[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1997년]]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1997년]]
         '''박근영'''(朴根永<ref>한국야구위원회, 2014 가이드북</ref>, [[1973년]] [[8월 2일]] ~ )은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포수]]이자, 현 [[KBO 리그]] 소속 [[심판 (스포츠)|심판]]이다.
         [[1996년]]에 [[1996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신인 드래프트]]에서 [[삼성 라이온즈]]의 2차 18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지만 고작 1군 3경기에 그쳐 거의 2군에서만 머무르다가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이후 [[1998년]]부터 심판으로 활동 중이다.
         [[2013년]] [[6월 15일]] [[넥센 히어로즈]] 대 [[LG 트윈스]] 경기에선 5회 말 2사 만루 상황에서 아웃이 되어야 하는데 세이프로 판정하여 해당 타석을 포함하여 넥센이 8실점을 하는 사건이 일어나 논란이 되고 있다. [[한국 야구 위원회]]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그를 2군 심판으로 강등하였다.
         [[2013년]] [[9월 12일]] [[두산 베어스]]와 [[SK 와이번스]]의 경기에서도 [[손시헌]]의 내야안타 타구를 아웃으로 판정하였다. 3루 깊숙한 타구를 [[최정 (야구 선수)|최정]]이 잡아서 송구하였으나 송구가 빗나가면서 1루수 박정권의 발이 베이스에서 떨어졌다. 내야안타가 될 상황이었지만 1루심 박근영은 아웃을 선언하며 또다시 오심을 일으켰다. KBO는 그를 또다시 2군으로 강등하였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17&article_id=0002374984&redirect=true</ref>
         [[분류:197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KBO 리그 포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심판]] [[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남대학교 동문]][[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심판]]
  • 김윤동 (야구선수) . . . . 17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2년]]
         |드래프트 순위 = [[2012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2년 4라운드]]([[KIA 타이거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3년]] [[7월 23일]]<br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 대 [[LG 트윈스|LG]]전 구원
         * [[상무 야구단]] (2014년 ~ 2015년)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 = [[2017년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2017년]]
         ==[[상무 야구단]] 시절==
         * 투구폼은 좋으나 특유의 새가슴기질을 고치치 않는 한 야구로 성공하기 힘들듯 한 예로 기아의 김희걸과 비슷한 유형임
         {{2017년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 대한민국 선수 명단}}
         [[분류:199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KIA 타이거즈 선수]][[분류:대구남도초등학교 동문]][[분류:경상중학교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안동 김씨 (신)]][[분류:상무 야구단 선수]]
  • 김일엽 (야구선수) . . . . 17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07년]]
         |드래프트 순위 = [[1998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1998년]] 고졸우선지명([[삼성 라이온즈]])
         '''김일엽'''(金一燁<ref>{{서적 인용 |저자=[[KBO (야구)|KBO]] |제목=한국 프로야구 기록대백과 |판=제4판 |쪽=321 |날짜=2009-03-10 }}</ref>, [[1979년]] [[11월 15일]] ~ )은 [[KBO 리그]] 전 [[롯데 자이언츠]], [[한화 이글스]]의 투수이다.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의 고졸우선지명<ref>[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107260007 해외파들, 어떤 절차로 한국 팀에 입단했나?] - OSEN</ref> 을 받았으나 [[단국대학교]] (1998학번)에 진학했고 [[투수]] [[이승학]]과 함께 [[2001년]] 3월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85만 달러에 입단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2001년]] 외에는 제대로 뛰지 못했고 어깨 회전근 부상으로 [[2003년]] 5월에 방출당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38&aid=0000189169 김일엽 메이저 리그 꿈과 좌절] - 한국일보</ref>
         귀국 이후 수술을 반복하여 재활하였고 방위산업체에서 산업기능요원으로 일하며 군 복무를 마쳤다. 복무하던 중에 [[KBO 리그]] 복귀 유예 기간 규정이 지나 [[대한민국]]에서 활동이 가능해졌고 방위산업체 근무를 마친 후 [[2007년]] [[1월 4일]]에 [[롯데 자이언츠]]에 [[신고선수]]로 입단<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3&aid=0000278662 롯데, 마이너 리그 출신 김일엽과 계약] - 뉴시스</ref> 하였으며, 주로 중간계투로 등판했다. 1군에는 [[2008년]]부터 올라오기 시작하여 [[2008년]]에는 2승 1패 1세이브 5홀드, 평균자책 3.21을 기록했다. 그러나 [[2009년]] 시즌에 들어서는 선발 투수들의 잇단 부상으로 [[2009년]] [[5월]]부터 한시적으로 선발 보직도 겸하였다. 그러나 성적은 매우 좋지 않아 [[2009년]]에는 승리 없이 5패, 평균자책 7.36을 기록하였으며, 특히 [[2009년]] [[6월 21일]]에 있었던 [[KIA 타이거즈|KIA]]와의 경기에서는 선발로 출장했음에도 단 1이닝도 버티지 못하고 5실점하여 강판되었다.<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6210116 ‘데뷔 첫 그랜드 슬램’ 김현수 “만루포 처음이야!”], 《동아일보》 [[2009년]] [[6월 21일]]</ref> [[2012년]]에는 1군 1경기에 그쳤고 그마저도 대량 실점하여 평균자책 40.50을 기록한 후 방출되었다.
         {{토막글|야구인}}
  • 서울특별시/인물 . . . . 17회 일치
         * [[김혁규(프로게이머)|김혁규]] - 강서구(서울)
         * [[강동호(야구선수)|강동호]] - 양천구
         * [[김태원(야구선수)|김태원]] - 종로구
         * [[박민우(야구선수)|박민우]] - 마포구
         * [[소이현(야구선수)|소이현]] - 은평구
         * [[이상혁(프로게이머)|이상혁]] - 강서구(서울)
         * [[임동혁(프로게이머)|임동혁]] - 관악구
         * [[유지현(야구선수)|유지현]] - 구로구
         * [[이용호(야구)|이용호]] - 구로구
         * [[이재영(야구선수)|이재영]] - 서초구
         * [[이영하(야구선수)|이영하]] - 양천구
         * [[이병훈(야구)|이병훈]] - 영등포구
         * [[이종욱(야구선수)|이종욱]] - 중랑구
         * [[조성환(야구)|조성환]] - 도봉구
         * [[최재훈(야구선수)|최재훈]] - 강서구(서울)
         * [[추재현(야구선수)|추재현]] - 성동구
         * [[한동훈(프로게이머)|한동훈]] - 금천구
  • 이민호(1987) . . . . 17회 일치
         [include(틀:다른 뜻1, other1=NC 다이노스의 투수, rd1=이민호(야구선수))]
         [include(틀:상위 문서, top1=배우/한국)]
         ||<#878787> '''{{{#EEE156 데뷔}}}''' || [[2006년]] [[한국교육방송공사|EBS]] [[드라마]] '[[비밀의 교정]]' ||
         [[꽃보다 남자(KBS)|꽃보다 남자 한국판 드라마]]에서 [[F4]] 중 구준표를 맡아 일대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대한민국]]의 [[배우]]. 2009년부터 현재까지 가장 주목받는 남자배우다.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된 케이스로 신세대 한류 스타들 중 가장 주목받는 배우들 중 하나다.
         그러던 중 KBS의 [[꽃보다 남자(KBS)|꽃보다 남자의 한국판]]에서 주인공 구준표역할에 발탁. 특유의 소라빵 머리와 우월한 기럭지를 자랑하며 시청률 대박을 치게되어 신드롬을 일으키며 일약 떠오르는 청춘스타 대열에 합류한다. 이때의 인기는 상당해서 대부분의 예능, 코미디 프로에서 특유의 소라빵머리를 하고 나오는 캐릭터들이 한명씩은 꼭 있었다. 아시아 3국의 꽃보다남자 캐스팅중에서 일본인들이 꼽은 원작에 가장 가깝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이 드라마로 이민호는 5년간의 무명 세월을 마감하고 톱스타가 된다. 그야말로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은 것이다.
         그렇게 대박을 치고 얼마간의 휴식기를 가지다가 2010년에 3월 31일 MBC에서 방영한 '''개인의 취향'''에서 '''게이는 아닌데 게이로 오해받고 마침 게이로 오해한 여자의 집이 자신의 프로젝트에 상당히 중요한 집이라 어쩔수 없이 게이취급 받으면서 그 집에 들어가게 되는 남자(...)'''역을 맡아서 [[손예진]]과 좋은 호흡을 보였다.
         2013년에는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 [[김은숙]]의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 상속자들|상속자들]]에서 주인공 [[김탄]]역을 맡아 최고 시청률 25.6%를 찍으며 연말 수목극 1위를 유지하며 대박 행진을 이어갔다. 기존의 까칠한 [[김은숙]]표 로코 남주들과 달리 다정하며 직진하는 고등학생의 모습을 담담하게 연기해 냈다.[* [[http://tenasia.hankyung.com/archives/196854|연애의 발견 정현정 작가는 트위터를 통해 이민호의 연기를 칭찬했다]].] 2013 SBS 연기대상에서 중편드라마 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베스트드레서상, 10대 스타상, 시청자 인기상, 베스트커플상의 다섯 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 상속자들|상속자들]]은 [[중국]]에서도 인기가 높아 이민호를 일약 최고의 한류스타로 도약시켰다. 2014년 1월 외국인은 출연이 힘들다는 [[중국]] CCTV의 춘완에 한국인 최초로 출연하여 이민호가 출연한 순간 최고시청률을 기록하였고 7억명의 시청자들이 보았다고 한다.
         2015년 초에 개봉한 [[강남1970]]의 [[김종대#s-2]] 역할로 영화 첫 주연작품을 찍었다. 이민호의 새로운 연기 변신에 호평을 받았고 눈빛 연기, 액션 연기 쪽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청불임에도 불구하고 첫 주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총 관객수 220만 명으로 막을 내리는 걸로 스크린 데뷔식을 치렀다. [[강남1970]]으로 2015년 52회 [[대종상영화제]] 남자신인상 수상, 19회 부천판타스틱영화제 프로듀서초이스상을 수상하였다.
         2016년 [[푸른 바다의 전설]]에서는 허준재, 김담령 1인2역을 연기하였고 로맨틱 코미디와 액션, 스릴러를 넘나들며 섬세하며 차별화된 연기로 역시 이민호라는 찬사를 받았고 대만, 중국 등 아시아에서 인기를 끌었고 한국 영화 및 드라마 데이터베이스 구축 사이트인 HanCinema에서 가장 좋아하는 남자 배우 1위에 선정됐다.
         || 2009년 || KBS2 || [[꽃보다 남자(KBS)|꽃보다 남자]] || 구준표 || ||
         || 2009년 || [[박산다라]] || [[https://www.youtube.com/watch?v=ZAqiMCp9zrI|Kiss]] ||
         ||<|3> 2009년 || 제45회 [[백상예술대상]] || TV부문 남자 신인연기상 ||<|3> 꽃보다 남자 ||
         || 2015 SNS 산업대상 || 한국정보진흥원장상 || ||
         || 제19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프로듀서 초이스상 || ||
         [[분류:한국 남배우]] [[분류:1987년 출생]] [[분류:포항시 출신 인물]] [[분류:2006년 데뷔]]
  • 이상목 (야구선수) . . . . 17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90년]]
         |드래프트 순위 = [[1990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1990년]] 고졸우선지명([[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1990년]] [[6월 11일]] <br />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 대 [[LG 트윈스|LG]]전 구원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08년]] [[10월 4일]] <br/>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 대 [[SK 와이번스|SK전]] 구원
         == 프로 시절 ==
         대표적인 [[포크볼]] 투수이며 [[1990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였지만 별 활약을 보이지 못해 [[1993년]] 시즌 중에 [[포수]] [[박선일]]을 상대로 [[빙그레 이글스]]에 트레이드되었다. 빙그레에 이적한 후 선발 투수로 자리매김하였고 시속 140km대의 직구와 낙차 큰 [[포크볼]]로 많은 승수를 얻었으며 [[1999년]] [[한화 이글스]]의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로 활동했다. [[2003년]]에 15승 7패를 기록하여 한화에서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낸 후 FA 자격을 얻어 [[롯데 자이언츠]]에 이적하였다. 그러나 [[2006년]]을 제외하고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해 [[2007년]]에 방출되었으며 [[선동열]] 감독의 부름을 받아 [[2008년]] 친정 팀 [[삼성 라이온즈]]로 복귀했다.
         [[정경훈 (야구인)|정경훈]]의 소개로 현재는 [[서울특별시]]에서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사회인 야구도 병행 중이다.<ref>[http://sports.donga.com/3/all/20120215/44075265/3 이상목 “다시 잡은 야구공…마구, 마구 던졌죠] - 동아일보</ref>
         [[분류:197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분류:빙그레 이글스 선수]][[분류:한화 이글스 선수]][[분류:롯데 자이언츠 선수]][[분류:한국 프로 야구 100승 클럽]][[분류:성광고등학교 동문]][[분류:경복중학교 동문]][[분류:대구수창초등학교 동문]]
  • 이영욱 (1980년) . . . . 17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03년]]
         |드래프트 순위 = [[1999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1999년 2차 8라운드]]([[쌍방울 레이더스]])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05년]] [[4월 16일]]<br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 대 [[삼성 라이온즈|삼성]]전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13년]] [[9월 28일]]<br />[[문학야구장|문학]] 대 [[KIA 타이거즈|KIA]]전 구원
         * [[덕수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14년 ~ 2017년)
         * [[진성중학교 (경북)|진성중학교]] 야구부 감독 (2018년 ~ 현재)
         '''이영욱'''(李永旭, [[1980년]] [[8월 13일]] ~ )은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이자, 현 경북 [[진성중학교 (경북)|진성중학교]]의 야구부 감독이다.
         ==야구선수 은퇴 후==
         2014년부터 [[덕수고등학교]] 야구부의 코치를 맡았고 2018년부터 경북 [[진성중학교 (경북)|진성중학교]]의 야구부 감독으로 활동한다.
         그가 데뷔 첫 승을 거둔 경기는 [[2005년]] [[5월 29일]]의 [[두산 베어스|두산]]전인데, 첫 승을 따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1회말에 선발 [[헤수스 산체스]]가 1/3이닝 5실점으로 부진하자 1회부터 그가 구원[[투수]]로 긴급 투입되었고 3회말에 상대 타자 [[장원진]]에게 몸에 맞는 볼을 던졌다. 이에 [[장원진]]이 그를 구타하면서 양 팀 간의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고, 4회초 공격에서 1:5로 뒤지던 [[SK 와이번스]]는 무려 6득점하면서 그에게 프로 데뷔 첫 승을 안겨줬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11&aid=0000011178 SK 조범현 감독, "두산 장원진이 우리를 뭉치게 만들었다"] - 조이뉴스24</ref>
         [[분류:198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SK 와이번스 선수]][[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분류:대구칠성초등학교 동문]][[분류:경운중학교 (대구) 동문]][[분류:대구상원고등학교 동문]][[분류:홍익대학교 동문]][[분류:아시안 게임 야구 메달리스트]]
  • 임현준 . . . . 17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1년]]
         |드래프트 순위 = [[2011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1년]] 4라운드([[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1년]] [[4월 2일]] <br /> [[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광주]] 대 [[KIA 타이거즈|KIA]]전 구원
         * [[상무 야구단]] (2011년 ~ 2013년)
         |야구 월드컵 = [[2011년]] 파나마
         '''임현준'''(林玄埈, [[1988년]] [[12월 21일]] ~ )은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이다. [[KBO (야구)|KBO]]에서 정말 희귀한 좌완 언더핸드 투수이다.
         [[대구고등학교]] 시절에는 [[1루수]]로 주로 활동했지만 제28회 [[대붕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 당시 선수가 부족하여 깜짝 선발로 등판하였다. 경기에서 6⅓이닝을 4안타 무실점으로 막으며 [[북일고등학교]]를 상대로 승리하여 모교의 우승을 이끌었다.
         [[2011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1년]] [[삼성 라이온즈]]의 4라운드 지명을 받아 입단했고, [[2011년]] [[4월 2일]] [[KIA 타이거즈|KIA]]와의 개막전에서 데뷔 첫 구원 등판하여 첫 구원 승을 기록하였다.<ref>[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104020266 '채태인 역전 만루포' 삼성 첫 승…KIA, 개막전 7연패] 《OSEN》</ref>
         ==[[상무 야구단]] 시절==
         [[2011년]] [[4월 16일]] [[두산 베어스|두산]]전에서 8회 초 타석에 들어선 [[정수빈]]이 기습 [[번트]]를 시도하고 그가 1루 베이스를 커버하려고 가는 순간 갑자기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에 정전이 발생하며 순식간에 모든 조명들이 꺼지는 바람에 경기가 중단되었고, 결국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되어 다음 날([[4월 17일]]) [[정수빈]] 타석부터 경기가 재개됐다.<ref>[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104180307382224&ext=na 대구구장 정전 사태는 민폐의 결정판] 《마이데일리》 2011년 4월 18일</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76&aid=0002099786 '정전 등판' 임현준, "선발 등판하는 느낌"] 《스포츠조선》 2011년 4월 17일</ref>
         {{2011년 야구 월드컵 대한민국 선수 명단}}
  • 황성관 . . . . 17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97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1997년]] ([[삼성 라이온즈]])
         |드래프트 순위 = [[1997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1997년]] 1차 지명 ([[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KBO (단체)|KBO]] / [[1997년 한국프로야구|1997년]]
         |마지막 경기 = [[KBO (단체)|KBO]] / [[2001년 한국프로야구|2001년]] [[10월 3일]] <br/>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 대 [[두산 베어스|두산]] 전
         {{토막글|야구인}}
         [[분류:197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외야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
  • K리그 챌린지 . . . . 16회 일치
         K리그 챌린지는 대한민국 차상위 프로축구 리그의 명칭이다.
         K리그 챌린지의 발족은 승강제 도입과 관련한 이슈로 인해 탄생하게 되었다. 허나 K리그는 선수들의 수준만 보면 아시아 최고라 자부할 수 있을지언정 리그 자체가 가진 상업성은 아시아 최하위 수준으로 간주할 수 있을 정도라서 새로 프로축구구단을 창설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허나 ACL참가조건에 대해 승강제 여부를 보겠다는 AFC의 발언에서 승강제 도입문제가 이슈화되고, 한국프로축구연맹은 2부리그에 참가할 팀을 구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K리그 가입금에 대한 조건을 폐지하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그간 미적했던 분위기가 어느 정도 K리그 신규구단 창설을 위한 상태로 전환된다.
         특히 축구에 대해 한이 많은 부천, 안양을 중심으로 프로화를 진행 및 시민구단이 창설되고, 또 수원 FC나 충주 험멜과 같이 기존 [[내셔널리그]] 팀들이나 [[R리그]]에 참가했던 경찰청 축구구단들이 기준을 충족하면서 2013시즌부터 챌린지에 참가할 6개 팀이 탄생하게 된다. 여기에 2012시즌 K리그에서 강등된 광주와 상주가 챌린지에 합류하며 2013시즌을 원년으로 K리그 챌린지가 시작된다.
         그러나 이 챌린지란 이름도 기존에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운영하던 U-18대회인 챌린지리그와 또 같은 이름이 되기 때문에 기존의 챌린지 리그는 [[K리그 주니어]]로 명칭을 변경하는 원인이 된다.
         간혹 내셔널리그를 챌린지의 전신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한국프로축구연맹의 계획과는 달리 고양 국민은행이 승격을 거부한 것을 시작으로 울산미포조선까지 승격을 거부함으로써 승강제가 가동하지도 않았고, 리그의 구성 팀마저 프로화를 마친 구단이 없었기 때문에 챌린지와의 연관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적어도 챌린지는 리그가 구성된 이후에 승강이 이루어졌으며 리그의 구성 회원들도 모두 프로구단이기 때문에 그 연결성을 찾기가 어렵다.
         게다가 K2리그로 출범했던 당시에는 리그의 운영이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아니라 한국실업축구연맹으로 봐야 하며, 이 두 연맹은 상하위적 조직이 아니다. 또한 챌린지가 발족하였음에도 별도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까지 미뤄 보면 이 둘간의 관계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K리그 챌린지 플레이오프]]는 챌린지 2위부터 4위팀들끼리 벌어지는 승강 플레이오프 진출자격 획득을 위한 경기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 규정한 바에 따라 플레이오프는 챌린지 정규시즌의 연장선이 아니므로 별개의 대회로 취급했었으나, 2015시즌부터는 챌린지PO도 챌린지의 연장선으로 인정함으로써 챌린지 PO의 승자는 챌린지의 최종순위 2위로 인정받게 되었다. 때문에 챌린지와 플레이오프 사이에서는 기록이 호환되지 않았다가 통산기록으로는 인정하게 되었다. 자세한 설명은 해당항목 참고.
  • 김동호 (야구선수) . . . . 16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5년]]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6년]] [[4월 1일]] <br />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대구]] 대 [[두산 베어스|두산]]전 구원
         * [[한화 이글스]] (2009년 ~ 2010년)
         '''김동호'''(金東昊<ref> 한국야구위원회, 2015 가이드북 </ref>, [[1985년]] [[9월 10일]] ~ )는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이다.
         ==한국 프로야구 시절==
         2009년에 입단하였다.
         ==한국 독립야구 시절==
         ==한국 프로야구 복귀==
         [[분류:198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분류:대구수창초등학교 동문]][[분류:성광중학교 동문]][[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분류:영남대학교 동문]][[분류:한화 이글스 선수]][[분류:고양 원더스 선수]]
  • 김인철 . . . . 16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 top1=야구 관련 인물(KBO))]
         || '''학력''' || 포항초-포항제철중-[[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포철공고]] ||
         || '''프로입단''' || 1990년 고졸연고 자유계약 ||
         || '''지도자 경력''' || [[청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2017~) ||
         || 박홍철(1990~1994) || → || '''김인철(1995~2001)''' || → || [[임동규(야구)|임동규]](2003~2007) ||
         [[삼성 라이온즈]], [[KIA 타이거즈]], [[한화 이글스]]에서 뛰었던 전직 야구선수이자 2017년 11월 현재는 [[청주고등학교 야구부|청주고등학교]] 야구부의 감독. 등번호는 67번(1991~1994) - 13번(삼성) - 40번(KIA, 한화)
         == 프로 선수 시절 ==
         현역 은퇴 후에도 자신의 마지막 현역 팀인 [[한화 이글스]]와의 관계를 유지했고, 한화의 원정 전력분석원으로 활동하다가 스카우트팀 과장으로 인사이동되었다. 그 후 2017년 선수폭행으로 물의를 빚은 장 모 감독과 심 모 감독의 뒤를 이어 [[한화 이글스]]의 연고지역 야구부인 [[청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취임했다.
          * 2017년 7월 청주고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장정순은 상습 폭행건으로, 경질되고, 심정진이 새로 부임했는데, 과거 폭력전과가 있어서 해임되었다.]나온 기사에 따르면 은퇴 후 한화의 전력분석원, 스카우트를 맡을 때도 틈틈이 공부를 하는 '공부하는 야구인'이었으며, 현재 대학원 입학을 위해 공부 중이라고 한다. 나중에 꿈은 대학 강단에 올라서 제대로 된 야구인을 육성하는 것이라고. 또한 심판, 기록원, 스카우트 등 야구계 전반에서 활동할 이들에게 체계적인 야구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포항시 출신 인물]][[분류:1971년 출생]][[분류:투수]][[분류:우완 투수]][[분류:타자]][[분류:외야수]][[분류:우투우타]][[분류:삼성 라이온즈]][[분류:KIA 타이거즈]][[분류:한화 이글스]]
  • 박재현 (야구인) . . . . 16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96년]]
         |드래프트 순위 = [[1996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1996년]] 2차 4순위([[쌍방울 레이더스]])
         |첫 출장 = [[KBO (야구)|KBO]] /
         * [[경상중학교]] 야구부 코치 (1997년 ~ 2000년)
         * [[경북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01년 ~ 2004년)
         * [[계명대학교]] 야구부 코치 (2005년 ~ 2013년)
         '''박재현'''(朴宰賢<ref>한국야구위원회, 2014 가이드북</ref>, [[1974년]] [[2월 8일]] ~ )은 전 [[한국 실업 야구]] [[현대 유니콘스|현대 피닉스]]의 [[내야수]]이자, 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2군 1루 주루코치이다.
         ==야구선수 은퇴 후==
         [[경상중학교]], [[경북고등학교]], [[계명대학교]] 등 야구부 코치를 거쳐 [[kt 위즈]], [[삼성 라이온즈]] 등에서 코치로 활동했다.
         [[분류:197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대구옥산초등학교 동문]][[분류:경복중학교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계명대학교 동문]]
  • 베이식 (가수) . . . . 16회 일치
         *2009년 Double Trouble(Basick & InnoVator)-''Troublemakerz''발매
         *[[2009년]] Jiggy Fellaz - The Black Album
         *2009년 Verbal Jint - 달리자(Feat. Swings & Basick)/마취중진담
         *2009년 몰리디 - ast Night(Feat. Basick, DeepFlow)/Mollywood Classic Vol.1
         *2009년 B-Free - True Story(Feat. Kickaflo, Basick)/One Nation
         *2009년 LUKA - U Know(Feat. Basick)/A Pianist Who Loves HipHop
         *2009년 [[아웃사이더 (가수)|Outsider]] - City Hunter(Feat. Basick, Carry.D Of Swagger)/Maestro
         *2009년 Steady B - Wanna Luv Ya Mo'(Feat. Joe Brown, Basick)/Steady Lady
         *2009년 Jiggy Fellaz - The Blue Album
         *2009년 [[화요비]] - 어린아이(Feat. Basick)/SUMMER
         *2009년 비 프리 - All I know(Feat. Basick)/자유의 뮤직
         *2009년 VON (본) - 내 아이팟(Feat. BASICK, PENTO, MAD CLOWN & 어니)/CREAM
         *2009년 루크 - Drop The Bomb (86ERS Anthem)(Feat. Row Digga, Swings, Basick)/The Last Supper
         *2009년 Ja (제이에이)- I'm Not Jokin'(Feat. Basick) /'90
         [[분류:198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광주 이씨]][[분류:중앙대학교 동문]][[분류:힙합 가수]][[분류:2007년 데뷔]][[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래퍼]][[분류:대한민국의 힙합 음악가]][[분류:지기 펠라즈 음악가]][[분류:2000년대 가수]][[분류:2010년대 가수]][[분류:한국어 가수]]
         [[분류:남자 래퍼]][[분류:Show Me The Money 참가자]][[분류:리얼리티 텔레비전 프로그램 우승자]]
  • 서영무 . . . . 16회 일치
         '''서영무'''(徐永武, [[1934년]] [[5월 18일]] ~ [[1987년]] [[5월 26일]])은 전 [[대한민국]]의 야구 감독이자, [[삼성 라이온즈]]의 초대 감독이다.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으로 [[대구상원고등학교|대구상고]]와 [[경북대학교|경북대]]를 졸업했다. 이후 공군 등 실업 야구 팀에서 선수 생활을 하였지만, 선수 시절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주 포지션은 [[내야수]]였다. 모교 [[대구상원고등학교|대구상고]]의 감독을 맡았다가 [[일본]]에 야구 연수를 다녀왔고, [[1967년]]부터 [[경북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아 명성을 쌓았다. [[1971년]]에는 전국 고교 대회를 모두 석권하는 위력을 보여 주며 고교 야구계에서는 '''"우승 제조기"'''로 불렸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022&article_id=0000100831 한국 야구 100주년 ⑬ 우승 제조기 서영무] - 세계일보</ref> 이후 [[한양대학교]], [[서울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일하다가 [[1982년]] [[KBO 리그]]가 출범하자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의 초대 감독에 임명되었다.
         당시에는 전·후기 리그로 연간 리그가 분리되어 있었는데, 전기리그는 [[두산 베어스|OB 베어스]]가, 후기리그는 [[삼성 라이온즈]]가 각각 우승하였다.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은 두 팀은 첫 경기에서 무승부를 기록하고 2번째 경기에서 [[삼성 라이온즈]]가 이겼으나 이후 내리 게임을 내주면서 4승 1무 1패로 [[두산 베어스|OB 베어스]]에 밀려 준우승에 머물렀다. [[1983년]]에는 조감독으로 영입된 [[재일 한국인]] 출신 [[이충남]]과의 지휘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생일을 일 주일 지난 그 해 [[5월 25일]]에 감독직에서 전격 사임하고 팀을 떠났다.
         삼성의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대구에 1급 차량 정비공장을 차려 운영하였다. [[1984년]] [[두산 베어스|OB 베어스]]의 초대 감독이었던 [[김영덕 (야구인)|김영덕]]을 [[삼성 라이온즈]]에서 나은 조건으로 스카웃하여 차기 감독으로 영입하게 되자, [[두산 베어스|OB 베어스]]는 이에 맞서 그 해 [[4월 13일]] 서영무를 자문역 역할인 관리 이사로 영입하여 [[삼성 라이온즈]]의 전력 분석을 맡기기도 하였다.
         [[경북고등학교|경북고]] 출신의 명 선수인 [[이선희 (야구인)|이선희]], [[황규봉]], [[배대웅]], [[조창수]], [[임신근]], [[강문길]] 등이 그의 제자였기 때문에 '''대구 야구의 대부'''라고 불리며, 엄격한 훈련과 함께 선수들의 책임과 품위를 철저히 강조한 감독이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199354 with 라이온즈 열정의 30년 ⑩‘대부’의 쓸쓸한 퇴장, 원년 감독 서영무] - 매일신문</ref>
         {{토막글|야구인}}
         [[분류:삼성 라이온즈 감독]][[분류:대한민국의 야구 감독]][[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경북대학교 동문]][[분류:대구상업고등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1934년 태어남]][[분류:1987년 죽음]][[분류:뇌졸중으로 죽은 사람]]
  • 송창현 . . . . 16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2,top1=한화 이글스/선수목록, top2=야구 관련 인물(KBO))]
         ||<:> '''학력 ''' || 포항대해초 - 매송중 - [[야탑고등학교 야구부|야탑고]] - [[제주국제대학교|제주국제대]] ||
         ||<:> '''프로입단''' || [[한국프로야구/2013년/신인드래프트|2013년 신인드래프트 3라운드]] ([[롯데 자이언츠|롯데]]) ||
         ||<:> '''군 복무''' || [[상무 야구단]] (2017~2018) ||
         [[야탑고등학교 야구부|야탑고]]를 거쳐 제주국제대로 진학한다.
         == 프로 선수 시절 ==
         [[한국프로야구/2013년/신인드래프트|2013년 드래프트]]에서 3라운드 27순위로 [[롯데 자이언츠]]의 지명을 받았으나, 2012 시즌이 끝나자마자 [[김응용]] 감독이 [[한화 이글스]]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자신이 야인 시절 직접 점찍어 두었던 송창현을 곧바로 트레이드로 데려왔다. 이 때 트레이드로 롯데로 넘어간 선수가 다름 아닌 '''[[장성호]]'''였기에, 졸지에 화제의 신인으로 급부상한다. 물론 좋은 의미가 아니라(…).
         데뷔 초에는 속구와 슬라이더 두 개의 구종만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시즌 후반에 체인지업과 커브를 장착한 것으로 보아 구질 습득도 빠른 편인듯 하다.[* 체인지업은 [[송진우(야구)|송진우]], 커브는 [[정민철]] 혹은 [[이대진]] 코치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한화 이글스의 팟캐스트 방송 이글스캔들에서 본인이 밝힌 바로는 체인지업은 송진우 코치가 그립만 가르쳐준 것을 실전에서 사용했더니 통했다고 한다.]
          * 여담이지만 [[선동열|김응용 감독의 수제자이자, 0점대 방어율 투수]]와 상당히 닮았다. 트레이드 당시에도 뭐가뭔지 모르는 야구팬들 사이에서 '''송창현을 선택한 진짜 이유'''라는 우스개 소리로 돌아다니는 짤. ~~얼굴은 선동렬인데 제구는 [[김정수(1962)|김정수]]...는 무리인가~~
         || 2017 ||<|2><:><-16> [[상무 피닉스 야구단]] 복무 ||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분류:포항시 출신 인물]] [[분류:1989년 출생]] [[분류:투수]] [[분류:좌완 투수]] [[분류:좌투좌타]]
  • 이상무(만화가) . . . . 16회 일치
          * [[만화가 및 일러스트레이터 목록/한국]]
         한국의 만화가이다. 이상무는 필명으로, 본명은 박노철. 경북 [[김천시]] 출신이다.
         1946년 김천 출신으로 1963년 고교 재학시절, 대구 [[영남일보]]의 어린이 지면에 주 1회 네칸 만화를 연재한 것을 계기로 이듬해 상경, [[박기준]] 화백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1965년 월간 "여학생"의 "[[로미오와 줄리엣|노미호와 주리혜]]"로 데뷔하였다. 이상무라는 예명도 이때 얻었다. 이후 70~80년대에는 축구, 야구 등의 스포츠 만화를 주로 연재했고, 1980년대 성인 만화 잡지가 탄생하자 성인만화를 적극적으로 시도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는 골프만화를 연달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가 유명해 진 계기는 바로 스포츠만화였다. 특히 1970년대 [[고교야구]]붐을 탄 야구만화에서 그는 독보적이었다. 1980년대 [[이현세]]가 나오기 전까지 그는 야구만화의 독보적 일인자였다. 하지만 야구만화만 거의 그리던 허영만이나 이현세랑 달리 [[축구]]도 좋아해서인지 독고탁이 나오는 축구만화도 제법 여럿 그렸다. 그가 창조한 캐릭터 [[독고탁]]은 그의 이름보다도 더 유명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고 그야말로 [[허영만]]을 콩라인으로 만든 만화가였다. 허영만 스스로도 자신이 늘 편집장에게 이상무 씨에게 밀려요라는 말을 지겹게 들어서 타도 이상무! 라고 그림을 그렸더니만 나중에는 이현세가 나와서 또 2인자 신세더라며 두 이씨(물론 보시다시피 이상무는 필명)에게 진다고 한탄했다고...
         이상무는 데뷔작이 고교생이 주인공인 청춘 개그물이었고 스포츠 만화나 가족 드라마를 주로 그렸지만, 주 독자층인 어린이들이 이해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성인 취향의 주제를 자주 다루었다. 예를 들어, 재일교포 형제를 주인공으로 그린 [[현해탄 너머]]에서 동시대 만화가들처럼 단순히 일본인들의 재일교포 차별만 넣는 대신 두 나라 사이에서 갈등하는 2세대 교포의 모습도 다루었다. 독고 탁이 투수로 나오는 한국인 시리즈가 그 극이라 할수 있다. [[비둘기 합창]]에서 소아마비 장애 때문에 남자친구에게 버림 받는 여자를 그렸는가 하면, [[달려라 꼴찌]]에서 일본의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과 한국의 흑인 혼혈인에 대한 인종 차별을 묘사하였다. 밝은 그림에 비해서는 주제가 무거운 편.
         화풍은 매우 깔끔하지만 데뷔 시기를 보면 알수 있듯 조금 평면적이다. 간략한 선에 스크린톤이나 펜선을 많이 사용하지 않아 화면이 밝은 편. 당시 야구만화들이 다 그렇듯이 마구나 지옥훈련이 자주 등장한다. 그래도 거인의 별처럼 황당무계한 설정이나 마구는 아니다.
         이현세 만화의 마동탁에 해당하는 악역 주인공은 김준 또는 옥기호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형제로 나올 땐 독고 준, 일본을 무대로 했을 경우에는 악역은 십중팔구 일본으로 귀화하여 일본 이름을 쓴다. 안경을 쓰고 나올 때도 많아서 캐릭터 이미지가 마동탁과 매우 비슷하다. 다만 성격은 원래 나쁜 놈으로 나올 때가 많은 마동탁과 달리 처음엔 주인공 독고탁과 친했지만 재일 한국인 차별이나 가난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열해진 인간일 때가 많다.
          * 태양을 향해 던져라[* 위의 “울지 않는 소년”의 에니메이션 버전, 그러나 “울지 않는 소년”이 축구를 소재로 한 반면 “태양을 향해 던져라”는 야구로 설정되었다]
          * 네이버 한국만화 거장전 “추억여행”
          * 1980년 한국도서잡지주간신문윤리위원회 한국만화상 아동만화 부문 우수상(유대철 화백과 공동수상)
  • 이상훈 (1987년) . . . . 16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0년]]
         |드래프트 순위 = [[2010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10년]] 4라운드([[한화 이글스]])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0년]] [[7월 13일]]<br>[[문학야구장|문학]] 대 [[SK 와이번스|SK]]전 대타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16년]] [[10월 6일]]<br>[[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광주]] 대 [[KIA 타이거즈|KIA]]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 2009년 삿포로
         '''이상훈'''(李相勳<ref>한국야구위원회, 2012 가이드북</ref>, [[1987년]] [[5월 4일]] ~ )은 전 [[KBO 리그]] [[kt 위즈]]의 [[외야수]]이자, 현재 [[KBO 리그]] [[한화 이글스]]의 전력분석원이다.
         ==야구선수 은퇴 후==
         {{2009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대한민국 선수 명단}}
         {{토막글|야구인}}
  • 전상렬 . . . . 16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92년]]
         |드래프트 순위 = [[1991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1991년]] 고졸우선지명([[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1992년]] [[9월 4일]] <br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 대 [[쌍방울 레이더스|쌍방울]]전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05년]]
         * [[두산 베어스]] (1999년 ~ 2009년)
         '''전상렬''' (全商烈, [[1972년]] [[6월 12일]] ~ )은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로, 현재 [[KBO 리그]] [[한화 이글스]]의 2군 작전·주루코치다.
         [[대구상원고등학교|대구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2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1997년]] 삼성에서 방출된 뒤 [[한화 이글스]]로 옮겼고, 한화 시절부터 조금씩 존재감을 알렸다. [[1999년]]에 [[투수]] [[김경원 (야구인)|김경원]]을 상대로 [[내야수]] [[홍원기 (야구인)|홍원기]]와 함께 [[두산 베어스]]에 트레이드되었다. 늘 백업으로 뛰었지만 발이 빨라 [[2004년]]에는 [[도루]] 8위를 기록했으며, [[2005년]]에는 [[2004년]] 병역비리 사건으로 주축들이 대거 빠지게 되어 최하위를 예상하였던 두산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큰 기여를 하였다. [[2006년]]에는 FA 계약으로 2년에 총 4억원에 계약을 맺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109&aid=0000024857&|저자=박선양|출판사=OSEN|제목='늦깎이 스타' 전상렬, 두산과 2년 4억원에 FA 계약|날짜=2006-01-15}}</ref> [[2009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였다.<ref>[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Sports/BaseBall/Article.asp?aid=20091029005501&subctg1=05&subctg2=00 두산, 이승학·정원석 등 방출] - 세계일보</ref> 보기보다 조숙한 얼굴로 '할매'라는 별명이 있어서,<ref>[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120&g_serial=391182 최고참 전상렬, "은퇴는 사절, 불혹까지 뛴다"] - 조이뉴스24</ref> 김인식 감독이 "대타 할매" 라고 심판에게 대타 기용 사인을 전달할 때 심판들이 바로 그를 대타로 낸다고 알아차릴 정도였다.<ref>[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009190045 '신할매' 정수빈, 이틀 연속 불 뿜은 본능] - OSEN</ref>
         ==야구선수 은퇴 후==
  • 차재욱 . . . . 16회 일치
         {{프로게이머 정보
         '''차재욱'''(車宰旭,[[1985년]] [[1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출신 프로게임단 코치였다. 당시에는 [[CJ 엔투스]] 소속이었다.
         [[2002년]] KOR 에 입단하며 프로게이머 생활을 시작했다. 이 당시 팀 동료인 [[한동욱]]과 함께 '''욱 브라더스'''라 불리며 활약했다.
         [[2008년]]까지 [[하이트 스파키즈]]소속으로 프로게이머 활동을 하다가 [[2009년|2008년 11월]]공군에 입대, [[공군 ACE]]에서 활약 하였다. [[2009년]] [[11월 29일]] 에서 [[정종현]]을 상대로 1254일 만에 승리를 했다.
         신한은행 프로리그 2008 결승전에서 온게임넷 스파키즈와 [[삼성전자 칸]]이 맞붙게되었는데 대구 전 차재욱이 상대 팀 삼성전자 칸 소속 프로게이머인 [[이성은]]에게 '''x밥'''이라는 발언을 하게된다. 이후 대구에서 승리한 이성은이 상대 팀 부스를 향해 공깃밥을 던지고 빠삐놈 병神 디스코 믹스를 배경음악으로 춤을 추면서 빠삐코 아이스크림을 나눠주는 세레모니를 선보였다.
         * [[2004년]] SKY 프로리그 2004 1라운드 개인전 다승왕
         * [[2004년]] SKY 프로리그 2004 2라운드 개인전 다승왕 (공동)
         * [[2005년]] SKY 프로리그 2004 3라운드 결승전 MVP
         * [[2005년]] SKY 프로리그 2004 통합 MVP
         * [http://www.ognsparkyz.com/mboard.asp?exec=view&strBoardID=chajaeuk&intPage=1&intCategory=0&strSearchCategory=s_id|||&strSearchWord=&intSeq=13 차재욱 하이트 스파키즈 프로필]{{깨진 링크|url=http://www.ognsparkyz.com/mboard.asp?exec=view&strBoardID=chajaeuk&intPage=1&intCategory=0&strSearchCategory=s_id%7C%7C%7C&strSearchWord=&intSeq=13 }}
         {{대한민국의 스타크래프트 리그|한국 사람}}
         [[분류:198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e스포츠 선수]][[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연안 차씨]][[분류: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분류:온게임넷 스파키즈의 선수]][[분류:공군 ACE의 선수]]
  • 허건엽 . . . . 16회 일치
         || '''학력''' || 도산초-포철중-[[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포철공고]] ||
         || '''프로입단''' || [[한국프로야구/2012년/신인드래프트|2012년 2차 4라운드 전체 34순위]] ([[SK 와이번스]]) ||
         [[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포철공고]] 시절 65회 [[청룡기]]에서 [[순천 효천고등학교 야구부|효천고등학교]]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둔 적이 있다. 또, 63회 황금사자기에서 임찬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적도 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한국프로야구/2012년/신인드래프트|2012년 신인드래프트]] 2차 4라운드에서 SK의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2014년]] 2군에 2점대 후반이라는 준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1군에 콜업되지 않아 [[안치용(야구선수)|안치용]]처럼 "불교 등의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은 아닌가" 하는 소리가 나왔고, 여기서 나온 별명이 '''[[석가모니|허가모니]]''', '''[[이슬람|허슬람]]'''~~허슬두가 아니다!~~ 이 있다. 다만 2군 기록 기준 30이닝을 던져 삼진(18개)보다 볼넷(22개)가 많은 점이 흠.
         그리고 2014 시즌 종료 이후 [[상무 피닉스 야구단]]에 지원했으며 11월 20일 최종 합격했다.
         이후 6월 15일 [[이홍구(야구선수)|이홍구]]와 함께 1군에서 말소됐고 시즌이 끝날 때까지 1군에 등록되지 못했다.
         || 2015 ||<-13><|2> 군복무([[상무 피닉스 야구단]]) ||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구미시 출신 인물]][[분류:1993년 출생]][[분류:투수]][[분류:우완 투수]][[분류:우투우타]][[분류:상무 피닉스 야구단/전역]]
  • 김상엽 (야구인) . . . . 15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89년]]
         |드래프트 순위 = [[1989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1989년]] 고졸우선지명([[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1989년]] [[4월 8일]]<br />[[사직야구장|사직]] 대 [[롯데 자이언츠|롯데]]전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00년]]
         * [[1993년]] [[KBO (야구)|KBO]] 탈삼진왕
         * [[영남대학교]] 야구부 코치 (2002년 ~ 2010년)
         '''김상엽'''(金相燁, [[1970년]] [[5월 11일]] ~ ) 은 전 [[KBO 리그]] [[LG 트윈스]]의 [[투수]]이자, 현재 [[KBO 리그]] [[NC 다이노스]]의 재활군 투수코치이다. 부상 이전 촉망받던 고졸 강속구 투수였다. 최고구속 150km대에 근접한 강속구를 뿌렸으며, 당시에는 희귀한 낙차 큰 파워 커브로 타자들을 상대했다. 1990년대에는 당시 보기 드물게 야구 선수로서 [[삼성물산]]의 패션 사업부인 [[삼성물산|에스에스패션]]의 신사복 빌트모아 TV CF에 출연하였을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1999년]] 12월 [[삼성 라이온즈]]가 [[LG 트윈스]] [[포수]] [[김동수 (야구인)|김동수]]를 FA로 영입하면서 보상 선수로 [[LG 트윈스]]로 이적하였으나 부상이 지속되어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하고 2경기 동안 6.2이닝, 2패만 기록한 후 [[2001년]]에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통산 78승 56패, 3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현역으로 활동할 때 홀수 해에 성적이 좋고 짝수 해에는 성적이 부진한 징크스가 있었다.
         ==야구선수 은퇴 후==
         은퇴 후 [[삼성 라이온즈]]의 마무리 투수 출신 [[영남대학교]] [[권영호]] 감독의 제안으로 [[영남대학교]] 야구부의 투수코치로 활동했으며 [[2011년]] [[투수]] [[박찬호]]의 주선으로 [[오릭스 버펄로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ref>[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world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380&article_id=0000000077 오릭스 김상엽 코치 “박찬호야말로 진정한 위너다”] - 이영미 칼럼</ref> 연수 후 [[NC 다이노스]]의 투수코치로 선임되었다.
         [[분류:197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분류:LG 트윈스 선수]][[분류:KBO 탈삼진상 수상자]][[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분류:경복중학교 동문]][[분류:대구수창초등학교 동문]]
  • 박진성(시인) . . . . 15회 일치
         [[2018년]] 자신이 받은 성폭력, 성희롱 혐의를 키운 언론인 [[한국일보]]와 기사를 쓴 황수현 기자와의 재판에서 1심 승리.
          * 2016년 9월 18일에, 본인의 페이스북을 통하여 "나의 여혐일기를 작성한다"라는 글을 올렸다. [[https://www.facebook.com/poetone78/posts/1051318471583355?pnref=story|해당 내용 링크]] 링크된 해당 페이스북의 내용은 [[2016년 문화계 성추문 폭로 사건|당시 한국 문단 내 암암리에 퍼진 성폭력에 대해 성토하는 분위기 속에 작성된 내용이다.]] 이 내용은 박진성 시인이 본인 스스로에게 [[여혐]]성향이 있음을 자책하며, 스스로의 자성을 추구하는 참회록의 성격을 띈 내용이다.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469&aid=0000168790|<한국일보> 문화계 왜 이러나…이번엔 시인 상습 성추행 의혹]]
         이 주장을 처음으로 기사화한 것은 [[한국일보]] 소속의 황수현 기자이며, [[http://www.hankookilbo.com/v/0564032fc2164032b7c5c3af3f668c50|이 기사]]([[https://archive.is/uTwCo|@]])를 보면 [[메갈리아]] 성향의 [[페미니스트]]로 보인다. 위의 보도 이후로는 대표적인 [[기레기]]로 평가되고 있다. 박 시인은 2017년 2월에 한국일보와 황 기자를 상대로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시작했다. 2018년 4월 27일에 말하길 26일이 1심 6차 변론 기일이었는데, 한국일보 측이 정정보도를 할 것은 확실해졌고 손해배상의 규모 정도만이 남은 기일 동안 정해질 것 같다고 한다.[[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89895731627474944|#]] 그리고 7월 18일에 1심에서 승소, 한국일보와 황수현 측이 정정보도와 함께 5천만원의 배상금을 지불하라는 판결이 나왔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006&aid=0000092780|#]]
         이후 박진성 시인은 2016년에 나온 기사들에 대해 정정보도를 요청했는데 한국일보만 받아들이지 않아, 자신의 [[https://blog.naver.com/poetone/221149485970|블로그]]와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89378037782216704|트위터]]를 통해 황수현 기자를 허위사실유포로 고소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2017년 11월에 시인의 아버지가 쓴 글에 따르면, 성폭행 혐의로 보도가 난 이후 집 앞에서 피켓 시위가 일어나기도 하고, 지인들의 연락이 모두 끊겼으며, 출판사는 책을 내주지 않는 등 결론이 나기도 전에 보도만으로 이미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것과 같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어떤 지인은 '한국일보 같은 신문사에서 성폭행을 했다고 기사를 썼으니 사실 아니겠냐'며 면전에서 면박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박진성 시인의 출판을 담당했던 출판사는 사건이 나자, 무죄여부 확인 과정없이 일주일 만에 출판 계약 해지에, 출판된 시집은 출고 정지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관련된 소송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출고 정지 처분을 풀지 않고 있는데, 계약 해지에 대해 물었더니 "아직 시인으로부터 계약 해지를 요구받은 적이 없다. 언제든지 연락을 주신다면 논의하겠다”고 답했다. [[http://www.newspost.kr/news/articleView.html?idxno=59082|해당 기사 출처]][* 이 기사에선 출판사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 박 시인 아버지의 글에선 [[문학과지성사]]라고 나온다.] 2018년 3월 21일에 [[https://blog.naver.com/poetone/221233628914|문제의 출판사와는 결국 계약을 해지]]했으나, 무슨 문제가 있는지 7월에 박 시인이 밝히기를, 문제의 시집은 아직도 출고정지 상태라고 한다.[* 이 사실을 처음 밝힐 때 박 시인이 여러 시집의 계약을 이행하라는 언급도 한 것과 2016년 당시 출간 예정이었던 산문집의 글은 2018년 3월 계약해지를 알린 후에 산문집 '이후의 삶'에 포함되어 출간된 걸 보면, 기존의 시집과 당시 출간 예정이었던 시집과 관련된 계약을 해지하는데 문제가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해 민사소송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한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1115546|#]]
         그리고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35282180711837697|ㅁㅊ]]([[https://archive.is/GZrdp|@]])이라는 전형적인 [[트페미]]는 자기 말로는 이미 등단한 실제 시인인데도 익명을 쓰고 있다고 추측되는 [[https://twitter.com/jajf1le1/status/934947768753299457|글]][[https://archive.is/uk1hs|@]]을 올렸다. 심지어 ㅁㅊ은 저 글 전체에서 간이 부었는지 트페미, [[여성시대]], [[메갈리아]], [[워마드]]를 비판하는 [[박가분]]과 [[유아인]]과 박진성을 같이 엮어 비꼬고 있다. [[https://twitter.com/jajf1le1/status/935280720691437568|#]][[https://archive.is/nKyFQ|@]][* 그리고 ㅁㅊ은 박진성을 비하하는 과정에서 '''문단_내_성폭력''' 태그를 처음 돌렸다고 자처했으며, 카페 창비에서 자기 편을 들거나 자기와 처지 같은 모임에 모인 사람 몇몇과 같이 뒷담화와 무차별 고소를 모의했다는 간접적인 자폭 시인(是認)을 해버렸다. 이는 박진성처럼 무고죄 처분을 받은 피해자들의 조사에 쓰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https://twitter.com/jajf1le1/status/934436470416334849|#]] [[https://archive.is/9IZbK|@]] 여담으로 [[http://www.hankookilbo.com/v/59c63886250945728a1b52d81920104c|이 기사]][[https://archive.is/eNOrA|@]]에 나온 비공식 모금 출판 책 '참고문헌없음'에는 박진성 작가를 허위사실로 조리돌림한 한국일보 황수현 기자, 유진목 작가, 탁수정(책은탁)이 공동 저자로 표기되어 있다([[https://tumblbug.com/baumealame4|해당 펀딩 주소]]). 즉, 저 자료도 무고죄 소송에 쓰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박진성 시인도 소송을 건 사람 중 한 명이나, 아래의 자살 시도 이후 부질없이 느껴져서 취하했다. 2018년 4월 11일에 박 시인이 [[탁수정]]에게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83923802202488832|메인 트윗에 올린 자신과의 카카오톡 대화를 내리라고 요구]]했을 때, 이때 몇몇 트위터리안들이 대화의 전문을 트위터에 올리는 것을 건의하자, 박진성 시인은 진실이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사생활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며 해당 건의를 거절하면서 그 대화록은 법원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4월 19일엔 메인 트윗을 내려줄 것을 다시 요청했는데, 이 때는 '오늘까지 기다린다'는 말([[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86803521419755520|#]])까지 한 걸로 보아 당시엔 탁수정과의 소송전 재개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대신, 한국일보와 황 기자와의 정정보도 요구 소송의 1심 판결문 중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1020315951638564865|해당 대화를 성희롱으로 보기 어렵다]]고 한 부분을 7월 20일에 공개했다.
          * 2017년 12월 7일, 오전 00시 47분에 의식을 회복하고 블로그에 첫 글을 남긴다. 그 이후에는 언론들에게서 받은 심적 피해가 심대했는 듯, 한국일보 황수현 기자를 고발하는 글 등 언론들의 무고 관련 보도 태도에 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들을 남기기 시작한다. 또한 블로그의 내용을 보면 박시인의 아버지 분도 거기에 적극 협력하고 있는 듯하다. [[https://blog.naver.com/poetone/221157223698|해당 게시글 링크]]
          참고로 박 시인은 자신을 공격한 이들과 7월 현재까지 소송 중인데, 무고 피해자들을 지원하겠다는 것과 관련해 웃긴대학의 일부 회원에게 강하게 비난을 받자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건지 17일 오전에 페이스북에다 자살을 암시하는 글과 동영상을 올렸다. 다행히 지인이 이 게시물을 보고 신고해, 신고를 받은 경찰에 의해 병원에 가 안정제를 맞았다고 한다. 자세한 건 [[웃긴대학/사건 및 사고#s-6|한국 래디컬 페미니즘 동조자들의 박진성 시인 자살 유도 사건]] 참조.
         >2008년 4월의 일입니다. C 대학교에서 주최하는 고En 시인 초청 강연회에 갔었습니다. 200명 넘는 방청객들 사이에서 고En 시인은 정말 빛나는 별이었습니다. 자신의 문학적 여정을 회고하고 나아가 한국문학의 위상에 대해서 말하는 고En 시인은 저의 앞으로의 ‘미래’였습니다. 뒷자리에 앉았던 저는 한 마디라도 놓칠까 싶어 고개를 최대한 앞으로 숙여 시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대학생, 대학원생들, 여러 학과의 교수들, 그리고 인근 주민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 행사는 ‘공개 개방 강좌’였습니다. 시인이라는 존재가 골방에만 쳐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저렇게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구나,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 감동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다룬 기사를 쓴 한국일보 황수현 기자가 [[사진작가]] [[ROTTA]]의 성추행 의혹 등 미투 운동을 다루는 [[http://naver.me/GNjRWJvu|기사]]를 쓰자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이 미투 운동을 기사로 다루는 것이 말이 되냐면서''' 일침하는 댓글을 달기도 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469&aid=0000281588&viewType=pc&m_view=1&m_url=%2Fcomment%2Fall.nhn%3Fgno%3Dnews469%2C0000281588|#]]
  • 백상원 . . . . 15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0년]]
         |드래프트 순위 = [[2010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0년]] 4라운드([[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3년]] [[4월 27일]] <br /> [[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광주]] 대 [[KIA 타이거즈|KIA]]전
         * [[상무 야구단]] (2011년 ~ 2012년)
         |야구 월드컵 = [[2011년]] 파나마
         ==[[상무 야구단]] 시절==
         시즌 후 곧바로 [[상무 야구단]]에 입대하여<ref>조이 뉴스 24 - 2010년 10월 26일 기사 [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120&g_serial=523983 "홍희정의 아웃사이더: 퓨처스 남부 리그 수위 타자 백상원, 삼성 내야의 미래"]</ref> 복무를 마치고 [[2012년]]에 제대했다.
         [[2013년]] [[4월 27일]] [[KIA 타이거즈|KIA]]전을 앞두고 처음으로 1군에 등록되어 그 날 경기에서 대수비로 출전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1군에서 안타를 기록하지 못해 2군에 계속 머물러 있다가, [[김상수 (1990년)|김상수]]의 부상으로 다시 1군에 올라와 [[2013년]] [[10월 3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김성배 (야구 선수)|김성배]]를 상대로 데뷔 첫 안타와 타점을 올렸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629325 '백상원을 아시나요' 삼성의 화수분 야구는 계속 된다] - OSEN</ref>
         {{2011년 야구 월드컵 대한민국 선수 명단}}
         [[분류:198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KBO 리그 2루수]][[분류:KBO 리그 3루수]][[분류:대구남도초등학교 동문]][[분류:경상중학교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단국대학교 동문]][[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분류:수원 백씨]][[분류:상무 야구단 선수]]
  • 서정환 . . . . 15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82년]]
         |드래프트 순위 = 프로 원년 멤버
         '''서정환'''(徐定煥, [[1955년]] [[7월 5일]] ~ )은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와 [[해태 타이거즈]]의 [[유격수]]였다. 현재는 [[KBO (야구)|KBO]]의 대구 감독관이다.
         [[건국대학교|건국대]]를 졸업하고 실업 야구 팀 [[포스코|포항제철]]과 경리단을 거쳐 [[1982년]] [[KBO 리그]]가 출범하자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의 창단 멤버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그의 포지션이었던 [[유격수]]에 [[오대석]], [[장태수]] 등의 쟁쟁한 선수가 많아 주전으로 출전하기 힘들게 되자 시즌 후 스스로 트레이드를 요청하여 [[유격수]] 자원이 부족하였던 [[해태 타이거즈]]에 현금 트레이드로 이적했다. 이것은 [[KBO 리그]] 역사상 최초의 현금 트레이드로 양 팀과 선수에 모두 도움이 된 win-win 케이스로 꼽힌다. 서정환의 트레이드는 최초의 현금 트레이드이고, 최초의 선수 간 트레이드는 [[1983년]] [[6월 27일]] [[MBC 청룡|MBC]] [[내야수]] [[정영기 (야구인)|정영기]]와 [[롯데 자이언츠|롯데]] [[포수]] [[차동열]] 간의 트레이드였다.<ref>[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100&g_serial=585648&rrf=nv 트레이드, 그라운드 밖의 승부수] - 조이뉴스24</ref> 이후 서정환은 견실한 수비와 빠른 발을 이용한 플레이로 1980년대 [[해태 타이거즈]]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86년]]에는 도루왕에 오르기도 했다.
         [[1989년]]에 은퇴하여 [[해태 타이거즈]]에서 코치 생활을 하다가 [[1995년]]에 도일하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1996년]] 고향 팀 [[삼성 라이온즈]]로 복귀하여 수비코치로 일했다. [[1997년]] [[10월 30일]] [[삼성 라이온즈]]는 라이벌 팀 [[해태 타이거즈]]를 벤치마킹하려는 경영진의 결정으로 [[해태 타이거즈|해태]]에서 오랜 선수 생활을 했던 그를 [[백인천]]의 후임으로 [[삼성 라이온즈|삼성]] 선수 출신 최초의 감독에 임명하였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ports_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201661 삼성,제 9대 감독으로 서정환 코치 전격 발탁] - 연합뉴스</ref><ref>서정환 다음으로 [[삼성 라이온즈|삼성]] 선수 출신으로 감독이 된 경우는 [[류중일]]이며, 서정환과 달리 [[류중일]]은 원 클럽맨 출신으로 삼성의 감독이 된 첫 번째 경우이다.</ref> [[1998년]]에 정규 시즌 2위, [[1999년]](이 해에 잠깐 양대 리그제로 바뀌었다.) 드림리그 1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만, [[롯데 자이언츠]]에 패해 [[1999년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고 그 해 [[11월 1일]]에 사임하였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ports_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563593 프로야구 삼성, 서정환 감독 사의] - 연합뉴스</ref> [[2001년]] [[해태 타이거즈|해태]]로 돌아와 2군 감독을 맡았고 시즌 중 수비코치로 보직 변경되었다. 이후 구단주가 바뀐 [[KIA 타이거즈]]에서 [[김성한 (1958년)|김성한]], [[유남호]] 감독을 보좌하여 코치 생활을 하였다. [[2005년]] [[유남호]] 감독이 시즌 최하위의 책임을 지고 시즌 중 사임하자 [[KIA 타이거즈]]의 감독 대행을 맡았고 [[2006년]] 정식 감독에 취임하였다.
         이후 [[MBC 스포츠+|MBC ESPN]]에서 해설가로 활동했고, 현재는 [[KBO (야구)|KBO]]의 대구 감독관으로 재직 중이다.
         |후임자 = [[김용희 (야구인)|김용희]]
         {{한국야구위원회 전문위원회 명단}}
         [[분류:KIA 타이거즈 감독]][[분류:삼성 라이온즈 감독]][[분류:해태 타이거즈 선수]][[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분류:KBO 도루상 수상자]][[분류:KBO 리그 2루수]][[분류:KBO 리그 유격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해설자]][[분류:대한민국의 야구 감독]][[분류:건국대학교 동문]][[분류:대구신암초등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195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달성 서씨]]
  • 이상민 (야구선수) . . . . 15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3년]]
         |드래프트 순위 = [[2013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3년 7라운드]]([[NC 다이노스]])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3년]] [[6월 15일]]<br />[[마산종합운동장 야구장|마산]] 대 [[삼성 라이온즈|삼성]]전 구원
         * [[경찰 야구단]] (2016년 ~ 2017년)
         [[동의대학교]] 3학년 때인 [[2011년]]에 [[대학야구 춘계리그]]에서 호투하여 최우수 선수에 선정됐다.
         [[2013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7라운드(전체 60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퓨처스리그 15경기에 등판해 5홀드, 평균자책점 0으로 가능성을 인정받았으며, [[2013년]] [[6월 15일]]에 1군에 올라왔다. 이 날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구원 등판하여 0.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556327 '아기공룡' 이상민의 성공적인 1군 데뷔전] - OSEN</ref>
         ==[[경찰 야구단]] 시절==
         {{토막글|야구인}}
         [[분류:199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NC 다이노스 선수]][[분류:넥센 히어로즈 선수]][[분류:대구남도초등학교 동문]][[분류:대구중학교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동의대학교 동문]][[분류:경찰 야구단 선수]]
  • 장대환 . . . . 15회 일치
         {{뉴스 인용|제목=50대 총리서리 ‘세대교체’ 중책?|url=http://www.donga.com/docs/magazine/weekly/2004/10/05/200410050500008/200410050500008_1.html|확인날짜=2012-04-08|날짜=2002-08-22|출판사=주간동아}}</ref> [[한국 전쟁]] 중 [[대구광역시|대구시]]에서 출생하였으나, 줄곧 서울과 해외에서 생활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donga.com/3/all/20020809/7851168/1|제목= <nowiki>[오늘의 이슈]</nowiki>'50세 총리' 발탁 또 깜짝인사|날짜=2002-08-09|출판사=[[동아일보]]}}</ref>
         제37회 한국신문협회 회장이다.
         * 1988년 6월 : 한국신문협회 이사, 국제언론인협회(IPI) 한국위원회 감사, 아시아신문재단(PFA) 감사
         * 1997년 10월 : 한국신문협회 감사
         * 2005년 2월 ~ 2010년 3월: 한국신문협회 회장
         * 2008년 9월 ~ 2009년 9월: 한국 방문의 해 추진위원회 위원
         * 2008년 10월 ~ : 한국태평양경제협력위원회 자문위원
         * 2009년 1월 ~ : 통일부 통일고문회의 고문
         * 2009년 3월 ~ : 국립대한민국관 건립위원회 위원
         * 2009년 5월 ~: 북한정책 포럼 공동의장
         * 2009년 12월 ~ 2010년 5월: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
         * 2010년 3월 ~ : 한국신문협회 고문
  • 조현근 . . . . 15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05년]]
         |드래프트 순위 = [[2005년 한국프로야구 신인선수 지명회의|2005년]] 2차 2라운드([[두산 베어스]])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05년]] [[4월 22일]] <br /> [[수원야구장|수원]] 대 [[현대 유니콘스|현대]]전
         * [[경찰 야구단]] (2010년 ~ 2011년)
         '''조현근'''(趙賢根<ref>한국야구위원회, 2012 가이드북</ref>, [[1985년]] [[11월 21일]] ~ )은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이다.
         중간계투로 주로 등판하며, [[2005년]]에 [[두산 베어스]]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고 2홀드를 기록했다. [[2006년]] [[7월 12일]] [[두산 베어스]]에서 [[김덕윤]]<ref>[[2008년]] 시즌 후 방출되었다.</ref> 을 상대로 1:1로 고향 팀 [[삼성 라이온즈]]에 트레이드되었고 [[2007년]]에 첫 승을 기록했다.
         == [[경찰 야구단]] 시절 ==
         [[2009년]] [[12월 17일]] [[경찰 야구단]]에 입대<ref>[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2009770 우규민-연경흠-우동균 등 24명 경찰청 입대] - 스포츠조선</ref> 하여 [[2011년]]에 제대했다.
         [[분류:대구본리초등학교 동문]][[분류:평양 조씨]][[분류:두산 베어스 선수]][[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분류:경찰 야구단 선수]]
  • 최여진(탤런트) . . . . 15회 일치
          * 상위 문서: [[배우/한국]]
         지상파의 고정패널, [[케이블 TV]]의 진행자를 맡는 등 본업이 연기자라는걸 감안하면 꽤 다양한 예능에 출연하였다. 과거 고정패널로 활동했던 "여걸6"[* 이게 이 프로그램의 여성 출연자들의 위치가 좀 미묘했다. 일단 대우는 MC급으로 퇴사하면서 어쩔수 없이 하차해야 했던 [[강수정]]을 제외하면 본인이 하차하지 않는 한 변동이 거의 없었지만 사실상 진행은 [[지석진]]이 혼자 맡았고 일반적인 당시의 짝짓기 프로그램처럼 여성 출연자들이 프로그램의 진행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었으며 고정 페널이라 보기에는 당시 고정 페널로 나오던 [[이승기]], [[김종민]], [[신정환]]과는 대우가 완전히 달랐다.]에서는 주로 [[신정환]]과 엮이는 구도였으나 그리 오래 출연하진 못하고 4개월 만에 개인 스케쥴 문제로 하차하고 말았다. 프로그램내 비중은 거의 공기수준으로 아무래도 다른 여성 출연자들의 [[정선희|존]][[조혜련|재]][[현영|감]][[강수정|이]] 너무 크다보니 상대적으로 많이 묻혔었다.[* 다만 대부분 여성 출연자들의 외모덕에 나름 비주얼 담당을 맡았었다는게 그나마 위안거리다.] 여담으로 출연시 [[밸리댄스]]를 추는 특집편이 있었는데, '''[[뽕]]'''이 상의 위로 밀려올라가서 검색어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2009년 [[백상예술대상]]에서 시대를 앞서가는 패션을 선보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Mnet등에서 "패션"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고, 각종 시상식의 "베스트, 워스트 드레서"에 대한 평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 2009년 || SBS || [[드림(드라마)|드림]] || 장수진 || ||
         애초에 이 사람이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게, 과거 자기가 키우는 '''애완견에게 소고기를 20kg이나 먹였고''' 딸 최여진이 '''[[http://artsnews.mk.co.kr/news/98621|모피 컬렉션에도 참가]]했고, [[http://www.editorpost.com/news/articleView.html?idxno=282105|몸소 앙고라니트 패션을 선보이는 등]][* 앙고라 토끼의 털은 양털처럼 깎는 것이 아니라 산채로 털을 뽑아서 채취한다. 따라서 살아있는 내내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죽을 때까지 주기적으로 맛봐야 한다.][* 다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미국이나 영국등 앙고라 토끼털을 생산하는 농가에선 원래 그런식으로 털을 생산하지 않는다. 토끼털은 원래 가위로 깎거나 빗으로 흝어 얻어내는 가내수공업 형태로 생산되어왔다. 다만 이 방식은 토끼의 털이 충분히 길지 않아 단가가 낮아진다는 단점이 있으며, 이로인해 주 공급처인 중국등지에서 털을 뽑아서 채취하는 방식을 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토끼털을 뽑아서 채취하는 방식을 처음 시작한 곳은 한국이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영상은 이러한 잔인한 토끼털 생산행태를 고발한 것이며 토끼털 채취 방식이 반드시 그런 방식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의 활동을 하는데 있어선 개의치 않는 모습이 드러나 비판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http://entertain.naver.com/read?oid=144&aid=0000445743|#]]
         허나 한국은 [[연좌제|연좌제]]를 헌법으로 금지하고 있으며 연좌가 될 법한 조건도 아니다. 모친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해서 아무런 죄도 없는 딸에게 그 책임을 씌우는 것은 이성적인 행동도 아니며, 전형적인 [[마녀사냥]]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 최여진 프로그램 하차 논란 ===
         최여진 모친에 대한 논란은 현재 2라운드로 접어든 상태인데 이전까지의 관심은 최여진의 모친이 진정어린 사과를 할 것인가였다. 그러나 최여진의 모친이 끝내 제대로 된 사과를 하려는 모습이 안 보이자 사람들의 관심은 최여진이 현재 하고 있는 프로그램에서 하차를 할 것인가로 관심이 다 옮겨간 상황.
         위의 서술대로 연좌제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 자체에는 사람들 대다수가 동의하는 분위기. 최여진이 죄가 없다는 사실도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시청자들이 적은 의견들을 읽어보면 '최여진은 죄가 없으나 최여진을 보면 자꾸 모친의 개고기 논란이 생각나서 프로그램에 집중이 힘들 것 같다'는 의견들이 대다수다.
         [[분류:한국 여배우]][[분류:한국 여성 모델]][[분류:라디오 스타의 역대 게스트]][[분류:서구(대구) 출신 인물]][[분류:2001년 데뷔]][[분류:1983년 출생]]
  • 현정건 . . . . 15회 일치
          | 경력 = 前 고려공산당 상임위원 <br/> 前 대한국민대표회의 외교분과위원 <br/> 前 한국독립당 전임위원
         '''현정건'''(玄鼎健, [[1887년]] [[6월 29일]] ~ [[1932년]] [[12월 30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ㆍ교육자이다. 본관은 [[연주 현씨|연주]]. 독립운동가로서의 다른 이름(아호)은 '''읍민'''(揖民)이며, 소설가 [[현진건|현진건(玄鎭健)]]의 형으로 현진건의 반일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혼인을 통해 [[박종화]](朴鍾和) 가문, [[윤치호]](尹致昊), [[윤치영]](尹致暎), [[윤보선]](尹潽善) 가문과도 겹사돈관계가 된다
         조선 [[대한제국 고종|고종(高宗)]] 24년([[1887년]])에 [[대구광역시|대구(大邱)]]에서 현경운(玄炅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0년]]에 중국으로 유학, [[상하이 시|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임시의정원|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 이규홍(李奎洪) 등과 함께 1919년 9월 17일 경상도 의원으로 보선되었다. [[1920년]]에 상하이 주재 [[고려공산당|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입당하였고 [[1922년]] 10월 20일에 열린 베르프네우딘스크(Verkhneudinsk) 회의<ref group="설명">이동휘의 상하이 고려공산당과 김철훈ㆍ안병찬의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의 경쟁을 완화하고 두 세력을 합치기 위해 코민테른에서 그들에게 베르프네우딘스크에서 연합대회를 갖도록 하였다. 여기에는 한인 공산주의 운동 계열의 주요 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하였는데, 국내에서는 정재달, [[조봉암]] 등도 여기에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대회는 대표의 자격 문제가 제기되면서 파탄나고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철수, 코민테른 당국이 각파 지도자를 모스크바로 불러 조정하려 했으나 이마저 실패하자 결국 코민테른은 양파 모두 해산하고 단일당을 조선 안에 세울 것을 지시함으로써 상하이파도 이르쿠츠크파도 없어지게 된다. 김학준 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2005, 민음사.</ref>에 윤자영(尹滋英)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일원으로서 참가하였다. [[1923년]] 1월에 상하이에서 소집된 [[국민대표회의|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는 윤해(尹海)ㆍ신숙(申肅) 등과 더불어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왕삼덕(王三德) 등과 참여하였고 2월 5일에 [[여운형|여운형(呂運亨)]]과 더불어 외교분과위원으로 지명되었으나, 창조파가 임시정부를 부정하며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건국을 결정하고 임시헌법과 국호 등을 제정하자 뜻을 바꾸어 "임시정부는 3ㆍ1운동의 결정인데 출석원(員)의 2/3나 되는 개조안을 무시하고 사신 5인이 퇴석 통고를 하고 불착한 대로 국호를 조선공화국로 정하여 새 국가를 만든 것을 성토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ref>「創造派의 회의 종료」 『동아일보(東亞日報)』 1923년 6월 25일자.</ref> 7월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한국독립촉진회에도 가담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파간의 이견 조정에 힘쓰는 등 민족 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8월에 조선의 관서([[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대홍수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는 상하이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의 상하이교민단(上海僑民團)이 내지동포수재구제회(內地同胞水災求濟會)를 조직해 9월 26일에 수재의연금 110원을 동아일보사에 전달하기도 했는데 <ref>「同胞의 ㅁ愛! 해외각디동포의열렬한동정 가련한수재당한형뎨들에게」 『동아일보』1923년 10월 4일자 기사.</ref> 여기에 현정건의 이름이 실려 있다.
         [[1925년]] 5월 9일에는 상하이에 있던 [[조소앙|조소앙(趙素昻)]]ㆍ여운형ㆍ윤자영ㆍ김상덕(金尙德)ㆍ최창식(崔昌植)ㆍ김규면(金圭冕)ㆍ손두환(孫斗煥) 등 약 30명의 조선인 동지와 함께 서문 밖 체육장에서 배일(排日) 중국인 단체의 집합에 참가하였고 이곳에서 "중국과 한국이 합동하여 일본에 맞서야 한다"는 취지의 『상하이주간(上海週刊)』5월 9일자 특별호에 실린 사설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ref>이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에 의해 7월 1일에 일본 외무성의 외무차관에 보고되었다. 국회도서관(國會圖書館) 편찬 『한국민족운동사료(韓國民族運動史料)』(중국편), 1976년, 567~568쪽.</ref> 9월 8일에는 상하이교민단의 의사원(議事員)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6년]] 10월 10일에 중국사정연구회(中國事情硏究會)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1월에 상하이에서 의열단 창립 9주년을 맞아 재중 조선인들에게 격문을 발표하며 성대한 기념식을 가졌다. [[1927년]] 4월 10일 홍진(洪鎭)ㆍ홍남규(洪南杓) 두 사람의 명의로 발표된 전민족적독립당결성선언문(全民族的獨立黨結成宣言文)에 따라 11일에 삼일당에서 약 40명이 모여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 창립총회를 열고,
         * 한국유일당 조직을 촉성하는 것
         * 한국 민족의 독립적 역량을 집중하는 일에 노력하는 것
         등의 강령 및 명칭, 위원 기타를 결정하고 조직을 끝냈는데 이때의 집행위원으로 [[이동녕]]ㆍ조소앙 등과 함께 현정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11월에 다시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를 조직할 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ref>대한민국 국회도서관 편찬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 1976년, 618~621쪽 및 일본 외무성경찰사(外務省警察史) 지나지부(支那之部) 『조선민족운동사(朝鮮民族運動史)』≪미정고(未定稿)≫ 4, 고려서림(高麗書林), 1989, 11~22쪽.</ref>
         [[1922년]] 동생 현진건이 [[홍사용]] · [[박종화]] 등의 문인들과 함께 동인으로 참여한 문예지 《[[백조 (잡지)|백조]]》 창간호에 [[이광수]]의 악부(樂府)가 실려 있는 것을 보고, 현진건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한국의 꽃봉오리 같은 젊은 청년들이 발표하는 깨끗한 《백조》지에, '귀순장'을 쓰고 항복해 들어간 이광수가 동인이 되었다 하니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빨리 동인에서 제거하라"며 항의했고, 결국 《백조》 동인에서 이광수는 빠지게 되었다.
         [[분류:1887년 태어남]][[분류:1932년 죽음]][[분류:한국의 옥사한 사람]][[분류:고문 피해자]][[분류:유교 이탈자]][[분류:자유 연애]][[분류:사회주의자]]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고려공산당]][[분류:윤치호]][[분류:한국독립당]][[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대한제국 순종]][[분류:이승만]][[분류:김구]][[분류:의친왕]][[분류:윤치영]][[분류:윤보선]][[분류:연주 현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홍준표(야구선수) . . . . 15회 일치
         [[분류:1991년 출생]][[분류:내야수]][[분류:우투좌타]][[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구미시 출신 인물]]
         [include(틀:상위 문서2, top1=야구 관련 인물(KBO), top2=SK 와이번스/선수단)]
         ||<:> '''출신학교''' || 구미도산초 - 구미중 - [[구미전자공업고등학교 야구부|구미전자공고]] - [[한민학교]] - [[우석대]] ||
         ||<:> '''프로입단''' || [[한국프로야구/2015년/신인드래프트|2015년 신인드래프트 9라운드 87순위]] ([[SK 와이번스]]) ||
         '''[[구미전자공업고등학교 야구부]] 출신 최후의 프로 선수'''[* 2009년 해체 당시 홍준표가 재학 중이었고 홍준표 외에 구미전자공고 출신 야구선수는 현재 [[KBO 리그]]에 없다.]
         [[한국프로야구/2015년/신인드래프트|2015년 신인드래프트]]에서 9라운드에 [[SK 와이번스]]의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단했다. 2015년 입대하여 군복무를 마쳤다.
  • 2016 K리그 다득점 우선적용 논란 . . . . 14회 일치
         2016시즌 [[K리그]]를 앞두고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순위산정방식의 변경을 알리면서 발생한 논란이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의 발표에 따르면 "공격축구"가 관중을 끌어모은다는 판단 하에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422&aid=0000168424|"타 리그와 비교해도 골 수가 적으니 관중이 잘 안 모이고 흥행이 되지 않는다"]며 이 제도를 시행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웃긴 이야기는 여기에서 예시로 든 분데스리가와 J리그를 보면 골 수와 관중 사이에는 의미있는 데이터가 성립하지 않는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주장대로, 공격축구를 통해 골이 많이 터질수록 흥행이 이루어진다면 골이 많이 나온 시즌은 관중이 많아야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K리그도 분데스리가와 마찬가지로 2012시즌부터 2015시즌까지 오히려 '''골 수는 줄었는데 관중이 늘고, 골 수가 늘었는데 관중이 줄어드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연맹은 그 어떤 명확한 해답을 내 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근거라고 내 놓은 분데스리가와 J리그 모두 연맹의 주장을 뒷받침할 사례를 제시할 수 없다. 한마디로 2016년 한국프로축구연맹 활동중에 최대의 뻘짓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
         K리그가 성립할 수 있었던 배경은 전두환 시절의 3S정책과 맞닿아 있던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으나, 박정희 시절부터 내려온 스포츠 지원정책의 기치는 '''"(저 북괴놈들에게 절대 꿇리지 않는) 국제적인 스포츠 업적을 거두어 세계만방에 걸친 명성을 쌓아 올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즉, 국제 스포츠계에서 업적을 쌓는다는 명분이 대한축구협회 시절에 세운 기치이며 이는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설립된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한국프로축구협회 정관: 제1조 목적, 이 법인은 한국프로축구의 수준향상과 저변확대는 물론 국제교류 등 축구를 통해 국민의 건 전한 여가 선용을 도모하고, 스포츠 활성화와 지역사회를 비롯한 '''국가 발전 및 국제친선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 K리그 클래식 . . . . 14회 일치
         K리그 클래식은 2012년 기존 K리그가 [[아시아축구연맹]] AFC의 [[AFC 챔피언스 리그]]의 개편에 따라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승강제]]를 도입함으로써 구분된 대한민국 최상위 프로축구리그다.
         K리그는 [[수퍼리그]] 시절부터 승강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승강을 실행하기에 충분한 수준의 팀이 창설되지 않았던 관계로 이 부분이 상당히 지지부진하였다. 그러던 것이 월드컵 유치와 관련하여 사회적으로 약간의 축구붐이 조성되면서 K리그에 참가하는 팀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예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실업팀의 프로화를 통한 K리그 참가는 여전히 지지부진했던 상황.
         단적으로 K2리그를 출범하고 리그 우승팀을 프로화시켜 승격을 시키는 방안을 시작으로 실업축구단들의 참가를 유도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프로팀을 점진적으로 늘려가며 장기적으로는 K리그의 프로팀 숫자를 늘리고, 늘어난 팀 수를 바탕으로 상위와 하위리그를 나눠 승강제를 운영할 계획이었다. K2리그라는 명칭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본래 K리그의 승강제 구성을 위해 탄생한 2부리그 격 세미프로리그였다. 하지만 2번이나 우승팀들이 승격을 거부함으로써 승강제는 아예 물 건너가게 되었고, K2리그는 내셔널 리그로 이름을 바꿔 완전히 별개의 리그가 되어버린다.
         이후 함맘은 2009년에 '''승강제가 없는 리그는 ACL참가 불가'''라는 폭탄선언을 하게 된다.[* http://www.hani.co.kr/arti/sports/soccer/390028.html] 그리고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여기에 낚여 2012년까지 승강제를 마련하겠노라는 계획서를 제출하게 되고, 이 계획에 따라 진행하여 K리그는 2012년에 승강제 도입이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현실이 되었다.]].[* 이런 연맹의 노력이 무색하게 2016년 현재 ACL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승강제가 없는 [[A-리그]]는 아무런 문제없이 ACL에 참가하고 있는 걸로 봐선... 안습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이로써 2012년에 승강제 계획안이 발표되고, 2013시즌부터 대한민국 최상위 프로축구리그의 명칭은 '''K리그 클래식'''이 되었다.
         2016년 기준, K리그 클래식의 리그 수준은 아시아 '''최고'''다. 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통틀어 1위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ACL 무대에서는 최고 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다. 허나 AFC의 최근 트렌드가 축구 개발도상국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기 때문에 4장을 배정받던 과거완 달리 현재는 3.5장으로 줄었다. 현재 AFC의 정책이 점점 UEFA의 정책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이는 걸로 봐서는 기존 강호들은 3.0장으로 줄어드는 것도 감안해야 할 것으로 보이며, 한국도 예외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
         정규 라운드에서 획득한 점수는 그대로 이양되고 "자신의 팀이 속한 스플릿의 경쟁자와 한번씩 대결"을 통해 상위 스플릿에선 우승과 차기 ACL 티켓을 두고 경쟁을 하게 되며, 하위 스플릿에서는 강등팀(꼴찌)과 승강 플레이오프로 갈 팀(꼴찌에서 [[홍진호|2등]])을 정하게 된다.[* 처음 도입되었던 2012시즌에서 [[신태용]] 감독이 이걸 이해하지 못해 욕을 먹었던 적이 있었다. 스플릿 라운드에 돌입하게 되면 정규시즌의 기록이 다 사라지고 스플릿 라운드에서 얻은 기록만을 비교하여 우승팀을 가린다고 착각했던 것. 덕택에 [[샤다라빠]]가 신명나게 까댔다.]
  • 고유민 . . . . 14회 일치
         || '''프로 입단''' || 2013-2014 V리그 1라운드 4순위(현대건설) ||
         초등학교 6학년때 부터 [[배구]]를 시작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위기가 많았지만[* [[http://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298227|프로입단 당시의 지역신문 기사]]] 복지단체의 지원을 받으며 [[배구]]선수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2013년 [[대구여자고등학교]]의 주 공격수였으며 [[이고은]]과 콤비를 이루어 주요 대회인 2013년 [[기독교방송|CBS]]배 전국남녀 중고배구대회 여고부에서 우승했다. 이때 선수는 겨우 10명 이었고 악조건 속에서의 우승이었다.
         이 대회의 활약으로 [[황현주(배구)|황현주]] 전 현대건설 감독이 주목하게 되고 1라운드에서 지명된다. 이때 배구팬들은 키 큰 [[황윤정]][* 기업은행 센터였으나 현재 실업 수원시청 소속.]이나 리시브 되는 최지유[* 기업은행에 2라운드 지명되었으나 메디컬 테스트에서 탈락했다.]나 뽑지, 리시브를 프로에서 배워야할 선수를 왜 1라운드에서 뽑을 필요가 있는가? 라며 황현주 전 감독을 깠다.
         == 프로 선수 시절 ==
         프로 입단 첫 시즌에는 [[김주하(배구선수)|김주하]], [[정미선(배구선수)|정미선]], [[박슬기]] 등 당연히 쟁쟁한 선배들에 밀려서 서브로 간간히 나왔다. 첫 프로 경기 출장은 2013~14시즌 첫 경기인 도로공사전 교체 선수로 잠깐 나왔다 들어갔다. 팀은 0:3 셧아웃을 당했다.
         프로 첫 선발 출장은 2013년 12월 29일 GS칼텍스 전이었는데 컨디션이 좋지 못했던 황연주를 대신해 라이트로 출장했다. 이때 팀이 0:3으로 패했는데 마지막 3세트는 10:25으로 대패했다. 다만 전체적으로 수비가 망해버린 팀에서 그나마 리시브를 적절히 받아낸 축에 속해서 욕을 먹진 않았다. 한편, 고유민은 실수했을 때 쟤 실수하고 왜 웃냐고 재밌다고 컬트적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시즌 대회 전 [[http://sports.donga.com/3/all/20150708/72365102/3| 프리뷰 기사]]에서 현대건설은 '부상병동'이라고 일컬어지며 제 실력 발휘가 어려울 것이라 예상되었다.[* 레프트 포지션만 따져도 작년 주전 레프트 [[김주하]]는 2015년 4월 발목 수술후 재활 중, 재작년 주전 레프트 정미선은 작년 컵대회 때 당한 복합십자인대 부상으로 작년 시즌을 통으로 쉰 후에 재활 중, 베테랑 한유미는 컵대회 직전까지 출전을 장담하기 힘들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고유민도 왼쪽 무릎이 좋지 않아 재활 중이었다. 라이트 포지션인 [[황연주]]도 고질적인 무릎은 물론이고 허벅지 근육 파열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다. 세터 [[이다영]]도 허리 부상의 여파에서 막 벗어난 상태였다.] 도로공사와의 경기 직전 라인업[* 센터: 양효진-김세영 라이트: 황연주 세터: 염혜선 레프트: 고유민-정미선 리베로: 김연견.]이 발표되자 배구갤러리, 경기중계댓글 할 거 없이 '''"도대체 팀 상황이 얼마나 막장이면 작년에 잘 보이지도 않던 애 둘을 스타팅으로 넣냐"'''며 비웃음과 조롱이 넘쳐났고 현대건설 팬들은 [[김천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도공]]의 새 감독 [[이호(배구선수)|이호]]의 첫 승리 상대가 될 생각에 답답해했다.
         2차전 인삼공사 전에서도 선발 출장했다. 이날도 현대건설은 기복이 있는 경기력을 보여줬지만 컵대회 직전까지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던 황연주-양효진-고유민의 삼각편대를 다시 한번 보여주면서 승리했다. --그것보다도 [[이다영]]이 잠시나마 경기감각을 되찾고, [[한유미]]의 정밀서브, [[염혜선]]의 닭장거부서브가 인상적인 경기였지만-- 13득점(팀내 2위, 12공격득점), 공격점유율 17.52%(팀내 3위), 공격성공률 '''50%(팀내 1위)''' 백어택(후위공격) 1[* 프로데뷔 첫 백어택], 1블로킹, 6디그, 리시브 성공률 28.57%--1차전 보다 3배 더 잘받았는데 그냥 그날그날 로또다--를 기록하면서 컵대회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던 현대건설 돌풍의 주역이 되었다. 주로 황연주와 양효진이 상대 블록커를 몰고 다니면 어디선가 나타나 그 빈틈으로 공격을 성공시켜 상대팀의 블록 포지션을 찢어놓거나 뒤에서 왔다갔다 하는 스크린성 플레이로 혼란을 주는 역할이 주효했다.
         시즌 최종 기록은 150 공격 시도/50 성공으로, 공격 성공률 33.33%. 157 리시브 시도/57 성공, 9실패로 리시브 성공률 30.57%. 세트당 디그 1.01, 세트당 세트 0.09를 기록했다.비슷한 롤이었던 박슬기가 은퇴 직전 시즌인 5년차에 달성한 공격 성공률-리시브 성공률 30%를 일단 프로 3년차에 달성하긴 했다. 은근한 노력가로 첫 시즌에 비한다면 경기력 자체는 점차 개선되어[* 수준이하의 서브, 수준 이하의 리시브, 수준 이하의 공격력으로 故황현주 감독에게는 배구선수가 공을 무서워하면 어디에다 쓰냐고 극딜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다음 시즌에는 양철호 감독이 배구선수가 볼 미팅도 제대로 못하면 어디에다 쓰냐고 까였다. 다행히도 3번째 시즌엔 그렇게 욕먹지는 않았다.] 컵대회 때는 날라다니다가 시즌만 되면 수비에서 무너져 내리며 지워지는 패턴을 보였다. 터질 듯하면서 안 터지고 있어서 한국인 레프트 한자리에 고통스러워 하는 현대건설 팬들의 애증의 대상이 되었다.
         스페셜 브이 프로그램에서 밑도 끝도 없는 드립으로 선배들을 쇼크에 빠지게 했는데, '''"내가 [[수지(miss A)|수지]] 닮았다."'''고 하는 이상한 사람이 들어왔다고 해서 보니 당시 1년차 고유민 이었다. 이는 [[황연주]]와 [[양효진]][* 양효진의 경우 심지어 본인이 [[전지현]] 닮았다고 말한 걸 들었을 정도다.]이 직접 들었고 아니겠지 하고 넘겼으나 동기 정현주가 당시 주장이던 황연주에게 일러바치면서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안습하게도 2주 동안 공식 홈페이지 프로필이 얼굴만 바뀐 채로 야나 프로필이었던 적이 있었다.
  • 김대륙 . . . . 14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2, top1=롯데 자이언츠/선수단, top2=야구 관련 인물(KBO))]
         || '''학력''' || 대해초-포철중-[[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포철공고]]-[[동아대학교|동아대]] ||
         || '''프로입단''' || [[2015년]] [[롯데 자이언츠]] 2차 5라운드 48순위 ||
         롯데 자이언츠 소속의 야구선수.
         == 프로 선수 시절 ==
         6월 11일 [[kt wiz|kt]]를 상대로 6회초에 대수비로 들어온 후 6회말에 프로 첫 타석, 초구를 받아 쳐 좌전안타를 만들어냈다.
         6월 14일~~ 박종윤이 150타석동안 단 하나도 기록하지 못한~~ 볼넷을 골라냈다. 프로 첫 사사구.
         6월 19일 대수비로 출장해 프로통산 두번째 안타를 기록했다.
         시즌 후 상무 야구단에 [[김준태(야구선수)|김준태]]와 함께 지원했지만 최종 합격한 김준태와 달리 최종 합격자 명단에 들지 못했다.
          * 잘 생겼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6/11/2015061103946.html|#언론은 벌써 롯데의 아이돌 취급]] ~~그래서 벌써 얼빠들이 많이 생겼다~~ 이 때문에 본인도 고민이 많은 듯.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12&article_id=0002712527&redirect=false|롯데 김대륙, "외모 아닌 야구로 보여주고 싶다"]] 롯데 팬들은 [[김원중(야구선수)|김원중]]과 함께 묶어 팀 외모 투탑으로 인정해주지만 생긴 만큼 야구를 했더라면(…)이라고 평가한다.
         [각주][[분류:1992년 출생]][[분류:포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타자]][[분류:내야수]][[분류:우투우타]]
  • 동군연합 . . . . 14회 일치
         당시 폴란드의 왕가였던 앙쥬왕가가 남계가 단절되면서 당시 폴란드 왕의 딸이 리투아니아의 대공에게 시집가면서 생긴 연합. 쭉유지되다가 이후 폴란드가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에게 삼분할되면서 '''멸망'''~~딴애들은 전부 해체나 상실인데 얘만 멸망이다. 안습~~
         ===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 ===
         본래 튜튼기사단이란 신정국가가 지배하던 프로이센 지방은 [* 정확히는 폴란드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곳의 이교도때문에 통치를 못할 수준이 되자 튜튼기사단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 이후 튜튼기사단의 단장 알브레이트가 프로이센 공국을 선언하고 세속화되어 호엔촐레른 왕가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계가 단절되자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였던 브란덴부르크와 동군연합이 된 것이다. 이게 왜 추가될 사례인지 모를 사람이 있을텐데, 쉽게 말해 '''독일제국의 전신이다.''' 이로써 단순 발트지방 소국에 불과했던 브란덴부르크가 프로이센 지방을 삼키며 본격적으로 열강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여담으로, 브란덴부르크가 핵심지였지만, 이후의 국명은 '프로이센'이 되는데 이는 프로이센이 당시 '독일 바깥'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독일왕'을 겸하므로 독일영역 내부의 영주는 별도의 왕위를 주장할 수 없다. 프로이센은 본래 독일인의 영역이 아닌 발트계 민족 프루사 족의 땅이라서 별도의 왕위로서 '프로이센 왕'이라는 칭호를 내세우는게 가능했던 것이다.(마찬가지로 체코 지역도 본래의 독일 지역이 아니었으므로 '보헤미아 왕'을 칭할 수 있다.) 다만, 역시 프로이센 공작위도 엄밀히 말하자면 본래 폴란드 왕의 봉신인 신세라 이걸로 트집이 잡힐걸 우려해서인지 'King of Prussia'(프로이센 왕)이 아닌 'King in Prussia'(프로이센 안의 왕)이라는 일종의 외왕내제식 편법을 썼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시기에 'King of Prussia'라는 칭호를 쓰게 됀다.
         영국에 빅토리아 1세가 즉위. 여왕을 인정하는 영국과는 달리 [[살리카법]]을 따르는 하노버왕국은 여성 군주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대신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가 즉위하면서 연합은 해체된다. ~~그리고 하노버 왕국은 프로이센한테 멸망당한게 함정.~~
         당시 바이에른 선제후국을 지배하고 있던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가가 단절되면서 팔츠계 비텔스바흐가가 계승되면서 나타난 동군연합. 이후 남독일을 장악하려고 오스트리아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바이에른 계승전쟁이 대번 터졌다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오스트리아군이 박살나면서(...) 이 지방은 비텔스바흐가가 장악하게 되고, 최종적으로 바이에른 왕국으로 통합된다.
  • 레이디 제인 (가수) . . . . 14회 일치
         | 소속그룹 = 아키버드 (2006년 ~ 2009년)<br/>[[티라미스 (음악 그룹)|티라미스]] (2009년 ~ 현재)
         2006년 [[허밍 어반 스테레오]] 2집의 객원보컬로 활동했으며 같은 해 인디 밴드 아키버드의 1집 《All Allowed》로 데뷔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44&aid=0000130133 '핫'한 레이디제인! 그녀가 궁금하다.], 《스포츠경향》, 2010년 11월 8일</ref> 300 대 1의 경쟁률을 극복하고 발굴되고 나서 2009년 아키버드에서 탈퇴했다. 동년 [[홍대 (지명)|홍대]] 유명 실력파 밴드 [[티라미스 (음악 그룹)|티라미스]]의 멤버로 디지털 싱글 ‘슈팅스타’를 발매하였다. 이때 홍대에서의 많은 활동으로 ‘홍대여신’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2013년 10월 ‘Dandy Girl’을 발표한 이후 레이디 제인은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서 다양한 모습을 비추어왔으며, [[홍진호]]와의 열애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 [[tvN]] 《[[롤러코스터 (텔레비전 프로그램)|재밌는 TV 롤러코스터]]》
         * [[KBS 2TV|KBS2]] 《[[해피선데이]] - [[맘마미아 (텔레비전 프로그램)|맘마미아]]》
         * [[KBS2]] 《[[비타민 (텔레비전 프로그램)|비타민]]》
         * [[스토리온|Story On]] 《[[렛미인 (텔레비전 프로그램)|‎렛미인 4]]》
         * [[KBS2]] 《[[해피투게더 (텔레비전 프로그램)|해피투게더 시즌 3]]》
         * [[SBS]] 《[[매직아이 (텔레비전 프로그램)|매직아이]]》
         * [[KBS1]] 《[[스포츠 이야기 운동화 2.0]] - 스포츠 대작전 (야구편)》
         * [[SBS 파워FM]] 《[[영스트리트 (라디오 프로그램)|김희철의 영스트리트]]》
         * [[SBS 파워FM]] 《[[영스트리트 (라디오 프로그램)|붐의 영스트리트]]》
         * [[KBS 제2FM]] 《[[2시 (라디오 프로그램)|레이디제인의 2시]]》
  • 박종윤 (1993년) . . . . 14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2년]]
         |드래프트 순위 = [[2012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12년 2라운드]] ([[넥센 히어로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2년]] [[6월 21일]] <br />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 대 [[두산 베어스|두산]]전 구원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17년]] [[6월 2일]] <br /> [[고척스카이돔|고척]] 대 [[두산 베어스|두산]]전 구원
         * [[상무 야구단]] (2014년 ~ 2015년)
         '''박종윤'''(朴鐘允<ref>한국야구위원회, 2012 가이드북</ref>, [[1993년]] [[2월 9일]] ~ )은 전 [[KBO 리그]] [[넥센 히어로즈]]의 [[투수]]이다.
         ==[[상무 야구단]] 시절==
         {{2011년 아시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 대한민국 선수 명단}}
         [[분류:경상중학교 동문]][[분류:대구본리초등학교 동문]][[분류:상무 야구단 선수]]
  • 변현제 . . . . 14회 일치
         {{프로게이머 정보
         | 종족 = [[프로토스]]
         '''변현제'''([[1994년]] [[1월 28일]] ~ )는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II]] [[프로게이머]]이다. '''Mini'''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며, 종족은 [[프로토스]]이다.
         [[SK플래닛 스타크래프트 II 프로리그 시즌 2]]에서는 변현제가 스타2로 출전했을때 처음에는 2연승을 했으나 내리 연패를 하며 2승 4패의 저조한 기록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브루드 워]]에서는 저그전에 강한 프로토스중 한명으로, 2012 스타리그 듀얼토너먼트에서는 자신보다 랭크가 높던 [[박재혁 (프로게이머)|박재혁]]과 [[김성대 (프로게이머)|김성대]]를 꺾고 16강에 진출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포스트 김택용'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으나, 종목이 스타2로 완전 전환되며 유명무실한 별명이 되고 말았다.
         * [[2010년 1월]] 제55회 스타크래프트 준프로게이머 선발전 입상
         * [[2013년 7월]] SK플래닛 스타크래프트 II 프로리그 12-13 플레이오프 MVP
         {{토막글|한국 사람}}
         [[분류:199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e스포츠 선수]][[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스타크래프트 II 프로게이머]][[분류:프로토스 선수]][[분류:SouL (e스포츠)의 선수]][[분류: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 유열 (가수) . . . . 14회 일치
         |직업 = [[가수]] <br /> [[작사가]] <br /> [[뮤지컬 배우]] <br /> [[뮤지컬]] [[제작자|감독]] <br /> [[음반]] [[음악 프로듀서|프로듀서]]
         '''유열'''(柳列, 본명 '''류종렬'''(柳鍾列) 예명 유열로 개명 (2009.11.09), [[1961년]] [[1월 12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자 [[뮤지컬|어린이 및 가족 뮤지컬]] [[연출가|프로듀서]]이다. 대표곡으로는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가을비》, 《이별이래》, 《하늘을 닮은 그대에게》, 《단 한번만이라도》, 《화려한 날은 가고》, 《어느날 문득》, 《그 여름》, 《사랑의 찬가》 등이 있다.
         [[대구초등학교]], [[대구중학교 (대구)|대구중학교]], [[대구고등학교 (대구)|대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무역학을 전공. [[고려대학교 문화예술 최고위과정수료]] [[1986년]] [[12월 19일]] [[MBC 대학가요제|제10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라는 노래로 대상을 수상하면서 음악계에 데뷔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http://www.chosun.com/se/news/200601/200601190193.html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 [브라보~! 7080] '데뷔 20주년' 유열<!-- 봇이 붙인 제목 -->]</ref> 그 후 [[1989년]]까지 매년 [[한국방송]]·[[문화방송]]의 연말 10대가수로 선정되는 등 큰 인기를 누렸다.<ref name=autogenerated2>[http://www.izm.co.kr/news_view.asp?key=1&s_idx=1700 * IZM - New Stream *<!-- 봇이 붙인 제목 -->]</ref> 1996년 대한민국 동요대상,동요를 사랑한 가수상 수상
         [[신애라]] 등 [[연예인]]들이 읽어주는 [[오디오 북]]을 만드는 사업도 진행했었다.<ref name=autogenerated2 /> [[2007년]] [[한국여성장애인연합]]의 제1대 홍보대사가 되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10490 가수 유열, 여성장애인 다리가 되어 - 오마이뉴스<!-- 봇이 붙인 제목 -->]</ref>
         직접 제작한 어린이 뮤지컬 《브레멘 음악대》는 현재까지 70만명 관객돌파 흥행뮤지컬로 자리매김하고 있고 2009년에는 [[독일]] [[브레멘]]주정부 초청공연,2011년 8월[[중국 상해]] [[국제 아동극 페스티벌]]에 개막작으로 선정된 바 있다.
         2010년 제 1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한국콘텐츠진흥원장 표창을 받았다.
         한국 여성장애인연합 홍보대사 /
         한국음악실연자연합회 이사
         * [[한국외국어대학교]] 무역학과 학사
         === 라디오 프로그램 ===
         [[분류:196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학가요제 출신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프로듀서]][[분류:대한민국의 팝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연출가]][[분류:뮤지컬 감독]][[분류:1986년 데뷔]][[분류:동아방송예술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구초등학교 동문]][[분류:대구중학교 (대구) 동문]][[분류:한국외국어대학교 동문]][[분류:대구고등학교 (대구)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침례교도]][[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음악가]]
  • 이상백 (1904년) . . . . 14회 일치
         | 소속 = 前 [[국제 올림픽 위원회|국제올림픽위원회]] 종신위원 <br/> 前 [[대한민국 문교부]] 편수관 <br/> 前 [[서울대학교]] 교수 <br/> 前 [[고려대학교]] 교수 <br/> 前 [[한국독립당]] 체육행정특보위원
         [[1924년]] 일본의 [[일본 대학농구연맹]]을 결성하고 [[와세다 대학]] 농구팀 대표로 [[일본 대학농구연맹]]에 참여하였으며, 일본 대학농구연맹 농구부 주장으로 [[미국]]에 원정 경기에 출전하여 여러 번 우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밖에 축구, 야구에도 주전 선수로 실력을 보여주었다. [[1927년]]에 [[와세다 대학]] 문학부 사회철학과를 졸업했다. 그 뒤 모교인 [[와세다 대학]] 동양사상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또한 [[1910년]]까지도 [[고려]]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 손자라는 주장의 허구성을 논증하고, 조선의 건국 세력이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손인 것처럼 유포했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이를 근거로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에 취하여'를 발표하였다. 또한 조선 전기의 서자 차별 문제에 대한 연구 외에도 과부 재가 금지법인 '재가금지습속(再嫁禁止習俗)의 유래에 대한 연구' 등의 논저를 발표하였다. 그밖에 진단학회에서 편찬한 《한국사-근세전기편-》과 《한국사-근세후기편-》의 편집을 담당하였다.
         그는 대학에서 국사, 근세사 외에도 사회학사, 한국사회론 등을 강의하였으며, 《질서와 진보》, 《중간계급의 성격》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사회학과의 개설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한 이래 국내 최초로 사회학과를 설립하고, 대학 강의와 교양지 및 학술지를 통해 사회학을 보급하였다. 또한 사회학을 연구하는데 기초자료로서 통계조사와 설문을 채택, 통계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이어 사회학의 연구와 보급을 위해 외국 사회학을 소개하는 데도 힘써, 미헬스(Michels,R.)의 《정치 사회학》, 루세그 와런의 《사회학개론》 등의 책을 [[한글]]로 손수 번역, 이들 서적의 [[번역서]]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의 사회학은 주로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고전 사회학 이론을 국내에 도입하되 고전 사회학 이론을 한국 사회에 적용하고 이해하려 노력하였다. 통계학을 연구하면서 사회 조사에도 관심을 기울여 농촌, 도시, 사회 계층 등에 관한 여러 가지 조사 연구와 설문 등을 하였다. [[황해]]안의 여러 섬들에 관한 조사보고서인 《서해도서 (西海島嶼)》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1957년]] [[한국사회학회]]의 창립에 참여하고, [[한국사회학회]]의 1대 회장이 되었으며 2대 회장으로 연임되었다. [[1961년]] [[6월]] [[5·16 군사 정변]] 이후 군정에서 조직한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으로 위촉되었다.
         장례식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한국사회학회, 진단학회, 대한체육회, 대한올림픽위원회 등 5개 단체가 주관한 연합장으로 주관되어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현 [[대구광역시]] 남구 화원동) 가족 묘역에 안장되었다. 묘비는 사후 1년 뒤인 [[1967년]] 그의 1주기에 세워졌는데, 묘비문은 국문학자 [[이희승]](李熙昇)이 짓고, 글씨는 이기우(李基雨)가 썼다.
         *《한국사:근세전기편》
         *《한국사:근세후기편》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65&aid=0000041893 OLD SCHOOL 한국 체육사의 巨木 이상백]
         [[분류:1904년 태어남]][[분류:1966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역사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스포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농구 선수]][[분류:일제 강점기의 스포츠 평론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수필가]][[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건국동맹]][[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분류: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분류:한국독립당]][[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인]][[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역사가]][[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사회학자]][[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
  • 이상호 (1989년) . . . . 14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0년]]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3년]] [[4월 2일]]<br />[[마산종합운동장 야구장|마산]] 대 [[롯데 자이언츠|롯데]]전 대주자
         * [[상무 야구단]] (2015년 ~ 2016년)
         [[10월 9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 [[삼성 라이온즈|삼성]]전에서 [[차우찬]]을 상대로 솔로 홈런을 기록하며 데뷔 첫 홈런을 기록했다.<ref>[http://osen.mt.co.kr/article/G1109977238 NC 이상호, 차우찬에게서 데뷔 첫 홈런] - OSEN</ref>
         ====[[2014년 한국프로야구 포스트시즌|준플레이오프]]====
         ==[[상무 야구단]] 시절==
         [[12월 22일]] [[상무 야구단]]에 [[김희원 (야구 선수)|김희원]], [[권희동]]과 함께 2015년에 입대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7257485 상무 야구단, 이용찬 등 17명 합격자 발표 ] - 연합뉴스</ref>
         [[분류:198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KBO 리그 2루수]][[분류:KBO 리그 유격수]][[분류:KBO 리그 3루수]][[분류:KBO 리그 1루수]][[분류:KBO 리그 외야수]][[분류:KBO 리그 좌익수]][[분류:KBO 리그 지명 타자]][[분류:NC 다이노스 선수]][[분류:대구옥산초등학교 동문]][[분류:경운중학교 (대구) 동문]][[분류:대구상원고등학교 동문]][[분류:강릉영동대학교 동문]][[분류:롯데 자이언츠 선수]][[분류:SK 와이번스 선수]][[분류:상무 야구단 선수]]
  • 이상화 (시인) . . . . 14회 일치
         이상화는 [[1901년]](광무 4년) [[4월 5일]]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부]] 의 양옥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시우(李時雨)이며, 어머니는 김신자(金愼子)로 [[김해 김씨]]이다. 4형제 중 둘째이다. 형 이상정은 독립 운동가이며, 셋째 아우 [[이상백 (사학자)|이상백]]은 한국최초의 IOC위원이자 한국 사회학계의 선구자이고 넷째 아우 이상오는 정통 수렵가이자 [[바둑]] 유단자이다. 그의 집안은 [[대구]]의 명문가로 대 부잣집이었으나 아버지 이시우는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자손들은 [[대구광역시|대구]]의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1940년 대구부 계산 2동에 집을 마련하였다. 그가 새로 마련한 집 바로 앞에는 김광제와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했던 [[서상돈]] 고택이 있다.<ref name="gotack01">[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62516 헐릴 위기에서 우뚝선 이상화 고택] 오마이뉴스 2008.08.13</ref> [[1940년]]말 [[대륜중학교|교남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대구부 계산2동 84번지의 집에서 주로 생활하며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그해부터 [[춘향전]]을 [[영어]]로 번역하고, 이어 한국 [[국문학사]]와 [[프랑스|불란서]][[시]]정석 등을 [[한글]]로 번역을 시도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만다.
         [[2009년]] 초부터 [[대경대학교]] 뮤지컬학과 학생들은 이상화의 일대기를 뮤지컬로 제작하였다. 대본을 맡은 학생 허윤선은 이상화의 둘째 아들인 이충희를 수소문해 이상화 시인의 삶에 대해 묻고 극을 구성했다.<ref name="mkros">[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09&no=609348 <nowiki>[</nowiki>민족시인 이상화 일대기 창작뮤지컬로 그린다<nowiki>]</nowiki>] 매일경제 2009.11.25</ref> 이들은 지난 6개월간 시인의 삶을 기록한 책자를 참고하면서 대구시 중구 계산동 소재 이상화 고택을 수십차례 방문해 당시 분위기를 몸에 익혔다. 대경대 뮤지컬과 1학년 학생 30여명은 1920년대 식민지 시대를 살면서 저항시인으로 뜻을 굽히지 않은 이상화 시인의 삶과 비극적 역사상황을 담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만들었다.<ref name="mkros"/>
         [[2009년]] [[11월 30일]]과 [[12월]]에는 그의 일대기를 다룬 창작뮤지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공연되었다.<ref name="pahjeon">[http://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142989 민족시인 이상화 일대기 창작뮤지컬 공연] 경북매일신문 2009.11.26</ref>
         |제목=한국현대문학사
         [[김현 (문학평론가)|김현]]은 1920년대 한국시의 두 가지 과제를 식민지 현실 직시와 새로운 시 형식의 모색이라고 분석하면서, 이를 나름대로 해결하려고 노력한 시인으로 [[김소월]], [[한용운]], 이상화 세 사람을 꼽는다. 그러면서 이상화의 현실 인식이 식민지 현실은 한국 궁핍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직시하는 면에서 투철하며, 그 현실 인식이 현실 밖이라면 어디든 괜찮다는 극단적인 탈출 욕구를 낳는다면서 이상화의 시를 식민지 초기의 낭만주의적 성격의 한 상징으로 보았다.<ref>{{서적 인용
         |제목=한국현대문학사
         |제목=한국현대문학사
         조병춘도 이명재와 비슷하게 이상화 시의 세 단계를 감상적 낭만주의 시, 저항적 민족주의 시, 민족적 비애와 국토예찬의 시로 나눴으며, 특히 40년대에 문인들 거의가 친일문학을 일삼았음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은 그의 민족정기와 문학정신을 높이 평가하였다.<ref>조병춘, 〈한국 현대시의 전개양상 연구〉, 명지대학교 박사학위논문(1979) 174쪽</ref>
         * [[2009년]] 최춘식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뮤지컬)|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분류:1901년 태어남]][[분류:1943년 죽음]][[분류:20세기 한국 사람]][[분류:사상가]][[분류:대한제국의 사회 운동가]][[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박헌영]][[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소설가]][[분류:일제 강점기의 문학 평론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스포츠 평론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권투 선수]][[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경주 이씨]][[분류:염상섭]][[분류:유교 신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위암으로 죽은 사람]][[분류:결핵으로 죽은 사람]][[분류: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작가]][[분류:김성수 (1891년)]][[분류:박중양]][[분류:대륜중학교 동문]][[분류:20세기 시인]]
  • 최충연 . . . . 14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6년]]
         |드래프트 순위 = [[2016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6년]] 1차 지명([[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6년]] [[8월 25일]] <br />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광주]] 대 [[KIA 타이거즈|KIA]]전 선발
         {{메달 스포츠|남자 [[야구]]}}
         {{금메달|[[2018년 아시안 게임|2018년 자카르타-팔렘방]]|[[야구]]}}
         [[2017년]] [[6월 2일]] [[KIA 타이거즈|KIA]]전에 [[백정현]]이 타구에 맞아 5회를 다 막지 못하고 강판되자 그가 구원 등판해서 3.2이닝 무실점을 기록하며 데뷔 첫 승을 기록했다.<ref>[http://www.newspim.com/news/view/20170602000278 ‘최충연 프로 데뷔 첫승’ 삼성 라이온즈 3연승 질주... 김상수 3안타2타점] - 뉴스핌</ref>
         * 제 27회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 국가대표
         * 제 43회 봉황대기 전국 고교 야구 대회 최우수 선수
         {{2018년 아시안 게임 야구 대한민국 선수 명단}}
         [[분류:199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분류:대구수창초등학교 동문]][[분류:대구중학교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야구 참가 선수]][[분류:2018년 아시안 게임 야구 참가 선수]]
  • Victoria II . . . . 13회 일치
         === 주 & 프로빈스 ===
         각 주는 여러개의 프로빈스(Province)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서울 주는 서울, 강릉, 원주, 대전, 인천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자의 프로빈스는 다음과 같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
          * 치안율: 해당 지역의 범죄가 얼마나 저지되는가에 따른 정도. 관료 POP가 제공하는 효율성과 국가 관리 효율성에 따라 바뀐다. 이 수치가 낮을수록 해당 프로빈스에서 사회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 코어: 영토의 소유권…비슷한 개념. 만약 다른 나라의 프로빈스에 자국의 코어가 박혀있다면 해당 프로빈스를 되찾기 위해 전쟁을 벌이거나 위기를 일으킬 수 있다. 또한 다른 국가의 코어가 있는 프로빈스에서 민족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다른 나라의 영토로 만들거나 독립을 벌이는 일이 일어날수도 있다.
          * 보급 한도: 해당 프로빈스에서 얼마나 많은 수의 병력이 보급을 받을 수 있는가의 정도. 단위는 ~,000명이다. 만약 이 수치 이상의 부대가 해당 지역에 있다면 보급 부족으로 병사들이 죽어나간다.
         프로빈스에 건물을 짓거나 있는 건물을 증축해 효율을 늘릴 수 있다. 건설이나 증축을 하려면 그에 해당하는 기술, 적당한 자금, 마지막으로 해당 건물의 재료로 쓸 상품이 필요하다. 건설이나 증축이 진행되는 중에는 해당 지역에 크레인이 등장하기에 쉽게 알아볼 수 있다.
          * Fort(요새): 해당 프로빈스에서 전투가 벌어질 경우 프로빈스를 소유한 쪽에게 방어 능력치 보너스를 준다.
          * Prussian Constitutionalism(프로이센식 입헌군주정) : 입헌군주제이긴 한데 사실상 국왕이 다 해먹는 유사 민주주의. 전제 군주정 국가에서 투표를 허가하면 이게 된다. 여당을 플레이어가 바꿀 수 있지만 일정 주기마다 치뤄지는 총선에 따라서도 바뀐다. 무정부 자유주의, 공산주의, 파시스트는 여당이 될 수 없다. 자코뱅 반란으로 뒤집어지면 민주정이 된다.
          * German Unit Pack : 프로이센, 독일 제국, 북독일 연방, 남독일 연방의 유닛 스프라이트를 고증에 따른 군복으로 바꿔주는 DLC.
  • 구재서 . . . . 13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82년]]
         |드래프트 순위 = 프로 원년 선수
         '''구재서'''(具載書<ref>프로야구 金始眞(김시진) 6연승…올2완봉승, 동아일보, 1985년 5월 2일자.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5050200209209012&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5-05-02&officeId=00020&pageNo=9&printNo=19562&publishType=00020</ref>, [[1963년]] [[8월 15일]] ~ )는 전 [[KBO 리그]] [[두산 베어스|OB 베어스]]의 외야수이다.
         [[신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 한국 프로 야구가 출범함에 따라 [[두산 베어스|OB 베어스]]의 원년 멤버로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원년 멤버로서 [[OB 베어스]]에서 같이 활동하였던 전 야구선수 이자 [[NC 다이노스]]의 2군 수비 코치 [[구천서]]는 그의 쌍둥이 형이다.
         == 프로야구 시절 ==
         [[신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에 [[OB 베어스]]에 입단, 원년 멤버로 활동하였다. 선수 시절 주 포지션은 외야수였으며, 발이 빨라 주로 대주자로 출장하였다. 그 후 [[1989년]]까지 활동하다가 은퇴한다.<ref>'최정-최항 형제' SK 한솥밥, 야구계 한팀 형제 선수는?, 스포츠서울, 2011년 8월 26일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73&aid=0002080576</ref>
         {{토막글|야구인}}
  • 김동한(가수) . . . . 13회 일치
          * 하위 문서: [[김동한(가수)/프로듀스 101 시즌2]], [[JBJ/활동]]
         [include(틀:프로젝트 문서, 프로젝트=나무위키 보이그룹 프로젝트)]
         ||<:><#232323> {{{#FFFFFF ''' 별명 ''' }}} ||<(> 하니, 동센예[* ''''동'''한이가 '''센'''터에 있는 게 '''예'''뻐'의 줄임말.], 호두[* '카운트다운 101'에서 호두를 손가락으로 박살내는 개인기를 보여주었다.], 동엔예[* ''''동'''한이가 '''엔'''딩인게 '''예'''뻐'의 줄임말.] 포두[* 프로듀스 101 시즌 2 종료 후 보라(포도)색으로 염색한 머리 + 호두], 막내온탑, 김무민[* [[무민]]과 닮아서. 아예 [[https://mobile.twitter.com/isdonghanmoomin|무민 닮은 모습을 모아놓은 트위터 계정]]도 있다.], 김무브[* JBJ 단독 콘서트에서 [[태민]]의 [[MOVE(태민)|MOVE]]를 춰서.] ||
         2017년 [[프로듀스 101 시즌2]]에 참가했다.
         === [[프로듀스 101 시즌2]]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김동한(JBJ)/프로듀스 101 시즌2)]
          * 이전에 합기도를 했었다가[* 프로듀스101에서도 1분PR영상에서 도복을 입고 보여주었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부상을 입어서 그만두었다고 밝혔다. 가수를 꿈꾸기 전에는 경호원을 꿈꾸었다고...
          * 돌직구를 잘 날리는 타입이다. [[프로듀스 101 시즌2]] [[프로듀스 101 시즌2/3회|3회]]에서도 [[EXO]]의 Call Me Baby 1조에서 [[장문복]]에 대해 "문복이 형이 저희를 췍길을 걷게 해줄 거니까요"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안무를 잘 따라오지 못하자 이내 양날의 검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 최근에 '단식하는 푸드 파이터' 라는 별명이 붙었다. 직업을 떠나서 음식을 많이 먹는 사람들에게 흔히 붙여지게 되어버린 [[푸드 파이터]]와, 그와 대조되는 [[단식]]이라는 단어가 합쳐져 모순적인 매력이 생겼는데, 이 별명이 붙은 이유는 김동한 본인이 먹는 것을 좋아하지만 체중 및 몸매 관리를 위해 [[다이어트]]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지만 [[프로듀스 101 시즌2]] 종료 이후 여타 방송 매체에 출연하게 되면서 특히 음식이 함께하는 순간에 [[먹방]] 본능이 무엇인가를 숨김없이 발휘하였고 ~~프듀가 끝나고 너무 먹는 바람에 살이 쪘었다고 얘기했지만 그렇게 많이 찐 것 같지도 않았다는게 함정~~ [[JBJ]] 내에서도 혈기왕성한 막내답게 활동량이 많은데, 리얼리티를 통해서도 '참고있지만 리미터를 해제(?)하면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표정으로 먹는 모습'이 더욱 빛을 발하면서 이 별명이 자연스럽게 안착했다. [[http://tv.naver.com/v/2210364|#]]
         [[분류:JBJ]][[분류:달서구 출신 인물]] [[분류:1998년 출생]] [[분류:프로듀스 101/참가자]] [[분류:아이돌 막내]]
  • 김상훈 (1963년) . . . . 13회 일치
         |정당 = [[자유한국당]]
         * [[2008년]] [[1월]] ~ [[2009년]] : 대구시청 기업지원본부장
         * [[2009년]] ~ [[2011년]] [[12월]] : 대구시청 경제통상국장
         * [[2017년]] ~ [[2018년 6월]] : 자유한국당 정책위원회 보건복지 정책조정위원장
         * [[2017년]] [[2월]] ~ : [[자유한국당]] 정책위원회 수석부의장
         * [[2017년]] [[3월]] ~ : [[자유한국당]] 지방자치위원장
         * [[2017년]] [[6월]] ~ : [[자유한국당]] 민생AS센터 맞춤복지위원회 위원장
         * [[2017년]] [[7월]] ~ [[2018년 8월]] : [[자유한국당]] 대구시당 위원장
         * [[2018년]] [[3월]] ~ [[2018년]] [[5월]] : 6.13지방선거 자유한국당 대구시당 공천관리위원장
         * [[2018년]] [[5월 23일]] ~ [[2018년]] [[6월 13일]] : 6.13지방선거 자유한국당 대구시당 공동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 [[2018년 8월]] ~ :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회 정당개혁위원회 위원
         |소속정당 =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분류:1963년 태어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자유한국당의 정치인]][[분류:대건고등학교 동문]][[분류:성광중학교 동문]][[분류:대구서부초등학교 동문]][[분류:영남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살아있는 사람]]
  • 김재규 . . . . 13회 일치
         ||<:> '''수상''' || ~~[[대한민국 훈장|충무무공훈장]]~~[* 삭선이 그어진 것은 서훈이 취소되었기 때문. [[2006년]] [[3월 21일]] 정부는 서훈을 취소할 수 있게 개정된 상훈법 규정에 따라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포함한 공직자 및 기업인 174명에 대한 서훈을 취소했으며, 10·26사태의 주범인 김재규 또한 그 대상에 포함되어 8개 훈·포장을 박탈당하였다. [[https://news.joins.com/article/2238076|기사]] ] [br]~~[[대한민국 훈장|보국훈장]] 천수장~~[br]~~[[대한민국 훈장|보국훈장]] 삼일장~~[br]~~[[대한민국 훈장|보국훈장]] 국선장~~[br]~~[[대한민국 훈장|보국훈장]] 광복장~~[br]~~[[대한민국 훈장|보국훈장]] 통일장~~[br]~~[[대한민국 훈장|청조근정훈장]]~~[br][[사우디아라비아]] 킹 압둘 아지즈 훈장[* 당시 건설부장관으로서 몸소 중동에 방문해 (한국 기업을 통한) 중동 개발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공을 인정받아 획득했다.] ||
         1943년 안동공립농림학교[* 해방 후 안동농림고등학교, 현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한 후, 그 해, 대구농업전문학교 중등교원양성소[* 이 당시에는 2년제 전문학교였다. 해방 후 대구농과대학을 거쳐 1951년 대구사범학교 등과 통합하여 경북대학교로 개교한다.]에 입학하여 1945년 수료하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중등교원의 수가 부족한데 반해, 조선 내에는 고등사범학교가 없었다. 문과의 경우 [[경성제국대학]] 졸업자 등으로 수요를 채울 수 있었지만, 이공계 쪽의 교사가 부족하여 일제는 각종 전문학교에 2년제 '교원양성소' 과정을 도입하여 교사인력을 충원했다. 1945년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조선인이 징집 대상이 되었을 때 [[일본군 해군]]의 [[카미카제]] 양성을 위한 예과 후보생으로 차출되었으며 카미카제의 생존률이 0%라는것을 감안해보았을때 만약 일본이 빨리 몰락하지 않았다면 김재규는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당시 [[한국]]과 [[미국]]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박정희]]가 미국의 만류를 뿌리치고 강경진압을 했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337787|서울에도 계엄을 내리고 군을 투입할 계획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유혈사태로 번졌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김재규 역시 박정희 사망 이후 비상계엄령을 추진하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5개월 한정이라는 전재를 달았으며 부마민주항쟁 때도 유혈 진압을 비판했던 입장이기 때문에 강경한 방식으로 막가파 운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군부의 시각을 돌리기 위해 그럴싸한 핑계를 대려고 했다가 뽀록이 났다는 견해다.
         이밖에도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의 구속을 반대하는 동시에 [[김대중]]의 가택 연금을 일시적으로 해제시키고 김영삼과 만나게 승인했으며, [[차지철]]과의 갈등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승진과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다가 발생한 갈등이 아니라 국정 방향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갈등이 생겼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박정희를 추앙하는 조갑제조차도 김재규가 사욕이 있었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희박하다는 칼럼을 개시했을 정도였다. 김영삼의 측근이었던 김봉조의 회고에 의하면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장 시절 자신을 방으로 불러 격려하며 김영삼은 한국을 위해 큰 일을 할 인물이고 앞으로 김영삼이 정치활동을 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자신있게 잘 모시라며 격려하였다고 한다.[[http://m.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773|#]]
         >김재규의 거사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데 이르지는 못했지만, 여성 연예인들이 저런 식으로 대통령의 술자리에 불려가는 일만큼은 확실히 차단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김재규의 구명을 호소하면서 우리의 민주화가 김재규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는데, 민주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그 여성 연예인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우리 역사에는 또다른 10·26 사건이 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쏜 날이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70년을 두고 2개의 10·26 사건이 있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해 군사독재가 왔는데, 일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이토의 제삿날과 군사독재의 상징인 박정희의 제삿날이 같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중략)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득세한 나라에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 의사의 계보는 대가 끊어졌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으면서도 박정희의 명예는 끝까지 지켜주고자 했던 김재규는 대가 끊겼던 한국 보수우익의 계보학에서 돌출한 마지막 대륙형 인간이었다.
         2015년 박권흠 전 의원이 김영삼과 김재규가 단 둘이 나눈 대화 내용을 한 언론매체에 공개하였는데, 당시 현직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가 야당 총재였던 김영삼을 지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큰 인상을 남기고 있다. 1979년 김영삼은 <뉴욕타임스>와의 기자회견에서 "한국정부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과 공화당은 김영삼의 발언을 '사대주의적 망언'으로 규정하고 국회의원직 제명을 시도한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양 측을 중재하고자 김영삼에게 만남을 요청하여 실제로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박권흠 전 의원이 공개한 둘의 대화는 다음과 같다.[[http://m.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876|#]]
         가정이긴 하지만, 박정희가 살아있었다면 3저 호황을 통한 경제발전, [[핵무기]] 개발 등을 통해 [[리콴유]] 처럼 박씨 일가의 세습독재 체제를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있다. 육사를 나와 장교가 된 박지만은 군부를 장악하여 [[리셴룽]]처럼 젊은 나이에 장성을 지내고 나서 정계로 들어와 후계자가 되었을 것이고 박근혜는 최씨 일가의 도움으로 문화, 여성, 종교계를 장악했을 것이다. 반면, 박정희의 무리한 국가주도식 경제정책과 국민들에 대한 과도한 통제, 오랜 독재정치로 인한 선진국들과의 외교갈등 등의 요소들을 고려해보면 과연 박정희가 80년대의 격변기를 유연히 대처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당시 한국은 이스라엘처럼 미국정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국가도 아니었으며 영국, 프랑스 같은 강대국도 아니었기에 무리하게 핵무기를 개발하였다고 하여 미국 등의 강대국들이 한국의 핵무기 보유를 용인해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박정희의 오랜 독재체제를 못마땅해하던 카터 대통령의 입장을 고려해봤을때 무리하게 핵무기를 개발했을 경우 국제적인 경제제재가 가해져 외교뿐만아니라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이러한 재평가 흐름에 정점을 찍게 만든 것이 바로 2016년 말 벌어진 한국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였다. 1970~80년대 독재 정권에서나 일어날 법한 박근혜의 후안무치한 행각과 헌법부정으로 인해 퇴진운동이 불붙으며 자연스럽게 그 아버지인 [[박정희]]와 그의 독재정권을 종결시킨 김재규에 대한 관심도도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비록 그의 암살이 대한민국의 민주화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주장은 있지만 적어도 그의 행동이 박정희의 절대권력을 깨부순 것은 사실이며, 이전부터 보여온 친민주화적 행각이 대중들 사이에서 조명 받으며 재평가 움직임은 대중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단순히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한 박정희 독재를 종결'한 것이 재평가 받은게 아니라, '생전에도 존경받을만한 많은 언행 + 특히 독재정권에 몸을 담고는 있지만 민주세력들을 배려하는 행동 + 사형 직전까지 재판에서 보여준 평소 신념에 대한 논리정연함' 등이 조명받으면서 '''"권력 투쟁이 아닌, 진심으로 시민과 민주주의를 생각한 거사"'''로 뒤바뀐 평가가 퍼져나간 것이다.
         [[시사IN]]의 정희상 기자가 김재규를 재평가하기 위해 시작한 스토리펀딩 프로젝트 [[https://storyfunding.daum.net/project/11718/|'김재규, 역사의 심판대 다시 오르다']]는 목표금액 1천만원을 270% 초과한 2700만 2900원을 모금하며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한국 [[미술]]계의 대형 스캔들인 [[천경자 미인도 위작 사건]]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미인도는 한때 김재규의 개인 소장품이었는데, [[10.26 사건]] 후 김재규의 재산을 몰수하는 과정에서 이 그림이 국가로 귀속되어 1980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이후 위작논란이 시작되었다. 즉, 김재규가 이 작품의 위작 여부를 알고 있었는지, 작품을 소장하게 된 경위가 어떤 지를 밝히는 게 위작논란의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일단은 김재규의 남동생에 의하면 "형수가 그 그림이 진품인지는 알지못하고 걸었다"라고 인터뷰한 바가 있고 검찰에 의하면 김재규의 부인이 친한 오모 대령의 부인에게서 받은 그림이라고 한다. 처음 이 논란이 시작되었을 때는 단순히 전 소유주라는 사실 이상의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그 사건]]이 터지고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다루면서 '''김재규의 업적을 깎아내리기 위한 신군부와 미술계의 결탁'''이라는 가설이 힘을 얻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백윤식]]이 열연했다. 김재규와 [[박정희]] 살해 사건을 주제로 한 블랙 코미디 영화. 이런 류의 풍자 코미디가 드문 한국에서는 괜찮은 수작이다. 다만 조롱에 중점을 둔 나머지 영화 속 청와대 사람들에 대한 묘사의 리얼리티는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다.
         [[분류:일본군/조선인]][[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한국전쟁/군인]][[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분류:구미시 출신 인물]][[분류:1926년 출생]][[분류:1980년 사망]]
  • 박세웅(1996) . . . . 13회 일치
          * [[야구 관련 인물(KBO)]], [[삼성 라이온즈/선수단]]
         ||<:> '''학력''' || 대해초 - 포항중 - [[청주고등학교 야구부|청주고]] ||
         ||<:> '''프로입단''' || [[한국프로야구/2015년/신인드래프트|2015년 신인드래프트 2차 4라운드]] ([[SK 와이번스|SK]]) ||
         || [[김강석]](2014) || → || '''박세웅(2015)''' || → || [[이현석(야구선수)|이현석]](2016) ||
         || [[이승현(야구선수)|이승현]](2017) || → || '''박세웅(2018)''' || → || 현역 ||
         한 해 선배인 [[황영국]]과 동기인 [[주권(야구선수)|주권]]과 함께 2013년 [[청주고등학교 야구부|청주고]]의 돌풍을 주도하면서 맹활약했다. 비록 창단 40년만에 처음으로 전국 대회 결승에 오른 청주고의 돌풍은 협회장기와 전국체전 준우승으로 끝나며 아쉽게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했지만, 당시 2학년이던 주권과 박세웅이 원투펀치를 이룰 청주고는 2014년 강력한 고교야구의 패권자로 꼽혔다. 그런데 주권은 기대대로 잘 했지만, 정작 박세웅이 썩 빼어낸 모습을 보이지는 못하면서 청주고의 돌풍은 아쉽게 2013년 한 해의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동명이인인 전 [[NC 다이노스]]의 [[포수]] [[박세웅(1993)|박세웅]]과는 [[청주고등학교 야구부]] 선후배 사이이다. 다만 3년 터울이기 때문에 같이 고교 생활을 한적은 없다.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포항시 출신 인물]][[분류:1996년 출생]][[분류:투수]][[분류:좌완 투수]][[분류:좌투좌타]]
  • 박진영 (야구선수) . . . . 13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08년]]
         |드래프트 순위 = [[2008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08년]] 5차 3라운드([[KIA 타이거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08년]] [[4월 22일]]<br />[[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광주]] 대 [[넥센 히어로즈|히어로즈]]전
         |대륙간컵 (야구) = 2006 대만
         '''박진영'''(朴晋永<ref>한국야구위원회, 2009 가이드북</ref>, [[1985년]] [[3월 27일]] ~ )은 [[KBO 리그]] 전 [[고양 원더스]]의 [[내야수]]이다.
         2008년 2차 3순위로 [[KIA 타이거즈]]에 입단하였다. 2008년 포스트시즌 탈락 이후 후반 신예들을 주로 기용한다는 [[조범현]] KIA 감독의 방침에 의해 9월부터 김종국과 함께 주로 2루수로 기용되어, 26타수 8안타 0.308 타율를 기록하였다.<ref>[http://www.koreabaseball.com/record/player.asp?player_id=78606 박진영 기록 페이지, 한국야구위원회]</ref>. 상무에서 퓨처스리그 등 2군 리그에서 주로 활약하다 2012년 시즌 이후 팀에서 방출당한다.
         {{2003년 아시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 대한민국 선수 명단}}
  • 박철우(배구) . . . . 13회 일치
         || 출신학교 || 본리초 - 경북사대부중 - [[경북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경북사대부고]] - [[명지대학교|명지대]][* 고등학교 졸업 후 프로 데뷔를 했기 때문에 [[명지대학교]] 소속으로 뛰지는 않았다.] ||
         || 응원가 || 이전 : [[DJ DOC]] - 나 이런사람이야[* 나 이런사람이야~ 삼성의 철우~ 난 박철우야~ 최!강!삼!성!박!철!우!(x 2)] [br] 현재 :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 [[엘리제를 위하여|Für Elise]]'''[* '''최강삼성 박철우 박철우 박철우 최강삼성 박철우 박철우 박철우 워워워워~ 워워워~ 워워워~ 워워워~최강삼성 박철우 박철우 박철우 박!철!우!'''][* [[SK 와이번스]] 소속 [[이재원(야구선수)|이재원]] 선수와 현 [[SK 와이번스]] 소속 [[이홍구(야구선수)|이홍구]] 선수의 KIA시절 응원가가 동일하다.][* 원래 응원단장들이 응원가를 만들 때 여러 종목을 겸업하는 단장들은 주로 야구선수의 응원가들 중 호평을 받은 응원가들을 편곡해서 만드는 편인데 이 응원가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박철우 응원가가 원조이고 이후에 이홍구, 이재원 순으로 만들어졌다.] [br] [[굿 럭!!]] OST 'Departure'[* 삼성 삼성 삼성 박철우 오오오오오 승리를 위해~*2][* 현 [[KT 위즈]] 소속 외야수 [[이대형]]의 KIA시절 응원가와 같다.] ||
         ||||||||||||<table align=center> '''2006 KOVO컵 프로배구 MVP''' ||
         ||||||||||||<table align=center> '''2008 KOVO컵 프로배구 MVP''' ||
         '''[[후인정]]-[[김세진]]을 잇는, [[문성민]]과 더불어 삼성-현대 라이벌관계를 상징하는 현재 한국배구의 에이스급 라이트'''
         [[1985년]]생으로 [[김요한]]과 나이상 동기지만, 프로 데뷔가 엄청나게 빨랐던 것은 그가 고졸 자격으로 현대캐피탈에 입단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남자 배구판에서는 20년 전 경북사대부고에서 럭키금성(現 [[의정부 KB손해보험 스타즈|KB손해보험]])으로 직행한 김찬호 현 [[경희대학교|경희대]] 배구부 감독에 이어 2번째인 고졸 현역 데뷔 선수. 가난한 집안 사정과 [[이경수]] 드래프트 파동으로 인해 대학-실업 간 선수 수급에 대한 합의 등이 없던 상황을 이용해 당시 현대캐피탈 감독이자 ~~주로 부정적인 쪽으로~~[[스카우트]]의 귀재인 [[송만덕]]의 아이디어로 프로행을 선언, 초고교급 대어였던 박철우를 잡기 위해 삼성화재와 현대캐피탈이 모두 계약을 시도했고, 경쟁의 승리자는 현대캐피탈이 되었다. 학교 지원금(공식적으로 명지대에 일반 학생으로 입학한 케이스)을 포함해 총 '''계약금 8억 원'''을 받고 현대캐피탈에 입단했다. 이것이 대학연맹과 실업연맹 간 갈등 악화를 부채질했고, 결국 [[이경수]] 드래프트 파동이 정상화되었을 때 대학배구연맹은 '''고졸 선수의 프로 직행을 금지하는 조항'''을 프로 연맹에 요청해 공식적으로 명문화되었다.[* 이후 2013년 드래프트부터 이 조항이 삭제되어 고교졸업 예정 선수들도 드래프트에 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개정에 따라 지명된 선수가 송림고등학교 졸업 후 [[인천 대한항공 점보스|대한항공]]의 지명을 받아 입단한 [[정지석]]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중대한 결정을 주도한 당시 현대캐피탈 [[송만덕]] 감독은 그 해가 가기도 전에 [[방신봉]]의 항명 파동으로 인해 현대캐피탈 감독직에서 사실상 해임되었다는 것.[* 사실 박철우의 고졸 프로 진출보다 더 파격적인 사례가 있었다. 그 주인공은 1990년대 초반 중학교 졸업 후 [[구미 KB손해보험 스타즈|럭키화재]]에 입단했던 이상욱. 그러나 이상욱은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한 채 1994-1995 슈퍼리그 직전 슬그머니 방출되었다.]
         2009년 9월, 당시 국가대표팀 코치였던 [[이상열(배구)|이상열]]에게 피멍이 들 정도로 구타를 당했다. 이례적으로 공개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의 상처를 공개하였는데, 이 일을 계기로 체육계의 고질적인 선수 구타 관행이 재조명되며 대한체육회에서도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섰다. --하지만 실효성은(...)-- 그 때 배구 대표팀은 [[태릉선수촌]]에서 쫓겨났고, [[이상열(배구)|이상열]] 코치는 '무기한 제명'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그 ~~[[이상열(배구)|이상열]] 코치~~는 지도자로서 활동할 수 없으나 KOVO 경기 감독관으로는 활동할 수 있었는데, 징계가 슬그머니 풀려서 [[경기대학교|경기대]] 배구부 감독으로 복귀했다. 하긴 전임 [[이경석(배구)|이경석]] 감독도 비리 문제로 물러났다가 은근슬쩍 복귀한 전례가 있었으니...
  • 이영수 (야구인) . . . . 13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05년]]
         |드래프트 순위 = [[2000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00년]] 2차 4라운드([[해태 타이거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05년]]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10년]]
         * [[상무 야구단]] 타격코치 (2014년 ~ 2017년)
         '''이영수'''(李永守<ref>한국야구위원회, 2009 가이드북</ref>, [[1981년]] [[5월 9일]] ~ )는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외야수]]이자, 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타격코치이다.
         ==야구선수 은퇴 후==
         [[상무 야구단]]에서 타격코치로 활동하다가 2018년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타격코치로 활동했다.
         {{토막글|야구인}}
  • 이헌일 . . . . 13회 일치
          | 복무 = [[한국 광복군|대한광복군]]
          | 최종 계급 = [[한국광복군|대한광복군]] [[대위]]
          | 기타 이력 = [[한국독립당]] 기초군사행정위원 <br/> [[한국독립당]] 초급행정위원 <br/> [[한국독립당]] 행정연대위원
         '''이헌일'''(李憲一, [[1917년]] [[3월 25일]] ~ [[1979년]] [[4월 17일]])은 [[한국의 독립 운동|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慶州), 호(號)는 창록(蒼綠). 경상북도 대구(慶尙北道 大邱) 출생이다.
         * 1945년 9월 3일, [[한국독립당]] 기초군사행정위원.
         * 1946년 3월 2일, [[한국독립당]] 초급행정위원.
         * 1947년 3월 2일, [[한국독립당]] 행정연대위원.
         * 1958년 3월 29일, [[한국독립당]] 행정연대위원 직위 퇴임 및 한국독립당 탈당.
         {{토막글|한국 근현대사|군인}}
         [[분류:1917년 태어남]][[분류:1979년 죽음]][[분류:대륜고등학교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연희전문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문과대학 동문]][[분류:육군 장교]][[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주 이씨]][[분류:대한민국의 반일 감정]][[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김구]][[분류:이범석 (1900년)]][[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분류:광복군]][[분류: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분류:한국독립당]][[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 정진호(1956) . . . . 13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 top1=야구 관련 인물(KBO))]
         || '''학력''' || 포항초-[[경상중학교|경상중]]-[[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연세대]] ||
         || '''프로입단''' || [[한국프로야구/1983년/신인드래프트|1983년 1차 지명]] ||
         [[삼성 라이온즈]]와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에서 활동했던 야구선수. 그리고 범죄자. '''~~[[양승호]], [[이광은]]~~과 같은 입시비리의 대표주자'''. 현역 시절에는 그리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고 주로 백업으로 활동하다[* [[1985년]]에는 부상으로 결장한 [[오대석]] 대신 2루수 [[김성래]]와 플래툰으로 유격수를 맡았지만(만약 김성래가 유격수를 맡으면 2루수는 [[배대웅]]이 대신했다.) 다음 해인 [[1986년]] [[4월 19일]] [[이승엽 야구장|대구]] [[빙그레 이글스|빙그레]]전에서 5회말 대타로 나섰다가 손문곤이 던진 공에 오른쪽 엄지손가락 부상을 당해 결국 그 해 6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으며 [[유격수]] 자리는 부상에서 돌아온 오대석과 김성래가 번갈아 맡았다.] 청보로 이적한 다음 해인 1987년 주전 2루수를 맡았지만 그 이후 하락세를 걸어오다가 1990년 은퇴했다.
         은퇴 후에 태평양 수비코치를 시작으로, 1996년부터 2006년까지 [[현대 유니콘스]] 수석코치를 맡았다. [[김재박]] 현대 감독이 LG로 부임하면서 오랜 기간 현대의 수석코치를 맡았던 정진호도 현대 차기 감독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김재박을 따라 [[LG 트윈스]]로 갔다. LG에서도 수석코치로 있다가 2009년 말 김재박을 이어 [[박종훈(1959)|박종훈]]이 신임 감독이 되면서 정진호도 LG에서 나왔다. 2010년 7월, [[이광은]]을 이어 연세대 야구부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연세대학교]] 야구부는 2015년에도 또 다시 입시비리 사건에 휘말려 감독이 출국금지를 당했다.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야구감독]][[분류:포항시 출신 인물]][[분류:1956년 출생]][[분류:타자]][[분류:내야수]][[분류:우투우타]][[분류:대한민국의 범죄자]][[분류:삼성 라이온즈]]
  • 진창현(음악인) . . . . 13회 일치
         陳昌鉉. [[재일 한국인]] [[현악기]] 제작자.
         이 와중에 현악기 제작에 필요한 양질의 목재를 감별하는 법을 익혔고, 목재를 바이올린 공장에 팔고 공장의 제작 과정을 어깨너머로 봐가면서 바이올린 제작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이후 공사장 근처에 오두막을 짓고 막일과 바이올린 제작을 병행했고, 아내의 제안으로 [[도쿄]]에 가서 악기 매입을 시도했다. 이 때 도호학원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치던 바이올리니스트 시노자키 히로츠구(篠崎弘嗣)[* 스즈키 신이치와 함께 일본 현악 교육의 거물로 손꼽히는 인물로, 자신의 성을 딴 바이올린 교본도 만든 바 있다. 한국에서도 현악기 초심자들이 흔히 접하는 것이 스즈키 아니면 시노자키 교본.]가 어린이 교육용 악기로 사들이기 시작했고, 이후 도호학원을 위해 정기적으로 바이올린 제작과 납품, 수리를 시작했다.
          * [[스트라디바리우스]]와 [[아마티]], [[과르네리]] 등 전설의 명기가 가진 비결을 알아보기 위해 이 악기들을 소유한 수많은 명연주가들이 내일 공연을 했을 때 대기실을 들락거리면서 악기의 본을 뜨거나 직접 켜보거나 하기도 했다. 이 일화는 훗날 일본 언론에 연재되었고, 한국에 출간된 구술 자서전 후반에도 나온다.
          * 인력거꾼으로 일할 때 [[영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에 주로 주일[[미군]]을 고객으로 맞이했고, 덕분에 수입이 꽤 좋았다고 한다. 이 시기에 톰(Tom)이라는 이름의 [[루이지애나]] 출신 [[흑인]] 병사와 친해졌는데, 톰의 소속 부대가 [[한국전쟁]]에 투입되기 위해 일본을 떠나기 전에 같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면서 미국에서 차별받던 흑인과 일본에서 차별받던 조선인의 심정을 나누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 혼자서 허름한 오두막을 짓고 막노동과 바이올린 제작으로 소일하다가 [[1961년]]에 일본인 여성 나미코와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고, 장남 진창호와 차남 진창룡은 각각 현악기 제작자와 현악기용 현 제작자로 활동하며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고 있다. 자서전에 의하면 바이올린 제작을 위한 연장들을 찾기 위해 골동품 가게를 전전하다가 가게를 보고 있던 나미코를 처음 만났다고 하며, 가난한 조선인이라는 핸디캡 때문에 처음에는 결혼 승낙을 받기 어려웠지만 예전에 근무했던 건설 회사 사장이 장인에게 사위의 인품을 칭찬해 주면서 결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나미코 부인은 가족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할 때 자신의 이름을 [[한국어]] 식으로 이남이(李南伊)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 식민지 치하의 조선인으로 일본에 건너온 뒤 계속 눌러 살면서 [[조선적]]을 고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때문에 오랜만에 고향 땅을 방문했을 때도 생각치 못한 고초를 겪었지만, 이후에도 한국 국적으로든 일본 국적으로든 전환하지 않고 계속 무국적이나 다름없는 조선적을 고수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한 때 [[종북주의자]] 수준으로 의심받기도 했지만, 조선적 소지자이면서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등 북한계 단체와는 접점이 없이 악기 제작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국적 문제로 말썽이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물론 식민지 시절부터 이어진 '조센징'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여느 교포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의 차별은 감수하고 살아야 했다. 일본에서 손꼽히는 현악기 장인이었음에도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상훈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인 듯 보인다.
          * [[1970년]]의 한국 방문에서 당한 일이 워낙 충격적이었는지, 자서전에도 그 경위를 상세하게 적어놓고 있다. 일본으로 떠난 이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어머니]]와 [[여동생]]의 가난했던 삶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고,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대충 조사를 마무리지은 뒤 회식비를 자신에게 모두 떠넘겼다거나 1976년에 모친상을 치르기 위해 다시 귀국했을 때 자신이 만든 악기가 위조품으로 간주되어 반입 불가를 당한 문제까지 언급하고 있어서 당시 한국에 대한 감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한국이 [[민주화]]되고 재일 한국인에 대한 이념적 재단 같은 편파적인 잣대가 주춤하기 시작하면서 소원했던 관계를 회복하기 시작했고, [[2008년]]에 국민훈장을 수상하면서 공식적으로도 명예회복을 이루었다. 말년에는 한국 언론들과 자주 인터뷰나 대담 등을 가지기도 했고, 생전에 마지막으로 언론과 접촉한 것도 타계 열흘 전인 5월 3일에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이 병상을 찾았을 때였다.
  • 고성국 . . . . 12회 일치
          | 언어 = [[한국어]], [[영어]]
         '''고성국'''(高成國, [[1958년]]<ref>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sm=tab_txc&where=people_profile&ie=utf8&query=%EA%B3%A0%EC%84%B1%EA%B5%AD&os=517736</ref> ~ )은 [[대한민국]]의 정치평론가이다.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 학위 후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추적 60분]] 진행 등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으며, 여러 권의 정치서적을 펴냈다.
         2013년부터는 여러 방송에 다수 출연해 뉴스해설, 정치평론 등을 맡았다. 이후엔 영역을 넓혔다. tvn 오마이갓의 경우 기독교, 불교, 천주교의 성직자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이었고, tvn 빨간의자는 시사 보다는 일반적인 토크쇼에 가까웠다. 한편으로는 친박근혜에 가깝다는 논란 때문에 KBS '글로벌 대한민국', '시사 진단'의 진행자로 섭외되었다가 자진 하차하는 일도 있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128|제목=KBS, '친박평론' 고성국 MC 기용 철회 - 미디어스|언어=ko|확인날짜=2018-04-10}}</ref> 2017년 들어서는 출연하던 대부분의 방송을 그만두게 된다. 특히 고성국 라이브쇼는 [[방통심의위]]의 지적을 받고 TV조선에서 자체 폐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5916|제목=방통심의위에서 ‘변화’ 약속한 TV조선, 얼마나 변할까|성=미디어오늘|날짜=2017-03-29|뉴스=미디어오늘|언어=ko|확인날짜=2018-04-10}}</ref>
         2018년에는 [[유튜브]] 방송을 시작하였다. 2018년 3월 1일 고성국은 '고성국TV'를 개국하고 정치분석 방송을 연일 내보내고 있다. 고성국TV 개국 시 [[정우택 (1953년)]], [[나경원]] 등 [[자유한국당]] 계열 정치인들이 축사를 보냈다.
         == 출연 프로그램 ==
         * [[2008년]] 5월 12일 ~ [[2009년]] 2월 26일 : CBS 시사자키 고성국입니다 진행
         * 《대중정당: 민족민주대중정당의 이론과 현실》(공저), 한국사회연구소, 1989<ref>http://books.google.com/books?id=E4vSAAAAMAAJ&q=inauthor:%22%EA%B3%A0%EC%84%B1%EA%B5%AD%22&dq=inauthor:%22%EA%B3%A0%EC%84%B1%EA%B5%AD%22&hl=ko&ei=EUDaTsvKCeHJmQXis-H0Cw&sa=X&oi=book_result&ct=result&resnum=2&ved=0CDAQ6AEwAQ</ref>
         * 《한국사회 변혁운동과 4월혁명》(공저), 한길사, 1990
         * 《한국정치의 구조와 진로》(공저), 실천문학사, 1990<ref>http://books.google.com/books/about/%ED%95%9C%EA%B5%AD%EC%A0%95%EC%B9%98%EC%9D%98%EA%B5%AC%EC%A1%B0%EC%99%80%EC%A7%84%EB%A1%9C.html?id=NRQhHAAACAAJ</ref>
         * 《청년을 위한 한국 현대사》(공저), 소나무, 1992 {{ISBN|897139031X}}
         * 《한국사회운동의 혁신을 위하여》(공저), 백산서당, 1993 {{ISBN|8973270877}}
         * 《한국정당정치론》(공저), 나남, 1995 {{ISBN|8930034063}}
  • 류명선(야구선수) . . . . 12회 일치
          * [[야구 관련 인물(KBO)]]
         ||<:> '''학력''' || [[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포철공고]]-계명대 ||
         ||<:> '''프로입단''' || 1988년 삼성 라이온즈 1차 지명 ||
         전 야구선수. 삼성 라이온즈와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활동했다.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삼성 투수진을 지켰던 투수.
         계명대 재학 중인 1988 신인지명 때 삼성에 1차 지명을 받지만 1988년 서울 올림픽 참가 때문에 대학 졸업 후 실업팀인 [[세일통상 야구단]]에 입단해 1989년에 삼성에 입단했다.
         프로 첫해인 1989년 4월 12일에는 첫 완투승을, 5월 24일에는 첫 완봉승을 거두는 등 14승 8패 1세이브의 성적을 기록하며 당시 [[김시진]]의 이적으로 자칫 약화될 수도 있었던 삼성 투수진을 [[김성길]]과 함께 같이 지켰다. 타격 2위를 차지한 강기웅과 함께 그해 삼성의 대표적인 유력 신인이었지만, 신인왕은 19승을 거두며 맹활약한 [[태평양 돌핀스]]의 [[박정현(야구선수)|박정현]]이 차지했다. 이듬해 [[이태일]]이 입단하며, 김성길 등과 함께 1990년대 초 삼성 선발진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물론 이 시기에는 [[김상엽]]도 있었지만 1990년을 제외하면 기대 이하의 성적이었다.] 입단 동기였던 [[정윤수]]가 1990년 선발과 중무리를 오가며 혹사 당한 끝에 1991년 이후에는 위력이 크게 저하된 것을, 생각하면 내구성도 좋았던 편.
         1992년부터 점점 성적이 하락해 갔는데, 때마침 1993년에 등장한 [[박충식]] - [[김태한]] - [[김상엽]] - [[성준(야구선수)|성준]]으로 이어지는 삼성 선발진이 모두 10승 이상을 기록하며 그의 빈자리를 채워 나갔다.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구원투수로 나와서 혼자 2패를 당해 당시 삼성 팬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류명선에게는 불행 중 다행히도, 이들 2패는 광주와 잠실의 원정 경기에서 당한 것이었다. 만약 홈인 대구에서 패한 것이었다면, 더욱 큰 봉변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잠실에서 벌어진 6차전에서는 해태 김성한에게 역전 홈런을 맞았고, 이후 시리즈 전체의 판도가 해태에 기울어지면서 더욱 뼈아픈 장면이 되었다.
         이후 부진을 면치 못하다 결국 1995년 5월 [[김현욱(야구)|김현욱]]과 같이 쌍방울로 트레이드되었다.(류명선+김현욱↔[[최한림]]+윤혁) 쌍방울에서도 재기에 실패해 1996년 은퇴했다.
         은퇴 후 2004년 말 모교인 계명대 코치로 부임해, 2011년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참고로 류명선은 계명대 야구부 1기 출신.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포항시 출신 인물]][[분류:1965년 출생]][[분류:우완 투수]][[분류:우투우타]]
  • 박상원(배우) . . . . 12회 일치
         [include(틀:다른 뜻2, other1=한화 이글스 소속 야구선수, rd1=박상원(야구선수), other2=삼성 라이온즈 소속이었던 前 야구선수, rd2=박상원(전 야구선수))]
         ||<#5F9EA0> '''{{{#ffffff 학력}}}''' ||<(> [[수창초등학교]] (72년 졸)[br][[인천남중학교]] (75년 졸)[br][[동산고등학교(인천)|동산고등학교]] (78년 졸)[br] [[서울예술대학교]] (80년 졸)[br] [[한국방송통신대학교]] (99년 졸)(편입)[br] [[세종사이버대학교]] (2007년 졸)(편입)[br][[상명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
         [[모래시계(드라마)|모래시계]]에서 맡았던 검사 역할은 현재 [[홍준표]] 전 경남지사의 검사 시절에서 모티프를 따와 만든 배역이라고 알려졌다. 당시 드라마 작가였던 송지나가 2017년 대선 당시 아니라고 주장했었으나 하는데 사실 맞다고 보는게 옳다. 자세한 내용은 [[모래시계(드라마)|모래시계]] 5번목차 참고. 홍준표는 이후 [[모래시계(드라마)|모래시계]]를 통해서 형성된 그의 대중적 인기에 주목한 신한국당의 권유로 정계에 진출하게 된다.[* 1996년 총선에서 서울 송파 갑 지역구에서 무난하게 당선된다. 그러나 강직한 이미지와 달리 선거비용 사용 내역을 조작해서 의원직을 박탈당한다. 이후 2001년 동대문을 재보궐선거에 당선되면서 다시 정계로 돌아왔다.][* 사실 홍준표는 슬롯머신 비리 사건 수사 과정에서 상급자인 [[이건개]] 검사장을 구속하면서 검사들 사이에서 왕따당하고 있었다. 2년 동안 자기한테 같이 밥 먹자는 동료 검사 한명이 없었다고. 정작 홍준표가 구속한 이건개는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1996년 총선에서 자유민주연합 전국구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때문인지 박상원 본인도 늘 정계진출 떡밥이 있는 배우. 일단 본인은 정계 입문은 생각에 없다고 못박아두고 있다. 하지만 1인 시위 등을 통해 본인의 정치적 입장[* 보수 성향으로, [[오세훈]] 전 [[서울특별시장]]과도 친분이 있다. 2011년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때 광화문 이순신 동상앞에서 오세훈 시장을 지지하는 1인 시위를 한 적도 있다.]을 드러내곤 해서 이 떡밥은 여전히 쉬지 않고 현재진행형이다.
         2009년도에 [[음주운전]]으로 물의를 빚은 바가 있다. 지적이고 점잖은 이미지에 큰 타격이 될 수 있었지만 크게 문제거리는 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간 듯 보인다.
          * 2009년 미워도 다시 한 번 (KBS) - 이정훈 역
          * 2009년 [[드림(드라마)|드림]] (SBS)
          * 뮤지컬 2009년 브로드웨이 42번가
          * 일본 도쿄도미술관 삭일회상(2009년)
         [[분류:동명이인/ㅂ]][[분류:한국 남배우]][[분류:1959년 출생]][[분류:1979년 데뷔]][[분류:중구(대구) 출신 인물]]
  • 박신혜 . . . . 12회 일치
         박신혜는 이후 단막극 《[[드라마시티]] - 첫차를 기다리며》(2004), 《[[MBC 베스트극장|베스트극장]] - 베리 메리 크리스마스》(2004), 《새 아빠는 스물 아홉》(2005)와 《한뼘 드라마》(2004), 《베스트극장 - 어느 멋진 날》(2005), 《드라마시티 - 키다리 아저씨》(2005)와 시트콤 《[[혼자가 아니야]]》(2004-05), 《[[귀엽거나 미치거나]]》(2005)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연기력을 다져나갔다. 2004년부터 2005년까지 박신혜는 사전 제작 된 퓨전 사극 드라마 《[[비천무]]》에 캐스팅 되어 중국 로케 촬영하였다. 그리고 2006년 2월, 첫 방영한 드라마 《[[천국의 나무]]》에서 여주인공 하나 역에 캐스팅 되었고, ‘천국의 계단’에서 그녀를 발탁했던 이장수 감독은 여주인공으로 고등학생이었던 박신혜를 또다시 발탁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인터뷰> 드라마 '천국의 나무' 여주인공 박신혜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1&aid=0001197151|출판사 =연합뉴스 |저자 =정열 |날짜 = 2006-01-16 |확인날짜 =2013-09-01 }}</ref> 같은 해 4월, 영화 《[[도마뱀 (영화)|도마뱀]]》으로 첫 스크린 데뷔를 하였다. 이듬해, 2007년 황인뢰 감독은 드라마 《[[비천무]]》의 제작 현장에서 눈여겨본 박신혜에게 드라마 《[[궁S]]》의 귀족 소녀 신세령 역으로 캐스팅했으나 이 드라마는 전작과 달리 진부한 내용과 설정으로 흥행에는 크게 실패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잘 자라줘서 고마워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312&aid=0000002569|출판사 =텐아시아 |저자 =최지은 |날짜 = 2009-10-28 |확인날짜 =2015-04-18 }}</ref> 같은 해 5월 개봉 된 호러 영화 《[[전설의 고향 (2007년 영화)|전설의 고향]]》과 드라마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 가지 질문]]》에 출연했다. 7월부터 방영 된 드라마 《[[깍두기 (MBC)|깍두기]]》에서는 절에서 자란 여주인공 장사야 역을 맡아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긴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는 등 파격 변신을 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문희' 후속 드라마 '깍두기' 주인공 확정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0081490|출판사 =OSEN |저자 =김지연 |날짜 = 2007-07-19 |확인날짜 =2013-09-01 }}</ref> 박신혜는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예능 프로그램 《[[환상의 짝꿍]]》의 진행을 맡아 [[MBC 방송연예대상]] 쇼버라이어티부문 여자신인상을 수상했다.
         2009년 9월, 박신혜
         박신혜는 2009년, 드라마 《[[미남이시네요]]》로 이후 1년 반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하였다. 극중 속세와 차단된 수녀원을 나와 쌍둥이 오빠 고미남을 대신해 비밀과 가십, 계산과 계약으로 움직이는 연예계에서 살아 나가는 고미녀 역을 연기하며 배우 인생 전환점을 맞이했고, 일본 및 중화권에서도 인지도를 높히며 한류 퀸으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ref>{{웹 인용|url=http://isplus.liv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3851058 |title=‘미남이시네요’가 ‘아이리스’에 기죽지 않는 이유 |출판사=일간스포츠 |저자= 정지원|날짜=2009-10-30 |확인날짜=2016-12-29}}</ref><ref>{{웹 인용|url=http://www.hancinema.net/jang-geun-seok-you-re-beautiful-beats-winter-sonata-33223.html |title=Jang Geun-seok "You're Beautiful" beats "Winter Sonata" @ HanCinema :: The Korean Movie and Drama Database |publisher=Hancinema.net |date=2011-09-14 |accessdate=2016-12-29}}</ref> 나중에 박신혜는 인터뷰에서 “성인이 돼 처음 한 작품으로, 아역이 아닌 ‘박신혜’라는 한 여배우의 시작을 알리게 해준 작품”이라고 ‘미남이시네요’에 대해 말했다.<ref name="mbn" /> 이듬 해, 2010년 박신혜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에서 연애 조작 요원 오민영 역을 맡아 [[엄태웅]], [[이민정]], [[최다니엘]]과 공연하며 영화는 260만명의 관객수를 동원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박신혜는 사전 제작 된 대만 드라마 《선풍관가 旋風管家》에서 샤오즈 역을 맡아 출연하였고, 2011년 방영되었다.
         박신혜는 2011년 드라마 《[[넌 내게 반했어]]》에서 가야금을 전공하는 상큼한 여대생 이규원 역을 연기해, [[정용화]]와 다시 공연했다. 예술대학을 배경으로 풋풋한 청춘의 사랑과 우정을 그려내겠다는 취지로 시작 됐지만 연이은 시청률 부진으로 15회로 조기 종영 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시청률 부진 속 <넌 내게 반했어>, 15회로 종영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oid=047&aid=0001984579|출판사 =오마이뉴스 |저자 =이미나 |날짜 = 201-08-09 |확인날짜 =2013-09-01 }}</ref><ref>https://www.soompi.com/2010/09/01/george-hu-is-park-shin-hyes-combat-butler/</ref> 이듬 해, 2012년에는 단막극 《[[KBS 드라마 스페셜]] - 걱정마세요 귀신입니다》에서 본인이 귀신이란 걸 자주 망각하는, 사람보다 더 사람같은 생기 넘치는 귀신 연화 역을 연기해 호평을 받아 [[KBS 연기대상]] 단막극 여자연기상을 수상했다. 박신혜는 2013년 초 개봉 되어 역대 여덟 번째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7번방의 선물]]》에 성인 예승 역을 연기했다.<ref>{{웹 인용|title='Miracle in Cell No. 7' third most-viewed Korean film|url=http://english.yonhapnews.co.kr/culturesports/2013/03/15/27/0701000000AEN20130315007900315F.HTML|work=[[연합뉴스]]|accessdate=2013-03-20|date=15 March 2013}}</ref><ref>{{웹 인용|title='Miracle in Cell No. 7' third most-viewed Korean film|url=http://nwww.koreaherald.com/view.php?ud=20130315000902|work=The Korea Herald|accessdate=2013-03-20|date=15 March 2013}}</ref><ref>{{웹 인용|last=Ji|first=Yong-jin|title=MIRACLE IN CELL NO. 7 Passes MASQUERADE to Become 3rd Most Successful Korean Film|url=http://www.koreanfilm.or.kr/jsp/news/news.jsp?mode=VIEW&seq=2324|work=Korean Film Council|accessdate=2013-03-20|date=19 March 2013}}</ref> 같은 해 1월 첫방영 된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이웃집 꽃미남]]》에서 사람 만나길 두려워 하는 히키코모리 고독미 역을 연기했고, 제 나이와 성격에 어울리는 밝고 씩씩한 여대생의 매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ref name="mbn" /><ref>{{웹 인용|url=http://www.soompi.com/2012/10/31/park-shin-hye-and-yoon-shi-yoon-to-star-in-new-drama-flower-boy-next-door/|title=Park Shin Hye and Yoon Shi Yoon to Star in New Drama "Flower Boy Next Door"|date=June 26, 2012|accessdate=February 7, 2012|publisher=soompi}}</ref> 박신혜는 코오롱스포츠 4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 된 '웨이 투 네이처 필름 프로젝트 단편 영화 《사랑의 가위바위보》에 출연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김지운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사랑의 가위바위보'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47&aid=0002023569|출판사 =오마이뉴스 |저자 =이선필 |날짜 = 2013-04-30 |확인날짜 =2013-09-01 }}</ref>
         박신혜는 매년 팬미팅 수익금을 현지 NGO나 사회단체에 기부해오고 있다. 2007년, 박신혜는 드라마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 가지 질문》의 순수제작비를 제외한 작가, 연출자, 연기자들의 원고료와 연출료 및 출연료 전액 등의 수익금을 NGO 단체를 기부하는 것에 동참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원고료-출연료 기부...첫 도네이션 극 방영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13&aid=0000006327|출판사 =TV리포트 |저자 =김진도 |날짜 = 2007-05-14 |확인날짜 =2013-09-01 }}</ref> 2012년에는 한국 공식팬클럽 ‘별빛천사’와 함께 한 한국 팬미팅 티켓 판매금 전액을 팬들과 대표적인 [[NGO]] 단체 ‘기아대책’에 기부하며, 박신혜가 봉사를 다녀온 아프리카 가나의 별빛 천사 마을을 위해 후원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노래선물, ‘팬 위한 노래’ 직접 작사한 곡 ‘최초 공개’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38&aid=0002231659|출판사 =리뷰스타 |저자 =김숙희 |날짜 = 2012-02-20 |확인날짜 =2013-09-01 }}</ref> 같은 해 7월, 드라마 《[[넌 내게 반했어]]》의 후지TV 방송을 기념해 [[정용화]]와 함께 7월 15일과 16일 두 차례에 걸쳐 열린 팬미팅 행사를 성공리에 마쳤고, 팬미팅 수익의 일부를 국제기아대책기구를 통해 동일본대지진의 지원금으로 기부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정용화, '넌 내게 반했어' 日 팬미팅 수익금 기부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76&aid=0002236717|출판사 =스포츠조선|저자 =김표향 |날짜 = 2012-07-17 |확인날짜 =2013-09-01 }}</ref> 2013년 일본 팬미팅 후에는 기아대책 일본지부에, 필리핀 팬미팅의 수익금도 현지에 되돌려 한류의 이미지 제고에 앞장서오고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中 반려동물 성금 기부… 경시풍조에 경종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469&aid=0000056438|출판사 =한국일보 |저자 =이현아 |날짜 = 2015-04-05 |확인날짜 =2015-04-07 }}</ref> 같은 해 1월, 드라마 《[[이웃집 꽃미남]]》 제작발표회에서 팬들에게 받은 쌀 화환을 나눔의 집에 기부했고, 같은 해 2월, 한국 팬미팅 수익 전액과 일본 팬미팅 수익 일부를 기아 대책에 기부했다. 4월에는,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 CGV 스타리움에서 영화 《사랑의 가위바위보》의 쇼케이스 행사에 참석한 박신혜를 응원하기 위해 일본 팬클럽과 공식 팬클럽 회원들은 쌀 화환 520kg과 공식 팬클럽은 '별빛천사는 사랑의 가위바위보를 응원합니다' 등의 메시지를 적은 쌀 화환을 보내고, 이날 받은 쌀 화환 520kg은 박신혜가 지정하는 기부처로 전달돼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 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쌀 화환 520kg 어려운 이웃에 기부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1&aid=0000330294|출판사 =조이뉴스24 |저자 =권혜림 |날짜 = 2013-04-30 |확인날짜 =2013-09-01 }}</ref> 6월 24일, 영화 《사랑의 가위바위보》의 청각장애인을 위한 한국어 대사와 해설 자막, 시각장애인을 위시·청각 장애인들도 비장애인과 함께 영화를 감상할 수 있게 제작한 배리어프리 버전 녹음을 진행했고, 박신혜는 영화의 앞부분에 내레이터로 재능 기부에 참여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김지운 감독·박신혜, 시청각 장애인 위해 재능기부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2348112|출판사 =마이데일리 |저자 =김미리 |날짜 = 2013-06-24 |확인날짜 =2013-09-01}}</ref>
         박신혜는 또한 2011년부터 기아대책 홍보대사로 활동, 서부 아프리카 가나에 있는 결연아동 아반네를 결연후원 해오고 있으며 팬들과 해외 빈곤국에 센터 세우는 일에 동참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팬과 함께 봉사활동 나선 별들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382&aid=0000196660|출판사 =스포츠동아 |저자 =김원겸 |날짜 = 2014-04-08 |확인날짜 =2014-04-09}}</ref> 국내외 팬들과 전 세계 빈곤국가 아이들의 교육적, 정서적 지원을 위한 ‘별빛천사마을’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1호 센터로 서부 아프리카 가나 ‘신혜센터(Shin Hye Center)’가 2013년 11월 완공되어 5백여 명의 학생들이 이용하고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 =기아대책 홍보대사 박신혜, ‘러브백’ 특별행사 참여 |url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405291628173210|출판사 =뉴스엔 |저자 =김찬미 |날짜 = 2014-05-29 |확인날짜 =2014-05-30}}</ref> 2014년에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을 위해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를 통해 5,000만원을 기부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이어 소속사도 1000만원 기부 "작게나마 위로가 됐으면"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9&aid=0003189349|출판사 =매일경제 |저자 =이슈팀 |날짜 = 2014-04-23 |확인날짜 =2014-04-24}}</ref><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이어 소속사도 1000만원 기부 "작게나마 위로가 됐으면" |url =http://stoo.asiae.co.kr/news/view.htm?idxno=2014042515493577725|출판사 =스포츠투데이 |저자 =김은애 |날짜 = 2014-04-25 |확인날짜 =2014-04-26 }}</ref> 또한 자신의 SNS 트위터 프로필 사진을 노란리본 사진으로 변경, 노란리본 캠페인에도 동참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기부 이어 노란리본 캠페인 동참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44&aid=0000242446|출판사 =스포츠경향 |저자 =온라인뉴스팀 |날짜 = 2014-04-23 |확인날짜 =2014-04-24 }}</ref> 2015년, 박신혜는 ‘2015 Dream of Angel’ 타이틀로 아시아투어에 나섰고, 상해 팬미팅 수익을 [[NGO]] 단체 ’기아대책’의 별빛천사마을 만들기와 중국의 유기동물 보호단체 ‘타소원’에 기부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상해 팬미팅 수익금 전액 기부.."한류스타 이례적 행보"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18&aid=0003217288|출판사 =이데일리 |저자 =강민정 |날짜 = 2015-03-30 |확인날짜 =2013-09-01 }}</ref> 4월, 박신혜는 큰 피해를 입은 [[네팔]] 국민들을 위해 국제구호단체 기아대책를 통해 3,000만원을 기부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네팔 지진 희생자 위해 3천만원 후원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3054697|출판사 =OSEN |저자 =정유진 |날짜 = 2015-04-30 |확인날짜 =2013-09-01 }}</ref> 2016년 7월, 박신혜는 아프리카 가나의 신혜센터에 이어 필리핀 마닐라에 신혜센터의 건립을 진행했다. 이에 박신혜와 소속사 솔트 엔터테인먼트 직원들은 센터건립에 앞서 필리핀 쌈빨록 지역의 아이들과 1:1 결연을 맺었고, 지난 3월 박신혜는 필리핀의 결연아동의 집을 직접 방문하고 아동결연센터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지며 센터 건립에 앞서 건축기념식을 가졌다.<ref>{{뉴스 인용|url=http://entertain.naver.com/read?oid=382&aid=0000489585|제목=박신혜가 또… 필리핀에 아동복지시설 ‘신혜센터’ 건립|출판사 =스포츠동아 |저자=홍세영|날짜 = 2016-07-22|확인날짜=2016-12-09}}</ref>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조연}}
  • 박화랑 . . . . 12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0년]]
         2009년 [[제43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준우승을 비롯 [[제31회 대붕기 전국고교야구대회|대붕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 [[제90회 전국체육대회|제90회 전국체전]] 우승을 이끌며 우수 투수상 등의 개인 상 수상 및 청소년 대표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11&aid=0000180568 홍희정의 아웃사이더 '청대' 출신 박화랑, 와신상담 끝에 삼성 '신고선수' 출발!] 《조이뉴스》 2010년 3월 9일</ref>
         == 프로 입단 후 ==
         {{2009년 아시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 대한민국 선수 명단}}
         {{토막글|야구인}}
         [[분류:199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분류:대구상원고등학교 동문]][[분류:경운중학교 (대구) 동문]][[분류:대구수창초등학교 동문]]
  • 배재준 . . . . 12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3년]]
         |드래프트 순위 = [[2013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3년]] 2라운드([[LG 트윈스]])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8년]] [[4월 26일]]<br>[[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 대 [[넥센 히어로즈|넥센]]전 구원
         [[대구상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13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3년]]에 2라운드로 지명받아 입단했다. [[2018년]] [[4월 26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구원 등판하며 데뷔 첫 경기를 치렀고, 경기에서 0이닝 1실점(비자책)을 기록하였다.
         {{토막글|야구인}}
         [[분류:199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LG 트윈스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대구본리초등학교 동문]][[분류:경상중학교 동문]][[분류:대구상원고등학교 동문]][[분류:배씨]]
  • 배지환 (야구선수) . . . . 12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8년]]
         '''배지환'''([[1999년]] [[7월 26일]] ~ )은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이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내야수]]이다. 여자친구가 폭행혐의로 고소하여 비판을 얻는 등 논란이 되고 있다.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도 참가하여 주전 유격수를 맡아 팀이 준우승 하는데 큰 활약을 하였다.
         [[2018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 참가 한 시간 전에 미국 진출 때문에 지명받지 않았다. 이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300,000달러에 계약하였고, 교육리그에도 참가하였다. 그러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2014년에 불법 계약을 한 것이 드러나 중징계를 받게 되었다.<ref>[http://osen.mt.co.kr/article/G1110781032 배지환 계약 파기 FA행… 애틀랜타 MLB 징계 확정] - OSEN</ref> 게다가 이면계약을 한것이 드러나 계약이 파기되었다. 이후 [[육성선수]] 신분을 인정해달라는 가처분 소송을 냈으나 [[KBO (야구)|KBO]]측에서는 강경대응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미국 프로야구 시절==
         2018년 3월 10일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계약하였다.<ref>[http://hei.hankyung.com/hub01/201803103243I 배지환, 국제미아 위기에서 ML피츠버그와 계약] - 한국경제</ref>
         [[분류:199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피츠버그 파이리츠 선수]][[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대구중학교 동문]]
  • 송지효 . . . . 12회 일치
         | 한국어 더빙
         === 예능 프로그램 ===
         * [[2008년]] ~ [[2009년]] [[SBS]] 《[[드림콘서트]]》 2년 연속 MC ([[김희철 (가수)|김희철]]과 함께)
         * [[2009년]] [[7월 11일]] [[tvN]] 《[[월드스페셜 LOVE]]》 [[필리핀]] 편
         * [[2009년]] [[8월 2일]] ~ [[8월 9일]] [[서울방송|SBS]] 《[[패밀리가 떴다]]》 58회, 59회 게스트
         * [[2010년]] [[8월 22일]] ~ [[SBS]] 《[[일요일이 좋다]] - 2부 [[런닝맨 (텔레비전 프로그램)|런닝맨]]》 고정 멤버
         * [[2011년]] [[3월 3일]], [[2013년]] [[4월 18일]] [[KBS]] 《[[해피투게더 (텔레비전 프로그램)|해피투게더]]》 187회, 295회 게스트
         | 2010 || 제5회 [[SBS 연예대상]] || 예능 특별상 || rowspan=2|[[런닝맨 (텔레비전 프로그램)|런닝맨]] || {{won}}
         | rowspan=2|2013 || rowspan=2|제8회 [[SBS 연예대상]] || 여자 최우수상 || rowspan=4|[[런닝맨 (텔레비전 프로그램)|런닝맨]] || {{won}}
         | 제10회 [[SBS 연예대상]] || 버라이어티 부문 최우수상 || |[[런닝맨 (텔레비전 프로그램)|런닝맨]] || {{won}}
         * 2009년 춘천월드레저총회 및 경기대회 홍보대사
         * 2009년 뷰티디자인엑스포 홍보대사
  • 신동주(야구) . . . . 12회 일치
          * [[야구 관련 인물(KBO)]]
         ||<:> '''학력''' || [[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포철공고]] ||
         ||<:> '''프로입단''' || 1991년 [[삼성 라이온즈]] 고졸연고 자유계약 ||
         [[삼성 라이온즈]]와 [[KIA 타이거즈]]에서 뛰었던 전 야구 선수. 등번호는 37번(삼성) - 25번(해태) - 37번(KIA) - 40번(삼성, 2004) - 24번(삼성, 2005, 트레이드 전) - 52번(KIA, 2005) - 37번(KIA, 2006). [[마해영]]이 삼성으로 오기 전 [[이승엽]]-[[양준혁]]과 클린업을 구축하여 상대의 투수에게 공포를 선사하던 장본인. 그래서 [[임창용]]도 신동주가 해태로 이적하고 나서야 원래 등번호인 37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삼성에서 상당한 활약을 하던 선수 치고는 항목이 엄청 짧다.~~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5번타자. ~~더불어 롯데 왕자의 난 덕에 기업인 동명이인에게 밀린 [[안습]]의 사나이~~
         1991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해 1992년에 데뷔했으며, [[백인천]] 감독의 휘하에 삼성의 중심 타선으로 자리잡았다. 롯데의 [[8888577]]의 암흑기였던 [[백인천]]이었으나 젊은 시절의 [[백인천]]은 1990년 LG의 우승을 이끌었는데다 삼성 감독으로서 [[최익성]], 신동주, [[이승엽]]의 타격 실력을 대폭 향상시킨 장본인이다. 1997년에는 도루 2개가 모자라 20-20을 달성하지 못했으나 21홈런에 .326에 .581의 장타율로 타율-장타율에서 [[이종범]]과 맞먹는 스탯을 자랑했다.[* 한편으로는 아쉬운 해였다. 이 해 외야 부문 [[KBO 골든글러브]]는 [[양준혁]], [[박재홍(야구)|박재홍]], [[이병규]]가 탔는데, [[양준혁]], 박재홍이야 압도적인 실력이니 그렇다 쳐도 [[이병규]]와 비교해서는 타율, 홈런 등에서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했음에도 골든글러브에서 떨어지며 결국 골든글러브는 인기투표임을 인증했다. ~~[[이병규]]도 2011년에 똑같이 당한 게 함정~~~~이병규는 그 해 신인왕인데 신인한테 인기에서 밀렸다고?~~] 게다가 그해 준플레이오프에서는 2개의 홈런을 쏘아올렸는데 1차전 전주경기에서는 결승홈런이었고 2차전 대구에서도 0:3에서 추격하는 홈런을 올렸다.[* 물론 그 준플레이오프는 선수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김상엽]]에게 mvp가 돌아갔다.] 1999년에는 .278 22홈런 26도루로 20-20을 달성하기도 하였다. 이 때 [[KBO 리그]] 역사상 전후무후한 기록을 세웠는데 이것은 1이닝 3도루이다.
         현역 시절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1999년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롯데와의 플레이오프]] 당시 삼성의 주전 외야수였으나 팀은 7차전까지 간 접전 끝에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고, 그가 강영식과 트레이드되어 KIA에 있었을 때인 2002년에는 친정팀 삼성 라이온즈가 첫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들어올린 해였다. 이후 2004년 다시 친정팀 삼성으로 돌아와 그해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며 생애 첫 한국시리즈 무대도 밟아봤으나 팀은 9차전까지 간 접전 끝에 준우승에 그쳤다. 이후 2005년 초 다시 KIA로 트레이드된 뒤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이 우승하는 등 여러모로 현역 시절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은퇴 후 [[대구광역시]] [[북구(대구)|북구]] 침산2동에 B&G 스크린 골프연습장을 열었으며, 전 삼성 - 두산 - 롯데 투수 출신 [[이상훈(우완투수)|이상훈]]을 티칭 프로로 맞이하여 함께 운영했다. 2012년 현장으로 복귀하여 친정 팀인 삼성의 원정 기록원으로 활동했다.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분류:포항시 출신 인물]] [[분류:1972년 출생]] [[분류:타자]] [[분류:외야수]] [[분류:우투우타]]
  • 안영준 . . . . 12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2, top1=농구 관련 인물(한국), top2=동명이인/ㅎ)]
         || '''프로입단''' || [[2017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2017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4순위([[서울 SK 나이츠]]) ||
         ||<#e1002a><:> '''[[2017~2018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FFFFFF 2018}}}]]''' ||
         ||||||||||||<tablealign=center> '''2017~2018 [[한국프로농구]] [[KBL 최우수 신인|최우수 신인]]''' ||
         === 프로 시절 ===
         2017년 11월 13일 전자랜드와의 [[한국프로농구 D리그|D리그]] 경기에서는 비록 팀은 패했지만 26득점으로 맹활약을 했다.
         SK나이츠가 18년만에 우승하면서 신인왕+챔피언결정전 우승에 성공한 역대 6번째 선수가 되었다. 소속팀이 워낙 오랫동안 무관으로 고생했던지라 너는 축복받은 선수다라고 선배들이 말하는 듯. 안영준 본인도 대학 우승 이후 곧바로 프로에서 우승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SK 나이츠 국내 선수들 중에서 챔피언결정전 평균출장시간이 28.1분으로 팀내 최장출장시간을 기록했다. 첫 시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대활약. 신인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면서 성장시키는 스타일의 문경은 감독 체제하에서 발전이 기대되는 선수다.
         좋은 피지컬 능력을 이용한 돌파, 적극적인 수비가담, 그리고 리바운드에 강점이 있다. 이 부분은 프로에서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야투 기복이 존재하며 대학 4학년 기준 3점슛 성공률은 26.19%(22/84) 로 다소 떨어졌다. 드래프트 전 평가는 외곽 능력이 조금 떨어지는 슬래셔에 가깝다는 평가였고, 프로에서는 대학무대에서의 활약을 이어갈 수 있을지 의문부호가 많이 존재했다. 하지만 프로 진출 후 문경은 감독에게 슈팅폼 수정을 받은 후 3점슛 정확도가 매우 상승한 케이스이다. 팀 선배 [[최부경]]과 함께 경기 2시간 전부터 슈팅연습을 할 정도로 노력을 보인 끝에 데뷔시즌부터 본인의 약점이였던 3점슛을 크게 개선시켰다.
  • 이미연 (배우) . . . . 12회 일치
         1995년에는 배우 [[김승우]]와 결혼했지만, 2000년 5년간의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이혼했다.<ref>{{뉴스 인용|제목 = 김승우-이미연 이혼 속사정은…|url =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10/h2007101115081484220.htm|출판사 = 한국일보|날짜 = 2007-10-11|확인날짜 = 2013-10-03|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31005011044/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10/h2007101115081484220.htm|보존날짜 = 2013-10-05|깨진링크 = 예}}</ref> 이미연은 1990년대 중후반에는 영화 《[[넘버 3]]》, 《[[모텔 선인장]]》, 《[[여고괴담]]》, 《[[내 마음의 풍금]]》 등의 영화에만 주로 출연하다 1999년 단만극 《[[TV영화 러브스토리]]》로 3년여만에 드라마에 컴백했고, 이후 2001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명성황후 (드라마)|명성황후]]》에서 젊은 명성황후 역으로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보여주어 많은 시청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으며,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또한 당시 소속사였던 [[김광수 (1961년)|김광수]] 대표의 프로젝트로 《이미연의 연가》라는 [[컴필레이션 음반]]을 발매해 166만장이라는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했다.<ref>{{뉴스 인용|제목= PR비 파문 등 여파 가요계 ‘불황의 늪’…2002 한국 음반시장 결산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5&aid=0000131324 |출판사= 국민일보|날짜= 2002-12-24 }}</ref>
         === 텔레비전 프로그램 ===
         * [[1998년]] [[한국방송|KBS2]] 《[[독점여성]]》
         * [[2001년]] [[KBS2]] 《[[이소라의 프로포즈]]》
         * [[2009년]] [[KBS2]] 《[[박중훈쇼 대한민국 일요일 밤]]》 - 마지막회 게스트
         ||[[한국화장품]]||A3F[on]||[[대유위니아]]||위니아 딤채
         * 2003년 2003 [[한국광고주대회]] 광고주의 밤 시상식 광고주가 뽑은 좋은 모델상
         * 1990년 제1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우}}
         [[분류: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수상자]][[분류:청룡영화상 수상자]][[분류:대종상 수상자]][[분류:춘사영화상 수상자]][[분류:197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연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동국대학교 동문]][[분류:광주 이씨]]
  • 정인숙 (1945년) . . . . 12회 일치
         [[1962년]] 신명여고 졸업 후 [[1964년]]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에 지원했으나 낙방했다. 이후 [[명지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했으나 학업에 흥미를 잃고 학교에는 가는둥 마는둥 하다가 중퇴하였다. 뛰어난 미모로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가려고 했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ref name="han01">[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807/h2008070802511484800.htm <nowiki>[</nowiki>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nowiki>]</nowiki> <16>정인숙 사건과 나] 한국일보 2008년 07월 08일자</ref> 아버지의 실직과 대학 낙방은 그의 방황을 부추겼다. 영화배우가 되고 싶은 꿈에 영화감독을 만났으나 1년만에 헤어지고, 임신한 아이는 낙태하였다. 이후 요정에 들어가 요정업에 종사하게 된다.
         당시 그를 목격한 연예기자 정홍택의 회고에 의하면 '그 날도 나는 남산 중턱에 있는 타워호텔 18층 나이트클럽에 갔다. 밤 8시 반쯤 되었을까? 나는 만나기로 한 일행보다 먼저 도착했고 클럽 안에서는 밴드가 연주를 하고 있었는데 젊은 여자 한 분이 카운터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도 술집에서 카운터 앉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그 여인과 몇 자리 떨어진 곳에 앉았다. 가까이 보니 아주 미인이었다. 그리고 얼굴이 하얀 것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ref name="han01">[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807/h2008070802511484800.htm <nowiki>[</nowiki>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nowiki>]</nowiki> <16>정인숙 사건과 나] 한국일보 2008년 07월 08일자</ref>
         정인숙의 오빠 정종욱은 19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하고 난 뒤 "동생과 관계했던 고위층이 뒤를 봐준다고 했다는 아버지(정도환)의 회유로 거짓 자백을 했을 뿐, 집앞에 있던 괴한들이 동생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숱한 의문점 때문에 정인숙 사건은 단순 살인사건이라는 수사기관의 발표에도 불구하고‘권력기관에 의한 살인’이라는 세간의 의혹을 잠재우지 못한 채 지금까지도 한국 현대사의 미스터리 사건으로 남아있다.<ref name="jon01"/> [[2010년]] 2월 [[중앙일보]] 측에서 어렵게 만난 오빠 정종욱은 "억울해서가 아니라면 수감생활까지 다 마치고 나와 '내가 쏘지 않았다'고 얘기하겠냐"며 그의 결백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주장했다. 70대 중반에 들어선 그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마지막으로 재심청구를 통해서라도 명예회복을 하고 싶다"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ref name="jon01"/>
         비서를 지낸 또 다른 김 전 의원 역시 기자의 질문에 “어쨌거나 정확한 [[DNA 검사]]를 하지 않았으니 (친아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당시 정 씨가 넷째외삼촌과 함께 돈을 얻을 요량으로 정 전 총리를 직접 지목하면서 친자확인소송을 하느니 소동을 벌여 상당히 곤혹스러웠다”고 말했다.<ref name="ilyo01"/> 또한 그는 “정 씨(정성일)는 적절치 못한 처신으로 외가는 물론 정 전 총리 측과도 완전 결별하다시피 했다. 91년 그가 한국에 와서 친자확인소송을 한다고 했을 때 정 전 총리 측에서 거액을 주고 일단 무마시켰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또 한국에 나타나서 방송 인터뷰니 뭐니 여기저기 말하고 다녀 정 전 총리 측에서 아주 고개를 흔들 정도로 불쾌해 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상종해선 안 될 놈’이라는 막말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고 전했다. 또 다른 정 전 총리의 측근인 신 전 의원은 외유 중이어서 통화가 안됐다.<ref name="ilyo01"/>
         [[정일권]]의 한 측근은 '91년 그가 한국에 와서 친자확인소송을 한다고 했을 때 정 전 총리 측에서 거액을 주고 일단 무마시켰다.<ref name="ilyo01"/>'고 진술하였다.
         * '베일 속의 사치', 한국일보 1970년 03월 20일자 7면
         * '그녀가 만난 처음과 마지막 남자' 한국일보, 1970년 03월 24일자, 6면
         * [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807/h2008070802511484800.htm <nowiki>[</nowiki>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nowiki>]</nowiki> <16>정인숙 사건과 나] 한국일보 2008년 07월 08일자
         * [http://news.jkn.co.kr/article/news/20090323/6124498.htm 원조 스캔들 정인숙 사건', 故 장자연 리스트로 다시 주목] 재경일보 2009년 03월 23일자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70년대편 1》 (인물과 사상사, 2006)
         * 정길화·김환균 외, 《우리들의 현대침묵사-한국현대사 미스터리 추적》(도서출판 해냄, 2006)
  • 최진순 . . . . 12회 일치
         [[1969년]] [[대구광역시|대구]]에서 출생했으며, [[1998년]] [[교수신문]]을 거쳐 [[2000년]] [[서울신문]]에서 본격적인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사)한국온라인신문협회 기획분과위원, 뉴스분과위원 및 운영위원 등을 차례로 역임했다. [[2004년]]에는 [[한국언론재단]] [[KINDS]] 태스크포스(TF) 팀장, 운영위원 등을 지냈다. 또 한국언론재단 [[뉴스ML]] 포럼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다. [[2004년]] 미국언론연구원(API) [[온라인저널리즘]] 디플로마 과정을 수료했다.
         [[2005년]]부터 [[중앙대학교]] 미디어공연영상대학 [[신문방송학부]] 겸임[[교수]]를 맡기 시작한 최진순은 저서 《한국 신문의 뉴 미디어 혁신》(2006)을 비롯 《온라인 신문, 경쟁과 생존》, 《신문도 TV도 죽었다》, 《뉴스의 혁명, NewsML》, 《혁신 저널리즘》 등의 책을 잇따라 펴냈다. [[2008년]]에는 방송·통신 융합 시대 [[인터넷]] 정책현황분석 및 주요 이슈 (한국인터넷진흥원) 연구보고서(공저)를 냈다.
         [[2005년]] [[한국경제신문]]으로 이직해 [[2016년]] 9월 현재 편집국 기자로 재직 중이며 [[언론중재위원회]] [[언론중재]]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한국신문협회]] 기조협의회 포털팀(TFT) 등 신문업계 기구에서 계속 활동하고 있다. [[2005년]]부터 블로그 [[최진순 기자의 온라인저널리즘의 산실]]을 운영 중이다. [[2013년]] 건국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강의 과목은 온라인저널리즘, 디지털스토리텔링, 블로그저널리즘 등이다.
         * 현재 [[한국경제신문]]기자(2005년~)
         * [[한국온라인편집기자협회]]온라인저널리즘 기여 공로상(2013년)
         * [[한국온라인편집기자협회]]온라인저널리즘 데이터저널리즘 부문 최우수상(2015년)
         * [[한국신문의 뉴미디어 혁신]] (2006년)
         * [[한국기자협회]]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View.html?idxno=8220
  • 가상 메모리 . . . . 11회 일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즈에서 가상 메모리 운용의 필요성은, [[GUI]] OS로 전환하고 [[멀티 태스킹]]이 보편화되면서 나타났다. 멀티 태스킹 기능은 다수의 어플리케이션을 하나의 OS에서 돌릴 수 있게 했으나, 프로그램을 마구 올리다가는 [[램]]이 [[으앙 죽음]] 수준으로 심각하게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OS차원에서 고도의 메모리 관리가 필요해졌기 때문에 제시되었다.
         가상 메모리 기능이 없는 OS는 메인 메모리를 그대로 물리적 어드레스에 따라서 액세스(읽고 쓰기)를 지원한다. 그래서 실제 존재하는 메모리 이상의 프로그램은 절대로 돌릴 수 없다. 실제로 DOS에서 메모리가 모자라면 일단 프로그램이 안 올라간다. 게다가 이게 좀 [[복불복]]스러워서 최악의 경우는 프로그램이 돌아가는데 잠깐 실행되다가 OS자체가 다운된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은행 순번표 같은 형식[* 이를 페이징(Paging)이라고 한다.]으로 각 메모리 공간마다 순번을 할당해놓고 필요할 때마다 돌려쓰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실제 메모리 공간을 초과한 프로그램을 올려도 '일단은' 문제가 생기지 않게 되었다. 또한, 메모리 단편화 문제도 어느 정도 해소된다. 이는 메모리를 일정한 단위로 쪼개어 쓰기 때문이다.
         가상 메모리 기능이 있으면 실제 메모리 공간이 어느 정도 부족하다고 해도, OS는 당장 실행중이긴 하지만 당장 사용하지 않는 프로그램은 가상 메모리 영역으로 내려보내고 지금 실행중인 프로그램은 실제 메모리 공간으로 올려보낸다. 이렇게 유연하게 사용자의 멀티 태스킹에 맞춰서 대응해주는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유저가 [[메모장]]을 쓰고 있다가 [[그림판]]과 [[계산기]]를 켠다. 그런데 3개의 프로그램을 한꺼번에 돌리기에는 메모리가 부족한 상황. --미친 [[똥컴]]이군--
         가상 메모리 기능이 없는 DOS는 이런 상황에서 그냥 그림판과 계산기를 올려주지 않거나, 그림판은 어떻게 돌아갔는데 계산기를 돌리려는 순간 최악의 경우 프로그램과 OS자체가 다운되는 암울한 상황이 발생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작업한 모든 작업물은 사요나라--
         이것이 한동안 작업 표시줄에 내려놓고 전혀 안 건드리던 프로그램을 켜면 버벅거리는 일차적인 이유. 그리고 [[램]]을 확장하고, 하드 디스크를 억세스 속도가 훨씬 빠른 [[SSD]]로 바꾸면 체감 속도가 아주 빨라지는 이유이다.
         한세경, 『뇌를 자극하는 프로그래밍 원리: CPU부터 OS까지』(서울: 한빛미디어, 2007).
  • 구명환 . . . . 11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04년]]
         |드래프트 순위 = [[2004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04년]] 4차 5라운드([[두산 베어스]])
         * [[KBO (야구)|KBO]] 심판위원(2011`~ '''현재''')
         2003년 두산 베어스에 입단하였다. 선수 당시 등번호는 44번이었다. 2011년 4월부터 한국야구위원회 심판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8년 4월 19일 [[수원야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즈]]-[[kt 위즈]]전에서 주심을 맡았을 때 경기 중 일부 타자들이 스트라이크 판정에 불만을 나타냈고, 판정을 비판하는 여론이 있었다.<ref>{{뉴스 인용|제목=4월 19일 비교적 정확했던 구명환 심판…어떻게 `괴물`이 됐나|url=http://sports.mk.co.kr/view.php?year=2018&no=265344|날짜=2018-04-26|출판사=매일경제|확인날짜=2018-04-30}}</ref>
         [[분류:1986년 태어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능성 구씨]][[분류:구씨]][[분류:KBO 리그 외야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심판]][[분류:두산 베어스 선수]][[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경상중학교 동문]][[분류:대구내당초등학교 동문]]
  • 김윤환 . . . . 11회 일치
          * '김윤환' 이라는 이름을 가진 프로게이머는 셋이나 있다. 이 중 두 명은 '''전직''' 프로게이머.
          *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 테란은 [[김윤환(1988)]], 저그는 [[김윤환(1989)]]
          * [[스페셜 포스]] 프로게이머 - [[김윤환(1990)]]
          * 전직 [[한국프로야구]]선수 - 김윤환
         ||<:> 제3대 [br] [[이춘구]] ||<:> → ||<:> 제4대 [br] ''' 김윤환 ''' ||<:> → ||<:> '' 해당 '' [br] ,,,([[신한국당]] 창당),,, ||
         그러나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 이후 김윤환은 정치권에 몰아친 사정의 태풍을 피해 해외에서 체류하다시피 했다. TK민정계의 동료였던 [[박준규(1925)|박준규]]와 [[박철언]] 등이 대거 정계에서 축출당하는 상황에서 김윤환은 대통령을 만들어낸 2인자임에도 오히려 몸을 사려야 했다. 그런 와중에 1995년 2월 [[김종필]]이 민자당을 떠나고 6월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이 참패하자 김영삼은 김윤환을 통해 당과 범여권을 안정시킬 필요를 느낀다. 이에 김윤환은 다시 민자당 사무총장으로 복귀했고 얼마 뒤에는 민자당 대표위원에 취임하여 명실상부하게 여당의 2인자가 되었다. 민자당이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개정한 뒤에도 김윤환은 대표위원으로 유임되었고 [[제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당시 신한국당의 국회의원 당선자 139명 중 그의 계보로 꼽힌 당선자는 무려 26명으로 전체의 5분의 1에 육박했다.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구미 을) || '''[[신한국당]]''' || '''37,306 (55.74%)''' || '''당선 (1위)''' || 2000.2.24 탈당[br](공천불복) ||
  • 김준 (배우) . . . . 11회 일치
         '''김준'''({{본명|김형준}}, [[1984년]] [[2월 3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자 가수이다. 2007년 [[티맥스 (음악 그룹)|티맥스]]의 래퍼로 데뷔했으며, 2009년 드라마 《[[꽃보다 남자 (대한민국 드라마)|꽃보다 남자]]》에 출연하며 연기 활동을 시작했다.
         * [[한국외국어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생명화학과
         *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학부 (편입)
         *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 (석사과정)
         * 2009년 《젊음의 행진》 교생 역
         | [[천하무적 토요일]] - [[천하무적 야구단]]
         * 2009년 인천관광 홍보대사
         * 2009년 한-필리핀 방송콘텐츠 쇼케이스 및 미디어 포럼 홍보대사
         {{천하무적 야구단}}
         {{토막글|한국 배우}}
         [[분류:198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2007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래퍼]][[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분류:한국외국어대학교 동문]][[분류:호루라기 연극단]][[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
  • 김태희 . . . . 11회 일치
         '''김태희'''(金泰希<ref>{{뉴스 인용|저자1=장주영|제목=[인터뷰①] ‘그랑프리’ 김태희, “서른은 나를 당당해지게 했다”|url=https://entertain.naver.com/read?oid=009&aid=0002315791|날짜=2010-09-03|확인날짜=2018-07-05|뉴스=매일경제}}</ref>, [[1980년]] [[3월 29일]] ~ )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2000년 "화이트" 광고 모델로 연예계에 데뷔해서 2001년 영화 《[[선물 (영화)|선물]]》에 [[이영애]]의 아역으로 출연하면서 연기자로 입문하였고, 2002년 독립 영화 《[[신도시인]]》에 출연했다. 이후 시트콤 《[[해변으로가요]]》(2004), 《[[스크린 (드라마)|스크린]]》, 《[[천국의나무]]》(2006)와 같은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했다. 2003년에는 《[[천국의 계단]]》에서 악역 한유리 역할로 얼굴을 알리며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이 드라마로 [[SBS 연기대상]]에서 뉴스타상을 수상했다. 2004년에는 드라마 《[[작은아씨들]]》과 《[[목련꽃아래서]]》에 출연했다. 하지만 이후 영화 《[[중천 (영화)|중천]]》(2006), 《[[싸움 (영화)|싸움]]》(2007)에 출연했으나, 모두 흥행에 실패했다. 2009년에는 시청률 30%대를 기록한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최승희 역할을 연기해 [[KBS 연기대상]]에서 우수연기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드라마 《[[마이프린세스]]》(2011), 《[[나와 스타의 99일]]》(2012), 《[[장옥정 사랑에 살다]]》(2013)에서 주연으로 출연했고, 2015년 드라마 《[[용팔이 (드라마)|용팔이]]》로 [[SBS 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1980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북 구미 으로 이사 하였다. 김태희 본인의 가족으로는 부모와 언니 김희원, 남편 [[이완 (1984년)|이완]]이 있다. 연예인 [[비 (가수)|비]]와 동료.<ref name="씨네21">{{웹 인용 |제목=천천히 밝게 빛나는 별, <중천>의 김태희|url=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43569|출판사=[[씨네 21]]|저자=이혜정|날짜=2006-12-22|확인날짜=2014-02-25}}</ref> 6학년에는 언니를 대신해 교복 모델로 활동했다.<ref name="씨네21"/> 졸업하고,<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중학내내 전과목 100점…공주대접도 당연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3&aid=0003771618|출판사=뉴시스|저자=김지은|날짜=2011-03-30|확인날짜=2014-02-25}}</ref> 이후 재학 시절 학원 홍보 전단지 모델로도 활동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경북 구미 에서 김태희 모르면 간첩? 학창시절 인기-성적표 공개!|url=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9091530327|출판사=[[한국경제]]|저자=김명신|날짜=2009-09-15|확인날짜=2014-02-25}}</ref>
         김태희는 2004년, [[KBS 2TV|KBS2]] 《[[구미호 외전]]》에 이어 [[SBS 월화드라마|SBS 드라마]]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에서 하버드 의대생 이수인 역할로 출연했다.<ref name="김태은">{{뉴스 인용 |제목=작품속 김태희, 이렇게 바뀌었다|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7061711531396823&type=1&outlink=1|출판사=머니투데이|저자=김태은|날짜=2007-06-19|확인날짜=2014-03-05}}</ref> 그녀는 이 두 작품으로 [[KBS 연기대상]]에서 신인연기상,<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08&aid=0000004931 |제목=김태희-이완 남매, 최초로 신인연기상 동시수상 |날짜= 2004-12-31 |출판사= 스타뉴스 |확인날짜= 2010-10-02 }}</ref> [[SBS 연기대상]]에서 10대스타상과 네티즌최고인기상을 수상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15&aid=0001978489 |제목=김태희의 하루’ 네티즌들 관심 가득 “뭘해도 예뻐요” |날짜= 2008-06-20 |출판사= 한국경제 |확인날짜= 2010-10-02 }}</ref>
         김태희는 2008년 3월 19일 방영된 [[KBS 1TV|KBS]] 《[[수요기획]]》의 이라크전 5주년 특집으로 만들어진 돌아갈수 없는 땅, 바그다드 편 내레이션을 맡았다.<ref>{{뉴스 인용|제목=김태희 '목소리만으로' 안방극장 찾는다|url=http://news.hankooki.com/lpage/sports/200803/h2008031720511791970.htm|출판사=한국일보|저자=이현아|날짜=2008-03-17|확인날짜=2014-03-05|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80404032016/http://news.hankooki.com/lpage/sports/200803/h2008031720511791970.htm#|보존날짜=2008-04-04|깨진링크=예}}</ref>
         김태희는 2009년 4년 만에 첩보액션 드라마 《[[아이리스 (드라마)|아이리스]]》의 여주인공 최승희 역할로 출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아이리스`, 가장 진지하게 준비한 작품"|url=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09&no=273866|출판사=MK 뉴스|저자=진향희|날짜=2009-05-12|확인날짜=2014-03-05}}</ref>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39.9%, 평균 시청률 30%대를 기록했다.<ref>{{뉴스 인용 |제목=‘아이리스’ 실체 추적하는 감성적 액션 주목하세요… 블록버스터 드라마 ‘아이리스2’ 제작발표회|url=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6627557&cp=nv|출판사=국민일보|저자=진정희|날짜=2012-11-14|확인날짜=2014-03-05}}</ref> 연기력에 있어서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일부에서는 첩보원 역할에 걸맞지 않다는 평도 있었다.<ref>{{뉴스 인용 |제목='멍때리는' 김태희? 연기논란 재점화 |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9102914300874627&type=1&outlink=1 |출판사=머니투데이 |날짜=2009-10-29 |확인날짜=2010-01-02}}</ref> 그 해 [[KBS 연기대상]]에서 처음으로 연기력으로 우수연기상을 받았는데,<ref>[http://web.reviewstar.net/news/articleView.html?idxno=220883 김태희, '아이리스'로 연기력 논란 극복하고 상도 받고 눈물 '펑펑']{{깨진 링크|url=http://web.reviewstar.net/news/articleView.html?idxno=220883 }} 리뷰스타 2010년 1월 1일</ref> 이에 대해 “우수연기상은 인기로 받은 인기상이 아닌 연기자로 인정받은 최초의 상이었다. 연기로 인정 못 받고 있다고 그간 생각했다. 항상 마음의 무거운 짐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ref>{{뉴스 인용|저자1=김지연|제목=김태희 "연기력 논란, 항상 마음의 무거운 짐"|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0091500362265489&type=1&outlink=1|날짜=2010-09-15|확인날짜=2015-12-14|뉴스=머니투데이}}</ref> 2010년 1월 김태희는 소속사를 [[나무엑터스]]에서 자신의 형부가 설립한 루아엔터테인먼트로 이적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1인 기획사 대열 합류… 전 소속사와 협업관계 유지 |url=http://isplus.joins.com/article/article.html?aid=1305720 |출판사=[[일간스포츠]] |날짜=2010-01-11 |확인날짜=2010-01-11}}</ref> 9월 16일에는 영화 《[[그랑프리 (영화)|그랑프리]]》에서 서주희 역할로 출연했다.<ref>{{뉴스 인용|제목=[추석영화열전⑥]'그랑프리' 김태희, 연기논란 잠재우고 흥행퀸 '찜'|url=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0091608154987413|출판사=아시아경제|저자=조범자 |날짜=2010-09-16|확인날짜=2015-07-17}}</ref> 김태희의 연기력은 이전보다 나아졌다며 긍정적인 평가가 있었으나, 16만 명의 관객수를 끝으로 상업적 실패를 거뒀다.<ref>{{뉴스 인용|제목=[울림과스밈] ‘그랑프리 실패’ 김태희에게는 ‘약'|url=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442216.html|출판사=한겨레|저자=김진철|날짜=2010-10-05|확인날짜=2015-07-17}}</ref> 11월 22일에는 몇몇 내용을 편집해 만든 《[[아이리스: 더 무비]]》가 개봉했다.<ref>{{웹 인용|제목=씨네21 - 아이리스 더 무비|url=http://www.cine21.com/do/zlgam/detail/main?prodSeq=1623|출판사=[[씨네21]]|날짜=2010|확인날짜=2012-02-29|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4124525/http://www.cine21.com/do/zlgam/detail/main?prodSeq=1623#|보존날짜=2016-03-04|깨진링크=예}}</ref> 12월 13일에는 《[[아이리스]]》의 스핀오프작 《[[아테나: 전쟁의 여신]]》 1회에 회상신으로 특별 출연했다.<ref>{{뉴스 인용|제목="짧아서 아쉬워"..이병헌·김태희 `아테나` 깜짝 등장|url=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EA31&newsid=01138166593198520&DCD=A10102|출판사=[[이데일리]] |날짜=2010-12-14|확인날짜=2012-02-29}}</ref>
         김태희는 2011년 1월부터 방영된 드라마 《[[마이 프린세스]]》에 출연했다. 드라마는 평균 15%의 시청률을 기록하였다.<ref>{{뉴스 인용 |저자=이수아|제목='마이 프린세스', 종영…여심 흔든 달콤한 '황실로맨스'|url=http://www.frontiertimes.co.kr/news/news/2011/02/25/65491.html|출판사=프런티어타임스|날짜=2011-02-25 |확인날짜=2012-02-29}}</ref> 김태희는 [[송승헌]]과 함께 공연해 대학생 이설 역할을 맡아 기존의 이미지와는 달리 코믹한 캐릭터를 연기했고, 이미지의 변화와 이전보다 향상된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저자=김민호|제목=김태희 푼수연기 호평 "이제야 딱 맞는 캐릭터!"|url=http://www.today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2348|출판사=투데이코리아|날짜=2011-01-06|확인날짜=2011-01-06}}{{깨진 링크|url=http://www.today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2348 }}</ref> 4월 1일에는 《[[MBC 다큐스페셜]]》에서 셀러브리티 바이오그래피 [[MBC 스페셜 방영 목록#2011년|태희의 재발견]]이 방영되었고, 방송에서 김태희의 일상, 연기력 논란, 학창 시절 등에 대해서 다뤘다.<ref name="미디어스">{{뉴스 인용|저자=곽상아|제목=MBC스페셜 '태희의 재발견'…"황당·실망"|url=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960|출판사=미디어스|날짜=2011-04-03|확인날짜=2014-04-07}}</ref> 시청률은 지난 편에 비해 2배 가량 상승한 9.3%를 기록했다.<ref>{{뉴스 인용|저자=문완식|제목=궁금했던 김태희..'태희의 재발견' 시청률 9.3%|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1040209125306836&type=1&outlink=1|출판사=머니투데이|날짜=2011-04-02 |확인날짜=2014-04-07}}</ref> 하지만 일부에서는 “뭘 말하려 했는지 모르겠다”, “김태희 홍보프로” 등의 비판이 이어졌다.<ref name="미디어스"/> 이에 대해 [[성공회대]] 김서중 교수는 “[[MBC스페셜]]이 김태희도 다룰 수 있다. 문제는 소재가 아니라 다루는 방식”이라고 말했다.<ref name="미디어스"/> 《[[마이 프린세스]]》가 종영되고 나서 김태희는 [[일본]] 기획사 [[스위트 파워]]와 계약을 맺고 [[일본]] 진출을 한다고 발표했다.<ref>{{뉴스 인용|제목=김태희 일본 진출…"일본서 적극적으로 활동 펼칠 것"|url=http://sstv.hankyung.com/?c=news&m=v&nid=101064|출판사=SSTV|저자=신영은|날짜=2011-03-03|확인날짜=2014-04-07|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408214713/http://sstv.hankyung.com/?c=news&m=v&nid=101064#|보존날짜=2014-04-08|깨진링크=예}}</ref> 이후 [[일본]] [[후지TV]] 드라마 《[[나와 스타의 99일]]》에 여주인공 한유나 역할로 출연해 일본 배우 [[니시지마 히데토시]]와 공연했다.<ref>{{뉴스 인용|제목=김태희, 일본 드라마 주연…니시지마 히데토시와 호흡 |url=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519575|출판사=아시투데이|저자=정희영|날짜=2011-08-25 |확인날짜=2011-09-10}}</ref> 첫 [[일본]] 드라마는 평균 시청률 9.3%를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끝냈고, 많은 CF 촬영도 진행 할 예정이였다.<ref>{{뉴스 인용|제목=김태희, 日 드라마 성공 데뷔 후 해외 CF 러브콜 쇄도|url=http://isplus.joinsmsn.com/article/882/7420882.html?cloc=|출판사=일간스포츠|저자=김인구|날짜=2012-02-21|확인날짜=2012-02-25}}{{깨진 링크|url=http://isplus.joinsmsn.com/article/882/7420882.html?cloc= }}</ref> 그러나 2005년 이완과 함께 스위스에서 독도 사랑 캠페인을 벌인 것을 빌미로 각종 CF 방영 계획이 취소되었고, 드라마 촬영 중단까지 요구되었다.<ref name="광주일보">{{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日 CF행사 취소..독도발언 때문|url=http://www.kwangju.co.kr/read.php3?aid=1329898239461109010|출판사=[[광주일보]]|날짜=2012-02-22 |확인날짜=2012-02-25}}</ref>
         2013년 4월부터 6월까지 방영된 SBS 퓨전사극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김태희는 '9대 [[장희빈]]'으로 캐스팅 되며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장옥정]] 역할을 연기했다. 하지만 작품에 대한 혹평으로 이어진 계속되는 시청률 하락과 함께 김태희의 연기력 논란, [[한국사|역사]] 왜곡 등으로 문제를 지적 받았다.<ref>{{뉴스 인용 |제목 ='장옥정' 독기만 품은 김태희, '착한' 장희빈은 어디갔나?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2339334|출판사 =마이데일리 |저자 =최두선 |날짜 = 2013-05-28 |확인날짜 =2017-09-09 }}</ref><ref>{{뉴스 인용 |제목 =김태희 "연기력 혹평에 자존심 상처··독하게 해보겠다"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77&aid=0003007259|출판사 =아시아경제 |저자 =최준용 |날짜 = 2017-05-24 |확인날짜 =2017-09-09 }}</ref><ref>{{뉴스 인용 |제목 =종영 '장옥정',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잃었나 |url=http://entertain.naver.com/read?oid=047&aid=0002027910 |출판사 =오마이뉴스 |자지 =김성규 |날짜=2013-06-26 |확인날짜 =2017-09-09 }}</ref>
         2014년 5월 29일, 김태희는 중국 사극 드라마 《[[서성왕희지]]》 제작발표회에 참석하며 중국 데뷔를 알렸다. 그녀는 극중 왕희지의 아내 씨루이 역할을 맡아 연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중국 드라마 출연..'서성왕희지' 제작발표회 참석|url=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EA31&newsid=01453046606094168&DCD=A10102|출판사=이데일리|저자=고규대|날짜=2014-05-30|확인날짜=2015-08-05}}</ref> 김태희는 자신의 역할 씨루이에 대해 "뻔한 여성상이 아닌, 순수하고 정의로운 캐릭터"였기 때문에 더욱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中드라마 '서성 왕희지', 유학 동경해 선택한 작품"[TD포토]|url=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426553404869440017|출판사=티브이데일리|저자=고규대|날짜=2015-03-17|확인날짜=2015-08-05}}</ref> 이듬해 2015년에는 한국 브라운관으로 복귀해, [[SBS TV|SBS]] 드라마 《[[용팔이 (드라마)|용팔이]]》에 한여진 역할로 출연했다. 김태희에게는 2년만에 안방극장으로 복귀작으로 최고 시청률 20.4%를 기록하며 시청자들에 큰 인기를 얻었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코리아드라마페스티벌]] 최우수연기상, [[SBS 연기대상]] 미니시리즈부문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SAF 연기대상] 김태희, 최우수연기상 수상 "'용팔이' 덕에 행복한 한 해"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416&aid=0000174514|출판사 =SBS funE |저자 =김재윤|날짜 = 2016-01-01|확인날짜 =2017-09-09}}</ref>
         김태희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자연미인으로도 꼽힌다.<ref>{{뉴스 인용 |제목=한국 최고미녀 왜 김태희인가|url=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1101131845363&sec_id=540101&pt=nv|저자=윤대헌|출판사=스포츠 칸 |날짜=2011-01-13 |확인날짜=2011-01-20}}</ref> [[중국]]에서 뽑은 [[한국]] [[여배우]] 순위 1위에도 뽑혔다.<ref>{{뉴스 인용 |제목=중국인, 김태희가 최고…송혜교 이다해 순|url=http://morningnews.co.kr/article.php?aid=129319437931191006|출판사=모닝뉴스 |날짜=2010-12-24 |확인날짜=2011-01-20}}</ref> 또, [[전지현]]·[[송혜교]]·[[손예진]]·[[한가인]]·[[이나영]]·[[한지민]]·[[한예슬]] 등과 200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의 [[미인]]으로 불린다.
  • 남유진 . . . . 11회 일치
         || '''소속 정당''' ||<(>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 ||
         2006년부터 2018년까지 12년 동안 [[구미시]]의 시장을 지냈으며, 소속 정당은 [[자유한국당]]이다. 그리고 [[박정희]] 기념 사업에 지나친 예산 투입을 반복하여 결국 [[구미시]] 경제를 파괴해 '''역사상 최악의 구미시장'''으로 손꼽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구미판 니콜라스 마두로--
         한 지자체장에 3선을 초과하여 도전할 수 없다는 우리나라 법에 따라 구미시장 4선 도전은 할 수 없기에 2018년 1월 25일에 [[경상북도지사|경북도지사]] 출마를 위해 자진 퇴임을 하였다. 곧바로 박정희 정신을 계승하겠다며 경북도지사 출마 선언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참석 이력을 강조하며 공약으로 포항 영일대에 박정희 동상을 설치하겠다고 한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2/26/0200000000AKR20171226141300053.HTML|연합뉴스]] 하지만 자유한국당 경상북도지사 경선에서 11.0%를 득표함으로써 경선을 꼴찌로 마감했다. 이후 경선에서 선출된 [[이철우(1955)|이철우]] 경상북도지사 후보의 공동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그리고 시장뿐만 아니라 제반 정치 환경까지 새로 바뀌었다. 경북 도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자유한국당]]에 비해 앞섰으며, 시의회는 더불어민주당이 공천한 모든 후보가 1위 혹은 2위로 모두 당선되었다. 남유진 시장의 아스트랄한 실정에 지친 구미 시민들이 시장과 시의회를 통째를 바꾸게 된, 즉 위 아 더 월드를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쯤 되면 TK에 얼마나 더불어민주당이 자리잡지 못했는지 알 수 있다. 구미 같이 평균 연령이 낮은 TK 지자체에서도 더민주는 각 선거구별로 후보가 아예 없거나 1명 정도만 내었기 때문에 자유한국당 후보와 비교하면 후보 수 자체(시의회 후보 더민주 7명 VS 한국당 17명, 2.5배 차이다.)가 딸리기도 하고, 그 자유한국당 쪽 의원도 여러 명이 공천이 되기 때문에 있으나 마나한 더민주 후보(혹은 무소속)를 제끼면 최소 한명은 당선되는 시스템인데다가 그마저도 선산읍, 도개면, 무을면, 옥성면, 해평면처럼 고령층이 다수를 차지하는 시외 읍면 지역에서 당선된 인물이 5명이다. 나머지 동 지역은 더불어민주당이 1위를 휩쓸었다. 사실, 도의원 결과만 봐도 바로 설명 끝난다. 구미시의 도의원 당선자 6명 중 3명이 더불어민주당, 나머지 3명이 자유한국당 소속인데, 이 중 1선거구, 4선거구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이 과반(52.22%, 50.33%)으로 당선되었다. 게다가 자유한국당 소속 도의원이 당선된 선거구 중 2선거구는 무투표 당선, 3선거구는 (비록 1:1이 아니고 보수표가 갈렸지만) 단 254표(0.8%p) 차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6선거구는 읍면 지역. 그만큼 자유한국당이 TK에서 그 동안 견제 세력 없이 얼마나 횡포를 부렸는지를 알 수 있고, 그걸 무기로 남유진이 자신의 사리사욕+덕질을 통한 자기만족을 위해 얼마나 구미 시민들을 만만하게 봤는지를 알 수가 있다.
  • 박주아(1942년) . . . . 11회 일치
         '''박주아'''(<small>본명</small>: '''박경자''', [[1942년]] [[9월 20일]] ~ [[2011년]] [[5월 16일]])는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1962년]]에 [[한국방송공사|KBS]] 1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으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신우암 초기 판정을 받고 [[2011년]] [[4월 17일]] 수술한 후 중환자실에서 회복 중, [[5월 14일]] 급작스런 다발성 장기 부전에 빠져 투병하다가 16일 오전 향년 68세로 별세했다.
         * [[한국방송공사|KBS]] 《여로》 ([[1972년]])
         * [[한국방송공사|KBS]] 《[[왕과 비]]》([[1998년]])
         * [[한국방송공사|KBS]]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1999년]])
         * [[한국방송공사|KBS]] 《[[태조 왕건 (드라마)|태조 왕건]]》([[2000년]])
         * [[한국방송공사|KBS]] 《[[눈꽃 (2000년 드라마)|눈꽃]]》 ([[2000년]])
         * [[한국방송공사|KBS]] 《[[제국의 아침]]》([[2002년]])
         * [[한국방송공사|KBS]] 《[[두 번째 프러포즈]]》 ([[2004년]])
         * [[한국방송공사|KBS]] 《[[아름다운 시절]]》 ([[2007년]] ~ [[2008년]])
         * SBS 《[[시티홀 (드라마)|시티홀]]》 ([[2009년]])
         {{토막글|한국 배우}}
  • 박진석 (프로게이머) . . . . 11회 일치
         {{프로게이머 정보
         | 종족 = [[프로토스]]
         '''박진석'''([[1995년]] [[3월 4일]] ~ )은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II]] [[프로게이머]]이다. '''Trend'''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며, 종족은 [[프로토스]]이다.
         2012년 상반기 드래프트에서 삼성전자 칸(현 [[삼성 갤럭시 (프로게임단)|삼성 갤럭시]])의 3차 지명으로 입단하였다.
         SK텔레콤 스타크래프트2 프로리그 2014 4라운드 로스터에서 말소, [[삼성 갤럭시 (프로게임단)|삼성 갤럭시]]에서 탈퇴하고 은퇴하였다.
         * [[2011년 9월]] 제4회 스타크래프트 루키리그 준프로 선발전 입상
         {{토막글|한국 사람}}
         [[분류:199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e스포츠 선수]][[분류:스타크래프트 II 프로게이머]][[분류:프로토스 선수]][[분류:삼성 갤럭시 (e스포츠)의 선수]][[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박창달 . . . . 11회 일치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5><:>'''[[한국자유총연맹]] 역대 총재'''||
         || '''학력''' ||[[한국외국어대학교]] 행정학 학사[br][[영남대학교]] 행정학 석사||
         || '''소속 정당'''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 ||
         [[대한민국]]의 [[정치인]]. [[포항시]] 출신. [[계성고등학교]],[[한국외국어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영남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제 11,12,13대 [[한국자유총연맹]] 총재
         늘푸른한국당 대구시당위원장
         [[늘푸른한국당]] 대구시당위원장을 맡았다. --분명히 [[박근혜]]를 입문시키긴 했는데다가 '''자유총연맹 회장'''까지 한 사람이 요즘 단톡방에서 촛불집회에서 박근혜 까는 유머물을 재밌어하며 많이 올리신다.-- 그러나 늘푸른한국당이 해산되면서 [[자유한국당]]에 복당하였다.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26번) || '''[[신한국당]]''' || - || 낙선→'''당선''' || 2000.3.8 승계[BR](윤원중 의원 탈당으로 승계) ||
  • 백승주(정치인) . . . . 11회 일치
         ||<bgcolor=#C9151E> '''{{{#FFFFFF 소속 정당}}}''' ||<(> '''[[자유한국당|{{{자유한국당}}}]]'''[* 방송 사고로 소속이 잘못 나오는 경우가 있지만, [[JTBC]]는 여러번 백승주를 [[더불어민주당|민주당]](더민주) 의원으로 표기한 전례가 있다.] ||
         ||<bgcolor=#C9151E> '''{{{#FFFFFF 약력}}}''' ||<(> 제20대 국회의원[br]국방부 차관[br]자유한국당 경북도당 위원장[br]한국정치학회 부회장[br]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br]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
         [[1961년]] [[3월 20일]] [[경상북도]] [[구미시|선산군]] 장천면에서 태어났다. 구미 오로초, 대구 성광중, 대구 [[심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9년]] [[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다. 이후 [[경북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정치학회와 [[한국국방연구원]]에서 근무했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국방연구원 산하의 [[북한]]연구실장과 안보전략연구센터장을 지냈다. [[2013년]] [[3월]]에 국방차관으로 선임되었다. 보통 국방차관은 예비역 [[중장]]이나 드물게 재정 전문가가 보임되는데 비해서 순수하게 안보 연구(북한군사 전문)를 해온 [[민간인]]이 선임된 사례는 처음이라 주목을 받았다.역대 최연소 차관이며 [[육군사관학교]] 출신이 거의 독점하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 몇 안 되는 민간인[* 여기서 민간인은 비장성 출신.] 출신이다. 참고로 병역은 [[중위]]로 마쳤다.[* 아무래도 보직이 보직이다 보니 예비역 병장을 그 자리에 앉히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직업군인 출신이라는 점이 파격적이다.]
         2. 한국국방연구원 소속 연구자인 동시에 국방부 차관을 엮임하였기에 차관 임기를 마친 후에는 곧바로 조기퇴직과 함께 국회의원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주변인들에게 밝혔다고 한다. 전(前) 국방부 차관은 예비역 중장에 준하는 대우를 해줘야하는데, 한국국방연구원장도 예비역 중장이기에 모양새가 이상해져서 그냥 국회의원을 하기로 했다고...--한 하늘에 두 개의 4스타는 있을 수 없다!--
  • 부산광역시/인물 . . . . 11회 일치
         * [[강병철(야구인)|강병철]] - 강서구(부산)
         * [[김용철(야구)|김용철]] - 중구(부산)
         * [[김영재(프로게이머)|김영재]] - 해운대구
         * [[박성호(야구선수)|박성호]] - 동래구
         * [[박근홍(야구선수)|박근홍]] - 부산진구
         * [[심혜진(1967)|심혜진]] - 기장군 기장읍 (기장대로413번길) 한국에너지산업충전소
         * [[이학주(프로게이머)|이학주]] - 동래구
         * [[이용훈(야구)|이용훈]] - 영도구
         * [[이정민(야구선수)|이정민]] - 영도구
         * [[정현(야구선수)|정현]] - 수영구
         * [[조성주(프로게이머)|조성주]] - 수영구
  • 신동일 (언어학자) . . . . 11회 일치
         숙명여자대학교의 MATE(Multimedia Assisted Test of English), [[YBM-Sisa]]의 [[SEPT]](Spoken Engish Proficiency Test), 크레듀가 참여한 [[OPIc]] (Oral Proficiency Interview computer), 교통부의 Pilot & Air Traffic Controller 대상 영어말하기능력인증평가, 교육부의 국가영어인증시험 등과 같은 학교, 기업, 국가 단위의 다양한 언어시험 개발/시행, 말하기/쓰기교육 콘텐츠개발에 관한 (책임)연구에 참여했다. 2000-2007년에 한국영어평가학회 총무로 일했고, 2007-2009년 동안은 비영리교육단체인 ACTFL((American Councils on the Teaching of Foreign Languages) 한국위원회를 설립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 〈한국의 영어평가학 4: 사회문화편〉([[2012년]])
         * 〈시험개발의 기술: 시험-문항작성 세부계획서를 기반으로〉(공역) ([[2009년]])
         * 〈한국의 영어평가학 3: 스토리텔링편〉([[2009년]])
         * 〈언어교육평가 연구를 위한 FACETS 프로그램: 기초과정편〉(공저) ([[2009년]])
         * 〈한국의 영어평가학 2: 말하기시험편〉 ([[2006년]])
         * 〈한국의 영어평가학 1: 시험개발편〉 ([[2003년]])
  • 신화용 . . . . 11회 일치
         포항제철동초등학교 4학년때 단거리 육상선수에서 축구로 전향하여 포철중-포철공고까지 유스 테크트리를 탔으나 골키퍼였음에도 작은 키와 실력 성장 정체가 문제가 되어 프로입단에 실패하게 된다.[* 졸업 당시 179cm였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에 포항 원 클럽 맨이었던 최상국 감독이 청주대로 신화용을 부르게 되고 신화용은 청주대로 가게 된다. 하지만 당시 청주대 축구부는 프로 입단,대학 입학 경쟁에서 밀린 선수들이나 가는 곳이었고 선수들의 의욕도 없었다. 게다가 1학년때 허리 디스크 부상을 당하면서 축구를 그만둘뻔 하기까지 했다.[* 이때 디스크 부상으로 인해 군 면제를 받게 된다.] 신화용이 2학년이 되자 청주대 감독이 유인권 감독으로 바뀌었고 유인권 감독의 지도하에 성장했다. 이때 포항의 백업 골키퍼였던 조준호가 이적하면서 팀에 키퍼가 부족해지자 포항은 신화용에게 입단 제의를 했고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 2009년 이전 ===
         2008년 정성룡이 성남으로 갔지만 같은 해 김지혁이 이적해오면서 리그 경기 대부분을 김지혁에게 내줬지만 ACL에서만큼은 6경기 전경기에 출전했다. 그러다가. 2009년 초부터 김지혁을 밀어내고 신화용의 독무대가 시작되었다. [[K리그]]는 물론[[AFC 챔피언스 리그]] 에서 선방쇼를 보여주며 포항 팬 한정으로 골머리를 앓던 수비[* 이 때 포항의 주력 수비수가 [[황재원]], 김형일. 타 팀 팬들은 군침 흘리며 탐을 냈지만 매주 포항의 경기를 지켜보는 포항 팬들은 가끔씩 벌이는 정줄 놓는 수비에 그냥 뒷목만 잡았다.]문제를 혼자서 다 커버했다. 2009년 포항은 플레이오프에서 성남에게 패배하여 리그 3위로 시즌을 마쳤지만 이러한 선방쇼 덕에 신화용은 다른 쟁쟁한 골키퍼들을 제치고 처음으로 '''시즌 베스트 11에 뽑힌다.'''[* 당시 경쟁자들이 모두 실점률 1점대를 찍을 때 홀로 0점대(0.95) 실점률을 기록했다.]
         15시즌이 끝나고 다른 한국 골키퍼들이 연달아 J리그로 떠나자, 해마다 포항 팬들에게 주목 받던 '''신화용의 거취문제가 어느 때 보다 관심이 높아졌다.''' 게다가 전남 드래곤즈와 [[김병지]]의 결별, 성남 FC의 [[박준혁(축구선수)|박준혁]]의 현역 입대, 부산 아이파크의 강등으로 클래식 팀들의 구애를 받게 된 [[이범영]]까지 골키퍼 연쇄이동이 점쳐지는 가운데 '''언급된 모든 키퍼들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신화용이 재정감축위기에 빠진 포항을 떠날까 포항팬들이 걱정했으나...
          * 2006년 3월 12일, 전북전에서 프로 데뷔이자 K리그 데뷔전을 치뤘고, 첫 실점을 기록하였다.
         키가 큰 골키퍼를 선호하는 김봉수 코치 때문에 대표팀에 뽑히지 못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저 소문일 뿐이다. 김봉수 코치는 오히려 김병지, 이운재, 카시야스를 거론하며 골키퍼는 키보다 경기 운영능력, 판단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http://www.sportnest.kr/1564|관련 기사]] 정성룡 때문에 덩달아 미운 털이 박혀서 본인이 한 말과 정반대의 말이 퍼져 인터넷에서 공연히 욕을 먹고 있다.[* 덧붙여 굳이 김봉수의 양아들을 찾자면 정성룡이 아니라 A매치 달랑 1경기 뛰어본 이범영이다. 유소년 시절부터 가르친 선수로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 4강 UAE전에서 한국에서 패널티킥 방어가 가장 뛰어난 김승규를 빼고 승부차기 대비용으로 넣을 정도로 신뢰를 보였다. 정성룡은 부진할 때 코치로서 변호해준 게 다인데 어쩌다 보니 양아버지란 낙인이 찍혔다.] 신화용이 뽑히지 못한 건 잘한다고 무한정 돌려 쓸 수 없는 골키퍼 포지션의 특수성 때문이지 다른게 아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 최악의 경기인 2015 K리그 클래식 홈 개막전 울산과의 경기를 슈틸리케 감독이 보도진 몰래 [[포항 스틸야드]]에 암행정찰을 왔다. --왜 잘 할 때는 안 오고-- 이 날 모습을 생각한다면 국대와의 거리가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신화용 >>>>>> 정성룡을 외치던 K리그 팬들을 입 다물게 한 반면에, 오히려 K리그까들로부터 '''정성룡이랑 뭐가 다르냐, 정성룡보다 더 못하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조롱받고 있는 중. 기량이 제대로 폭발한 이후로 실수가 상당히 줄어든 키퍼인데 역대급 실수를 엄청나게 보여주면서[* 그것도 공중파 전국 생중계였다. [[KBS]]가 올 시즌부터 K리그 클래식을 전격 중계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 --아니, 왜 잘할 때는 중계를 안 해주고-- 참고로 KBS의 K리그 클래식 전격 중계는 [[이영표]]가 해설위원이 되면서 내건 조건으로 KBS는 이를 받아들였다라고만 서술하면 이영표 해설위원 혼자서 다 한 거 같게 느껴지는데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프로축구연맹에서 따낸 계약 조건이라고 보는게 정확하다. 이영표 해설위원이 아무것도 안한 건 아니지만 엄밀히 말하면 프로축구연맹>>>이영표의 기여도 차이가 있는 일이다.] 엄청 평가가 떨어졌다. 다만 이 경기를 관람한 슈틸리케 감독은 "축구에서는 언제든 실수가 나올 수 있다.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실수였고, 선수들은 이런 실수가 나오는 데 대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했다.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a_match&ctg=news&mod=read&office_id=343&article_id=0000047475|관련기사 1]],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_league&ctg=news&mod=read&office_id=108&article_id=0002396186|관련기사 2]]
          * 2009년, K리그 베스트 11 GK에 선정되었다.
  • 우현(배우) . . . . 11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 top1=배우/한국)]
         [[1964년]]생으로 대표 [[노안]]배우다.[* 이 노안 얼굴 덕분에 "사람들이 내 아내를 딸로, 아들을 손자로 본다"고 자주 언급한다.] 절친한 동갑내기 친구로는 [[안내상]][* 과 동기인 데다가 30년지기 절친한 친구이다. 그야말로 평생가는 친구. 다만 유난히 둘 사이가 튀었는지, 안내상의 아버지는 둘이 [[동성애]]를 한 줄 알고 헤어지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우현의 말로는 함께 젊을 적부터 학생운동도 하고 어울리고 했으나, 안내상이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같이 어울리는 친구 중에 튀기에 좀 '그랬다고'(?) 한다.]과 [[이대연]]이 있고, 다른 동갑 연예인은 [[한석규]]와 [[이선희]]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 노안 문제는 한국을 벗어나면 더욱 심각해지는데, 왜냐하면 이 분이 '''[[키아누 리브스]]'''와 동갑이라는 점이다!! ~~뭐?~~ 키아누 리브스가 미치도록 동안인 것도 맞다. 저 둘을 누가 동갑내기 친구라 믿겠는가?] 닮은 꼴로 [[골룸]], [[요다]][* 실제로 <유자식 상팔자>에서 우현의 얼굴에 요다 CG를 붙인 적이 있다.], 통아저씨 [[이양승]], 전 국회의원 [[조순형]]이 거론된다.
         그러다가 2003년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의 단역으로 영화에 데뷔하였고, 같은 해 [[황산벌(영화)|황산벌]]에도 출연한다. 2004년 [[시실리 2km]]의 해주로 강한 인상을 남기며, 일반인뿐만 아니라 영화계의 관심도 받게 된다. [[http://www.youtube.com/watch?v=ChRUT0rck9A|니가 94야 그럼?]] 흥행한 영화가 아니었음에도 '제일 늙은 막내 조폭'이라는 역할 설정의 매력으로 영화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에도 그 장면이 나오는 등, 출연자 중 우현만큼은 대중에게 얼굴을 꽤 알린다.
         친구인 [[안내상]]과만 몇 번 출연하다가 [[JTBC]] [[유자식 상팔자]]에서 가족과 함께 출연한 계기로 본격적으로 예능에 진출했다. 본래 예능 울렁증이 있다 보니 우현보다는 가족들의 활약이 대단했었고 빵빵 터졌지만, 어느 정도 예능을 하다보니 본인도 평타를 치기 시작했다. 또한 극초반에 드라마 촬영 일정 때문에 아내와 외아들만 출연하다가, 잠깐 하차했다가 다시 매주 고정출연 중이다. 그 후 장모님이 타계 후 잠깐 쉰 적이 있지만, 그 후에도 프로가 종영할 때까지 꾸준히 참여하였다.
         하지만 그 후 [[유자식 상팔자|고정 출연 프로]]가 종영되면서 예능 출연 빈도 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2016년 7월말 이후로는 예능에 출연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2018년 2월 달에 파일럿 예능 삐그덕 히어로즈를 통해 오랜만에 예능에 출연하였다. 그 후 범바너 2화에 출연하였다.[* 참고로 친구인 안내상은 이 프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 협동 프로젝트 新 부자수업(mbn, 2015) - 하빠의 변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1,2편)
         본래 가족과 방송 출연은커녕 공개조차 되지 않았다. 그나마 아내는 인터뷰나 [[라디오스타]] 등에서 자주 언급했었고 부부가 영화 동반 출연한 적이 있었다. 그러던 중 [[유자식 상팔자]] 계기로 온 가족이 방송에 출연했다. 하지만 출연 후에도 아내는 방송에서 자주 모습을 비추는 것에 비해 아들은 고정 프로그램인 <유자식 상팔자>와 [[무한도전]] [[무한도전 못·친·소 페스티벌 시즌 2|못친소2]]에서 잠깐 출연한 것 이외의 다른 프로그램에는 전혀 출연하지 않는다.
          * 2017년 한 때 인피니트를 구글에 검색하면 [[인피니트]]의 [[남우현]]의 프로필 사진에 나온적이 있다.
         [[분류:김천시 출신 인물]][[분류:한국 남배우]][[분류:1964년 출생]][[분류:1998년 데뷔]][[분류:무한도전의 역대 게스트]][[분류:1대 100 역대 1인]]
  • 이병규 (1983년) . . . . 11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06년]]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06년]] [[7월 7일]] <br />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 대 [[롯데 자이언츠|롯데]]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 [[2005년]] 일본
         '''이병규'''(李柄奎<ref>{{서적 인용 |저자=[[KBO (야구)|KBO]] |제목=한국 프로야구 기록대백과 |판=제4판 |쪽=759 |날짜=2009-03-10 }}</ref>, [[1983년]] [[10월 9일]] ~ )는 [[KBO 리그]] [[롯데 자이언츠]]의 [[외야수]], [[내야수]], [[지명타자]]이다.
         [[2009년]] [[8월 8일]]에 [[투수]] [[서승화]]가 2군에서 일으킨 구타 사건의 피해자로 널리 알려졌고, 이 사건이 드러나면서 [[서승화]]로 예고됐던 [[롯데 자이언츠|롯데]]전 선발 [[투수]]가 [[박지철]]로 교체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39&oid=032&aid=0002025836 이대호 연타석포 롯데, 5연패 탈출 4위로] - 경향신문</ref>
         [[2012년]]부터 다시 본업인 [[1루수]]로 [[최동수 (야구인)|최동수]]와 번갈아가며 출장했고, [[2012년]] 시즌 후 10월 무릎 수술을 받고 재활했다. [[넥센 히어로즈]]전에 특히 강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2013년]] 2012년 10월에 무릎 수술 후 2013년에는 초반에 복귀하지 못하고 2군에 있는 경우가 많았으며 후반기에 복귀하였다. [[두산 베어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 홈런을 기록했다.
  • 이선희 . . . . 11회 일치
          | 직업 = [[싱어송라이터]], [[음악 프로듀서]]
         2006년 돌연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포기하고 2009년에 귀국해 14집 《사랑아...》를 발매하며 여러 방송과 행사에 출연했다. 특히 KBS의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불후의 명곡]]》에 출연하였다.
          |제목 = 이선희 한국가수 3번째 카네기홀 공연, 이서진-이승기 미국행 지원사격
         * 2009년 14집《[[사랑아...]]》
         * 2009년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 2009년
         === 가요 프로그램 1위 ===
         <!--KBS, MBC, SBS, M.net에서 방영되는 가요프로그램 주간 1위 내역만 기록해 주시고, 나머지 내역들은 '그 외' 문단으로 분류하여 기재해주세요.(상반기 및 연간 1위도 '그 외' 문단으로 기재.)-->
         [[분류:196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1980년대 가수]][[분류:1990년대 가수]][[분류:2000년대 가수]][[분류:2010년대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싱어송라이터]][[분류:골든디스크 본상 수상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팝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대한민국의 발라드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댄스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록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프로듀서]][[분류:1984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연출가]][[분류: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정치인]][[분류:민주자유당 당원]][[분류:새한국당]][[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91년)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95년) 당원]][[분류:새정치국민회의]][[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의 배우자]][[분류:계명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계명문화대학교 교수]][[분류:동아방송예술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여성 기업인]][[분류:한산 이씨]][[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한국방송통신대학교 동문]][[분류: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홍콩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
  • 이현우 (가수) . . . . 11회 일치
         ==== 기타 프로그램 ====
         * 《[[한바탕 웃음으로 (TV프로그램|한바탕 웃음으로]]》[[KBS]]
         * 《[[이소라의 프로포즈]]》[[KBS]]
         * 《[[은밀하게 위대하게 (텔레비전 프로그램)|은밀하게 위대하게]]》[[MBC]]
         * [[한국존슨]] 지퍼락 ([[2004년]]) (faet.[[최화정]](내레이션))
         *[[CJ CGV]] 윈터가든 ([[2009년]])
         *[[한국인삼협회]] ([[2018년]])
         * 2009년 《천만번 사랑해》ost - Love Night
         === 가요 프로그램 1위 ===
         [[분류:196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1988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20세기 미국 사람]][[분류:21세기 미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미술가]][[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모델]][[분류:비디오 자키]][[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참가자]][[분류:미국의 개신교도]][[분류:파슨스 디자인 스쿨 동문]][[분류:경원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한국계 미국인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마약범]][[분류: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가수]][[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이라크 전쟁 반전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분류:경주 이씨]][[분류:대한민국의 범죄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 강승현(모델) . . . . 10회 일치
         어린 시절부터 꽤나 [[장신|큰 키]]였는데, 그 땐 그게 [[콤플렉스]]로 작용했다고 한다. 다만 그 시절부터 패션잡지를 접하며 모델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다가 [[동덕여자대학교]] 모델학과에 입학한 후 자신의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큰 키[* 프로필에도 적혀 있지만, 현재 178cm다. 이는 [[장윤주]](171cm)보다도 7cm나 더 크고(다만, 슈퍼모델계는 평균키가 워낙 커서 171cm 정도는 [[장신]] 축에도 못 끼긴 한다. 런웨이에 서는 사람들 평균이 175cm다.) 13/12 법칙을 사용할 경우 이에 상응하는 남성의 신장은 약 193cm.]를 장점으로 바꾸어 나가는 데 성공했다.
         프로필의 각주에서도 설명했다시피 예명은 '효니 강'(Hyoni Kang)이다. 이는 좀 더 귀여운 느낌을 주고자 붙인 예명이며, 그와 동시에 외국인들도 쉽게 발음해서 이름이 더 잘 각인되게끔 하기 위한 의도도 있다.
         그 이외의 경력으로는 금호건설을 비롯한 여러 CF 출연([[http://pann.nate.com/video/202506959|금호건설 CF 보기]])[* CF를 보면 '난 포즈부터 달라'라는 대사와 함께 강승현이 몸을 구부리는 포즈를 취한 뒤에 그에 맞춰 [[아부다비 국제공항]] 관제탑이 오버랩된다. [[아부다비 국제공항]] 관제탑은 실제로 구부러진 모양으로 지어져 있으며 금호건설이 수주한 프로젝트라고 한다.], [[무한도전]]의 '악마는 구라다를 입는다'편 출연, 글로벌 성공시대 '뉴욕을 매혹시킨 패션모델, 강승현'편 출연, 2014년 [[런닝맨]] 출연 등이 있다.
         디자이너 겸 사업가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사업 분야는 패션 분야. 포드 모델 대회에 참가하면서 인연을 맫은 스타일리스트 윤애리, 사진·비디오 작가 이준엽과 함께 '리본 프로세스'(Reborn Process)라는 브랜드를 출범, 자신이 디자인하고 자신이 모델을 하면서 사업을 하고 있다.
         2015년 4월 7일 첫 방송을 하는 KBS W 채널의 뷰티바이블 2015 S/S[* 제목을 보면 지난 시즌 '[[애프터스쿨]]의 뷰티바이블'과 관련이 있는 듯 하지만 전혀 다른 프로그램이라고 한다.]에서 [[전효성]], [[황광희]]와 함께 공동MC를 맡을 예정이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1&aid=0000418959|관련 기사]]
          * [[힙합의 민족 2]]에 출연했다. 1라운드에서 가장 많은 프로듀서들의 선택을 받았다.
          * 본래 [[리그베다 위키]] 시절에 [[강승현]] 문서로 들어가면 이 사람을 포함하여 3명의 동명이인으로 갈라지도록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쪽을 [[한화 이글스]][[강승현(야구선수)|에서 뛰고 있는 오빠뻘 되는 야구선수]][* 다만 문서 작성 당시는 [[롯데 자이언츠]] 소속이었다. ]가 생기며 뒤늦게 이 사람에 대한 문서가 작성되었다. 근데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https://ko.wikipedia.org/wiki/%EA%B0%95%EC%8A%B9%ED%98%84|강승현]]으로다가 들어오면 바로 이 사람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이는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https://en.wikipedia.org/wiki/Kang_Seung-hyun|마찬가지]]. 아마도 세계적인 인지도 때문인 모양.
         [[분류:한국 여성 모델]][[분류:1987년 출생]][[분류:달서구 출신 인물]]
  • 건어물 여동생 우마루짱/168화 . . . . 10회 일치
         [[건어물 여동생 우마루짱]] 168화. '''우마루와 교육프로그램'''
          * 도마 우마루(코마루)와 모토바 키리에는 한가하게 Tv를 보다가 어린이 교육프로그램을 보게 된다.
          * 그 프로그램의 굉장한 팬이었던 키리에. 하지만 고등학생이나 돼서 그런걸 본다고 하면 반응이 나쁠거 같아서 일코를 감행한다.
          * 우마루는 그런 것도 키리에답다며 격려하며 키리에는 용기를 얻어서 굉장히 좋아하는 프로그램이라고 털어놓는다.
          * 분위기가 업된 키리에는 프로그램의 안무를 현란하게 따라하는데 마침 귀가하던 도마 타이헤이, 모토바 타케시(봄바)와 딱 마주친다.
          * 그런데 채널을 돌리다 보니 "네코롱 부스"라는 어린이 교육프로그램을 발견한다.
          * 네코롱 부스는 우마루도 아는 캐릭터인데, 원조는 이 프로그램. 상당히 전통있는 프로그램이다.
          * 우마루가 이 프로그램을 좋아하는거 같다고 말하자 "보통일까"라고 어색하게 대답하고 자학한다.
          * 키리에는 사실 엄청나게 좋아하는 프로그램이라고 고백하고 끝없는 덕심을 어필한다.
  • 광주 FC . . . . 10회 일치
         2010년 12월 16일에 창단한 구단[* 창단식 기준.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승인은 10월에 이미 나 있던 상태였다.]으로 2011시즌부터 [[K리그]]에 참가하고 있는 프로구단이다. K리그의 16번째 구단이며, 순서상 6번째 [[시민구단]]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광주광역시]]를 연고로 두고 활동한다. 정식명칭은 "광주시민프로축구단".
         광주 FC의 창단은 1996년 월드컵경기장 유치과정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2002 월드컵 개최지로 한국과 일본이 선정되면서 각 지방에서는 월드컵경기장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했고, 광주광역시가 개최도시 중 하나로 선정될 수 있었다.
         일단 종합운동장으로 활용하는 건, 사용처를 바꾸기 위해 또 추가로 목돈이 투입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안건은 사실상 폐기가 되고, 프로축구단을 유치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 가장 유력했던 방법은 경기장을 짓기 위해 당시 금호건설을 포함한 지역기업에 축구단 창단을 종용하는 일이었으나 이 역시 1년 운영비를 이유로 난색을 표하게 되어 전남 드래곤즈를 광주에 공동연고지로 제의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까지도 최종적으로 좌절된다.
         이에 당시 [[상무 축구단]]이 프로화를 고려하고, 이걸 감지한 각 지역은 상무 축구단을 유치하고자 하였는데 여기에 광주광역시도 유치흐름에 참가하여 광주 상무 불사조가 탄생하게 된다. 단, 여기에는 2002년부터 2008년까지 한시적 연고협약으로 맺어졌고, 광주광역시는 위 대안중에서 2번과 4번을 혼합하는 방안으로 월드컵경기장을 활용하게 된다.
         그러나 광주광역시의 신생구단 창단은 상당히 지지부진하여 2008년 연고협약 종료시점까지 광주로 오려는 팀은 없어 창단이 제대로 가시화되지 않았고, 2009년에 마지막으로 믿고 있던 울산 현대미포조선 축구단을 K리그 참가조건으로 유치하려 했으나 이 역시도 울산미포조선은 애초에 K리그에 참가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 않았기에 2번과 4번을 혼용하는 대안 역시 폐기된다.[* 기업구단을 유치하려 했던 이유는 2001년에 광주시가 파악했던 금액과는 달리 K리그 1년 운영비가 120억 수준이라는 것에 기겁(...)한 감이 있다. 2001년 시점에 광주시가 파악했던 K리그 구단의 1년 운영비는 40억 수준이었는데 지금와서 보면 택도 없이 낮은 금액.] 또한 이 상무와의 연고협약 과정에서 광주광역시는 이미 한국프로축구연맹에 K리그 참가를 전제로 이미 회원가입비 + 축구발전금으로 40억원을 납부한 상황이었는데... '''만약 팀 창단을 하지 않으면 이 40억이 공중분해되는 마술이 펼쳐질 상황'''이라 결국 시에서 직접 나서는 5번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상무와 연고협약이 연장된 2년의 유예기간 안에 창단을 안 할시에는 그대로 돈이 날아가는 조건이었다.]
  • 김승대 . . . . 10회 일치
         김승대만의 특징은 '''기가 막힌 타이밍에 [[오프사이드]] 라인을 깨는 라인 브레이커에 걸맞는 움직임과 골 감각이다.''' 이는 한국 선수로는 거의 독보적인 능력이며 과거의 한국 축구 레전드들도 쉽게 가지지 못한 강점이다.[* 80년대 이전에는 오프사이드 라인을 구성하는 전술 자체가 빈약했고 90년대 이후에는 오프사이드 라인을 깨기보다는 피지컬과 발기술로 찍어누르는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에 1:1 상황에서의 결정력도 좋아서 질 좋은 패스까지 배급되면 거의 골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 다만, 뒤에서 [[영 좋지 않은]] 패스가 공급되면 별다른 활약을 할 수 없다는 단점도 있다.[* 김승대에게 양질의 패스를 공급해주던 [[이명주]]가 2014년 여름에 이적하자 그 뒤로 힘을 못쓴 전례가 있고 2015년에는 전반기에 부진하다가 여름에 [[신진호]]가 복귀하면서 패스의 질이 높아지자 김승대도 다시 활약하기 시작했다.]
          * {{{#blue '''2013년 3월 13일, 분요드코르전에서 프로 데뷔이자 ACL 데뷔전을 치뤘다.'''}}}
          * 2013년 7월 10일, 성남전에서 프로 선수로는 첫 FA컵 경기를 치뤘다.
          * 2013년 9월 14일, 제주전에서 프로 선수로는 첫 FA컵 도움을 기록하였다.
         ||<#00703c> '''{{{#eee156 2013.07.03}}}''' ||<#00703c> '''{{{#eee156 포항}}}''' ||<#00703c> '''{{{#eee156 서울}}}''' ||<#00703c> '''{{{#eee156 도움}}}''' [* 프로 데뷔 첫 공격 포인트] ||
         ||<#00703c> '''{{{#eee156 2014.04.09}}}''' ||<#00703c> '''{{{#eee156 포항}}}''' ||<#00703c> '''{{{#eee156 경남}}}''' ||<#00703c> '''{{{#eee156 2득점}}}''' [* 프로 데뷔 후 첫 멀티 득점] ||
         ||<#00703c> '''{{{#eee156 2014.08.09}}}''' ||<#00703c> '''{{{#eee156 포항}}}''' ||<#00703c> '''{{{#eee156 상주}}}''' ||<#00703c> '''{{{#eee156 2도움}}}''' [* 프로 데뷔 후 첫 멀티 도움] ||
         ||<#00703c> '''{{{#eee156 2013.09.14}}}''' ||<#00703c> '''{{{#eee156 포항}}}''' ||<#00703c> '''{{{#eee156 제주}}}''' ||<#00703c> '''{{{#eee156 도움}}}''' [* 프로 데뷔 후 FA컵 첫 도움] ||
         ||<#00703c> '''{{{#eee156 2013.10.19}}}''' ||<#00703c> '''{{{#eee156 포항}}}''' ||<#00703c> '''{{{#eee156 전북}}}''' ||<#00703c> '''{{{#eee156 득점}}}''' [* K리그 클래식, FA컵, ACL 통틀어 프로 데뷔골] ||
  • 김태훈 (1987년) . . . . 10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0년]]
         |드래프트 순위 = [[2010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10년]] 3차 6라운드([[KIA 타이거즈]])
         [[2006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06년]] 4차 7라운드([[SK 와이번스]])
         '''김태훈'''(金太勳<ref> 한국야구위원회, 2012 가이드북 </ref>, [[1987년]] [[9월 28일]] ~ )은 [[KBO 리그]] 전 [[KIA 타이거즈]]의 [[포수]]이다.
         {{토막글|야구인}}
  • 김현정 (1979년) . . . . 10회 일치
         | 학력 = [[한국방송통신대학교|방통대 영문과]] [[학사]]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학과<ref>[https://news.knou.ac.kr/news/article.html?no=18562 "연기만큼 학업도 열심히!
         2009년 위안부 문제를 다룬 연극 '나비'를 마지막으로 배우로서 활동을 마치고 '가톨릭상담봉사자과정'에서 1년 넘게 심리상담 교육을 받은 후 화가가 되었다. 이를 통해 2014년 6월에는 첫 개인전인 <묘사와 연기>가 열렸으며<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6965311 화폭으로 옮긴 심리 치유…배우겸 화가 김현정 개인전], 연합뉴스, 2014년 6월 17일 작성.</ref>, 2014년 11월 9일 부터 11월 19일까지 [[백남준]], [[이왈종]]과 함께 중국 베이징에서 <하나에서 셋으로:한국 예술가 3인전>에 작품전을 열었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218578 ‘동양화로 그린 장서희는?’ 화가 김현정, 中진르미술관 초청], 뉴데일리, 2014년 10월 7일 작성.</ref>
         |align="center"| 2008년 ~ 2009년
         * "일분위삼 - 한국현대예술가3인전"
         * "서도무문 - 한국서법예술교류전"<ref>[http://www.korea.net/NewsFocus/People/view?articleId=133814 Her evolution has no end], 코리아넷, 2016년 3월 16일 작성.</ref>
         :장소 : 중국 [[베이징]] 주중한국문화원 / 파주 민족화해센터 순례자 갤러리
         * [http://www.kmdb.or.kr/actor/mm_basic.asp?person_id=00013948&keyword=김현정 한국 영화 데이터베이스]
         [[분류:197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98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모델]][[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연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뮤지컬 배우]][[분류:비디오 자키]][[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배화여자대학교 동문]][[분류:한국방송통신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화가]][[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김천시 출신]]
  • 김혜옥 . . . . 10회 일치
         * 5년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가정교육학과 학사
         * [[2009년]] [[KBS2]] 주말연속극 《[[솔약국집 아들들]]》 ... 안문숙 역
         * [[2009년]] [[SBS]] 일일드라마 《[[두 아내]]》 ... 민 여사 역
         * [[2009년]] [[MBC]] 미니시리즈 《[[맨땅에 헤딩]]》 ... 연이 모 역
         * [[2009년]] [[MBC]] 아침드라마 《[[망설이지마]]》 ... 수현 모, 차영란 역
         * [[2015년]] [[KBS2]] 금토드라마 《[[프로듀사]]》 ... 이후남 역
         * [[2009년]] 《[[킬미]]》 ... 윤여경 역
         * [[2009년]] 《[[걸프렌즈 (2009년 영화)|걸프렌즈]]》 ... 엄마 역
         [[분류:195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78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연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서울예술대학 연극과 동문]][[분류:한국방송통신대학교 동문]][[분류:중앙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여자고등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 대한민국 FA컵 . . . . 10회 일치
         대한민국 FA컵은 [[대한축구협회]]에서 주관하는 [[컵 대회]]이다. 프로, 아마추어 구분없이 KFA에 등록되어 있고 규정을 충족한 모든 팀이 겨루는 대회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모든 경기는 단판승부가 원칙이나 흥행을 유도한다는 이유로 대회진행방식이 끊임없이 바뀌고 있어 NTX위키에 일일이 적기가 어려울 정도.
         물론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는 프로팀도 참가가 가능했기 때문에 현대적인 의미의 FA컵으로 규정할 수도 있으나 실제 운영에서 프로팀이 별로 신경도 안 쓸 뿐더러 구단의 역사에 특별히 기록하지도 않을 정도로 권위가 없는 대회이기도 했다. 또한 FA컵이 운영되고 있음에도 별도로 전국축구선수권대회가 열렸었다는 점은 사실 전신이라고 말하기에도 곤란한 부분이 있다.
         FA컵은 KFA에 등록된 프로와 아마추어가 모두 참가자격을 갖게 되지만, 실질적으로 경기에서 보여줄 수 있는 기량이 명백하기에 토너먼트를 진행하기에 앞서 라운드를 차별 배정받는다.
         단, 이 규정은 '''법인화가 완벽하게 진행된 완전한 프로팀'''이라지만 FA컵 우승팀 자격으로 티켓을 받을 수 있다. 즉, 아직까지 K리그 이외 팀이 우승한 적은 없지만 만에 하나 실업팀과 같은 세미프로나 대학팀 같은 아마추어가 우승하게 되면 우승팀일지라도 ACL 참가는 불가능하다. 또한 프로화를 했다고는 하나 팀이 사업자등록 및 법인화까지는 AFC의 규정에 적합해도 '''"팀의 선수 전부가 본질적으로 군인 내지는 경찰"'''인 상주 상무와 안산 경찰청은 세미프로팀과 마찬가지로 ACL진출이 불가능하다. 이 경우는 법인화가 완벽하게 진행되었지만 선수들의 신분문제로 완전한 프로팀으로 규정할 수 없기 때문.
         2016년 기준, ACL에 참가하는 대한민국 프로축구팀들은 AFC의 규정에 따라 다음과 같은 조편성에 들어간다.
  • 박승욱 . . . . 10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2년]]
         |드래프트 순위 = [[2012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2년 3라운드]]([[SK 와이번스]])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2년]] [[6월 28일]] <br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 대 [[삼성 라이온즈|삼성]]전 대타
         '''박승욱'''(朴承昱<ref>한국야구위원회, 2012 가이드북</ref>, [[1992년]] [[12월 4일]] ~ )은 [[KBO 리그]] [[SK 와이번스]]의 [[내야수]]이다.
         {{토막글|야구인}}
  • 서수민 . . . . 10회 일치
         || '''가족''' ||<(> 조카: [[장순왕후]][* 드라마 제작국의 프로듀서로 [[넝쿨째 굴러온 당신]], [[전우치]] 등에서 활동했다.], 딸 2명 ||
         || '''직업''' ||<(> 몬스터 유니온 예능부문 프로듀서 ||
         [[경상북도]] [[포항시]] 출생[* 1박 2일 2016년 1월 31일 방송에서 [[유호진]] PD를 통해 언급됐다.]으로, [[한국방송공사|KBS]] 예능국 소속 PD다. [[1995년]] [[연세대학교]] 의생활학과를 졸업한 다음 KBS에 입사했다.
         [[개그 콘서트]], [[폭소클럽]] 등의 코미디 프로그램을 주로 연출했고, [[2012년]] [[11월]] 개그 콘서트를 비롯한 2~4개의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책임프로듀서([[CP]])로 승진했으며 [[드라마]]국 소속의 김성근 [[PD(방송)|PD]]와 결혼했다.
         물론 단발적으로 호응이 좋은 코너를 가지고 성공했다고 해도, 장기적으로 호응을 얻기 힘든 것을 지속적으로 밀어붙임으로써 시청자들이 질리게 만들었으니 매니악한 팬들만 질리게 했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다만 PD로서의 역량은 높지만 개그를 보는 눈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개그는 본디 "개그맨이 짜고 개그맨이 연기 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개그를 선별하여 방송에 내보내는 개그 프로그램 감독으로서의 [[무능력한 상사|역량은 무능하다 보는게 일반적인 시선이다.]]
         또 라디오 스타에서 아빠 어디가?에 출연하라는 제안을 받은 김대희에게 출연을 하지 못하게 만든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아빠 어디가?는 2013년 1월에 방송이 시작되었는데 사실 해당 방송과 개콘의 방송시간을 감안하면 경쟁 프로그램도 아닌데 막은 것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도 있다. 전통의 개콘 녹화일인 수요일에 녹화하는 것이 아니라면 서수민이건 다른 PD건 막을 명분이 없는데 전후사정을 떠나 김대희는 개인적으로 많이 아쉬웠을 듯.
          *[[프로듀사]] (2015년 5월 15일~6월 20일)
          [[분류:프로듀서]][[분류:포항시 출신 인물]][[분류:1972년 출생]][[분류:1995년 데뷔]][[분류:1대 100 역대 1인]]
  • 양일환 . . . . 10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83년]]
         |드래프트 순위 = [[1983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1983년]] 1차 3순위([[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1983년]]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1989년]]
         '''양일환'''(梁日煥, [[1961년]] [[6월 10일]] ~ )은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이자,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2군 투수코치이다. [[1990년]]부터 잠깐의 휴식기였던 [[1999년]] ~ [[2000년]]과 [[2009년]]을 제외하고 단 한 번의 팀 이동 없이 [[삼성 라이온즈]]에서 [[투수]]코치로 재임 중이다. [[2011년]] 시즌 중 암으로 입원하여 시즌을 마감한 [[장효조]] 2군 감독을 대신해 후반기 [[한국 야구 퓨처스리그|퓨처스 리그]]를 이끌었다.
  • 원피스/875화 . . . . 10회 일치
          *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를 끌고 가려고 접근해서 [[몽키 D. 루피]]가 패기로 공격하나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징베가 강물을 이용해 공격하자 간단히 약화된다.
          그의 생각이 맞아떨어졌다. 빅맘은 미쳐있는 중에도 제우스가 없는게 불편해 죽겠는지 제우스에게 돌아오라고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하지만 나미의 구름 맛에 홀린 제우스는 눈치만 보지 결코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보다못한 "프로메테우스"가 쫓아와서 왜 마마의 명령을 거역하냐고 제우스를 다그쳤다. 그럴 수록 나미는 더욱 맛있는, "쥬시한 먹구름"으로 제우스의 환심을 샀다. 결과는 대성공. 역시 제우스는 빅맘의 부하가 맞았고 식탐에 눈이 머는 것도 똑같았다.
          * 루피는 "태양" 녀석이 다가오자 킹 밤의 원수를 갚으려 했다. 무장색을 두른 "JET 개틀링"으로 프로메테우스를 벌집으로 만들었다. 언뜻 프로메테우스의 몸이 흩어지는 것 같았지만 아주 잠깐. 아무 소용도 없었다. 루피는 당황해하며 패기 조차 통하지 않으면 "자연계"보다 성가신 적이 아니냐고 소리쳤다. 다행히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를 데리고 가는게 우선이어서 그런지 일행에게 반격할 기미는 없었다. 프로메테우스가 거듭 마마에게 돌아가자고 재촉하자 헤롱거리던 제우스도 조금 정신을 차렸다. 돌아가겠다고 말한 것이다. 단, 마지막으로 맛있는 구름을 원껏 먹고 나서. 부모를 똑닮은 자식.
          일행이 다리에 올라서자 징베는 강으로 뛰어들었다. 생각이 있었다. 그는 일행을 먼저 건너게 하고 자신은 프로메테우스를 요격했다. "창파 소나기". 징베가 강물을 휘감아 프로메테우스에게 퍼부었다. 루피의 공격 조차 아무렇지 않게 씹었던 프로메테우스가 물세례에는 어이없이 쪼그라들었다. 징베는 일행에게 저것이 "응축된 불꽃의 화신"이며 "대화재"가 말을 하고 다니는 거라고 여기라고 말했다. 그러니 다른 건 통하지 않아도 불의 성질을 이용한 공격에는 여지가 없는 것이다.
          * 프로메테우스를 쓰러뜨린 걸로 안심하기는 이르다. 빅맘이 지나쳐왔던 추격대 병력이 그녀를 따라잡았다. 그들이 빅맘을 추월해 일행의 후미로 쇄도해왔다. 그 중 호박머리가 다린 허수아비가 긴 몸채를 뻗으며 공격했다. 그가 노리는 것은 페드로. 페드로가 공격을 받아내는 동안 다른 병력들도 전개했다. 그 중 연기로 만든 산양 같은 것이 벽을 타고 달려왔다. 징베 바로 뒤로 달리던 캐럿은 자기 앞으로 끼어드는 녀석에게 선공을 날렸으나 막히고 만다.
  • 유병수 . . . . 10회 일치
         유병수는 대구신암초등학교를 다니며 축구부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대구 청구중학교에 입학한 후 서울 수서중학교로 전학해 매경기 1골이상을 득점하여 활약을 했고, 서울 [[언남고등학교]]로 진학해서 백록기 전국고교 축구대회 득점상과 추계 한국고교축구연맹전 득점상 등 좋은 활약을 펼쳤다. 홍익대로 입학을 결정한 그는 전국 추계 1, 2학년 대학축구대회 도움상을 받으면서 주목 받기 시작했다.
         홍익대학교를 휴학한 유병수는 [[K리그 2009|2009 K리그]] 신인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인천 유나이티드 FC|인천 유나이티드]]에 지명되며 프로리그에 데뷔했다. 시즌 시작전, [[인천 유나이티드 FC|인천 유나이티드]]는 창단멤버인 [[방승환]]을 팔게 되는데, 이는 주 공격수이자 프랜차이즈 스타인 선수의 이적이므로 팬들의 걱정을 야기시켰으나 오히려 대표이사인 안종복 사장은 "신인 유병수가 그의 자리를 메꿔 줄거라 의심치 않는다" 라는 발언으로 유병수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었다. 또한 인천의 새 감독 [[일리야 페트코비치]] 역시 앞으로 인천을 대표하는 선수로 클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는 개막전에서 데뷔골을 성공시키고 무회전 프리킥을 선보이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ref>{{웹 인용|url=http://www.newsis.com/article/view.htm?cID=&ar_id=NISX20090308_0001583942 |제목='유병수 데뷔골' 인천, 부산에 1-0 승리 |확인날짜=2010-08-15 |출판사=뉴시스}}</ref> [[2009년]] [[11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볼턴 원더러스 FC|볼턴 원더러스]]가 유병수의 영입에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가 볼턴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Wanderers line up another raid on South Korea |url=http://www.theboltonnews.co.uk/sport/4734025.Wanderers_line_up_another_raid_on_South_Korea/ |출판사=The Bolton News |저자=Marc Iles |날짜=2009년 11월 12일| 확인날짜=2011년 6월 25일}}</ref> 그러나 유병수는 사실무근이라며 기사에 반박했다.<ref>{{웹 인용|url=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107817 |제목=유병수 "볼턴行? 금시초문, 오직 인천 우승이 목표" |확인날짜=2010-08-15 |출판사=엑스포츠뉴스}}</ref> [[K리그 2009|2009 시즌]]이 끝날 때까지 [[김영후]]와 [[K리그 신인선수상|신인왕]] 대결을 펼쳐 많은 주목을 받았다.<ref>{{웹 인용|url=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0910122224013&sec_id=520101&pt=nv |제목=‘유병수 vs 김영후’ K리그 신인왕 경쟁 후끈 |확인날짜=2010-08-15 |출판사=스포츠칸}}</ref> 결국 김영후가 간발의 차로 신인왕의 자리에 올랐지만<ref>{{웹 인용|url=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108762 |제목=김영후, K-리거가 뽑은 2009년 '최고 신인' |확인날짜=2010-08-15 |출판사=엑스포츠뉴스}}</ref> 유병수는 프로 데뷔 첫 시즌만에 자신의 이름을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시키는데 성공하였다.
         [[K리그 2010|2010 시즌]]이 시작된 후에는 7라운드까지 무득점으로 일관하다가 8라운드 [[포항 스틸러스]]전에서 네 골을 터뜨린 것부터<ref>{{웹 인용|url=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513432 |제목=유병수 4골 '펄펄' 6년 만에 진기록 |확인날짜=2010-08-15 |출판사=경인일보}}</ref> 시작해, 강원전까지 네 경기에서 아홉 골을 몰아쳤다. 비슷한 시기에 [[김영후]] 또한 득점포를 터뜨려 언론은 이들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재조명했다.<ref>{{웹 인용|url=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008080011 |제목=유병수-김영후는 전생에 부부?...득점 사이클 '비슷' |확인날짜=2010-08-15 |출판사=OSEN}}</ref><ref>{{웹 인용|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210&g_serial=508870 |제목='찰떡궁합(?)' 김영후-유병수, 올해도 경쟁은 계속된다 |확인날짜=2010-08-15 |출판사=아이뉴스24}}</ref> 이후 유병수는 대전전 헤트트릭을 기록하며 리그 20골을 기록, K리그 최연소 한국인 득점왕과 최연소 20골을 달성했다. 마지막 라운드까지 22골을 기록하며 17골을 기록한 [[호세 오르티고사]]를 5골로 따돌리고 [[K리그 2010|2010 시즌]] 득점왕을 차지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011071805472239&ext=na |제목=유병수, 올시즌 정규리그 득점왕 |출판사=마이데일리 |날짜=2010-11-07}}</ref> 2011년 2월 22일 유병수는 인천 유나이티드와 2013년 12월까지 계약 연장에 성공했다.<ref>{{뉴스 인용|url=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102230096 |제목=유병수, 인천과 2013년까지 계약 연장 |출판사=OSEN |날짜=2011-02-23}}</ref>
         [[2013년]] [[6월 22일]] 알힐랄은 유병수가 [[러시아 프리미어리그]] [[FC 로스토프]]로 이적한다고 공식 발표하였다.<ref>{{뉴스 인용|http://news.sportsseoul.com/read/soccer/1200347.htm |제목=유병수, 사우디에서 러시아 FC 로스토프로 이적 |출판사=스포츠서울 |저자=신원엽 |날짜=2013-06-23}}</ref> 러시아로 이적한 유병수는 리그 득점왕 출신 팀 동료 [[아르템 주바]]에게 밀려 데뷔 시즌 선발 출전 2경기에 그쳤으나 주로 조커로 총 17경기에 출전하여 2골을 기록하였다. 한편 [[러시아 컵]]서도 3경기에 출전하며 팀이 클럽 최초 컵대회에 우승하여 [[유로파리그]] 티켓을 획득하는 데 기여하였다.
         [[K리그]]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유병수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팀]]에의 승선이 거론되었다. 국가대표팀 감독 [[허정무]]도 그에 대해 관심을 숨기지 않았으며, 마침내 [[2010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3연전을 앞두고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었다.<ref>{{웹 인용|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5211806415&code=980201 |제목=신인 유병수, 허정무호에 ‘깜짝 승선’|확인날짜=2010-08-15 |출판사=경향뉴스}}</ref> 그리고 [[2009년]] [[6월 3일]]에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열린 [[오만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친선 평가전에 후반 교체 출전하여 A매치에 데뷔하였지만<ref>{{웹 인용|url=http://www.sportalkorea.com/news/view.php?gisa_uniq=20090604122105§ion_code=10&key=%C0%AF%BA%B4%BC%F6&field=gisa_title&search_key=y |제목=A매치 데뷔 유병수, UAE전 승리 위한 '비밀병기' |확인날짜=2010-08-15 |출판사=스포탈코리아}}</ref> 오만전이 A매치로 인정을 받지 못하면서 국가대표팀 출전 기록은 삭제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sportsseoul.com/news2/soccer/world/world/2009/0804/20090804101020201000000_7288524317.html |제목=6월 허정무호 오만전, FIFA A매치서 제외 |확인날짜=2010-08-15 |출판사=스포츠서울}}</ref> 이후 대표팀과 인연이 없다가 [[10월 4일]], [[조광래]] 감독이 [[10월 12일]] 열릴 한일전을 앞두고 유병수를 발탁하면서 다시 기회를 잡게 되었고<ref>{{웹 인용|url=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010041004362234&ext=na |제목=한일전 명단 발표…유병수-신형민 대표팀 복귀 |확인날짜=2010-10-04 |출판사=마이데일리}}</ref> 경기가 끝나기 9분 전에 교체 투입되며 공식 데뷔전을 치렀다.
         [[분류:198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언남고등학교 동문]][[분류:수서중학교 동문]][[분류:대구신암초등학교 동문]][[분류:K3리그의 축구 선수]][[분류:둔촌중학교 동문]][[분류:홍익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해외 진출 축구 선수]][[분류:인천 유나이티드 FC의 축구 선수]][[분류:알힐랄 (리야드)의 축구 선수]][[분류:FC 로스토프의 축구 선수]][[분류:K리그1의 축구 선수]][[분류:러시아 프리미어리그의 축구 선수]][[분류:2011년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러시아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사우디아라비아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김포 시민축구단의 축구 선수]][[분류:K리그1 득점상 수상자]][[분류:사우디아라비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러시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사우디 프로리그의 축구 선수]]
  • 이석훈 . . . . 10회 일치
          * 상위 문서: [[가수/한국]], [[SG 워너비]]
         ||<#0D3EA3> {{{#ffffff 종교}}} ||<(><rowbgcolor=#ffffff> [[개신교]][* 6집 앨범 끝부분에서 성경구절을 언급함과 동시에 감사함을 드러냈으며 실제로 2009년 10월에는 줄라이 프로젝트라는 그룹의 CCM앨범에도 참여했다.] ||
         물론 기존 채동하 파트를 김용준과 반반 나눠 부르긴 하지만, [[https://youtu.be/OYcx8blRyj0?t=7m4s|2008년]]과 [[https://youtu.be/qvhttEgA-K8?t=2m19s|2009년]]의 「내 사람」 라이브 영상만 비교해봐도 훨씬 깔끔해졌고 바이브레이션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프로듀스 101 시즌2]]에 보컬트레이너로 출연했으며 똑 부러지는 트레이닝과 착한 이미지로 밀고 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는 다르게 연습생들에 대한 사이다지적으로 의도치 않게 인기를 얻고 있다. ~~고정픽 이라는 사람도 생겼다~~
          * 2009년 MBC 《우리 결혼했어요》 출연
          * 2017년 Mnet 《프로듀스101 시즌2》 보컬 트레이너로 출연
         남자 보컬리스트 특집에 2번 참여했으며, 1승 했다. 이 때 타 남자가수들 평이 '첫 무대부터 이러면 어쩌자는 거임?' 이후 2011년 11월 말부터 불후의 명곡 2에 고정 출연하게 되었다.[* [[최백호]] 편에서 「낭만에 대하여」를 불렀는데... 예전에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이적이 「낭만에 대하여」를 불렀을 때와 편곡의 방향이 아주 묘하게 비슷하다. 착각이거나 혹은 [[아코디언]]과 [[반도네온]]의 차이 때문일 수도...][* 참고로 이 「낭만에 대하여」 무대는 이석훈 불후의 명곡 무대 탑 중 하나다.] 여러 번 참여했으나 번번히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 우리나라 서바이벌 음악 프로그램의 특징상 풍부한 중저음보단 높고, 개성있고, 자극적인 무대를 선호하기 때문인듯 하다.
         ~~긴 공백기도 신기하지만 장수하고 있는 프로그램도 신기하다~~
         [[분류:SG워너비]][[분류:한국 남가수]][[분류: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역대 출연자]][[분류:포항시 출신 인물]][[분류:1984년 출생]][[분류:2008년 데뷔]][[분류:라디오 스타의 역대 게스트]][[분류:1대 100 역대 1인]]
  • 이종희 (1942년) . . . . 10회 일치
         이종희는 [[1969년]] 대한항공 공채 1기로 입사해 말단 직원에서 총괄사장 자리에 오르며 '샐러리맨의 신화'로 평가받는다. 출범 당시 대한항공은 아시아의 작은 지역항공사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글로벌 톱10으로 세계적인 대형 항공사로 성장했다. 그동안 이종희는 [[대한항공]]의 성장 과정에서 40년 한국 민항 역사의 산증인 역할을 했다. 그는 경영학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정비분야로 입사해 30여년간 정비 자재 기획 영업 등 항공사의 전문경영인이 되는 데 필요한 업무를 두루 섭렵한 '테크노 경영인'이다. 특히 여객 영업에만 20여년간 몸 담은 여객영업 분야 전문가로서 신규 노선 개척 및 세계 항공사와 제휴 업무를 주도적으로 맡아왔다. [[대한항공]]은 [[2009년]] [[12월]] 말 인사에서 이종희를 대한항공 상임고문으로 추대했다. 이로써 대한항공 대표이사는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 이종희 대한항공 고문과 서용원 부사장 3인의 각자 대표로 변경됐다. .<ref>{{뉴스 인용|url=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0022517362982441&outlink=1|제목=대한항공, "앞으로 3인 대표이사 체제"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로 겉보기에는 무척 부드러워 보이지만 업무에 있어서는 강한 추진력을 발휘,매사에 빈틈이 없다는 평을 받는다. [[대한항공]]이 사업정상화를 위해 제트기를 새로 도입할 당시 신입직원이던 이종희는 영어로 된 부품과 정비매뉴얼을 제대로 이해하는 전문가가 전무한 상황에서 밤을 새워가며 정비매뉴얼을 완벽하게 번역하면서 오너로 부터 확실한 눈도장을 받았다. 영업부에서 항공기 운항과 정비 등의 운항 종합정보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아 5년간 휴일을 포함해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사무실을 지켰다는 일화는 지금도 사내에 회자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한 · 프랑스 협력에 앞장서고 세계 항공시장에서 양국 간 경제협력과 우호증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이종희에게 프랑스 정부 최고 훈장인 레종 드뇌르 슈발리에(La Legion d'honneur Chevalier) 훈장을 수여하였다. 레종 도뇌르 훈장은 ‘영광의 군단’이란 의미를 지닌 프랑스 국가 최고훈장인데 레종 도뇌르는 일반적으로 코망되르, 오피시에, 슈발리에 등 3개 등급으로 구분되고 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2004년]] 이 훈장 가운데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등급인 레종 도뇌르 코망되르를 받은 바 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9112408021|제목=이종희 대한항공 사장‥40년 한국 민항 역사의 산증인|날짜=2009-11-25|출판사=한국경제|확인날짜=2010-04-12}}</ref>
         * [[2009년]] [[12월]] ~ 대한항공 고문, 대한항공점보스 프로배구단 구단주
         * [[2004년]] ~ [[2009년]] [[12월]] 대한항공 총괄담당 대표이사 사장
         * [[1992년]] 대한항공 한국지역본부장
         * [[2009년]] 제36회 상공의 날 금탑산업훈장
         {{토막글|한국 근현대사|교육인}}
  • 이태현(씨름) . . . . 10회 일치
         1990년대 중후반~2000년대 초반 씨름판을 지배했던 천하장사. [[의성고등학교]]를 거쳐 1993년 청구건설 씨름단에 입단하여 프로 씨름계에 데뷔했다. 1993년 데뷔부터 2006년 1차 은퇴까지의 전적은 630경기 472승 158패(승률 74.9%)를 기록하며 역대 최다 전적, 최다승 기록을 보유했고, 천하장사 3회(1994, 2000, 2002), 지역장사 12회, 백두장사 20회를 기록했다. 특히 백두장사 20회 기록은 [[이만기]]의 백두장사 18회를 뛰어넘는 기록이다. 2006년까지 역대 총 상금 역시 5억 9,000여 만원으로 1위. --모래판의 황태자의 위엄. 오오!--
         고교 때부터 그 연령대의 지존으로 통했으며, 1994년 절친이자 라이벌인 [[백승일]][* 백승일은 2004년 LG투자증권 씨름단 해체 사태 후 순천시청에서 잠시 뛰다가 2005년 2월 설날 대회를 끝으로 은퇴했다. 은퇴 후 [[트로트]] 가수로 전향.]을 꺾고 처음으로 천하장사에 올랐다.[* 문제는 당시 5판 3선승제로 치뤄지던 결승전에서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두 선수가 2:2의 상황이 되자 5차전에서 서로 섣불리 기술을 못걸고 눈치만 보는 상황이 이어지자 연맹에서는 긴급 이사회를 소집해서 경기시간이 계속 길어질경우 두 선수의 몸무게를 측정하여 더 가벼운 쪽에 우승을 준다는 계체승이라는 황당한 규칙을 신설하였고 당시 백승일을 의식하며 의도적으로 몸무게를 좀 더 가볍게 유지하던 이태현이 결국 계체승을 거두었고 이후 한동안 이태현에게는 저울장사라는 오명이 따라붙었고 제2의 이만기라 불리던 백승일이 의욕을 잃고 하락세를 타면서 프로씨름이 인기가 점차 시들해져 갔다.] 이후 백승일을 비롯 이태현의 7개 대회 연속 우승을 저지했던 '모래판의 귀공자' 황규연, '들소' 김경수, 신봉민 등과 라이벌리를 이루며 1990년대 씨름판의 인기 스타로 발돋움했다. 특히 당대 씨름선수들과는 달리 잘생긴 외모로 '''모래판의 황태자'''라는 별명으로 최고 인기 스타로 자리잡게 된다. 2000년대 들어 이태현보다 한 뼘 정도 큰 골리앗 [[김영현]],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 등의 후배들이 등장했지만, 이들도 이태현 앞에서는 버로우였다.
         그러나 2006년 한국씨름연맹[* 흔히 (프로)씨름을 관장하는 단체가 대한씨름협회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잘못됐다. 쉽게 말하자면, 야구로 치면 대한씨름협회는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한국씨름연맹은 [[한국야구위원회]]와 같은 위치의 단체들이다.]의 막장 행정, 세력간 정치다툼으로 흑화가 되고 [[최홍만]]이 [[K-1]]에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자, 이태현은 소속팀 현대삼호중공업과 2012년까지 맺었던 계약을 파기하며 [[종합격투기]]에 뛰어든다.[* 이 때 소속 팀인 현대삼호중공업이 이태현에게 계약파기에 대한 소송을 걸었다가 취하했을 정도로 이태현은 종합격투기 진출 선언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었다.] 이태현은 국내 복귀 후 인터뷰에서 "그저 관중이 있는 곳에서 시합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었는데, 종합격투기의 화려한 조명과 관중들의 환호, 매스컴의 관심 등을 보면서 엄청난 유혹에 시달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2011년 2월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동년 3월에 모교인 [[용인대학교]] 격기학과의 씨름전공 교수로 정식 임용된 후 씨름 팀 감독으로 재직 중에 있으며, 이와 함께 [[2014년]] 부터 [[한국방송공사|KBS]]에서 씨름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이돌스타 육상 선수권대회|아육대]]에도 출연해 여자 씨름 해설을 했으며, 출전자들을 지도해 주기도 했다.
  • 이희성 (1988년) . . . . 10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1년]]
         |드래프트 순위 = [[2011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11년]] 3차 4라운드([[넥센 히어로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2년]] [[7월 25일]] <br /> [[잠실야구장|잠실]] 대 [[두산 베어스|두산]]전 구원
         [[고양 원더스]]로 옮겨 [[김성근 (야구인)|김성근]] 감독의 손을 거쳤다.
         [[LG 트윈스]]의 부름을 받아 이적하여 [[고양 원더스]] 선수 중 최초로 프로에 이적한 선수가 되었고 그 해 1군에도 처음 올라왔다.
         {{2010년 세계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대한민국 선수 명단}}
  • 진동한 . . . . 10회 일치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분류:포항시 출신 인물]] [[분류:1961년 출생]] [[분류:투수]] [[분류:우완 투수]] [[분류:우투우타]]
          * [[야구 관련 인물(KBO)]]
         || 학력 ||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고려대]] ||
         || 프로입단 || 1984년 1차 지명 ||
         || 지도자 || [[울산공업고등학교 야구부|울산공업고등학교]] 감독 (2014~2016년)[br] [[저니맨 외인구단]] 감독 (2017년)||
         전 야구선수.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활동했다. 언더핸드 투수로 [[양일환]] - '''[[이태일]] - [[박충식]]'''으로 이어지는 삼성의 잠수함 투수 중 하나.
         1986년 한국시리즈 1차전 광주경기 때 3회에 구원투수로 등판하여 7회말까지 잘 막고 덕아웃으로 들어오다가 해태팬이 던진 소주병에 머리를 맞고 교체되었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투수는 [[김시진]]으로 교체되었고 이후 김시진이 불을 지르며 역전패했다. 한창 잘 던지고 있던 선수가 예기치 않은 부상으로 교체되고 경기마저 패하자 [[대구아재|삼성팬]]들은 분노했다. 그리고 3차전 대구경기에서도 삼성이 역전패를 당하자 분노한 삼성 팬들은 경기 후 해태 구단버스에 불을 질러 분풀이를 한 것. 이 구단버스 방화사건은 프로야구 관중 난동 사건하면 늘 언급이 되며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은퇴 후 쌍방울에서 스카우트로 있었다. 구미 도산초등학교 코치를 거쳐 도산초 감독으로 재직하다가 2014년에 [[울산공업고등학교 야구부|울산공고]] 감독으로 선임되어 3년간 지도를 하였다. 이후 2018년에 포항 대해초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 차일목 . . . . 10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03년]]
         |드래프트 순위 = [[1999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1999년]] 2차 5라운드([[해태 타이거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03년]] [[4월 6일]] <br /> [[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광주]] 대 [[한화 이글스|한화]]전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17년]] [[8월 13일]] <br /> [[고척스카이돔|고척]] 대 [[넥센 히어로즈|넥센]]전
         ==야구선수 은퇴 후==
         {{토막글|야구인}}
  • 최한경 . . . . 10회 일치
         ||<:> '''학력''' || 대해초-포항중-[[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포철공고]] ||
         ||<:> '''프로입단''' || 1993년 삼성 라이온즈 고졸연고지명 ||
         전 야구선수. [[삼성 라이온즈]]와 [[LG 트윈스]]에서 활동했다. 1993년 삼성이 한국시리즈 준우승 이후로 침체기였던 때에 홀연히 등장했다 사라진 비운의 투수. 별명은 '그라운드의 흑곰', '제2의 [[김상엽|만딩고]]'. 특히 만딩고라는 별명을 가졌던 팀 선배 [[김상엽]]과는 까무잡잡했던 얼굴과 속구를 던지던 것 때문에 많이 매치가 되곤 했었다.
         [[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포항제철고]] 시절에는 투타 만능에 빠른 공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으며 [[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포항제철고]] 졸업 후인 1993년 삼성에 입단했다. 입단 첫 해에 12경기에 나와 2.87의 평균자책을 기록했으나 그리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다.
         당시 150km대를 던지는 투수는 [[선동열]]하고 [[박동희(야구선수)|박동희]] 정도로 많지 않았던 상황에서, 쌩 고졸신인이 평균 150km의 공을 던진다는 것은 일약 센세이션에 가까웠다. 마무리 활동 당시 삼성전 중계 방송에서는 최한경까지만 가면 삼성이 이길 수 있다는 말이 자주 나오곤 했는데, 이는 그가 94년 한정 당대 최고의 마무리였음을 입증한다. 공은 가볍다는 소리를 들었을지언정 속도만큼은 엄청났고, 이 때문에 94년 주전으로 활약했지만 오히려 속구를 던질 수 있다는 것 때문에 5회부터 등판하고, 선발로도 나오는 등 아직 몸이 다 만들어지지 않은 고졸신인에게는 가혹할만치 엄청난 혹사를 당했다.
         1995 시즌부터는 방위복무 때문에 홈경기에만 출전했고 게다가 그나마 선발로 키우려고 시도했던 선수들이 죄다 무너지며 최한경을 선발 기용하는 강수를 뒀다. 갑작스런 선발 전향에도 7승 4패의 성적을 거뒀지만 그간의 혹사를 버티지 못하고 평균자책이 5.70으로 부진했다. 150km/h의 강속구는 130km/h의 속도로 밋밋해졌고 또한 선발과 계투를 오가며 자잘한 부상을 얻어 1996년에는 1승 2패를 거두는데 그쳤다. 그것이 최한경의 마지막 1군에서의 모습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동년배들이 이제 막 프로에 진출할 시기에 자취를 감춘 것.
         은퇴 후 LG 트레이너로 있다가 [[대전고등학교 야구부|대전고]], [[홍익대학교|홍익대]] 코치를 거쳐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의 야구 팀인 장쑤 호프스타스의 감독, 광동 레오파드의 코치로 있다가 현재는 귀국해 고향 포항에서 스포츠센터를 운영 중이다.
  • 강재형 (아나운서) . . . . 9회 일치
         * [[2007년]] 2월 ~ [[2009년]] 2월 : [[한국아나운서연합회]] 회장
         * [[2004년]] : 한국어문교열기자협회 간사
         * [[2004년]] :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보도용어통일심의위원회 위원
         * [[2001년]] ~ [[2009년]] :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방송언론학과 언론학 석사
         * [[2014년]] 12월 제26회 한국어문상 대상
         * [[2000년]] 한국어문대상 특별상
         === 라디오 프로그램 ===
         * [[MBC 표준FM]] : 《[[오늘의 스포츠 (라디오 프로그램)|오늘의 스포츠]]》
  • 고아성 . . . . 9회 일치
         | [[여행자 (2009년 영화)|여행자]]
         | 한국-프랑스 합작 영화<br />제62회 [[칸국제영화제]] 특별상영 초청작
         | 한국-일본 합작 영화
         === 텔레비전 프로그램 ===
         | 5부작<ref>{{뉴스 인용 |제목 =‘나도 영화 감독이다2’ 박성웅-고아성, 영화 제작자로 변신..열정 가득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15&aid=0003478303|출판사 =한국경제 |저자 =고승아|날짜 = 2015-11-16|확인날짜 =2017-09-07}}</ref>
         | 게스트 (야구르지롱 돌직구 야구소녀)
         === 라디오 프로그램 ===
         | 제3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김경식 (희극인) . . . . 9회 일치
         }}</ref> IMF 이후 SBS가 코미디 프로그램을 폐지하면서<ref>{{뉴스 인용
         하지만, [[2002년]] [[1월]] 종영된 예능 프로그램 <토요일이 온다> 이후<ref>{{뉴스 인용
         | 제목 = SBS 오락-예능프로 대폭 개선
         * [[2017년]] - 제44회 한국방송대상 내레이션상
         === 라디오 프로그램(진행, 출연) ===
         * [[MBC]] 《[[만화열전 - 공포의 외인구단]]》 - 마동탁 / 야구해설
         * [[한국코카콜라|한국 코카콜라]]
         {{토막글|희극 배우|한국 가수}}
  • 김성민 (1991년) . . . . 9회 일치
         [[1994년]] [[문화방송|MBC 문화방송]] [[텔레비전 드라마|드라마]] 《[[짝 (드라마)|짝]]》의 단역으로 아역 [[배우|연기자]] 첫 데뷔하였다. 이후 [[1996년]] [[한국방송공사|KBS 한국방송공사]] 드라마 《[[슈팅 (드라마)|슈팅]]》에서 유년기 김영웅 역으로 출연하였고 [[1998년]]에는 여성 아역 연기자 [[김성은 (1991년)|김성은]]이 출연한 [[서울방송|SBS 서울방송]]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에서 김의찬 역을 맡았으며, [[2001년]]에는 여성 아역 연기자 [[전성초]]가 출연한 [[한국방송공사|KBS 한국방송공사]] 드라마 《[[요정 컴미]]》에 출연하였고, [[2002년]] 《[[태양인 이제마]]》에 아역 출연하였다. 1994년 데뷔한 이후 최근까지 간간이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 [[한국방송공사|KBS]]
         | [[한국방송공사|KBS]]
         | [[한국방송공사|KBS]]
         * [[2009년]] [[대구고등학교]] 졸업
         {{토막글|한국 배우}}
  • 김승관 . . . . 9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 top1=야구 관련 인물(KBO))]
         || '''학력''' || 옥산초-경복중-[[대구 상원고등학교 야구부|대구상고]] ||
         || '''프로입단''' || 1995년 고졸연고지명 ||
         || '''지도자''' || [[대구상원고등학교 야구부|대구상원고등학교]] 코치 [br] 롯데 자이언츠 3군 타격코치 (2015~2017) [br] 롯데 자이언츠 1군 타격보조코치 (2017) [br] 롯데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 (2017~ ) ||
         [[삼성 라이온즈]]에 오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에게 따라다니던 딱지는 [[2군 본즈|2군 홈런왕]]이었다. 그럼에도 본인이 좋아해 온 팀이자 고향 팀에 몸담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버텨 왔지만, 2004년 7월 12일 투수 [[노장진]]과 함께 외야수 [[김대익]], 투수 [[박석진]]을 상대로 [[롯데 자이언츠]]에 [[트레이드]]되고 말았다. 2006년 7월 16일에는 친정 팀 삼성을 상대로 [[투수]] [[임동규(야구)|임동규]]에게 선제 결승 쓰리런 홈런을 작렬시키며 롯데의 스코어 14:0의 대승을 이끌기도 했다.
         은퇴 후 [[박영진(야구)|박영진]] 감독의 부름을 받아 모교인 [[대구 상원고등학교 야구부|상원고등학교]]의 타격코치로 부임했으며, 잠시 투수코치를 겸하기도 했다.
         항상 [[이승엽]]을 따라다니다가 본인이 스스로 무덤을 파 버린 비운의 천재. 당시 고교 코치들 말에 따르면, 이승엽은 부드러운 스윙을 휘두르는 반면, 김승관은 뻗어나오는 거친 스윙이라서 절대 프로에서 성공할 수 없었다고 한다.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북구(대구) 출신 인물]][[분류:1976년 출생]][[분류:타자]][[분류:내야수]][[분류:우투우타]]
  • 김지훈(1993) . . . . 9회 일치
          * [[야구 관련 인물(KBO)]]
         ||<:> '''학력''' || 포항초-경포중-[[울산공업고등학교 야구부|울산공고]] ||
         ||<:> '''프로입단''' || [[한국프로야구/2012년/신인드래프트|2012년 드래프트 3라운드]]([[삼성 라이온즈|삼성]]) ||
         [[울산공업고등학교 야구부|울산공고]] 역사상 처음으로 드래프트 지명을 받은 선수로서, 178cm에 75kg의 투수로서 왜소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부드러운 투구폼으로 최고 구속 148km, 평균 구속 140km 중반대의 공을 던지면서 상위 지명이 예상되었으나 예상 외로 3라운드까지 밀렸다. 투타 양면에 재능을 보여 2011년 아시아 청소년 야구 대표팀에는 내야수로 선발됐다.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분류:포항시 출신 인물]] [[분류:1993년 출생]] [[분류:투수]] [[분류:우완 투수]] [[분류:우투우타]]
  • 박칠용 . . . . 9회 일치
         [[1969년]] [[연극배우]] 첫 데뷔하였고 [[1971년]] [[동양방송|TBC 동양방송]] 공채 [[배우|탤런트]] 12기로 정식 데뷔한 그는 이후 [[한국방송공사|KBS 한국방송공사]] 탤런트 극회로 공식 지원하고 있다.
         * [[1989년]] 5년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농학과 학사<ref>[[1986년]]에 3학년을 편입학하여 [[1989년]] [[1989년 2월|2월]]에 학사 학위</ref>
         * [[1995년]] [[한국교육방송공사|EBS]] 《[[언제나 푸른마음|언제나 푸른 마음]]》
         * [[2002년]] [[한국교육방송공사|EBS]] 《[[역사탐구 과거와의 대화]]》
         * [[2009년]] [[KBS2]] 《[[전설의 고향 (드라마)|전설의 고향]]》 ... 을수 부 역
         === 라디오 프로그램 ===
         {{토막글|한국 배우}}
         [[분류:195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분류:1969년 데뷔]][[분류:세종특별자치시 출신]][[분류:창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동아방송예술대학교 교수]][[분류:조치원고등학교 동문]][[분류:연성대학교 동문]][[분류:한국방송통신대학교 동문]][[분류:명지대학교 대학원 동문]]
  • 백진희 . . . . 9회 일치
         1990년 2월 8일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김천시) (봉산로) 에서 태어났다. 2008년 독립영화 《사람을 찾습니다》에 출연하며 본격적인 연기 활동을 시작했고, 《[[반두비]]》로 주목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저자1=윤희성|제목=백진희│My name is…|url=http://tenasia.hankyung.com/archives/3538|날짜=2013-06-18|확인날짜=2016-01-27|뉴스=텐아시아}}</ref><ref>{{뉴스 인용|저자1=최은화|제목=[쿠키人터뷰]‘어쿠스틱’ 백진희, “한국판 아만다 사이프리드? 좋죠~”|url=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ent&arcid=1288698003&cp=nv|날짜=2010-11-02|확인날짜=2016-01-27|뉴스=쿠키뉴스}}</ref>
         | 《[[키친 (2009년 영화)|키친]]》
         * [[프록터 앤드 갬블|한국P&G]] 페브리즈
         |[[2009년]]
         * [[프록터 앤드 갬블|한국P&G]] 페브리즈
         }}</ref> 이 작품이 끝난 뒤 시작한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SBS [[기분전환 수요일]] 공동 MC<ref>{{뉴스 인용
         | 출판사 = 한국경제
         <!--실제로는 2008년이지만 영화가 2009년 개봉해 2009년부터 활동하였다..-->
  • 서용주 . . . . 9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 top1=야구 관련 인물(KBO))]
         || '''출신학교''' || 대해초-포철중-[[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포철공고]]-[[동의대]] ||
         || '''프로입단''' || [[2013년]] [[KIA 타이거즈]] 육성선수 입단 ||
         동의대의 주장이자 4번타자였지만 프로지명을 받는 해인 4학년에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춘계리그]] 이후 39타수 1안타라는 최악의 ~~대삽질~~부진을 보이면서 결국 프로 지명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KIA 타이거즈]]의 제의로 [[육성선수]]로 입단할 수 있었다. 그 이후부터 타격이 폭발, 드래프트 이후 치러진 제67회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에서 4경기, 17타수 9안타(1홈런), 7타점의 맹활약을 펼쳐 팀의 우승에 기여하였다.
         == 프로 데뷔 후 ==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포항시 출신 인물]][[분류:1990년 출생]][[분류:타자]][[분류:외야수]][[분류:우투우타]]
  • 송언석 . . . . 9회 일치
         ||<bgcolor=#C9151E> '''{{{#FFFFFF 소속 정당}}}''' ||<(> '''[[자유한국당|{{{자유한국당}}}]]''' ||
         ||<bgcolor=#C9151E> '''{{{#FFFFFF 약력}}}''' ||<(> 제20대 국회의원[br]기획재정부 제2차관[br]기획재정부 예산실 실장[br]자유한국당 경상북도 김천시 당협위원장[br]국민대학교 특임교수[br]제29회 행정고시합격 ||
         '''[[2018년 재보궐선거]] 중 유일하게 [[자유한국당]] 소속으로 당선된 국회의원.'''
         [[대한민국]]의 [[공무원]] 출신 [[정치인]]이다. 현재 [[자유한국당]] [[제20대 국회의원]](경북 [[김천시(선거구)|김천시]]).
         계파는 [[친홍]]계로 분류된다.[* 송언석 의원이 [[박근혜정부]] 시절에 [[기획재정부]] 차관으로 일하면서 친박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었지만 아시다시피 송언석 의원은 [[배현진]], [[길환영]]과 같이 [[홍준표]]에 의해 자유한국당에 영입되면서 친홍 인사로 분류된다.]
         [[이철우(1955)|이철우]]가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당협위원장직을 사퇴하자 2018년 2월 자유한국당에 입당하여 김천시 당협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동시에 치러질 [[2018년 재보궐선거]]에서 경상북도 김천시 [[선거구]]에 출마할 후보로 [[공천]]되었다.
         || 2018 || [[2018년 재보궐선거|재보궐선거]] (경북 김천 국회의원) || [[자유한국당]] || '''39,323 (50.32%)''' || '''당선 (1위)''' || '''초선'''[* 전임자 [[이철우(1955)|이철우]] 경상북도지사 출마를 위해 사퇴] ||
         [include(틀:제20대 국회의원/자유한국당)]
  • 신민아 . . . . 9회 일치
         * 상위 문서 : [[배우/한국]]
         ||<:><#000000> '''{{{#white 이름}}}''' ||<(><#ffffff> '''신민아(新慜娥)'''[* 한국에서 쓰는 [[신(성씨)|신씨]]는 申(납 신), 辛(매울 신), 慎(삼갈 신) 이렇게 세 종류가 있는데, 예명이라서 그런지 新(새 신)이라는 특이한 한자를 쓴다.] ||
         본명은 양민아. 중학교 2학년이던 1998년 10월 패션잡지[* 90년대 후반 당시에는 각종 패션잡지가 창간되고 '패션잡지 전성시대'였고, 10대 여자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달별로 패션잡지를 사서 학교에서 돌려보는 일이 유행했다. [[배두나]], [[김민희]], [[김효진]] 등 잡지 모델들의 인기도 상당했으며, cf모델등을 거쳐 연예계에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또한 잡지 부록 경쟁도 한창 치열하여 다이어리, 화장품, 가방등 다양한 부록이 선보였다.] '키키'(현재는 폐간)의 전속모델 선발대회로 데뷔했다. 이런 이야기에서는 의례 들어가기 마련인, '친구'가 '장난삼아' 써준 응모원서를 냈고, 대회에서 춤도 추고 표정연기도 하는 끼많은 다른 참가자들과 달리 숫기없이 꾸벅 이름만 간신히 말하고 들어갔는데도(심사위원들이 될성부른 떡잎을 알아본건지) 대상으로 뽑혔다. 워낙 나이가 어려(당시 15세) 대회 심사위원들 사이에서도 우려를 낳았지만, 1년도 지나지 않아 스포트 리플레이를 시작으로 예스비, dop, tea, 017등 각종 화보와 지면광고를 찍는 등, 김효진, 김민희와 더불어 대표적인 틴에이져 잡지모델로 활발히 활동했다. 키키 전속이 끝난 뒤에는 당시 유행했던 거의 모든 잡지(쎄씨, 신디더퍼키, 유행통신, 피가로 등)에 인기있는 모델로 얼굴을 도배했고, 촉촉한 초코칩, 네스카페, 코오롱 샴푸, 위스퍼, 매직 스테이션 등 tv광고도 수없이 많이 찍을 정도로 잘 나가는 유망주였다. 대중에게는 [[이승환]]의 '당부' 뮤직비디오.[* 이 '당부' 뮤직비디오는 1999년에는 [[엠넷]]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영상음악대상]]에서 당시의 대세였던 [[아이돌]]들의 뮤직비디오를 제쳐버리고 대상을 받았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뮤직비디오다.] 로 "저 처자는 누구냐"는 반응을 끌어내며 얼굴을 널리 알렸고, 가요프로그램에서 순위를 알려주는 VJ로 출연하는 등 본격적으로 방송에 진출하게 되었다.
         버거 소녀로 유명한 배우 [[양미라]]와 이름이 비슷해, 신민아로 활등명을 개명했다. 드라마 [[아름다운 날들]]에서 [[이병헌]]의 여동생으로 첫 연기를 시작한 이래, 영화 [[화산고]]를 찍는 등 고교시절까지도 유망주로 잘 나갔으나 성인이 된 이후로도 부정확한 발음과 국어책 읽는 연기로 드라마와 영화 모두 흥행에는 계속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모델 출신 다운 늘씬한 몸매와 감각적인 패션센스, 볼륨있는 몸매와는 상반된 사랑스럽고 귀여운 외모로 꾸준히 광고에 등장하다가 2008~2009년에는 드디어 포텐이 터져 cf퀸으로 떠올랐다. 2015~2017년의 [[AOA]] [[설현]] 정도 입지라고 생각하면 될 듯. 진로의 소주 J광고부터 [[포텐]]이 만개하여 주점 앞에 광고를 위해 세워둔 등신대 입간판이 사라지는 등의 해프닝이 처음으로 보도되었다. 귀여운 외모에 늘씬하고 굴곡있는 몸매로 베이글녀로 유명세를 탔으며 특히 골반과 힙라인, 뒤태가 주목받았다.
         한 때 CF쪽에서는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나, 유독 [[영화]]와는 인연이 없는지,--드라마라고 아닌건 아닌데..-- 아니면 작품을 선택하는 안목이 낮은건지 출연한 작품 중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 '''말아먹었다'''. 그 덕분에 ''''한국 영화사 최고의 [[핵잠수함]]'''', ''''[[충무로]]의 흥행 [[부도]] [[수표]]''''이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는데[* 의외로 이름난 드라마작가나 유명 [[영화 감독]]들과 작품을 많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CF나 영화에 캐스팅되고 있어서 '[[스폰서]]가 빵빵하다', '[[언론플레이]]에 능하다'라는 의견도 다수 가지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 공히 '히트작이 없음'에도, 'CF에 있어서는 가히 도배'를 하고 있는건 미스테리다. 흥행 관련해서는 비슷한 내용이 [[봉태규]] 항목에도 똑같이 존재한다. 2010년대 들어서는 남배우로 봉태규보다 ~~새로 떠오르는 국밥배우~~ ~~흥행전선 먹구름~~[[김강우]]와 더 많이 비교되는 것 같다. 다만 김강우의 경우 2017년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살아난다는 차이점이 있다.
          * 2009년, 지금은 50가지 그림자 시리즈로 유명해진 [[제이미 도넌]]과 함께 [[캘빈 클라인]]화보를 찍은 적 있다. [[http://205.oeker.net/bbs/board.php?bo_table=Hollywood&wr_id=4550826&sca=%EC%82%AC%EC%A7%84&sfl=wr_3&stx=&sop=and&page=3|#]] 촬영 당시, 사고로 조명이 넘어져서 신민아의 머리와 어깨에 상당한 충격이 가해졌지만, 툴툴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기며 주위를 배려하는 인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https://youtu.be/1uapjf3vvOA?t=18m21s|#]]
         ||<|4> 2009년 || 맥스무비 최고의 영화상 || '''최고의 여자배우상''' ||
         || 한국광고주대회 광고주의 밤 시상식 || 광고주가 뽑은 좋은 모델상 || ||
         [[분류:한국 여배우]] [[분류:1984년 출생]] [[분류:세종특별자치시 출신 인물]] [[분류:1998년 데뷔]]
  • 안내상 . . . . 9회 일치
         * 2009년 《[[물 좀 주소 (영화)|물 좀 주소]]》 ... 소부장 역 (특별출연)
         * 2009년 [[KBS2]] 미니시리즈 《[[남자이야기 (드라마)|남자이야기]]》 ... 김욱 역
         * 2009년 [[문화방송|MBC]] 미니시리즈 《[[신데렐라맨]]》
         * 2009년 [[SBS (대한민국의 방송사)|SBS]] 대기획 《[[태양을 삼켜라]]》 ... 수창 역
         * 2009년 [[SBS (대한민국의 방송사)|SBS]] 드라마스페셜 《[[카인과 아벨 (2009년 드라마)|카인과 아벨]]》 ... 조현택 역
         * 2009년 [[SBS (대한민국의 방송사)|SBS]] 미니시리즈 《[[천사의 유혹]]》 ... 형사 역
         * 2009년 [[KBS2]] 주말연속극 《[[수상한 삼형제]]》 ... 김건강 역
         === 라디오 프로그램 ===
  • 에스쿱스 . . . . 9회 일치
         중학교 2학년이던 시절, 축구하자는 친구들을 피해 학교 뒷문으로 도망쳤다가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관계자에게 길거리 캐스팅을 받은 멤버로, 그전까진 장래 희망이 체육 선생님이었고 [[가수]]를 꿈꿔 본 적도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캐스팅 소식을 들은 [[에스쿱스]]의 아버지는 널 뽑았을 리 없다고 의아해했으며, 스스로도 [[대구광역시|대구]]까지 와서 자신을 캐스팅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오디션 날 지각하게 되었으나 단번에 합격 통지를 받고 [[2009년]] [[플레디스엔터테인먼트]]에 입사하게 된다.
         더하여 [[2017년]] [[프로듀스 101 시즌2]] 마지막 생방송에 방청을 간[* [[뉴이스트|친분있는]] [[사무엘(가수)|출연자]]들의 응원을 위해 간 것.] [[에스쿱스]]가 화면에 잡히자, 그가 이미 데뷔한 그룹의 어엿한 리더라는 걸 몰랐던 시청자들에게 "저렇게 잘생긴 연습생이 도대체 언제 탈락한 거냐.", "왜 이제서야 카메라에 잡아주느냐." 등의 반응을 이끌어 낸 일화도 유명하다.[* 심지어 해당 방송에 [[세븐틴(아이돌)|세븐틴]]의 '만세'가 경연곡으로 쓰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날 [[애프터 스쿨]] 리더 출신 [[가희]]가 트레이너로, [[뉴이스트]]의 리더이자 [[프로듀스 101 시즌2]]의 모든 팀에서 리더를 맡아 "로얄 리더"라는 별명을 얻은 [[JR(뉴이스트)|JR]]이 연습생 신분으로, [[I.O.I]] 리더 출신이자 [[프리스틴]]의 리더인 [[나영(프리스틴)|나영]]이 관계자로, '''세븐틴의 총괄 리더인 에스쿱스는 ~~정작~~ 스탠딩석에 방청객'''으로 출연해 [[플레디스엔터테인먼트|플레디스]] 家 리더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진귀한 풍경이 연출되었다.]
         당시 '만세''는 [[학원물]] 컨셉으로 방향을 잡아 기획한 곡으로 멤버 전원이 [[가쿠란]]이나 한국식 교복을 입고 무대에 올랐는데, 소년 같은 모습의 멤버들 사이에서 거의 유일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성인 남자다운 매력을 발산하며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후일 프로듀서 [[BUMZU]]의 인터뷰에서 '만세''를 작업할 때 실제로 [[에스쿱스]]의 이미지를 많이 참고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인간 만세"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이외에도 팀 내 팔씨름 2인자인 [[정한]]을 가볍게 꺾은 경험이 있고, [[2016년]] 2월 [[SBS]] 설 특집 프로그램 <사장님이 보고 있다>에서 진행된 씨름 대회에선 [[엔플라잉]]의 광진, [[비투비]]의 [[이민혁|민혁]], [[방탄소년단]]의 [[정국(방탄소년단)|정국]]을 연달아 이기며 우승을 거머쥐었다. 특히 [[방탄소년단]]의 [[정국(방탄소년단)|정국]]은 [[에스쿱스]]보다 더 한 근육질 몸매의 소유자로 워낙 유명한 인물인지라 양 [[팬덤]] 내에서 놀라움을 샀다.
         또한 [[세븐틴(아이돌)/힙합팀|힙합팀]]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모든 랩 메이킹에 참여하고 있다. 정식으로 발매된 앨범들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으나, 비교적 노출도가 낮은 믹스테이프로 공개된 곡 중엔 매우 노골적이고 사나운 단어 선택 및 펀치라인으로 공격성을 진하게 띄는 가사가 있기도 하다. 가령 'LIKE A LOOSE CANNON'이나 'WALLY'같은 곡들의 경우인데, 그중 'WALLY'는 가사에 드러난 대상이 매우 직접적이라 공개 당시 팬들 사이에서 조심스레 추측성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세븐틴TV]] 항목의 [[세븐틴TV#s-3.2.1|승철]] 문단 참조.
          * [[2017년 ]]<[[프로듀스 101 시즌2]]> 마지막 생방송 공연을 스탠딩으로 보고 온 [[에스쿱스]]는 후일 팬사인회에서 스탠딩의 고단함을 이제야 알았다며 팬들에게 감사하다고 후기를 남겼다.
          * 문화 웹매거진 [[ize]]의 편집장 [[강명석]]은 [[한국일보]]에 "아이돌 센터의 조건"이란 타이틀의 [[http://www.hankookilbo.com/v/dd7106a298784fc194f095ae915322aa|기사]]를 게재하며 '만세' 뮤직비디오 속의 [[에스쿱스]]를 예로 들었는데, 기사만 보면 마치 [[세븐틴(아이돌)|세븐틴]]의 독보적인 센터가 에스쿱스인 듯한 느낌을 주지만 이는 공식적인 사실을 명백히 간과해 작성한 것이다. [[세븐틴(아이돌)|세븐틴]]은 센터나 메인이 명확하게 존재하지 않는 그룹이며 에스쿱스는 단지 '만세'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이었을 뿐이다.
  • 이동훈 (1996년) . . . . 9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6년]]
         |드래프트 순위 = [[2016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6년]] 2차 2라운드([[한화 이글스]])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6년]] [[7월 10일]]<br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대전]] 대 [[삼성 라이온즈|삼성]]전 대주자
         [[2016년]]에 입단하였다. [[2017년]] [[5월 5일]] [[kt 위즈|KT]]전에서 [[배제성]]을 상대로 데뷔 첫 안타를 기록하였다.<ref>[http://www.spotvnews.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1953 프로 첫 안타 한화 이동훈 "이제야 웃네요"] - 스포티비뉴스</ref> [[2018년]] [[8월 9일]] [[넥센 히어로즈|넥센]]전에서 [[신재영 (야구 선수)|신재영]]을 상대로 데뷔 첫 홈런을 기록하였다.<ref>[http://www.sportsseoul.com/news/read/668077 한화 이동훈, 데뷔 첫 홈런 신고] - 스포츠서울</ref>
  • 이민호(1969) . . . . 9회 일치
          * [[야구 관련 인물(KBO)]]
         ||<:> '''학력''' || [[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포철공고]] - [[영남대학교|영남대]] ||
         ||<:> '''프로입단''' || [[한국프로야구/1993년/신인드래프트|1993년]] 2차 3순위 지명 ||
         前 빙그레, 한화, 쌍방울, SK의 야구 선수.
         1993년 빙그레 이글스의 2차 3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1993년에는 [[강석천]]의 백업으로 뛰다가 1994년 [[강석천]]의 부진을 기회삼아 암울했던 1994년 한화 타선에 [[박지상]]과 더불어 힘을 실어 주었다. 이 때가 커리어 하이로 0.299의 타율과 14홈런 36타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1995년 [[방위병]] 복무로 홈 경기 밖에 뛰지 못했으며, 그 이후 주춤하다가 1998년 주전 3루수가 됐으나 1998년 시즌 후 [[동봉철]]과 함께 투수 [[임창식]]을 상대로 [[쌍방울 레이더스]]로 트레이드됐다. 쌍방울이 해체되고 2000년 [[SK 와이번스]]에 이적하고 1시즌을 뛴 후 은퇴했다. 이후에는 인천에서 유소년 야구 팀을 지도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분류:내야수]] [[분류:우투우타]] [[분류:1969년 출생]] [[분류:포항시 출신 인물]]
  • 이상화(1980) . . . . 9회 일치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분류:포항시 출신 인물]] [[분류:1980년 출생]] [[분류:투수]] [[분류:우완 투수]] [[분류:우투우타]]
          * [[야구 관련 인물(KBO)]]
         ||<:> '''학력''' ||송주초-포항중-[[경주고등학교 야구부|경주고]]-경성대 ||
         ||<:> '''프로입단''' ||[[한국프로야구/2004년/신인드래프트|2004년 KIA 타이거즈 2차 4순위 지명]] ||
         2004년 [[KIA 타이거즈]]에 입단. 구속은 140km 초중반 정도로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제구력과 변화구 구사 능력이 좋다고 평가되었다. 2006년 무려 121이닝을 소화하며 투수진의 한 축을 담당했으나[* 45경기 121이닝 5승 6패에 평균자책점은 3.87을 기록.], 이 때의 혹사 여파로 인해서인지 이후로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지금와서는 당시 [[서정환]]감독시절의 혹사로 [[한기주]], [[신용운]] 등만 거론되지만 어찌보면 이 둘보다도 더 심하게 굴려졌다. 2007년 시즌 종료 후 [[상무 피닉스 야구단]]에 입대하였고, 2009년 시즌이 끝나면서 제대하였다. 하지만 혹사의 여파로 인한 부상으로 전혀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2011년 시즌 후 방출되었다.
  • 이지우 (야구선수) . . . . 9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4년]]
         |드래프트 순위 = [[2014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14년 2차 3라운드]]([[NC 다이노스]])
         율하초등학교를 경복중학교를 거쳐 [[경북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경북고등학교]] 시절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하여 1학년 때부터 주전 좌익수로 활약하며 좋은 타격성적을 보여주었다. 고교 통산 58경기 타율 0.357 출루율 0.441 장타율 0.464 74안타 1홈런 48타점 25볼넷 21삼진을 기록하였다. [[2013년]] [[8월 26일]] [[2014년 한국프로야구 신인선수 지명회의]]에서 NC 다이노스에 2차 3라운드 26순위로 지명되었다.<ref>[http://www.ncdinos.com/board/story/view?articleId=7421 왼손 거포의 계보를 이어갈 NC 이지우] - NC 다이노스</ref>
         [[분류:199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NC 다이노스 선수]][[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경복중학교 동문]][[분류:대구율하초등학교 동문]]
  • 정운용 . . . . 9회 일치
         '''정운용 (鄭雲用)''' (1904년 ~ 1963년 10월24일 )은 [[조흥은행]] 2대행장으로 일본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이후 최초의 한국인 행장이었다. 그는 [[경상합동은행]] [[취체역]](이사), 경상합동은행 [[두취]] (행장),한성은행 상무취체역(상무이사) 등을 거쳐 1945년 11월 조흥은행 행장에 올랐다.<ref><<조흥은행 100년사>>, (조흥은행, 1997), p.231~234</ref>
         정운용은 대구 부호이자 민족자본은행의 개척자인 [[정재학]]의 장손으로 태어났다.<ref>고승제, <<끝없는 도전 세기의 기업-기업가 이야기>> (한국경제신문, 1991), 제7편 2. 정재학/은행업의 개척자</ref> 그의 모친 김인아는 정운용이 중학생이었던 1918년 타계했고 부친인 정응원마저 1933년 서거한 뒤 정재학 조부 밑에서 자랐다. 정재학은 3남인 [[정종원]]과 장손인 정운용을 각별히 여겨 니혼대학 법학과, 메이지대학 법학과로 유학을 보낸 뒤 3남에게는 관료로 활동하도록 했고 맏손자에게는 은행경영 노하우를 전수했다.<ref>고승제,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p.210~226</ref><ref>윤재실, <<팔도명인전>>, ( 진명사, 1979) p.211</ref>
         마침내 1945년 해방을 맞아 미 군정시대가 열리면서 조흥은행 일본인 임원들이 한국을 떠났다. 정운용은 미군정에 의해 1945년 11월 해방 후 첫 한국인 조흥은행장(2대)로 선임됐다. 불과 41세의 나이에 국내 최고 민간은행의 수장이 됐다.<ref><<조흥은행 90년사>>, (조흥은행, 1987) p.412~431쪽 역대임원</ref>
         정운용 조흥은행장은 미 [[군정청]] 골든 재무부장(중령)과 친밀한 관계였다. 해방 후 중앙은행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여서 조흥은행은 강력한 중앙은행 후보로 꼽혔다. 조흥은행은 민족자본비중이 절반을 넘은데다 일본자본의 침투가 가장 적었다.<ref><<조흥은행 100년사>>, (조흥은행, 1997), p.222</ref> 하지만 1946년 광복1주년을 맞이하여 미 군정청 내각 전원이 한국인으로 채워진다. 골든 재무부장이 본국으로 돌아갔고 윤호병이 신임 재무부장으로 선임됐다. 조흥은행 대신 조선은행이 중앙은행으로 선정됐다.<ref>서광운, <<한국금융백년 >> (창조사, 1970) p.237</ref> 정운용 행장 역시 1947년 10월 군정장관의 명령에 의거 행장에서 물러났다.<ref>경향신문, 1947년 10월 18일 2면 정운용 행장 해임</ref>
         앞서 민씨 가문은 일제 강점기 당시 조흥은행 대표취체역(대표이사)으로 [[민규식]]을 배출했다. 그러나 일본인 행장이 따로 있었고 실권은 없는 자리였다. 이어 해방 후 초대 한국인 조흥은행장은 정재학의 손자인 정운용이 맡았고 정재학의 3남인 정종원이 5대 행장을 역임했다.<ref name="ReferenceA"/>
         [[정재학]]의 손자이자 해방 후 처음으로 한국인으로서 2대 조흥은행장에 오른 정운용은 첫 아내와 사별한 뒤 김분조와 재혼했다. 김분조의 부친 [[김진만]]은 1915년 대구를 떠들썩하게 했던 ‘[[대한광복단]] [[대구권총사건]]'의 핵심인물이었다.<ref>경향신문 1963년 3월 1일 3면 대한광복단 사건</ref><ref>대구사회비평 2003년 7~8월 통권 10호 문예미학사 http://hrznnzrh.blog.me/60033398980 근대 100년 대구 거부실록 정재학가</ref><ref>경향신문 1966년 10월 8일 7면</ref><ref>독립기념관 1910년대 국내독립운동의 전개 4. 대한광복회 https://search.i815.or.kr/Degae/DegaeView.jsp?nid=456</ref> 김진만은 대한광복회 단원으로 대구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펼치는 가운데 대구 지역 부호였던 장인 [[서우순]]의 집을 찾아가 설득했다. 그러나 실패한 뒤 도피하다 반항하는 하인 우도길에 총상을 입혔다.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돼 1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ref>민족문화대박과사전 독립운동가 김진만 http://encykorea.aks.ac.kr/Contents/Contents?contents_id=E0010638</ref><ref>독립기념관 29 김진만 독립운동가 서한집 http://www.i815.or.kr/media_data/data_chong/32.pdf</ref>
  • 정창영 (공무원) . . . . 9회 일치
         | 경력 = [[한국철도공사]] 사장<br />[[대한민국 감사원|감사원]] 사무총장<br />감사원 제1사무차장<br />감사원 제2사무차장<br />감사원 국장<br />[[대한민국 국회|국회]] 예결위 입법심의관<br />[[대통령비서실|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br />감사원 과장<br />감사원 감사관<br />청와대 [[대통령경호실|경호실]] 감사담당관<br />감사원 부감사관<br />경북도 / 대구시 / 서울시 행정사무관<br />행정고시 24회
         [[대한민국 감사원|감사원]]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2012년]] [[2월 6일]]에 [[한국철도공사]] 사장으로 취임해 [[2013년]] [[6월 17일]] 물러났다.
         * 한국철도공사 사장
         |임기 = [[2009년]] [[1월 2일]] ~ [[2009년]] [[7월 22일]]
         |임기 = [[2009년]] [[7월 22일]] ~ [[2009년]] [[12월 16일]]
         |임기 = [[2009년]] [[12월 16일]] ~ [[2011년]] [[7월 21일]]
         |직책 = [[한국철도공사]] 사장
  • 정칠성 . . . . 9회 일치
         [[1924년]] [[5월 15일]] 그는 [[경성]] [[천도교당]]에서 [[허정숙]], [[주세죽]], [[김조이]], [[정종명]], 박원희, 김필애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여성 사회운동 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를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여성동우회 창립발기식의 사회자로 활동했다. 바로 [[조선여성동우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이어 신사회 건설과 여성해방운동에 참여할 여성의 단결 등을 목표로 설정하였고,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사회운동을 벌였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PPL_7KOR_A1897_2_0012412|정칠성|丁七星}}
         * 김중순, 〈근대화의 담지자 기생〉, 계명대학교, 《한국학논집 제43집:2011년 6월호》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1) pp 161 ~ pp 194
         [[분류:1897년 태어남]][[분류:1958년 죽음]][[분류:기녀]][[분류:여성 해방 운동가]][[분류:노예제 폐지론자]][[분류:한국의 자유주의자]][[분류:한국의 사회주의자]][[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작가]][[분류:일제 강점기의 무용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여성주의자]][[분류:일제 강점기의 음악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철학자]][[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산주의자]][[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여성주의자]][[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철학자]][[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용가]][[분류:알렉산드라 콜론타이]][[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여성 해방 운동]][[분류:조선공산당의 정치인]][[분류:남조선로동당]][[분류:월북자]][[분류:조선여성동우회의 인물]][[분류:근우회의 인물]][[분류:신간회의 인물]][[분류:허정숙]][[분류:박헌영]][[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조무근 . . . . 9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드래프트 순위 = [[2015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5년]] 2차 6라운드([[kt 위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5년]] [[5월 2일]] <br /> [[수원야구장|수원]] 대 [[NC 다이노스|NC]]전 구원
         {{메달 스포츠|남자 [[야구]]}}
         [[상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입단을 제안한 프로 구단이 없어 [[성균관대학교]]에 진학했고 졸업 후 2015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2차 6라운드로 [[kt 위즈]]의 지명을 받았다. 2015년에는 1점대 평균자책점으로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WBSC 프리미어 12]] 참가를 비롯해 많은 이닝을 소화한 여파 때문인지 2016 시즌부터는 부진했다.
         {{토막글|야구인}}
  • 최순달 . . . . 9회 일치
         '''최순달'''(崔順達, [[1931년]] [[6월 20일]] [[대구광역시|대구]] ~ [[2014년]] [[10월 18일]] [[서울]] )은 대한민국의 과학자이다. [[대한민국 정보통신부|체신부]] 장관을 역임하였고, [[한국과학기술원]] [[인공위성연구센터]]를 설립하여 소장을 맡아 대한민국의 첫 인공위성인 [[우리별]] 위성 발사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인공위성 및 우주기술 전문 벤처회사인 (주)[[쎄트렉아이]]를 설립해 회장을 맡았다.
         * [[1981년]] [[한국전자통신연구원|전기통신연구소]] 소장
          |확인날짜=2007-10-10 |형식= |웹사이트=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 [[1985년]] [[한국과학기술원|한국과학기술대학]] 학장(한국과학기술원과 나중에 합쳐진 학사과정)
         * [[1987년]]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 [[1990년]] [[한국과학기술원]] [[인공위성연구센터]] 소장
         [[분류:1931년 태어남]][[분류:2014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공학자]][[분류:한국과학기술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체신부 장관]][[분류:전두환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의 우주 개발]][[분류:우주 개발 선구자]][[분류: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동문]][[분류:스탠퍼드 대학교 동문]][[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황보관 . . . . 9회 일치
         은퇴 후 그는 지도자보다는 구단 경영자, 행정가로 더 두각을 드러냈다. [[1998년]] 은퇴한 후, [[아시아 축구 연맹|AFC]]에서 주관하는 'C,B,A 코스' 및 '프로페셔널 지도자 코스'를 이수하였다. [[1999년]]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 U-20 대표팀]] 트레이너를 맡은 뒤, [[오이타 트리니타]]에서 코치로 활동하였다. [[2001년]] [[오이타 트리니타]] 유스 팀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고, 지도력을 인정받아 [[2004년]] [[오이타 트리니타]]의 수석 코치로 활동하였다. [[2005년]] [[요한 베르거]]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사임하자, [[오이타 트리니타]] 감독으로 승격하였다.<ref>[http://osen.freechal.com/news/view.asp?Code=G04120600017 황보관 J리그 오이타 감독 승격]</ref> 감독 취임 뒤, [[경상남도]] [[통영시]]에서 열린 [[통영컵]]에 참가하여 데뷔전을 치러 우승을 차지하여 성공적인 시작을 알렸으나,<ref>[http://osen.freechal.com/news/view.asp?Code=G05022700011 황보관의 오이타, 2005 통영컵 패권]</ref> 성적 부진으로 9개월 만에 해임되었다.<ref>[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220&g_serial=167328 황보관 오이타 감독, 전격 해임 '성적 부진 탓']</ref> 이후 [[오이타 트리니타]] 유소년 육성부장을 거쳐, [[오이타 트리니타]] 부사장 및 이사에 올랐다. [[2008년]] 팀이 [[J리그 컵]]에서 우승하자, 우승컵을 갖고 [[대한민국]]을 방문하였다. 또한 [[일본문리대학]] 축구부의 테크니컬 디렉터도 맡았다. 오이타가 [[2009년]] 경영난 속에 [[J리그 디비전 2|2부 리그]]로 강등된 후, 이듬해 감독직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2부 리그에서도 15위에 그치자 사임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황보관, J2 오이타 사령탑에서 퇴임|url=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011300164 |출판사=OSEN |date={{날짜한글화|2010-11-30}} }}</ref>
         [[2009년]]에는 [[오이타 트리니타]] 구단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J리그에서 주관하는 GM(General Manager)교육을 한국인으로는 처음 이수하였다.
         * [http://www.kfa.or.kr/news/news_view.asp?tb_name=interview_gisa&g_idx=895 나의 선수 시절 - 황보관, 한국축구 최고의 캐논슈터]
         |제목= [[한국프로축구연맹|<span style="color:#22559E;">한국프로축구연맹 (K리그)]]
  • 강동진 (야구선수) . . . . 8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04년]]
         '''강동진'''(姜東珍)은 [[KBO 리그]] 전 [[SK 와이번스]]의 야구 선수이다.
         현재는 대구광역시 달서구 이곡동에 위치한 강동진베이스볼 (야구교실) 을 운영중에 있다.
         * [[한국사이버대학교]]
         {{토막글|야구인}}
         [[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SK 와이번스 선수]][[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한국사이버대학교 동문]]
  • 곽상도 . . . . 8회 일치
         | 정당 = [[자유한국당]]
         * [[2009년]] [[2월]] : 곽상도법률사무소 변호사
         * [[2017년]] [[12월]] ~ : [[자유한국당]] 원내부대표
         * [[2018년]] [[2월]] ~ [[2018년]] [[5월]] : 자유한국당 지방선거총괄기획단 대여투쟁본부 위원
         * [[2018년]] [[3월]] ~ [[2018년]] [[5월]] : 6.13지방선거 자유한국당 대구시당 공천관리간사
         * [[2018년]] [[5월 23일]] ~ [[2018년]] [[6월 13일]] : 6.13지방선거 자유한국당 대구시당 공동선거대책위원회 전략본부 본부장
         |소속정당 =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분류:195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현풍 곽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구남산초등학교 동문]][[분류:심인중학교 동문]][[분류:대건고등학교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검사]][[분류:대한민국의 변호사]][[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분류:자유한국당 당원]][[분류:친박]]
  • 구천서 (야구인) . . . . 8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82년]]
         * [[KIA 타이거즈]] 수비코치 (2007년 ~ 2009년)
         * [[한화 이글스]] 수비코치 (2009년 ~ 2012년)
         구천서는 1981년 대통령배 실업 연맹전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받았다. 이후 쌍둥이 동생 [[구재서]]와 함께 1981년부터 상업은행에서 활약했다. [[1982년]] 한국 프로 야구가 출범하면서 [[두산 베어스|OB 베어스]]의 원년 멤버로 동생과 함께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선수 시절 주 포지션은 내야수였다.
         {{토막글|야구인}}
  • 금조(나인뮤지스) . . . . 8회 일치
         특기는 노래이고, 프로모션 비디오에서 직접 노래[* 똑같은 시기에 합류한 [[소진(나인뮤지스)|소진]]은 비욘세 eco의 춤을 커버 했다.]를 하기도 했다.
         [[2015년]] [[1월 16일]] 로버타 플렉의 [[http://youtu.be/m9t8T1Kv1VI|<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을 커버한 프로모션 영상이 공개되었다.
         [[2015년]] [[2월 4일]] [[주간 아이돌]] [[나인뮤지스]]편에 출연했지만 예능 초보이니만큼 말이 없는 편이었다. 또한 멤버 [[이유애린]]으로부터 맛깔진 랩으로 소개되었다.--[[이유애린|얼굴이 예뻐 그으~음조 성격도 좋아 그으~음조 바디가 예뻐 그으~음조 목소리도 프로 그으~음조 그것밖에 없어 그으~음조(...)]]-- --랩소개가 끝나서 행복한 당사자는 덤--
         통상적으로 [[코러스]]라고 불리는 작업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실제 앨범에는 "백그라운드 보컬"이라고 표기된다.] 실제로 [[http://www.fkmp.kr/|한국실연자협회]]에 금조가 참여한 곡을 검색하면 실연정보에 '''<부실연 : 금조 [BACKGROUND VOCAL]>''' 이라고 나오는걸 볼 수 있다. 데뷔 전부터 참여해온 활동인데 데뷔한 이후에도 여전히 진행중. --참여한 곡들만 모아도 이미 정규앨범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 [[벤(한국 가수)|벤]] - 그런 사람 [* 앨범 수록곡은 아니고 [[JTBC]] <싱포유>를 통해 나온 곡이다.]
         ||<rowbgcolor=#fb5a1e> {{{#white '''연도'''}}} || {{{#white '''방송사'''}}} || {{{#white '''프로그램'''}}} || {{{#white '''비고'''}}} ||
          * [[https://www.youtube.com/watch?v=MQQxGbDbYc4|철저하게 자신을 믿지 못하는 프로 반전러]]이다. 2분 05초 쯤에 자신을 믿냐는 질문에 당당하게 "아니요!" 라고 답했다.
          * 2017년 5월 15일 브이앱에서 [[프로듀스 101 시즌2]] [[주학년]], [[형섭|안형섭]], [[라이관린]]을 응원했다고 언급했다.
  • 김대진 (야구인) . . . . 8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83년]]
         |드래프트 순위 = [[1983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1983년]] 2차 1순위 ([[삼미 슈퍼스타즈]])
         * [[SK 와이번스]] 2군 감독 (2006년 ~ 2009년)
         {{토막글|야구인}}
         [[분류:195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외야수]][[분류:KBO 리그 1루수]][[분류:KBO 리그 2루수]][[분류:KBO 리그 좌익수]][[분류:KBO 리그 우익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삼미 슈퍼스타즈 선수]][[분류:OB 베어스 선수]][[분류:대구삼덕초등학교 동문]][[분류:경복중학교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교육과학대학 동문]]
  • 김동재 . . . . 8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83년]]
         |드래프트 순위 = [[1983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1983년]] 1차 1순위([[삼성 라이온즈]])
         {{2009년 KIA 타이거즈}}
         {{토막글|야구인}}
         [[분류:196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KBO 리그 2루수]][[분류:KBO 리그 3루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분류:MBC 청룡 선수]][[분류:LG 트윈스 선수]][[분류:계성초등학교 (대구) 동문]][[분류:경운중학교 (대구)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교육과학대학 동문]]
  • 김상훈 (1990년) . . . . 8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0년]]
         |드래프트 순위 = [[2010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10년]] 4라운드([[두산 베어스]])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0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1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두산 베어스]]의 4라운드(전체 26위) 지명을 받아 입단하였다.
         [[분류:199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두산 베어스 선수]][[분류:넥센 히어로즈 선수]][[분류:대구율하초등학교 동문]][[분류:경운중학교 (대구)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
  • 로버트 켈리 . . . . 8회 일치
         2017년 초, [[반기문]] 사무총장의 귀국과 대통령 후보 논란에 대하여, "그는 구식 관료이며 그 점에서 나는 한국인들이 그를 선택할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유권자들은 반기문을 변화를 가져올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매우 '대가 약한 사람'(milquetoast)", "올해는 수십만 명의 한국인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한 '격동의 해'(big year)"라는 언급을 월스트리트 저널에 남겼다.[[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1/12/0200000000AKR20170112199600009.HTML (참조)]]
         2017년 박근헤 대통령 탄핵 선고를 압두고, 블룸버그에서 "한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이다. 한국 역사에 유례없는 일이 벌어졌다", "현재로써 한국 증시에 미치는 영향은 없다. 하지만 기각이 될 경우 대규모 시위가 우려된다"고 전망했다.[[http://msportalkorea.mt.co.kr/news/n_news_view.php?sec=2&gisa_uniq=2017031010131578173&key=&page=1&field=§ion_code=#_adtep (참조)]]
         아내는 한국인으로 이름은 김정아. 2017년 시점에서 4세 딸 매리언, 8개월이 된 아들 제임스가 있다.
         [[트위터]]에서는 몇몇 영어권 여성 페미니스트 계정에서도 "겁에 질린 듯한 행동을 봐서 유모라고 생각했다."고 주장하거나, "억압받는 아내처럼 보인다."고 주장하며 이를 정당화 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에 공감하지 않았다.[[http://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32965699 (참조)]]
         2012년에 아내와 함께 한국 투표소를 찾아서 사진을 찍고 트윗을 올린 적이 있으며, 투표가 아주 빠르고 신속하여 미국과는 참 다르다는 감상을 남겼다.[[https://twitter.com/Robert_E_Kelly/status/281231957965279232 (참조)]]
  • 마기/351화 . . . . 8회 일치
         [[마기]] 351번째 밤. '''세상을 루프로 환원시키는 마법'''
          * 그러나 하늘에서 성궁의 사자들이 강림. 세상을 무차별 공격해 루프로 환원시키기 시작한다.
          * [[연백룡]]과 [[쥬다르]]도 일행을 쫓아와 합류. 우고는 아무래도 "세상을 루프로 환원시키는 마법"이 작동한 것 같다 하는데.
          * 천사는 성궁의 방어 시스템이었다. 천사가 검을 내리쳐 가족들과 그 가족이 있던 자리의 마고이를 루프로 환원시킨다. 그렇다. 세상을 루프로 환원하는 마법이 발동해 버린 것이다.
          * 방금 전까지 세상의 앞날을 놓고 열띈 토론을 하고 [[신드바드(마기)|신드바드]]의 생각마저 돌려놓았던 [[알라딘(마기)|알라딘]]과 [[알리바바 사르쟈]]. 갑자기 던전이 사라지고 성궁에 밤이 찾아온다. 성궁의 관리자 [[우고(마기)|우고]] 또한 영문을 알 수 없는 사태. 우고는 혹시 세상을 루프로 환원하는 마법이 발동된게 아닌가 의심한다. 그렇지만 알라딘은 방금 전 신드바드가 그 마법을 막지 않았냐고 반박하는데, 그 신드바드가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 우주로부터 한 쌍의 손이 내려와 우고를 붙든다. [[다윗]]이다. 그가 우고에게 잡혔을 때 상황을 그대로 되갚아준 것이다. 붙잡힌 우고가 이 모든게 네 짓이냐고 묻자 다윗은 그저 웃을 뿐이다. 대체 어떻게 한 거냐고 묻자 다윗이 설명을 시작한다. 이 또한 우고에게 잡혔을 때 당했던 일이다. 그는 우고를 "우랄투고"라 부르며 이것은 그가 가르쳐준 "신의 서열을 뒤바꾸는 마법"이라고 밝힌다. 그래서 신의 자리를 빼앗은 다윗은 성궁을 장악해 세상을 루프로 환원하는 마법을 재시동했다. 다윗은 신의 서열을 바꾸는 마법이 멋지긴 하지만 자신이 만들 수는 없었던 것이라 말한다. 그래도 우고가 그걸 구축해냈으니 단지 쓰는 것 뿐이라면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말대로였다.
          >세상 만물을 루프로 환원시키는 마법은 내가 완수하겠어!
  • 박세직 . . . . 8회 일치
         [[분류:구미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자치단체장]][[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1933년 출생]][[분류:2009년 사망]][[분류:대한민국 국회의원]]
         [[1933년]] [[9월 18일]] ~ [[2009년]] [[7월 27일]]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채명신]] 초대 파월사령관이 미군들과 파병 관련 한국 지원 및 작전 구역 설정, 그리고 지휘체계 설정 협상하는 과정을 지원하며 활약하였다. 이후 1976년 대통령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을 지냈고, 1979년 군사정보 참모를 지냈다. 박희도나 박준병과는 달리 하나회였음에도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하지 않아서 [[김영삼]] 정권 때 화를 겪지 않았다.
         그러나 곧 다시 [[전두환]]에게 중용되어 1982년 [[한국전력공사]] 부사장을 지냈다. 그러다가 1983년 [[국가안전기획부]] 제2차장에 임명되어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을 보좌하였다. 그러면서 노신영과 함께 그 해 5월에 일어난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을 해결하였다.
         1992년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전국구]]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6년 [[신한국당]] 공천후보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구미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자유민주연합 [[박재홍(1941)|박재홍]] 후보를 꺾고 재선되었다.
         그러다가 [[김대중]] 정권이 출범하자 1998년 4월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여 부총재가 되었다. 그리고 1998년부터 2000년까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월드컵]]조직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2006년 [[재향군인회]] 회장이 되었다. 재향군인회 회장으로 있던 중 2009년 급성 [[폐렴]]으로 별세하였다.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구미 갑) || '''[[신한국당]]''' || '''30,415(45.47%)''' || '''당선 (1위)''' || ||
  • 배기철(정치인) . . . . 8회 일치
         ||<bgcolor=#C9151E> '''{{{#FFFFFF 학력}}}''' ||<(> 김천고등학교[br][[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학사[br][[계명대학교]] 대학원 환경과학과 휴학 ||
         ||<bgcolor=#C9151E> '''{{{#FFFFFF 소속 정당}}}''' ||<(> '''[[자유한국당|{{{자유한국당}}}]]''' ||
         [[대한민국]]의 [[공무원]] 출신 [[정치인]]이다. 당적은 [[자유한국당]]이다.
         1957년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태어났다. [[김천고등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계명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82년 총무처(현 [[행정안전부]] 및 [[인사혁신처]]) [[7급 공무원]] 공채에 합격하였다. 이후 총무처, [[대구광역시청]] 등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동구(대구)|동구]]청 부구청장 등을 지냈다. 퇴직 후 자유한국당 부설 [[여의도연구원]] 정책자문위원회 정치발전분과 부위원장을 지냈다.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자유한국당 [[공천]]을 받았고 본선에서 현직 [[구청장]]인 [[바른미래당]] [[강대식]]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 2018 ||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대구 동구청장) || [[자유한국당]] || '''62,891 (37.38%)''' || '''당선 (1위)''' || ||
  • 백승민 (야구선수) . . . . 8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4년]]
         |드래프트 순위 = [[2014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4년]] 2차 10라운드([[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8년]] [[6월 21일]]<br>[[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대구]] 대 [[SK 와이번스|SK]]전
         {{토막글|야구인}}
         [[분류:199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외야수]][[분류:KBO 리그 중견수]][[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KBO 리그 1루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분류:대구남도초등학교 동문]][[분류:경상중학교 동문]][[분류:대구상원고등학교 동문]][[분류:영남대학교 동문]][[분류:수원 백씨]]
  • 백일섭 . . . . 8회 일치
         명지대학교 재학 시절이던 [[1963년]] 연극배우로 처음 데뷔하였고 이듬해 [[1964년]] [[뮤지컬배우]] 데뷔하였으며 1년 후 [[1965년]] [[한국방송공사|서울중앙방송]](지금의 [[한국방송공사|KBS 한국방송공사]]) 공채 5기 탤런트로 데뷔했다. [[1969년]] [[문화방송]] 개국과 더불어 KBS에서 MBC로 자리를 옮겨 MBC 드라마에 자주 출연하였다.
         * [[2009년]] [[KBS2]] 주말연속극 《[[솔약국집 아들들]]》 ... 송광호 역
         * [[2009년]] [[SBS]] 연말특집극 《[[아버지의 집]]》 ... 강수복 역
         * [[2006년]] 《[[한반도 (영화)|한반도]]》 ... 북한국방위원장 역
         * [[2003년]] [[KBS 제2TV|KBS2]] 《[[비타민 (텔레비전 프로그램)|비타민]]》
         2021년예능프로 살림하는남녀들 시즌1 백 며느리 경하 출연
  • 서상기 (1946년) . . . . 8회 일치
         |정당 = [[자유한국당]]
         * [[1992년]] ~ [[1998년]] : 한국기계연구원 원장
         * [[2011년]] [[2월 24일]] ~ : [[한국우주소년단]] 총재
         * [[2012년]] [[1월 16일]] : [[한국대학야구연맹]] 초대회장
         * [[2017년 3월]] ~ : 한국청소년단체협의회 회장
         [[2012년]] [[7월 9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19대 전반기 정보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ref>[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2070918443765916&outlink=1 서상기 국회정보위원장 프로필], 머니투데이, 2012년 7월 9일 변휘 기자</ref>
         [[분류:194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구칠성초등학교 동문]][[분류:경운중학교 (대구) 동문]][[분류:경기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동문]][[분류:호서대학교 교수]][[분류:웨인 주립 대학교 동문‎]][[분류:드렉셀 대학교 동문]][[분류:자유한국당 당원]][[분류:달성 서씨]][[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친이]][[분류:친박]]
  • 손형준 (야구선수) . . . . 8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2년]]
         |드래프트 순위 = [[2012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2년 10라운드]] ([[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2년]] [[10월 3일]] <br /> [[대구시민운동장|대구]] 대 [[두산 베어스|두산]]전 대타
         '''손형준'''(孫亨埈<ref>한국야구위원회, 2012 가이드북</ref>, [[1989년]] [[7월 1일]] ~ )은 [[KBO 리그]] 전 [[삼성 라이온즈]]의 [[외야수]]이다.
  • 신혜성 . . . . 8회 일치
         * 한국
         * 한국
         *한국
         :101번째 프로포즈 O.S.T
         ! 한국 !! 일본
         === 2009년 ===
         * SBS 엑스맨, SBS 강호동의 연애편지외 다수의 예능프로
         === 가요 프로그램 1위 ===
  • 어쌔신 크리드 III/임무일람/주요임무 . . . . 8회 일치
         [[런던]]에서 보스턴으로 가는 배인 프로비던스호에 탄 헤이덤.
         항해 둘째 날, 바람을 쐬기 위해 갑판으로 나온 헤이덤은 선원들과 시비가 붙는다. 선원들과 싸우던 헤이덤은 그 광경을 프로비던스호의 선장에게 들키게 된다. 선장은 헤이덤을 디스한 후 선장실로 끌고간다. 둘 밖에 없는 선장실에서, 선장은 함상 반란이 일어날 것 같으니 해결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헤이덤은 선장의 부탁을 수락하고는 "다시 한번 나를 모욕했다가는 망설임 없이 목을 잘라버릴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선장실을 나간다.
         항해 33일 째 날. 의문의 선박이 프로비던스를 쫓아온다. 프로비던스가 맞서 싸우는 동안, 프로비던스의 선장은 헤이덤이 아무 도움도 못될 것이라 판단해 헤이덤을 선실 밑으로 내려보낸다. 선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건 루이스 밀즈. 밀즈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며 항복을 제안한다. 헤이덤은 명예는 지켜주겠다는 밀즈의 말에 차라리 검을 달라고 대꾸, 밀즈에게서 검을 넘겨받고 결투를 벌여 승리한다. 이후 헤이덤은 다시 갑판으로 올라와 의문의 선박이 노리는건 자신임을 밝힌 후, 선장을 암살검으로 협박해 폭풍 속으로 프로비던스를 몰게 한다. 폭풍 속에서 헤이덤은 돛를 고정시키고, 돛을 펴는 일을 돕는다. 그러던 중 제임스가 돛대에서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그를 돕기도 한다. 제임스를 돕고 난 후, 헤이덤은 쫓아오던 선박의 돛대가 폭풍에 부러져 더이상 쫓아오지 못하는걸 확인한다.
         항해 72번 째 날. 프로비던스가 보스턴에 도착한다. 안개 때문에 도착했다는걸 믿지 못한 헤이덤은 돛대에 올라가 보스턴을 확인한다.
         다섯 달 후, 라이트 여관에서 술을 마시던 헤이덤 일행[* 찰스 리 제외. 찰스 리는 브래독 밑의 병사로 있다.]에게 카니에티오가 찾아온다. 카니에티오는 브래독을 습격할 때가 왔다며 헤이덤 일행을 북쪽의 캠프로 보낸다.
  • 유지태 . . . . 8회 일치
         2003년 [[단편 영화]]《자전거 소년》를 통해 [[영화 감독]]으로서 첫발을 내딛었고 그해 부산아시아 단편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음으로써 영화 감독으로 재능을 발휘했다. 2005년《장님은 무슨 꿈을 꿀까요?》, 2008년《나도 모르게》, 2009년《초대》의 단편 영화를 발표했고, 네 번째 단편 영화《초대》는 2009년 7월, 제5회 인디판다 국제 단편 영화제와 제8회 제주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ref>{{뉴스 인용|url=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EntCulture/Article.asp?aid=20090819001036&subctg1=15&subctg2=00|제목=유지태, 네 번째 작품 제주영화제 출품|성=|이름=스포츠월드 황인성 기자|날짜=2009-08-19|출판사=세계일보|확인날짜=2010-04-17}}</ref><ref>{{뉴스 인용|url=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0907300038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EntCulture/Article.asp?aid=20090819001036&subctg1=15&subctg2=00|제목=감독 유지태, 인디판다 국제단편영화제 4연속 초대|성=|이름=OSEN 조경이 기자|날짜=2009-07-30|출판사=스포츠 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OSEN|확인날짜=2010-04-17}}</ref>
         * [[2009년]] 《[[초대 (영화)|초대]]》 - 남자 역
         * [[2009년]] 《[[초대 (영화)|초대]]》
         * [[한국인삼공사]] [[정관장]] (2018)
         * [[2009년]] 9월 제22회 도쿄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심사위원
         * [[2009년]] 8월 제14회 부산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
         | 제4회 한국패션월드어워드
  • 윤찬수 . . . . 8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09년]]
         * [[LG 트윈스]] (2009년 ~ 2012년)
         '''윤찬수'''는 [[KBO 리그]] 전 [[LG 트윈스]]의 선수이다. [[2009년]] 4분기 [[상무 야구단]]에 합격하여 2년간 병역의무를 이행한 후 원 소속팀인 [[LG 트윈스]]로 복귀하였고 [[2011년]] 가을 방출되었다. [[2012년]] [[5월 26일]] 새벽 [[국군체육부대]] 소속 시절 친분을 쌓은 승부조작의 장본인이자 전 프로 축구 선수인 [[김동현 (1984년)|김동현]]과 함께 [[서울특별시|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빌라 주차장에서 귀가하던 부녀자를 납치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현재 윤찬수는 공범인 [[김동현 (1984년)|김동현]]과 [[국민참여재판]]을 받을 예정이다. [[2013년]] [[1월 17일]],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됐다. 같은 날 김동현도 징역 3년이 선고됐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6045507 `특수강도' 前국가대표 축구선수 김동현 법정구속]</ref>
         [[분류:198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KBO 리그 투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LG 트윈스 선수]][[분류:한양대학교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이지찬 . . . . 8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4년]]
         |드래프트 순위 = [[2014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4년 2차 8라운드]]([[kt 위즈]])
         * [[경찰 야구단]] (2016년 ~ 2017년)
         ==[[경찰 야구단]] 시절==
         [[분류:199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KT 위즈 선수]][[분류:경찰 야구단 선수]][[분류:대구옥산초등학교 동문]][[분류:대구중학교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경성대학교 동문]]
  • 이호준 (프로게이머) . . . . 8회 일치
         {{프로게이머 정보
         '''이호준'''([[1991년]] [[7월 23일]] ~ )은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 II]] [[프로게이머]]이다. '''Puma'''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며, 종족은 [[테란]]이다.
         2009년 12월 30일 하이트 스파키즈로 이적하였다.
         2010년 2월 9일 09-10 신한은행 프로리그 3R 위너스리그 대 공군전에서 [[홍진호]], [[차재욱]], [[박정석]], [[민찬기]]를 연속으로 꺾으면서 올킬을 달성했다.
         * [[2009년 1월]] PGL 시즌4 그랜드파이널 8강
         {{토막글|한국 사람}}
         [[분류:199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e스포츠 선수]][[분류:스타크래프트 II 프로게이머]][[분류:테란 선수]][[분류:이스트로의 선수]][[분류:온게임넷 스파키즈의 선수]][[분류:CJ 엔투스의 선수]][[분류:Team SCV Life의 선수]][[분류:이블 지니어스의 선수]][[분류: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 정링컨 . . . . 8회 일치
          | 종교 = [[개신교]]([[기독교한국침례회|침례회]])
         '''정링컨'''({{본명|링컨 폴 램버트}} - <small>(Lincoln Paul Lambert)</small>, [[2007년]] [[10월 1일]] ~ )은 [[미국 시민권]]의 아버지와 [[대한민국]] [[국적]]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계와 한국계 [[혼혈|혼혈인]] 아역 [[연기자]]이다.
         * [[On Style]]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시즌4》
         * [[tvN]] 《일요일N tvN - [[세 얼간이 (텔레비전 프로그램)|세 얼간이]]》 8회 2인 3각 레이스 종목 생방송 방송분
         * [[한국교육방송공사|EBS 1TV]] 《[[딩동댕 유치원]]》
         {{토막글|한국 배우|방송인}}
         [[분류:2007년 태어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2011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모델]][[분류:비디오 자키]][[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미국 사람|램버트, 링컨]][[분류:21세기 터키 사람|람베르트, 파울]][[분류:미국의 남자 모델]][[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어린이 배우]][[분류:한양초등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미국의 침례교도]][[분류:미국계 터키인]][[분류:한국계 터키인]][[분류:미국계 한국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캐나다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터키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뉴질랜드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브루나이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침례교도]]
  • 정상교 . . . . 8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1년]]
         |드래프트 순위 = [[2011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11년]] 5라운드([[KIA 타이거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1년]] [[8월 10일]]<br>[[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광주]] 대 [[LG 트윈스|LG]]전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12년]] [[5월 6일]]<br>[[광주무등경기장 야구장|광주]] 대 [[넥센 히어로즈|넥센]]전
  • 창작:치킨교 . . . . 8회 일치
         치킨교는 기성종교의 혹세무민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하고 [[치킨]]으로 지상에 오신 [[치느님]]의 희생정신과 만민평등의 정신을 전파하기 위한 [[한국]]의 종교이다.
         본래 [[미국]]에서 [[노예]]로 착취 당하던 흑인 노동자들에게 평화와 영양을 전하시던 것이, 흑인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선지자 샌더슨의 입을 통해 증거되시어 [[KFC]]란 교단을 일으켜 한국에 전해지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KFC 교단의 선교를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한국의 신앙전통에 맞는 형태로 탈바꿈시켰고 이것이 오늘날의 치느님과 치킨교이다.
         치킨교의 위상은 매우 높아서, 한국의 노동자들은 장래 치킨교의 사제가 되어 치킨을 튀기는 일에 종사하는 것을 꿈으로 여기고 있다. 치킨과 함께 먹는 것으로는 [[맥주]] 등을 선호하며, 한국에서는 특히 '치킨무'라 불리는 특수한 [[무]] 요리를 함께 먹는다.
         한국에는 다양한 치킨교의 분파들이 활동하고 있다.
         후라이드 치킨교도들이 흔히 "제1차 외식전쟁"에서 죽을 쑤자 나타난 종파였다. 제1차 외식전쟁은 미국의 위대한 선지자 맥도날드와 피자헛이 한반도에 선교를 하러 오고, 한국인지 일본인지 애매한 하이브리드인 롯데리아가 참전하면서 시장통을 지배하던 후라이드 치킨교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시작된 전쟁이었다. 이 전쟁 결과로 치킨교는 제법 상당한 피해를 감수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 피해로 인해 후라이드 교는 일종의 종교개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내부에서도 별도의 총대주교(소스) 세력에 불과하면 양념파가 따로 떨어져 나오는 결정적인 빌미가 된 것.
  • 토니 고 . . . . 8회 일치
         |출생지= [[대한민국]] [[대구광역시]]<ref name="헤럴드">{{뉴스 인용 |저자= |제목= [슈퍼리치]로레알이 인정한 한국계 뷰티갑부 ‘토니 고’ |url= http://superich.heraldcorp.com/superich/view.php?ud=20160610000882&sec=01-74-03&jeh=0&pos= |뉴스= |출판사= 헤럴드경제 |위치= |날짜= 2016년 6월 12일 |확인날짜= 2016년 9월 23일 }}</ref>
         |거주지= [[미국]] [[로스앤젤레스]]<ref name="포브스 프로필">[http://www.forbes.com/profile/toni-ko/?list=self-made-women Profile], ''포브스'', 2016년 9월 23일 확인.</ref>
         |국적= [[미국]]<ref name="포브스 프로필"/>
         |학력= 글렌데일 커뮤니티컬리지 중퇴<ref name="포브스 프로필"/>
         [[대한민국]]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13살이였던 1986년, 부모님과 함께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ref name="헤럴드"/> 방과 후에는 부모님이 하시던 미용용품 사업일을 도왔다. 어릴 적부터 화장품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고급 브랜드의 화장품을 살 형편은 되지 않았고, 저렴한 화장품의 질에는 만족하지 못했다. 결국 스스로 합리적인 가격의 질 좋은 화장품을 만들자 마음 먹고, 25세 때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화장품 브랜드 "닉스"(NYX Cosmetics)를 설립했다. 인기 판매 제품인 립 펜슬은 3.5 달러 정도였다.<ref name="포브스 프로필"/>
         브랜드 출시 첫 해, 4백 만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ref name="포브스 프로필"/> 2000년대 초반 닉스는 미국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화장품 브랜드 중 하나였다. 또 2008 금융 위기 시절, 저가 화장품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오히려 불황은 기회가 되었다.<ref name="헤럴드"/> 또 토니는 사람들이 [[미셸 판]] 등 뷰티 유튜버에 영향 받는 모습을 보며, 소셜 미디어의 중요성을 깨닫고 [[SNS]]를 마케팅에 적극 활용했다.<ref name="헤럴드"/> 이후 15년 동안 안정적으로 사업을 키워나간 후, 2014년 [[로레알]]에 닉스를 5억 달러에 매각했다.
         * [http://www.forbes.com/profile/toni-ko/?list=self-made-women 토니 고] - [[포브스]] 프로
         [[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홍승규 . . . . 8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83년]]
         |드래프트 순위 = [[1983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1983년]] 1차 5순위([[삼성 라이온즈]])
         '''홍승규'''(洪勝奎<ref>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7042800209205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7-04-28&officeId=00020&pageNo=5&printNo=20174&publishType=00020 "라이온즈 1번타자 자리놓고 張泰洙·洪勝奎 각축"] 동아일보. 1987년 4월 28일.</ref>, [[1960년]] [[6월 20일]] ~ )는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외야수]]이다. 현재는 대구MBC의 라디오 야구 중계 해설가로 활동 중이다.
         {{토막글|야구인}}
         [[분류:196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외야수]][[분류:KBO 리그 우익수]][[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분류:대구상업고등학교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남양 홍씨 (당홍)]][[분류:대한민국의 야구 해설자]]
  • 황경태 . . . . 8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6년]]
         |드래프트 순위 = [[2016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6년]] 2차 2라운드([[두산 베어스]])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7년]] [[7월 19일]]<br>[[문학야구장|문학]] 대 [[SK 와이번스|SK]]전
         [[분류:199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KBO 리그 3루수]][[분류:KBO 리그 유격수]][[분류:KBO 리그 1루수]][[분류:KBO 리그 지명 타자]][[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두산 베어스 선수]][[분류:대구옥산초등학교 동문]][[분류:경운중학교 (대구) 동문]][[분류:대구상원고등학교 동문]]
  • 강연재 . . . . 7회 일치
         | 정당 = [[자유한국당]]
         * [[2009년]] : M&A 컨설팅 상무이사
         * [[2014년]] : 한국여성변호사회 대변인
         * 자유한국당 당대표 법무특보
         * ~ [[2018년 9월]] : 자유한국당 노원구 병 당협위원장
         {{선거기록/KR/개인 |[[2018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6.13 재보선]] | 20대 | 국회의원 | [[서울 노원구의 국회의원|서울 노원구 병]] | 자유한국당 | 13,297 표 | 14.48 | 3위 | 낙선 | }}
         [[분류:1975년 태어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신명여자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시립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변호사]][[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안철수]][[분류:홍준표]][[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정치인]][[분류:국민의당 당원]][[분류:자유한국당 당원]]
  • 강정길 . . . . 7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85년]]
         |드래프트 순위 = [[1985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1985년]] 1차 1순위([[삼성 라이온즈]])
         [[1985년]] [[삼성 라이온즈]]의 1차 1순위 지명을 받았으나 지명권 양도로 [[이강돈]]과 함께 [[한화 이글스|빙그레 이글스]]의 창단 멤버로 입단했다. 주 포지션은 [[1루수]]였고, 정교한 타격을 선보이는 중거리형 타자였다. [[이정훈 (1963년)|이정훈]], [[이강돈]] 선수와 함께 [[한화 이글스|빙그레 이글스]] 타선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ref>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09&aid=0001995565 강정길, "삼성만 만나면 펄펄 날았다"] 《Osen》, 2008년 12월 10일</ref>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모교인 [[경북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지냈다.
         {{토막글|야구인}}
  • 고도현 . . . . 7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3년]]
         |드래프트 순위 = [[2013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13년 7라운드]] ([[롯데 자이언츠]])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3년]] [[10월 1일]] <br /> [[사직야구장|사직]] 대 [[LG트윈스|LG]]전
  • 고수희 . . . . 7회 일치
         2005년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마녀]] [[죄수]]로 출연 [[이영애]]에게 죽임을 당하는 역할로 열연해 주목을 받았고,<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2043371 '친절한 금자씨' 고수희, 전통혼례로 사업가와 결혼] 마이데일리. 2009년 10월 18일</ref> 2011년 영화 《[[써니 (영화)|써니]]》에 칠공주파 멤버 장미 역으로 출연하였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9&aid=0002524181 ‘써니’의 고수희 주연 영화 ‘바다’ 캐스팅 비화는?] 매일경제. 2011년 08월 20일</ref>
         * [[1999년]]. [[2004년]], [[2005년]], [[2008년]], [[2009년]] : 《청춘예찬》 - 간질 역/레지 역 (2005년)
         * [[2007년]], [[2009년]], [[2011년]] : 《경숙이, 경숙아버지》 - 어메 역
         * [[2009년]] : 《[[불꽃처럼 나비처럼]]》 - 소희 역
         * [[2009년]] : 《[[친구사이?]]》 - 레스토랑 사장 역
         * [[2009년]] : [[SBS]] 《[[자명고 (드라마)|자명고]]》 - 모양혜 역
         * [[2009년]] : [[MBC]] 《[[맨땅에 헤딩]]》 - 허숙희 역, 특별출연
  • 김굉필 . . . . 7회 일치
         '''김굉필'''(金宏弼, [[1454년]] ~ [[1504년]] [[10월 7일]])은 [[조선]] 전기의 문인, [[교육자]], [[성리학자]], 화가로 [[호 (이름)|호]](號)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ref>[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25465&pTotalSearchCount=1&pPosition=0&pRecordId=00500050004C005F0036004A004F0061005F00410031003400350034005F0031005F0030003000300031003200360030&pName=AE40AD49D544002891D15B8F5F3C0029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깨진 링크|url=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25465&pTotalSearchCount=1&pPosition=0&pRecordId=00500050004C005F0036004A004F0061005F00410031003400350034005F0031005F0030003000300031003200360030&pName=AE40AD49D544002891D15B8F5F3C0029 }}</ref> 또는 한훤(寒暄), 말곡(末谷<ref>중종실록 100권, 중종 38년 1월 4일 기유 8번째기사 1543년 명 가정(嘉靖) 22년 판중추부사 김안국의 졸기</ref>)이며 자(字)는 대유(大猷),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김일손]], [[김전]], [[남곤]], [[정여창]] 등과 동문이었다.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하였고, 《소학》의 가르침대로 생활하였다.
         영남의 유학자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하던 중 어느날 《소학》의 어느 글귀를 읽고 깊이 감동한다. 이후 [[소학]]을 읽고 스스로 "소학동자 (小學童子)"라 일컬었고 평소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길재]], [[김숙자 (1389년)|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학문 전통을 이어, 성리학에 능하였으며 실천 궁행을 위주로 하는 학자가 되었다.<ref name="글로벌 서울 김굉필"> 《[[글로벌 세계대백과]]》〈[[: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지리/중부지방-남부지방/서울특별시/서울의 사회·문화#김굉필|김굉필]]〉 </ref> 그는《소학》을 행동의 근간으로 삼아 《소학》을 알지 못하고는 학문을 할 수 없고, 사서육경을 알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는 [[소학]]에 나온대로 실천궁행에 힘썼다.
         중종 때 이여가 정몽주의 문묘종사를 청했다. 중종은 이여의 건의와 유생의 상소에 따라서 정몽주의 문묘종사를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했다.<ref>이순형,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49</ref>
         그 후에 조강에서 태학생(太學生)들이 [[정몽주]]와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하자고 상소한 문제를 의논하자고 임금이 제안했을 때, 정광필은 자신의 자제가 김굉필의 문하생인데 추향이 지극히 바르고 실천이 독실한 사람이기는 하나 문묘종사에는 신중해야 할 것이라고 신중론을 폈다.<ref>이순형,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49</ref>
         <ref>이순형,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49</ref>
         종사를 의논하도록 했다. 이때 조광조가 이심원을 거론하자 정광필이 반대했는데 임금도 이에 동의했다.<ref>이순형,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50</ref> 참찬관 김정(金淨)이 대학연의를 강의하다가 김굉필의 문묘종사를 건의했다.<ref>이순형, 한국의 명문 종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50</ref> 그를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자신들의 직계 스승을 배향하기 위한 것이라며 훈구파는 물론 온건 사림파들, [[김종직]]의 다른 제자들이나 다른 제자의 문인들 역시 반대하였다. 결국 [[광해군]]때 가서야 문묘에 종사된다.
  • 김동한 (1919년) . . . . 7회 일치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 기타 이력 = 1940년 [[대구가톨릭대학교|경상북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전문학사 출신 <br /> 1956년 [[국방대학교|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기 출신 <br/> [[성직자]], [[천주교]] [[사제]], [[수필|수필가]], [[군인]] <br/> [[신민당 (1967년)|신민당]] 국가보건행정특보위원(1975년) <br /> [[한국가톨릭결핵시설연합회]] 회장
         [[1951년]] [[대한민국]]의 [[대한민국 해군|해군]] 군종 장교로 [[대한민국 해군|해군]] [[대위]] 임관하여 이후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군종장교|군종사관]] [[사제]]로 참전하였으며 [[군종사제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고 [[1970년]] [[대한민국 해군|해군]] [[중령]] 예편하였다.
         그의 가계는 천주교 순교자 집안이었다. 할아버지 김보현 요한은 조선 후기였던 1868년 무진박해 때 체포되어 [[한성부]]에서 순교하였다.<ref name="한경1">[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9021957741 우리 곁을 떠난 김수환 추기경은 어떤 분이었나 ] 한국경제 2009-02-20 </ref> 옹기장수인 아버지를 여의고 포목행상으로 살림을 꾸리는 어머니의 아들로 출생하였고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라<ref name="한경1"/> 이후 [[대구가톨릭대학교|경상북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들어가 졸업 후 사제가 된다. 이후 그의 동생 [[김수환]]도 그의 영향을 받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로 진학하게 된다.<ref name="한경1"/>
         그 뒤 김동한 가롤로 사제는 [[1949년]] [[6월]]부터 [[1951년]] [[3월]]까지 [[창원시|경상남도 창원]]에서 사목하다가 [[1951년]] [[대한민국 해군|해군]]의 첫 [[군종장교|군종사관]](군종 신부)로 [[대한민국 해군|해군]] [[대위]] 임관하였다.<ref name="가톨1">[http://www.catholictimes.org/news/news_view.cath?seq=36413 (한국교회사 인물 80) (하)]{{깨진 링크|url=http://www.catholictimes.org/news/news_view.cath?seq=36413 }} 가톨릭뉴스</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2528492 김동환 신부와 함께하는 故 김수환 추기경 :: 네이버 뉴스<!-- 봇이 붙인 제목 -->]</ref> 1953년 4월 진해 및 인근 본당들과 함께 ‘군민 합동 성체대회’ 개최했으며 이 대회는 진해 지역의 천주교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ref name="가톨1"/> 그 이후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대구]] [[계산성당]] 등에서 사목하였다.
         [[1978년]] ‘한국 가톨릭 결핵 시설 연합회’ 조직하고 초대 회장에 피선되어 결핵환자 요양원을 맡았다.<ref name="가톨1"/><ref>[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7738&yy=2009 영남권 대표 인터넷 신문 "매일신문"<!-- 봇이 붙인 제목 -->]</ref> [[1983년]] [[9월 28일]] 선종하였다.
         [[분류:1919년 태어남]][[분류:1983년 죽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광산 김씨]][[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 성직자]][[분류:대한민국 해군 중령]][[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함세웅]][[분류:신민당]][[분류:대한민국의 군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문화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구가톨릭대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
  • 김민제 (프로게이머) . . . . 7회 일치
         {{프로게이머 정보
         | 종족 = [[프로토스]]
         '''김민제'''([[1986년]] [[11월 26일]] ~ )는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이다. 종족은 [[프로토스]]이며 아이디는 '''BestGod'''이다. 2005년 하반기 드래프트에서 Plus(현 [[화승 OZ]])의 1차 지명으로 입단하였다.
         [[2007년]] [[3월 5일]] 같은 팀 소속이던 박성진과 함께 르까프 오즈에서 STX SouL로 이적하였다. 2009년에 은퇴하였다.
         {{토막글|한국 사람}}
         [[분류:1986년 태어남]][[분류:대한민국의 e스포츠 선수]][[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분류:저그 선수]][[분류:화승 OZ의 선수]][[분류:SouL (e스포츠)의 선수]]
  • 김성윤 (1991년) . . . . 7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4년]]
         |드래프트 순위 = [[2014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4년]] 2차 3라운드([[kt 위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토막글|야구}}
  • 류영수 . . . . 7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 베이징 타이거스 투수코치 (2008년 ~ 2009년)
         * [[원광대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2010년 ~ 2013년)
         * [[마산용마고등학교|마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1979년 ~ 1982년)
         {{토막글|야구인}}
         [[분류:194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대구상업고등학교 동문]][[분류:경상중학교 동문]][[분류:대구칠성초등학교 동문]][[분류:고흥 류씨]]
  • 마기/331화 . . . . 7회 일치
          * [[신드바드(마기)|신드바드]]의 바람대로 세계는 루프로 돌아가길 택했다. 축제 분위기 속에서 [[알라딘(마기)|알라딘]]과 [[알리바바 사르쟈]]만이 동떨어져 있다.
          * 하지만 모르지아나는 "루프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고 남을 위해 행동하는 알리바바 성격상 그 길을 택할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 모르지아나는 새삼 지난 일을 회상하며 감사와 사랑을 고백한다. 알리바바는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루프로 돌아가자고 하지 말아줘"라고 설득한다.
          * [[신드바드(마기)|신드바드]]가 루프로 돌아가자고 선언하고 세상 사람들은 한결 같이 칭송하며 축제 분위기를 연출한다. 환희가 넘치는 세상에서 [[알라딘(마기)|알라딘]]과 [[알리바바 사르쟈]]만이 어울리지 못한다.
          * 황제국으로 돌아가면서, 알리바바는 한 가지 선택을 놓고 계속 고민한다. 싸우느냐, 싸우지 않느냐.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싸워왔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도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누구도 절망하지도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모두 루프로 돌아가길 원하는데 막고 싶은건 자신 뿐이다. 이건 결국 모두가 원하는 대로 싸우지 않느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싸우느냐의 선택이다.
          >'''루프로 돌아가니까요.'''
          >부탁할게 너는 정신을 차려줘. 루프로 돌아가고 싶단 말은 하지 말아줘.
  • 무협/용어 . . . . 7회 일치
         [[무협]] 장르에는 특정한 관용구가 존재한다. 거의 무협 장르에만 쓰이는 용어로서, 한국 무협소설에서는 매우 특이한 무협소설만의 문체를 만들어낸다.
          * 독자적인 조어 : 과잉 한자어, 관용적인 조어를 넘어서 '다른 어떤 분야에서도 쓰이지 않고, (주로 한국의) 무협소설에서만 쓰이는 단어'.
         초창기 무협 번역에서는 '장풍'을 '손바람'으로 번역하는 등, 고유어 번역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이는 '정협지' 같은 사례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고유어 번역은 오히려 차츰 줄어들게 되었다. 이는 무협 번역에서 전문적인 작가의 비중이 줄어들고, 중국어와 한국어를 모두 할 줄 아는 [[화교]] 등 아마추어의 개입이 늘어나게 되었다는 점, 출판사가 영세화 되면서 번역의 품질이 나빠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국어의 영향이 과도하게 들어간 일종의 '중국어 번역체'가 남발되게 되었고, 이를 무협 장르의 독자나 후발 작가들이 학습하면서 중국어 번역체의 영향을 받은 장르 고유의 문체가 형성되었다.
         한국어에서는 쓰이지 않고, 중국어에서 쓰이는 단어가 그대로 유입된 단어들이다.(대부분 한국어 사전에서는 뜻을 찾아볼 수 없거나 일상용례가 지극히 드물며, 중국어 사전을 검색해야 나오는 단어들)
          * 관후(寬厚) : 너그럽다는 뜻. 일단 한국어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으나, 일상적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 한자어이다.
          * 애병(愛兵) : 애용(愛用)하는 병기(兵器)라는 의미. 한국 무협소설 이외에는 이러한 단어가 쓰이지 않는다. 중국 고전에는 [[손자병법]]과 관련하여 애병총화(愛兵總和)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애용하는 병장기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병사]]들을 [[사랑]]하라."는 의미이다.
  • 박성환 (야구선수) . . . . 7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7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7년]] 10차 10라운드 (전체 100순위)([[두산 베어스]])
         {{토막글|야구인}}
         [[분류:199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대구월배초등학교 동문]] [[분류:경운중학교 (대구) 동문]][[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
  • 박태호 (야구인) . . . . 7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87년]]
         은퇴 이후 모교인 [[대구고등학교]] 감독과 청소년 야구 국가대표팀을 거쳐 현재 [[영남대학교]] 감독을 맡고 있다.
         {{2009년 아시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 대한민국 선수 명단}}
         {{토막글|야구인}}
         [[분류:196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야구 감독]][[분류:롯데 자이언츠 선수]][[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분류:영남대학교 동문]]
  • 서동민 . . . . 7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4년]]
         |드래프트 순위 = [[2014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4년 2차 6라운드]]([[SK 와이번스]])
         |첫 출장 = [[KBO (야구)|KBO]] /
         [[분류:199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SK 와이번스 선수]][[분류:대구율하초등학교 동문]][[분류:경복중학교 동문]][[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분류:달성 서씨]]
  • 소명(가수) . . . . 7회 일치
         * 2006년 모범가수상 《한국연예협회》
         * 2009년 아름다운 문화예술대상
         * 2009년 제10회 한국연예문화예술대상 최우수인기가요대상
         * 2013년 한국재능나눔 최우수상
         * 2013년 제3회 한국대중가요발전협회 인기스타상
         * 2014년 위대한 한국인대상 대중가요부문 최고인기가수상
  • 원피스/874화 . . . . 7회 일치
          * 킹밤은 살아서 레이디 트리와 재회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가로막는 부하들까지 내치며 달리는데, 태양 "프로메테우스"가 이를 배신으로 간주하고 보복한다.
          * 킹밤이 프로메테우스의 힘에 불타고 밀집모자 일당은 킹밤에서 내려서 달리는데, 그 뒤로 어느 새 빅맘이 다가오고 있다.
          나미의 판단이 정확했다. 느긋한 얼굴로 빅맘을 태우고 다니던 제우스는 근처에 떠다니는 작고 검은 뇌운들에 시선을 빼앗겼다. 빅맘이 다시 한 번 위국을 쓰려고 나폴레옹을 치켜들었던 그때, 제우스는 임무도 팽개치고 블랙볼을 따라 방향을 돌렸다. 빅맘은 발 밑이 흔들리면서 땅바닥에 위국을 꽂았고 자신도 중심을 잃고 추락했다. 주인을 닮아도 너무 닮은 제우스는 빅맘이 그러거나 말거나 한 줄로 늘어선 블랙볼을 차례로 맛보며 "맛있다"를 연발했다. 그때까지 상공에서 지켜보던 "프로메테우스"가 이 어이없는 실수에 뜨악해한다. 나폴레옹도 황당해한다. 둘이서 질책해도 간식에 정신 팔린 제우스는 들은 척도 없었다. 그 사이 킹밤은 반토막난 몸으로도 바람 같이 달려서 유혹의 숲으로 향했다.
          * 킹밤의 눈물겨운 돌격은 오래가지 못했다. 상공으로부터 프로메테우스가 내려왔다. 킹밤을 진지하게 "배신자"로 간주한 프로메테우스에게 종전같은 온화한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진짜 태양만큼 팽창하며 킹밤의 머리 위를 덮쳤다. 밀집모자 일당은 그 열기에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를 뛰쳐나온다. 하지만 킹밤은 그럴 수 없었다. 프로메테우스가 비대해짐 몸집으로 킹밤을 찍어눌렀다. 일행은 간신히 몸을 피했지만, 킹밤은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잘 마른 장작처럼 타들어갔다. 루피는 도망치면서도 킹밤을 걱정해 돌아보는데, 그의 타버린 잿더미 사이로 눈이 돌아간 빅맘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전히 웨딩 케이크를 찾으며.
  • 유승옥 . . . . 7회 일치
         ||<:><#ffdae0>'''{{{#white 소속}}}'''||<#ffffff>프로페셔널엔터테인먼트||
         2015년에 SBS의 예능 프로그램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 출연하고, 게임 [[철권 7]] 런칭쇼에서는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신 캐릭터 [[카타리나 아우베스]]의 [[코스프레]] 복장을 하고 나와 유명해졌다. --하지만 신캐 반응이 썰렁해서 묻혔다.[* 실제로 그녀의 소속사 사이트를 가보면 다른건 다 기록되있어도 철권 런칭에대한건 나와있지 않았다(....)].-- 롯데월드에서 열린 대회에서 철권 7 이벤트 매치를 벌이기도 했다. 플레이 당시 유승옥이 선택한 캐릭터는 홍보할 때 코스프레했던 캐릭터인 카타리나였고, 대전 상대는 한국의 여성 철권 고수로 유명한 카니스 (본명 양이섭)의 [[스티브 폭스]].
         2015년 11월 [[UFC]] 한국대회에서 [[강예빈]], [[이수정(1987)|이수정]]의 뒤를 이어 한국 UFC [[옥타곤걸]]로 발탁되었다.
         2017년 [[소사이어티 게임 2]]에 플레이어로써 참가했다.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순수하고 따뜻한 모습을 보여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 2014년 머슬마니아 한국대표 선발전 모델부문 2위
  • 의상 (신라) . . . . 7회 일치
         }}{{한국의 불교}}
         '''의상'''(義湘, [[625년]] ~ [[702년]])은 고대 [[통일신라]]시대 중기의 왕족 출신, [[승려|고승]]이다.<ref name="글로벌-의상">[[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통일신라와 발해/고대문화의 융성#의상|한국사 > 고대사회의 발전 > 통일신라와 발해 > 고대문화의 융성 > 의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br/>[[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귀족사회와 무인정권/귀족문화#의상|한국사 > 중세사회의 발전 > 귀족사회와 무인정권 > 귀족문화 > 의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ref> 또한,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작가이자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여 [[지엄]](至嚴)으로부터 [[화엄종]](華嚴宗)을 수학하고 법통을 받아 중국 화엄종의 제3 세조가 되었다.
         또한,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시조이며, 속성은 김(金: 혹은 박(朴)씨라고 함)이다.<ref name="글로벌-의상"/> 시호는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이다.
         그 후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의 혼란을 피하여 [[661년]]([[문무왕]] 1년)에 [[당나라]] 사신의 배편을 빌려 타고 건너가 [[중난산 산|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서 [[지엄]](至嚴: [[중국의 불교|중국]] [[화엄종]]의 시조)의 문하에 [[법장 (당나라)|현수]](賢首: 법장)와 같이 [[화엄]]의 깊은 이치를 깨달았다.<ref name="글로벌-의상"/> [[법장 (당나라)|현수]]는 [[지엄]]의 뒤를 이어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되고, 의상은 귀국 후 [[한국]] [[화엄종]]의 시조가 된다.
  • 이영훈 (경제학자) . . . . 7회 일치
         [[2004년]] [[9월 2일]] [[문화방송]]의 100분 토론에 출연하여 "정신대가 조선총독부의 강제동원이 아니라 한국인의 자발적으로 참여로 이뤄진 상업적 공창"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함으로써 일제 식민 통치를 찬양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모욕했다는 논란에 휘말렸다. 이 교수는 "정신대 관련 일본 자료를 보면 범죄행위는 권력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고 참여하는 많은 민간인들이 있었다"며 "한국 여성들을 관리한 것은 한국업소 주인들이고 그 명단이 있다"고 주장하여 정신대 문제를 성매매와 동일시 하였다.<ref>{{뉴스 인용
         [[2006년]] [[12월 1일]] 고등학생용 《한국근현대사 대안 교과서》에서 [[4·19혁명]]을 《4·19학생운동》으로, [[5·16군사정변]]을 《5·16혁명》으로 기술해 논란을 불러일으킨 《[[교과서포럼]]》의 심포지엄에서 4·19민주혁명회, 4·19혁명공로자회, 4·19혁명희생자유족회 회원 30여 명에게 격렬한 항의를 받았으며, 이 교과서는 [[2008년]] [[3월 24일]] 내용을 수정하여 출간하였다. 이 교과서는 이영훈 이외에 [[박효종]] 등의 교수가 참여했다.<ref>{{뉴스 인용
         *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 (공저, 2008-3-25,[[도서출판 기파랑]])
         * 한국경제사Ⅰ·Ⅱ (2017, 도서출판 일조각)
         * 한국경제학회 청람상
  • 이재율 (1993년) . . . . 7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6년]]
         |드래프트 순위 = [[2016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6년]] 2차 4라운드([[NC 다이노스]])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6년]] [[4월 2일]]<br />[[마산종합운동장 야구장|마산]] 대 [[KIA 타이거즈|KIA]]전 대주자
  • 이종혁 (야구선수) . . . . 7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7년]]
         |드래프트 순위 = [[2017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17년]] 2차 2라운드([[kt 위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7년]] [[8월 12일]] <br /> [[문학야구장|문학]] 대 [[SK 와이번스|SK]]전 구원
  • 이홍열 (바둑기사) . . . . 7회 일치
         |소속 = [[한국기원]]
         |프로 입단 = [[1983년]]
         아마추어 시절 [[1979년]] 13기 아마국수전에서 우승하여 [[1983년]]에 입단하였고, 2001년 8단을 거쳐 [[2005년]] 11월에 9단으로 승단하였다. [[2007년]]에 한국바둑리그 제일화재 감독, [[2009년]] KB국민은행 한국바둑리그 감독(신안 태평천일염)을 맡았다.
         * [http://www.baduk.or.kr/info/player_view.asp?prpl_code=10000045 한국기원의 기사 정보]
         {{한국바둑리그}}
  • 이희근 (1929년) . . . . 7회 일치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 기타 이력 = [[대한민국 국방부]] 촉탁위원 <br/> 한국산업기지개발공사 사장 <br/> [[신민주공화당]] 국방외교안보행정특임보위원 <br/> [[자유민주연합]] 국방외교안보행정특임고문
         * 1983년 한국산업기지개발공사 사장.
         * 1988년 한국산업기지개발공사 사장 직위 퇴임.
         * [http://www.doopedia.co.kr/photobox/comm/community.do?_method=view&GAL_IDX=111222000817460 Daum 데이터 사전 - 예비역 대한민국 공군 대장 이희근 前 한국산업기지개발공사 사장]
         * [http://www.doopedia.co.kr/photobox/comm/community.do?_method=print&GAL_IDX=111222000817460 네이버 데이터 - 예비역 대한민국 공군 대장 이희근 前 한국산업기지개발공사 사장]
         [[분류:192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 공군 대장]][[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경주 이씨]][[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공군참모총장]][[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공군사관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미국 미주리 종합군사학원 동문]][[분류:육군포병학교 동문]][[분류:공군방공포병학교 동문]][[분류:공군대학교 동문]][[분류:미국 공군참모대학교 동문]][[분류:미국 국방참모대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원 동문]][[분류:전두환]][[분류:백선엽]][[분류:박정희]][[분류:정일권]][[분류:노태우]][[분류:김종필]][[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정주영]][[분류:심대평]][[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 정종원 . . . . 7회 일치
         막내 정운익은 하와이 오하나 퍼시픽 은행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고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 팀을 처음으로 직접 구성했다. 그는 대한아이스하키협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국제아이스하키연맹 집행위원을 겸직했다.<ref>경향신문, 1998년 2월 25일 26면</ref> 정종원 행장 내외가 생전에 장충동 본가에서 키우며 마지막으로 안아 본 손녀가 정운익의 3녀인 뉴욕퀸이다.
         정종원은 1947년 조흥은행에 입행했다. [[윤호병]] 전 재무부장이 그를 조흥은행 취체역(이사) 겸 특수업무부장으로 추천해준 결과다. 그의 조카 [[정운용]]은 이미 41세였던 1945년 11월 조흥은행 2대 행장이자 해방 후 첫 한국인 행장으로 선임된 바 있다. 정종원은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조흥은행]]은 [[동일은행]] [[한성은행]]의 통합으로 1943년 출범했고 앞서 1941년 [[경상합동은행]]은 [[한성은행]]에 흡수 합병된 바 있다.<ref>윤재실, <<팔도명인전>>, ( 진명사, 1979) p.236</ref><ref>국가문화유산 포털 조흥은행 역대은행장 사진첩 제1권</ref><ref>고승제,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p.210~226</ref><ref>서광운 <<한국금융백년>>(창조사,1970) p.684 조흥은행 계보도</ref><ref><<대구사회비평 2003년 7~8월 통권 10호>> 문예미학사
         민 씨 가문은 1957년 하반기부터 1958년 상반기까지 조흥은행 주식을 대거 처분한다.<ref>동아일보 1957년 7월 20일 3면</ref> 조흥은행에서 소수주주로 전락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 조선맥주은 주세체납 등으로 은행관리로 넘어가게 됐다.<ref>매일경제 1968년 7월 2일 7면 빚만 늘어가는 조선맥주</ref> 앞서 민 씨 가문은 일제 강점기 당시 조흥은행 대표취체역(대표이사)으로 [[민규식]]을 배출한 바 있다. 일본인 행장이 따로 있었고 실권은 없는 자리였다. 이어 해방 후 초대 한국인 조흥은행장은 정재학의 손자인 정운용이 맡았고 정재학의 3남인 정종원이 5대 행장을 역임했다.
         조국분단과 [[한국전쟁]]을 겪고 난 뒤 60년대에 들어서 처음으로 발간된 불교 잡지는 '법시(法施)'로서 1967년 9월 법시사에 의해 첫 호를 발간했다.
         법시는 다른 불교전문 잡지들이 사찰 등의 후원을 받아 발행된 데 비해 선종불교에 심취한 정종원 전 조흥은행장이 이사장으로서 재정지원에 나서 눈길을 끌었다. 또한 [[김세련]] 전 한국은행총재, [[문종건]] 전 조흥은행도 후원자로 참여했다.<ref>경향신문 1967년 7월 8일 5면</ref> 불교계는 1960년 초부터 불교전문 잡지가 창간됐으나 법시를 1960년대 들어 최초의 발간된 불교잡지로 인정하고 있다. '법시'에 앞서 창간된 잡지들은 몇 해를 넘기지 못하고 폐간됐기 때문이다.
  • 정호용 . . . . 7회 일치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자원 입대한 이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고 1955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11기)하였다. [[전두환]], [[노태우]]의 육사 동기로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5.17 비상계엄 확대조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에 가담했다. 12·12 군사 반란 이후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특전사]] 사령관, [[제3야전군]] 사령관, [[대한민국 육군#역대 참모총장|제25대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하였으며,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이후에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상임위원회 위원, [[민주정의당]] 대구경북지구당 위원장,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장관과 [[대한민국 행정안전부|내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에서 군부 인맥의 서열 3순위였으나, [[대한민국 제6공화국|제6공화국]] 무렵 노태우와의 경쟁 끝에 몰락하였다.---노태우와 정호용은 경쟁한적이 없습니다. 정호용은 김윤환과 더불어 노태우의 최측근으로 6공의 실세중의 실세였습니다.
         [[대구광역시|대구]]에서 출생한 그는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후일 육사의 동기가 되는 [[노태우]]는 경북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이자 동창이었다. 1951년에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전쟁]] 중 육군에 병사로 입대하여 참전하였다. 그 뒤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전두환, 노태우가 육사 11기 동기생이며 이후 전두환, 노태우 등과 사적 모임인 [[하나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80년대편 1 (인물과 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80년대편 2 (인물과 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80년대편 4 (인물과 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90년대편 1 (인물과 사상사, 2006)
         [[분류:193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참전유공자]][[분류:대한민국의 경제학자]][[분류: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내무부 장관]][[분류:전두환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대한민국의 반란자]][[분류:민주정의당]][[분류:박정희]][[분류:노태우]][[분류:김영삼]][[분류:하나회]][[분류:경운중학교 (대구) 동문]][[분류:대구남산초등학교 동문]][[분류:민주자유당 당원]][[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육군고급부관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기갑학교 동문]][[분류:육군기계화학교 동문]][[분류:육군포병학교 동문]][[분류:육군공병학교 동문]][[분류:육군대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한양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건국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연일 정씨]][[분류:대한민국 육군 대장]][[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반역죄 기결수]][[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
  • 정홍준 . . . . 7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06년]]
         |드래프트 순위 = [[2002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02년]] 6차 9라운드([[삼성 라이온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06년]] [[6월 11일]]<br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대구]] 대 [[현대 유니콘스|현대]]전
  • 최윤영(1986) . . . . 7회 일치
          * [[배우/한국]]
          * [[2009년]] [[KBS 2TV]] 《[[남자 이야기]]》 : 백화점 점원 역.
          * [[2009년]] [[KBS 2TV]] 《[[그저 바라보다가]]》 : 스타일리스트 역.
          * [[2009년]] [[KBS 2TV]] 《[[결혼 못하는 남자]]》 : 유수영 역.
          * [[2009년]] [[KBS 2TV]] 《[[열혈 장사꾼]]》
          * [[2009년]] [[KBS 2TV]] 《[[천하무적 이평강]]》 : 봉소희 역.
         [[분류:한국 여배우]][[분류:김천시 출신 인물]]
  • 최재만 . . . . 7회 일치
         최재만(崔載晩, [[1988년]] [[5월 19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2009년]] 7월 2일 [[대한민국]]의 [[음악 그룹]] [[어반 자카파]]의 EP 앨범 '커피를 마시고'로 데뷔하여 [[2010년]] 3월까지 [[어반 자카파]]의 멤버로 활동하였고, [[2014년]]과 [[2015년]]에 [[대한민국]]의 [[음악 그룹]] [[The Nucleus]]에서 활동하였다. [[2017년]] 4월 25일에 솔로로 데뷔하였다.
         * '''[[어반 자카파]]: 커피를 마시고 (EP)''' <2009.07.02 발매> (공동 디렉팅 및 프로듀싱)
         * '''[[어반 자카파]]: Sweety You (EP)''' <2009.12.10 발매> (공동 디렉팅 및 프로듀싱)
         * '''[[어반 자카파]]: 01 (1집)''' <2011.05.17 발매> (공동 프로듀싱)
         * '''[[The Nucleus]]: Heaven (Digital Single)''' <2012.03.05 발매> (보컬, 작사, 작곡, 편곡, 공동 프로듀싱)
         * '''[[The Nucleus]]: The Nucleus (1집)''' <2012.03.09 발매> (보컬, 공동 프로듀싱)
         {{토막글|한국 가수}}
  • 탁민제 . . . . 7회 일치
         | 경력 = [[KAIST]] 항공우주공학전공 교수 </br> 前 [[한국항공우주학회]] 회장
         '''탁민제'''(卓民濟, 1954년 ~ )은 [[대한민국]]의 [[항공우주공학자]]이다. 현재 [[KAIST]] 공과대학 기계항공시스템학부 항공우주공학 교수이자 [[한국항공우주학회]]장이다.<ref>{{뉴스 인용|제목 = 항공우주학회장 KAIST 탁민제 교수|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8&aid=0002196808|출판사 = 한국일보|날짜 = 2011-11-08}}</ref>
         * [[한국항공우주학회]] 회장 (2012년)
         * 한국항공우주학회지 편집위원장
         *[http://ae.kaist.ac.kr/ 한국과학기술원 항공우주공학전공]
         [[분류:195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공학자]][[분류:대한민국의 과학자]][[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한국과학기술원 교수]][[분류: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동문]][[분류:텍사스 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광산 탁씨]][[분류:항공우주공학자]]
  • 한길로 (영화감독) . . . . 7회 일치
         * [[2007년]]《[[마을금고 연쇄습격사건]]》(코미디 / 프로듀서)
         * [[2007년]]《[[더 게임]]》(스릴러 / 프로듀서)
         * [[2009년]]《[[킹콩을 들다]]》(드라마 / 프로듀서)
         * [[2011년]]《[[적과의 동침]]》(드라마, 코미디 / 프로듀서, 기획)
         * 2009년 제17회 [[춘사영화상]] 프로듀서상
  • 현진건 . . . . 7회 일치
         | 언어 = [[한국어]]
         '''현진건'''(玄鎭健, [[1900년]] [[8월 9일]] ~ [[1943년]] [[4월 25일]])<ref>{{웹 인용|url=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25h0979b|제목=현진건|출판사=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확인날짜=2007-11-25}}</ref> 은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 조선(朝鮮)의 작가, [[소설|소설가]] 겸 [[언론|언론인]], 독립운동가이다.
         [[2005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건국공로훈장 독립장]](3급)이 추서되었다. [[2009년]]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현진건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 [[이광수]] - 박종화의 일기에 보면, [[1922년]] 현진건이 홍사용 · 박종화 등의 문인들과 함께 동인으로 참여한 문예지 《백조》 창간호에 이광수의 시 「악부(樂府)」가 실리게 되었을 때, 상해에서 《백조》를 받아보고 현진건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한국의 꽃봉오리 같은 젊은 청년들이 발표하는 깨끗한 《백조》지에, '귀순장'을 쓰고 항복해 들어간 이광수가 동인이 되었다 하니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빨리 동인에서 제거하라"며 항의했고, 결국 《백조》 동인에서 이광수는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광수는 이미 당시 춘원은 허윤숙이라는 여인과 동거하면서 일제에 이른바 '귀순장'이라는 것을 써서 독립지사들의 정보를 넘겨주고 변절한 상태였던 것이다.<ref>윤병로 「박종화의 삶과 문학」1998, 신효정「문학산책」2000, 역사문제연구소 편찬「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2003.</ref>
         생가는 주소만 남아있을 뿐 어디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가 살았던 [[인왕산]] 밑의 부암동 자택은 종로구에서 공용주차장을 짓기 위해 2003년에 헐어버려서 지금은 터와 '현진건 집터'라는 표석만이 남아 있다. 당시 그 생가의 철거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자 행정당국은 '민간인 소유자와 부지 매입을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는데<ref>[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711/h2007110618342324420.htm#none 편집국에서-사라지는 문학의 고향, 한국일보 2007년 11월 6일자 기사]</ref> 2012년 10월 4일에 [[안평대군]]의 사저와 함께 법원경매에 부쳐졌다. 유언에 따라<ref name="cho"/> 화장되고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서장리에 매장됐었으나 그 후 남서울 개발관계로 묘소가 사라져 유해는 한강에 뿌려졌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PPL_7HIL_A1900_1_0014602}}
         [[분류:1900년 태어남]][[분류:1943년 죽음]][[분류:병사한 사람]][[분류:대한제국의 사회 운동가]][[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박헌영]][[분류:일제 강점기의 소설가]][[분류:대륜고등학교 동문]][[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작가]][[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연주 현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홍서범 . . . . 7회 일치
         홍서범은 [[1958년]] [[12월 7일]]에 [[경상북도|경북]] [[김천시|김천]] 대광동 (김천시) (환경로) 에서 2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재학 중 대학 2학년때 팀 '옥슨79'를 창설하면서 멤버로 활동했다. [[1980년]]에는 대학 캠퍼스 밴드 '옥슨80'의 멤버로 같은 해 [[동양방송|TBC]] '젊은이의 가요제'에 출전하여 '''불놀이야'''로 금상을 수상하며 데뷔하였다. '옥슨80'의 멤버로 활동하다 [[1989년]] 32세에 《나는 당신께 사랑을 원하지 않았어요》라는 자작 록 발라드 곡으로 솔로 가수가 되었다. 솔로 가수로 데뷔한 뒤에는 '''구인광고''', '''김삿갓''' 등이 히트를 치기도 했다. 라디오 프로그램과 TV 방송에도 출연, [[1994년]]에는 [[한국방송공사|KBS 한국방송공사]] 라디오 프로그램 홍서범의 뮤직쇼 DJ를 진행하였으며 그 해 영화 《[[커피 카피 코피]]》의 주연(영화배우)으로 스크린에도 데뷔하였다. [[2003년]]에는 라디오 DJ를 복귀하면서 [[서울방송|SBS]] 라디오 프로그램 '홍방불패'의 DJ로 활동하였다.
         * 한국가스안전공사
         * 〈나 어떡해〉는 사회적으로 암울했던 시대, 대학 가요제 대상을 수상했던 곡이었다고 한다.<ref>[http://reviewstar.hankooki.com/Article/ArticleView.php?WEB_GSNO=10039036 불후의 명곡2 홍서범, "'나 어떡해'는 당시 사회적 편견을 깬 곡"] {{웨이백|url=http://reviewstar.hankooki.com/Article/ArticleView.php?WEB_GSNO=10039036# |date=20131227041836 }}《한국일보》</ref> 홍서범은 "당시 부모님들은 공부를 안 하고 기타치고 노래하면 혼을 내서, 대학생들이 몰래 노래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가요제 대상을 수상한 거다. 그래서 놀란 부모님들이 노래를 부르라 허락했다"고 하였다.
  • K리그 관중 실 집계 정책 . . . . 6회 일치
         2012시즌부터 [[K리그]]에 적용한 정책. [[한국프로축구연맹]]이 가장 잘 한 일 중 하나다.
         예를 들어 어느 지역의 인구 수를 매년 잘못 파악한다고 치면 해당 도시의 인구가 왜 늘어났는지, 혹은 반대로 왜 줄어들었는지에 대한 분석 자체가 불가능해지게 된다. 여초현상이 발생했으면 왜 여초현상이 발생했는지, 여기에 대한 원인은 무엇인지, 해결책은 없는지에 대한 고찰을 해야 하는게 당연한 수순이다. 헌데 2011시즌까지의 K리그는 사실 이게 불가능한 정도를 넘어 구단들이 알아서 뻥튀기를 했고, 또 K리그를 주관하는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이걸 공식자료로 활용하고 있었는데 K리그가 지금 흥행하고 있는건지 아니면 대대적인 실패를 하고 있는건지 진단조차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한국프로축구연맹]]
  • 강원 FC . . . . 6회 일치
         2008년 11월 10일에 창단한 구단으로 2009시즌부터 [[K리그]]에 참가하고 있는 프로구단이다. 구단의 법인지배구조는 [[시민구단]]이고, 연고지는 도 전체를 포괄하기 때문에 언론에서는 야구의 사례와 빗대어 광역연고구단으로 보고 있다.[*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는 딱히 광역연고와 도시연고를 구분하고 있지 않다. 연고지는 "구단과 협약을 맺은 지자체의 행정지역과 그 범위"로 보고 있기 때문에 딱히 이런 구분은 무의미하다.] 연고지 협약을 맺은 지역이 강원도 전체를 대표하는 강원도청이기 때문에 강원FC의 전체 이름은 "강원도민프로축구단"으로 정한 바 있다.
         실제 창단의 시발점은 2008년 4월 28일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5&oid=001&aid=0002064010|"강원도민프로축구단 창단추진"]을 발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몽준 前 축협회장이 참가하여 "창단을 축하한다"는 발언을 생각하면 이 시기를 구단 역사의 첫 페이지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http://www.viewsnnews.com/article?q=33646|참고기사]]] 당시 도지사였던 김진선 이외에도 1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던 이광재(태백, 영월, 평창, 정선), 최욱철(강릉)도 여기에 대해서는 당선공약으로 내세웠을 정도로 여야를 막론한 창단의 동의는 사실상 이루어졌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 권성욱 . . . . 6회 일치
         '''권성욱'''([[1970년]] [[1월 20일]] ~ )은 대한민국의 케이블 방송국 [[KBS N 스포츠]]의 [[스포츠캐스터]]이자 현 KBS N 편성국장으로 [[야구]]중계를 격주 1회정도로 겸하고 있으며, [[농구]]중계도 담당했었다.
         [[대구광역시]] 출신으로 [[1998년]] [[2월]]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의 지역방송국인 PSB 부산방송(현재 [[KNN]])으로 입사하여 아나운서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주로 프로야구 중계를 많이 담당하였다. [[2001년]]부터는 스포츠 전문 케이블방송인 [[KBS N 스포츠]]로 소속을 옮겨 [[2013년]]까지 [[KBO 리그]], [[KBL 리그]] 농구 중계를 담당하였다. [[2011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2011 대구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때는 일부 필드경기 및 시상식 장내해설을 맡은 바 있다. [[2014년]] 팀장으로 승진하면서 마이크를 내려놓았는데, 2015년 5월 2일과 10월 21일 2경기 마이크를 잡았으며, 2016년 4월 1일, [[KT 위즈]]와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 [[한국 프로농구]]
         [[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1970년 태어남]][[분류:KNN의 아나운서]][[분류:한국방송공사의 아나운서]][[분류:살아있는 사람]]
  • 권영진 (야구선수) . . . . 6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08년]]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08년]] [[7월 5일]] <br /> [[한밭종합운동장 야구장|대전]] 대 [[한화 이글스|한화]]전
         * [[경찰 야구단]] (2010년 ~ 2011년)
         [[분류:198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SK 와이번스 선수]][[분류:대구옥산초등학교 동문]][[분류:대구중학교 동문]][[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교육과학대학 동문]][[분류:안동 권씨]][[분류:경찰 야구단 선수]]
  • 권영해 (1888년) . . . . 6회 일치
          | 경력 = [[한국독립당]] 특임행정촉탁위원
         '''권영해'''(權永海, [[1888년]] [[8월 12일]] ~ [[1949년]] [[6월 23일]])는 [[대한민국]]의 [[한국의 독립 운동|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1948년 6월에서 이듬해 1949년 3월까지 [[한국독립당]] 특임행정촉탁위원을 잠시 지냈다.
         {{토막글|한국 근현대사|독립운동가}}
         [[분류:1888년 태어남]][[분류:1949년 죽음]][[분류:안동 권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대륜고등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반일 감정]][[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한국독립당]][[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목회자]][[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
  • 김근백(프로게이머) . . . . 6회 일치
         주종족이 [[저그]]인 전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1981년]] [[8월 30일]] 생. [[대구광역시]] [[동구(대구)|동구]] [[신암동]] 출신이다. [[종교]]는 [[개신교]]이다.
          * [[2004년]] 게임빌 챌린지 리그 준우승 (vs [[조용호(프로게이머)|조용호]] 2:3)
         아이옵스 스타리그 16강에서는 [[박정석]]에게 패했지만 [[전상욱(프로게이머)|전상욱]], [[변은종]]을 잡아내며 8강에 진출한다.
         이후 2005년 구룡쟁패 듀얼토너먼트에서 [[박지호(프로게이머)|박지호]], [[김준영]] 등을 내리 잡아내며 3시즌만에 스타리그 16강에 진출. [[안기효]]를 잡았으나 [[최연성]], [[차재욱]] 등에게 패해 탈락한다.
         [[이성은|흑운장]]이 방송에서 말하길 프로선수 시절 대단히 장비 등에 예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습 끝나고 놔두었던 마우스 위치나 헤드셋 위치가 그대로 있어야만 했고, 아닐 시에는 집합을 걸었다고... 물론 [[이성은|흑운장]]은 집합해서 별 거 안하고 좋게 말로 했다고 애써 포장했다.
         [[분류:프로게이머/스타크래프트]][[분류:동구(대구) 출신 인물]][[분류:1981년 출생]][[분류:2000년 데뷔]]
  • 김부식 . . . . 6회 일치
         '''김부식'''(金富軾, [[1075년]] ~ [[1151년]])은 《[[삼국사기]]》를 쓴 [[고려]] 시대 학자·문신·역사가이다. 본관은 [[경주 김씨|경주]],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ref>[http://people.aks.ac.kr/front/dirservice/dirFrameSet.jsp?pUrl=/front/dirservice/ppl/viewDocumentPpl.jsp?pLevel2Name=&pLevel3Name=&pAgeCode=&pAgeName=&pGanadaFrom=&pRecordID=PPL_5COb_A1075_1_0001702&pPplCount=&pOrderByType=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ref>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고려 인종|인종]]이 즉위하면서 외척인 [[이자겸]]은 국정을 농단하였다. 이 시기 김부식은 이자겸의 전횡에 비례(非禮)를 이유로 반대한 일<ref name="고려사 김부식전">《고려사》 권98, 열전11, 김부식전.</ref> 이 있으나 직접적으로 대항하지는 않고 묵종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이자겸 집권기에 순탄하게 승진하였다.<ref name="한국중세사학사">정구복, 《한국중세사학사(Ⅰ)》, 집문당, 1999년.</ref> 또한 [[1126년]]과 [[1127년]]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행차하여 송나라가 몰락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하였으며, 박승중(朴昇中)·정극영(鄭克永)과 함께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할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을 쌓았다. 어사대인(御史大人)·호부상서(戶部尙書)·한림원학사 등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승진하였고, 수사공(守司空)을 더하였다.
         [[1126년]](인종 4년) 이자겸이 피살됨으로써 그의 전횡은 끝났으나 이로 인한 혼란과 궁궐의 소실 등을 이유로 서경파가 득세하였다. 이 시기 김부식은 추밀원사(樞密院使)로 승진하여 재추(宰樞)의 반열에 오르는 등 정치적 지위가 급성장하였다.<ref name="한국중세사학사"/> [[묘청]] 등의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서경천도운동]]은 [[1129년]](인종 7년) 무렵부터 대두되기 시작하여 서경에 궁궐을 축조하고 인종도 자주 행차하였다. 서경파의 [[정지상]] 등은 묘청과 [[백수한]]이 성인이니 모든 정치를 그들에게 물어서 행하자고 하면서 연판장을 돌렸다. 조정 신료 가운데 오직 평장사 김부식, 참지정사 임원애(任元敱), 승선(承宣) 이지저(李之氐)만이 이를 거부하였다.<ref>《고려사》 권127, 열전40, 묘청전.</ref> 그러나 서경의 서기(瑞氣)를 조작한 일이 탄로나고, 행차 때의 악천후 등이 잇따름에 따라 김부식 등의 반대파 의견이 우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부식 일파는 [[1134년]](인종 12년) 인종의 서경 행차를 막는 데 성공하였다.<ref name="고려사 김부식전"/>
         서경 천도가 불가능해지자 묘청·조광·유담 등은 [[1135년]](인종 13년)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김부식은 토벌군의 원수가 되어 일단 개경에 머물고 있던 서경파 정지상, 김안(金安), 백수한을 처형하고 출전하였다. 김부식은 중군장으로서 좌군장으로 [[김부의]](金副儀)<ref>김부식의 동생</ref>, 우군장으로 이주연(李周衍)을 거느리고 서경으로 향했다. 서인들은 묘청·유담들을 죽이고 항복하였으나, 조광(趙匡)이 또 반하므로 서경을 포위하고, 그 이듬해인 [[1136년]]에 잔당을 소탕하였다. 반란을 진압한 김부식은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 칭호와 검교태보수태위[[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감수국사상주국 겸 태자태보(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監脩國史上柱國兼太子太保)로 임명되었다. 김부식은 이 전공을 이용하여 정적(政敵)인 [[윤언이]](尹彦頥)를 축출하고 정권을 잡았다.<ref name="한국중세사학사"/>
         반면 한국 사학 1세대로 평가되는 역사학자 [[이기백]] 전 이화여대·서강대 교수는 아래와 같이 그의 저술에 대해 호평하였다.
  • 김운용 . . . . 6회 일치
         김운용은 연희전문대(현재의 [[연세대학교]]) 학생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고, 미국 보병학교로 세 차례 군사유학을 다녀오며 익힌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1군사령관 [[송요찬]]의 부관으로 일했다. [[4·19 혁명]] 당시 계엄사령관인 송요찬의 부관으로 근무하였으며, 경찰의 실탄 요청을 송요찬이 거부하였다고 증언하였다.<ref>이문영,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73473.html “4·19때 경찰이 계엄사령관에 총탄 10만발 빌려달라 요청”], 한겨레신문</ref>
         [[1971년]]부터 [[1991년]]까지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1973년]]부터 [[2004년]]까지 [[세계 태권도 연맹]]을 역임했다. [[태권도]]의 세계화를 추진했으며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6년]]부터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92년]]에는 부위원장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2001년 IOC위원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2005년 공금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된 후에 IOC 위원직을 사퇴했다. 2017년 10월 3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의 [[연세대학교 의료원|세브란스병원]]에서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f name="yonhapnews_2017-10-03_death">{{뉴스 인용 | 저자=배진남 | 위치=서울 | 뉴스=연합뉴스 | 제목='한국스포츠 거목'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 3일 오전 타계(종합3보) | 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0/03/0200000000AKR20171003024154007.HTML | 날짜=2017-10-03 | 확인날짜=2017-10-03 | 보존url=https://archive.today/20171003133204/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0/03/0200000000AKR20171003024154007.HTML | 보존날짜=2017-10-03 | 깨진링크=아니오 }}</ref><ref name="news1_2017-10-03_death">{{뉴스 인용 | 저자=정명의 | 위치=서울 | 뉴스=뉴스1 | 제목=거목이 쓰러지다…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이 걸어온 길 | url=http://news1.kr/articles/?3116999 | 날짜=2017-10-03 | 확인날짜=2017-10-03 | 보존url=https://archive.today/20171003133158/http://news1.kr/articles/?3116999 | 보존날짜=2017-10-03 | 깨진링크=아니오 }}</ref>
         [[분류:1931년 태어남]][[분류:2017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 육군 소령]][[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미국 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포병학교 동문]][[분류:육군공병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분류:텍사스 대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메리빌 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잉글랜드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수감자]][[분류:IOC 위원]][[분류:동국대학교 교수]][[분류:동덕여자대학교 교수]][[분류:중앙대학교 교수]][[분류:홍익대학교 교수]][[분류:단국대학교 교수][[분류: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분류:한양대학교 교수]][[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서울가톨릭대학교 교수]][[분류:한성대학교 교수]][[분류:성균관대학교 교수]][[분류:이화여자대학교 교수]][[분류:숭실대학교 교수]][[분류:한국체육대학교 교수]][[분류:서일대학교 교수]][[분류:숙명여자대학교 교수]][[분류: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분류:경기대학교 교수]][[분류:세종대학교 교수]][[분류:국민대학교 교수]][[분류:태권도인]][[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대통합민주신당 당원]][[분류:스포츠영웅 명예의 전당 헌액자]]
  • 김이브 . . . . 6회 일치
         2000년대 후반에는 [[코미디 프로그램 갤러리|코갤러]]들에게 괴롭힘을 많이 받았다. 그 당시에는 아프리카TV 보안이 허술해서 시청자 중 누군가 해킹을 해 방종이나 얼리기 등을 마음대로 조종하거나 채팅창에 플래시파일을 올리는 것이 가능했는데, 이를 이용하여 19금 움짤이나 귀신 움짤로 도배를 하거나 방송국 게시판에 링크낚시를 하는 등 지속적인 괴롭힘으로 한동안은 방송이 불가능했던 시절도 있었다. 특히 [[진워렌버핏|이 인간]]의 만행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018년 5월 15일 플랫폼을 아프리카 TV로 변경하면서 2018년 5월 14일 카카오 실시간방송이 종료되었고, 2018년 5월 15일 유튜브 실시간방송이 종료되었다.[* 당초은 아프리카TV와 유튜브 동시송출을 진행하였으나 방송진행중 프로그램에 의한 CPU의 사용율이 90%를 초과 등의 문제등이 발생 하여 원활한 방송진행을 위하여 부득이하게 유튜브 송출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 2016년 9월 08일, 인천 문학야구장에서 열리는 [[SK 와이번스]]와 [[넥센 히어로즈]]의 야구 경기 시작 전 [[양띵]]과 함께 [[시구]], [[시타]]를 했다. 이는 [[KBO 리그|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MCN]] 1인 크리에이터가 하는것이다.[[https://youtu.be/ipgtbnoyUrw|#]][[https://youtu.be/3qT33tpkxeU|##]]
  • 김지석(배우) . . . . 6회 일치
          * 상위 문서 : [[배우/한국]]
         [[영국]]에서 중고등학교(브래드필드 컬리지)를 다니다가 [[한국외대]]로 진학한 이력이 있으며 원래는 2001년 5인조 댄스그룹 리오로 데뷔했다가 리오가 묻히면서[* 참고로 이 그룹의 소속사가 여성 4인조 아이돌 그룹 [[슈가]]를 배출했고, 소녀시대 [[써니]]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스타월드였다.] 가수의 길은 접고 연기자로 전업해 2004년 MBC 시트콤 아가씨와 아줌마 사이로 데뷔했다. 이 과정에서 연예계 생활에 회의, 혹은 불안을 느낀 것인지 학교생활을 하면서 이중전공으로 [[독어]]/[[영어]] 교사 자격을 얻었다. 인터뷰에 따르면 연예인 포기하고 정말 학교 선생님으로 전직할 생각이었던 모양.
         || 2009년 || KBS2 || [[전설의 고향]] - 혈귀편 || 현 || ||
         || 2009년 || [[국가대표(영화)|국가대표]] || 강칠구 || ||
         ||<|2> 2009년 || 제17회 이천춘사대상영화제 || 공동연기상 ||<|2> 국가대표 ||
         [[분류:한국 남배우]][[분류:1981년 출생]][[분류:무한도전의 역대 게스트]][[분류:라디오 스타의 역대 게스트]][[분류:김천시 출신 인물]][[분류:2004년 데뷔]]
  • 김지훈(배우) . . . . 6회 일치
          * 상위 문서: [[배우/한국]]
         || [[2009년]] || KBS || [[천추태후(드라마)|천추태후]] || [[현종(고려)|현종]] || ||
         || 2010년 || [[나탈리(한국 영화)|나탈리]] || 민우 ||
         ||<|4> 2002년 || [[강타]] || 프로포즈 ||
         || 2009년 || [[엠씨 더 맥스]] || 뒤차가 경적을 ||
         [[분류:무한도전의 역대 게스트]][[분류:한국 남배우]][[분류:1981년 출생]][[분류:포항시 출신 인물]][[분류:2002년 데뷔]][[분류:1대 100 역대 1인]][[분류:라디오 스타의 역대 게스트]]
  • 김현민 (야구선수) . . . . 6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2년]]
         '''김현민'''(金賢敏<ref>한국야구위원회, 2012 가이드북</ref>, [[1992년]] [[4월 12일]] ~ )은 [[KBO 리그]] [[두산 베어스]]의 선수이다.
         {{토막글|야구인}}
         [[분류:199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외야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두산 베어스 선수]][[분류:제주고등학교 동문]][[분류:경상중학교 동문]][[분류:대구남도초등학교 동문]]
  • 김효진 (배우) . . . . 6회 일치
         * [[2009년]] 《[[오감도 (영화)|오감도]]》 ... 강나루 역
         * [[2009년]] 《[[돌멩이의 꿈]]》 ... 이하나 역
         * [[2009년]] 《[[전우치 (영화)|전우치]]》 ... 빨간 머리 역(특별출연)
         * 2009년 연극 《한 여름밤의 꿈》
         * [[2009년]] 러브트리 프로젝트 - 비 (La pluie)
  • 대한민국 FA컵/2016시즌 . . . . 6회 일치
          * 연합회팀: 한국후지제록스, SMC엔지니어링
          * [[한국 내셔널리그]]팀: 10개팀
          * 내셔널리그팀: 경주한국수력원자력(주), 강릉시청, 코레일, 용인시청, 부산교통공사
          * K리그 챌린지팀: 부천축구클럽1995, 부산아이파크, 대구FC, 서울이랜드FC, 대전시티즌, 안산무궁화프로축구단, FC안양, [[강원FC]]
         4라운드부터는 본선이며, MPV선정이나 득점왕 및 도움왕 선정을 위한 기록은 모두 이 4라운드부터 적용한다. 또한 본선부터는 각 라운드 진출에 따라 프로팀도 지원금을 받을 수 있게 된다.
         || 54 || 2016년 05월 11일 || [[수원 삼성]] || : || 경주한국수력원자력(주) || 1:0 ||
  • 맥스 페인/줄거리 . . . . 6회 일치
         맥스는 보일러실에서 의자에 묶인채로 죽은 남자와 그 옆에 버려진 피묻은 야구방망이를 발견한다. 그 옆에는 만화 "캡틴 베이스볼배트보이"가 실린 신문지가 놓여져 있었다.
         여자의 이름은 [[모나 색스]], 안젤로 펀치넬로의 아내인 리사 펀치넬로의 쌍둥이 자매였다. 그녀는 눈 깜빡하지도 않고 맥스를 죽일 수 있는 프로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모나의 말에 따르면 알렉스 볼더를 죽이고 맥스에게 누명을 씌운 자는 잭 루피노가 아닌 안젤로였었다. 안젤로는 리사를 구타하고 있었고, 이는 그가 모나의 표적이 되는 원인이 되었다.
         남자는 자신을 "방망이" 프랭키 나이아가라라고 소개했다. 그의 이름을 들은 맥스는 잘 울어서 나이아가라냐고 프랭키를 도발해보지만 머리를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맞을 뿐이었다. 맥스를 두들겨 팬 프랭키는 잠시 바에 가서 시원한거나 마신후 시작하자며 맥스를 남기고 가버린다. 프랭키가 가자 맥스는 의자를 부숴 포박에서 풀려난다. 그러고는 프랭키가 놓고간 야구방망이를 집어든다. 맥스는 무기를 찾아내 다시 무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와중 프랭키에게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하수구에 버려져 있는 것도 목격한다.
         맥스가 바에 들어갔을 때, 프랭키는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맥스는 그를 야구방망이로 패죽이려고 하자, 프랭키는 양손에 잉그램을 들고 저항한다. 하지만 그는 맥스에 의해 죽게된다.
         맥스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자신의 토사물 위에 식은땀을 흘리며 엎어져 있었다.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 들었던 말을 떠올린 맥스는 뉴욕 바깥에 위치한 "콜드 스틸"이라는 공장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많은 트럭들이 오가고 있었다. 맥스는 쇠파이프와 야구방망이, 베레타 한 정만 가지고 콜드스틸 지붕 위 채광창을 통해 잠입한다.
  • 몽키 D. 루피 . . . . 6회 일치
         ||||<tablealign=center><#DCDCDC><:> 프로필 ||
         || 한국판 || [[정미숙]](KBS), [이보희](대원) || [[강수진(남자 성우)|강수진]] ||
          * 에릭 - 애니메이션판 한정. 아피스(한국명 유리카) 편에서 등장했으며, 고무고무 종 & 바주카로 K.O.
          * [[Mr.3]] - 캔들 챔피언으로도 무리인 걸 알고 도망치는 척 분신들을 만들어놓은 Mr.3를 고무고무 스탬프로 찍어버리고 끝.
          * [[오마츠리 남작]] - 극장판 6기 한정. '''지금까지 나왔던 극장판 전부를 통틀어서''' 오마츠리 남작 만큼 루피를 처참하게 만든 인물은 없었다. 동료들 전부 잃고 온 몸에 화살이 박힌 채로 오마츠리 남작에게 동료들을 돌려달라며 덤비는 모습은 정말 안쓰럽다. 개인 능력은 루피보다 한참 아래지만 루피를 핀치상태로 몰고 간 계획성이나 루피만큼 동료애가 강했으나 그 성질이 삐뚤어져 있었던 만큼 극장판 6기 분위기를 여느 다른 극장판과 달리 어둡게 몰고 가는데에 한 몫했다. 여담으로 오마츠리 남작의 [[성우]]는 공교롭게도 후에 싸울 [[최종보스]] 후보 중 하나인 [[마샬 D. 티치]]를 연기한 '''[오오츠카 아키오]'''다. 한국판은 로브 루치를 연기한 [[현경수]].
          * 국내 개그프로그램인 [[개그콘서트]]의 한민관이 이 캐릭터 코스프레를 한 적이 있어 아주 잠깐 화제가 되었다.
  • 박지훈 (야구선수) . . . . 6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2년]]
         |드래프트 순위 = [[2012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12년 1라운드]] ([[KIA 타이거즈]])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2년]] [[4월 12일]]<br>[[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광주]] 대 [[삼성 라이온즈|삼성]]전 구원
  • 박홍우 . . . . 6회 일치
         * 민사소송법 제426조 제3항의 위헌여부에 관한 고찰, 세계헌법연구 제1호, 국제헌법학회 한국학회 (1994)
         * 헌법 제23조 3항에 따른 보상규정이 없는 경우의 문제해결방안, 한국헌법학의 현황과 과제: 금랑 김철수 교수 정년기념논문집, 박영사 (1998)
         * 핀란드의 사법제도, 세계헌법연구 제8집, 국제헌법학회 한국학회 (2003)
         * 태국의 사법제도, 세계헌법연구 제12집 2권, 세계헌법학회 한국학회 (2006)
         * 국회의원지역선거구간 인구편차의 헌법상 한계, 현대 공법의 이론과 판례의 동향, 세계헌법학회 한국학회 편, 도서출판 관악사 (2014)
         * 주석형법 (공저), 한국사법행정학회 (2006)
  • 서정돈 . . . . 6회 일치
         성균관대학교 총장으로 재직 중이던 2009년 동 대학 유학대학원에 학생 신분으로 입학하여 이듬해인 2010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011758305&code=100203 성균관대 서정돈총장 대학원 진학] - 경향신문, 2009년 2월 1일</ref>
         * 2009년 : 한국 유장 편찬위원회 위원장
         * 2009년 : 삼성문화재단 이사
         * 2009년 ~ 2014년 : 국제유학연합회 이사장(제4대)
  • 성세현 . . . . 6회 일치
         [include(틀:프로젝트 문서2, 프로젝트1=나무위키 동계스포츠 프로젝트, 프로젝트2=나무위키 올림픽 프로젝트)]
         원래는 세컨드를 맡았지만 스킵 [[김창민]]과 서드 [[김민찬(컬링)|김민찬]]이 군복무로 팀을 이탈하면서 2시즌간 스킵을 맡기도 했다. 비록 이 동안 한국선수권에서는 우승하진 못했지만, 2015-2016 시즌에는 전국 4개 대회에서 모두 우승했다. 김창민이 복귀한 후로는 서드를 맡았다.
  • 유재호 (야구선수) . . . . 6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0년]]
         |드래프트 순위 = [[2010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10년]] 1차 7라운드([[LG 트윈스]])
         [[분류:199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외야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LG 트윈스 선수]][[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분류:대구중학교 동문]][[분류:대구남도초등학교 동문]][[분류:강릉 유씨]]
  • 윤문영 . . . . 6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2년]]
         |드래프트 순위 = [[2012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12년 6라운드]] ([[NC 다이노스]])
         [[분류:199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포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NC 다이노스 선수]][[분류:계명대학교 동문]][[분류:대구상원고등학교 동문]][[분류:경상중학교 동문]][[분류:대구율하초등학교 동문]]
  • 이덕건 . . . . 6회 일치
         |직업 = [[한국방송공사|KBS]] 드라마 제작국 PD
         '''이덕건'''은 [[대한민국]]의 [[한국방송공사|KBS]] [[드라마]] 제작국 [[프로듀서]]이다.
         [[2008년]] [[12월]]에는 드라마 제작국 EP(총괄프로듀서)를 맡아 드라마 전반을 총괄하였다.<ref>{{뉴스 인용
         }}</ref> 그 외에 수목드라마인 <[[해신]]>, <[[장밋빛 인생 (2005년 드라마)|장밋빛 인생]]>, <[[위대한 유산 (드라마)|위대한 유산]]>, <[[투명인간 최장수]]>, <[[달자의 봄]]>, <[[마왕 (2007년 드라마)|마왕]]> 등의 책임프로듀서(CP)를 맡기도 했다.
         * KBS TV제작본부 드라마 1팀 프로듀서
  • 이상정 (1897년) . . . . 6회 일치
          | 기타 이력 =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br/>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이상정'''(李相定, [[1897년]] [[6월 10일]] ~ [[1947년]] [[10월 27일]])은 [[일제 강점기|일제 강점기 조선]]의 [[한국의 독립 운동|독립운동가]] 겸 [[군인]]이다.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慶州)이고 아호(雅號)는 청남(晴南), 산은(汕隱)이며 일명(一名)은 '''이연호'''(李然晧)이다. [[대구광역시|대구]] 출생이다.
         그는 시인 [[이상화 (시인)|이상화]](李相和), 사학자 [[이상백 (사학자)|이상백]](李相佰), 수렵가 [[이상오]](李相旿)의 형이다. 호적상에 등재된 부인은 2년 연상의 한문이(韓文伊, 1895년 5월 7일 ~ 1941년) 여사인데, 우리나라 여성 [[비행사]] 1세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한국의 독립 운동|독립운동가]] 겸 항공비행사였던 4년 연하의 [[권기옥]](權基玉, 1901년 1월 11일 ~ 1988년 4월 19일) 여사와 [[1928년]], [[내몽골 자치구|중화민국 네이멍구 자치구]] [[후허하오터 시|후허하오터]]에서 다시 결혼하였다.
         [[분류:1897년 태어남]][[분류:1947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경주 이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장교]][[분류:한국의 장군]][[분류:반일 감정]][[분류:김구]][[분류:염상섭]][[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박헌영]][[분류:육군 장군]][[분류:한국독립당]][[분류:일제 강점기의 화가]][[분류:자유 연애]][[분류:일제 강점기의 서예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저술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조각가]][[분류:대륜고등학교 동문]][[분류:도쿄 공업대학 동문]][[분류:도쿄 예술대학 동문]][[분류:히토쓰바시 대학 동문]][[분류:고쿠가쿠인 대학 동문]][[분류:유교 신자]][[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의 배우자]]
  • 이영희 (1936년) . . . . 6회 일치
         [[대구광역시|대구]]에서 출생한 그녀는 [[1994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ref>[http://news.joins.com/article/18725617 반평생 바친 한복, 한류 명품으로 키울 자신 있어요] 《중앙일보》 2015-09-23</ref> [[2001년]] [[6월 7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직할시|평양]]에서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였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1&aid=0007108528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의 인생 이야기] 《연합뉴스》 2014-09-06</ref> 또 2005년 APEC 정상회의 때는 APEC 정상회의의 이벤트였던 전통의상 부문에서 참가국 정상들의 두루마기를 제작한 바 있다.<ref>[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6012674691 APEC 정상들의 두루마기 패션쇼] 《한국경제》 2016-01-26</ref> 배우 [[전지현]]의 시외조모이다.<ref>[http://news.ichannela.com/enter/3/06/20151004/73990365/1 ‘전지현 시할머니’ 이영희, 누구 한복 만들었나] 《채널A》 2015-10-04</ref>
         * 사단법인 미래문화(뉴욕 이영희 한국박물관) 대표
         *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 무대미술과 교수
         * 한국인상(1994)
         * 올해의 초대 디자이너(한국패션협회, 1996)
         * 자랑스런 한국인대상(언론인협회, 2008)
  • 일곱개의 대죄/190화 . . . . 6회 일치
          * 이런 상황에서 길프로스트로 위장하고 있던 비비안이 정체를 드러내며 길선더를 데리고 도주.
          * 하우저, 길선더, 슬레이더는 바토라 왕의 호위에 전념. 길선더는 마가렛왕녀 만큼은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길프로스트는 굳은 얼굴로 지켜본다.
          * 그런데 길프로스트가 끼어들더니 "길은 절대 죽게 두지 않는다"고 말한다.
          * 정체를 드러내는 길프로스트. 그는 비비안이었다.
          * 길프로스트의 정체는 비비안. 작중 인물들이 질려서 "스토커질"이라고 직접적으로 디스한다.
          * 정체가 비비안이란건 길프로스트가 차고 있는 반지 때문에 어느 정도 예견된 사실. 하지만 전혀 갱생한 면모가 없고 또 길선더만 살리겠다고 도망쳐버리는 졸렬함을 보인다.
  • 전지수 . . . . 6회 일치
         | 학력 = [[한국체육대학교]]
         * [[한국체육대학교]]
         * [[한국체육대학교|한국체육대학교 대학원]]
         [[분류:198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분류:한국체육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국체육대학교 동문]][[분류:정화여자고등학교 동문]][[분류:덕화중학교 동문]][[분류:대구파동초등학교 동문]][[분류:아시안 게임 쇼트트랙 메달리스트]][[분류:2007년 동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분류:2007년 동계 아시안 게임 쇼트트랙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은메달리스트]]
  • 전호영 . . . . 6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2년]]
         |드래프트 순위 = [[2012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12년 4라운드]] ([[LG 트윈스]])
         [[분류:199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LG 트윈스 선수]][[분류:대구율하초등학교 동문]][[분류:경상중학교 동문]][[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분류:정선 전씨]]
  • 정명환 . . . . 6회 일치
         [[1980년]] [[연극배우]] 첫 데뷔하였고 이후 1982년 6월에서 1985년 6월까지 [[국방의 의무|대한민국 육군 사병 복무]]한 그는 [[1986년]] [[문화방송|MBC 문화방송]] 공채 18기 탤런트로 정식 데뷔하였으며 [[1988년]] [[영화]] 《둥지 속의 철새》의 단역으로 [[영화 배우|영화배우]] 데뷔하였고 이듬해 [[1989년]] 영화 《모래성》에 단역 출연하였으며 이후 [[배우|텔레비전 연기자]]로서 [[문화방송|MBC 문화방송]], [[한국방송공사|KBS 한국방송공사]], [[서울방송|SBS 서울방송]], [[한국교육방송공사|EBS 한국교육방송공사]] [[텔레비전 드라마|드라마]]에서 주연과 조연과 단역을 두루 배역하였다.
         === 라디오 프로그램 ===
         * [http://www.kmdb.or.kr/vod/mm_basic.asp?person_id=00009925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 트로피코 4/건물 . . . . 6회 일치
         === 핵무기 프로그램 ===
         ||코쟁이들과 불곰 놈들은 트로피코를 경외하며 이 핵 무기 프로그램을 탐합니다. 국가의 안녕을 위해선 자력으로 핵무기를 보유하는 수밖엔 없지요. 뭔가 모순이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15킬로톤짜리 핵 미사일을 날릴 수 있는 건 적들뿐만이 아니라는 이 사실은, 우리가 발 뻗고 잘 수 있도록 해줍니다.
         이 프로그램을 유지할만한 자본이 있는 한, 국가는 타국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합니다.||
         ||어떤 똑똑한 자식이 TV를 발명해버리는 바람에 시민들을 세뇌하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게 되어버렸습니다. 각하 버젼의 민주주의를 시행하시거나 멍청한 예능 프로그램이나 연속극을 방영하여 시민들을 멍청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겠지요.
          * 우라늄 농축: 요즘 같은 시대에 좀 잘 나가는 국가들 사이에서는 우라늄 농축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왜인진 모르겠으나, 분명 뭔가 죽여주는 이유가 있겠지요. 우라늄 농축 모드로 설정되어 있는 모양에는 핵무기 프로그램에 유지비가 전혀 들지 않게 됩니다.
         ||대부분의 '검소한' 부자들은 높고 거대한 건물을 좋아하지요. 그들의 생각은 지그문트 프로이트만이 설명해줄 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거대한 건물을 건설하신다면 카리브 해 일대뿐만 아니라 세계에 명성을 드높이실 수 있습니다.||
  • 허준영 . . . . 6회 일치
         '''허준영'''(許准榮, [[1952년]] [[10월 23일]] ~ )은 대한민국의 제12대 [[경찰청장]]을 역임한 공무원으로 제4대 [[한국철도공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김해 허씨|김해]]이며,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이다.
         * 2009.3 ~ 2011.12 :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사장([[코레일공항철도]] 대표이사 겸임)
         * 2015.02~ 2016.2 : [[한국자유총연맹]] 중앙회장<ref> {{뉴스 인용|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2/26/2016022600239.html|저자=곽래건|제목=자유총연맹 회장선거… 親朴 김경재, 허준영 꺾었다|출판사=조선일보|날짜=2016-02-26|확인날짜=2016-03-16}} </ref>
         |직책 = [[한국철도공사]] 사장
         |임기 = 2009년 3월 19일 ~ 2011년 12월 21일
         [[분류:195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김해 허씨]][[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5급 국가공무원 공개경쟁채용시험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외교관]][[분류:건국대학교 교수]][[분류:경찰대학 교수]][[분류:홍익대학교 교수]][[분류:단국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경찰청장]][[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자유한국당 당원]][[분류:홍준표]][[분류:명지대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연구진 . . . . 5회 일치
          * Aeronatics(항공학): 아이콘은 프로펠러.
          * Aircraft Test(항공기 시험): 아이콘은 전투기와 프로펠러.
          * Avionics(항공전자공학): 아이콘은 프로펠러와 막대(?)
          * Airborne Training(공수 훈련): 아이콘은 프로펠러와 병사.
          * Caproni(카프로니)
  • 경순왕 . . . . 5회 일치
         경순왕은 이름이 부(傅)이며, [[신라 문성왕]](文聖王)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대아찬]](大阿飡)을 지낸 [[김효종 (신라)|김효종]]이고, 어머니는 [[신라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이다.<ref>성은 김(金)씨이다. 출처: 한국고대인명사전 - 헌강왕(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573670&cid=42953&categoryId=42953)</ref> [[927년]]부터 [[935년]]까지 재위하였다. 가계는 [[신라 문성왕]](文聖王)-상대등 '김안'(金安)-각간 '김민공'(金敏恭)-추존 의흥왕 '김실홍'(金實虹. 일명 仁慶)-추존 신흥왕 [[김효종 (신라)|김효종]](金孝宗)-경순왕(敬順王)으로 이어진다.
         그는 즉위 초 아버지 [[대아찬]](大阿飡)을 신흥왕(神興王)으로, 할아버지 각간(角干) 김실홍을 의흥왕(懿興王)으로 각각 추존하였다. 재위시에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따라서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ref name="nate01">[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128 경순왕:네이트 한국학]</ref>
         경순왕릉비는 [[1748년]](영조 24) [[연천 경순왕릉|경순왕릉]] 있근 경기도 연천군 장단면 고랑포 마을 민가에서 후손 [[경주 김씨]] 김빈(金礗)과 김굉(金硡) 등이 발견한 것으로, 비문 내용은 10여자 정도 남아 있는데 자연풍화 등으로 많이 훼손되어 거의 알아 볼 수 없다.<ref name="dk01"/> 이후 한국전쟁 당시 경순왕릉에서 300m 떨어진 고랑포리 시가 지역에 방치되어 오던 것을, [[1973년]] 고랑포 초등학교로 이전되었다가, [[1987년]] 경순왕릉 정화사업에 따라 현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비석의 재질은 대리석으로 크기는 높이 132cm, 너비 65cm, 두께 16cm 이며, 상태는 1면만 겨우 남아 10여개의 문자만 판독되고, 내용은 거의 알 수 없다.<ref name="dk01"/>
         * [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128 신라 경순왕:네이트 한국학]
         *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3TSR_A9999_1_0000320 경순왕: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
  • 권은희 (1959년) . . . . 5회 일치
         * 1984년 1월 ~ 1985년 12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데이터통신실 연구원
         * 2007년 5월 ~ 2009년 6월: (주)KT하이텔 파란포탈사업부문장(상무이사)
         * 2009년 7월 ~ 2010년 9월: (주)KT네트웍스 BIZ부문장(전무이사)
         * 2017년 7월 ~ 2018년 7월 : 한국여성의정 대구여성아카데미 원장
         * 2013년: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협회 공로패
  • 김상희 (가수) . . . . 5회 일치
         '''김상희'''(金相姬, 본명 : 최순강(崔順江), [[1943년]] [[3월 29일]] ~)는 [[대한민국]]의 가수이다.<ref>김상희는 예명이고, 본명은 최순강이다.</ref>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고, [[고려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1년]] 가수로 데뷔, [[1965년]]부터 활동하였다.<ref>처음 리사이틀 갖는 金相姬, 《경향신문》, 1970.1.17.</ref> [[1971년]] [[동양방송|TBC]] 가요대상, 1973년 제1회 대한민국방송가요대상 여자가수부문, [[1977년]] [[도쿄]] [[요요기 공원]]에서 열린 동경 국제 가요제에서 "즐거운 아리랑"을 부르며 특별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한국방송예술진흥원]]의 학장 및 [[한국교통방송]]의 DJ로 활동 중이다.
         * [http://media.daum.net/society/people/newsview?newsid=20090505141403841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57〉언제나 그모습 - 가수 김상희], 《한국일보》, 2009.5.5.
         {{토막글|한국 가수|한국 배우}}
  • 김성주 (기업인) . . . . 5회 일치
         [[1990년]] ㈜성주그룹을 설립, 글로벌 명품 패션브랜드인 [[구찌|Gucci]], [[Sonia Rikyel]], [[이브생로랑|YSL]]과 영국내 최고 패션 유통회사인 [[막스앤스펜서|Marks & Spencer]]를 국내에 런칭 하며 한국 패션산업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킨 중견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현재 한국 및 이태리 공방에서 제작한 명품을 전 세계 35개국에 수출하며 한국 패션 산업의 글로벌화를 이끌고 있다.
         개인의 신념이자 경영철학인 “Succeed to Serve", 사회환원기업 (Social Enterprise)으로써의 책임의식으로 2009년 ㈜성주재단을 설립, 기업의 순수익 10%를 적극적인 사회공헌활동으로 환원하며,
         그녀는 정직하고 투명한 기업경영을 통해 아름다운 자본주의의 모범이 되고, 중소기업과 젊은이,여성을 키워 글로벌 무대를 만들어 주겠다는 미션으로 진취적인 사업전개와 글로벌 활동을 펼쳐왔다. 세계의 주목을 먼저 받은 그녀는 한국여성으로는 최초로 2013년부터 Asia Pacific Economy Council의 ABAC (APEC Business Advisory Council) 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ref>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6/25/2013062502603.html</ref>
  • 김숙자 (1389년) . . . . 5회 일치
         '''김숙자'''(金叔滋, [[1389년]] [[8월 24일]] ∼ [[1456년]] [[3월 2일]])는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자배(子培), 호는 강호(江湖)·강호산인(江湖散人)으로 불렸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ref name="김숙자">《한국민족문화대백과》,김숙자(金叔滋),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선산 출신의 도학자이자 유학자이다. 야은 [[길재]](冶隱 吉再), [[윤상 (조선)|윤상]](別洞 尹祥)의 문인이다.
         * 「한국의 명문 종가」, 사림의 학맥형성과 그 특성, 이순형 저, 서울대학교출판부(2000년, 17~33p)
         * 「한국사 테마전」,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김경수 저, 돋을새김(2009년, 128~151p)
  • 김숭실 . . . . 5회 일치
         '''김숭실'''(金崇實, [[1981년]] [[4월 21일]] - )은 [[대한민국]]의 [[한국마사회]] 소속의 대한민국 여자 [[탁구]] 선수이다.
         * [[2001년 ITTF 프로 투어]] [[브라질 오픈]] 복식 2위
         * [[2003년 ITTF 프로 투어]] [[브라질 오픈]] 복식 3위
         * [[2005년 ITTF 프로 투어]] [[한국 오픈]] 단식 3위
  • 김옥이 . . . . 5회 일치
          | 기타 이력 = 숙명여자대학교 초빙교수 <br/> 한나라당 특임위원 <br/> 한나라당 행정위원 <br/> 한나라당 경기도 의회 의원 <br/> 한나라당 상임위원 <br /> 한나라당 국회의원 <br /> 새누리당 국회의원 <br/> 새누리당 전임위원 <br/>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이사장 <br/> [[자유한국당]] 보훈행정위원
         2013년 11월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 [[2013년]] 11월 ~ [[2017년]] 8월 :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이사장
         [[분류:대구달성초등학교 동문]][[분류:대구일중학교 동문]][[분류:194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여군 장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주 김씨]][[분류:대한민국 육군 대령]][[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여성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숙명여자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자유한국당 당원]][[분류:대구여자고등학교 동문]][[분류:동아대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동국대학교 동문]][[분류:친이]][[분류:친박]]
  • 김정수 (1991년) . . . . 5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4년]]
         '''김정수'''(金廷洙,<ref>한국야구위원회, 2014 가이드북</ref>, [[1991년]] [[4월 5일]] ~ )은 [[KBO 리그]] [[한화 이글스]]의 [[외야수]]이다.
         {{토막글|야구인}}
  • 마기/330화 . . . . 5회 일치
         [[마기]] 330번째 밤. '''함께 루프로'''
          * 신드바드는 국민들에게 자신의 이상을 어떻게 생각하냐 묻고, 사람들은 대찬성하며 "함께 루프로"가자며 감격에 겨운 눈물을 흘린다.
          * 야무라이하는 현재와 미래를 다 지키고 싶고 그러기 위해선 세상을 루프로 환원하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알라딘은 진심이냐고 묻는데 야무라이하는 자신은 진심이며 그들의 루프가 신들의 노예취급 받고 있다고 호소한다. 그런건 과거 매그노슈타트가 비마도사들의 마고이를 착취한 것과 다를바 없다고 말한다. 알라딘이 그래서 어쩌자는 얘기냐고 하자...
          >더 좋은 세상을 쟁취하기 위해 다 함께 루프로 돌아가자!
          * 시민들은 더이상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대환호. 전세계, 기계적으로 맞춘 것처럼 동시에 환호성이 번져간다. 그들은 "다 함께 루프로 돌아가자", "더 좋은 세상을 쟁취하기 위해서"라는 신드바드의 말을 찬양하듯 따라하며 박수를 치고 축하하며 감격에 겨운 눈물을 흘린다.
  • 마기/346화 . . . . 5회 일치
          * 알리바바는 패턴이 된 그의 질문을 건너뛰고 곧바로 "세상을 루프로 환원하는 거 보다 나은 방법은 없는가"라고 되묻는다.
          마치 암흑천지에 홀로 던져진 것 같은 고독. 알리바바가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한다. 그는 아르바 또한 신드바드의 동료가 됐으니 세상을 루프로 환원하는 일에 동의하는 거냐고 묻는다. 그런데 아르바의 태도는 무슨 쌩뚱맞은 소리냐는 듯 심드렁하다. 알리바바는 그녀가 딱히 신드바드에 찬동하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자 당황스러운 기분이다.
          * 이번만큼은 그 규칙이 깨진다. 알리바바는 시간도 없으니 이런 짓은 그만하라며 신드바드의 질문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세상을 루프로 환원하는 것도 그만하자. 그보다 나은 길은 없는가?"라고 되묻는다. 이런 전개에 아르바는 패턴을 깼다며 조금 놀라지만 신드바드는 별로 동요하지 않은 채 "없다"고 잘라말한다.
          그는 [[알라딘(마기)|알라딘]]에게 펼친 논리를 재탕 한다. 그가 여기까지 왔다는 것 자체가 솔로몬 대왕을 비롯한 "보다 높은 곳의 신"들의 의지다. 아울러 그의 "세상을 루프로 환원한다"는 정책에 동의하고 추종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신드바드가 두각을 드러낸 것이며, 신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이 거대한 섭리 앞에 알리바바 개인의 윤리관은 의미가 없다.
          신드바드가 이겨서 세상이 루프로 돌아간다. 그리고 알리바바가 이기면 솔로몬의 세계가 그냥 지속될 뿐이다. 어느 쪽이든 메리트는 없다. 그녀는 "이젠 뭐든 질색"이란 심플한 표현으로 정리한다.
  • 마기/350화 . . . . 5회 일치
          * 신드바드는 세상을 루프로 환원하는 마법을 완전히 정지시키고 알리바바 일행은 세상을 구하는데 성공한다.
          >세상을 루프로 환원하는 마법이다.
          각기 미궁을 돌파하고 바깥으로 나온 [[연백룡]]과 [[쥬다르]]. 그들은 갑자기 성궁 전체가 흔들리고 정오의 태양이 빠르게 저무는걸 목격한다. 모든게 루프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알라딘과 알리바바가 경악해서 그만두라고 외치는데 사실 이건 세상이 루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태양은 먼 산 위에 걸린 채로 멈춘다. 신드바드가 알리바바의 제안을 타당하다 여기고 작동시키고 있던 세상을 루프로 환원하는 마법을 정지시킨 것이다.
  • 문무왕 . . . . 5회 일치
         [[진덕여왕]] 4년([[650년]])<ref group="주">[[진덕여왕]] 4년부터 [[신라]]의 독자 연호가 아닌 [[당나라|당]]의 연호를 쓰기 시작했다.</ref>에 [[당나라|당]]에 사신으로 파견돼 [[당 고종|고종]]에게 〈[[한국의 삼국시대 시가#치당태평송|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을 바쳤다. 고종은 이를 가상히 여겨 법민에게 태부경(太府卿)이라는 벼슬을 내렸다.<ref name="삼국사기-650">《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진덕왕 4년(650)</ref> [[654년]] 아버지 [[김춘추]]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파진찬]]으로써 [[병부령]]직에 임명되었다.<ref name="삼국사기-661">《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1년(661)</ref> [[655년]] 태자로 봉해졌다.<ref name="삼국사기-655>《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2년(655)</ref> [[태종무열왕]] 7년([[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칠 때, [[김유신]]과 함께 5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멸망시켰다.<ref name="삼국사기-660">《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7년(660)</ref> 이어 [[태종무열왕]] 8년([[661년]]) 부왕이 승하하자 곧 즉위하였다.
         9년([[669년]]) 5월 천정군(泉井郡)·비열홀군(比列忽郡)·각련군(各連郡) 세 군의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9">《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9년(669)</ref>{{refn|group=주|이 기록을 통해 이 시기에 이미 비열성(비열홀)은 다른 두 성과 함께 신라 조정의 군이 설치되어 신라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당나라는 전략요충지인 비열홀을 [[안동도호부]]에 귀속시키고자 하였다.<ref name="이상훈">이호영·이상훈,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B%82%98%EB%8B%B9%EC%A0%84%EC%9F%81&ridx=0&tot=614 나당전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또한, 당은 [[웅진도독부]]를 설치해 백제 땅을 점거하고, 신라의 백성들을 웅진도독부 안으로 편입시키기도 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71"/> 신라 내부에선 “당은 [[왜국]]을 정벌한다는 명분으로 군함을 수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신라를 치려는 것이다.”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ref name="삼국사기-671"/>}} 같은 달, 급찬 기진산(祇珍山) 등을 당에 보내어 자석(紫石) 두 상자를 바쳤다. 또한 각간 김흠순과 파진찬 김양도(金良圖)를 당에 보내 사죄하게 하였다.{{refn|group=주|신라가 백제의 토지와 유민(遺民)을 취(取)한 것에 대해 당의 질책이 있었으므로 이를 해명하고자 하여 이들을 보낸 것이다. 흠순은 다음해 귀국하였으나 양도는 당나라에 억류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ref name="삼국사기-669"/>}} 겨울에는 당의 사신이 도착하여 신라의 쇠뇌 기술자인 사찬 구진천(仇珍川)을 당에 데려갔다.<ref name="삼국사기-669"/> 이는 당시 ‘천보노(千歩弩)’라고까지 불리며 쏘면 1천 보를 나간다는 소문이 퍼져 있던 신라의 쇠뇌 제작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 한국 해군의 [[DDH-976 문무대왕]]함은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의 제2번 함이다.
         [[분류:신라의 왕|문무왕]][[분류:신라의 군인|문무왕]][[분류:육군 장군]][[분류:신라의 작가]][[분류:신라의 외교관|김법민]][[분류:626년 태어남]][[분류:681년 죽음]][[분류:경주 김씨]][[분류:무속의 신]][[분류:한국의 장군]][[분류:불교도 군주|김법민]][[분류:병사한 사람]][[분류:영웅]][[분류:무속]][[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여당전쟁 관련자]][[분류:태종무열왕]][[분류:문무왕]]
  • 문성주 . . . . 5회 일치
         ||<:> '''프로입단''' || [[KBO 리그/2018년/신인드래프트|2018년 신인드래프트 2차 10라운드 97순위]] (LG 트윈스) ||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와 [[강릉영동대학교|강릉영동대]]를 졸업하고 [[KBO 리그/2018년/신인드래프트|KBO리그 2018년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해 2차 10라운드에서 [[LG 트윈스]]의 지명을 받아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6월 23일 시점까지 퓨처스에서 0.365로 높은 타율을 기록하고 있었고 [[김태형(1998)|김태형]]이 말소되면서 프로 데뷔 처음으로 1군으로 콜업되었다.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분류:1997년 출생]] [[분류:좌투좌타]] [[분류:외야수]] [[분류:포항시 출신 인물]]
  • 박강현 . . . . 5회 일치
         |소속사 = [http://www.theproactors.com/ 더프로액터스]
         '''박강현'''([[1990년]] [[2월 27일]] ~ )<ref>{{웹 인용 |제목= 171208 김주택 인스타라이브(미라클라스 단체 등장)|인용문=주민등록상 생일, 실제 태어난 날은 1989년 12월 27일이다}}</ref>은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이다. [[2015년]]에 뮤지컬 '라이어타임'으로 데뷔하였다. 크로스오버 남성 사중창 그룹을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인 [[팬텀싱어]] 시즌2에 출연하여 '''[[미라클라스]]'''의 멤버로 결승에 진출,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 2018년 SBS Power FM《박소현의 [[러브 게임 (라디오 프로그램)|러브 게임]]》
         * 2017년 《더프로액터스 콘서트》- 광림아트센터 BBCH홀
         * 2016년 《유메토모 한국 특별콘서트》- 백암아트홀
  • 박소연 (배우) . . . . 5회 일치
         '''박소연'''(SoYeon Park)은 [[대한민국]]의 뮤지컬배우이다.<ref>[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query=%EB%B0%95%EC%86%8C%EC%97%B0&sm=tab_etc&ie=utf8&key=PeopleService&os=161276 네이버 프로필]</ref>,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 경희대학교 연극영화과 외래교수 ( 2009년 ~ 2014년 )
         | 뮤지컬 || 마인 || 2009년
         | 뮤지컬 || 색즉시공 || 2009년
         | 뮤지컬 || 로미오 앤 줄리엣 || 2009년
  • 배장원 . . . . 5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3년]]
         '''배장원'''(裵章元<ref>한국야구위원회, 2013 가이드북</ref>, [[1990년]] [[5월 17일]] ~ ) 은 전 [[KBO 리그]] [[KIA 타이거즈]]의 [[외야수]]이다.
         [[분류:199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외야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KIA 타이거즈 선수]][[분류:대구남도초등학교 동문]][[분류:경상중학교 동문]][[분류:대구상원고등학교 동문]][[분류:홍익대학교 동문]]
  • 백대현 . . . . 5회 일치
         |소속 = [[한국기원]]
         |프로 입단 = [[1994년]]
         1994년 입단하였으며, 2010년 7월에 8단으로 승단하였다. 현재 [[한국바둑리그]] [[영남일보]] 소속의 선수이다.
         * [https://baduk.or.kr/info/player_view.asp?prpl_code=10000097 한국기원의 기사 정보]
         {{한국바둑리그}}
  • 빅터 차 . . . . 5회 일치
          한국계 미국인.
         조지 부시 행정부 시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담당 보좌관을 역임했다. 또한 워싱턴 소재 싱크탱크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 in Washington, DC) 한국 석좌로 있다.
         1959년 출생. 미국 이민자의 자녀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이다.
         아버지 차문영은 한국에서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콜럼비아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뉴욕에서 도자기, 자개, 병풍 등을 판매하는 기프트 가게를 열었으며, 동양 화병에 미국제 갓을 얹고 중국제 나무로 받침대를 한 --기괴한-- 동양램프라는 상품을 백화점에 납품하여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차문영은 2001년까지 40년간 아시아하우스를 운영하고, 2005년 타계했다.
         그의 부인은 군인,정치인 김식의 딸이다. 김식은 전남 강진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를 나왔으며 [[전두환]], [[노태우]]와 육사 동기이다. 군에서 소장으로 전역했으며, 11대, 12대 국회의원([[민주정의당]])으로 당선됐다. 13대에서는 낙선했고, 14대에서는 [[민주자유당]], 15대에서는 [[신한국당]]에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했다.[[http://ko.pokr.kr/person/1933151 (참조)]] 13대에서 낙선한 이후로 농림수산부 장관을 역임했다.
  • 상디 . . . . 5회 일치
         ||||<tablealign=center><#DCDCDC><:> 프로필 ||
         || 한국판[* 한국판에서는 무려 세 명의 성우가 맡았는데, 각 성우의 해석이 조금씩 달라 어느 쪽이 낫다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대체적으로 김일의 해석이 더 디테일하고 맛깔난다는 의견이 많다. 그래서 쓰레기 퀄리티로 욕먹는 ~~대~~원피스 Original에서 유일하게 건질 만한 게 김일의 상디라는 말까지 나왔다. ~~여기에 11기에서 [[브룩(원피스)|브룩]]에 [[이인성(성우)|이인성]]이 캐스팅되면서 건질 게 더 늘었다~~ 다만 투니판을 맡은 박성태 버전도 꽤 괜찮은 연기로 호평이 많다. 양석정 버전은 특유의 음색 탓인지 셋 중 가장 평이 좋지 않다.] || [[이유리(성우)|이유리]](대원방송), [[김영은]](투니버스), [이현주(성우)|이현주](KBS) || [김일(성우)|김일](KBS, 대원방송), [[양석정]](KBS)[* 성우 교체에 얽힌 이야기가 참 복잡한데 2006년경 터진 [[흑역사가 된 것들/성우#s-1.1|KBS 성우 스캔들]]로 인해 김일을 포함한 3명의 성우가 6개월에서 1년의 자격 정지를 당해 양석정으로 교체되었고 투니버스에서 방영될 때쯤에는 김일의 자격 정지는 풀렸지만 성우 본인이 투니버스 출연을 거부하고 있어서 결국 박성태에게 넘어갔다.], [[박성태]](투니버스) ||
         어렸을 때부터 '''어른스럽게 보이겠다'''는 이유로 무리해서 담배를 피우다 결국 골초가 됐는데도 미각이 전혀 둔해지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거기다가 그렇게 담배를 피워대면 손에 담배 냄새가 흥건히 묻어서 요리에도 냄새가 베일 텐데도 그런 묘사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위의 프로필에서 쵸파가 상디에게 느껴진느 향기는 담배와 해산물 냄새라고 되어있는데, 수트에는 담배 냄새가 베어있어도 요리전 손의 위생 관리에는 철저한 모양] 또한 담배는 해상레스토랑에서 일을 했고 항상 항해생활을 해야되사 시중에서 구입하기 보단 직접 제작하는듯 하다.[* 클리크와의 전투후 루피를 간호하느라 상디의 방이 나왔는데 담배를 직접 제작한 흔적이 어렴풋이 보인다. 그리고 [샤키]처럼 담배를 피는 또 다른 캐릭터들의 담배와 비교해봐도 형태가 좀 다르다. 일반 담배와 달리 만드는 담배 특유의 약간 찌그러진 모양이 묘하게 리얼하다.] 더불어 수영의 달인으로서 [[어인]]과 맞붙을 수 있을 정도의 폐활량까지 갖추고 있으니 필시 원피스의 담배 자체가 현실의 담배와 다른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상디의 과거회상에서 담배를 처음 피우는 상디를 보고 제프가 "관둬. 담배 같을걸 피우면 혀가 돌아버린다."라고 한마디 하는 장면을 보면 또 그렇지도 않은게...거참. ~~아니면 상디의 미각과 폐활량이 패기를 쓸 줄 알거나~~]
         ~~한국팬덤 한정으로 얘도 [[D(원피스)|D의 일족]]이란 우스갯소리도 있다. 상 D.?~~
  • 서상일 . . . . 5회 일치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09년 [[안희제]]·[[김동삼]]·[[윤병호]]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한때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며, [[1945년]] 8·15광복 후에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장덕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설하고, 사실상 집단지도체제하의 정당의 최고위원이라 할 수있는 8총무단의 일원으로 선임되었다.
         * [[한국민주당|한민당]]
         |소속정당 = [[한국민주당]]
         [[분류:대한제국의 사회 운동가]][[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분류:대한민국 제2공화국]][[분류:호헌동지회]][[분류:윤보선]][[분류:윤치호]][[분류:조봉암]][[분류:장택상]][[분류:민주당 (대한민국)]][[분류:진보당 (대한민국) 정치인]][[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대구 서씨]][[분류:간 질환으로 죽은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소냐(가수) . . . . 5회 일치
          * 상위 문서: [[가수/한국]],
         [[대한민국]]의 여성 [[가수]]이자 뮤지컬 배우. [[주한미군]]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 예능 프로그램 ===
          * 2004년 제10회 한국뮤지컬대상 여자신인상
         [[분류: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역대 출연자]][[분류:한국 여가수]][[분류:김천시 출신 인물]][[분류:1980년 출생]][[분류:1999년 데뷔]]
  • 송남헌 . . . . 5회 일치
         [[대구사범학교 (1923년)|대구사범학교]] 졸업하고 교사로 지냈다. 일제강점기 말기 [[경성방송국]]에 근무하던 조선사람이 단파통신을 통해서 [[1943년]]에 있었던 [[얄타회담]]에 관한 소식, 그리고 [[이승만]]박사 등의 외국에서의 한국독립운동에 관한 소식을 듣고 친지들에 전한 것을 들은 죄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 사건이 [[단파방송 밀청 사건]]이다.
         광복 후 해방정국에는 [[한국민주당]]에 입당했다가 [[1946년]]부터 [[미군정]] 입법의원인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직에 있던 독립운동가 [[김규식]] 비서장을 지내고 우파를 대표하는 김규식, 좌파를 대표하는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우파 진영 위원회의 비서로 지냈다.
         * [[한국민주당]]
         [[분류:1914년 태어남]][[분류:2001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사]][[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한국의 통일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 송정현 . . . . 5회 일치
         |클럽팀 최신 업데이트 날짜=[[2009년]] [[1월 1일]]
         |국가대표팀 최신 업데이트 날짜=[[2009년]] [[1월 1일]]
         [[1999년]] [[경북 드래곤즈]]에 입단하였으나, 그 해 발목 부상을 입어 재활 치료를 받다가 [[2000년]] 복귀하였다. 하지만 [[2001년]] 다리 부상을 입어 시즌이 끝난 뒤 방출되었고, 이후 1년 간 무적 신분으로 지내다 [[2003년]] 당시 신생 팀이자 연고 팀인 [[대구 FC]]에 창단 멤버로 입단하였다. [[2006년]] 친정 팀 [[전남 드래곤즈]]로 복귀하여,<ref>[http://www.dragons.co.kr/news/news.asp?mode=view&category=&boardcode=tb_board_news&idx=6157 송정현, 진순진 영입]</ref> [[2006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하였고,<ref>[http://www.segye.com/Articles/Spn/Sports/Article.asp?aid=20061203000144&cid=0101110300000&dataid=200612031710000231 전남, 9년 만에 FA컵 품었다…송정현·김태수 연속골]</ref> [[2007년]] [[포항 스틸러스]]와 결승전에서 2골을 기록하는 등<ref>[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0712021657372235 '혼자 2골' 송정현, FA컵 2연패 가능케 한 전남의 영웅 ]</ref> [[FA컵 (대한민국)|FA컵]] 2연패에 큰 공헌을 하였다. [[2009년]] [[FA]]로 풀린 송정현은 [[울산 현대 호랑이]]로 이적하였으다.<ref>[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0903221500532234 울산, FA 송정현 긴급 수혈…전반기 단발 계약]</ref>
         * [[2009년]] {{국기그림|대한민국}} [[울산 현대 호랑이]]
         * [[2009년]] ~ [[2011년]] {{국기그림|대한민국}} [[전남 드래곤즈]]
  • 아메리카 퍼니스트 홈 비디오 . . . . 5회 일치
         America Funniest Home Video. 미국의 TV 프로. 시청자들이 보낸 홈비디오를 모아서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영상 대부분에 사회자가 코멘터리인지 나레이션인지 모를 무언가를 하는데 미국식 말장난이 대부분이라 한국인들은 이해 못 한다.
         옛날에는 대한민국 공중파에서도 틀어줬다. 독립된 방송은 아니고 어떤 쇼 프로의 한 코너로. 지금은 FOX 채널에서 볼 수 있다.
         [[분류:TV 프로그램]]
  • 아키즈키 리츠코 . . . . 5회 일치
         [[아이돌 마스터]]의 등장인물. 765 프로덕션의 아이돌 겸 프로듀서.
          * 사실 리츠코가 전업 프로듀서로 나온건 2와 애니마스 뿐. 하지만 2차 창작에서는 대부분 전업 프로듀서다. 왜일까 원포올에서 복귀했음에도 복귀를 그리는 작품이 드물다.
          * 대부분의 2차 창작에서 상식인 역할을 맡고 있지만, 사실 디어리 스타즈의 세계관을 적용하면 리츠코는 사촌 남동생을 여장시켜서 아이돌로 만들어버린 코토리도 소름끼쳐할 변태다. 디어리 스타즈가 상당히 흑역사이기는 한데 아무튼 이쪽도 존재 자체는 어느 정도 인정되고 있으므로, 이 점은 대부분의 세계관에서 변하지 않게 된다. 765프로덕션에서 숨은 최강 변태.
  • 안종범 . . . . 5회 일치
         |정당 = [[자유한국당]]
         * 1992 . 08 : 한국조세연구원 연구위원
         * ~ 1996 . 09 : 한국조세연구원 연구조정부장
         * 2008 . 03 ~ 2010 . 09 : 한국재정학회 회장
         [[분류:195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순흥 안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계성고등학교 (대구)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위스콘신 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경제학자]][[분류:성균관대학교 교수]][[분류:박근혜 정부]][[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분류:자유한국당 당원]][[분류: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자]]
  • 에릭 (가수) . . . . 5회 일치
         에릭(Eric Moon, 문정혁)은 대구에서 1남 2녀중 막내로 1979년 2월 16일에 태어났다. 그는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은 했으나 바로 몇 개월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미국에서를 졸업했다. 그는 미국에서 캐스팅되어 한국으로 귀국해 [[SM 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이 되었다. 그는 연습생이었을 때 [[앤디 (가수)|앤디]]와 같이 [[S.E.S.]] 1집 수록곡인 'I'm your girl' 랩 피쳐링을 하였으며, [[S.E.S.]]와 같이 무대에 오르기도 하였다. 에릭은 [[1998년]]에 [[신화 (음악 그룹)|신화]]에서 영어 랩을 담당하는 이국적인 외모 이미지로 데뷔를 하였다.
         * 2019년 [[MBC Every 1]] 《[[세빌리아의 이발사 (텔레비전 프로그램)|세빌리아의 이발사]]》
         * [[2016년]] 장미쉘바스키아, 한국오츠카 우르오스, CJ비비고(육개장, 만두등), 농심 보글보글 부대찌개라면
         * [[2017년]] 리니지2 레볼루션, 장미쉘바스키아, 한국오츠카 우르오스, 쉐보레 스파크
         * 2004 [[한국광고주대회]] 광고주의 밤 시상식 광고주가 뽑은 좋은 모델상
  • 요시다 세이지 . . . . 5회 일치
         1992년 방한하여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사죄하기도 했다.[[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2/1747454_19402.html (MBC뉴스)]]
         요시다 세이지는 1943년 부터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전남, 경남, 제주 등에서 끌고간 한국인 징용자의 숫자는 종군위안부 1000명을 포함하여 6000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그의 저술에서는 "종군위안부 징용은 한 마디로 노예사냥이었다. 끌려가지 않으려는 여자들을 후려갈겨 트럭에 강제로 태우고, 울며 매달리는 젖먹이를 억지로 떼어냈던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고 되어 있다.
         1993년 6월 요시다 저서를 바탕으로 제주도를 조사한 한국정신대연구소 전 연구원 강정숙은, 요시다 증언과 합치하는 증언을 현지에서 찾을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
         아사히 신문은 2014년 4~5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70대 후반에서 90대까지 약 40여명을 취재했다. 이 과정에서 요시다 증언의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건어물 제조 공장에서 수십명의 여성이 사라졌다"고 기록한 제주도 북서부의 마을에서는, 생선을 다루는 공장이 1개 박에 없었고 경영자의 아들은 "통조림 밖에 만들지 않았다. 여자 종업원이 사라진 일은 없다."고 증언했으며, 요시다 세이지가 '초가지붕'이라고 썻던 공장의 지붕은 한국에서 당시 수산산업을 연구했던 리츠메이칸대학 역사지리학 전공 가와하라 노리후마 교수에 따르면 함석판과 기와로 되어 있었다.[* 원래 제주도는 바람이 강하고, 벼농사가 되지 않아 초가집이 적었다.]
         사실, 요시다 증언의 영향은 한정적이다. 위안부 문제에 관련된 증거는 요시다 증언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1993년 고노 담화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요시다 증언을 참조하지 않았으며, 이는 1991년 1월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 동원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음을 증명하는 일본 정부의 내부 문서를 아사히 신문이 공개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1991년 8월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가 첫 공개 증언을 하면서, 한국은 물론 동남아에서도 피해자 증언이 잇따르게 되었다.
  • 유태웅(탤런트) . . . . 5회 일치
          * 관련 문서: [[배우/한국]]
         || [[2009년]] || [[KBS2]] || [[결혼 못하는 남자#s-2|결혼 못하는 남자]] || 문석환 || ||
         || [[2014년]] || [[백프로]] || 강프로 || ||
         [[분류:한국 남배우]][[분류:라디오 스타의 역대 게스트]][[분류:1972년 출생]][[분류:1994년 데뷔]][[분류:1대 100 역대 1인]][[분류:세종특별자치시 출신 인물]]
  • 유한식 . . . . 5회 일치
         ||<height=40><bgcolor=#C9151E> {{{#FFFFFF ''' 현직 ''' }}} ||<(> [[한국농어촌공사]] 감사 ||
         ||<height=40><bgcolor=#C9151E> {{{#FFFFFF ''' 소속 ''' }}} ||<(>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 ||
         ||<height=40><bgcolor=#C9151E> {{{#FFFFFF ''' 경력 ''' }}} ||<(> [[한국농어촌공사]] 감사[br][[새누리당]] 세종시당 위원장[br]제1대 [[세종특별자치시장]][br]제35~36대 [[연기군]]수[br]연기군청 농업기술센터 소장[br][[충청남도]]청 농촌진흥원 사회지도과장[br][[농촌진흥청]] 농촌지도관[br]농촌진흥청 기술공보담당관 ||
         이후 [[한국농어촌공사]] 감사에 임명되어 정치계와는 좀 거리를 두고 활동하고 있다.
  • 윤덕홍 . . . . 5회 일치
         2014년 4월 28일 윤덕홍이 서울시교육감 예비후보로 등록한 당일 《머니투데이》는 윤 전 부총리가 문용린 현 교육감과 고승덕 변호사, 조희연 교수를 모두 앞서고 있다고 보도했는데, 이 여론조사는 윤덕홍이 《한국인텔리서치》에 의뢰하여 조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인텔리서치》가 중앙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에 등록한 조사대상 및 표본크기에 의하면, 응답률이 3.0%에 60대 이상이 530명으로 전체 표본의 52.4%를 차지하고 있고, 20~30대는 116명, 40대 130명, 50대 234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6191"뒤늦게 서울교육감 출마 선언한 윤덕홍, 이건 아니다"] 오마이뉴스 2014년 4월 30일</ref>
         대개 여론조사기관은 여론조사 결과를 홈페이지에 공표하는데, 《한국인텔리서치》는 "담당자가 없다. 현재 홈페이지 개발 중"이라며 설문조사 문항을 공개하지 않았다. <ref>[http://www.redian.org/archive/70041 "윤덕홍 전 부총리, 교육감 출마와 동시에 지지율 1위?"] 레디앙 2014년 4월 28일</ref>
         * 2000 ~ 2002 : 한국시립대학교 총장협의회 부회장
         * 2004 ~ 2007 : 한국학중앙연구원장
  • 이강덕 . . . . 5회 일치
         ||<bgcolor=#C9151E> '''{{{#FFFFFF 소속 정당}}}''' ||<(> '''[[자유한국당|{{{자유한국당}}}]]''' ||
         [[대한민국]]의 [[경찰공무원]] 출신 [[정치인]]이다. 현재 [[자유한국당]] 소속 포항시장이다.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 후보로 포항시장 선거에 출마하였다 여론조사 상으로는 5% 안팎의 치열한 접전이 예상되었고, 실제로도 불과 7.7% 차이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 2018 || [[제7회 지방선거]] (경북 포항시장) || [[자유한국당]] || '''127,592 (50.1%)''' || '''당선(1위)''' || '''재선''' ||
  • 이광훈 (축구선수) . . . . 5회 일치
         [[2012 K리그 드래프트]]에서 [[포항 스틸러스]]에 우선지명되며 팀에 입단하였는데, [[포항 스틸러스|포항]]에서 우선지명 고교 선수가 대학을 거치지 않고 프로팀으로 직행한 것은 [[2006 K리그 드래프트|2006년]] [[신광훈]] 이후 2012년의 이광훈, [[문창진]], [[문규현 (축구 선수)|문규현]]이 처음이었다.
         [[K리그 클래식 2013|K리그]]에서는 4월 13일 6라운드 [[경남 FC]]와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그라운드를 밟았다. [[K리그 클래식 2014|2014 시즌]]에는 차츰 출전을 늘려가는 듯 보였으나,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며 8월 이후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ref>{{뉴스 인용 |제목='대전 임대' 이광훈, "매 경기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뛰어야죠" |url=http://sports.hankooki.com/lpage/soccer/201501/sp2015010809201993650.htm |출판사=스포츠한국|date={{날짜한글화|2015-01-08}} }}</ref>
         [[2012년 AFC U-19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여 대한민국의 8년 만의 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특히 이란과의 8강전에서는 결승골을 성공시켜 한국의 4:1 승리에 기여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AFC U-19챔피언십)한국, 이란 꺾고 4강 진출 |url=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a_match&ctg=news&mod=read&office_id=003&article_id=0004822065 |출판사=뉴시스 |date={{날짜한글화|2012-11-12}} }}</ref> [[2013년 FIFA U-20 월드컵]]에 참가하여 대한민국의 8강 진출에 기여하였으며, 이라크와의 8강전에서는 후반 5분 동점골을 성공시켰고,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키커로 나왔으나 실축해 한국의 4강 진출이 실패되었다 .<ref>{{뉴스 인용 |제목=(U-20 월드컵) 빛나는 용병술, 이광훈 천금 동점골...현재 2-2 |url=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a_match&ctg=news&mod=read&office_id=139&article_id=0002001848 |출판사=스포탈코리아 |date={{날짜한글화|2013-07-08}} }}</ref>
  • 이열희 (1924년) . . . . 5회 일치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한국 전쟁]]
         === 한국 전쟁 당시 ===
         [[미국]] 제25육군병원에서 [[하버드 대학]] 출신인 [[치과]]전문의 [[마틴 D. 해치]](Martin D. Hatch) 박사의 지도 하에 악안면 [[성형외과]]를 수학하였다. 이후 그는 육군 제1병원에 근무하였으며, 제1병원 재직 중 악안면성형 및 구강외과를 창설했다. 당시엔 전쟁 당시 발생한 부상이나 상처 등으로 턱, 안면 등에 변형이 생긴 환자들이 있었다. 그의 성실성을 높이 평가한 [[마틴 D. 해치]]는 [[한국]]을 떠나기 전 그에게 수술할 때 사용했던 소수술기구와 성형외과학서적 5권을 그에게 특별히 선물해주기도 했다. 이후 그는 [[1953년]] [[경북대학교]] 의과 대학 치의학과를 졸업하였다.
         [[1954년]] 군의관으로 재직 중 최영보 중령(국군제1병원 외과부장겸 수련부장), 오상근 대위(국군제1병원 정형외과 과장), 허경발 대위(주한미군의무관실 연락장교) 등의 주선과 도움으로 [[미국]]으로 유학, [[한국]]의 치과 군의관 신분으로 [[미국]] [[하버드 대학]]의 [[성형외과]] 수련 과정을 이수하고 귀국하였다.
         [[분류:1924년 태어남]][[분류:2012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참전유공자]][[분류:대한민국의 치과 의사]][[분류:대한민국의 외과 의사]] <!--[[구강 성형외과]] 의사-->[[분류:경북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의학자]][[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 육군 대위]][[분류:대한민국의 군의관]][[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서울대학교 치과대학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기갑학교 동문]][[분류:육군기계화학교 동문]][[분류:육군포병학교 동문]][[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육군공병학교 동문]][[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경북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주 이씨]]
  • 이종혁 (배우) . . . . 5회 일치
         1993년 연극배우 첫 데뷔한 그는 이후 1998년 영화 《[[쉬리 (영화)|쉬리]]》로 데뷔하였고 2004년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로 이름이 알려졌다.<ref>{{뉴스 인용 |제목 = 이종혁, '엄마의 공책: 기억의 레시피'로 스크린 복귀|url =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2&aid=0002864179|출판사 = 헤럴드POP |저자 = |날짜 = 2016년 11월 8일|확인날짜 = }}</ref> [[2002년]] [[6월 4일]] 최은애와 결혼식을 올려 장남 이탁수([[2003년]] 출생), 차남 이준수([[2007년]] 출생) 두 아들을 두었다. 2013년 MBC 예능프로 '[[아빠! 어디가?]]'에 출연하여 국민적 사랑을 받으며 '국민 아빠'로 불리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 '엄마의 공책'..이종혁, 철부지 아들로 변신 |url = http://entertain.naver.com/movie/now/read?oid=109&aid=0003723802|출판사 = OSEN |저자 = |날짜 = 2018년 2월 22일|확인날짜 = }}</ref>
         * [[2009년]] [[SBS]] 미니시리즈 《[[천사의 유혹]]》 - 정상모 역 (특별출연)
         * [[2009년]] 《레인맨》 - 찰리 바비트 역
         * [[2012년]] [[MBC]] 《[[해피투게더 (텔레비전 프로그램)|해피투게더]]》 - 274회 벽을 뚫는 남자 팀
         === 라디오 프로그램 ===
  • 이중환(법조인) . . . . 5회 일치
         [include(틀:프로젝트 문서, 프로젝트=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프로젝트)]
          * 2009년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예금보험공사 금융부실책임조사본부 본부장 파견)
         ||<-6> [[박근혜정부]] · [[새누리당]] · [[친박]] · [[미르재단]] · [[K스포츠재단]] · [[더블루K]] · [[비덱]] ·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 [[팔선녀(단체)|팔선녀]] ·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 [[삼성그룹/비판 및 문제점#s-10|삼성그룹]]([[삼성전자 승마단]]) · [[국민연금공단]] · [[이화여자대학교/사건사고|이화여자대학교]] · [[영세교]] · [[알자회]] · [[고령향우회]] · [[통일교]] · [[일베저장소]] · [[대한민국어버이연합|어버이연합]] · [[대한민국 엄마 부대|엄마부대]] · [[박사모]] · [[아프리카TV/사건사고#s-1.10|아프리카 TV]] · [[주식갤러리#s-2.5|주식갤러리]] · [[JTBC]] · [[회오리축구단]] · [[워마드]] ||
  • 이철희(1964) . . . . 5회 일치
         한때 [[청와대]] 행정관으로 근무한 적도 있고, 중앙 정계의 언저리를 있으면서 민주당 쪽 정치인들과도 두루 인연을 쌓았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그리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다. 두문정치전략연구소라는 작은 정치 컨설턴트 사무소의 소장으로 여러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한 바 있으나 역시 그의 인지도를 전국적으로 높여준 건 [[JTBC]] [[썰전]]이다. 이 시기 보수 진영의 패널을 맡았던 [[강용석]]과 더불어 진보 진영의 패널로서 ~~열심히 MB를 까며~~ [[썰전]]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2012년 대선 정국 당시, 한겨레 TV의 [[김어준의 뉴욕타임스]]에 출연해 [[김어준]]과 날선 토론을 벌여 김어준의 눈에 띄게 되었고[* 이 시기 이철희보다 먼저 출연하였고, 이름을 알렸던 인물이 바로 [[김용민(1974)|김용민]]의 소개로 출연하였던 [[고성국]]이다. 그리고 고성국이 친박 성향을 확연히 드러내면서 빠진 자리를 이철희가 메웠다.], 그 후 고정 패널로 안착하여 대선이 끝나고 프로그램이 없어질 때까지 출연하게 된다.
         12월 24일 [[새정치민주연합]]이 이 소장을 내년 4월 총선을 진두지휘할 총선기획단장으로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했고, 다른 기사에선 성사 직전까지 왔다고 한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oid=057&aid=0000865862|#]]
          * [[경상도]] 사투리 억양을 가진 편임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고 정확한 발음이나 발성, 톤 조절 등 기초적 발언 능력이 상당히 뛰어날 뿐만 아니라, 토론에서의 치고 빠지는 타이밍(?)[* 평론가 시절 방송 토론에서 --노답-- 상대가 억지 논리로 나올 때도 이철희는 처음엔 참고 있다가 자신에게 유리한 시점(큰 헛점이 표출될 때)에 치고 나오며, 막판에 상대와 같이 깽판을 치더라도 상대 빈틈을 파고들 타이밍을 안 놓치고 맹공격하곤 했으며, 상대의 억지 논리를 그대로 이용하여 받아치는 것도 정확한 타이밍을 잡아 왔고, 역으로 소위 막가는(?) 언쟁을 끝낼 때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칼같이 끊어버리곤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가 봐도 상대가 먼저 깽판을 쳤고, 이철희는 그에 잘 맞섰다는 인상을 주었다. --상대는 콧김만 씩씩, 사회자는 그냥 멘붕--] 설정 능력, 짧은 시간에 상대 논리의 빈틈을 찾아내는 능력, 상대와 상황에 맞춰서 발언 스타일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기술이 탁월하여, 농담으로 '말 못하는 사람도 토론은 잘 한다'[* 말투가 어눌하거나 목소리 톤이 별로거나 하는 등 대화에 불리한 조건을 가진 사람조차도 상대의 뜻을 빠르고 정확히 찾아내어 자신의 목적에 적합한 문장을 구성하고, 그 상황에 맞는 비언어적 표현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단점들을 극복하고 부드럽게 대화하는 능력은 뛰어나다는 뜻이다. 즉, 언어라는 요소만을 이용해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것에는 그 사람만의 [[포스]]나 [[카리스마]]도 포함된다. 한국 근대 민주화의 뿌리였던 [[김대중]]은 대통령 시절 연예인들이 그 말투를 흉내내어 당대에 가장 유행한 개그 패러디 소재가 되었을 정도로, 발음이나 말투가 매력적인 편이 아니었음에도 평생 수많은 진보 인사들을 연설과 대화로 매료시켰던, 한국 정치사 최고의 웅변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대한민국사 최초의 [[필리버스터]]도 김대중이 했다.) 그와 대화했던 정치인들의 경험담들을 보면 짧은 문장에도 힘이 실려있었다고 한다. '우리 박동지가 날 좀 도와줘야겠어'라는 말 한 마디에 사람이 움직인다는 것은 말을 못해도 말을 잘한다는 개념과 일치한다. 물론 이런건 김대중처럼 정치인생의 험난한 경험과 그런 고난들을 수없이 극복한 뒤에만 얻어지는 절대적 카리스마가 많이 쌓여야만 가능한 것으로, 초선의원 이철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분야다.--원래 말 잘하는 사람은 그냥 말 잘하면 된다--]는 소리도 있는 스피킹의 달인들이 모인 정치인 집단들 중에서도 정상급이다.
  • 장우혁 . . . . 5회 일치
         * [[2011년]] [[KBS 2TV|KBS2]] 《[[해피투게더 (텔레비전 프로그램) |해피투게더]]》
         * [[2011년]] [[KBS 2TV|KBS2]] 《[[시크릿 (텔레비전 프로그램) |시크릿]]》
         * [[2019년]] [[TV조선]] 《[[연애의 맛 (텔레비전 프로그램) |연애의 맛]]》
         === 가요 프로그램 1위 ===
         * [[2000년]] ~ :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마약퇴치 홍보대사
  • 장혁주 . . . . 5회 일치
         '''장혁주'''(張赫宙, <small>일본식 이름:</small> 野口稔('''노구치 미노루'''), 野口赫宙('''노구치 가쿠추'''), [[1905년]] [[10월 13일]] ~ [[1998년]] 2월)는 [[한국]]의 소설가, 문학평론가로, 본명은 '''장은중'''(張恩重)이다.
         일본 문단에서 활동하던 장혁주는 [[1933년]] 장편 《무지개》로 한국 문단에도 선을 보였다. 도시를 배경으로 한 《무지개》도 초기의 사실주의적 작풍이 살아 있는 작품이나, 이후 남녀간의 복잡하게 얽힌 애정 관계가 묘사된 《삼곡선(三曲線)》(1934~1935) 등 점차 통속적인 경향의 소설을 발표했다. 이 무렵 평론가로도 활동했다.
         |제목=한국현대문학대사전
         [[분류:1905년 태어남]][[분류:1998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소설가]][[분류:일제 강점기의 문학 평론가]][[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한국계 일본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재일 한국인]]
  • 전종화 . . . . 5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87년]]
         |드래프트 순위 = [[1987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1987년]] 2차 2순위([[롯데 자이언츠]])
  • 조진호 (축구인) . . . . 5회 일치
         조진호는 [[대륜고등학교]] 재학 시절 일찌감치 재능을 인정 받아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남북단일팀에 선발되었다. 당시 대표팀의 공격진은 대부분 북한 선수들이었지만, [[서동원]]과 더불어 남한선수로는 유일하게 대표팀의 공격진을 이끌었으며, 대표팀의 8강 진출에 공헌하였다. 실력을 인정받은 조진호는 [[1992년 하계 올림픽|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축구대표팀에 선발되며 당시 최연소 한국올림픽 축구대표팀 선발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1993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본선에 2회 연속 출전하였으며, [[1994년 FIFA 월드컵|미국 월드컵]] 대표팀에 선발되였으며, [[카메룬 축구 국가대표팀|카메룬]]과의 월드컵 직전 두차례 평가전서 연속골을 기록하며 많은 주목을 받았고, 조별리그 3라운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독일]]전에 [[서정원]]과 교체로 출전하였으며, [[구이도 부흐발트]]의 전담 마크맨으로 활약했으나, 한국의 2:3 패를 피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1994년 아시안 게임|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본선 출전하였지만,끝내 한국은 4강에서 떨어졌고, [[1996년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 선임된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은 한국 축구의 체질개선을 선언하였고,좋은 체격조건을 가진 선수를 추구했던 탓에 조진호의 대표팀에서의 입지는 줄어들었으며, [[1995년]] 다이너스컵 출전을 앞두고 [[아나톨리 비쇼베츠]]의 기용방식에 불만을 품고 올림픽대표팀 합류 거부 파문을 일으켰고, 황금기를 열지도 못한채 6개월 선수 자격정지와 함께 축구팬들의 외면을 받아고, 부상으로 인해 포항에서조차도 [[고정운]],[[박태하]]등에 밀렸으며, [[2000년]] [[제주 유나이티드|부천 SK]]로 이적하였다.
         이틀 뒤인 [[2017년]] [[10월 10일]]에 화명동 [[부산 아이파크]] 숙소를 나서다 상주 시절부터 좋지 않았던 심장에 심적 부담이 더해진 것이 원인이 되어 급성 [[심장마비]]로 쓰러져 병원에 후송됐지만, 끝내 향년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빈소는 양산부산대학교병원 장례식장 특 2호실에 마련되었으며, 발인은 12일 오전에 이루어졌다.<ref name="sportschosun_2017-10-10_death">{{뉴스 인용 | 저자=박찬준 | 뉴스=스포츠조선 | 제목=[속보]조진호 부산 감독, 심장마비로 사망 | url=http://sport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076&aid=0003160548 | 날짜=2017-10-10 | 확인날짜=2017-10-12 | 보존url=https://archive.today/20171012131826/http://sport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076&aid=0003160548 | 보존날짜=2017-10-12 | 깨진링크=아니오 }}</ref><ref name="yonhapnews_2017-10-10_death">{{뉴스 인용 | 저자=김태종 | 위치=서울 | 뉴스=연합뉴스 | 제목=프로축구 부산 조진호 감독 심장마비 별세(종합2보) | url=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0/10/0200000000AKR20171010097452007.HTML | 날짜=2017-10-10 | 확인날짜=2017-10-12 | 보존url=https://archive.today/20171012131801/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10/10/0200000000AKR20171010097452007.HTML | 보존날짜=2017-10-12 | 깨진링크=아니오 }}</ref> 그의 유해는 김해 화장장에서 화장된 뒤 [[경기도]] [[광주시 (경기도)|광주시]] 추모공원에 안장되었다.
  • 조청희 . . . . 5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1.6 ~ 2011.8 :몽골야구협회 유소년 야구팀 수석 코치 / [[한화 이글스]] 트레이닝 코치
         [[분류:196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대구초등학교 (대구) 동문]][[분류:경운중학교 (대구) 동문]][[분류:충암고등학교 동문]][[분류:건국대학교 동문]][[분류:조씨]]
  • 주다영 . . . . 5회 일치
         * [[2014년]] [[OCN]] 일요드라마 《[[닥터 프로스트 (드라마)|닥터 프로스트]]》 ... 박한솔 역
         * 《[[그림자 살인]]》 (2009년) - 옥이 역
         * 《[[백야행 (영화)|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 (2009년) - 이지아 역 ([[손예진]] 아역)
         * 1997년 잡지 모델로 시작해 베비라 모델 ,비유와상징, 농협 아름찬 김치, 데이콤 08217, 우리은행, 해태제과 베스트 원 아이스크림, 페브리즈, 한국통신, 맥도날드, LG 휘센에어컨, 대교, 하나은행, 삼환 아파트, 마몽드, 장인가구, 풍성건설, 아디다스, 톰키드, 원아동복, 블루독, 정상어학원, 소니 핸디캠, LG CNS, 메이크업 포에버, 간지(GanGee) 2013년 12월호 표지모델, CAMPUS JOB&JOY 제52호 표지모델, 간지(GanGee) 2014년 11월호, 센트리얼 휘트니스
  • 진선유 . . . . 5회 일치
         |제목 = 한국, 쇼트트랙을 지배했다
         |출판사 = 한국일보 (한국아이닷컴)
         |제목 = <쇼트트랙세계선수권 결산> 세계 최강 입증한 한국
         |제목 = 한국 쇼트트랙 ‘브레이크’
  • 창작:레스터 리 . . . . 5회 일치
         20대 한국인 남성. 본명은 불명이며 일부러 얘기하지 않는다. [[창작:존 휘태커|존 휘태커]]보다 나이가 4살 가량 어리다. 중키에 마른 체질이며 머리카락은 적당한 검은색 비대칭 머리. 존은 '사이비 종교나 사기꾼들이 사랑하게 생겼다'고 표현했다. 안경을 껴서 그런지 지적인 이미지가 있고, 실제로도 지적이다(아래 '내적' 참고).
          * 그러나 사격술은 의외로 상당한 편이다. 본인 왈 '''게임으로 다져진 실력'''이라고(…). ~~과연 게임의 본고장 한국~~ 하지만 존 휘태커와 달리 죽이는 것이 아닌 '''무력화'''를 목적으로 삼기에 주로 어깨나 배, 다리를 노린다. 그러다 보니 명중률에 비해 큰 도움은 안 되는 편. 존도 '그럴 거면 총 버리고 따라다니기만 해'라고 핀잔을 준다.
          * 운전은 존에 비하면 상당히 잘 하는 편.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남아 있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나중에는 지인들의 운전사나 도주책(!), 스트리트 레이싱(!!)까지 하게 된다. ~~쉽게 말해 전천후 셔틀.~~
         [[창작:트와일라이트 시티|트와일라이트 시티]]에 온 지 얼마 안 되었기에 도착하자마자 사기를 당하게 되지만, [[창작:존 휘태커|존 휘태커]]의 도움으로 돈을 되찾는다. 이후 한국인 공동체를 찾아갔지만 예상 외로 조건이 빡쎄서 결국 공동체 구성원이 추천한 집을 구한다. 그런데 그 곳은 존의 집인 [[창작:릴리퍼트 아파트|릴리퍼트 아파트]]였고, 다행스럽게도 공동 관리인 [[창작:앨프레드 박|앨프레드 박]]이 존을 설득한 덕분에 "길가의 버려진 강아지" 취급을 받으며 같이 살 수 있게 된다.
          * 국적을 필요 이상으로 자랑하다가 바보 취급당한 적이 있기에 그냥 동양인이라고만 하고 다닌다. 그 편이 의뢰인에게 더 편하기도 하거니와 의뢰인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단서가 되어서 그렇다고. 물론 같은 한국인을 만나면 엄청 반가워한다. 그렇다고 일본인이나 중국인을 만났다고 불쾌해하진 않는다. ~~다만 한일전만큼은 용납하지 못한다~~
  • 창작:코스모폴리턴 . . . . 5회 일치
         동명의 옴니버스 범죄물 소설[* 단 제목은 ~~있어보이려고~~ 영어로 표기하여 COSMOPOLITAN이다.]이자 그 세계관의 구축을 위한 프로젝트. 비중은 프로젝트가 더 크다. ~~그래서 소설은 연재속도가 겁나게 늦다고 하더라.~~ 처음에는 공동 프로젝트로 기획되었으나 세계관에 대한 이해 및 해설 부족을 비롯한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개인 프로젝트로 전환되었다.
         '''오픈월드 게임의 소설화'''를 베이스로 삼고 있기 때문에, 소설에 필요한 3요소(인물, 사건, 배경) 외에도 등장할 확률이 낮거나 없는 요소들도 다소 기록되어 있다. 이 역시 프로젝트의 비중이 크다 보니 생겨난 ~~악~~영향.
  • 최대원(정치인,국회의원) . . . . 5회 일치
         || '''약력''' ||<(>[[LG화학]] 선임부장[br]고려장학회 이사장[br]한나라당 경북도당 부위원장[br]대구대 겸임교수[br][[자유한국당]] 상임고문 ||
         [[자유한국당]] [[이철우(1955)|이철우]] 의원이 경북도지사 출마로 국회의원을 사퇴하게 되자, 해당 지역구인 [[경상북도]] [[김천시]] 선거구에 도전했다. 당초 자유한국당 소속으로 도전을 시도했으나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도전하게 되었다. [[더불어민주당]]이 후보를 내지 않은 관계로 자유한국당 [[송언석]] 후보와 맞붙게 되는데, 이로 인해 민주당 및 진보 지지자들의 기권 가능성이 높아졌으나, 민주당 도의원 후보의 암묵적인 지원사격을 받으면서 자유한국당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친여무소속 취급을 받았다.
  • 최란(배우) . . . . 5회 일치
          * 관련 문서: [[배우/한국]]
         최란은 [[한국]]의 [[배우]]다.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의 전신인 대구 오리온스 감독을 하던 이충희 전 감독에 대해 공홈에서 당시 오리온스의 엄청난 부진에 악플러들이 많았는데 며칠만에 최란에게 전원 고소당해서 처벌받은 실사례도 있었다. [[원주 DB 프로미]]의 전신인 원주 동부 프로미 공홈에서도 실명임에도 성적 부진에 성난 팬들이 이충희에 대한 악플을 남기다가 고소당한 사람들이 나왔고 이후 농구팬들은 최란이라면 벌벌 떨 수준이 되었다.(...)
         [[분류:한국 여배우]][[분류:김천시 출신 인물]][[분류:1960년 출생]]
  • 최윤동 . . . . 5회 일치
         * 한국독립군 의용단 대장
         * 한국민주당 중앙본부 연락부장
         * 한국민주당 중앙상무위원
         |소속정당 = [[한국민주당]]
         {{토막글|한국 사람|정치인}}
  • 파일 드라이버 . . . . 5회 일치
         [[프로레슬링]]의 기술 가운데 하나. 상대의 허리를 붙잡고 내던져, 머리를 바닥에 내리찧는 기술이다.
         전일본 프로레슬링 출신으로서, 프로레슬링 NOA를 개양하여 사장 겸 레슬러로 활동하던 미사와 미츠하루가 경기중 파일 드라이버를 맞아 척추단열로 사망한 사례가 있다.
         화려한 동작 때문에 액션 게임에서 프로레슬링 기술을 쓰는 캐릭터에게 자주 붙어있는 기술이다.
         [[분류:프로레슬링 기술]]
  • 한보배 . . . . 5회 일치
         * [[2009년]] [[KBS1]] 대하드라마 《[[천추태후 (드라마)|천추태후]]》 ... 어린 [[선정왕후 (목종)|선정왕후]] 유씨 역 ([[이인혜]] 아역)
         * [[2009년]] [[MBC]] 일일시트콤 《[[태희 혜교 지현이]]》 ... 한보배 역
         * [[2009년]] [[SBS]] 주말특별기획 《[[그대, 웃어요]]》 ... 연재 역
         * [[2009년]] [[KBS2]] 장애이해교육드라마 《[[굿 프렌즈]]》 ... 손예슬 역
         * [[2009년]] [[윤하]] - 오늘 헤어졌어요
  • 함중아 . . . . 5회 일치
          | 종교 = [[개신교]]([[기독교한국침례회|침례회]])
         *2009년 09월 함중아 《어리석은 여자》
         === TV 프로그램 ===
         {{토막글|한국 가수|작곡가}}
         [[분류:195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미국계 한국인]][[분류:대한민국의 록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사이키델릭 록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록 기타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피아노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키보드 연주자]][[분류:김현식]][[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1971년 데뷔]][[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분류:대한민국의 침례교도]][[분류:대한민국의 검정고시 통과자]][[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캐나다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명지전문대학 교수]][[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홍콩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잉글랜드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스코틀랜드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뉴질랜드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오스트레일리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허규옥 . . . . 5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82년]]
         |첫 출장 = [[KBO (야구)|KBO]] / [[1982년]] [[4월 6일]] <br /> [[광주무등경기장|광주]] 대 [[해태 타이거즈|해태]]전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1992년]] [[9월 26일]] <br /> [[대구시민야구장|대구]] 대 [[롯데 자이언츠|롯데]]전
  • 황대봉 . . . . 5회 일치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제8번)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당선 직후 [[김일윤]]과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였고, [[무소속]]으로 당선된 [[김효영]], 김일윤 등과 같이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에 입당하였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국국민당을 탈당하였으나 [[민주정의당]]에는 입당하지 않았다.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디시전 . . . . 4회 일치
          경제 슬라이더가 중앙 계획으로 돌아간다. 60일 후 랜덤한 프로빈스 한곳에 공장이 세워진다.
          중앙계획 중심의 경제 전용. 30일 후 랜덤한 프로빈스 1-5 곳의 기반시설이 10% 오른다. 몇개의 프로빈스에 적용되는지는 발동 당시 돈을 얼마나 붓냐에 따라 다르다. 최대치로 투자할 경우 경제 슬라이드가 중앙 계획으로 돌아가니 주의.
          중화민국의 입장에는 청두 프로빈스에 공군 기지가 하나 지어지고, 그곳에 요격기 비행단 하나와 전술폭격기 비행단 하나가 생긴다. 강경파로 정치 슬라이더가 한칸 이동하며, 소련에게서 빠져나간 보급품 1500과 석유 250을 가지게 된다. 소련과 관계도가 10 상승하며, 소련에서 파견된 공군 지휘관 [[https://en.wikipedia.org/wiki/Timofey_Khryukin|흐류킨]]을 사용할 수 있게된다. 또한 몇몇 청사진을 획득한다.
  • K리그 챌린지 플레이오프 . . . . 4회 일치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 규정하는 공식경기 중 하나로 [[K리그 챌린지]]의 정규 라운드가 종료되고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기 위해 열리는 플레이오프대회다.
         첫 대회가 열렸던 2014시즌에는 이 대회 역시 한국프로축구연맹이 규정한 공식경기지만 챌린지의 기록과는 무관하게 별도로 기록했었다. 이는 챌린지 플레이오프가 엄밀히 말하면 챌린지의 정규 라운드의 연장선이 아니라 승강 플레이오프라는 [[승강제]] 시스템과 관련이 있는 대회로 보기 때문이며, K리그의 소식을 전하는 공식매체인 [[K리그 웹진]]에서도 2014시즌의 데이터는 챌린지와 호환이 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2015시즌부터는 챌린지 플레이오프를 K리그 챌린지의 연장선으로 보고 이 데이터를 공식으로 집계하기 시작하였으며, K리그 웹진 2015년 12월호에서는 다 통합하여 데이터를 공개하였다.
  • OK 본 . . . . 4회 일치
         [[1983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유년 교육 과정을 밟으며, 1996년부터 랩 메이킹을 시작하며 [[힙합]]에 뛰어들었다. 2000년대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해 NOMZ 프로젝트, 개놈 프로젝트 등 비정규 음반에 참여했다. 1집 발매 이전에는 [[힙합플레이야]] 등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곡을 올리며 활동하였으며, 2005년 라디오 프로그램 Open Mic의 선발자로 출연했고, 이어서 구단지 독서실 1집 앨범을 발매했다. 이후 여러 언더 힙합 앨범에 참여하며, 2008년 구단지 독서실 2집 '라임왕'을 발매했다. [[서울시립대]] 경영학부를 졸업하였다.
         * [[한국 힙합]]
  • Q.E.D. 증명종료 . . . . 4회 일치
         [[일본]]의 작가 [[카토 모토히로]]가 [[코단샤]]의 [[계간]]지 '월간 소년 매거진 플러스'[* 원래는 매거진 GREAT라는 이름이었으나, 2009년 매거진 Z라는 잡지가 폐간, GREAT에 흡수되면서 '매거진 이노'라는 잡지가 되었다가 이마저도 2011년에 폐간. 이노에서의 연재작들을 모아 새로 창간한 잡지가 매거진 플러스.]에 연재 중인 [[추리]]만화. 작가는 전에 일하던 출판사([[에닉스]])에서 정리해고당하고 이 만화까지 망하면 만화가를 그만두겠다는 각오로 그렸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왕창 팔린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판매 부수는 권당 4만부 정도. 잡지가 워낙 마이너하다 보니... ] 97년부터 2015년까지 장장 18년 동안 장수하며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격월간지 장기연재 만화로 기네스북에 등재돼있는 상태로, 실시간 갱신중이다.] [[date]] 기준으로 48권까지 정발되었다.
         인물설정 때문인지 오일러의 공식이라든지 초끈이론이라든지 일반인으로서는 머리아픈 수학, 과학적 이론이 많이 나오는데 작가는 건축과 출신으로 과학은 취미로서 좋아한다고 한다.[* 현학적이라 장점이자 단점. 팬들은 좋아하지만 골치아프다고 포기하는 독자도 많다.] 그래서인지 가끔 만화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즉, 기타 추리물처럼 오류가 있다. 이를테면 4권에서 클란이 네트워크를 통해 전 세계를 공격한다는 장면에서 '''MIT'''출신자인 토마와 로키가 원자력 발전소, 미사일 사일로 등을 걱정하는데 사실 걱정할 필요가 없는 내용. 기술자들도 바보는 아니라서 어지간한 중요 시설은 '''물리적'''으로 일반 네트워크와는 분리되어 있다.[* 즉 아예 물리적인 서버 자체가 따로 구축되어 있다. 은행권의 경우 인터넷 뱅킹 등으로 외부 전산망과 연결되어 있고 그 틈을 노릴 수 있지만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는 네트워크'''는 공개 전산망에 이어지는 회선 자체가 없다. 물론 최근에는 폐쇄 네트워크를 공격하기 위한 [[스턱스넷]]과 같은 공격기법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약정한 공격행위를 하는 것뿐으로 외부에서 원격 조종하는 개념은 아니다.] 즉 직접 가서 네트워크를 연결해야 한다는 말인데, 일개 컴퓨터 프로그램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일반인의 통념이라면 모르겠는데 '''MIT''' 현역이 저런 소리를 하니..
          * 작품 자체의 소재가 일반인들은 접해보지 않은 개념들이 많아. 상당히 상식적인 면에서 읽어볼만하나 원체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 많기도 하고, 일본어 특유의 외국어 표기법(ex, 마구도나루도)으로 번역자가 그대로 해석해서 한국어의 외래어 표기법과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연속체 가설에서 만화책에서는 '아레후'라고 나오지만 제대로 된 명칭은 [[알레프]].
          * [[NHK]]에서 드라마로 제작, 2009년 01월부터 방영되어서 10화로 완결. 여주인공 가나역에는 모닝구무스메의 멤버([[다카하시 아이]])가 캐스팅되어 화제...였다고는 하지만...아~[[망했어요]][* CMB 14권에 따르면 작가의 부인이 이 드라마 덕분에 다카하시의 팬이 되었다고는 하는데 과연...] 다행히 실사판의 흥행여부와는 관계없이 만화는 계속 사랑받고 있다.
  • That 70's show . . . . 4회 일치
         [[미국]]의 [[시트콤]]. 1998년에서 2006년 까지 방송했다. 미국 FOX 채널에서 방송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요절복통 70쇼 등으로 케이블 TV 등에서 방송됐다. 1970년대, [[위스콘신]] 주의 포인트 플레이스라는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에릭의 베프. 반항하에 시니컬한 성격으로서 아프로와 선글래스가 특징. --왠지 [[도우너]]가 연상된다.-- 가정사가 매우 복잡한데, 어머니만 있는 편부모 가정에서 자라다가 그나마 어머니도 도망가서 에릭네 집 지하실에서 집세를 지불하며 얹혀 살게 된다. 실종됐던 아버지 버드가 돌아오면서 잠시 아버지네 집에 가기도 했는데, 아버지가 또 실종되면서 다시 지하실에 돌아온다. 6시즌에서 버드는 생부가 아니었고 윌리엄 바넷이란 사람이 생부였다는 것이 밝혀지는데, [[흑인]]으로 레코드 체인점을 소유한 [[부자]]였다. 흑백혼혈이었던 것, 하이드 본인은 자신의 반항적인 혈통의 기원을 찾았다며 아주 기뻐한다. 또 배다른 여동생 엔지 바넷이 생기게 된다.
         도나의 아버지. 아프로 헤어에 듬직한 곰 같은 인상. 감정적이고 잘 우는 성격이라 레드는 밥이 우는걸 매우 싫어한다.
          * 눈에 뛰고 특이한 것을 좋아한다. 1시즌 1에피소드에서 [[아프로]] 헤어를 한다.
  • Victoria II/상품 . . . . 4회 일치
         특정 프로빈스의 RGO[* Resource gathering operation. 지역 특산물 정도로 이해하면 편하다.]에서 생성되며, 다른 상품을 만들기 위해 쓰이는 상품들. 농부와 노동자 POP가 생산한다. 자국에서 나지 않는 원자재의 대부분은 수입하는 수 밖에 없다. 아니면 [[식민지|원자재가 나는 곳을 영토로 만들던가.]]
         물고기를 생산하는 국가들은 가끔 "노인과 바다" 이벤트가 발생할 때가 있다. 이 경우 물고기를 비축할 것인지, 해당 프로빈스의 빈민들에게 나눠줘 투쟁성과 의식도를 감소시킬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차를 생산하는 국가들은 풍년으로 발생한 차들을 처리하는 "우리 나라의 모든 차"[* 해당 이벤트 이름은 영어 표현인 All the Tea in China에서 따왔다. 매우 값진것을 의미하는 표현. 보통 "중국의 모든 차를 다 준다고 해도 거부하겠다," 같은 식으로 쓰인다.] 이벤트가 발생할 때가 있다. 이 경우 차를 비축할 것인지, 해당 프로빈스의 빈민들에게 나눠줘 투쟁성과 의식도를 감소시킬 것인지, 해당 프로빈스의 자본가들에게 나눠줘 소지 자금에 보태게 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 . . . . 4회 일치
         그러나 이들은 단순히 추모행사를 주도한 것만이 아니라 이것을 자신들의 남혐활동을 합리화하는데 이용하였으며 한국사회를 여혐사회로 단정하고 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규정하는데 총력을 다했다.
         여초사이트가 주도한 만큼 이 사건은 웹상에서도 뜨거운 감자가 되었는데 주로 SNS를 중심으로 논란이 확산됐다. 처음에는 시민사회 전반의 애도가 모였으나 워마드를 비롯한 여초사이트의 공세가 강화되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한국사회를 답이 없는 여혐사회로 규정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으면서 이에 반발하는 움직임도 활발히 일어났다. 워마드를 중심으로 이런 움직임을 모두 "여혐"과 "반성을 모르는 남성"으로 규정, 철저히 비하하면서 이 사건은 여혐 대 남혐의 구도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때 정도를 지켜야할 언론에서는 사건을 원색적이고 편파적으로 다루면서 논란을 부채질했다. 특히 한겨레, 경향신문 등 진보 언론에서는 워마드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면서 극도의 페미나치스러운 기사를 쏟아내어 진보 진영 안에서도 성토를 당했다. 일부 유명인들도 이 사건과 관련해서 워마드에 편승하는 의견을 내놓으면서 빈축을 사기도 했다. 특히 진보논객이자 미학자로 유명한 진중권은 한국 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규정하면서 "x잡고 반성이나 해라"는 폭언을 늘어놓고 욕을 먹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작 피해자와 유가족의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었고 특히 피해자의 오빠는 여혐논란에 대해 "사건의 본질을 흐리고 피해자의 죽음을 이용하는 것"이란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여초사이트에서는 이러한 유가족의 목소리 조차 "한국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비하로 일관하였다.
  • 강성호 (1966년) . . . . 4회 일치
         | 정당 = [[자유한국당]]
         2014년 6회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의 대구 서구청장 후보로 내정되었으나 여기자를 성추행 했다는 의혹이 퍼지면서 공천 철회되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oid=001&aid=0006904645|제목=새누리당 대구경북 단체장 공천 '삐거덕'|확인날짜=2016-12-18}}</ref><ref>{{뉴스 인용|url=http://www.weekly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9980|제목=[6·4지방선거] 새누리당, 대구 서구청장 후보 류한국 공천 - 위클리오늘|확인날짜=2016-12-18}}</ref> 이에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당시 선거공보물에 본인이 저지른 잘못을 최대한 오래전의 일로 포장하기 위해 '1년 11개월' 전의 사건을 '2년 6개월'로 표기하였으며<ref>{{뉴스 인용|url=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5117&yy=2014|제목=성범죄, 가십거리도 안되는 일? '강성호 선거공보물 거짓' 문제 제기|성=매일신문|이름=|날짜=2014-05-28|뉴스=|출판사=|확인날짜=}}</ref> 피해여성이 먼저 술을 사달라고 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는 거짓으로 드러났다.<ref>{{뉴스 인용|url=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3876&yy=2014|제목="피해여성이 먼저 술 사달라 전화" 강성호 또 거짓말|성=매일신문|이름=|날짜=2014-05-21|뉴스=|출판사=|확인날짜=}}</ref> 기자회견에서 “시간도 늦었고 술에 취해 택시를 타고 피해여성을 집 앞까지 바래다줬다”며 “집에 들어가기 전에 피해여성과 대화를 나누다가 헤어지며 어깨를 포옹하고 머리에 입을 맞추고 작별 인사를 했다”고 밝혀 행위자체가 있음은 인정하였다. 이 사건은 향후 새누리당 윤리위원에 내정되면서 다시 화제가 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nocutnews.co.kr/news/4701668|제목='성추행 의혹' 인사가 새누리 윤리위원? "정신 나갔다" - 노컷뉴스|웹사이트=www.nocutnews.co.kr|확인날짜=2016-12-18}}</ref>
         |후임자 = [[류한국]]
         [[분류:196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진주 강씨]][[분류:대구중리초등학교 동문]][[분류:대건중학교 동문]][[분류:대건고등학교 동문]][[분류:대구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기자]][[분류:대한민국의 사회과학자]][[분류:한나라당의 정치인]][[분류:자유한국당의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지방의회의원]][[분류:대한민국의 지방자치단체장]]
  • 강세정 . . . . 4회 일치
         | 수상 = [[2009년]] [[MBC 연기대상]] 여자 우수상
         |2011||한국승마TV||고나은의 마녀 달리다||출연||
         |2016||JTBC||[[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출연||15회
         * 2009년 [[MBC 연기대상]] 우수상
  • 건포인트 . . . . 4회 일치
         이를 수행하기 위해 여러 장비들이 준비되어 있다. 처음에는 불프로그 하이퍼트라우저 밖에 쓸 수 없지만, 임무를 수행하며 돈을 벌어 상점에서 장비를 구매할 수 있다.
          * 불프로그 하이퍼트라우저(Bullfrog Hypertrousers)
          * 프로페셔널
          루크 파이어암즈의 경쟁사인 인텍스의 CEO. 입이 상당히 험해서 Fuck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콘웨이와 접선할 때 처음 한말이 "씨발 넌 뭐하는 놈이냐?"[* Who the fuck are you?]일 정도. 콘웨이에게 루크가 진행하는 비밀 프로젝트를 훔쳐올 것을 의뢰한다. 목격자를 살려두지 말라는 말은 덤.
  • 구본욱 . . . . 4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3년]]
         {{토막글|야구인}}
         [[분류:199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구수창초등학교 동문]][[분류:경상중학교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NC 다이노스 선수]]
  • 구성윤 . . . . 4회 일치
         === 프로 데뷔 이전 ===
         2013년 성인 팀으로 승격하였으나, 일본에서 고등학교 시절 입었던 무릎 부상이 재발하면서 전반기를 날렸고, 여름에 재활을 마친 후 다시 엔트리에 복귀했으나 전지훈련을 떠나는 당일에 또 부상을 당하며 다시 [[벤치워머]]가 되었다. 이후로도 2009년부터 꾸준히 [[세레소 오사카]]의 골대를 지키고 있던 선배 [[김진현(축구선수)|김진현]]에게 밀리면서 2014년까지 단 1경기도 출장하지 못하였다. 이후 삿포로로 이적한 장면을 보고, 세레소팬들은 구단한테 [[김진현]]선수의 후임이라고 했으면서 육성을 실패한다는게 말이되냐면서 비난이 이어졌다. 물론 그 비난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꽤 인정을 받는 골키퍼기 때문에 2018 러시아 월드컵 한국 대표팀에 구성윤이 뽑히지 않자 한국의 두터운 골키퍼 층을 부럽다는 일본 네티즌들의 반응도 있었다.[[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sports&wr_id=281364]]
  • 국부펀드 . . . . 4회 일치
         이리하여 국부펀드의 영향력이 증가하였으나, 이들의 총자산 등 정보가 비공개 상태라는 점을 염려하여 [[IMF]]에서는 산티아고 원칙 (Santiago Principles)이라는 가이드 라인을 제시했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The International Forum of Sovereign Wealth Funds (IFSWF)가 International Working Group of Sovereign Wealth Funds(IWG)에 의하여 출범했다. 2009년 4월에 쿠웨이트에 설립된 IFSWF는 2009년 10월에 멤버들간 정기회의를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개최하였다. 한국투자공사를 비롯하여 24개 국부펀드가 가입하고 있다.
          * 한국투자공사(KIC) : 2005년 7월 설립.
  • 국제복싱기구 . . . . 4회 일치
         [[미국]] [[플로리다]]에 본부를 두고 있는 프로복싱 단체. 약칭 IBO.
         역사가 짧아 프로복싱 주요 4개 단체(WBA·WBO·WBC·IBF)에는 크게 밀리는 마이너 단체이다. 하지만 본부가 있는 미국이 프로복싱이 활발하여, 프로복서로서 경력 닦기의 일환으로서 IBO 타이틀에 도전하는 선수가 많다. 패전이나 반납으로 타이틀을 잃은 선수가 IBO 타이틀에 도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보니 의외로 유명한 선수가 이 단체를 거쳐갔다.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나 [[매니 파퀴아오]]도 한때 이 단체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이러다보니 타이틀이 공석이 되어 있는 때도 많은 편.
  • 권영준 (1952년) . . . . 4회 일치
         '''권영준'''([[1952년]] [[5월 15일]]~ , [[대구광역시]])은 [[대한민국]]의 경영학자인 대학교수이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의연구소 소장과 한국재무학회 이사를 맡고 있다.
         * 한국선물학회 제9대 회장
         * [[한국증권선물거래소]] 사외이사
         * 한국재무학회 이사
  • 권재진 . . . . 4회 일치
         * [[2009년]] ~ [[2011년]] 청와대 민정수석
         * [[2009년]]~[[2009년]]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임기 = [[2009년]] [[9월 1일]] ~ [[2011년]] [[8월 5일]]
  • 그랜드 테프트 오토 시리즈 . . . . 4회 일치
          2009년 발매된 DLC. 리버티 시티에서 활동하는 폭주족 "로스트"의 단원인 조니 클레비츠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2009년 발매된 DLC. 나이트 클럽을 운영하는 토니 프린스, 일명 "게이 토니" 밑에서 일하는 루이스 로페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2009년 발매. 삼촌에게 고대의 검을 전하기 위해 리버티 시티로 왔다가 그 검을 강탈당한 황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2009년 발매. 로스트 앤 댐드와 발라드 오브 게이 토니의 합본.
  • 김건우 (1990년) . . . . 4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3년]]
         {{토막글|야구인}}
         [[분류:199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구칠성초등학교 동문]][[분류:대구중학교 동문]][[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KBO 리그 투수]][[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NC 다이노스 선수]]
  • 김경준(축구선수) . . . . 4회 일치
         === 프로데뷔 이전 ===
         2018년 4월 27일, KEB하나은행 K리그1 2018 8라운드 [[FC서울]]과의 경기에서 후반 43분경 [[고요한]]의 정강이를 스터드로 가격하는 과격한 행위를 하여 퇴장 당했다. 이 일로 한국프로축구연맹 상벌위로부터 제재금 300만원 징계를 부과받았다.[[http://m.sport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139&aid=0002090150|#]]
         축구 선수와 대학생, 두 가지를 하면서 대학생 생활을 거의 못해봐서 엠티나 과팅에 대한 환상이 있는 듯 하다. [[http://www.footballjournal.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26|엠티 가고 과팅을 해보고 싶다]]라는 인터뷰를 했었다. 결국 프로로 도전하면서 못해본 듯 하다.
  • 김관용 . . . . 4회 일치
         |정당 = [[자유한국당]]
         * 2006년 7월 ~ 2018년 6월: 제2대 [[한국국학진흥원]] 이사장
         * 자유한국당 국책자문위원회 위원장
         [[분류:1942년 태어남]][[분류:선산 김씨]][[분류:구미시 출신]][[분류:영남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교사]][[분류:대한민국의 공무원]][[분류:자유한국당 당원]][[분류:친박]][[분류: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후보]]
  • 김광석 . . . . 4회 일치
         '''김광석'''(金光石<ref>[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711220915531&code=900307 '대중음악 100대 명반'25위 김광석 ‘다시 부르기 2’], 《경향신문》, 2007년 11월 22일 작성, 2011년 2월 14일 확인.</ref>, [[1964년]] [[1월 22일]]<ref>{{저널 인용|제목=[추억의 LP 여행] 김광석(上) 시대의 감성을 일깨운 우울의 미학 해맑은 미소로 기억될 '거리에서'|저널=주간한국|이름=|url=http://weekly.hankooki.com/lpage/enter/200407/wk2004070211320337570.htm|날짜=2004-07-02|출판사=|저자=최규성|확인날짜=2010-03-12}}</ref> ~ [[1996년]] [[1월 6일]])은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이다. ‘노래하는 철학자’로도 불린다. 2014년 제5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표창장이 추서되었다.
         2007년, 그가 부른 노래 중 하나인 〈[[서른 즈음에]]〉가 음악 평론가들에게서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우리 가요에 깃든 '서른'|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08&aid=0000078450|출판사=머니투데이 스타뉴스|저자=김원겸 기자|날짜=2007-09-27|확인날짜=2011-12-10}}</ref> 2008년 1월 6일에는 12주기 추모 콘서트와 함께 [[대학로 (서울)|대학로]]의 학전 블루 소극장에서 노래비 제막식이 열렸다.<ref>{{뉴스 인용|url=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8010694037|제목=김광석 12주기 추모콘서트 개최 ‥ 노래비 제막식도 함께 진행돼|출판사=한국경제신문|저자=디지털뉴스팀|날짜=2008-01-06|확인날짜=2008-01-06}}</ref>
         부인 [[서해순]]은 타살이 아닌 자살이라고 주장을 했지만 가족 및 지인들은 의혹을 제기했다. 세간에 알려진 김광석의 자살설에 대해 가족들은 "자살할 아이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김광석의 누나들은 "광석이는 '부모보다 먼저 가는 자식만큼 불효는 없다'라고 항상 말했다. 오래 살고 싶다고 했다" 라며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이유가 없다는 모습을 보였다. 어머니 역시 "활발하고 마음이 약한 아이다. 자살할 아이가 아니다. 착하고 남한테 해코지할 사람도 아니다" 라며 아들의 자살을 믿지 못했다.<ref>{{뉴스 인용|제목=故 김광석 타살의혹 재점화… 가족들 입 모아 “자살 아니다”|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8&aid=0002269614|출판사=한국일보|저자=최인경 기자|날짜=2012-06-19|확인날짜=2013-12-29}}</ref> 또, 김광석과 음악 동호회 활동을 했던 한 지인은 "돌아가시기 한 6개월 전쯤부터는 거의 매일 보다시피 했다"며 "자살했다는 것 자체가 황당하다. 개인적으로 타살이라고 생각하는데 의문점들이 지금이라도 밝힐 수 있다면 밝혀져 김광석이 어떻게 돌아가시게 된 것인지 밝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 [[1993년]] 화인프로덕션 비디오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3|슈퍼 마리오3]] 주제가
  • 김보민 . . . . 4회 일치
         * [[2003년]] ~ '''현재''' : [[한국방송공사|KBS]] 29기 공채 아나운서 ([[KBS 부산방송총국]] 지역근무)
         * [[2009년]] ~ [[2010년]] : [[KBS1]] 《[[토요일 가족이 부른다]]》
         * [[2009년]] ~ [[2013년]] : [[KBS2]] 《[[스포츠 타임]]》
         * [[2014년]] : [[KBS 클래식FM]] 《[[국악의 향기 (라디오 프로그램)|국악의 향기]]》
  • 김새해 . . . . 4회 일치
         | 활동기간 = [[2009년]] [[4월]] ~ (온미디어 7기) <br/ > [[2012년]] ~ [[현재]] (프리랜서)
         '''김새해''' ([[1986년]] [[12월 11일]] ~ )는 [[대한민국]]의 여자 [[성우]]이다. [[2009년]] [[투니버스]] 7기 공채 성우로 데뷔하였다.
         ** 꿈빛 파티시엘 프로페셔널 - '''캬라멜'''
         [[분류:1986년 태어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성우]][[분류:2009년 데뷔]]
  • 김성조 . . . . 4회 일치
         || '''직업''' || [[한국체육대학교]] 제6대 총장 ||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9년까지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원|여의도연구소]] [[소장]]을 역임하였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을 역임하였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15년부터 [[한국체육대학교]] [[총장]]을 역임하고 있다.
  • 김승목 . . . . 4회 일치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부산직할시 [[해운대구]]-남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이흥수(1928)|이흥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민주당]] [[이기택]] 후보와 민주정의당 [[유흥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1981 ||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직할시 [[해운대구]]-남구) || [[민주한국당]] || || '''당선'''[* [[민주정의당]] [[이흥수(1928)|이흥수]] 후보와 동반 당선] || ||
         || 1985 ||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직할시 [[해운대구]]-남구) || [[민주한국당]] || || 낙선 || ||
  • 김쌍수 . . . . 4회 일치
         [[대한민국]]의 [[기업인]]. [[LG그룹]] 부회장[* LG에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부회장까지 올랐다. 이 때문에 윤종용, [[이학수]]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공부잘하는 [[엄친아]], [[엄친딸]]들이 자신의 우상이자 롤모델로 삼는 인물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대기업 부회장 자리는 게임으로 따지면 파이널 스테이지까지 클리어한 것이다.], 前 [[한국전력공사]] 사장, 現 [[수원 KEPCO45]] 프로배구단 구단주. 졸업 고교는 [[성의고등학교]]. [[경상북도]] [[김천시]] 출신이다.
          * 수원 KEPCO45 프로배구단 구단주
          * 한국전력공사 사장
  • 김양 (1953년) . . . . 4회 일치
          | 경력 = [[창조한국당]] 보훈행정위원 <br/> [[국방대학교|대한민국 국방대]] 객원교수
         * [[2011년]] [[3월 20일]] ~ [[2012년]] [[3월 30일]] : 창조한국당 보훈행정위원
         {{토막글|한국 근현대사|정치인}}
         [[분류:195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안동 김씨 (구)]][[분류:김구 가]][[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 육군 군인]][[분류: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분류: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분류:조지 워싱턴 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금융인]][[분류: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분류:대한민국의 국가보훈처장]][[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김대중]][[분류:문국현]][[분류:창조한국당]][[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군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경제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역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국방대학교 교수]][[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감리교도]]
  • 김용준 (1904년) . . . . 4회 일치
         '''김용준'''(金瑢俊, [[1904년]] [[2월 3일]] ~ [[1967년]] [[11월 3일]]?)은 [[한국]]의 [[화가]]이며 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이다. 수필가로도 알려져 있다. 아호는 근원(近園)이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와 [[동국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48년]] 그의 호를 딴 수필집인 《근원수필》을 출간하기도 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 [[조선인민군]]이 [[서울특별시|서울]]을 점령했을 때 [[서울대학교]] 예술대학의 임시 학장을 맡았고, 그 해 가을 후퇴하는 [[조선인민군]]을 따라 월북했다. 월북한 후에는 [[조선미술가동맹]]과 [[조선건축가동맹]]에 참가했으며 [[평양미술대학]]의 강좌장이 되었다.
         전통적인 모더니즘 계열에서 [[정지용]], [[이태준]]과 궤를 같이 하면서 광복 전·후로 좌익 예술계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던 김용준의 월북 동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생으로 [[국대안 파동]] 때 [[한국의 군정기|미 군정]]과 충돌해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김진항]]의 추대로 [[한국 전쟁]] 중 얼떨결에 학장이 되었다가 월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설과, [[공산주의자]]였던 부인의 권유로 함께 북으로 갔다는 설이 있다.
  • 김정재 . . . . 4회 일치
         ||<bgcolor=pink> '''{{{#0C0C0C 소속 정당}}}''' ||<(><bgcolor=#F6EDF8> '''[[자유한국당|{{{자유한국당}}}]]''' ||
         ||<bgcolor=pink> '''{{{#0C0C0C 약력}}}''' ||<(><bgcolor=#F6EDF8> 제20대 국회의원[br][[자유한국당]] 원내대변인[br][[새누리당]] 부대변인[br][[서울특별시]]의회 시의원(재선)[br][[숙명여자대학교]] 겸임교수 ||
         자유한국당 원내 대책회의에서 "[[안경환]]건 계속요. 집요하게. 오늘은 그냥 [[조국(인물)|조국]] 조지면서 떠드는 날입니다”, "[[문정인]]. [[무슬림]]인지. [[반미]] 생각 가진 사람이 특보라니”라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주고 받은 모습이 카메라에 찍혀 논란이 되었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799574.html|#]]
  • 김종덕 (야구선수) . . . . 4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2018년]]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8년]] [[9월 7일]]<br>[[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광주]] 대 [[KIA 타이거즈|KIA]]전
         [[분류:199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포수]][[분류:넥센 히어로즈 선수]]
  • 김준희 (1960년) . . . . 4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85년]]
         '''김준희'''(金濬禧<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3111500329208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3-11-15&officeId=00032&pageNo=8&printNo=11733&publishType=00020 "겨울放學 프로野球 場外훈련"] 경향신문. 1983년 11월 15일.</ref>, [[1960년]] [[5월 16일]] ~ )는 전 [[KBO 리그]] [[삼성 라이온즈]]의 선수이다.
         {{토막글|야구인}}
  • 김현철(교수) . . . . 4회 일치
         || '''약력''' ||<(> 쓰쿠바 대학 부교수[br]일본 경제산업성 연구위원[br]한국자동차산업학회장[br]한국중소기업학회 부회장[br]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br]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장 ||
         2015년 11월 26일, 국회에서 열린 국회 최고위 경제분석과정 강의에서 “수출 부진과 가계부채 증가로 한국 경제는 파국에 접어들고 있다”며 지금의 [[대한민국/경제]]가 1990년대 중반 버블이 꺼지기 시작한 일본경제와 닮았다고 평가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소니가 삼성 때문에 쓰러졌다고 생각하지만 소니는 삼성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무너뜨린 것"[* 소니가 안 무너졌다는 반론은 있다. 오히려 반등에 성공했다는 지표도 있다. [[http://it.chosun.com/news/article.html?no=2819018|링크참조]] 그러나 맥락상 포인트는 소니가 무너졌다 안무너졌다의 단순 팩트 체크가 아니라, 일본 정부의 법인세율 인상 정책 때문에 소니가 피해를 입었다는 맥락이다.]이라며, 법인세율 인상은 기업을 망가뜨리게 되고 나아가 한국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김호근 . . . . 4회 일치
         '''김호근'''(金虎根, [[1951년]] [[5월 5일]] ~ )은 [[한국검정교과서]] 이사장이었다. 1971년부터 교육공직생활을 하셨고 2세 교육발전하였다.
         * [[한국체육대학교]] 총무과장(부이사관)
         * [[한국검정교과서]] 제16대 이사장
         * [[2009년]] [[6월 29일]] : 홍조근정훈장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09화 . . . . 4회 일치
          * 드디어 시작되는 2회전. 그런데 현장에 있는 "프로 요구조자"들은 구조대상이자 시험관이기도 했다.
          * 현장에는 "프로 요구조자"라고 하는 연기자들이 투입되어 있다.
          * 이들은 통친 "Help Us Company"(줄여서 HUC)라 불리는데 이런 훈련에서 전문적으로 요구조자 역할을 하는 프로들. 상당한 인기직이라 한다.
          * 이이다는 바쿠고 카즈키를 탈환할 때는 빌런의 추격을 떨구고 프로 히어로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것에 전념해 요구조자들을 신경쓰지 못했다고 말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35화 . . . . 4회 일치
          * 나이트아이도 미도리야와 그랜토리노 사이의 대화를 뜻모를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회의를 속행시킨다. 이후는 여기까지 입수된 정보를 바탕으로 HN에서 협력을 요청했으며 현재에 이른다. 오챠코와 츠유는 HN가 뭔지 모르는데, [[하도 네지레]]가 설명해준다. 히어로 네트워크의 약자로 프로 히어로들이 사용하는 넷서비스로 상호활동 보고와 정보교류, 협력 요청 등을 처리할 수 있다.
          * 레게풍의 프로 히어로는 이 자리에 프로 이외의 인물이 있는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꼬맹이가 있으면 회의가 진행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자 패트껌이 반발하며 "이들은 '''슈퍼''' 중요 참고인"이라며 키리시마와 타마키를 소개한다. 정작 둘은 영문을 모르는 상태. 특이 타마키는 이 장소 자체가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다.
          * 나이트아이는 "치사키에겐 딸이 있다"는 정보까지 제시한다. 그리고 그 소녀가 자신의 인턴들, 밀리오와 미도리야와 접촉했다는 사실도. 그때 확인한 바로는 온 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프로 히어로들은 이것만 가지고도 무슨 이야기인지 충분히 이해를 한다. 하지만 키리시마 같은 학생들은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동안 불평 일색이던 레게풍의 히어로가 적나라하게 대답해준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40화 . . . . 4회 일치
          * 타마키는 자신이라면 적 세 명을 얼마든지 묶어놓을 수 있고 한 시라도 빨리 프로 히어로들과 경찰을 선행시켜야 한다고 설득해 일행을 먼저 보낸다.
          * [[오버홀]]이 감금한 "에리쨩"을 구출하고 시에핫사이카이를 일망타진하기 위해 아지트를 급습한 히어로&경찰 연합. 그러나 프로 히어로로 구성된 선두 그룹이 [[이리나카]]의 함정에 빠지며 후위와 분단된다. 이리나카는 우선 경찰 위주로 구성된 후위를 먼저 처리하려고 생각하는데.
          타마키는 공언한 대로 자기 혼자서 이 셋을 상대하겠다 재차 선언한다. 단발머리는 세츠노. 개성은 "절도". 대머리는 호죠. 개성은 "결정". 빵봉투는 타베. 개성은 "식". 이상 세 명이다. 타마키는 패트껌 사무소에서 타코야키를 충분히 먹어서 문어다리의 숙련도도 최고조에 달했고 지난 번 사건의 경험으로 원거리 공격에도 민감해진 상태다. 그는 이런 조무래기들 상대로 프로히어로가 몇 명이나 묶여 있는 거야 말로 적들이 바라는 일이라며 일행에게 먼저 가라고 한다. 후배인 [[미도리야 이즈쿠]]와 키리시마가 주저하나 이런 상황일 수록 프로들의 개성을 아껴두는게 좋다고 상사인 패트껌에게 결단을 촉구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87화 . . . . 4회 일치
         [[미도리야 이즈쿠|미도리야]] 일행이 [[바쿠고 카츠키|바쿠고]] 탈환 작전을 시작한 가운데 프로 히어로들도 [[빌런 연합]]을 대대적으로 공격한다.
          * 물론 진짜 피자 배달이 아니라 프로 히어로들이 아지트를 급습한 것.
          * 프로 히어로의 승리로 보이지만 "대사건"의 발단이라고 한 만큼 여기서 사건이 끝날거 같진 않다.
          * 프로 히어로들이 급습한 현장과 미도리야 일행이 보고 있는 현장이 전혀 다르다.
  • 노현정 . . . . 4회 일치
         * [[2003년]] : [[한국방송공사|KBS]] 29기 공채 아나운서([[KBS부산방송총국]] 지역근무)
         * [[2006년]] 제18회 한국방송프로듀서상 TV 진행자상
         [[분류:197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한국방송공사의 아나운서]][[분류:경희대학교 동문]][[분류:대구초등학교 동문]][[분류:대구중학교 동문]][[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분류:프리랜서 아나운서]][[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담철곤 . . . . 4회 일치
         담철곤의 할아버지가 [[중화민국]]에서 한국으로 이주했고, 담철곤은 1955년 [[대구광역시|대구]]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던 [[화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 [[한국광고주협회]] 이사
         [[분류:195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국켄트외국인학교 동문]][[분류:조지 워싱턴 대학교 동문]][[분류:오리온그룹]][[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중국계 한국인]]
  • 대전광역시 . . . . 4회 일치
         한국과학기술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대전철도트윈타워 (한국철도공사, 한국철도시설공단 본사)
  • 마철준 . . . . 4회 일치
         || 프로입단 || 2004년 [[제주 유나이티드|부천 SK]] ||
         ==== 프로 입단 전 ====
         [[경상북도]] [[포항시]] 출신으로 포항제철초등학교, [[포항제철중학교]], [[포항제철고등학교]]를 거쳐 [[경희대학교]]를 졸업하였다. 2003년 경희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모 프로 팀과 입단 계약을 조율하였으나 협상이 뜻밖에 결렬되어 미아 신세가 되고 말았고 그렇게 방황하다 2003년 [[고양 자이크로 FC|김포 할렐루야]]에 입단하여 K2리거로 실업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2004 시즌을 앞두고 2004 K리그 자유선발에서 [[제주 유나이티드|부천 SK]]에 자유 계약으로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입단 첫 시즌 수비형 [[미드필더]]와 [[센터백]], [[풀백]]을 가리지않고 주전 선수들의 백업용으로 활동하다 투쟁심과 꾸준한 경기 운영 능력 등을 [[정해성]] 감독에게 높이 평가받아 후에 부천 SK의 주전 수비수로 도약하는데 성공하였다.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붙박이 사이드 [[풀백]]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마철준은 안정적인 경기 운영 능력과 기복 없는 플레이로 오랜 시간 [[제주 유나이티드]]의 측면을 책임지다 2012년 32살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신인 및 젊은 선수들 사이에서 입지가 좁아지자, 여름 이적시장을 통해 [[전북 현대 모터스]]로 이적하게 된다.
  • 맥스 페인 . . . . 4회 일치
          * 야구방망이
          Frankie "The Bat" Niagara. 펀치넬로 패밀리의 구성원. 모나가 먹인 약탄 위스키에 기절한 맥스를 의자에 묶어놓고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팼다. 펀치넬로 패밀리에 손해를 입힌 맥스를 개처럼 죽이라는 명령에 따른 것. 잠시 휴식시간을 가지러 바에 간 사이 탈출한 맥스에 의해 죽는다. 사용하는 무기는 듀얼 잉그램.
          Captain Baseballbat-boy. 신문에 연재되는 만화. 야구방망이를 사용하는 캡틴 베이스볼배트 보이가 주인공이다. 야구방망이에 맞아 죽은 피해자 옆 신문에서 첫 등장.
  • 문창진 . . . . 4회 일치
         광양제철남초와 포항 스틸러스 유스클럽인 포철중학교, 포철공고를 졸업하였다. 광양제철남초 시절에는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과 [[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SV 베르더 브레멘]]에서 훈련을 받았다. 국내 복귀 이후에는 포항 유스클럽에 진학하였으며 2010년 백록기 우승, 2011년 고교클럽챌린지에서 6골 4도움을 기록하여 팀이 우승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본인은 MVP를 수상하였다. 이러한 활약에 문창진은 대학 진학 대신, 우선지명을 통해 바로 프로로 직행했으며 이는 [[신광훈]] 이후로 2번째 사례가 되었다.[* 이때 같이 프로로 직행했던 동기로 이광훈, 문규현이 있으나 문규현은 2013 시즌 이후 방출당했고 이광훈은 2015 시즌 대전에 임대 갔다가 임대 종료 후 수원 FC로 이적했다.] 하지만 허리 디스크로 인해 많은 경기를 뛰지 못했기에 출장 경기 수는 많지 않다.
         == 프로 경력 ==
          * 2012년 6월 14일, 인천과의 무관중 경기에서 프로 데뷔이자 K리그 데뷔전을 치뤘다. [* 3월 24일, 인천은 대전 시티즌과의 2012 K-리그 4라운드 홈경기에서 원정 팬들이 그라운드에 난입해 팀의 마스코트를 폭행하자 홈 팬들이 보복 폭행을 가하는 불상사가 일어났고 그에 대한 징계로 1경기를 무관중으로 치뤄야했다.]
  • 박동진 (1922년) . . . . 4회 일치
         1951년 외무부에 들어와, 의전국장, 주 영국 참사관, 외무부차관, 주 월남 대사, 주 브라질 대사(1962년 10월~1968 2월)<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2082100329201006&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62-08-21&officeId=00032&pageNo=1&printNo=5173&publishType=00020 브라질 大使에 朴東鎭氏] 《경향신문》1962년 8월 21일, 1면. <!--“最高會議 第63次 常任委員會는 21日 越南共和國駐箚大使 朴東鎭氏를 「브라질」合衆國特命全權大使로,...”--></ref><ref>{{서적 인용 |저자 = 외교통상부 |제목 = 한국 외교 60년 |url = http://www.mofat.go.kr/state/publication/history60/20100201/11369_file_2009%20dip60_appendix.pdf |장 = 부록 |확인날짜 = 2015년 2월 21일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60303211841/http://www.mofat.go.kr/state/publication/history60/20100201/11369_file_2009%20dip60_appendix.pdf |보존날짜 = 2016년 3월 3일 |깨진링크 = 예 }}</ref>{{Rp|496}}, 페루 겸임대사<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4042900209201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4-04-29&officeId=00020&pageNo=1&printNo=13079&publishType=00020 朴東鎭브라질大使 駐『페루』大使兼任]〉 《동아일보》(1964년 4월 29일) 1면 <!--“政府는 駐「브라질」大使朴東鎭씨를 駐「페루」大使도 겸임토록 28일하오 國務會議에서 議決했다.”--></ref>, 주 제네바 대사, 주 유엔 대사,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외무부 장관, 국회의원(11대.12대), [[대한민국 통일부|국토통일원]] 장관을 역임했다. 외무부장관으로서, 1976년 3월 말레이시아를 방문하여, 리타우딘 말레이시아 외무부 장관과 양국간의 경제무역관계를 더욱 강화하기로 합의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603190032920101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6-03-19&officeId=00032&pageNo=1&printNo=9377&publishType=00020 |제목= 貿易強化에 합의...韓․말聯 공동성명 |출판사 = 경향신문 | 날짜 = 1976-03-19 |인용문=<!--朴東鎭외무부장관과 리타우딘 말레이시아외상은 19일 공동성명을 발표, 평화․자유․번영이라는 공동목표를 추진하기 위해 아시아 제국간의 협력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양국간의 경제무역관계를 더욱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朴장관은 지난 17일부터 3일간 말레이시아를 공식 방문한 후 발표한 이 성명에서...--> }}</ref> 1988년 4월 22일 한국 정부는 박동진을 주미대사에 임명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42200209201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4-22&officeId=00020&pageNo=1&printNo=20477&publishType=00020| 제목 = 駐美大使 朴東鎭씨| 날짜 = 1988-04-22| 출판사 = 동아일보}}</ref> 박동진은 당시 민정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이었으나, 주미대사로 부임함에 따라 의원직을 사퇴하였고, 민정당 전국구 예비후보 11번인 김종열이 5월 13일자로 의원직을 승계하였다.
         <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51100329202010&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8-05-11&officeId=00032&pageNo=2&printNo=13112&publishType=00020| 제목 = 金鍾烈씨 議員職승계 朴東鎭 駐美대사 사퇴 | 날짜 = 1988-05-11| 출판사 = 경향신문 }}</ref> 1988년부터 1991년까지 주 미국 대사, 한국전력공사 이사장, 1996년부터 한국외교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 박보생 . . . . 4회 일치
         ||<bgcolor=#808080> '''{{{#FFFFFF 학력}}}''' ||<(> 김천농림고등학교 {{{-1 ([[졸업]])}}}[br][[한국방송통신대학교]] {{{-1 (행정학 / [[학사]])}}}[br][[경북대학교]] {{{-1 (행정학 / [[석사]])}}}[br][[경북대학교]] {{{-1 (행정학 / [[박사]])}}} ||
         ||<bgcolor=#808080> '''{{{#FFFFFF 경력}}}''' ||<(> 김천시청 기획실장[br]김천시청 행정지원국장[br]김천시청 사회사업국장[br]김천과학대학 책임연구위원[br]국제배드민턴연맹 한국대표단장[br]김천시체육회 회장[br]제18~20대 경상북도 김천시장[br]전국혁신도시지구 협의회 회장 ||
         [[대한민국]]의 [[공무원]] 출신 [[정치인]]이다. 전직 [[경상북도]] [[김천시]]장으로 당적은 [[자유한국당]]이다.
         1951년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태어났다. 김천농공(농림/공업)고등학교(현 [[김천생명과학고등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 [[경북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 박상돈(정치인) . . . . 4회 일치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선진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통합당]] [[박완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같은 해 자유선진당이 [[국민생각]]과 합당하여 [[선진통일당]] 소속이 되었다가 선진통일당이 새누리당에 흡수되자 [[새누리당]] 소속이 되었다. 이후 [[자유한국당]] 소속이 되었다.
         2018년에는 급을 낮춰 천안시장 출마를 선언, 자유한국당 공천을 받아 본선에 나섰으나 또 졌다.(...)
         또 다른 천안시의 국회의원인 [[양승조]] 의원과 함께 국무총리실 관리관 출신의 [[구본영]]을 열린우리당으로 영입하는데 큰 업적을 세운 인물이다. 현재 자신은 [[자유한국당]]에 있지만, 남은 두 사람은 각각 충남도지사 후보를 노리고 있고, [[천안시]]장을 역임하고 있다. --어쩌면 천안시를 민주당의 텃밭으로 만들려는 큰 그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육사2기수 절친후배인 [[구본영]] 현직시장과 대결하게 되었다. --[[구본영]]의 선거책자 뒷면에는 ''[[문재인]] [[양승조]] 구본영 VS [[홍준표]] [[이인제]] 박상돈' 이라고 적혀있다(...)--
         || 2018 ||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충남 천안시장) || [[자유한국당]] || 92,119 (35.31%) || 낙선 (2위) || ||
  • 박승호(정치인) . . . . 4회 일치
         || '''학력''' ||<(> 연세대학교 도시행정학 석사[br]한국체육대학교 이학 박사 ||
         || '''소속 정당''' ||<(> [[무소속|{{{#808080 '''무소속'''}}}]][* [[자유한국당]]에 복당을 신청하였다.] ||
         1957년 (현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태어났다. 달전초등학교, 동지중학교, [[포항고등학교]], [[용인대학교]] 체육학과,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 [[석사]], 동 대학교 행정대학원 도시행정학 석사, [[한국체육대학교]] 대학원 이학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새누리당]] [[공천]]에서 [[김정재]]에 밀렸다. 이후 새누리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누리당 김정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바른정당에 합류하여 2017년 3월 [[바른정당]]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당협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다시 탈당하여 자유한국당에 복당을 신청하였다.
  • 박정수(정치인) . . . . 4회 일치
         국제의원연맹 집행위원에 임명된 이듬해인 1996년,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월드컵]] 유치에 전념하겠다는 이유로 [[신한국당]] 전국구 의원직을 요구했다가 신한국당 수뇌부에 의해 거절당하였다. 이 상황에서 외교전문가 영입에 몰두하던 [[새정치국민회의]]에 전국구 의원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입당해 제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전국구 의원이 되고 부총재를 역임한다.[* 이 당시 새정치국민회의에서는 박정수를 포함한 보수적 인사들을 영입하려 노력하였고, 그 결과 [[오유방]], 정희경 등 민주정의당 출신 인사들이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였다.]
         1998년 3월 [[김대중]] 정부의 초대 외교통상부(현 [[외교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 해 5월의 기자회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문화 개방 및 '''천황'''의 방한을 원하신다"라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그리고 그 해 7월에는 모스크바 주재 한국대사관원의 강제추방 사건에 맞대응해 서울 주재 러시아대사관원인 올레그 아브람킨 참사관을 강제추방한 것이 화근이 되어 5개월 만에 장관직에서 경질된다. 이후 1998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에 복귀했다.
  • 박진주 . . . . 4회 일치
         | 《[[프로포즈 대작전 (2012년 드라마)|프로포즈 대작전]]》
         ===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 출연) ===
         * [[TV조선]] 《[[프로포즈 대작전]]》 OST - 그날 이후 (2012년)
  • 박현진 (음악가) . . . . 4회 일치
         === 텔레비전 프로그램 ===
         === 라디오 프로그램 ===
         * 《[[롯데:LG 야구 시구]]》(2017.5.21) - 시구&클리닝타임공연
         [[분류:200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어린이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래퍼]][[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래퍼]][[분류:대한민국의 힙합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어린이 래퍼]][[분류:K팝 스타 참가자]][[분류:리얼리티 텔레비전 프로그램 우승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박희부 . . . . 4회 일치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가 1984년 해금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충청남도 연기군-[[대덕구|대덕군]]-[[금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천영성]] 후보와 [[민주한국당]] [[유한열]]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충청남도 연기군-대덕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주공화당]] [[이인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할 때 합류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통일국민당]] 후보로 충청남도 연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치러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통일국민당을 탈당하여 민주자유당에 복당하였다. 이후 민주자유당, [[신한국당]]에서 원내부총무를 임명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연합]] 김고성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7년 한보그룹 비리로 구속되었다.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연기) || [[신한국당]] || 11,989 (29.77%) || 낙선 (2위) || ||
  • 배성룡 . . . . 4회 일치
         '''배성룡'''('''裵成龍''',[[1896년]] [[10월 28일]] [[경상북도]] [[청도군]] ~ [[1964년]] [[12월 8일]])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언론인, 경제평론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성주 배씨|성주]](星州). 필명은 수성(秀星)·성산학인(星山學人)·성산생(星山生)·성산인(星山人)·별뫼이다.
         *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HIL_A1896_1_0025723&curSetPos=0&curSPos=0&isEQ=false&kristalSearchArea=P 한국역대인물 - 배성룡]
         [[분류:1896년 태어남]][[분류:1964년 죽음]][[분류:청도군 출신 인물]][[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의 통일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 백결 선생 . . . . 4회 일치
         '''백결'''(百結, [[414년]]<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1971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ref> ~ ?) 또는 '''백결 선생'''(百結 先生)은 [[신라]] 전기의 [[거문고]] 명수이다.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영해 박씨 족보》에 따르면 [[눌지 마립간]]대의 문신 [[박제상]]의 아들이라고 한다. 또한 그의 형 또는 동생인 박효원(朴孝元)은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왕건의 측근인 [[박술희]]의 15대 선조가 된다. 다른 이름은 '''문량'''(文良)이다.
         {{토막글|한국 사람}}
         [[분류:414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5세기 한국 사람]][[분류:신라의 작가]][[분류:신라의 음악가]][[분류:신라의 시인]][[분류:신라의 문신]]
         [[분류:한국의 작곡가]][[분류:신라의 작곡가]][[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영해 박씨]]
  • 백성현 . . . . 4회 일치
         * [[2009년]] [[김형중]] - 오늘의 운세
         * [[2010년]] [[채널동아]] 《스타도네이션 프로젝트 '백성현의 희망 티셔츠'》
         * [[2014년]] [[SBS]] 《[[매직아이 (텔레비전 프로그램)|매직아이]]》
         * [https://web.archive.org/web/20140227072440/http://www.sidushq.com/star/bshyun 소속사에 의한 프로필]
  • 보나 . . . . 4회 일치
         [[분류:우주소녀]][[분류:한국 여배우]][[분류:1995년 출생]][[분류:달서구 출신 인물]][[분류:아이돌 댄서]]
          * 2016년 7월 22일, 공개된 [[네이버 웹소설]]의 특집 프로젝트인 '썸남에서 겟남까지'의 [[http://tvcast.naver.com/v/998129|광고모델로]] [[http://tvcast.naver.com/v/998161|출연했다.]]
          * 2017년 6월 25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2017 KBO리그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와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에서 시구를 맡았다.
  • 빌리 블랭크스 . . . . 4회 일치
         1980년대에 태권도('''tae''' kwon do)와 복싱('''bo'''xing)을 결합한 무술 겸 트레이닝 프로그램 '[[태보]]'를 창안하여,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캘리포니아]] 일대에 널리 보급했다.
         2008년에 부인과 [[이혼]]하고, 2009년에 14세 연하로서 자신의 통역을 담당하던 일본인 여성과 재혼했다. 2008년 11월에 일본인 부인과의 사이에서 장녀를 얻었다.
         2009년 6월에 오사카 시내에서 결혼식과 피로연을 열었으며, 7월에 오사카 신사이바시에 트레이닝 스튜디오 빌리 브랭크스 인터내셔널 스튜디오를 개설했다. 2009년 4월에 일본에 [[영주권]]을 신청했음을 밝혔다.
  • 서지영(가수배우) . . . . 4회 일치
          * 상위 문서: [[가수/한국]], [[배우/한국]]
         한참 샵으로 활동했을 당시엔 [[덧니]]가 매력 포인트였다. 싫어하는 사람들은 뻐드렁니라고 한다. 그러나 덧니가 사라진 뒤로는 개성 있는 얼굴이 다소 평범해졌다는 평. 때문인지 솔로로 컴백하고 나서 샵 시절만큼보다 큰 반향을 얻지는 못하고 이내 토크쇼 등 예능 프로그램을 전전하는 행보를 보였다.
         [[분류:한국 여배우]] [[분류:아이돌 댄서]] [[분류:1981년 출생]] [[분류:달서구 출신 인물]]
  • 성유미 . . . . 4회 일치
         [[연합뉴스TV]]의 [[아나운서]]. 지역방송국을 통해 경력을 쌓아왔다. 2010년에는 춘천시청 아나운서, 2011년에서 2012년까지는 TBC [[대구방송]]에서 아나운서로 근무하였고 2012년 8월부터 연합뉴스TV에 입사하여 아나운서로 뉴스프로그램을 진행해오고 있다. 지역방송국에서 2년 가까이 경력을 쌓아온 터라 진행능력 및 발성이 안정적인 편이다. 단아하고 지적인 이미지와 함께 생글생글 웃는 눈웃음이 매력포인트라서 팬들에게 "윰블리"라고 불리고 있다.
         == 프로그램 ==
         === 진행프로그램 ===
         === 하차프로그램 ===
  • 송아영 . . . . 4회 일치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종교]]는 [[개신교]]이다. 현재 [[자유한국당]] 중앙당 부[[대변인]]이다.
         이후 [[한국영상대학교]] 음악과 [[교수]]를 지냈다.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의 [[세종특별자치시장]] [[공천]]을 받았으나 현 시장인 이춘희 후보에게 큰 표차로 낙선했다.
         || 2018 ||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세종특별자치시장) || [[자유한국당]] || 24,546 (18.06%) || 낙선 (2위) || ||
  • 송종익 . . . . 4회 일치
         '''송종익'''(宋鍾翊, [[1887년]] [[2월 27일]] ~ [[1956년]] [[1월 7일]])는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본관은 [[야로 송씨|야로]], 호는 우강(友江),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이다.<ref>[http://100.naver.com/100.nhn?docid=756377 송종익 - 네이버]</ref>
         [[1905년]] 일본으로 유학을 갔으며 [[1906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가 [[재미 한국인]]의 애국 계몽 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했다. [[1908년]] [[전명운]]과 [[장인환]]이 미국 외교관 [[더럼 스티븐스|D. W. 스티븐스]]를 암살한 사건이 일어난 이후부터 재판후원회 재무로 활동하였다. [[1913년]] [[흥사단]] 창단 때 경상도 대표를 지냈으며 [[1919년]]에는 흥사단 이사장과 [[대한인국민회]] 재무를 지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PPL_7HIL_A1887_1_0006081|송종익}}
         {{토막글|한국 사람}}
  • 수애 . . . . 4회 일치
         | 제28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제1회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상
         * [http://people.hanple.com/people.php?cmd=view&pp_no=2720 수에 프로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
  • 스타크래프트 시리즈 . . . . 4회 일치
         [[우주]]를 배경으로 [[테란]], [[프로토스]], [[저그]] 세 종족의 이야기를 다뤘으며 1998년에 1편이 나오고, 이후 2010년에 2편이 나왔다. 이외에도 소설, 코믹스가 나왔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시리즈]], [[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와 더불어 RTS의 유명 게임.
         한국에서는 [[PC방]], [[프로게이머]], [[E스포츠]] 등 많은 영향을 끼쳤다. 관련없는 장르나 매체에서도 패러디를 볼 수 있을 판.
          * [[프로토스]]
  • 신종령 . . . . 4회 일치
         | 데뷔일 = [[2009년]]
         '''신종령'''([[1982년]] [[3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코미디언]]이다. [[2010년]] [[KBS]] 25기 공채 개그맨으로, 2009년 《[[개그 스타]]》의 코너 〈늦었어〉를 통해 데뷔하였다.
         === 출연 프로그램 ===
         [[분류:개그콘서트]][[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희극인]][[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대한민국의 범죄인]][[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대구대학교 동문]][[분류:2009년 데뷔]][[분류:1982년 태어남]]
  • 양윤재 . . . . 4회 일치
         | 직업 = 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교수<br>서울시 행정2부시장<br>한국과학기술원 초빙석좌교수
         * 2001 ~ : 한국도시설계학회 부회장
         * 2010.04 ~ : 한국도시설계학회장
         * 한국과학기술원 초빙석좌교수
  • 어쌔신 크리드 III/임무일람 . . . . 4회 일치
         코너는 미리암 몰래 미리암의 캠프로가서 주변을 탐색한다. 그러던 도중 부러진 단검을 발견한다. 미리암이 사냥한 노루를 해체하다 부러뜨린 것이라고 추측한 코너는 모리스에게 돌아가 미리암이 새 단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코너는 북쪽에서 새떼가 날아오르는걸 발견, 북쪽으로 아퀼라를 몬다. 그곳에서 랜돌프를 발견, 추격을 시작한다. 랜돌프는 폭풍우 속으로 도망쳐 영국군 전열함 두척의 지원을 받지만 아퀼라는 전열함들을 격침시키고 아퀼라의 돛대를 부러뜨린다. 이후 코너와 선원들이 랜돌프로 도선해 전투를 벌인다.
         1776년, 동해안. 아퀼라는 프로스펙터가 비밀을 숨기고 탈출하지 못하게 출항한다. 아퀼라는 영국 초계함대를 전멸시킨 후 암초지대에 잠복, 프로스펙터와 그 함대를 전멸시킨다.
  • 오승희 . . . . 4회 일치
         | 소속사 = [[업프론트프로모션]]
         '''오승희'''(吳承姬<ref name="hanja">[https://www.facebook.com/Umusic.JKPOP/photos/a.260040747449.141783.251736272449/10154571559607450/?type=3 모닝구 무스메 한자 자필]</ref><ref>[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21/2017082102498.html [더스타프로필] 오승희 "모닝구 무스메만의 리얼리티 찍고 싶다…빅재미 드릴 것"] {{웨이백|url=http://thestar.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21/2017082102498.html |date=20170912003602 }} 2017-08-25</ref>, [[1995년]] [[10월 10일]] ~ )는 일본의 가수로, [[모닝구 무스메]]의 서브보컬이다.<ref>{{웹 인용|url=https://www.youtube.com/watch?v=aWRTsHtA9zY|title=Debut Greeting at 모닝구 무스메 SHOWCASE|first=|last=보따리 bottari|date=2015-03-25|publisher=|accessdate=2017-08-12|via=YouTube}}</ref><ref>{{웹 인용|url=http://entertain.naver.com/now/read?oid=311&aid=0000587211|title=[XP★SHOT] 모닝구 무스메가 궁금해? 안전담당부터 보호본능까지③|publisher=xportsnews|date=2016-03-15|accessdate=2017-08-12}}</ref><ref>{{웹 인용|url=https://www.youtube.com/watch?v=y0Rau6SssxE|title=칯트키 Live - “PRODUSORN” EP02: LIFE AS A GIRL GROUP|first=|last=Cube Ent|date=2017-04-25|publisher=|accessdate=2015-03-18|via=YouTube}}</ref><ref>{{웹 인용|url=https://m.facebook.com/모닝구 무스메.UnitedCube/photos/a.1511382879116331.1073741828.1489401217981164/1558678227720129/?type=3&source=54|title=CLC Facebook:Seunghee|date=2017-03-14}}</ref><ref name=supertv>2018-04-06,XtvN,SUPER TV EP11,「메인래퍼、은지」「센터、은지」「리드보컬、모닝구 무스메」「리더、모닝구 무스메」。</ref>
         === 텔레비전 프로그램 ===
         *1997년인기오디션프로그램[[ASAYAN]]에서 개최된 샤란Q보컬리스트오디션 메이저에 데뷔하였으며 멤버를교체해가면서 장기간활동을 계속하고있는아이돌그룹이다
  • 원피스/855화 . . . . 4회 일치
          * 하지만 빅맘이 잠결에 거울을 깨고 그 소리에 프로메테우스, 제우스, 나폴레옹이 집중공격.
          빅맘 [[샬롯 링링]]의 처소 "여왕의 방". 빅맘은 브룩을 소중한 인형처럼 품에 끼고 잠들어 있다. 게다가 브룩 자신도 꿀잠 중. 주위엔 "프로메테우스", "제우스", "나폴레옹"이 함께 자고 있다. 브룩을 구하려던 일행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당황한다.
          * 거울을 들여다 보며 발만 구르는데, 빅맘이 갑자기 눈을 뜬다. 하지만 단순한 잠꼬대. 그때 마침 파리가 날아가고 빅맘이 잠결에 때려잡는다. 그 충격에 바닥이 박살나고 잠자던 프로메테우스, 제우스, 나폴레옹이 짜증을 부리며 소리가 난 곳을 공격한다. 정작 깨줬으면 하는 브룩은 잠깐 일어났다가 "뭐야 파리냐"하고 도로 잠들어 버린다. 속 터지는 상황에 빅맘의 엄청난 위력까지 목격한 일행은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그 자리에 얼어붙는다.
          * 브룩이 떨어지자 이번엔 [[나미(원피스)|나미]]가 시도한다. 나미는 브룩을 깨워서 데려가려 하는데 막 깨어난 브룩은 나미가 짊어진 가짜 브룩을 보고 놀라 귀신이라고 비명을 지른다. 그 소리에 다시 잠에서 깬 빅맘. 아직도 파리인 줄 알지만 정말로 짜증이 한계에 달해서 프로메테우스를 집어서 휘두른다. 위험하다고 생각한 징베는 거울 밖으로 몸을 날려 빅맘의 "헤븐리 파이어"에서 나미와 브룩을 구한다. 겉옷에 불이 붙지만 몸을 굴리면서 거울 속으로 도주, 가짜 브룩도 무사히 현장에 놔두고 왔다. 작전은 결국 성공.
  • 윤덕주 (농구인) . . . . 4회 일치
         빈소는 서울대병원 영안실 3층1호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2일 오전6시에 거행되었다.<ref>[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507/h2005070818102324180.htm 윤덕주 대한농구협회 명예회장 별세]</ref> 2005. 7. 12(화) 오전 6시 대한농구협회장(장례위원장, 이종걸)으로 거행되었으며 장지는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면]] 연화리 선영에 안장되었다.<ref>[http://www.jumpball.co.kr/cont/cont_view.php?cont_cd=02&cont_seq=2785 한국농구 대모 윤덕주 명예회장 별세]</ref>
         *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한국선수단 부단장
         * [[1999년]] [[4월 27일]] ~ [[1999년]] [[6월]] 제18회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5월2-9일, 일본 시즈오카) 한국 선수단 단장<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570997 한국 여자농구대표팀 28일 결단식]</ref>
  • 윤민수 (가수) . . . . 4회 일치
         [[1998년]] [[R&B]] [[보컬]] 그룹 [[포맨]](1기)으로 데뷔했으며, [[포맨]] 1기 해체 이후 [[2002년]] [[류재현]], [[노블레스 (가수)|유성규]]([[노블레스 (가수)|노블레스]])와 함께 [[바이브 (음악 그룹)|바이브]]를 결성했다. 1집 〈미워도 다시 한 번〉, 〈Promise U〉([[2006년]] [[씨야]] 1집에서 리메이크) 등의 곡으로 [[바이브 (음악 그룹)|바이브]]라는 이름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킨 후<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3&aid=0000010498 '브라운 아이드 소울' , '바이브' 전성 시대] 《뉴시스》, 2003년 12월 5일</ref>, [[2003년]] 2집 〈오래 오래〉, 〈사진을 보다가〉에 이어 [[2006년]]에 발표한 3집 〈술이야〉와 〈그 남자 그 여자〉는 방송 활동 없이 10만 장 이상의 앨범 판매와 각종 음반 차트에서 1위 및 각종 수상을 받는 등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3집 활동을 끝내고 [[2006년]] 말 [[산업기능요원]]으로 대체 복무를 시작하여 [[2009년]]에 끝내고 잠시 공백 기간을 가졌으며, 가수 활동을 하며 경험할 수 없었던 ‘직장 생활’ 이야기를 소재로 한 곡을 만들어 복무를 끝낸 후 발표한 4집 수록곡에 싣기도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79&aid=0002161570 바이브 "예능에서 망가질 자신 없다"] 《노컷뉴스》, 2010년 6월 16일</ref> [[2010년]] 4집 《Vibe in Praha》를 발매해 다시 한 번 많은 사랑을 받았다. 현재 [[바이브 (음악 그룹)|바이브]]의 멤버이면서 그룹 [[포맨]]([[신용재]], [[김원주 (가수)|김원주]])이 소속된 와이후엔터프라이즈의 대표이자 [[음악 프로듀서|프로듀서]], [[작곡가]]로 활동 중이다. [[2011년]] [[MBC TV|MBC]] [[우리들의 일밤]]의 코너 [[나는 가수다]]에 출연해 명예 졸업했으며, [[2013년]] 1월부터 장남 윤후와 함께 [[MBCTV|MBC]] [[우리들의 일밤]]의 코너 [[아빠! 어디가?]]에 출연했었다. 그가 출연한 [[2011년]]의 "[[나는 가수다]]" 코너가 대상을 받았고, [[2013년]]에는 "[[아빠! 어디가?]]" 코너가 대상을 받아 가수로는 드물게 방송연예대상을 2회 수상하였다.<ref>[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312300054041210 MBC연예대상 진짜 승자는 윤민수 ‘3년간 대상 2연패’] - 뉴스엔</ref>
         [[분류:198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98년 데뷔]][[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R&B 가수]][[분류:2010년대 가수]][[분류:2000년대 가수]][[분류: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가수]][[분류:파평 윤씨]][[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프로듀서]][[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
  • 이계순 (1927년) . . . . 4회 일치
         일본으로 유학, [[1940년]] [[교토]](京都) 제일고녀를 다녔다.<ref>[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921421094 일본인들이 부러워한 조선인 석주명] 국민일보 2009.09.14</ref> 귀국 후 [[1953년]] [[부산]] [[경남중학교]] [[영어]]교사가 되었다. 이후 부산연세실업학교 교수 등을 거쳐 [[1964년]] [[서울대학교]] 사범대 영어교육과 교수가 되었다. [[1977년]] [[전문직 여성클럽]] 한국연맹 회장이 되어 여성단체 활동에 뛰어들었고 교수직과 병행하였다. [[1985년]]부터 [[한국여성유권자연맹]] 회장을 맡았다. 1990년 3월부터 [[1991년]] [[12월]]까지 정무제2장관을 지냈다.
         [[1990년]] 정무제2장관 재직 중 ‘국·공립 연수기관에 여성관련 교과목’을 만들었다. 1991년에는 그가 직접 나서서 공무원 연수기관장들과 간담회를 열어 협조를 구했다. 이렇게 해서 개설되기 시작한 ‘여성관련’ 교과목은 ‘국가발전과 여성’ ‘여성문제의 현실과 정책방향’ 등의 과목명으로 1~2시간 특강 형식으로 배정됐다. 그러다가 정규과목으로 개설되고 교육훈련점수에도 반영되어 선택과정으로 전환되고 전문과정으로까지 확대됐다. 초창기 교수요원의 확보와 교육자료의 개발 등은 한국여성개발원이 담당했다.<ref>[http://www.womennews.co.kr/news/48170#.VNroPaJFBzo 공무원 양성평등교육이 제도화되기까지]</ref> 1990년 12월 27일의 개각에서 유임되었으며, [[1991년]] 퇴임 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명예교수에 위촉되었다.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443092 이계순 정무2장관 프로필]
  • 이기택 . . . . 4회 일치
         1980년 [[5.17 내란]]으로 신군부에 의해 정치활동이 규제되었다가 1984년 해금되면서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동래구 지역구에는 이미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한 자신의 비서 출신 [[박관용]]이 있었다. 이에 지역구를 [[해운대구]]-[[남구(부산)|남구]]로 옮기고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당 고문으로서 [[해운대구]]-[[기장군]] 갑 지역구에 출마했다가 [[신한국당]] [[김운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가 이끌던 통합민주당은 수도권에서 중도층의 지지를 일부 흡수하긴 했지만[[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5082|#]], 기존의 30석에서 15석(지역구 9석 + 전국구 6석)으로 의석이 반토막나면서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하였고, 같은 야권의 경쟁상대인 새정치국민회의에 비해 너무나도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울특별시 지역에서는 양천구의 서경석 목사를 비롯한 쟁쟁한 후보들을 내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강동구 갑의 [[이부영]]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낙선을 면치 못했고, 거의 전지역 3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기대했던 부산광역시에서는 전원 낙선이었다. 그나마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몇 개의 의석을 건지긴 했으나, 김영삼의 [[신한국당]]이 과반수 확보를 위해 황규선(이천시), [[이규택]](여주군), [[최욱철]](강릉시 갑) 등의 당선자 빼가기에 나서면서 폭망 확정.] 물론 김대중의 국민회의도 이때 상당히 부진했으나, 무엇보다 [[김종필]]의 [[자민련]]이 50석으로 크게 약진한 것과 크게 비교되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정계은퇴를 권유하였으나, 놀랍게도 통합민주당을 [[신한국당]]과 합당시키는 결단을 내렸다. 김영삼의 밑에 있다가, 김대중과 손을 잡았는데, 그 뒤에는 이회창의 밑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때 조순, 이철과 제정구는 이기택과 함께 한나라당으로 갔다. 그러나 노무현, 김정길, 김원기는 이기택과 절연하고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로 합류하였다.] 이기택으로서는 DJ, YS, JP 3김을 중심으로한 정치에 염증이 느끼고 있었고, [[1996년]] 김대중의 정계 복귀 뒤에 김대중과 갈등이 크게 겪게 되었고 그 과정 속에서 통합민주당이 와해당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3김 정치 청산을 내세운 이회창과 손을 잡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해서 [[한나라당]]을 창당했으나, 결국 1997년 12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여당해보나 했더니 또 야당됐네~~
  • 이동춘 . . . . 4회 일치
         |프로 데뷔 = 1980년
         '''이동춘'''(李東春, Dong-Chun Lee, [[1963년]] [[3월 8일]] ~ [[1995년]] [[9월 9일]])은 [[대한민국]]의 전 [[권투]] 선수로, 한국과 일본에서 활동했다. 일본명은 '''그레이트 가나야마'''(グレート 金山)이다.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1980년]] [[11월 18일]] [[대한민국]]에서 프로 무대에 데뷔했으며, [[1981년]] [[11월 18일]] [[OPBF]] 밴텀급 경기에서 [[오장균]]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1983년]] [[7월 26일]] 대한민국 밴텀급 챔피언에 올랐으며, [[1992년]] [[6월 6일]] [[일본]] 밴텀급 챔피언에 올랐다.
         통산 전적은 57전 45승(26KO) 2무 10패이며, [[1995년]] [[9월 5일]] [[도쿄도]] [[고라쿠엔 경기장]]에서 벌어진 [[세가와 세쓰오]]와의 경기에서 판정패한 뒤 급성 [[경막하혈종]]으로 쓰러져 4일 후인 [[9월 9일]] 사망했다.<ref>{{뉴스 인용|제목=韓國프로복싱선수,日링서 쓰러져 사망서|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3925974|출판사=연합뉴스|저자=|날짜=1995-09-10}}</ref>
  • 이병석(정치인) . . . . 4회 일치
         ||<-5><:> '''[[대한야구협회]] 역대 총재''' ||
         李秉錫. [[1952년]] [[10월 28일]]생. [[한국]]의 [[정치인]].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무비서관을 역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포항)|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옥중 출마한 [[무소속]] [[허화평]]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7년 허화평의 [[국회의원]]직 상실로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도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박태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이상오 . . . . 4회 일치
          | 소속 = 前 [[자유민족바둑동호회]] 회장 <br/> 前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 前 [[한국독립당]] 최고위원(1956년 ~ 1959년)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4460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분류:일제 강점기의 스포츠 평론가]][[분류:경주 이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김구]][[분류:한국독립당]][[분류:염상섭]][[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박헌영]][[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과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군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역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 평론가]][[분류:유교 신자]][[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륜고등학교 동문]][[분류:호세이 대학 동문]]
  • 이선아 . . . . 4회 일치
         |활동기간 = [[2009년]] ~ 현재
         * [[2009년]] [[드라마]] 《[[스타일 (드라마)|스타일]]》
         * [[2009년]] [[드라마]] 《[[아내가 돌아왔다]]》
         [[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198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2009년 데뷔]][[분류:한양대학교 동문]][[분류:전의 이씨]]
  • 이시형 (1934년) . . . . 4회 일치
         * 한국보육진흥원 ‘아이누리 자문단’
         * 한국자연의학종합연구원 원장
         * 이시형과 함께 읽는 프로이트(2002)
         * 품격 (2009년 현재 총 68권 출간)
  • 이유리(배우) . . . . 4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 top1=배우/한국)]
         || 2009년 || MBC || 사랑해, 울지마 || 조미수 || ||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353535><#353535> '''{{{#white 출연 연도}}}''' ||<#353535> '''{{{#white 방송사}}}''' ||<#353535> '''{{{#white 프로그램}}}''' ||<#353535> '''{{{#white 역할}}}''' ||<#353535> '''{{{#white 비고}}}''' ||
         [[분류:한국 여배우]][[분류:1980년 출생]][[분류:1999년 데뷔]][[분류:김천시 출신 인물]][[분류:라디오 스타의 역대 게스트]]
  • 이주호 (1961년) . . . . 4회 일치
         * 2001년 6월 ~ 2004년 5월 한국직업교육학회 이사
         * 2002년 3월 ~ 2004년 5월 한국노동경제학회 이사
         * 2009년 1월 ~ 2010년 8월 교육과학기술부 제1차관
         |임기 = [[2009년]] [[1월 20일]] ~ [[2010년]] [[8월 16일]]
  • 이지우 (레이싱모델) . . . . 4회 일치
         * 2006년 CJ 슈퍼레이스 챔피언십 [[한국타이어]] 스폰서십 전속
         * 2013년 CJ헬로비전 슈퍼레이스 챔피언십 [[한국타이어]] 스폰서쉽 전속
         ; 2009년
         {{토막글|한국 사람|방송인}}
  • 이효상 . . . . 4회 일치
         1963~1971년 6, 7대 국회의원, 국회의장을 역임하고 IPU․APU 한국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하였다. [[1973년]], 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같은해 3월에는 공화당 의장서리 겸 당무위원이 되고, 1979년 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공화당총재 상임고문에 취임하였다. 상훈으로는 [[서독]] 1급 대십자훈장, 교황청 대십자기사훈장, [[말레이시아]] 판쿠안네가라 최고훈장 등을 받았다.
         그가 [[박정희]]의 대통령 선거 때 "이 고장은 [[신라]] 천 년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지만 이 긍지를 잇는 이 고장의 임금은 여태껏 한 사람도 없었다. 박 후보는 신라 임금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다. 이제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을 천 년만의 임금으로 모시자.",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 등의 발언이 문제가 되어 지역감정을 조장했다. 현대 한국 정치사에서 지역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효시로 보기도 한다.<ref name="김충식">[[김충식 (1954년)|김충식]],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 1 (1992, 동아일보사)</ref>{{Rp|305}}<ref name="이상우">[[이상우]], 박 정권 18년: 그 권력의 내막 (1986, 동아일보사)</ref>{{Rp|343}}<ref>{{웹 인용 |url=http://www.sportsseoul.com/news2/ptoday/people/2009/0819/20090819101140200000000_7342608763.html |제목=[DJ 삶의 5가지 꼬리표] 시련·멍에는 역사의 거목을 키웠다 |확인날짜=2010년 1월 30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90824010951/http://www.sportsseoul.com/news2/ptoday/people/2009/0819/20090819101140200000000_7342608763.html |보존날짜=2009년 8월 24일 |깨진링크=예 }}</ref>
         * 차남 [[이문희]] ([[로마 가톨릭]] [[대주교]], 전 천주교 대구대교구 교구장, 전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 인천광역시/인물 . . . . 4회 일치
         * [[김영준(야구선수)|김영준]] - 미추홀구
         * [[김진영(야구)|김진영]] - 옹진군(인천)
         * [[김홍집(야구)|김홍집]] - 중구(인천)
         * [[벤(한국 가수)|벤]] - 동구(인천)
  • 일곱개의 대죄/175화 . . . . 4회 일치
          * 길선더는 자신을 멜리오다스 곁으로 순간이동 시켜달라고 길프로스트를 닥달한다.
          * 그러나 길 프로스트는 개봐야 개죽음이고 "네가 죽으면 곤란하다"며 거절한다.
          * 옥신각신하며 길선더는 길프로스트가 끼고 있는 반지를 발견하고 놀라고, 길프로스트는 황급히 손을 감춘다.
  • 임인배 . . . . 4회 일치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경상북도 김천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신한국당 원내부총무에 임명되었다. 1999년 한나라당 원내부총무에 임명되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김천고등학교 동기생인 [[이철우(1955)|이철우]]에게 밀려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하였다. 같은 해부터 2010년까지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2014년부터 [[안양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하고 있다.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김천) || '''[[신한국당]]''' || '''34,576 (45.23%)''' || '''당선 (1위)''' || ||
  • 임효준 . . . . 4회 일치
         | 학력 = 한국체육대학교
         * [[한국체육대학교]]
         [[1996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이후 [[계성초등학교]]를 졸업, [[경신중학교]]에 진학했다가 [[오륜중학교]]으로 전학한 뒤, [[동북고등학교]]를 거쳤다. 현재는 [[한국체육대학교]]에 재학 중에 있다.<ref name="대구일보">https://www.idaegu.co.kr/news.php?mode=view&num=242141</ref> 어린 시절에는 [[수영]]을 좋아했으나, 초등학교 2학년 때 [[고막]]이 터지는 바람에 수술대에 올랐고 이후 수영을 포기해야 했다.<ref name="스포츠조선">http://sports.chosun.com/news/pcnews.htm?id=201802110100090830006597&servicedate=20180210</ref> 이후 초2때 종목을 바꾸어 빙상부에 들어갔고, 4학년 때부터는 종별대회에서 1위를 기록하였다.<ref name="스포츠조선"/>
         [[분류:199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동메달리스트]][[분류:올림픽 쇼트트랙 메달리스트]][[분류:2018년 동계 올림픽 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쇼트트랙 참가 선수]][[분류:2018년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참가 선수]][[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계성초등학교 (대구) 동문]][[분류:오륜중학교 동문]][[분류:동북고등학교 동문]][[분류:한국체육대학교 동문]]
  • 정정아 . . . . 4회 일치
         * [[2009년]] [[세종대학교]] 대학원 영화연기예술학과 예술학 석사
         * 2008년~2009년 [[KBS]] <[[청춘예찬]]> - 주애순 역
         * 2009년 [[KBS joy]] <[[미녀들의 1박 2일]]> - MC
         {{토막글|한국 배우}}
  • 최운정 . . . . 4회 일치
         | 프로데뷔 = [[2008년]]
         | 프로우승 = 1승
         | 한국 LPGA 투어 =
         '''최운정'''({{llang|en|Chella Choi}}, 첼라 최, [[1990년]] [[8월 25일]] ~ )<ref>[http://www.seoulsisters.com/players/misc/chella.htm Seoul Sisters profile]</ref>은 [[대한민국]]의 프로 [[골프 선수]]이다. 소속사는 볼빅이다.
  • 최은경 (쇼트트랙 선수) . . . . 4회 일치
         | 학력 = [[한국체육대학교]]
         [[세화여자고등학교]] 2학년 때인 [[2002년 동계 올림픽|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과 [[한국체육대학교]] 3학년 때인 [[2006년 동계 올림픽|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에서 2회 연속으로 3000m 계주 금메달과 1500m 은메달을 획득했다. [[2003년]] [[폴란드]] [[바르샤바]] [[세계 쇼트트랙 선수권 대회]]와 [[2004년]] [[스웨덴]] [[예테보리]] [[세계 쇼트트랙 선수권 대회]]에서 2회 연속으로 종합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2005년]] [[중국]] [[베이징]] [[세계 쇼트트랙 선수권 대회]]에서는 종합 2위에 올랐다.
         * [[한국체육대학교]] [[스포츠 심리학]] 박사
         [[분류: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분류:198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구용지초등학교 동문]][[분류:목일중학교 동문]][[분류:세화여자고등학교 동문]][[분류:한국체육대학교 동문]][[분류:2002년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참가 선수]][[분류:2006년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참가 선수]][[분류:올림픽 쇼트트랙 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은메달리스트]][[분류:아시안 게임 쇼트트랙 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쇼트트랙 참가 선수]][[분류:2002년 동계 올림픽 메달리스트]][[분류:2006년 동계 올림픽 메달리스트]][[분류:2003년 동계 아시안 게임 쇼트트랙 참가 선수]][[분류:2003년 동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은메달리스트]]
  • 테란 . . . . 4회 일치
         시리즈의 주요 인물인 [[짐 레이너]]도 테란이란 점에서 스토리 상 비중이 크다. 그럼에도 다른 종족에게 얕잡아보이는 느낌이 강한데 사실 얕잡아볼만 하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면과 그 규모에서 [[저그]]에게 밀리고, 기술적인 면에서 [[프로토스]]에게 뭐...
         부패한 독재 국가인 [[테란 연합]]이 등장. [[저그]]와 [[프로토스]]를 비롯한 [[외계인]]들의 습격을 받는다. 이 틈을 타 [[아크튜러스 멩스크]]가 이끄는 혁명 조직 [[코랄의 아들들]]이 세를 불리고, 마침내 테란 연합을 무너뜨린다. 하지만 코랄의 아들들의 일원이었던 [[짐 레이너]]를 포함한 일부는 멩스크가 보였던 끔찍하고 비열한 행위[* 테란 연합의 수도성인 타르소니스로 저그 떼거리를 유인했다. 자신을 따라왔던 [[사라 케리건]]을 저그 떼 사이에 내다버린건 덤.]에 반감을 느껴 코랄의 아들들을 떠난다. 하지만 멩스크는 [[테란 자치령]]을 세우고 자신이 황제 자리에 앉는다.
         하지만 [[사라 케리건]]이 이끄는 저그 잔당이 [[테란 자치령]], [[레이너 특공대]], [[프로토스]]와 손을 잡고 정신파 분열기를 파괴하며 UED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UED는 케리건에게 토사구팽당한 테란 자치령과 프로토스와 함께 케리건을 공격하지만 결국 전멸한다.
  • 텐프레 . . . . 4회 일치
         사전적 의미로 볼 때 영어에서의 템플릿(Templet, Templete)은 어떠한 판형을 의미하며, IT쪽에서는 좁게는 플로우차트에서 넓게보면 프로젝트 관리상까지 포함해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행해지는 관습 및 서식화된 표준을, 디자인에서는 일반화된 패턴과 믹스[* 글렌체크라든가 스프라이트와 같은 것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등을 가리킨다. 하지만 일본의 속어로는 이런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 [[편지]], [[연하장]]의 서식이나, 디자인 파일의 양식 등을 뜻한다. 어떤 양식이 정해져 있고, 몇가지 단어나 문장만 바꾸는 것. 여기에는 프로그램 오류 제보등을 했을 때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하며 앞으로 개선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같은 [[코피페]]스런 대응도 포함된다. 친절하지만 별로 쓸모없고, 때로는 화까지 돋게 만드는 마이크로소프트스런 대응까지 포함.
          * 니코니코 동영상 서비스에서는 ここまでテンプレ(여기까지 텐프레)라는 표현으로 자주 쓰이곤 하는 표현으로 쓰인다. 가령 [[동방프로젝트]]에서 에린이 나오면 흘러가는 코멘트로는 " ( ゚∀゚)o彡"이 뜨고, 마지막 코멘트로는 "ここまでテンプレ"가 뜨는 식. 일종의 암묵의 룰이 적용되는 걸 알리는 텐프레된(?) 코멘트이다.
         [[텐프로]]와는 무관.
  • 한지우(배우) . . . . 4회 일치
         [[분류:한국 여배우]] [[분류:미스코리아 출신 배우]][[분류:1987년 출생]][[분류:포항시 출신 인물]]
         [include(틀:상위 문서, top1=배우/한국)]
         통칭 '''리틀 [[송혜교]]'''. 송혜교를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외모와 한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중국에서 상당한 인기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는 [[뜨거운 형제들]] 출연을 통해 유명해졌다. KBS 8부작 청춘드라마 '[[정글피쉬 2]]'의 주연으로 발탁돼 [[엄친딸]] '백효안' 역을 연기했다. [[무한걸스]] 시즌 3에 참여하였다.
  • 호환성 . . . . 4회 일치
         이는 [[정보공학]]의 호환성이다. 하나의 장치에서 처리한 데이터, 프로그램을 다른 장치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윈도우즈]] 프로그램은 컴퓨터에 관계없이 어떤 윈도우즈 기기에서도 호환성이 있다. 물론 [[사양]]은 있지만. 윈도우즈와 맥은 기종은 프로그램은 호환성이 없지만, 데이터는 서로 주고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데이터 호환성은 있다.
         호환성은 생산성 때문에 여러모로 소프트웨어 업계에서는 자주 다루어지는 문제이다. 일단 아키텍쳐가 바뀌면 모든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고 동작을 보장하는 [[삽질]]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메이저한 아키텍쳐이라면 큰 문제 없지만 마이너한 아키텍쳐는…. 그래서 [[자바]] 같은 [[가상 머신]]으로 호환성을 확보하기도 한다.
  • AFC 회원 랭킹 . . . . 3회 일치
         [[아시아축구연맹]]에 소속된 협회에서 일정기간동안 거둔 업적을 평가하여 산정한 순위자료다. AFC에서는 AFC MA Ranking이라 표기하고 있으며, 한국 언론에선 보통 AFC 랭킹으로 표기하고 있다. AFC 회원 순위는 AFC에서 주관하는 각종 클럽대항전 참가에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서 말하는 회원이란 특정 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축구협회를 가리키며, AFC에서는 특정한 상황이 아닌 한 1국가 1회원이라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다소 정치적인 문제와 역사 때문에 중국 본토와 마카오, 홍콩에 있는 축구협회는 중국이라는 하나로 보지 않고 별개로 인정하고 있다.]
          * 대한민국 축구협회가 지난 4년간 얻은 총 클럽 점수가 190점으로 아시아 팀들 중에 최고 득점을 받으면 한국의 클럽 점수는 70점이 된다.
          * ex1)사우디의 4년간 클럽 점수 = 182 / 190[* 최고점인 한국이 받은 점수를 의미] * 70[* 최대 클럽 점수] = 67.052
  • MoniWikiOptions . . . . 3회 일치
         == 프로세서 옵션 ==
          * 포메팅 프로세서 변경.
          * 기본 언어를 설정한다. 기본값 'auto'로 브라우져 설정을 따르며, 강제로 한국어로 하고자 하면 'ko_KR'로 지정한다.
  • Victoria II/디시전 . . . . 3회 일치
          * '''Balboa(발보아)''' 프로빈스를 소유하거나 소유국을 영향권 내에 두고있음
          * '''Suez(수에즈)''' 프로빈스를 소유하거나 소유국을 영향권 내에 두고있음
          * '''Ahmedabad(아마다바드), Bombay(봄베이), Chittagong(치타공), Coimbatore(코임바토르), Delhi(델리), Lahore(라호르), Vizagapatnam(비자가파트남)''' 프로빈스를 소유
  • 곽성문 . . . . 3회 일치
         '''곽성문'''(郭成文, [[1952년]] [[11월 24일]] ~ )은 [[대한민국]]의 제17대 [[국회의원]]이자 언론인이다. [[자유선진당]] 사무총장을 지냈고, 현재는 제2대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이다. [[대구광역시]] 출신이며, 본관은 [[현풍 곽씨|현풍]]이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임마누엘이다.
         * 2014년 10월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 취임
         [[분류:195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기자]][[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문화방송의 직원]][[분류:프리랜서 아나운서]][[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대구중학교 동문]][[분류:대구교육대학교 대구부설초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선진통일당의 정치인]][[분류:자유한국당의 정치인]][[분류:현풍 곽씨]][[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기은세 . . . . 3회 일치
         * [[2009년]] 《[[여자 없는 세상]]》 ... 제니스 역
         * [[2009년]] 키네틱플로우 - 현실에 2% 부족한 연인들에게
         * [[2007년]] [[한국관광공사]]
  • 김근석 . . . . 3회 일치
         {{야구 선수 정보
         |프로 입단 연도 = [[1983년]]
         {{토막글|야구인}}
  • 김만제 . . . . 3회 일치
         귀국하여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근무하였다.[* 이 때문에 역시 서강대에서 경제학 교수를 역임했던 전임 [[남덕우]], 후임 [[이승윤(정치인)|이승윤]] 경제 부총리와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을 역임한 [[김종인]] 등과 더불어 서강 학파의 대표 주자로 알려져 있다.] 1971년 [[한국개발연구원]]의 초대 [[원장]]으로 부임하여 1982년까지 재임하였다.
         한국개발연구원장 퇴임 후 잠시 [[한미은행]]장을 지내다가,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장관]], 1986년부터 1987년까지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부총리 겸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제5공화국]]의 경제정책을 주도하였다. 그의 경제부총리 재임 시절은 소위 3저(低)[* 낮은 물가, 금리, 석유가격을 뜻한다.]로 대표되는 경제 호황기로 수출 증대, 무역 흑자를 기록하며 국내외적으로 한국 경제에 대한 평가가 우호적이었던 시기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후임 [[노태우]] 정부의 출범 후, 이 때의 부실기업 처리 과정이 문제가 되어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다.
  • 김문오 . . . . 3회 일치
         * 한국기자협회 대구·경북지회장
         * 한국언론진흥재단 기금관리위원회 이사
         [[분류:194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문화방송의 직원]][[분류:대한민국의 기초지방자치단체장]][[분류:자유한국당의 정치인]][[분류:경상중학교 동문]][[분류:경북대학교 동문]][[분류: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동문]][[분류:대구화원초등학교 동문]][[분류:달성군 출신 인물]]
  • 김문집 . . . . 3회 일치
         '''김문집'''(金文輯, <small>일본식 이름:</small> 大江龍之介(오에 류노스케), [[1907년]] [[7월 7일]] ~ ?)은 [[한국]]의 문학평론가이다. 아호는 화돈(花豚)이다.
         중학교 때부터 일본에서 수학한 김문집은 일본 문학이론을 수입해 와 한국문학의 전통을 부정하는 친일적인 성향을 초기부터 보였다. [[중일 전쟁]] 발발 후에는 [[조선문인협회]] 발기인과 간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촉탁을 맡는 등 친일 단체에도 가담했다.
         [[분류:1907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20세기 일본 사람]][[분류:일제 강점기의 문학 평론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국계 일본인]]
  • 김민아 (아나운서) . . . . 3회 일치
         * 2016년 4월 한국전기안전공사 홍보대사
         * [[2010년]] : [[MBC]] 《[[야구 읽어주는 남자]]》
         * 2011년 토크 토크 야구 ({{ISBN|9788966210060}})
  • 김성곤 . . . . 3회 일치
         박정희의 친위대를 자처하면서 3선개헌에 회의적이던 김종필계와 대다수 공화당 인사들을 강하게 압박해서 [[3선 개헌]]을 성사시켰다.[* 3선개헌이 처음 불거졌을때 김종필을 선두로 해서 대다수 공화당 정치인들은 이를 반대했다. 장기집권한 이승만의 최후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9년부터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화당 국회의원들을 회유, 협박해서 결국 모두 찬성으로 돌려놨다. 당내에 막강한 독자계보를 가지고 있던 김종필을 압박하는데 선봉에 선게 김성곤, [[김진만(정치인)|김진만]], [[백남억]], [[길재호]] 4인방][* 한때 60명이 넘던 공화당내 개헌반대파 국회의원은 결국 3명 [[정구영]], [[예춘호]], [[이만섭]]만이 남았고, 결국 정구영-강제 정계은퇴, 예춘호-제명, 이만섭-낙선으로 모두 숙청되었다. 예춘호는 야당으로 넘어가서 1980년대 [[재야]]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고, 이만섭은 야인으로 지내다가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그리고 [[전두환]]의 집권 이후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 총재로 재기했다.] 이 과정에서 [[김진만(정치인)|김진만]], [[백남억]], [[길재호]]와 함께 소위 4인체제로 박정희를 대리해서 공화당을 관리하였다. 특히 [[재벌]]에게 해외차관과 정부발주공사의 10%를 무조건 자신을 통해서 상납하게 하면서 ~~[[뇌물]]의 제도화~~ 정권의 정치자금 창구를 단일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권과 재벌, 언론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는 그가 [[쌍용그룹]] 회장(재벌총수), 동양통신 사장(언론인)이면서 공화당 재정위원장(정치인)이자 박정희의 최측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73년 [[대한상공회의소]] 제8대 회장에 취임하였고 1974년 대한양회를 인수, 한국신문연구소 회장에 취임하는 등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1975년 [[고려대학교]] 교우회장 자격으로 졸업식 축사를 준비하던 중 갑자기 쓰러져 타계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으며, 그의 묘는 원래 가족장으로 [[국민대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가 1984년 [[강원도]] [[평창군]]에 이장되었고, 2014년 고향인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으로 재이장되었다.
  • 김종호(1933) . . . . 3회 일치
         1952년에 [[해군사관학교]] 10기로 입학해 1956년 임관했다. 목성함장과 부산함장을 지냈고 1984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함대사령관을 지냈다. 해당 한국함대는 뒤에 명칭이 바뀌어 [[해군작전사령부]]가 되었다.[* 해작사의 영어 표기도 Naval Operation Command가 아닌 Korea Fleet Command이다. 일본의 경우 작전사령부에 해당하는 함대가 [[자위함대]]로 [[함대]]급 부대인 [[잠수함대]], [[호위함대]], [[항공집단]]의 상위기관이다.] 1986년 2월 1일에 한국함대가 해군작전사령부가 되자 초대 작전사령관을 지냈다.
  • 김충섭 . . . . 3회 일치
         공직을 퇴직한 이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무소속으로 김천시장에 출마하게된다. 김천시장직은 박보생 시장이 3선 연임제한에 걸려 출마할 수 없었기에 도전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TK지역 여당인 [[자유한국당]] 공천을 바라며 경선에 참여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공천을 정하는 과정에서 불투명한 여론조사와 당원투표 등 여러 문제로 공천 잡음 들이 생겨나게된다. 이러한 문제 들로 인해 이에 불복한 [[최대원|시장 후보 중 한명]]은 아예 탈당하고 체급을 올려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나가게 되었다. 공천 문제로 분열된 자유한국당은 원래 보수층의 지지를 받고 [[더불어 민주당|친여 세력]]의 지원사격까지 받으며 진보층 세력까지 흡수한 김충섭 후보에게 시장직을 내주고 [[이철우(1955)|전직 의원]]이 경북도지사 후보로 영전함에도 불구하고 후계자 격인 [[송언석]] 후보는 최대원 후보에게 1%정도 차이로 초박빙 승부를 벌이는 모습을 보이며 국회의원직도 겨우 당선되는 등 옆동네인 구미와 함께 자유한국당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 김형기 (법조인) . . . . 3회 일치
         *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7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72년 9월 27일에 필화사건으로 기소된 동아일보 의정부 주재기자 장봉진에게 공갈죄를 적용해 징역9월 집행유예1년을 선고하면서 [[반공법]]위반에 대해서는 "송고 시간이 급박했고 오보된 기사의 정정을 위해 노력한 점으로 보아 이적 목적을 인정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2년 9월 27일자</ref> 10월 4일 폭력행위 처벌에 관한 법률과 [[도로교통법]]위반으로 기소된 영화배우 [[박노식]]에 대해 "실형을 선고해야 마땅하나 연예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나 반공극에 공헌한 점을 참작했다"며 징역10월 집행유예2년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72년 10월 4일자</ref> 12월 21일에 북한에서 의약업자를 하다가 귀순하여 국가보건원 직원들에게 국가시험 정답지를 20만원~100만원을 주고 빼낸 피고인 20명 중에서 1명만 무죄를 선고하고 징역1년~벌금5만원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2년 12월 21일자</ref> 1973년 5월 16일에 [[대한민국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동대문 선거구 공화당 후보에게 사전 투표를 하여 구속된 피고인에게 징역1년6월~10월을 각각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3년 5월 16일자</ref> 7월 24일에 일본에서 지내던 중에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되어 2차례 평양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합작투자로 위장하여 국내 경제계, 군부 등에 침투하려 했던 재일교포 사와모도 산지(한국명 한삼차)에게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나 피고인이 일본에 귀화했고 인생의 황혼기에서 범죄사실을 모두 자백한 점 등을 참작했다"며 [[국가보안법]], [[반공법]], 간첩죄를 적용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3년 7월 24일자</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3072400209207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3-07-24&officeId=00020&pageNo=7&printNo=15941&publishType=00020 동아일보 1973년 7월 24일자]</ref>
         * 서울형사지방법원 항소2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78년 8월 3일에 이리역 화약 열차 폭발사고로 1심에서 징역8월을 선고받은 한국화약 사장에게 벌금20만원을 선고하면서 한국화약 인천공장 공장장과 총무이사, 총무부장에게 징역8월 집행유예2년, 인천역 화물과장 징역8월 집행유예3년, 인천역 화물과 직원 징역6월 집행유예1년, 대한통운 인천지점 육운계 직원 벌금 10만원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78년 8월 4일</ref>
  • 깨끗한 독일국방군 신화 . . . . 3회 일치
         [[전간기]]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독일방위군은 구 독일제국군의 직계로서, 독일제국군의 인적 자산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제국군 당시 독일군의 장교단은 주로 [[프로이센]] 귀족 출신이었으며, 이들은 [[군국주의]]를 추구하는 한편 "[[황제]]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기사도적 충성 사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또한[[반유대주의]]나 [[슬라브 민족]]에 대한 [[인종차별]] 같은 사상도 널리 퍼져 있었다.
         연합군의 허가와 지원을 얻을 수 있게 된 전직 국방군 장성들은 제2차 세계대전사를 자신들의 시점에서 저술할 수 있게 되었다. 1946년 6월에, 프리츠 할더 육군 참모장이 책임자가 되어 328명의 독일 장교들이 제2차 대전 시기의 군사 서술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이들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관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저술하였으며, [[독소전쟁]]에 대한 주요 자료 제공을 독점할 수 있었다.
         깨끗한 독일국방군 신화의 영향은 [[소련군]]에 대한 폄하로도 나타난다. 독일군 장성들은 패전 이후에도 슬라브인을 멸시하는 인종주의를 버리지 못하여, [[독소전쟁]]에서 소련군이 단지 물량을 바탕으로 한 막무가내 [[우랴돌격]]에만 의존한 군대였다는 식으로 서술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이 같은 관점을 전쟁사 계에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소련군을 폄하하는 잘못된 관점이 오랫동안 독소전쟁 역사에서 뿌리깊게 남게 된다. [[냉전]] 시기에는 소련 측 역시 실증이 될만한 자료 공개를 하지 않고 [[프로파간다]]에만 집중하여 냉전이 끝날 때까지는 이런 관점이 오랫동안 바로잡히지 못하였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10화 . . . . 3회 일치
          * 폭발과 함께 나타나는 "테러조직". 정체는 빌런 역할을 맡은 프로 히어로 갱 오르카였다.
          * 프로 히어로 갱 오르카 등장.
          * 아이자와 쇼타는 프로 히어로라도 이런 상황은 어렵다며 시험에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시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39화 . . . . 3회 일치
          * 밀리오의 행동에서 용기를 얻은 타마키는 프로 히어로들을 재치고 자신이 적을 일소하겠다고 나선다.
          * 다혈질인 패트껌은 선전포고로 인식하고 "프로의 힘을 보여주겠다"고 이를 간다. 하지만 그때, 타마키가 "프로의 힘은 목적을 위해서 쓰라"며 막아선다. 이 녀석들은 자신이 처리하겠다면서.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83화 . . . . 3회 일치
          * 프로히어로도 6명 중 [[와일드 와일드 푸시 캣츠|한 명이 크게 다치고 한 명]]이 대량의 혈흔을 남기고 실종
          * 메스컴에서 연일 비난하고 있고 기존 웅영의 방침인 "굴하지 않는 자세"도 관철할 수 없게 된다. 프로히어로에 대한 신임마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
          * [[이이다 텐야]]는 "그건 프로 히어로가 맡을 일"이라며 말리지만 키리시마는 "이대로 있으면 남자도 히어로도 아니게 된다"며 "아직 손이 닿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86화 . . . . 3회 일치
         [[바쿠고 카츠키|바쿠고]] 탈환을 앞두고 프로 히어로, [[유우에이 고등학교|웅영고]], 학생들 사이에서 폭풍전야와 같은 긴장이 감돈다.
          * 프로 히어로들은 만전을 기하고 있다.
          * 집결해 있는 프로 히어로 중에 작가의 전작에 나왔던 캐릭터가 보인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88화 . . . . 3회 일치
         [[빌런 연합]]의 일망타진을 앞둔 프로 히어로들.
          * 미도리야 일행은 프로 히어로들이 상황을 정리했다고 생각해서 돌아가려고 한다.
          * 1초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프로 히어로팀이 전멸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89화 . . . . 3회 일치
         프로 히어로들이 포박한 [[빌런 연합]]을 한 순간에 빼앗긴다.
          * 프로히어로 일동이 전원 빈사 상태.
          * 프로 히어로가 저항조차 못하고 당한 첫 사례
  • 노행하 . . . . 3회 일치
         * 《[[지붕 뚫고 하이킥]]》 (MBC, 2009년)
         * 《[[보석비빔밥]]》 (MBC, 2009년)
         {{토막글|한국 배우}}
  • 단기선교 . . . . 3회 일치
         [[대한민국]] 교회의 단기해외선교 활동은 1989년 이후 해외여행이 자유화 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다만 1990년대 중반까지 단기선교는 일반 참가자가 아닌 해외 선교사 육성을 위하여 선교사 양성 프로그램의 일환으로서 하는 경우가 많았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로,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체험여행에 가까운 형식으로 일반인을 모집하여 단기선교를 하는 프로그램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는 일종의 이벤트 사업으로서 대형교회의 재정적 이유가 배경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단기선교는 현실적으로 현지인에 대한 봉사 보다는 참가자를 위한 체험 활동을 중시하기 때문에, 이러한 단기선교는 현지에 대한 구체적인 배려 없이 마치 관광여행처럼 프로그램 되어 있어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참가자들의 자질이나 현지 활동은 현실적으로 관광객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관광'이 아닌 '선교'를 목적으로 하며, 관광사업에는 아마추어인 교회 조직이 선교를 추진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 대한민국 망명정부 서사모아 설치계획 . . . . 3회 일치
         남한 정부와 60만 혹은 32만 8천명의 주민을 서사모아로 이주시켜서 새로운 한국(New Korea)를 건국한다는 계획이다.
         [http://www.koreastory.kr/bbs/board.php?bo_table=6_25&wr_id=39 KBS 특별기획 "한국전쟁"]
         [[분류:한국사]]
  • 랑그릿사 . . . . 3회 일치
         정규 타이틀은 5까지 발매하였으며, 이 중 1부터 3까지는 PC버전으로 정식발매되었다. 그러나 3의 흥행이 시원치 않았는지 4와 5는 한국에 발매되지 않았다. 그런데 외전으로 볼 수 있는 랑그릿사 밀레니엄은 또 한글화되어 발매되었다. 발매기준에 대해서는 좀 모호한 편.
         외전인 랑그릿사 밀레니엄은 2에서 3로의 변화보다 더 큰, 아니 아예 근본적으로 다른 게임이 되어버렸는데 한국에서는 이 급격한 변화를 수용한 팬들이 거의 없었으며 빛의 속도로 게임잡지 부록으로 전락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한글화와 PC판 발매, 애니메이션과 일러스트 덕분에 훨씬 높은 인기를 끌었던 게임이지만, 일본에서는 아무래도 인기 측면에서는 하드 자체가 마이너한 하드(메가드라이브, 세가 새턴)을 주로 나왔고 시리즈의 명맥이 아예 끊겨버린 상황이라, 현재는 인지도와 인기가 파이어 엠블렘에 훨씬 뒤쳐진 상황이다.
  • 류지혜 (레이싱모델) . . . . 3회 일치
         * 2016년 영상기자재전 코리아프로덕츠관 포즈모델
         * [[2009년]] [[KBS2]] [[TV]] [[스타골든벨]] 최연소 [[레이싱 모델]] 특별 출연
         {{토막글|한국 사람}}
  • 마기/336화 . . . . 3회 일치
          * 세상이 루프로 환원되는걸 막으려면 이 일곱 개의 던전에서 일곱 명의 신드바드를 쓰러뜨려야 한다.
          * 바알을 비롯한 일곱 진들은 각각이 신드바드가 지닌 일곱 개의 신념을 인정해 왕의 그릇으로 선택했다. 이들 앞에 나타난 일곱 던전은 각기 신념에 따라 재구성된 것이며 역시 일곱 명의 신드바드가 지키고 있다. 알라딘은 바알의 의도를 알아차린다. 세상이 루프로 환원되는 걸 막고 싶다면 일곱 던전의 일곱 신드바드를 쓰러뜨리라는 것이다. 쥬다르는 이쪽이 네 명인데 7회전이냐 할 거냐고 디스한다.
          * 이러는 사이 아르바가 지닌 모래시계는 착실히 시간이 가고 있다. 아르바는 이러다 해가 지겠다며 모래시계의 모래가 전부 떨어지면 세상이 루프로 환원된다고 경고한다.
  • 마기/352화 . . . . 3회 일치
          * [[신드바드(마기)|신드바드]]를 배신하고 다시금 적으로 등장한 [[다윗(마기)|다윗]]. 신드바드가 포기한 "세상을 루프로 환원하는 마법"을 작동시킨다.
          * [[알리바바 사르쟈]], [[알라딘(마기)|마기]], [[연백룡]], [[쥬다르]]는 [[신드바드(마기)|신드바드]]를 배신하고 적으로 나타난 [[다윗(마기)|다윗]]을 집중 공격한다. 그러나 어떤 공격으로도 신이 된 다윗을 파괴하는 건 불가능했다. 다윗은 자신이야 말로 "세상을 루프로 환원하는 마법"을 완성해 보다 상위의 신들을 계속 타도해나가겠다 선언한다. 만일 그걸 막고 싶거든 여기서 자신을 파괴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알리바바 일행은 반드시 그를 타도하겠다고 말한다.
          * 이건 신의 서열이 바뀌었다는 증거. 다윗은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우고느 성궁 시스템에 버그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신드바드는 다윗을 전적으로 믿은게 아니었다. 언제나 자기 등 뒤를 노리는 걸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한 대책도 세웠다. 바로 일곱 명의 진들이다. 신드바드가 루프로 환원됐을 때도 그들의 힘이 있어 신드바드가 돌아오는게 가능했다. 이번에도 그들의 힘이 있어 신드바드의 주도권이 복구된 것이다.
  • 머슬봄버 . . . . 3회 일치
         [[캡콤]]에서 만든 프로레슬링 게임. 실존 인물이나 단체가 아닌 캡콤의 오리지널 캐릭터들이 등장하며[* 다만 모티브 정도는 있다.] 이중에는 파이널 파이트의 캐릭터인 마이크 해거도 있다.
         프로레슬링 게임 답게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 등의 격투 게임과 달리 프로레슬링 경기 스타일. 적을 쓰러뜨리고 카운트를 세면 이기는 것도 구현. 이외에 1대1 싱글플레이와 2대2 팀플레이가 있는데 팀플레이 시에는 네명의 캐릭터다 하나의 링에서 싸운다. 그래서 4인 플레이가 가능. 플레이어가 없는 캐릭터들은 CPU에 의해 움직인다.
  • 메시우마 . . . . 3회 일치
         기원은 2채널의 게시판 중 하나인 야구판으로 안티 요미우리 자이언츠 스레드에서 "거인(자이언츠)가 져서 오늘도 밥이 맛있다."는 발언이 나오는 것이 시작으로 한다. 2003년 부터 이 발언을 바탕으로 "거인이 지면 밥이 맛있다."는 제목의 스레드가 세워진 것을 계기로 하여, "메시우마"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2008년 부터는 프로 야구 이외의 다른 장르의 판에서도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 자신이 기분 좋게 느끼는 것을 "메시우마 상태"라고 표현하게 된다.
  • 모닝구 무스메 . . . . 3회 일치
         1997년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 「ASAYAN」에서 개최된 "샤란Q 락 보컬리스트 오디션"에서 낙선자들에서 선발된 5명이 "층쿠♂"의 프로듀스를 받아서 활동을 시작했다. 1998년 메이저에 데뷔하였으며, 멤버를 교체해가면서 장기간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아이돌 그룹.
         CD, DVD, 콘서트 같은 가수 활동 이외에도, [[뮤지컬]], [[예능 프로그램]] 등 다양한 방면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4년 1월 1일 부터 그룹 이름을 모닝구 무스메.'14(モーニング娘。’14)로 한 것을 계기로 하여 2015년 부터 매년 연도를 변경하면서 활동하고 있다.
  • 문연주 . . . . 3회 일치
         |[[2009년]] [[5월 1일]]||잡지마 / 웃으며 삽시다 / 둘이서||정규
         |[[2009년]] [[10월 1일]]||둘이서 / 짜라자짜||정규
         * [[2014년]] 한국대중가요발전협회 인기가수상 수상
  • 민도 . . . . 3회 일치
         어떤 국가나 지역에서, 국민이나 주민들의 생활 수준, 경제력, 문명 정도를 뜻하는 말이다. 일본에서는 흔히 쓰이는 말이지만 한국에서는 별로 쓰이지 않는다.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의식에 대한 말로 쓰이는 것으로 나오는 사례가 많다. 굳이 따지자면 '시민의식'에 가까운 표현이다.
         한국에서 이렇게 잘 안 쓰이는 단어가 널리 알려지게 된 원인으론 2004년에 당시 도쿄도지사였던 이시하라 신타로의 망언 때문으로, 중국과 일본이 [[AFC 아시안 컵]]축구경기 결승전에 진출하면서 양국간 신경전이 벌어졌는데 이시하라 당시 지사는 "중국 관중이 일본에게 야유를 보내는 건 중국의 '민도'가 낮기 때문"이라는 망언을 했던게 한국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소개된 바 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 민효린 . . . . 3회 일치
         * 2007년 한국애견협회 애견 홍보대사
         2008년 3월 14일 발매된 디지털 싱글 'Touch me'는 CYON 뷰티폰 광고의 프로젝트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LG전자]] 측의 제안에 의해 제작됐다.
  • 박남현 . . . . 3회 일치
         * 《[[드림 (드라마)|드림]]》 (2009년, SBS) - 고광팔 역
         * [https://web.archive.org/web/20160315150908/http://people.mygo.co.kr/people.php?cmd=view&pp_no=763 박남현 프로필]
         {{토막글|한국 배우|무술가}}
  • 박명재 . . . . 3회 일치
         ||<bgcolor=#C9151E> '''{{{#FFFFFF 소속 정당}}}''' ||<(> '''[[자유한국당|{{{자유한국당}}}]]''' ||
         현 소속 정당은 [[자유한국당]]이지만, 그 전에는 [[열린우리당]] 소속이었으며[* 이는 [[강길부]] 의원, [[조경태]] 의원도 마찬가지.], [[노무현 정부]] 시절에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낸 이력이 있다.
  • 박재홍(1941) . . . . 3회 일치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경상북도 구미시-[[선산]]군-[[칠곡군]]-[[군위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한국당]] [[김현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같은 해 민주정의당 원내부총무에 임명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무소속]] 김현규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구미시 지역구 공천이 [[박세직]]에게 밀려 [[민주자유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4년부터 1995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교통위원장을, 1995년부터 199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건설교통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6년 초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치러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준홍 대신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경상북도 구미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박세직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 박진옥 . . . . 3회 일치
         || 프로입단 || 2005년 [[제주 유나이티드|부천 SK]] ||
         ==== 프로 입단 전 ====
         2015 시즌을 앞두고 [[한국 내셔널리그]] 소속 팀인 [[용인시청 축구단]]에 입단하여 팀이 해체되기 전까지 활약하였다.
  • 백낙청 . . . . 3회 일치
         '''백낙청'''(白樂晴, [[1938년]] [[1월 10일]] ~ )은 [[한국]]의 대학교수, 영문학자, 문학평론가, 사회운동가이다. 친일관료 백붕제의 아들로 [[대구]] 출신이다.
         1962년부터 [[서울대학교]] 영문과에 부임하였고, 1966년부터 계간지 《[[창작과비평]]》의 편집인을 맡아 진보적 평론활동으로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74년 유신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해직되었으나, 1980년 복직되었고, 2003년 교수직을 정년퇴임하고 현재는 명예교수이다. 이후에도 통일운동의 일선에서 일하며 2005년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2007년 대통령 선거에는 범여권후보 단일화운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3509&cid=41708&categoryId=41737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백낙청] , 권영민 저, 서울대학교출판부, {{ISBN|9788952104618}}
  • 서영종 . . . . 3회 일치
         '''서영종'''([[1952년]] 12월 17일 ~ )은 기아자동차의 前 사장으로 프로야구단 [[KIA 타이거즈]]의 구단주 및 사장으로도 활동하였다.
         {{토막글|한국 사람}}
  • 서현진 (방송인) . . . . 3회 일치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무용 학사
         === 텔레비전 프로그램 ===
         ===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 출연) ===
  • 성현아 . . . . 3회 일치
         2010년에 여섯 살 연상의 사업가와 재혼하여 아들을 [[출산]]했다. 그러나 재혼한 남편의 사업이 순탄치 않아 별거에 들어갔고, 이후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으며 [[2013년]] 성매매 알선 혐의로 기소돼 1,2심에서 벌금 200만원이 선고됐으나 [[2016년]] 대법원 판결에서 무죄를 인정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MBC로부터 출연금지를 받아야 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언론에 부담느꼈나? 성현아 끝내 제작발표회 불참| url= https://entertain.naver.com/read?oid=469&aid=0000276165| 출판사= 한국일보| 저자= 강은영| 쪽= | 날짜= 2018-02-06| 확인날짜= 2018-09-25}}</ref>
         * [[2009년]] [[SBS]] 대하드라마 《[[자명고 (드라마)|자명고]]》 ... 송 매설수 역
         * [[2009년]] [[tvN]] 《스캔들 2.0》 MC
  • 소격서 . . . . 3회 일치
         임하필기(한국고전종합DB)
         오주문연전상고(한국고전종합DB)
         [[분류:한국사]]
  • 손광업 . . . . 3회 일치
         * 《남한산성》 (2009년) - 김상헌 역
         * 《삼총사》 (2009년) - 추기경 역
         {{토막글|한국 배우}}
  • 송주훈 . . . . 3회 일치
         광명공고를 거쳐 [[건국대학교]]에 입학해 주전 센터백으로 활약했다. 이후 [[J리그]]로 진출하여 2014년 [[J1리그]] [[알비렉스 니가타]]에 최초로 입단했으나, 한국 대표팀 소집 훈련 중 턱 부상을 당해 큰 수술을 했고 이후 재활 기간이 길어지면서 결국 2경기 출장에 그쳤다. 설상가상으로 2015년에는 [[http://cafe.naver.com/jliga/24009|다리 골절]]이라는 중상을 입으면서 전치 3개월 판정을 받았고, 이후 여름 이적 시장에서 팀의 배려로 재활과 출전 기회 획득을 위해 [[J2리그]]의 [[미토 홀리호크]]로 임대되었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 [[중국 슈퍼 리그]] 소속 [[광저우 헝다 타오바오]]에서 유럽 이적을 추진하고 있는 [[김영권]]의 대체 선수로 송주훈의 영입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와 이적할 가능성이 생겼으나, [[http://sports.new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108&aid=0002571906|#]] 광저우에서 [[김형일(축구)|김형일]]을 대신 영입함에 따라 광저우 이적은 무산되었고, 결국 2017년 임대가 만료되어 본래 팀인 니가타로 복귀하게 되었다. [[https://twitter.com/Jleague_Bot/status/819043605956304899|#]][* 그러나 2017년 슈퍼 리그의 외국인 쿼터가 5명 보유 3명 출전으로 규정이 변경되면서 각 구단들은 더욱 고연봉인 유럽이나 남미 출신 선수들을 중용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김기희]], [[장현수]] 등 중국에서 뛰는 한국인 선수들이 [[벤치워머]]로 전락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중국 이적이 무산된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 실제로 송주훈 대신 이적한 김형일 역시 1경기도 뛰지 못하다가 방출되었고, 반대로 송주훈은 니가타에서 주전으로 잘 뛰고 있으니 정말로 일본에 남은 것이 이득이 된 셈이다.]
          * 일본 내에서는 원래 팀인 [[알비렉스 니가타]]보다, 임대로 뛰었던 [[미토 홀리호크]]에서 더 인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토에서는 임대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상으로 시즌 아웃을 당하자 그의 빠른 쾌유를 기원하는 현수막을 '''한국어로 써서''' 걸었을 정도.
  • 송진현 . . . . 3회 일치
         1981년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에 임용되어 1983년 서울형사지방법원, 1985년 [[춘천지방법원]] 속초지원 지원장, 1987년 [[서울가정법원]], 1988년 [[서울고등법원]]에서 판사를 하다가 1991년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거쳐 1992년 [[대구지방법원]] 1994년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 1996년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 1997년 서울지방법원, 2000년 2월 [[대전고등법원]], 2001년 2월 [[서울고등법원]]에서 부장판사를 하였다. 2005년 11월에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수석 부장판사가 되었으며 2006년 6월에 법원장으로 승진하여 [[서울동부지방법원]], 2008년 2월 [[서울행정법원]]에서 법원장을 하다가 2009년 2월에 사직하고 법무법인 로고스에서 변호사를 하였다. 보건의료직능발전위원회 위원장 등을 하면서 변호사를 하고 있을 무렵인 2015년 8월 [[박근혜 정부]]에서 제10대 [[경찰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중앙행정심판위원회 자문위원을 겸직하였다.
         * 서울형사지방법원 형사항소6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7년 10월 24일에 [[인천역]]에서 다른 승객이 놓고 간 35000원 상당의 공구함을 들고가다 붙잡힌 피고인에 대해 "지하철이 종착역에 도착한 순간부터 점유권이 지하철공사에 있으므로 피고인의 행위는 절도죄에 해당한다"며 징역10월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97년 10월 25일자</ref> 1998년 1월 10일에 일반음식점 영업 허가없이 통조림, 캔류 등 안주류를 파는 24시간 편의방을 운영해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피고인에 대해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98년 1월 11일자</ref> 1999년 1월 10일에 폭행 혐의로 조사를 받다가 경찰관의 신분증 제시 요구에 다른 사람의 운전면허증을 보여줘 공문서 부정행사죄로 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8월 집행유예2년을 선고받은 정모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관련 법령에 따라 운전면허증을신분증으로 규정한 조항이 없다"며 일부 무죄를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99년 1월 11일</ref> 4월 24일에 서울대 캠퍼스에서 집단 농성을 주도한 한국통신 서울본부 위원장에 대해 "서울대 총장이 한국통신 노조의 총파업에 대해 학내 출입을 금지했음에도 무단 진입했다"며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과 업무방해죄를 적용해 벌금 700만원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99년 4월 26일자</ref> 5월 17일에 [[한총련]] 범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했다가 [[집시법]]위반과 건조물 침입죄로 1심에서 징역8월 집행유예1년이 선고된 노래패 '희망새에 대해 단장 조모씨(31세)에 대해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집회라고 하더라도 공연의 목적으로 참석했고 구호를 외치거나 연설을 하는 등 집회,시위를 한 것이 아니다"는 이유로 원심을 깨고 [[집시법]]위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ref>한겨레 1999년 5월 18일자</ref> 10월 7일에 폭력배를 동원해 채무 해결사 노릇을 했던 [[홍수환]]에 대해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 부탁으로 후배를 연결해준 점은 인정되지만 채권을 회수하기로 후배와 공모한 일은 그 뒤에 이뤄져 피고인이 개입됐다고 볼 수 없다"며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ref>한겨레 1999년10월 8일자</ref>
  • 송호창 (1967년) . . . . 3회 일치
         * 한국 여성민우회 이사
         * [[2012년]] [[9월 27일]] [[문화일보]]의 '송 의원이 안철수 무소속 대선 후보 캠프로 합류할 가능성이 제기된다'는 기사에 대해 그의 보좌진이 문화일보 기자에게 약 20분 동안 [[안철수]] 캠프로 갈 생각이 없다고 강력하게 항의를 했으나 [[10월 9일]] 그는 [[안철수]] 캠프 합류 공식선언.<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2092701033623236004안철수, ‘새 정치 하자’ 전문가 의기투합… ‘실험적 리더십'] 문화일보 2012-09-27</ref><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2101101070723236002 “安캠프 안간다”던 송호창…] 문화일보 2012-10-11</ref>
  • 스카이 김 . . . . 3회 일치
         '''스카이 김'''([[1982년]] [[11월 24일]] ~ )은 [[호주]]의 [[양궁]] 선수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국적을 호주로 바꿨다. 한국명은 김하늘. 호주에서 사용하는 정식 이름은 '하늘 스카이 김'이다.
         [[분류:198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오스트레일리아의 남자 양궁 선수]][[분류:한국계 오스트레일리아인]][[분류:2008년 하계 올림픽 양궁 참가 선수]][[분류:오스트레일리아의 올림픽 양궁 참가 선수]]
  • 시계태엽 오렌지(영화) . . . . 3회 일치
         교도소에 들어간 알렉스는 목사와 친해지게 된다. 알렉스는 목사에게 간청해 죄수들 간의 소문으로 "지원하면 교도소에서 나갈 수 있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되는" 비밀 프로그램에 지원한다.
         그 프로그램은 루드비코 요법이라고 불리는 프로그램이었다. 약물을 주입당한 알렉스는 불량배들이 폭력을 저지르는 영상, 불량배들이 여자를 윤간하는 영상, 한희의 송가를 배경음악으로 한 전쟁 기록 영상 등을 강제적으로, 긴 시간 동안 보게된다. 그 결과 알렉스는 폭력적이거나 성적인 생각만 해도 구역질을 하는 몸이 된다.
  • 식극의 소마/235화 . . . . 3회 일치
          * 소마는 그것도 충분한 설명이 아니라 느낀다. 에이잔이 시나린 성분을 노리고 아티초크를 대량으로 썼지만, 그 경우 자기 요리의 맛도 무너지는게 당연지사. 하지만 에이잔의 요리는 완벽한 맛을 연출하고 있다. 이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잇시키 사토시]]는 그 점에 대해서 "경험치"라고 추측한다. 에이잔의 전공분야는 "프로듀스". 많은 식당을 프로듀스하면서 경쟁업체의 "맛"을 "지우는" 수법을 자주 사용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쌓인 경험치가 식극에서도 발휘됐을 거라는 것. 실제로 [[나키리 아자미]]가 에이잔을 등용한 것도 그런 점을 높이사서였다.
          * 아자미가 갓 신임 총수가 됐을 무렵이었다. 에이잔은 어느 백화점에 입점한 케이크 가게를 프로듀스했다. 본래 경쟁에서 패할 위기에 처해있던 가게는 그와 손을 잡자마자 매출이 수직상승, 위기를 벗어난 정도가 아니라 경쟁업체를 말려죽이고 있었다. 이때도 에이잔은 시음용 주스에 경쟁업체 주력상품의 맛을 지우는 성분을 대량으로 함유시켰다. 그렇게 상대방을 몰락시킨 뒤에는 다시 그쪽에 접촉해 "새로운 사업기회"를 제공한다는 빌미로 자신의 고객으로 삼았다. 아자미는 이런 면모를 만족해 그를 포섭했고 지금에 이르렀다.
  • 심판 토토하지 말라고 . . . . 3회 일치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으나 K리그는 다른 리그와 비교했을 때, '''특별히 [[오심]]이 많은 건 아니다.''' 당장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나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이탈리아 세리에 A의 사례와 비교해봐도 전체적으로는 준수한 경기운영을 보여주고 있다. 칼카나마의 쑥덕축덕만 봐도 라 리가에서 발생하는 치명적인 오심으로 [https://twitter.com/Kalkanama/status/727232395842187265|강등을 당하는 팀도 있고], 소위 [http://www.kfa.or.kr/news/news_column_view.asp?BoardNo=1086&Page=1&Query=|유령골이라고 불리는 옆그물 골]이 발생한 경우도 있으며, [http://http://www.teamtalk.com/news/ref-review-the-incorrect-decisions-from-week-31|한국인 선수가 뛰는 리그]도 예외없이 이런 이슈에 대해 아주 잘 소개된 바 있다. 농담 안 하고 세계 어디를 가든 심판의 수준은 사실상 도찐개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1. 그나마 [[http://sports.media.daum.net/sports/soccer/newsview?newsId=20150122101317147|talk about refree]]같은 프로그램이 진행되곤 있지만, 이걸 아는 K리그 팬은 별로 없을 정도로 홍보도 안 되어 있다.
          * 프로 스포츠 관계자는 [[스포츠 토토]]가 금지되어 있다.
  • 아이네이아스 . . . . 3회 일치
         [[그리스 신화]]의 [[영웅]]. [[트로이]]의 왕자이며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다. [[트로이 전쟁]]에 참가했으며, 트로이가 멸망한 뒤 [[이탈리아]]로 떠나 후에 [[로마 제국]]의 조상이 된다.
         아이네이아스와 같이, 트로이 전쟁의 영웅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비정하는 신화는 그리스 계 식민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아르고스]]에서 쫓겨난 [[디오메데스]]는 다우니아의 왕 다우누스의 딸과 결혼하여 그 땅을 이어받아 브린디시 등의 도시를 건설하였다고 하며[* 디오메데스는 똑같이 이탈리아에 표류한 아이네이아스와 대적하던 에트루리아의 투르누스에게 동맹을 요구받지만, 디오메데스는 아이네이아스 개인에게는 원한이 없다는 이유 혹은 아프로디테의 미움을 받는 것이 두려워 거절하였다고 한다.], 크레타의 지배자였던 이드메니우스 역시 크레타에서 쫓겨나 이탈리아 남부로 도망쳤고, 살라미스 섬의 테우크로스는 키프로스로 떠나[* 테우크로스는 살라미스의 영웅 [[아이아스]]의 가족이었지만, 아이아스의 자살을 말리지 않고 복수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아스의 아버지 테라몬 왕에게 미움을 받았다.] 살라미스 시를 건설하였다고 전해진다. [[헤라클레스]]의 [[활]]을 가지고 있었던 필로크테이스 역시 이탈리아 남부에, [[트로이의 목마]]를 만든 에페이오스 역시 이탈리아 남부의 메타폰시온 시를 건설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무렵 이탈리아 그리스 계 도시에서 있었던 유행에 로마 역시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아이유 . . . . 3회 일치
         | [[더빙 (영상)|한국어 더빙]]
         | style="text-align:center;" rowspan="3" | [[한국방송공사|KBS]]
         ! scope="row" | [[프로듀사]]
  • 애니멘 . . . . 3회 일치
         초기 멤버는 에이프맨, 버드맨, 캣맨, 프로그맨. 이후 드래곤플라이, 지라프맨, 피그맨, 그레이트 호네드 아울맨, 래빗우먼이란 캐릭터가 생겼다.
          * 프로그맨(Frog-Man)
          본명 Francois LeBlanc. 개구리 스타일이다. 스파이더맨과 관련이 있는 프로그맨과는 별개의 인물.
  • 애니프사 . . . . 3회 일치
         애니메이션 프로필 사진의 약자.
         [[트위터]]에서 애니메이션 프로필 사진을 쓰는 사람을 뜻한다. 일본에서는 애니메 아이콘(アニメアイコン)이라고 하며, 대체로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트위터의 계급 가운데 하나로, 정치인-정치 심취자, 종교인, 광고 스팸봇, 아이돌 프사[* 아이돌 프로필 사진의 약자. 주로 아이돌 팬들이 쓰고 다닌다.]와 함께 가장 흔히 보이는 계층 가운데 하나이다.
  • 야설록 . . . . 3회 일치
         * 한국 만화 스토리 작가 협회 회장
         * 한국 만화출판인 협의회 이사
         * [[한국의 장르작가 목록]]
  • 오경훈 . . . . 3회 일치
         | 정당 = [[자유한국당]]
         * [[2017년]] [[2월]] ~ 자유한국
         [[분류:196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해주 오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구신암초등학교 동문]][[분류:영동중학교 (서울) 동문]][[분류:용문고등학교 (서울)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분류:자유한국당의 정치인]]
  • 오냥코 클럽 . . . . 3회 일치
         1985년, [[후지TV]]의 프로그램 「저녁놀 냥냥(夕やけニャンニャン,유우야케냥냥)」에서 등장했다.
         [[일반인]] [[여고생]]을 프로그램 내에서 오디션 하여, 다수의 아이돌을 배출하였다. 대표곡으로 세라복을 벗기지 말아줘요(セーラー服を脱がさないで)가 있다.
         다수의 멤버를 모으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 특징. TV 방송국의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한 기획이었다는 것도 특징으로서, 이 때문에 결국 [[시청률]] 저하에 영향을 받아 활동을 중지하게 되었다.
  • 요괴:선풍기 . . . . 3회 일치
         이 요괴는 전 세계에 분포하고 있으나, 저 무서운 능력에 대해서는 주로 [[한국]]에만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이 요괴에게 봉인을 걸어, 일정 시간 이상 움직이면 저절로 음직임이 멈추게 하는 주박술을 걸어놓고 있기 때문에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때때로 한국에서도 여름에 선풍기에게 살해당했다는 안타까운 설화가 자주 전해진다.
  • 우찬양 . . . . 3회 일치
         [[포항 스틸러스]] 유스 출신으로 차세대 풀백 자원으로 주목받는 선수다. 곧바로 리그 데뷔전을 치른 2016 시즌에는 프로의 높은 벽을 실감하며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으나, 같은 팀의 [[이승모]]와 같이 2017 U-20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들 정도로 동년배 선수들 중에서는 이미 검증을 마친 기대주다. [[신태용호]]에서는 풀백과 센터백을 오가며 출전하는 편이었다가 U-20 월드컵에서는 센터백은 [[정태욱]], 이상민 주전에 [[이정문(축구선수)|이정문]] 백업으로 굳어지고 풀백 두 자리를 놓고 [[이유현]], [[윤종규]], 우찬양 세 선수가 경합하는 판도가 되었다.
          * 2016년 7월 3일, 광주전에서 프로 데뷔이자 K리그 데뷔전을 치뤘다.
          * 대학을 진학하지 않고 프로로 직행하였다.
  • 원피스/845화 . . . . 3회 일치
          * 그 말에 감동받은 상디는 푸딩에게 정식으로 프로포즈한다.
          * 때마침 일기가 흐려지며 나미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다. 몰려드는 암운을 보고 킹 바움이 빅맘이 분노했다고 두려워한다. 파운드가 말했듯 정말로 빅맘을 기후를 조종하고 있었다. 스위트 시티에서는 시민들이 하늘에서 날뛰는 프로페테우스와 제우스를 목격한다. 그걸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빅맘의 분노를 직감한다.
          * 상디가 푸딩의 프로포즈를 들은 그 순간, 루피는 빅맘의 군단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병사들은 쓰러뜨리고 있지만 군단의 이름있는 자들은 여유로워 보인다.
  • 원피스/848화 . . . . 3회 일치
          * 푸딩은 상디에게 프로포즈 받았지만 결혼은 하지 않을 거라 알려주며 루피와 나미의 귓가에 "어떤 결심"을 속삭인다.
          >나... 상디씨에게 프로포즈 받았어.
          푸딩은 상디가 프로포즈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결혼하겠다는건 진심이었다, 루피와 나미는 충격을 받는다. 같은 시각 상디는 푸딩에게 주기 위해 꽃다발을 만들고 있다. 자신을 설득시키는 연기를 계속하며.
  • 원피스/851화 . . . . 3회 일치
          * 푸딩은 [[상디]]가 내일 어떤 표정을 지을지 흉내내며 깔깔거린다. 그리고 프로포즈할 때 엉망이던 얼굴을 흉내내며 그를 모욕한다.
          푸딩은 바보같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내일 상디는 이렇게 하지 않을까"라며 마음대로 상디를 조롱한다. 레이쥬는 일부러 그 모습에 눈길을 주지 않는데 그것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상디가 프로포즈 할 때의 일도 들먹인다.
          푸딩은 그때 상디의 진심어린 프로포즈를 우스꽝스럽게 흉내내며 그의 모든 것을 비하한다. 그동안 형제들이 상디를 비웃고 괴롭히는 것도 내색없이 들어넘겼던 레이쥬는 정말로 거북하다는 듯 어두운 얼굴로 외면한다.
  • 원피스/854화 . . . . 3회 일치
          * 빅맘의 무기 "프로메테우스"는 [[브룩]]에게 처음으로 상처를 입어서 징징댄다. 하지만 빅맘은 그만큼 브룩이 강하다며 좋아하는 중.
          * 빅맘의 거처인 "여왕의 방"에서는 프로메테우스가 상처가 아프다고 징징거리고 있다. 그 상처는 브룩이 낸 것인데 생각보다 깊어서 자꾸 벌어진다고 한다. 빅맘은 프로메테우스가 한심하다고 말하다가 "그보단 이 녀석이 대단한 것"이라고 말을 바꾼다. 그녀의 세 무기에 상처를 낸 것은 브룩이 최초였기 때문이다. 빅맘은 브룩을 [[테루테루 보우즈]]처럼 만들어서 가지고 다니며 예뻐한다.
  • 유재한 (1955년) . . . . 3회 일치
         '''유재한'''(柳在韓, [[1955년]] [[3월 15일]] ~ )은 대한민국의 행정공무원과 한국주택금융공사 사장을 지내었고, [[한나라당]] [[대구광역시|대구시]] [[달서구]] 병 지역 당협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 [現][[한국정책금융공사]] 사장
         * 한국주택금융공사 사장(2007년 3월 ~ 2008년 3월)
  • 유키히라 소마 . . . . 3회 일치
         한국 한정으로 이름을 헷갈리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유키'''하'''라가 아니라 유키'''히'''라다. ~~이 항목에도 과거에는 '유키하라'라는 말이 굉장히 많았었다.~~
         세키모리 히토시는 도지마에게 이렇게 될 것을 예견하였냐고 묻고 도지마는 메구미가 부적합한 요리를 내놓았다면 학교에서 내쫓을 생각이었다고 말한다. 도지마는 시노미야가 오너 셰프로서의 그릇이 성숙해지기도 전에 정상에 도달해 정체된 것이라며 오늘 밤 시노미야는 요리사로서 필요한 탐욕을 되찾았을 거라 말한다.
         작중 언급으로는 벌꿀에는 단백질 분해효소인 '프로테아제'가 함유되어 있어, 그것이 단단한 쇠고기에 작용해 단기간에 부드럽게 완성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소마가 요리책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것으로, 본래는 '파인애플 과즙을 넣으면 고기가 부드럽게 된다'라고 적혀있었으나 파인애플을 살 기회가 없었던 소마는 여러가지 시험을 하다가 벌꿀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 윤진솔 . . . . 3회 일치
         | 활동기간 = [[2009년]] ~ 현재
         * [[2009년]] [[Mnet]] 《[[슈퍼스타K 1]]》
         * [[2009년]] [[슈퍼스타K 1]] - 보랏빛 향기
  • 은혼/579화 . . . . 3회 일치
         attachment:프로포즈.jpg
         * 우미보즈는 어디에 있어도 코우카가 없으면 견딜 수가 없다며 "네가 없으면 외로워"라면서 프로포즈한다
         - 우미보즈. 코우카에게 프로포즈하며
  • 이갑상 . . . . 3회 일치
         '''이갑상'''(李甲相, [[1924년]] [[3월 16일]] ~ [[2017년]] [[1월 29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122242 "젊은이들, 나라사랑 되새겨 주오" 생존 애국지사 이갑상옹] 매일신문 2009-03-02</ref>
         대구 출신으로 1944년 9월 징병1기생으로 일본군에 징집되어 중국전선에 투입되었다가 1945년 2월에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국 구강지구 중국군 제17사단에서 중앙군과의 합동작전에 참가하면서 항일운동을 벌였다. 1945년 3월 30일에 [[한국 광복군]]을 찾아가던 중 중국 무호현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같은 해 4월 28일에 일본군 제7330부대 임시군법회의에서 분적당여죄로 징역 10년형을 판결받고 [[마포형무소]]에서 [[8.15 광복]]까지 수감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
         [[분류:1924년 태어남]][[분류:2017년 죽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 이관섭 (1961년) . . . . 3회 일치
         * 2008년 3월 ~ 2009년 9월 : 대통령실 실장 선임행정관
         * 2009년 9월 ~ 2010년 1월 : [[지식경제부]] 산업경제정책관
         * 2016년 11월 ~ 2018년 1월 : [[한국수력원자력]] 사장
  • 이광호 . . . . 3회 일치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고,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계의문학]]》 편집위원(1992~1999), 《포에티카》 편집위원, 《[[문학과사회]]》 편집동인(1999~2010)을 역임했다. [[2001년]] 제13회 「[[소천비평문학상]]」, [[2003년]] 제48회 「[[현대문학상]]」, [[2007년]] 제18회 「[[팔봉비평문학상]]」, [[2009년]] 제17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1996년]]부터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2009년 제17회 「[[대산문학상]]」
         * 《미적 근대성과 한국문학사》([[민음사]], 2001)
  • 이동찬(기업인) . . . . 3회 일치
         1995년 12월 아들 [[이웅열]]에게 코오롱그룹 회장직을 물려주고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이 되었다. 이듬해인 1996년부터 1998년까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2002년 월드컵축구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수상 경력으로는 1984년 제16회 한국의 경영자상, 2003년 제3회 서상돈상 본상 등이 있다.
         스포츠에도 관심이 있었던지 1971년부터 1980년까지 한국실업농구연맹 회장, 1980년부터 1983년까지 [[대한농구협회]] 회장, 1985년부터 1996년까지 대한골프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 이동흡 . . . . 3회 일치
         * 2003년 한국법학원 이사
         *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BBK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이명박 특검법' 헌법소원에 대해 참고인 동행명령제를 제외한 나머지 조항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지만 김희옥 재판관과 이동흡 재판관 2명만 법 전체에 대해 위헌 의견을 냈다.<ref>미디어오늘 2009년 10월28일자 '재판관 성향으로 본 미디어법 위헌판결'</ref>
         *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와 관련된 야간 집회 금지의 헌법 소원에 대하여 [[헌법재판소]]가 [[2009년]] [[9월 24일]]에 헌법불합치로 결정할 때 "야간옥외집회 금지는 집회 및 시위의 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 유지의 조화라는 정당한 입법목적 하에 규정된 것"이라며 합헌이라고 했다.<ref>백나리, 차대운, [http://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78473.html 헌재, '야간집회 금지' 헌법불합치 결정], [[연합뉴스]]</ref><ref>{{뉴스 인용 |제목 = 盧 지명한 2인 등 위헌, 검찰출신·한나라 지명자 합헌 |url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9241805005&code=940301 |출판사 = 경향신문 |저자 = 조헌철 기자 |쪽 = |날짜 = 2009-09-24 |확인날짜 = }}</ref>
  • 이설주 . . . . 3회 일치
         광복 이후인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대구여자상업학교(현재의 [[대구제일중학교]]), [[경북여자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근무했으며 문고판형 전집 《설주문학(雪舟文學)》을 비롯한 여러 시집을 출간했다. [[2011년]] [[3월 24일]] [[한국문인협회]]는 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한국 현대 시문학과 시조문학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설주문학상을 제정했다.
         * [[1989년]] 한국문학상
  • 이원재(축구선수) . . . . 3회 일치
         || 프로입단 || 2005년 [[포항 스틸러스]] ||
         포철공고 출신으로 2005년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하였다. 그러나 포항에서는 출장기회를 잡지 못했고, 2008년 [[전북 현대]]로 이적하였다. 전북에서도 4경기 출장에 그쳤고, 2009년 [[울산 현대]]로 이적하였다. 2009년 울산에서 17경기에 출장하며 주전 자리를 획득하는 듯 했으나 2010년에 1경기도 출장못했고, [[포항 스틸러스]]로 이적하였다. 포항에서도 출장기회는 적었고, 2013년 [[경찰 축구단]]에 입대하였다. 2013년 경찰에서 28경기에 출장하였고, 2014년에는 11경기에 출장하였다. 2015년 1월 7일 [[대구 FC]]로 이적하였다. 2016년 [[경남 FC]]로 이적하였다. 2017년 바레인 리그 소속의 마나마 FC로 이적하였다.
  • 이은수(육군) . . . . 3회 일치
         [[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구미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분류:대한민국의 여성 고위 공무원]][[분류:한국군/여군]][[분류:1965년 출생]]
         ||<bgcolor=#808080> '''{{{#FFFFFF 약력}}}''' ||<(>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br][[고등군사법원]] 법원장[br][[육군본부]] 법무실장(육군 준장)[br]고등검찰부장[br]보통군사법원장[br][[군법무관]] 임관[br][[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원 ||
         1965년에 [[구미시]]에서 태어났으며(당시에는 선산군이었음) 4남매(2남2녀) 중 맏이였다. 오상고를 졸업하였으며[* 이 장군은 원래 의사나 과학자가 되고 싶어했으나 당시 오상고 여자반에 이과가 없어서 부득이하게 문과를 선택했고, 법대를 나온 고모부의 영향으로 경북대 법대에 입학하였다고 한다.], 1989년에 [[경북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했고, 한국개발연구원에 연구원으로 1년간 근무하다가[* 이 장군은 대학 4학년 때 사시 1차와 군법무관 1차에 합격하였으나 사시 2차에 떨어지고, 집안형편상 더 이상 고시공부를 할 수 없어 취직을 했다고 한다.] 군법무관 시험에 최종합격하여 1991년에 법무사관 9기로 임관(중위로 임관)했다.[* 대개 임관을 하면 사단 법무참모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여군이라 바로 발령받지 못했는데 당시 36사단장이 이은수 중위를 참모로 썼다. 36사단장의 사모님이 간호병과 대령이었기 때문에 여군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고 한다.] 법무사관 가운데 첫 여군이었다.[* 2012년 기준으로는 군법무관 560명 가운데 52명이 여성이었다.] 당시 임관한 뒤로 10년을 법무사관 중 홍일점으로 지내야 했다고. 2011년에 [[여군]] [[군법무관]]으로는 처음으로 [[준장]]에 올랐다.[* 여군 최초의 [[장성급 장교|장관급 장교]]는 간호 병과 출신 [[양승숙]] 준장이었다. 2014년까지 여군 [[장군]], [[제독]]은 간호 7명, 보병 1명, 법무 1명 등 총 9명(전원 육군)이다.] 법무 병과장인 [[육군본부]] 법무실장에 올랐다.[* 본래는 법무관리관이 병과장으로 육군 소장이 임명되었으나 여러 문제가 일어나 예비역 법무장교 출신 군무원을 임명하는 걸로 바뀌었다.] 같은 해 12월에 [[고등군사법원|고등군사법원장]]으로 옮긴 후 2014년 퇴임하였다.
  • 이인성 (화가) . . . . 3회 일치
         [[1945년]]에는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를, [[1946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강사를 지냈으며 [[1949년]]에 열린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심사위원을 맡았으나 [[한국 전쟁|6.25 전쟁]] 중이던 [[1950년]]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작품은 수채화에서 날카로운 지적인 특성을 보였으며 독자적인 강한 개성으로 한국의 풍토적인 감각을 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 <가을의 어느 날>, <경주의 산곡에서> 등이 있다.
         {{토막글|한국 사람}}
  • 이장영 . . . . 3회 일치
         * 한국금융연구원 국제금융팀 연구위원
         *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조정실 실장
         * 한국금융연수원 원장
  • 이장훈(배우) . . . . 3회 일치
         === TV 프로그램 ===
         ! 2009년
         * 삼성그룹 신입사원 연수 프로그램 연출부
  • 이장희 (시인) . . . . 3회 일치
          | 언어 =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제목=한국현대문학사
         정우택은 비속한 현실에 맞서 절대 자유, 절대 자아의 순전함을 추구했던 이장희의 삶은 곧 그의 시라면서 그의 미적 태도를 '미적 근대성의 자기 파괴적인 양상'으로 명명하였다. 또,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이장희는 근대적 주체의 자율성을 옹호하기 위해 예술의 자율성과 미적 근대성을 절대적인 지점까지 추구했던 시인으로 기록되어야 한다고 했다.<ref>정우택, 〈고월 이장희 시 연구〉, 《민족문학사연구》21권, 민족문학사학회, 2002, 216쪽</ref>
  • 이준섭(군인,정치인) . . . . 3회 일치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천영성]] 후보와 [[민주한국당]] 유한열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석유개발공사 부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 이채영(fromis_9) . . . . 3회 일치
         팀내에서 뛰어난 예능감을 가지고 있는 멤버로 많이 거론된다. 브이앱이나 [[fromis_의 방]], 약속회 토크쇼 등에서도 소소한 부분에서 재미를 유발하는 등 프로미스의 예능 에이스라고 불릴 정도. [[아이돌학교]]에서도 방송 내내 예능적인 면모를 자주 보여줬다. 주로 멤버들이 어떤 이야기를 시작하면 거기에 대해 성대모사를 하거나 과장을 보태어 상황을 설명하는 등 멤버 각자의 개성을 이끌어내는 재능이 있다. 이때문에 거의 모든 멤버와 케미가 잘 맞는 편.
          * 초등학교 때 육상을 했었다. 종목은 오래달리기. 달리기 외에도 [[축구]], [[야구]]를 좋아한다. ~~하긴 포항에서 [[삼성 라이온즈|두]] [[포항 스틸러스|팀]]이 경기를 하니~~
          * 평소엔 "Zㅗ르Zㅣ마" 같은 말투로 장난스럽게 늘어질 듯 말할 때가 자주 보인다. 프로미스의 방 0회에서 나온 언니도 비슷한 말투다. 또한 공연 전에는 항상 긴장이 넘치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무대에 올라가면 그런 모습 없이 좋은 공연을 보여준다. 그런 걸 보면 타고난 무대 체질인듯 하다.
  • 임현주 . . . . 3회 일치
         * 2009년 ~ 2011년 : [[KNN]] 아나운서
         !연도||방송사||프로그램||진행 기간||비고
         !연도||방송사||프로그램||진행 기간||비고
  • 장기 . . . . 3회 일치
         중국 장기와 일본 장기, 한국 장기는 각자 규칙이 다르다. NTX 위키는 한국 위키니까 한국 장기의 규칙을 설명한다.
  • 장남석 . . . . 3회 일치
         [[2009년]]엔 잦은 부상에 시달리며 정상적인 컨디션을 유지하지 못해 정규리그 14경기에 출전하는 동안 한 골도 성공시키지 못했다.
         ''2009년 3월 25일 기준''
         * [[2006년]] [[스포츠토토]] 한국축구대상 신인상
  • 장윤정 (미스코리아) . . . . 3회 일치
         1987년 18살의 나이로 [[미스코리아]] 진으로 뽑힌 후 1988년 [[미스 유니버스]] 2위에 오르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1990년대 각종 방송 프로그램의 MC로 활약하다 1999년 모든 방송 활동을 접고 연예계를 떠났고, [[미국]]으로 건너가 두 딸을 키우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지내다가 16년 만인 2016년 영화 《[[트릭 (2016년 영화)|트릭]]》에 출연하며 연기 활동을 재개했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382&aid=0000482667 ‘87년 전설의 미스코리아’ 장윤정, 잠정 은퇴 후 16년 만에 영화 ‘트릭’으로 돌아오다] 스포츠동아. 2016년 06월 22일</ref>
         1994년 은행원과 [[결혼]]했지만 3년만에 [[이혼]]하였고, 그 후 2000년대 초반 [[미국]]에서 15살 연상의 [[재미교포]] [[사업가]] 김상훈과 [[재혼]]했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022&aid=0002976972 미스코리아 장윤정 15년만 영화 '트릭' 으로복귀] 세계일보. 2015년 12월 17일</ref> 장윤정은 2016년 9월 27일 [[TV조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사업으로 미국을 자주 왕래하는 남편이 미국에 가자고하여 미국에서 살게 되었고 살다보니까 10년 정도 거주를 하게 됐다"고 미국에서 오래 살았던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이 남자가 언제까지 나한테 못되게 구나 두고보자라는 생각으로 오기로 결혼을 했다”라며 무뚝뚝한 남편과 결혼한 이유에 대해 밝히기도 했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011&aid=0002891291 미스코리아 장윤정 “15살 연상 남편 김상훈, 나한테 무심해 매력 느꼈다”] 서울경제. 2016년 09월 28일</ref>
         * [http://misskorea.hankooki.com/profile_view.php?year_miss=1987&miss_num=23&indexid=709 미스코리아 장윤정 프로필]
  • 전가의 보도 . . . . 3회 일치
         [[야구]] 분야에서는 [[투수]]가 자신있게 사용하는 [[변화구]]에 대하여 전가의 보도라는 말을 사용한다.
         한국 인터넷에서는 "'전가의 보도는 옛날에 '양반가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보검'을 뜻하는 말이다. 아들이나 아내가 불미스러운 일로 집안에 누가 되는 행동을 범했을 때 이를 처단하는 도구로도 사용됐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근거는 낮은 것 같다. 애초에 이 말은 한국 문화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인다.[[http://www.vop.co.kr/A00000768894.html (민중의 소리)]]
  • 전혜진(1970) . . . . 3회 일치
          * [[배우/한국]]
         ||<|2> [[1996년]] || KBS || 프로젝트 || ||
         [[분류:한국 여배우]][[분류:미스코리아 출신 배우]][[분류:1970년 출생]][[분류:김천시 출신 인물]]
  • 정재호 (1930년) . . . . 3회 일치
         * (주)한국경영정보센터(KMIC) 회장
         * [[한국부동산경제신문]] 회장
         {{토막글|한국 사람|정치인}}
  • 정치공학 . . . . 3회 일치
         정치학의 한 분야, 혹은 한국 정계의 관용어. 때때로 쓰이는 단어지만 그 의미가 확실하지는 않다.
         === 한국 정치계 ===
         한국정치계에서 쓰이는 관용구로서 '정치공학'은, 공학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학문은 아니며, 정치분야에서 마치 공학에서 기계나 사물을 다루는 것처럼 특정한 어젠다를 의도적으로 추종하거나, 정당, 계파 간의 연대와 협력 등의 정략으로 자기 정당의 집권을 도모하는 것을 뜻한다. 정치공학에는 국민의 의사나 복리를 무시하고, 정치권의 집권 이득만을 추구한다는 뉘양스가 있으며, 부정적인 의미가 매우 강하다. 또한 계파 간의 연대와 협력 과정에서 어떤 동질적 가치관이나, 이념에 대한 합의 추구가 없이 정권 획득과 권력 추구만을 하여 지조없이 협력하므로 '신념'이 없다는 의미도 있다. 다만 노골적인 협잡, 야합보다는 다소 부드러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http://www.newspim.com/news/view/20161213000292 (참조)]]
  • 정해창(정무직공무원) . . . . 3회 일치
         법무부장관 퇴임 후인 1989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을 설립하였다. 1990년부터 1993년 초까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대통령비서실장|장]]을 역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김천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임인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4년부터 2014년까지 한국범죄방지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한편 김천중학교-[[김천고등학교]] 재단이사장도 지냈다.
  • 진격의 거인/98화 . . . . 3회 일치
          * 파르코는 자신을 "크루거"라 밝힌 남자와 매일 만나고 있다. 파르코가 가비를 이길 일을 말하며 "크루거의 덕"이라 감사를 표한다. 하지만 크루거는 몇 번이나 편지 배달을 부탁한 자신이 감사할 일이라고 사양한다. 그는 가족으로부터 야구공과 글러브를 받았는데, 자신도 그걸로 "앞으로 나아가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때 의사가 다가오는 걸 보고 파르코는 자리를 뜨는데, 공교롭게도 그는 군의 진료의로 일하는 "예거"씨였다. 크루거는 그를 한 눈에 알아본다. 노인이 같이 앉아도 되겠냐 묻자 크루거가 허락하고 둘은 통성명을 한다. 크루거는 "크루거"라는 이름을 그대로 댄다. 노인은 크루거가 기억상실에 걸린 것이나, 파르코가 자주 방문하는 것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대화 상대를 찾아온 거란 말과는 달리, 파르코의 상세한 내력에 대해서 읊기 시작한다. 파르코의 숙부가 엘디아 복권파 조직의 간부였다 숙청 당한 것, 연좌를 당하고 살아남은 가족들은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했던 것. 콜트가 마레의 전사가 된 걸로 겨우 그라이스가에도 안정이 왔다는 설명 뒤에 아마 "짐승 거인"을 계승하는 문제 때문에 자신을 만나기 껄끄러울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가 이런 말을 한 진의는 이랬다.
          노인은 파르코와 크루거 사이의 거래도 알고 있었고 사실 크루거가 정상이라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니 의심살 짓은 그만두고 어서 가족에게 돌아가라고 권하는데. 크루거는 떠보듯이 "혹시 가족일로 후회할 짓을 했냐"고 묻자, 그는 상처를 찔린 표정이 된다. 그가 바로 [[그리샤 예거]]의 아버지이자 지크의 할아버지. [[엘런 예거]]에게도 할아버지가 된다. 그는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다고 고백했다. 그리샤가 여동생을 데리고 벽을 나서게 놔둔 일이나 아들에게 의사를 강요했던 일 등. 그 모든게 자신 탓이라고 자책하던 그는 마침내 오열하듯이 비명을 지른다. 그때 병원에서 진짜 의사가 달려나오는데, 사실 그도 이 병원의 환자였던 것이다. 크루거는 병실로 돌아가는 그를 바라보다가 가족에게서 받은 야구공을 허공 위로 던져 본다.
          역시나 그 정체는 엘런 예거. 파르코에겐 여전히 가족에게 편지를 보낸다는 명목으로 여러번 심부름을 시켰다. 개인적인 조언도 해준 모양인데 파르코는 그 덕분에 가비를 이겼다고 굉장히 고마워한다. 그런데 파르코와 만나는 자리에 야구공과 글러브를 가지고 나왔는데, 일단 가족에게서 받은 거라고 설명했다. 파르코가 돌아간 뒤에는 병원을 방문한 예거 박사와 만나는데, 첫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모습을 보인다. 예거박사가 파르코에게 심부름 시키는 거나 사실 그가 멀쩡하다는 걸 간파하고 가족에게 돌아가라 권하자 "혹시 가족에게 후회할 짓을 했냐"고 떠본다. 예상대로 예거 박사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늘어놓으며 오열하게 되고, 착잡한 표정이 된다.
  • 창작:앨프레드 박 . . . . 3회 일치
         20대 한국인 남성. [[창작:레스터 리|레스터 리]]보다 나이가 4살(존보다는 2살) 정도 더 많기 때문에, [[창작:리 올드포드|중장년급 입주자]]를 제외하면 거의 최고령 수준이다. 한국식 본명은 박재동이지만 다른 아시아계 거주민들처럼 본명은 잘 얘기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이유는 다르지만,[* '나는 한국이란 나라가 싫다는' 비정상적인 수준의 국까부터 시작해서, 이름이 촌스러워서 언급하기 싫다는 사소한 이유까지 다양하다.] 앨프레드의 경우는 '안 좋은 추억이 있어서'라고 한다.
  • 창작:좀비탈출/1-1 . . . . 3회 일치
         대문을 나선 순간 나의 냄새를 맡았는지, 골목길에 있던 좀비들이 모여오기 시작했다. 야구방망이로 제일 가까이 있던 놈의 골통을 후려 갈겨 쓰러뜨린 다음,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나는 채 10미터도 가지 못하고 한 다스도 넘는 좀비들에게 포위되었다. 어디에서 이렇게 많이 튀어나온 거지? 야구방망이를 아무리 휘둘러도 중과부적이다. 이길 수 없다.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4-1-2-1 . . . . 3회 일치
         이런 처지가 돼서 말하긴 뭣하지만 이렇게 극도로 얇고 허약한 막대기에 목숨을 맡기는건 멍청한 짓이다. 이걸로 머리통을 후려치면 똑 부러져도 이상할게 없겠지. 왜 이걸 보강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껌테이프로 칭칭 감기만 해도 지금보다는 나았을 거야. 물론 집 안에 껌테이프가 있을 때 얘기지만. 그럼 일단 집안으로 돌아갈까? 아니지 아니야. 이건 직감이지만 다시 들어갔다간 '''다시는 못 나올 거야.''' 두 번 다시는.
         토트넘이 나를 봤다. 눈깔이 남아 있다면 봤을 거다. 어쨌든 녀석은 나에게 똑바로 다가오고 있다. 담장을 넘는게 영향을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공만 죽어라 차대더니 죽어서도 하체는 튼튼한가 보다. 보통의 놈들에 비해서 빠르고 정확한 걸음을 하고 있으니까. 그 썩어 문드러진 면상만 아니었다면 프로 입단이라도 권해야겠어.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트와일라이트 시티/블랙리스트 . . . . 3회 일치
          모든 아가씨들의 남자를 자처하는 한국계 제비족 청년. 어학연수나 여행 때문에 왔지만 적응하지 못하는 한국인들에게 친근하게 대하다가, 이런저런 함정에 몰아넣고는 돈만 먹고 튄다. 그리고 그 돈은 다른 아가씨들과의 파티에 날려버리는 악질. 반대로 미국에 너무 오래 머무르거나 이런저런 문제로 곤란해하는 한국인들에게 마약을 팔아먹기까지 하고 있다. 그렇게 인면수심의 짓거리를 하고선, 자기 이름을 단 어학원을 경영하여 경찰의 추적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겁쟁이이기도 하다.
  • 최수환 . . . . 3회 일치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제13번)으로 당선되었다. 1984년 말 [[홍사덕]], [[김현규]], [[서석재]], [[허경만]], [[박관용]], 손정혁, [[김찬우(1933)|김찬우]] 등과 민주한국당 탈당 선언을 하고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영일군-[[울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민주정의당]] [[박경석(1937)|박경석]] 후보와 민주한국당 [[서종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크리미널 마인드 . . . . 3회 일치
         [[미국 드라마]]. 수사물. [[프로파일링]]을 전문으로 하는 [[FBI]] 행동분석팀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크리미널한 드라마.
          * 대부분의 사건에서 [[DNA]]나 [[지문]] 같은 증거가 없어서 [[CSI]]가 활약할 여지를 봉쇄한다(…). 사건의 주제상 사건을 프로파일링--이라는 이름의 무당질--으로 해결하기 위한 것인듯.
          * 프로파일링의 영험함(…)이 상당히 뛰어나다. 거의 [[무당]] 수준. 전문가니까 그렇다고 봐야겠지만.
  • 태보 . . . . 3회 일치
         1980년대에 [[빌리 블랭크스]]가 창안한 무술 겸 트레이닝 프로그램. 이름은 태권도('''tae''' kwon do)와 복싱('''bo'''xing)에서 따온 것이다.
         [[태권도]]와 [[복싱]]의 동작을 활용하여, [[춤]]과 [[에어로빅]]으로서 활동하는 트레이닝 프로그램이다.
         태권도와 복싱의 동작을 사용하여, 에어로빅처럼 음악에 맞춰 춤추듯이 움직이고 동작을 반복하여 트레이닝을 한다. 태권도와 복싱의 동작을 쓰기 때문에 운동만이 아니라 [[호신술]]로도 쓸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어디까지나 동작만 연습하는 것이고 실제 대련 프로그램은 없기 때문에 무술로서의 성격은 희박하다.--대신 빌딩은 파괴할 수 있다.--
  • 테헤페로 . . . . 3회 일치
         [[성우]] 히카사 요우코(日笠陽子)이다. 히가시 요우코(日笠陽子)와 나카무라 에리코(中村繪里子)가 진행하던 라디오 간사이의 방송 프로그램 「놀라움 전대 모모노키 파이브(おどろき戦隊モモノキファイブ) 」에서 처음으로 나온 것으로, 2009년 6월 방송된 제12화에서 나왔다.
          * 2009년 7월, 히카사가 블로그에서 처음으로 사용.
  • 템포라 . . . . 3회 일치
         Tempora. [[영국]]의 [[정보기관]]인 [[GCHQ]]가 진행하던 프로그램.
         [[광케이블]]을 해킹해 전화 통화, 인터넷 접속 내역, 이메일 등을 수집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이렇게 빼낸 정보는 30일 이상을 저장된 상태로 분류되고 분석되었으며, 미국 정보기관인 [[NSA]]에 공유되기도 했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7303662|국민일보 - 영국 정보기관, 대서양 광케이블 해킹… ‘템포라’ 프로그램 운용(한글)]]
  • 프로그램 규정설 . . . . 3회 일치
         프로그램 규정설에 따르면, 특정한 헌법 조항에 지정된 권리는 다른 법률과는 달리 구체적인 법률적 권리가 아니며 국가의 정치적 방향성을 지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프로그램 규정설의 탄생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바이마르 헌법]]에 대한 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이마르 헌법은 국민의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는 매우 이상적인 조항이 있었으나, 이는 당시의 보수적인 사회,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의 경제적인 실태에 적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러한 헌법의 이념과 현실의 격차를 처리하기 위하여 프로그램 규정이라는 이론이 도입되었다.
  • 홍효의 . . . . 3회 일치
          * [[야구 관련 인물(KBO)]]
         || 학력 || 포항초-포항중-[[구미전자공업고등학교 야구부|구미전자공고]]-강릉영동대 ||
         || 프로입단 || 2010년 삼성 라이온즈 신고선수 입단 ||
  • 1000가지 위기의 순간 . . . . 2회 일치
         1000 Ways to Die. [[단막극]] 형식으로 사고사 사례를 보여주는 미국의 TV 프로그램이다. 국내에서는 케이블 채널인 [[스마일TV]]가 방송 중.
         [[분류:TV 프로그램]]
  • 2013 K리그 심판매수 . . . . 2회 일치
         또한 검찰의 추가조사 결과 전북은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300&key=20160607.22006223302|경기 하루 전날 심판에게 돈을 건낸것으로 밝혀져] 이 행위가 경기 자체에 영향을 미쳤다고 충분히 볼 여지가 생겼다. 참고로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도 연맹의 규정에 따르면 경기에 배정되는 심판은 대외비라고 적시하고 있는데[* 한국프로축구연맹 규정 제4장 심판(2016년 1월 16일 개정판) 제9조 3항에 따르면 '''"K리그 심판의 배정은 대외비로 하며, 위원회는 거점 숙소제 운영 원칙에 따라 해당심판에 게 배정 통보 시기 및 배정 지역을 개별 통보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이 대외비가 흘러나온 것에서도 연맹은 비판을 면할 수 없다.
  • MoniWikiTutorial . . . . 2회 일치
          * [wiki:NoSmoke:FrontPage 노스모크] : 한국 최고의 위키 커뮤니티
          * [wiki:EnhaWiki:FrontPage 엔하위키] : 한국 최대 규모의 서브컬쳐 사전
  • USS 피닉스 (CL-46) . . . . 2회 일치
         1943년 7월, [[국무장관]]이었던 [[코델 헐]]을 [[카사블랑카]]까지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한 피닉스는 다시 태평양 전역으로 돌아온다. 같은 해 12월에는 글로스터 곶에 상륙하는 연합군을 지원하였으며, 1944년 1월에는 [[뉴기니]] 섬의 해안시설을 포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2월에는 [[로스니그로스]] 섬에 상륙하는 연합군을 지원하였고, 3월에는 다른 연합군 순양함과 함께 일본군의 해안 포대를 깨부쉈다. 4월 22일에는 홀란디아[* 現 [[자야푸라]].]에 상륙하는 연합군을 지원하였고, 그로부터 1주일 후에는 근처 지역의 일본군 비행장을 포격, 연합군을 위협할 수 없게 하였다. 5월에는 또다른 상륙작전들을 지원하여 일본군의 초소를 초토화시켰다. 6월에는 해당 지역에 증원군을 수송하던 일본군 구축함들을 발견, 쫓아내었다. 7월에는 Numfoor[* Neumfoor라고 읽기도 하는 듯. 갓-구글님께서 한국어 표기를 말씀하시지 않으신다.]의 해안을 포격했다. 9월에는 말루쿠 제도의 [[모로타이]] 섬 상륙작전을 지원하였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2050400329201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5-04&officeId=00032&pageNo=1&printNo=11260&publishType=00020|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경향신문 - 피격 아르헨순양함 침몰 승무원 오백여명 사망(한국어)]
  • Victoria II/POP . . . . 2회 일치
          * Location(지역): 해당 POP가 거주하면서 일하는 프로빈스. 예시의 POP는 평양에 거주한다.
          * Life Needs(생명 욕구): 살아있기 위해 필요한 것들. 물컵으로 표현된다. 가장 우선적으로 충족하려 하는 욕구로, 만약 충족되지 못한다면 의식도와 투쟁성이 크게 증가할 뿐만 아니라 POP들이 떼죽음을 당한다. 반대로 생명 욕구를 충족하고 거주 프로빈스의 생활등급이 30 이상이라면 어떻게든 애를 낳고 기르면서 산다. 그러니까 인구가 증가한다.
  • 감정없는 존재 . . . . 2회 일치
          1. 합리를 추구하는 "이성"자체가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묘사되며, "감정"이라는 프로그램이 아직 인스톨 되지 않은 경우
  • 거타지 . . . . 2회 일치
         [[분류:신라의 무신]][[분류:저격수]][[분류:한국의 신화]][[분류:신라 사람]][[분류:외교관]][[분류:한국의 전설]][[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
  • 건어물 여동생 우마루짱/141화 . . . . 2회 일치
         [[건어물 여동생 우마루짱]] 141화. '''우마루와 아프로'''
          * 실핀은 봄바를 "아프로"라고 부른다. 알렉스를 통해 아는 사이.
  • 건어물 여동생 우마루짱/160화 . . . . 2회 일치
          * 도마가에서는 우마루(코마루)와 키리에가 호러 Tv프로를 보고 있다.
          * 듣고 있던 우마루는 호러 프로그램을 본게 생각나서 "역시 같이 가는게 좋겠다"고 조언하고 키리에는 시원스럽게 수긍한다.
  • 건포인트/도전과제 . . . . 2회 일치
          불프로그 하이퍼트라우저를 즉시 뛰어오를 수 있도록 강화하십시오.
          불프로그 하이퍼트라우저를 최대한 멀리 뛸 수 있게 강화하십시오.
  • 경마 . . . . 2회 일치
         === 한국 ===
         한국의 경마는 1898년 서구식 경마가 처음으로 열렸다. 나귀경주, 기병경주가 열리다가 1922년 본격적인 경마가 시작되었다.
  • 경산시 . . . . 2회 일치
         * [[원효]] - 신라의 고승이자 철학자, 작가, 시인, 정치인이다. 설총의 생부이며, 한국 최초의 대처승으로도 유명
         * [[배재민]] - [[철권]] 프로게이머
  • 경주시 . . . . 2회 일치
         |align="center"| 팝피아니스트. 작곡가.프로듀서
         [[분류:경주시 출신|경주 출신 인물]][[분류:경상북도의 도시]][[분류:1955년 설치]][[분류:1995년 폐지]][[분류:1995년 설치]][[분류:한국의 옛 수도|서라벌]][[분류:대한민국의 항구 도시]]
  • 고원희 . . . . 2회 일치
         * [[한국관광공사]]
         {{토막글|한국 배우}}
  • 고준희 . . . . 2회 일치
         ||2010||한국 P&G||헤드앤숄더 헤어 폴 클리닉 샴푸 (헤어케어)||
         ||이엔에스||프로월드컵 (운동화)||
  • 곽결호 . . . . 2회 일치
         * 2005년 : 한국수자원공사 사장
         * 2009년 : 한양대학교 건설환경시스템 공학과 석좌교수
  • 교조 . . . . 2회 일치
         특정한 [[종교]]의 창시자를 뜻한다. 비슷한 말로 개조(開祖), 파조(派祖), 조사(祖師) 등이 있다. [[한국어]]에서는 별로 많이 안 쓰이는 단어지만 [[일본어]]에서는 교조가 자주 쓰인다. 한국에서는 대신 [[교주]]가 많이 쓰인다.
  • 구본홍 . . . . 2회 일치
         * 2008년 7월 ~ 2009년 8월 3일 : YTN 대표이사 사장
         {{토막글|한국 사람}}
  • 권민경 . . . . 2회 일치
         미스코리아 대구 입상 후 모델 활동을 잠시 한 이후 그녀는 1990년 대구 출신의 변호사 조재원과 결혼하여 그와의 사이에 1남 2녀(1991년생 장녀, 1993년생 차녀, 1998년생 막내아들)를 두었고 자녀들 중 막내아들 조상우({{출생일과 만나이|1998|5|23}} [[대구광역시|대구]] 출생) 君은 [[한림연예예술고등학교|한림예고]] 출신인데 지난 2015년 TvN TV 프로그램 《[[고교10대천왕]]》에 10대천왕 패널 주인공 중 일원으로 출연한 전력이 있다.
         {{토막글|한국 사람|방송인}}
  • 기동전사 건담 . . . . 2회 일치
         당시 만연했던 '로봇 프로레슬링'[* 매 화마다 특정 메카와 1대 1, 혹은 1대 다수로 일회성 대결을 펼치는 방식. '마징가 Z' 등을 떠올려보면 쉽다.] 플룻에서 벗어나 전쟁 서사적인 면을 다룬 스토리로 막 태동하기 시작하던 마니아 층에게 어필하여 초반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인기를 끌어모아 거대한 프랜차이즈를 형성하는 계기를 만들어냈다. 로봇물에서 이른바 '슈퍼로봇'과 '리얼로봇'이라는 구분법이 생겨나게 된 계기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단, 21세기 시각에서 돌이켜 보면 여전히 옛날 로봇애니의 요소들도 많이 담고 있기도 한 '과도기적 작품'이다.[* 아니,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21세기 작품들이 '옛날 로봇애니 요소'는 더 많을지도 모른다(…). ~~(유행은 돌고 돈다)~~]
         예를 들어 마징가Z의 경우, 마징가Z 이외의 로봇은 거의 상품화 되지 않았다.(적 메카는 거의 없다시피 했고, 보스보로트나 아프로다이A는 마이너한 인기가 있는 정도) 반면 건담은 프라모델 생산 라인으로 수십가지 상품군을 갖출 수 있었고, 이를 매년 신 시리즈를 내고 갱신하면서 20년 이상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훗날 신경향 건담들이 나오면서 '건담 우려먹기'가 시작되어, 건프라도 건담 계열에 치중된 라인업 우려먹기로 빠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 김덕현 (변호사) . . . . 2회 일치
         김덕현은 판사 출신으로 [[1986년]] 변호사로 개업한 뒤 여성변호사회 회장, 대한변호사협회 여성문제연구실무위원장, 한국에이즈퇴치연맹 이사, 국가인권위원회 위원 등을 거쳤다.<ref>김효섭.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0011071 전원위원회 구성 어떻게]. 서울신문. 2004년 8월 25일.</ref> <ref>강충식.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0033227 (‘로스쿨’로 뛰는 대학들) (1)한양대]. 서울신문. 2005년 2월 28일.</ref> <ref>심규석.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323957 <헌법재판관 5인 교체 앞두고 하마평 무성>(종합)]. 연합뉴스. 2006년 6월 11일.</ref> <ref>이하나. [http://www.womennews.co.kr/news/54417 네 번째 여성 대법관 탄생하나]. 여성신문. 2012년 8월 17일.</ref>
         *2000.01 ~ 2006.12 제4대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
  • 김문순 (언론인) . . . . 2회 일치
         * 2007년 한국신문협회 부회장 수상
         {{토막글|한국 사람}}
  • 김민교 (가수) . . . . 2회 일치
         === 가요 프로그램 1위 ===
         {{토막글|한국 가수}}
  • 김상기 . . . . 2회 일치
         * [[김상기 (야구 선수)|김상기]]([[1961년]] ~ )는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이다.
  • 김선재 (아나운서) . . . . 2회 일치
         * [[SBS (대한민국의 방송사)|SBS]] 《프로야구 중계석》
  • 김성주(축구선수) . . . . 2회 일치
         || 프로입단 || 2012년 [[알비렉스 니가타]] ||
         ==== 프로 데뷔 이전 ====
  • 김수자 . . . . 2회 일치
         '''김수자''' ([[1957년]] ~ )는 [[뉴욕]], [[파리]], [[서울]]을 기반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개념 미술|개념 미술가]]이다. 24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와 55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 특별관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출품하였다.<ref name="biography">Kimsooja Biography: http://www.kimsooja.com/biography.html</ref>그의 작업은 퍼포먼스, 비디오, 설치를 넘나들며 가장 첨예한 회화적 질문으로부터 예술과 삶의 조건들을 연계하여 다루어 왔고 이 시대를 치열하게 직면해 왔다. 구겐하임 빌바오(2015),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2013), 밴쿠버 아트 갤러리(2013), 국제 갤러리(2012), 뉴욕PS1/현대미술관(2001)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30여 회의 주요 국제 비엔날레와 트리엔날레에 참여했다.<ref>{{웹 인용|url=http://www.vmspace.com/2008_re/kor/sub_emagazine_view.asp?category=artndesign&idx=11956&pageNum=3|제목=SPACE Magazine|웹사이트=www.vmspace.com|확인날짜=2016-11-18}}</ref>
  • 김우중 . . . . 2회 일치
         |수상 = [[1999년]] 20세기 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
         그러나 [[1997년]] [[IMF 구제금융사건|IMF 구제금융]]으로 한국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고, 그로 인한 여파로 부채비율이 400% 이상이었던 [[대우그룹]]은 쌍용을 인수하는등 확장정책을 이어나갔지만 [[일본]] 노무라 증권이 [[1998년]] [[10월 25일]]에 발표한 '[[대우인터내셔널|대우]]에 비상벨이 울린다'는 보고서 1장으로 사실상 [[대우그룹]]이 위기를 맞게 된다. 후에 계열사를 41개에서 4개업종 10개 회사로 구조조정 단행과 [[삼성그룹]]과의 빅딜도 추진하나 둘다 실패했다. [[1999년]] [[8월 26일]] 이미 구조조정으로 회사 41개중 16개가 매각되었고 남은 25개 회사중 12개가 워크아웃을 신청하였다. 당시 부채는 500억 달러였다. 당시 [[대우그룹]]은 금융부문을 중점으로두고 사업확장을 하여 내부적으로 부채가 많았다. 사실상의 그룹 해체였다. [[1999년]] [[11월 1일]] 김우중은 13명의 [[대우그룹]] 사장단들과 함께 경영포기 및 회장직을 사퇴하였다. [[대한민국 검찰청|검찰]]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 출국한 후 도피생활을 하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중국]]에서 호화롭게 생활을 했다는 주장과, 반대로 [[유럽]] 등지의 3류 호텔에서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며 어렵게 생활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대우그룹]]은 당시 [[김대중 정부]]가 정치적으로 탄압했다는 설과 단순한 [[구조조정]] 실패라는 의혹이 있다.
  • 김재권 (철학자) . . . . 2회 일치
         '''김재권'''(金在權, 제이슨 킴, Jayson Kim(or Jaegwon Kim), [[1934년]] [[9월 12일]] ~ )은 [[한국계 미국인]] [[철학자]]이다. [[브라운 대학교]] 석좌교수인 그는 [[심신수반론]]을 창시한 이로도 유명하다.
         [[분류:193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미국의 철학자]][[분류:대한민국의 철학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미국의 저술가]][[분류:서울창경초등학교 동문]][[분류:서울경복중학교 동문]][[분류:경복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동문]][[분류:다트머스 대학교 동문]][[분류:프린스턴 대학교 동문]][[분류:20세기 철학자]][[분류:21세기 철학자]][[분류:심리철학자]][[분류:경암학술상 수상자]][[분류:스와스모어 칼리지 교수]][[분류:노터데임 대학교 교수]][[분류:미시간 대학교 교수]][[분류:브라운 대학교 교수]][[분류:존스 홉킨스 대학교 교수]][[분류:코넬 대학교 교수]]
  • 김정행 . . . . 2회 일치
          * 동명의 [[재일 한국-조선인]] 야구선수를 찾는다면 [[카나이 마사유키]] 문서 참고.
  • 김정호 (1949년) . . . . 2회 일치
         * 2005년 : 한국사료협회 회장
         * 2009년 : 운산그룹 해외곡물자원개발 부회장
  • 김중혁 . . . . 2회 일치
         친구 [[김연수]]가 한국 문학의 기대주로 승승장구 하는 것을 보고 2000년 '문학과 사회'에 중편 소설 [[펭귄 뉴스]]를 발표하며 뒤늦게 등단했다. 이후 <엇박자 D>로 2008년 제2회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외 2010년 제1회 젊은작가상 대상, 2011년 제19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문학부문), 2012년 <요요>로 이효석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5년 <가짜 팔로 하는 포옹>으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2016년부터 평론가 이동진과 영화소개프로그램 [[영화당]]을 진행한다.
  • 김지훈 (영화감독) . . . . 2회 일치
         1998년 단편영화 《온실》로 제2회 [[세계 필름 페스티벌]]에 초청되었으며, 제46회 [[독립영화제]]에서 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이후 《[[목포는 항구다]]》, 《[[화려한 휴가]]》를 제작하였다. [[5.18]]을 다룬 《[[화려한 휴가]]》는 [[전라도]] 사투리 연구에 많은 공을 들였고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022&aid=0000227432 김지훈 감독 "대구출신이라 3년 간 전라도 사투리 연구"] 세계일보. 2007년 05월 17일</ref> [[2011년]] [[8월]] 개봉한 한국 최초 3D 블록버스터인 《[[7광구]]》를 제작하였다. <ref>{{뉴스 인용|제목 = 김지훈: 영화정보-씨네21|url =http://www.cine21.com/Movies/Mov_Person/person_info.php?id=6724|출판사 = 씨네21|확인날짜=2011-05-19}}</ref>
         * 2007년 제27회 한국영화평론가협의회 최우수예술가상
  • 김충공 . . . . 2회 일치
         {{토막글|한국 사람|정치인}}
         [[분류:생년 미상]][[분류:835년 죽음]][[분류:신라의 왕족]][[분류:신라의 문신]][[분류:신라의 시중]][[분류:왕세자]][[분류:한국의 추존왕]][[분류:병사한 사람]][[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
  • 김필곤 . . . . 2회 일치
         *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항소4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2009년 3월 31일에 모텔에 투숙한 손님들의 자동차 번호판을 나무 판자로 가려줘 자동차관리법 위반으로 즉결심판에 회부되어 벌금 5만원을 선고받았지만 이에 불복해 청구한 정식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모텔 종업원에게 항소심에서 "해당 조항에서 처벌에 특별한 제한을 두고 있지 않으므로 처벌 근거 조항에 대해서는 행정형벌의 일반적인 특징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며 "자동차 관리와 안전을 해칠 수 있는 일반적 위험성이 있는 행위를 모두 처벌 대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면서 원심을 깨고 벌금 5만원을 선고했다.<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47248.html]</ref> 7월 8일에 "지하철에서 장갑을 팔았다 범칙금 스티커를 발부받아야 한다"며 강제연행하려는 서울메트로 질서기동팀 소속 공익근무요원을 폭행한 홍모씨에게 "임의동행을 거부한 피고인을 강제 연행하려 하거나 경찰관이 도착할 때까지 체포한 행위는 공익근무요원의 정당한 직무상 행위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피고인이 이에 대항해 폭행을 가했다 해도 공무집행방해죄로 처벌할 수 없다"며 벌금 2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ref>[http://www.fnnews.com/news/200907080856516671?t=y]</ref> 12월 9일에 비자발급 심사를 부실하게 한 혐의로 기소되어 "일부러 직무를 포기했다고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중국 주재 한국대사관 전 영사 황모씨에 대해 "중국 현지 한인회의 부탁으로 서류가 보완되지 않은 중국인에게 비자를 발급한 것도 직무유기에 해당한다"고 하면서도 "자의적인 비자 발급으로 불법 체류자가 생긴 만큼 죄질이 나쁘지만 그동안 국가에 헌신해 왔고 나태한 마음으로 범행을 하게 된 점을 참작했다"며 징역 8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ref>[http://news.mt.co.kr/mtview.php?no=2009120911405515959&outlink=1&ref=https%3A%2F%2Fsearch.naver.com]</ref> 2010년 2월 11일에 면허정지 기간에 운전을 하다 적발돼 벌금 100만원에 약식 기소되자 청구한 정식재판에서 "무면허 운전을 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벌금 50만원을 선고받은 피고인에게 "무면허 운전은 면허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고의로 차를 몰아야 성립하는데 최씨가 정지처분 통지를 받지 못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비록 경찰 당국이 통지를 대신하는 공고를 거쳤더라도 그것만으로는 그가 면허 정지 사실을 알았다고 보기에 부족하다”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ref>[http://www.fnnews.com/news/201002110848419738?t=y]</ref>
  • 김형철 (가수) . . . . 2회 일치
         {{토막글|한국 가수|한국 배우}}
  • 김효원 . . . . 2회 일치
         '''김효원'''(金孝元, [[1542년]] ~ [[1590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문신이다. [[퇴계 이황|이황]]과 [[남명 조식|조식]]의 문인이다.<ref name=autogenerated2>[http://weekly.hankooki.com/lpage/nation/200611/wk2006111416012337070.htm 주간한국 : [종가기행 24] 善山金氏 省庵 金孝元 - 부친 여윈 뒤 家勢 기울어 "가문의 전통 범절 잘 몰라요"<!-- 봇이 붙인 제목 -->] </ref> 본관은 [[선산 김씨|선산(善山, 일선)]]으로, 자는 인백(仁伯)이고 호는 성암(省庵)이다.
         [[분류:조선의 작가]][[분류:사상가]][[분류:허균]][[분류:성리학]][[분류:이황]][[분류:선산 김씨]][[분류:경상북도 출신]][[분류:병사한 사람]][[분류:사림파]][[분류:동인]][[분류:16세기 한국 사람]]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00화 . . . . 2회 일치
          * 굳이 공격 형태의 기술일 필요는 없으며, 예를 들어 이이다의 "레시프로 버스트"같은 일시적인 초가속도 가 자체로 강력하므로 필살기라 할 만하다.
          * 이이다는 레시프로의 디메리트를 줄이기 위해 장비를 개량할 생각이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03화 . . . . 2회 일치
          * 이레지어 헤드, 아이자와 쇼타의 그녀 등장? 아이자와의 지인 Ms.조크 등장. 아이자와는 일방적으로 프로포즈 당하고 거절하길 반복하고 있다.
          * 어차피 프로가 되려면 "개성을 공개"하는 것이 필연.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히어로라는 지론과 함께 "우리 학생들은 다른 학교보다 더 앞을 보고 있다"고 장담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13화 . . . . 2회 일치
          * 한동안은 얌전히 있었던 갱 오르카. 그러나 프로 히어로답게 약점에 대한 대처도 분명히 하고 있었다. 이정도로 불꽃의 소용돌이를 만들면 어지간한 빌런도 항복할 거라고 말하면서도 미리 준비했던 생수로 수분을 보충한다. 히어로는 항상 "다음 수"를 생각해야 한다면서 가볍게 열풍감옥을 뚫어버리더니 다음 수는 없느냐고 묻는다. 불행히도 거기까지는 여력이 없는 토도로키.
          * 시험 종료 후, 갱 오르카의 부하들은 예상보다 저항이 심했던 건지 자기들이 일처리를 제대로 못했다며 갱 오르카에게 굽실거린다. 사실 이들은 구속용 프로턱터가 착용돼서 제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던 상황. 하지만 갱 오르카는 그걸 감안해도 최후의 열풍감옥이나 거기서 이어진 미도리야의 기습은 좋은 작전이었고 만약 시험이 계속됐더라면 자기도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23화 . . . . 2회 일치
          하도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녀는 아시도의 움직이는 뿔을 신기해하며 만지작거리면서도 "좌절해서 히어로를 포기하고 문제를 일으킨 애가 있다"며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키리시마 에지로]]는 두 사람의 말을 모두 들었는데 상당히 자극을 받은 것 같다. 같이 이야기를 들은 [[토코야미 후미카게]]도 그렇다. 토코야미가 "우린 프로 히어로와 싸움도 겪어 봤다"고 말하자 키리시마가 "빌런과도 싸워봤다"고 맞장구치며 자기들이 "그런 걱정이나 받을 정도로 조무레기로 보이냐"고 직설적으로 따진다. 거기에 대한 밀리오 선배의 답은 이렇다.
          >'''프로도 포함해서 말이지'''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24화 . . . . 2회 일치
          [[아마지키 타마키]]는 벽에 붙어 있는 주제에 잘도 그 말을 듣고 "그게 너희의 한계"라고 여긴다. 예를 들어 일반인들은 프로 복서의 기술이 대단하다고 여기긴 해도 뭐가 어떻게 대단한 건지는 모른다. 밀리오가 지금껏 쌓아온 연구와 노력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강하다, 무적이다"라고만 여긴다면 대결은 커녕 한 방 먹이는 것 조차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 이들의 생각대로 처음엔 밀리오도 개성을 활용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금방 남들보다 뒤쳐졌으며 옷 조차 제대로 입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능력으로 "위"를 노리려면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개성의 약점을 끊임없는 연구와 "예측"으로 극복했다. 그리고 그 예측이 가능하려면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그가 말로 설명하기 보다 대련을 한 것도 그런 이유다. 직업체험에서는 말하자면 "손님"으로서 견학하는 것 뿐이지만, 인턴에 참가하면 한 사람의 "사이드킥"으로서 "프로"로 취급된다. 그건 엄청난 공포와 위험에 직면하는 일이지만, 반대로 학교에선 절대로 접할 수 없는 "경험"이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34화 . . . . 2회 일치
          * 그 자리에 도착해 보니 사무소 선배들은 물론 [[아이자와 쇼타]], [[그랜토리노(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그랜토리노]] 같은 프로 히어로들도 있다.
          그들이 도착한 건물에는 각 사무소의 히어로들을 포함해 여러 프로 히어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92화 . . . . 2회 일치
          * 이미 프로히어로들이 나타나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있다.
          * 그러나 프로 히어로들과 웅영고 관계자들은 경악하며 보도를 주시하고 있다.
  • 노루토끼 . . . . 2회 일치
         볼퍼팅어Wolpertinger의 한국어 번역 명칭. 블리자드의 온라인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한국 서버에선 '노루토끼'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다.
  • 노해 . . . . 2회 일치
          * [[프로레슬링]] 같은 경우는 종목 특성상 유명 선수가 오래 뛸 수 있으며, 집객능력 면에서 베테랑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또한 몇몇 유명 선수가 '챔피언병'(…)에 걸려서 장기집권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결과 신인데뷔가 줄어들고 단체나 종목 전체 에서 고령화 현상이 일어나서 심각한 문제를 겪기도 한다.
         본래 [[유교]]의 영향으로 경로 사상이 강한 한국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말이었으나, 2010년대에는 세대간 갈등이 격화되며 온라인에서는 "틀딱충", "나일리지" 같이 이와 유사한 멸칭이 나타나게 되었다.
  • 단축 도메인 . . . . 2회 일치
         http://goo.gl/ - [[구글]] 운영, 한국에서는 이쪽에서 발행된 스팸이 워낙 많아 정부와 은행에서는 이 주소로 시작하는 주소를 절대 클릭하지 말라고 한다.
         == 한국 ==
  • 대전광역시/인물 . . . . 2회 일치
         * [[김광림(야구)]] - 유성구
         * [[신주영(프로게이머)]] - 서구(대전)
  • 도모세 . . . . 2회 일치
         * [[2009년]] 전국성경고사대회 2등
         {{토막글|한국 배우}}
  • 둠 패트롤 . . . . 2회 일치
          * '[[프로페서X|휠체어를 탄 지적인 남자]]'에게 지도를 받는다.
         [[NEW 52]] 이후 <[[포에버 이블]]> 타이인 이슈에서 멤버들이 [[크라임 신디케이트]] 멤버인 쟈니 퀵과 아토미카에 의해 의해 몰살당하다시피 패했다. 이후 치프로 보이는 사람이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군'이라 말한다. 결국 포에버 이블 이후 등장 암시가 나오더니 [[저스티스 리그]] #31화 막바지에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치프는 새로운 [[할 조던(지구-3)|파워 링]]인 제시카 크루즈 역시 팀에 넣을 생각인듯 싶었으나 숙주(제시카 크루즈)를 죽여서라도 [[볼툼]]의 반지를 얻으려는 것 같으며 민간인이 다치는 것도 신경쓰지 않는다[* 네거티브 맨, 로봇맨, 엘라스티 걸, 엘레멘트 우먼이 불난 빌딩에 있는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고 했지만 치프는 "파워 링을 제압하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며 민간인을 놔두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간신히 파워 링을 얻을 기회가 생기지만 [[렉스 루터]]가 치프를 붙잡는다. 치프와 루터의 대화로 볼때 둘은 잘 아는 사이인듯.[* 이때 루터가 치프에게 "네 척추에 구멍을 내기 전에 파워 링을 넘겨라." 라고 협박하는 것으로 봐선 곧 휠체어에 탈 운명인듯 싶다.]
  • 라몬 베렝게르 3세 . . . . 2회 일치
         이후 그는 1112년에 프로방스의 마지막 상속녀인 두세와 혼인해 프로방스 백작위를 획득하고, 우르겔과 페랄라다를 제외한 모든 카탈루냐 국가들을 합병한다. 이후 우르겔 백국과 동맹을 한 그는 바르바스트로와 발라구에르를 정복해내는데 성공한다.
  • 러브라이브! . . . . 2회 일치
         일본의 가상아이돌 프로젝트. 2007년 시작되었다. 러브라이브의 팬들을 [[러브라이버]]라고 부른다.
         학교단위로 활동하는 아이돌인 "스쿨 아이돌"이 존재하는 배경으로, 스쿨 아이돌 활동이 프로젝트의 주요 내용이다.
  • 류원정 . . . . 2회 일치
         *[[2015년]] [[KBS 2TV|KBS2]] 《트로트 부활 프로젝트 후계자》
         {{토막글|한국 가수}}
  • 마기/323화 . . . . 2회 일치
          * 이것이 자기 꿈의 결말임을 깨달은 신드바드는 마지막으로 행복한 미소를 짓고 루프로 돌아가고 육신은 재만 남는다.
          * 마침내 신드바드의 육신은 재로 변하고 신드바드의 영혼은 루프로 돌아간다.
  • 마기/332화 . . . . 2회 일치
          * 완전히 타전한 존재들은 루프에 속하지 않아 루프로 인한 속박도 받지 않았다.
          * [[알리바바 사르쟈]]는 [[모르지아나(마기)|모르지아나]]에게 [[신드바드(마기)|신드바드]]를 타도할 것을 맹세한다. 모르지아나는 모든 사람들이 루프로 돌아가길 원한다고 반박하지만 알리바바는 단호한 태도로 "내가 아는 모르지아나는 그딴 소린 죽어도 안 할 여자"였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 마기/343화 . . . . 2회 일치
          * [[신드바드(마기)|신드바드]]는 자신이 루프로부터 살아남은 것이야 말로 "솔로몬 왕의 의지"라고 설명한다.
          * [[신드바드(마기)|신드바드]]는 자신이 신이 되는 것이 솔로몬 왕의 의지라고 주장한다. 그는 솔로몬의 지혜없이 성궁에 가는 것이나 한 번 루프로 환원되고도 살아돌아온 일을 들어 자신이야 말로 솔로몬의 의지가 택한 자라고 말한다. 그 증거로 다윗이나 [[아르바(마기)|아르바]], [[우고(마기)|우고]] 조차 그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왜 그런 일이 생겨났을까? 그거야 말로 솔로몬의 의지라고 해석해야 하지 않냐는 것이다.
  • 마기/345화 . . . . 2회 일치
          지금 세상은 죽은 사람들이 한곳에 모이지 않고 루프에 따라 격리된다. 알마트란시절 죽은 이들은 이 일 일라와 연결된 차원에, 현세에서 죽은 이들은 하얀 루프로 환원돼 "거대한 흐름"으로, 그리고 알 사멘처럼 타전된 자들은 검은 루프로 돌아간다. 알리바바는 이렇게 죽어서 뿔뿔히 흩어지기 보단 모든 이들을 이을 수 있다면 어떻겠냐고 묻는다. 그 말은 곧 이들이 자신의 그리운 사람들, 가족과 친구와 재회할 수 있다는 말이다.
  • 마기/347화 . . . . 2회 일치
          * [[신드바드(마기)|신드바드]]와 [[알리바바 사르쟈]]의 대결이 시작됐다. [[아르바(마기)|아르바]]는 무의미한 싸움이며 알리바바가 했던 말, "솔로몬의 세상이 계속되는 것도, 신드바드가 세상을 루프로 환원한 것고 아닌 '''전혀 다른 미래'''가 온다"고 한 말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애초에 그가 이길 리도 없고 말이다.
          * 신드바드의 마장 후루후루는 다양한 마공을 폭격처럼 퍼붓는 타입. 알리바바는 다양한 각도로 날아오는 마법을 베어내거나 사이로 피해다닌다. 그러면서도 "운명"이나 "신에게 대항하기 위해" 세상을 루프로 돌린다는 신드바드의 정책에는 절대 찬성할 수 없다고 강변한다. 신드바드는 그가 결국 [[알라딘(마기)|알라딘]]과 똑같은 인간이며 애초부터 그들이 이해하는게 무리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도 잠시 동안은 알리바바가 자격을 갖춘 인간일지 모른다 생각했다. 뭣보다 그가 현세로 돌아왔을 땐 운명이 보이지 않게 됐고 계획대로 돌아가던 일들이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했다. 전 세계를 동료로 삼는 것도 간단했는데 왜 알리바바는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그 점만은 지금도 미스테리다.
  • 마기/349화 . . . . 2회 일치
          * 그런데 하늘에서 벼락같은 소리와 함께 [[우고(마기)|우고]]가 나타난다. 맛이 간 눈이다. 그는 "차원을 연결하는 마법"을 적은 마고이로 쓰는건 불가능하다고 소리쳤다. 알라딘과 알리바바는 우고가 나타난 것도 놀랐지만 그가 하는 말에는 더 놀랐다. 우고는 핏발이 선 눈으로 자신과 [[솔로몬(마기)|솔로몬]] 대왕이 한 계층의 차원에 간섭하기 위해 일 일라의 모든 마고이를 총동원했던 사례를 들면서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목청을 돋웠다. 단순히 차원을 연결하는 마법은 자신도 예전에 고안했지만 신 하나 분량의 마고이가 필요한 무지막지한 마법이다. 그러니 차원끼리 연결시키려면 솔로몬이 만든 세상을 루프로 환원시켜 동력으로 삼지 않을 수가 없다는 거다.
          * 너무 격렬한 태도의 우고 때문에 얼이 빠진 알라딘과 알리바바. 알리바바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그 솔로몬 왕이 만든 세상이 루프로 환원돼 사라지는건 괜찮은 거냐"고 묻는다. 그러자 우고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더니 "그건 슬프다"고 울 것 같은 얼굴이 된다. 알라딘이 그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자 신드바드가 "다윗의 마법으로 머릿속이 혼탁해져서 그렇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가 가진 지성 자체는 알마트란 최고의 마법사인 그대로다. 결국 그가 한 말이 단순한 헛소리는 아니라는 것.
  • 마츠자카소 . . . . 2회 일치
          * 2009년 3월에 마츠자카시 차원의 문제가 되었는데, 2004년 2월 24일 푸젠성의 한 식품회사가 송판(松阪)이라는 상표를 신청하여, 2008년 12월 20일 중국 상표국이 공고하였다. 마츠자카시에서는 2009년 3월 3일 마츠자카소 연락협의회를 통하여 이의를 제기하였으며 시장이 중국을 직접 방문할 계획도 발표했다.
  • 메탈슬러그 시리즈 . . . . 2회 일치
          메탈슬러그 4에서 등장하는 캐릭터. 이름과는 달리 한국인이다.
         [[http://www.metalslug10th.com/top_j.html|메탈슬러그 공식 사이트(일본어)]] - 영어 버전과 상동. 이쪽은 업데이트가 2009년까지 되었다.
  • 무라하치부 . . . . 2회 일치
          * 소방 활동은 화재를 진압하지 못해서 불이 옮겨붙으면 마을의 다른 집 역시 곤란하기 때문이다.(일본의 가옥은 한국, 중국과 달리 나무를 쓰는 비중이 높다)
          * 신동진 한국 아나운서 협회장이 [[팔푼이]]라는 말이 무라하치부가 어원이 된게 아닌가 추측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http://www.announcer.or.kr/?p=8870&ckattempt=1 (참조)]]
  • 미래소년 코난/설정 . . . . 2회 일치
          [[비행정]]. 기간트를 제외하면 작품상에 등장하는 유일하게 전투가 가능한 비행기다. 전체적으로 기체는 둥글며, 주익은 있지만 수평꼬리날개가 없고, 수직꼬리날개 상단 후방에 수소가스터빈엔진으로 구동하는 프로펠러 1기가 장착된다. 최고속도는 360km/h 이며, 최저속도는 60km/h 까지 가능하다. 기수에 고정된 기관총과 선회식 기관총으로 무장한다.
          인더스트리아에서 침몰한 여객선을 인양하는 데 사용하는 선박. 현대의 동종선박과는 달리 자력항해가 불가능하다. 선박에는 크레인과 각종 작업도구가 있으며, [[잠수복]]은 외부에서 인력펌프로 공기를 넣어주는 공기 호스가 달린 구식 물건이다. 작품상에서는 간신히 여객선을 인양하는 데 성공했으며, 해당 여객선은 인더스트리아 주민들의 피난선으로 사용되었다.
  • 박성우 (정치인) . . . . 2회 일치
         '''박성우'''(朴性宇, [[1914년]] ~ [[1954년]] [[2월 4일]])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토막글|한국 사람|정치인}}
  • 박승효 . . . . 2회 일치
         * [[1981년]] [[7월 21일]] [[한국전자진흥회]] 이사<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07230009920800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1-07-23&officeId=00009&pageNo=8&printNo=4732&publishType=00020 ]</ref>
         {{토막글|한국 사람|경제}}
  • 박옥수 . . . . 2회 일치
         기쁜소식강남교회[* [[경부고속도로]]에서 [[서울특별시]]로 올라올 때 보이는 그 [[교회]]이다. 참고로, 이 교회 건물은 불법건축물이라고 한다. [[그린벨트]] 내에 건축제한이 있는데, 그걸 상큼하게 씹어먹은 것. 서초구청에서 강제 집행을 하려고 했었으나, 교인들이 죄다 나와서 막았다고...] 담임[[목사]]로도 활동하고 있으나, 국내외 기성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적도 없고, 한국에 구원파 [[신앙]]을 들여왔다고 불리는 미국인 [[선교사]] 딕 욕에게 안수를 받았다는데, 이에 대해서조차 논란이 있다.[* 문제는 이 선교사가 공식 선교사거나 정식으로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도 아닌 등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자세한 것은 [[구원파]] 참조. 게다가 딕 욕 본인은 안수를 준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목사안수 논란 문단을 볼 것.] 물론 어디까지나 [[신흥종교]]인 만큼 해당 교단 내에서 쓰는 직급으로 볼 수는 있다.
         결국 암치료를 받지 않고 또별만 먹은 사람들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 문제가 되었다. [[http://christian.nocutnews.co.kr/show.asp?idx=1850923|관련 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262&aid=0000004777|또 다른 기사.]] 또한 [[한국방송공사|KBS]] 추적 60분 2012년 3월 21일자 방영분에서도 또별 사건을 취재한 바 있다. 추적 60분 보도 이후 KBS와 신동아에서 반론 보도를 냈다. [[http://m.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111450|기사 전문]] [[https://youtu.be/hNhIUwPlWKk|반론 보도 영상]] 결국 박옥수는 식품위생법 위반으로만 벌금을 받았다고 한다. [[http://www.newsmission.com/news/news_view.asp?seq=52944|기사]]
  • 박은수 (1956년) . . . . 2회 일치
         1991년 대구 볼런티어센터 소장으로 취임<ref>[http://www.dgvolter.org/ 대구볼런티어넷 센터 소개]</ref> 하면서 장애인 전용버스 운행, 장애인 카풀 운동을 펼치는 등 장애인을 위한 본격적인 사회봉사활동을 시작하였다. 1993년 노인도 장애인도 탈 수 있는 지하철을 만들자는 대구시민단체협의회(노장지협) 사무총장이 되었다. 대구 종합자원봉사센터 소장, 달구벌종합스포츠센터 관장, 대구시 휠체어농구단 단장등을 역임하였다. {{출처|날짜=2010-4-15|2004년 한국장애인고용촉공단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장애인들에게 대기업 직원, 공무원 등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토막글|한국 사람}}
  • 박학기 . . . . 2회 일치
          | 소속사 = HK 엔터프로
         * [http://www.hkenterpro.com/ HK엔터프로]
  • 반지닦이 . . . . 2회 일치
         2011년에 개봉한 [[미국]] 영화 <[[그린 랜턴 : 반지의 선택]]>(이건 한국 개봉 당시 제목이며 원제는 그냥 Green Lantern.)의 오역이 넘치는 팬자막.
         영화가 그냥 평범한 수준이었다면 한번 웃고 넘어갈 퀄리티였으나 사실 영화부터가 병맛이며 사실 나올 때부터 망작취급 받았다. 덕분에 이 오역 자막은 한국의 DC 코믹스 팬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부터 망한 영화에는 'OO닦이'라는 별명이 붙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다.
  • 백기만 . . . . 2회 일치
          | 언어 = [[한국어]]
         [[분류:1902년 태어남]][[분류:1966년 죽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염상섭]][[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박헌영]][[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분류:대구초등학교 (대구)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동아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작가]][[분류:한국독립당]][[분류:일제 강점기의 문학 평론가]]
  • 부산광역시 . . . . 2회 일치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5/5a/Busan_Sajik_Stadium_20080706.JPG/120px-Busan_Sajik_Stadium_20080706.JPG|[[사직야구장]]
         사직야구
  • 불쑥 표주박 섬 . . . . 2회 일치
         [[NHK]]의 [[인형극]] 프로그램. 육지와 다리로 연결된 등대가 있는 작은 섬이었던 표주박 섬(ひょうたん島)이, 어느날 화산 폭발로 바다를 정처없이 방황하는 처지가 되어, 선데이 선생님과 그 제자들, 국제경찰이 비행기로 호송중이던 암살자 댄디, 뗏목으로 표류해온 해적 토라히게, 자칭 표주박 섬의 대통령 돈 가바쵸 등의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분류:인형극]] [[분류:TV 프로그램]]
  • 브이원 . . . . 2회 일치
         1996년 뮤지컬배우 첫 데뷔한 그는 [[대구광역시|대구]] 태생으로 [[대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아방송예술대학|동아방송대]] 방송연예학과 전문학사와 [[단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학사 학위를 거쳐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대중예술학전공으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브이원'이라는 예명으로 발라드 가수로 데뷔,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강현수는 임채홍과 함께 [[2010년]] [[3월 27일]]부터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입시 전문 방송아카데미 '배우&배움'을 열기도 했다. 평소 절친한 관계를 유지해 오던 두 사람은 오랜 준비 끝에 개업식을 갖게 되었다. 자신의 뮤직비디오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거나, [[2003년]] 방영된 시트콤 ‘달려라 울엄마’에서 복학생 역을 맡는 등 배우로서도 활동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003/h20100325062909111780.htm|제목=강현수·임채홍 방송아카데미 오픈|성=|이름=스포츠한국 안진용기자|날짜=2010-03-25|출판사=한국일보|확인날짜=2010-04-17}}</ref>
  • 블리치/691화 . . . . 2회 일치
          * 세계의 "불운"을 일정한 비율로 운이 좋은 자들에게 분배할 수 있고 자기 자신의 불운은 "프로인트 실드"로 방어하는 능력.
          * 우류가 하쉬발트에게 부상을 입히는 "행운"은 동량의 "불운"으로 되돌아가고 거기에 하쉬발트 본인이 받은 불운이 프로인트 실드로 다시 한 번 돌아가므로, 결국 우류는 능력을 쓸 수록 배가되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 서거정 . . . . 2회 일치
         '''서거정'''(徐居正, [[1420년]]~[[1488년]])은 [[조선 문종]], [[조선 세조|세조]], [[조선 성종|성종]] 때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대구 서씨|대구]](大丘). 자는 강중(剛中), 초자는 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이며,<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a_A1420_1_0005362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ref>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조선 세종|세종]], [[조선 문종|문종]], [[조선 단종|단종]], [[조선 세조|세조]], [[조선 예종|예종]], [[조선 성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섬겼다.
         {{토막글|한국 사람|조선}}
  • 서상돈 . . . . 2회 일치
          * [[한국사 관련 정보]]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
  • 서훈 (1942년) . . . . 2회 일치
         |소속정당 = [[무소속]] → [[신한국당]] → [[한나라당]] → [[무소속]] → [[민주국민당 (2000년)|민주국민당]]
         [[분류:194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달성 서씨]][[분류:영남고등학교 동문]][[분류:대구해서초등학교 동문]][[분류:영남중학교 (대구) 동문]][[분류:경북대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전남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 육군 대위]][[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통일민주당 당원]][[분류:통일국민당 (대한민국)]][[분류:신한국당 당원]][[분류:한나라당의 정치인]][[분류:민주국민당 (2000년) 당원]][[분류:자유민주연합의 정치인]]
  • 소벌도리 . . . . 2회 일치
         '''소벌도리'''(蘇伐道理 또는 蘇伐都利, ? ~ ?)는 [[신라]] 초기의 신화적인 인물로 서라벌 6촌 중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의 촌장이었다.<ref>[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539321&pTotalSearchCount=1&pPosition=0&pRecordId=PPL_2SNR_A9999_1_0005806&pName=소벌도리(蘇伐都利)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정보시스템 '소벌도리']{{깨진 링크}}</ref> [[혁거세 거서간]]을 발견하여 양육하고 즉위시켰다.
         [[분류:삼한]][[분류:신라 사람]][[분류:신라의 문신]][[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경주 최씨]][[분류:한국 신화]][[분류:전설]]
  • 소진은 . . . . 2회 일치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경시 부문,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와 경찰 부문에 수록되었으며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PPL_7HIL_A1892_1_0027144}}
  • 손지민 . . . . 2회 일치
         * [[2010년]] : [[한국방송공사|KBS]] 영남권 아나운서 ([[KBS 부산방송총국]], [[KBS 대구방송총국]] 지역근무)
         [[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연세대학교 문과대학 동문]][[분류:한국방송공사의 아나운서]][[분류:대한민국의 아나운서]][[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 솔롱고스 . . . . 2회 일치
         [[몽골어]]로 [[한국]]을 뜻하는 말.
         Солонгоc(솔롱고스) : [[한국]]
  • 송종호 (1956년) . . . . 2회 일치
         * 2011년 : 한국경영교육학회 한국인경여대상
  • 슈퍼맨 리벤지 스쿼드 . . . . 2회 일치
          괴력을 지니고 있으며 물질,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다. 프로젝트 캐드머스(Project Cadmus) 관련 캐릭터.
          환상을 다루며 비행능력 등도 있다. 프로젝트 캐드머스 관련 캐릭터이기도 하다.
  • 스틸오션/사령관 . . . . 2회 일치
          * 프로이센의 의지(Prussian Will) - 액티브. 5CP 소모. 30초간 가속력 10% 증가. 피격시 피해량 20% 감소.
          * 프로이센의 의지(Prussian Will) - 액티브. 5CP 소모. 30초간 가속력 10% 증가. 피격시 피해량 20% 감소.
  • 시바 . . . . 2회 일치
         === 한국 ===
         --시바는 한국에서 매우 널리 믿어지는 신이다. 사람들은 곤경에 닥치거나 나쁜 일이 있으면 "시바! 시바!"하고 외치면서 시바 신의 도움을 부탁한다.--
  • 신영식(만화가) . . . . 2회 일치
          * [[만화가 및 일러스트레이터 목록/한국]]
         [[1949년]] [[2월 11일]]에 [[충청남도]] 연기군(현 [[세종특별자치시]])에서 태어나 서라벌예술고등학교[* 현 [[서라벌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라벌예술대학[* 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서양화과를 다니다 중퇴한 뒤 1971년 소년한국일보에 <승리의 그날>을 시작으로 만화계에 데뷔한 뒤 주로 반공, 전쟁 등을 소재로 한 극화만화를 그려오다 1980년에 소년동아일보(현 어린이동아)를 통해 4쪽짜리 만화 <돌배군>을 장기간 연재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 신혜진 . . . . 2회 일치
         이외에도 조용한 [[성격]] 때문에 [[안무]] 등 퍼포먼스적인 면이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크게 돋보이는 멤버는 아니지만, 자상한 [[성격]]을 가진 '''팀의 둘째로서 팀을 융화하고 지지하는 필수불가결한 [[오마이걸]]의 멤버였다.'''[* 실제로 [[거식증]]으로 인해 활동을 쉬는 기간에도 [[오마이걸]]이 [[Coloring Book(오마이걸)|Coloring Book]]으로 [[콘셉트|컨셉]]돌로 도약하는 과정에서도 제일 큰 [[역할]]을 했던 멤버는 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역대 프로필 ==
  • 아데랑스 . . . . 2회 일치
         2009년 5월, 아데랑스에 투자했던 미국계 투자회사 스틸 파트너스는 사외이사로서 오오츠키 타다오(大槻忠男)를 진출시켰다. 그는 일본 펩시콜라 등에서 활동한 전문경영인이다. 그리고 오오츠키 타다오는 2009년 10월 CEO로서 사장 취임, 다양한 새로운 경영 방침을 발표했다. 2010년 10월에는 사명을 "유니헤어(ユニヘアー)"로 변경, 아데랑스는 남성용 브랜드로 남기고, 가발 이외에 증모, 육모 분야로 사업을 확대한다고 발표했다.[[https://facta.co.jp/article/201109066.html (참조)]]
  • 안드로메다 스토리즈 . . . . 2회 일치
         애니메이션은 TV 스페셜로 방송된 바 있다. 한국에서는 "안드로메다 별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비디오 테이프로 발매되었다.
  • 안병근 . . . . 2회 일치
         |프로전향 =
         [[대구광역시|대구직할시]]에서 출생하였으며, 옥산초등학교, [[대구중앙중학교]]와 대구계성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유도 安柄根 선수 프로필 |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8070009921101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4-08-07&officeId=00009&pageNo=11&printNo=5670&publishType=00020|출판사=매일경제|저자=|쪽=|날짜=1984-08-07|확인날짜=2016-12-15}}</ref>
  • 안축 (고려) . . . . 2회 일치
         <ref name="gwe">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n.d.). [[: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고려-조선의 문학/고려시대 문학/고려 후기#안축|“안축”]].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2017년 11월 26일 확인함. </ref>
         {{토막글|한국 사람}}
  • 애니 일본어 . . . . 2회 일치
         이는 한국 성우들도 마찬가지. 성우 발성훈련을 받은 목소리는 일상회화에 비해서 청취하기는 좋지만,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드문 것이다.
          * 오타쿠 대상 애니의 경우, 애니를 보는 사람은 오타쿠이므로, 그들에게 명백한 '오타쿠 용어'를 일상회화에 섞어 쓰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오타쿠 용어는 일상회화에 침투한 경우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므로 막 써대면 말이 안 통할 수도 있다. 가끔 한국 일상용어에 침투한 오타쿠 용어가 있다. [[신의 한 수]] 같은 것.
  • 오병희 . . . . 2회 일치
         1994년 3월 국내 첫 원거리 심장이식에 성공했다. 이후 서울대병원 심장이식 프로그램 책임자로 심장이식의 활성화에 기여했다. 고혈압·심부전 관련 200여 편 이상의 SCI(과학기술논문 색인지수)급 논문을 발표했다.
         * 2014년 자랑스런한국인대상 의료발전부문
  • 오중기 . . . . 2회 일치
         대학 졸업 후에는 상경하여 [[한국일보]]와 [[동아일보]]에서 일했다.
         2018년 4월 3일 경상북도지사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단수공천이 확정되었으나[[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8523033|#]] 상대 후보인 [[이철우(1955)|이철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하지만 경북에 출마한 민주당 후보로써는 최선의 결과, 더 나아가서는 최고의 결과를 내었다. --선거비용을 보전받은 것은 덤-- 이 기록은 역대 민주당계 정당 소속 경북지사 후보가 받은 득표율 최고치를 갱신한 것으로, 직전 기록은 현 자유한국당 소속 의원인 [[박명재]]가 2006년 4대 지선 당시 열린우리당 당적으로 기록한 23.19%이다.
  • 오철환 . . . . 2회 일치
         {{선거기록/KR/개인 | [[대한민국 제7회 지방 선거|지방 선거]] | 8대 | [[지방 관청|시의원]] | [[대구광역시의회|대구광역시(수성구제2선거구)]] | 자유한국당| 31,112 표| 49.93 | 2위 | [[대한민국 제7회 지방 선거 대구광역시#광역의원|낙선]] | }}
         {{토막글|한국 사람}}
  • 우의형 . . . . 2회 일치
         1948년 태어난 우의형은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71년 제1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77년 [[서울가정법원]] 판사에 임용된 이후 [[서울고등법원]], 서울형사지방법원 등에서 판사를 하다가 법원행정처에서 조사심의관으로 지냈으며 2003년에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장, [[청주지방법원]], [[인천지방법원]], [[서울행정법원]]에서 법원장을 역임하고 퇴직한 2005년에 변호사 우의형 법률사무소를 개업했다. 2009년 7월 22일에 제17대 영남대 재단 이사장,<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67375.html]</ref> 2011년 11월 10일에 주식회사 화진 사외이사에 선임되었다.<ref>[http://news.mt.co.kr/mtview.php?no=2011111017081381674&outlink=1&ref=https%3A%2F%2Fsearch.naver.com]</ref>
         *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24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4년 5월 17일에 [[상문고등학교]] 교장으로부터 1500만원의 뇌물을 받아 구속된 국립교육평가원장 박병용에게 "유죄는 인정되나 큰 과오없이 30년간 공직생활에 충실했다"며 [[특가법]] 뇌물죄를 적용해 징역2년6월 집행유예3년 추징금1500만원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94년 5월 18일자</ref> 1994년 6월 10일에 상무대 사업과 관련하여 공사대금 189억여원을 유용한 혐의로 구속된 청우종합건설 전 회장 조기현에게 [[특가법]] 횡령, 사기죄 등을 적용해 징역5년을 선고했다.<ref>매일경제 1994년 6월 11일자</ref> 6월 14일에 접착테이프로 암달러상의 입을 막고 금품을 빼앗으려다 전치2주 상처를 입혀 구속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94년 6월 15일자</ref> 7월 15일에 [[범청학련]] 결성식에서 인공기를 게양하여 구속된 [[중앙대학교]] 총학생회장 김영하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징역2년 자격정지2년을 선고했다.<ref>한겨레 1994년 7월 16일자</ref>
  • 원피스/843화 . . . . 2회 일치
          * 파운드는 빅맘이 "기후를 조종하는 여자"라 칭한다. 왼손이 "뇌운, 제우스", 오른손이 "태양, 프로메테우스"에 해당한다고.
          * 파운드가 밝힌 빅맘의 능력은 "기후를 다스리는 것". 왼손에 뇌운 "제우스", 오른손에 태양 "프로메테우스"가 있다고 한다.
  • 원피스/853화 . . . . 2회 일치
          * 브룩의 능력은 빅맘의 카운터지만 빅맘 자신과 자신의 혼을 직접 주입한 이각모 "나폴레옹", 뇌운 "제우스", 태양 "프로메테우스"에겐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혼"의 "격"이 다른 빅맘 자신과, 자신의 혼을 직접 주입한 이각모 "나폴레옹", 뇌운 "제우스", 태양 "프로메테우스"에겐 통하지 않는다. 빅맘은 이 세 가지 무기를 자신의 분신이라고 표현한다.
  • 원피스/863화 . . . . 2회 일치
          * 분노한 빅맘이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가 징베에게 덤벼드는 등 혼란의 와중에 변장한 [[브룩]]이 사진을 파괴하는데 성공한다.
          빅맘은 루피의 진짜 목적을 모르고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로 그를 공격할 생각만한다. 루피는 여유롭게 액자를 공격하려 하는데, 그때 측면으로 정체불명의 뭉터기가 날아온다. 그건 [[샬롯 카타쿠리]]의 "다리"였다. 루피의 고무고무 기술처럼 다리를 늘려서 공격했는데 거기에 맞은 루피는 튕겨 나가지도 않고 그대로 달라붙어 있다. 루피는 몸을 빼내려고 하지만 달라붙어서 전혀 떨어지질 않는다. 그 사이 카타쿠리는 자신이 붙잡은게 진짜 루피고 나머지는 브륄레의 능력으로 변신시킨 동물들이라며 무시하라고 지시한다.
  • 원피스/879화 . . . . 2회 일치
          밀집모자 일당이 충격을 이겨낸 직후에 등장. 여전히 있지도 않은 케이크를 찾아 폭주하고 있다. 경악스럽게도 바다위를 그냥 걸어서 나타났는데 알고보니 페로스페로가 사탕으로 만든 발판을 딛고 걸어오는 거였다. 페로스페로의 말로는 원래 빅맘의 이동은 거의 전적으로 "제우스"가 담당하고 있었던 듯. 정작 그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랑 사이 좋게 낙오해서 홀케이크 아일랜드 서쪽 해안에 있다. 일행이 어디로 간지도 몰라서 오도가도 못하는 중. 프로메테우스는 힘을 너무 써서 배 고파서 아무 것도 못하겠다고 징징거린다.
  • 위키백과 . . . . 2회 일치
         위키미디어재단에서 운영하는 위키 중 하나. 정식명칭은 위키피디아로 한국에서 알려진 위키 중 하나다.
         한국어위키백과 : [[http://ko.wikipedia.org]]
  • 유니콘남 . . . . 2회 일치
         왜일까 한국에서는 '''처녀가 아닌 여자를 증오하여, 사귀던 여자가 처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공격적으로 나오는 남자'''를 가리키게 되었다. 또한 때때로 이러한 남자가 늘어나서 일본이 사회적 문제를 겪고 있다는 설명도 추가되었다.
         2ch 스레드를 보고 한국 인터넷에서 자세히 알아보지 않은 탓에, 어떤 오해나 착각으로 잘못 퍼졌을 가능성이 높다.
  • 유승진 (필드하키 선수) . . . . 2회 일치
         고교 시대부터 한국 대표 선수로 활약,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우승에 공헌했다. [[1988년 하계 올림픽|1988년 하계 서울 올림픽]](10위), [[1996년 하계 올림픽|1996년 하계 애틀란다 올림픽]](5위)에서도 한국 대표로 출전했다. 1991년부터 남자하키 일본 리그 '表示灯'(현재의 나고야 프레이터(NAGOYA FRATER)) 선수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1996년에는 이 팀 감독에 취임했다.1996년에 일본 [[주쿄대학교]] 대학원 졸업을 하였고, 1996~2001년 일본 남자 하키 대표팀 코치, 2006~2007년 [[덴리 대학]] 여자 하키부 감독, 2006~2008년 일본 여자 하키 대표팀 수석코치로 활약했다. 2008년부터 여자 하키 일본 리그의 '코카콜라 웨스트' 감독을 맡았다. 2011년에는 같은해 현재 아시아 10명 밖에 없는 [[국제 하키 연맹]] 공인 코치 면허를 취득 했으며 2016년에는 [국제 하키 연맹] 공인 Coach Educator 자격과 함께 [아시아 하키연맹] 코칭 판넬에서 코치를 위한 코치 강습을 담당하고 있다. 2012년 10월 일본 여자 하키 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됐다. 2016년부터 경상북도 체육회 여자하키팀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 유인영 . . . . 2회 일치
         * 2009년 [[Mnet]] 《하늘에서 남자들이 비처럼 내려와》
         * 2009년 부산콘텐츠마켓 명예홍보대사
  • 육홍균 . . . . 2회 일치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경상북도 선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리고 민주국민당 중앙상무위원을 역임하였다. 1953년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김우동]]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구미시 출신 인물]]
  • 윤석용 . . . . 2회 일치
         '''윤석용'''(尹碩鎔, [[1951년]] [[11월 16일]] ~ )은 [[대한민국]]의 전직(18대) 국회의원([[새누리당]] 서울 강동구 을)이자 한의사이다.<ref>{{웹 인용|제목= 대한민국 대표 인명록 - 한국의 인물
         * 1994년 자랑스런 시한국인상
  • 은혼/627화 . . . . 2회 일치
          파라파헤븐에서 벗어난 헤도로 본래의 사악한 인격은 자신이라는 진정한 공포와 마주하게 된 인류에게 유감을 표한다.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지구와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올지, 그 무서운 계획에 대해서 살짝 알려주려고 한다. 긴토키는 떨리는 손으로 스카치 테이프로 어떻게든 꽃을 다시 붙여놓는다.
          흑역사를 자극 당한 신파치가 과민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판데모니엄은 게도마루의 말마따나 상처치료에 효과적인 만능 재료. 이 시기에 매우 필요한 보급품임에 틀림없다. 신파치는 징그러운 것이라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지만 오래 가지 못한다. 귀찮게 해버렸다며 방해하지 않겠다는 판데모니엄씨에게 다시 심쿵해 버린 신파치는 결국 인외의 길로 들어서 판데모니엄에게 프로포즈하고 만다.
  • 이경희 (1880년) . . . . 2회 일치
         [[1909년]](융희 3) [[윤치호]], [[안창호]]와 함께 [[청년학우회]]를 결성하고, [[청년학우회]] 경성부지회의 회원이 되었다. [[1910년]] [[5월 13일]] 독립운동가 [[구찬회]]가 [[경성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했다. 구찬회와 같은 고향 출신이던 그는 한국통감부와 일본의 눈을 피해 [[구찬회]]의 시신을 [[미역]] 속에 숨겨서 경성에서 대구 무태로 운반하여 [[구찬회]]의 가족들에게 시신을 전달하고 [[경성]]으로 돌아왔다. [[1910년]](융희 4) [[10월]] [[한일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경성]]으로 올라가 청년학우회 한성지회의 일원으로 [[이동녕]](李東寧), [[윤치호]], [[안창호]], [[윤치소]], [[이회영]](李會榮), [[윤기섭]](尹琦燮), [[이승훈]], [[김좌진]](金佐鎭), [[김구]]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하고 회원이 되었다. 이후 [[신민회]]의 비밀회의에 참여, 독립군 기지창건을 목적으로 자금을 마련하는데 동참했고, [[105인 사건]]을 피해 바로 [[서간도]](西間島)로 망명하여 무관학교(훗날의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장사와 노동에 종사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 돈을 모았다.
         [[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군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구광역시장]][[분류:의열단]][[분류:신간회의 인물]][[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윤치호]][[분류:안창호]][[분류:김구]][[분류:이회영]][[분류:김원봉]][[분류:허정숙]][[분류:조병옥]][[분류:이승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인천 이씨]]
  • 이규환 (영화감독) . . . . 2회 일치
         [[1944년]]부터 강제징용으로 노역을 하던 중 [[태평양 전쟁]] 종전을 맞았다. 라디오 드라마 《똘똘이의 모험》을 영화화하는 등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국 전쟁]] 후 연출한 《춘향전》(1955)은 전후 대한민국 영화 부흥의 기폭제로 평가받았다. 일제 강점기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며, 영화의 경향은 민족주의, 서정적 리얼리즘, 향토색으로 주로 설명된다.
  • 이병욱(스트리머) . . . . 2회 일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자신을 팩트로 까려는 사람을 메갈리아 유저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한 유저에 따르면 무작정 메갈이라며 활동정지를 당한 경력이 있다. 사실 원래는 이렇지 않았는데 어떤 사람이 페이스북에서 신태일, 푸워 등등은 칭찬하고 좋아한다면서 이병욱은 어떠냐고 그 사람의 지인이 묻자 [[구안와사|"그 안면마비 장애인새끼"]]라며 여러가지 욕설을 한것을 이병욱이 알게되자 심각하게 화를 낸적이 있다. 헌데 그 사람이 여자라 이 일이 있는 이후로 그냥 까기만 하면 무시하는데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프로필이 여자거나 하면 메갈이라며 싫어한다.]]
         ||[[https://youtu.be/5kQdCR-0OxA|4만원대 가성비 최고!! 궐련형 전자담배 엑스시그 프로 솔직 후기]]||
  • 이성계 . . . . 2회 일치
         --[[왕건]]과 함께 한국에서 태조라고 말하면 보통 떠올려지는 사람.--
         한국사의 명장 반열에 반드시 낄 정도로 군사적인 역량과 개인의 무용이 후덜덜했던 인물로, 이러한 업적을 통해 정계의 거물로 성장하였고, 그 후 명과의 외교 마찰로 인해 우왕과 최영이 요동 정벌을 추진하자 이에 반대하였으나 묵살당하자 최영이 우왕을 달래느라 정벌군을 직접 이끌지 못하는 상황을 이용해 국경지대의 하중도(河中島)인 '위화도'에서 군대를 물려 쿠데타를 단행해 최고 권력을 거머쥐게 된다. 그 후 정몽주 등의 저항을 뿌리치고 마침내 조선을 건국한다.
  • 이성구 (1942년) . . . . 2회 일치
         [[분류:194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운중학교 (대구) 동문]][[분류:대구공산초등학교 동문]][[분류: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민주자유당의 정치인]][[분류:신한국당 당원]][[분류:자유한국당의 정치인]][[분류:영천 이씨]][[분류:대한민국의 지방의회의원]]
  • 이영세 (1947년) . . . . 2회 일치
         * 2010.04~ 한국무역협회 정보화추진위원회 위원장
         * 2005.03~2010.08 한국원격대학협의회 회장
  • 이영은(1982) . . . . 2회 일치
          * [[배우/한국]], [[불교/인물]], [[경상북도/인물]]
         [[분류:한국 여배우]][[분류:김천시 출신 인물]]
  • 이예린 (1974년) . . . . 2회 일치
         * [[2016년]] [[JTBC]]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
         [[분류:1974년 태어남]][[분류:1994년 데뷔]][[분류:한국어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댄스 음악가]][[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팝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뮤지컬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분류:명지대학교 동문]][[분류:대구고등학교 동문]]
  • 이원형(1951) . . . . 2회 일치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창화(정치인)|정창화]]와의 [[공천]] 경합에서 승리하여 [[신한국당]] 후보로 [[대구광역시]] [[수성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연합]] [[박철언]]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중앙당 부대변인에 임명되었다.
         [[이명박 정부]] 때 [[한국관광공사]] 상임[[감사]]를 역임하였다.
  • 이재영 (뮤지컬배우) . . . . 2회 일치
         [[분류:1968년 출생]][[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1989년 데뷔]][[분류:뮤지컬 배우]][[분류:한국 여가수]]
         2009년 '신 행진 와이키키' 강지수 역
  • 이정무 . . . . 2회 일치
         2000년부터 2004년까지 [[한국체육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2005년부터 [[한라대학교]] 총장을, 2012년부터 한국물포럼 [[총재]]를 역임하고 있다.
  • 이정호 (독립운동가) . . . . 2회 일치
         1944년 6월 임시정부 외무부 정보과장으로 주중 미국대사관에 특파되어 일본군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고, 일본군내 한국인의 이탈을 선전하는 공작을 수행하였다. 1945년 6월에 광복군 제3지대 북경지구 특파공작원으로 일본군에 소속된 한국인 사병의 탈출공작을 수행하였다.
  • 이케멘 . . . . 2회 일치
         "잘나간다=이케테루(イケてる)"라는 말이 1996년대에 유행을 시작. 본래는 간사이 지역의 유행어였지만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계기로 전국적인 유행이 되었다.
         사라진 말들과는 달리 정착되어 현재에도 흔히 쓰이고 있다. 2009년에는 넷 유행어 대상으로 "단 이케멘에 한한다(ただしイケメンに限る)"가 수상을 했다.
  • 이현 (1983년) . . . . 2회 일치
         {{토막글|한국 가수}}
         [[분류:빅히트 엔터테인먼트 소속]][[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대한민국의 R&B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발라드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배우]][[분류:1983년 태어남]][[분류:대구대학교 동문]][[분류:2007년 데뷔]][[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2010년대 가수]][[분류:2000년대 가수]][[분류:한국어 가수]][[분류:살아있는 사람]]
  • 이현보 . . . . 2회 일치
         그는 특히 문장에 뛰어나 자연을 노래한 시조가 많이 있는데, 10장으로 전하던 <어부가>를 그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이 <[[청구영언]]>에 실려 있다. <효빈가(效嚬歌)> <농악가> <농암가(聾巖歌)> 등이 그의 저서인 <농암(聾巖)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ref name="이현보">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고려-조선의 문학/조선 전기 문학/시조 문학#이현보|이현보]]〉</ref>
         중종 때 이현보는 연시조인 어부단가(漁父短歌)를 지었는데, 이는 고려 때부터 전해 오던 어부 단가 10수를 고쳐 지은 것이다. 모두 5장으로 내용은 어부의 생활을 읊은 것이며 본래의 어부 단가 10수는 전하지 않는다. 그 가사가<청구영언><해동가요>에 전해 온다. <ref name="어부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고려-조선의 문학/조선 전기 문학/시조 문학#어부사(漁父詞)|어부사(漁父詞)]]〉</ref>
  • 인교진 . . . . 2회 일치
         2000년 [[문화방송|MBC]] 농촌드라마 《[[전원일기]]》에서 재동 역을 맡아 연기생활을 시작한 인교진은 2012년 4월 22일 종영된 [[SBS (대한민국의 방송사)|SBS]] 주말극 《[[내일이 오면 (2011년 드라마)|내일이 오면]]》을 통해 인연을 맺고 연인으로 발전, [[서우]]와 함께 공개 연애를 선언했으나, 2013년 5월 결별하였다. 이후 2014년 4월, 인교진은 12년 간 같은 기획사에서 만나 동료 연기자로 친분을 맺어 온 [[박수진 (1987년)]]과 교제를 시작했으며 동년 10월 4일 결혼식을 올렸다.<ref>[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ent&arcid=0008217748&cp=nv 인교진-박수진 결혼 공식입장 “지난달 초 결혼 프로포즈… 10월 결혼”], [[국민일보]] 2014년 4월 9일자</ref> 그리고 임신 소식이 전해져 태명을 기쁨이로 지었다. 2015년 12월 4일에는 딸이 태어나 그의 딸을 박하은으로 지어 가족으로 발전되기 시작되었다.
         * 2009년 [[문화방송|MBC]] 월화드라마 《[[선덕여왕 (드라마)|선덕여왕]]》 ... [[김용춘]] 역
  • 인종개량 . . . . 2회 일치
         이후 일본정부는 야마토 정신을 가진 [[야마토 민족]]이 가장 우월하고 [[귀축영미]]는 정신과 사상이 썩어빠진 놈들이라는 프로파간다를 펼치며, 일본민족이 가장 우수하므로 귀축영미로부터 아시아를 지켜내야 한다는 [[대동아공영권]]에 심취한다.
          * 혼혈을 통한 인종개량 같은 극단적인 주장은 사실 근대 일본에서도 그리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은 주장이었고, 실제로 정책적으로 옮겨진 사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언가가 와전되었는지 한국 인터넷에서는 일본인들이 개화기에 '혼혈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는 펼쳤다는 루머가 퍼져 있다.[[http://bobaedream.co.kr/view?code=strange&No=363548&rtn=%2Fmycommunity%3Fcid%3Db3BocWlvcGhyM29waHFnb3BocW5vcGhxb29waHFxb3Boc2ZvcGhza29waHNmb3Boc2g%3D (참조)]][[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freeboard&no=1073574 (참조)]]
  • 일곱개의 대죄/172화 . . . . 2회 일치
          * 길프로스트는 자신의 힘으로 잡혀있는 전원을 순간이동 시킨다.
          * 엘리자베스는 멜리오다스의 생사를 걱정하는데, 길프로스트는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며 수정구슬을 보여준다.
  • 일본어의 청음과 탁음 . . . . 2회 일치
         일본어는 한국어와 달리 기본적인 자음 구분을 서양 언어들처럼 유성음(voiced)과 무성음(voiceless)으로만 구분한다.
         음절 위치나 화자의 컨디션에 따라 한국인 귀에는 상당히 변화무쌍하게 들린다. 엄밀히 말하면 일본어의 청음은 숨소리(aspiration)가 우리말의 평음보다는 약간 높되, 격음보다는 낮은 음가이다. 진짜 일본인들과 같은 느낌으로 발음하는 방법은, '''카, 타를 소리내면서 힘을 살짝 빼주는 것이다.''' 아무래도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에서 어두 청음 표기를 탁음과 구별 없이 무조건 '가, 다'로 정해버린 이유가 이것 때문인 듯 하다(...)
  • 임지현(가수) . . . . 2회 일치
          * 상위 문서 : [[가수/한국]]
         [include(틀:토막글)][[분류:토막글/인물]][[분류:한국 가수]]
  • 장범준 . . . . 2회 일치
         === 예능 프로그램 ===
         {{토막글|한국 가수}}
  • 전국 BASARA(애니메이션) . . . . 2회 일치
         게임 [[전국 BASARA]]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2008년 쯤에 뉴타입에서 본 것 같다. 2009년에 방영했겠지.
         방영 당시 상당히 흥행했다. 일본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그 기세를 타고 2기가 나왔지만 이건 별로 재미 못 본 듯.
  • 전수희 . . . . 2회 일치
         '''전수희'''([[1988년]] [[6월 6일]] ~ )은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로, 현재 [[한국방송공사|KBS]] 공채 32기 개그우먼으로 활동중이다.
         **〈프로억울러〉
  • 정광용 . . . . 2회 일치
          * 상위 문서: [[친박]], [[박사모]],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 [[대통령 탄핵무효 국민저항총궐기 운동본부]], [[정치깡패]], [[범죄자/목록/한국]]
         2017년 [[새누리당(2017년)|새누리당]] 사무총장을 맡게 되었다. 허나 얼마 안가 열린 [[19대 대선]]에서 새누리당 [[조원진]] 후보를 밀지 않고, 대선 막판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를 지지하면서 새누리당 내부 분열을 자초했다. 직후 반대파에선 정광용 회장의 [[공금]] [[횡령]] 의혹까지 제기하며 감정의 골이 깊어진 상황으로 보인다. 일단 [[박사모]] 내에서는 이전의 정광용을 비난하던 여론을 누르고 [[변희재]], [[정미홍]] 등의 조원진 지지파가 배신자로 몰리며 상황이 역전된 모양새다.[* 정광용은 박사모를 10년 넘게 운영해 사실상 박사모 회원들의 실질적 교주 역할을 하고 있다. 변희재, 정미홍이 바깥세상에선 정광용에 비해 유명인사라 하더라도 박사모 내부에선 철저한 아웃사이더에 불과하며, 정광용은 카페 매니저라는 시스템적으로도 자신의 생각과 책임회피를 늘어놓는데 있어 둘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 있기 때문에, 사실상 박사모 내부에서의 여론전은 정광용이 압도적으로 우세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이후 [[조원진]] 지지파는 [[대한애국당]]을 만들고 분리되었다.
  • 정봉수(역사) . . . . 2회 일치
         군대를 전역한 후 1987년 코오롱 마라톤 팀의 창단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선수들에게 소식(小食)과 풍부한 단백질 식단을 집중 공급하는 방안을 도입하고 과학적인 선수 관리로 1990년과 1992년에 김완기가 한국 신기록을 세우고, 1992년 황영조가 2시간 10분벽을 넘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우승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이봉주 선수와 김이용, 권은주를 발굴해 세계적인 마라토너로 키우면서 한국 마라톤을 육성, 발전시켜 세계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 정채진 . . . . 2회 일치
         * 1988.05 : 한국지방자치학회 부회장
         {{토막글|한국 사람}}
  • 정혜선(배우) . . . . 2회 일치
          * [[배우/한국]], [[가톨릭/인물]]
         [[분류:한국 여배우]][[분류:1942년 출생]][[분류:1961년 데뷔]][[분류:김천시 출신 인물]]
  • 조긍하 . . . . 2회 일치
          | 직업 = [[테너]] [[성악가]], [[피아노 연주자]],<br />사진 작가, 영화감독, 영화평론가,<br />음악평론가, [[영화 프로듀서|영화 제작자]],영화기획가, 영화 편집감독, 영화각색가,<br>영화각본가, 소설가
         * [[1962년]] [[영화]] 《인간만세》를 감독, 이 [[영화]]로 [[영화 프로듀서|영화제작자]] 데뷔.
  • 지증왕 . . . . 2회 일치
         제도와 체제를 개편, 정비하여 [[504년]] 상복법을 제정하였으며, [[505년]] 주, 군, 현을 정하고 각 주에 군주를 두었다. [[509년]] 서울에 동시(東市)를 두었고, 512년 [[우산국]]([[울릉도]])을 정복하였다. 또한 [[한국]]의 [[고대 사회]]에서부터 전해지던 [[순장]] 풍습을 최초로 폐지한 군주이기도 하다. 시호는 지증인데, 신라 최초의 [[시호]]이기도 하다.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智度路)이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지증 마립간|본기 권4 지증 마립간]] |인용문= 智證麻立干立 姓金氏 諱智大路 或云智度路 又云智哲老 (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이 왕위에 올랐다. 성(姓)은 김씨이고 이름은 지대로(智大路)이다. <지도로(智度路) 혹은 지철로(智哲老)라고도 하였다.)}}</ref> 그는 6촌 형제간인 [[소지 마립간]]과 사돈이었고 즉위 전 [[갈문왕]]에 봉해진 것이 [[영일냉수리신라비]]를 통해 확인되었다.
         [[분류:신라의 왕|지증 마립간]][[분류:437년 태어남|지증 마립간]][[분류:514년 죽음|지증 마립간]][[분류:신라의 군인|지증 마립간]][[분류:마립간]][[분류:한국의 전설]][[분류:불교도 군주|김지대로]][[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지증왕| ]]
  • 창작:요괴위키 . . . . 2회 일치
         ||<#191970> '''{{{#white 용도}}}''' || 프로젝트 ||
         요괴위키는 온갖 사물, 용어를 '[[요괴]]'로서 소개하는 프로젝트이다.
  • 창작:좀비탈출/1 . . . . 2회 일치
         마당 한쪽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를 [[무기]]로 들었다. 이런 걸로 좀비를 쓰러뜨릴 수 있을지 의문스럽지만.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2-1 . . . . 2회 일치
         나는 작게 중얼거리면서 야구방망이를 옆집 아저씨 좀비를 향하여 휘둘렀다.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2-1-1 . . . . 2회 일치
         나는 아줌마 좀비를 향하여 야구방망이를 휘둘렀다. 아저씨 좀비보다 체격이 작고, 줄이 목에 걸려 있어서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조금 쉽게 처치할 수 있었다.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2-1-3 . . . . 2회 일치
         나는 이를 악 물고 야구방망이를 내리쳐서 처치했다.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요새편/1-1 . . . . 2회 일치
         생각할 수 있는건 많다. 당구대, 야구방망이, 삽, 곡괭이, 죽창 등등. 좀비 영화의 주인공들이 그토록 쉽게 줍는 물건이 내게는 하나도 없다. 나는 배란다 문을 닫아놓고 거실에 주저 앉았다. 어느덧 정오가 다가오고 있었다. 마당은 태풍의 한 가운데처럼 한산했다. 담 하나를 사이에 놓고 여전히 녀석들이 돌아다니고 있지만 조금 시끄러운 행인들이라고 생각하면 5분 정도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나는 머리를 식혔다.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요새편/1-2 . . . . 2회 일치
         출발 전 마지막으로 물자를 체크했다. 가방에 티셔츠와 아령으로 만든 철퇴. 산지 1년 쯤 된 티셔츠와 바지, 아디다스에서 구입한 운동화, 연식이 20년이 좀 넘은 한국남자 하나. 그리고 정오의 햇볕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좋아 완벽하군.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트와일라이트 시티 마피아 . . . . 2회 일치
          프로젝트가 프라임 시티였을 때부터 살아남은 조직. ~~이게 다 패러디 원본 때문이다.~~ 브루네티의 무력을 담당하고 있으며, 아예 쿠데타를 일으켜 5대 패밀리에 들어가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 프로젝트가 대변경되면서 마피아에 관한 설명도 바뀌었다. 프라임 시티가 뉴올리언스를 배경으로 삼았던 것처럼 트와일라이트 시티 역시 어느 정도 뉴욕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마피아의 역사나 사건 역시 뉴욕과 비슷하게 흘러갈 것이다. ~~뉴올리언스 때에 비하면 자료가 많아서 다행이다.~~
  • 최두호 . . . . 2회 일치
         |활동 연도 = 2009년 ~ 현재
         === 프로 전적 ===
  • 최병일 . . . . 2회 일치
         * [[한국협상학회]] 회장
         * [[한국경제연구원]] 원장
  • 최승욱 . . . . 2회 일치
         |리그 = [[한국 프로 농구|KBL]]
  • 최웅 . . . . 2회 일치
         | 한국마즈
         {{토막글|한국 배우}}
  • 최윤수(정무직공무원) . . . . 2회 일치
         1989년 제31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고, 1993년 [[사법연수원]]을 22기로 수료하였다. 그 후 잠깐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검찰에 들어갔으며, 서울지검, [[법무부]] 감찰관실 검사로 근무하다가 2009년 [[대검찰청]] 조직범죄부장으로 승진하였다.
         그 후 검찰은 홍만표 변호사의 통화추적 등을 통해 홍 변호사가 최윤수 차장을 두 차례 찾아갔고, 최윤수와 무려 20여 차례나 통화한 사실까지 확인했다. 하지만 검찰은 결국 최윤수 국정원 제2차장을 소환하지 않고 서면으로 조사하는 데 그쳤다. 이로 인해 당시 검찰은 ‘제 식구 감싸기’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사건 당시에도 최윤수와 우병우 간의 관계가 입길에 올랐다. 우병우는 2013년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한 뒤 이듬해 5월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 기용될 때까지 1년 동안 변호사로 활동했고, 이 기간에 홍만표 변호사와 함께 사실상 ‘2인 1조’로 움직이면서 정식 선임계도 내지 않고 정운호 대표 등의 ‘몰래 변론’을 맡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홍만표와 우병우는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당시 수사기획관과 1과장으로 대검 중수부에서 함께 일한 인연이 있다. 우병우가 변호사 활동을 할 때 사무실을 연 곳이 서울 서초동 오퓨런스 빌딩 1111호로, 홍만표의 사무실(1010호)과 같은 건물 아래 위층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홍만표와 최윤수 차장 간의 연결 고리가 우병우 아니었냐는 지적이 제기됐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21421.html#csidxde4c88fecae9760b9b6c86f97f5e042|#]]]
  • 최항석 . . . . 2회 일치
         * [http://www.kmdb.or.kr/vod/mm_basic.asp?person_id=00000636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토막글|한국 배우}}
  • 카라스노 고교 . . . . 2회 일치
         애초에 중학시절 베스트 리베로 상을 받은 [[니시노야 유]]와 키타가와 제1중 출신의 천재 세터 [[카게야마 토비오]]가 있는 것만으로, 전력상 무시 못 할 팀이다. 실제로 남덕들 사이에서는, 주인공 학교의 리베로와 세터가 너무 [[사기캐]]라는 평까지 나올 정도. 과장이 아닌 게 니시노야는 키 빼고[* 아무리 포지션이 리베로라 하더라도 [[니시노야 유|니시노야]]의 경우에는 '''너무 작다'''. 프로필 신장은 160cm 근방이지만 이 키가 세운 머리(10cm)까지 포함한 거다. 아무리 만화인 걸 감안하더라도, 이 신장으로 배구를 한다는 건 [[흠좀무]]다. 아직 고2니까 더 클 가능성도 있지만.] [[먼치킨]]이며, [[카게야마 토비오]]는 그냥 [[스탯]]부터가 깡패다. 작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천재]]상으로 카게야마를 설정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스탯을 몰빵해놓은데다[* 현재까지 등장한 캐릭터들 중 능력치 총점에서 카게야마를 앞선 캐릭터가 '''단 한 명도 없다'''. 심지어 [[후쿠로다니 학원]]의 보쿠토 마저도! 때문에 독자들은 [[시라토리자와 학원]]의 우시와카의 프로필이 어서 공개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작중 활약(문제의 토스들)만 따져도 얘만한 먼치킨이 없다.
  • 카쿠스 . . . . 2회 일치
         === 프로페르티우스 ===
         프로페르티우스에 따르면, 헤라클레스는 선의 여신의 성스러운 신전 안에 있는 샘물에서 물을 마시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여신에 대한 의식은 비밀스럽고 여성에게만 한정되어 있어 여사제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헤라클레스는 문을 부수고 들어가 물을 마셨다. 하지만 여사제에게는 되돌아가서 소떼의 갈증을 없애준 보답으로 제단을 세우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 의례에는 어떤 여자도 참석할 수 없게 했다.
  • 켄카킥 . . . . 2회 일치
         격투기 기술의 하나. [[프로레슬링]]에서 쓰인다. '야쿠자 킥'으로도 불리는데, 본래 '야쿠자 킥'이라는 이름이었지만 [[야쿠자]]라는 말을 꺼리는 경우에 '켄카킥'이라고 한다. 켄카(ケンカ)는 싸움(상당히 거친 의미)이라는 뜻.
         프로레슬러 쵸노 마사히로(蝶野正洋)의 경기에 기원이 있어, [[로프 반동]]으로 돌아온 상대 선수에게 발차기를 날렸는데 이 때 해설이 "마치 야쿠자의 발차기 같습니다!"라고 외친 것이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 크리스토퍼 라킨 . . . . 2회 일치
         [[분류:198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미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미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미국의 양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코네티컷주 출신 배우]][[분류:한국계 미국인 배우]][[분류:한국계 미국인]]
  • 태영호 . . . . 2회 일치
         2016년 8월 17일, 갑자기 영국에서 고위급 북한 외교관이 탈북했다는 소식이 퍼졌으며 곧 그가 태영호 영사라는 것이 밝혀졌다. 가족과 함께 탈북한 태영호는 한국 [[망명]]행을 택했는데, 1997년 이집트 주재 북한 대사 장승길이 망명한 이래 최고위급 외교관의 탈북이었다.
         북한-중국 경계에서 영업하는 북한쪽 식당의 경우 한국인을 극도로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전에는 중·고교 수학여행시 종종 여행경로중 하나이기도 했지만, ~~그리고 국정원에서 담당 선생님에게 전화가 오고 그러지만~~ 북한이 테러를 벌일 가능성이 있어 아예 수학여행도 취소될 가능성이 생겼다.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01&aid=0008631654&date=20160821&type=1&rankingSeq=1&rankingSectionId=100|네이버 뉴스]]
  • 태학 . . . . 2회 일치
         중국, 한국, 베트남 등의 왕조국가에서 설치하던 고등교육기관.
         === 한국 ===
  • 토탈워: 쇼군 2 - 사무라이의 몰락/요원 . . . . 2회 일치
          * 프로이센 스파이크 헬멧 - "오랑캐들은 품위있는 옷차림을 한 자를 두려워한다."
          * 야구 배트 - "안정된 스윙은 항상 정답이 되는 법"
  • 토탈워: 쇼군 2/유닛 . . . . 2회 일치
         ==== 야구라부네(Siege Tower Bune) ====
         한국에서는 안택선이라고 불리는 종류의 배. 분류상으로는 근접전용 선박이지만 유미 코바야보다 많은 수의 궁병이 타고있다.
  • 트로피코 4 . . . . 2회 일치
         스팀에서 산 경우 한국어 번역이 적용되어 있으니 그냥 하면 된다.
          * 1951-1953: 한국전쟁 - 모든 군사 건물의 가격이 절반으로 줄게됨
  • 판타스틱 포 . . . . 2회 일치
         [[마블 코믹스]]의 [[슈퍼히어로 팀]]. 마블의 원로급 팀이며 [[한국]]에서는 유명한 편은 아니지만 마블 세계에서는 매우 비중이 높고 유명한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로봇애니로 치면 [[캡틴 아메리카]]는 [[철인 28호]], [[네이머 더 서브마리너]]는 [[철완 아톰]]이라면, 판타스틱 포는 [[마징가Z]] 정도의 존재인 오랜 역사의 작품. 한국에서는 주로 줄여서 '판포'라고 불린다.
  • 팔푼이 . . . . 2회 일치
         신동진 한국 아나운서 회장은 [[무라하치부]]가 팔푼이의 어원이 아닌가 추측하였다.[[http://www.announcer.or.kr/?p=8870&ckattempt=1 (참조)]]
         [[분류:한국어]]
  • 페어리 테일/492화 . . . . 2회 일치
          * 한편 엘프먼은 페어리 테일 동료와 떨어져 유키노와 동행 중. 렉터와 프로시도 있다.
          * 둘이 자매라는걸 몰랐던 엘프먼, 렉터, 프로시는 경악.
  • 페어리 테일/511화 . . . . 2회 일치
          * 렉터와 프로시는 동료를 생각해 공복감에 저항한다. 스팅은 그걸 계기로 식욕의 유혹을 뿌리치고 다른 사람들이 서로 해치지 못하게 기절시킨다.
          * 라케이드는 서로 먹으면서 멸하라고 말하는데 단 한 명, 프로시 만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로그 체니와 함께 먹을 때까지 참겠다고 말한다.
  • 페어리 테일/513화 . . . . 2회 일치
          * [[스팅 유클리프]] 대 [[라케이드 드래그닐]]의 싸움은 스팅의 승리로 끝났다. [[미네르바 올랜드]]와 [[유키노 아그리아]]가 조력하러 오지만 이미 끝난 상황. 프로시와 렉터가 [[로그 체니]]와 스팅에게 달려들어 기쁨을 표현한다. 프로시는 다짐한 대로 로그와 함께 밥을 먹자고 하는데 상황을 알리 없는 로그는 어리둥절.
  • 페어리 테일/541화 . . . . 2회 일치
          * 종전을 맞이한 할지온 항구는 생존자들이 부상을 치유하며 휴식하고 있었다. [[리온 바스티아]]와 [[셰리아 브렌디]]는 누군가 워프로 접근하자 고개를 돌린다. [[메스트 그라이더]]의 도움을 받은 쥬비아와 그레이였다. 그레이는 한 번에 더 많이 옮길 순 없냐고 독촉하는데 메스트가 말도 안 되는 요구하지 말라고 대꾸한다. 쥬비아는 메스트는 안중에도 없는지 그레이와 단 둘이 워프하는게 딱 적당하다고 주장한다.
          리온이 다가오며 싸움은 끝난거 아니냐고 물었다. 그레이가 아크놀로기아의 침공을 알리자 경악한다. 쥬비아는 루시가 지시한 대로 큰 배를 준비해달라고 요청한다. 엘자와 미라젠 등을 비롯한 페어리 테일 멤버들은 할지온을 향해 서두른다. 메스트가 워프로 오가는 거리를 줄이기 위해서다.
  • 페이데이 2 . . . . 2회 일치
          수송차량을 습격하는 Transport 하이스트(의 5개 버전)와 기차에서 프로토타입 군용 병기를 훔치는 Transport: Train Heist 하이스트, 돌격소총(Commando 553), 기관단총(Swedish K), 권총(Gruber Kurz)이 들어있는 DLC
          [[핫라인 마이애미]]와의 콜라보 DLC. 러시아 마피아 두목을 족치는 Hotline Miami 하이스트와 기관단총 3개(Cobra, Blaster 9mm, Uzi), 야구빠따, 식칼, 정글도, 소방도끼가 들어있다.
  • 편의치적 . . . . 2회 일치
         편의치적은 오래된 관행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라이베리아]], [[파나마]], [[소말리아]], [[온두라스]], [[레바논]], [[키프로스]], [[바하마]], [[버뮤다]], [[싱가포르]] 등의 소국이 외국 자본 회사의 설립을 쉽게 하는 회사법을 제정하고, 선박세를 저렴하게 하고 법적 규제를 완화하여 외국의 선박 회사와 선박을 유치하였다. 여기에 [[미국]]이나 [[그리스]]의 선주들이 대거 이들 나라로 옮겨가면서 편의치적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대부분 미국의 석유 메이저 회사와 그리스 계 선주(특히 선박왕 오나시스) 였다.
         || 한국, 영국, 싱가포르 || 3% ||
  • 프로라 . . . . 2회 일치
         [[나치]]가 집권하던 1936년 당시 "Kraft durch Freude"[* 즐거움을 통한 힘. 기존의 사민당계, 공산당계 노조를 흡수하고 그 자산을 강탈하여 설립한 일종의 어용노조인 '독일노동전선' 산하의 단체로서, 노동자 복지와 레저 분야를 주로 담당하였다.]이라는 기관에 의해 건설을 시작했다. --쓸데없이 커다란걸 좋아하는 나치답게-- 20,000명의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시설로 설계되었다고. 하지만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건설이 중단되었다. 이후 프로라는 군사 시설로 사용되었고, 전쟁 막바지에는 피난민 수용소로 사용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소련군과 동독군의 막사로 사용되었다.
         [[http://www.proradok.de/en/startseite-2/|프로라 정보 센터(영문)]]
  • 하이모 . . . . 2회 일치
         한국의 모발기업. 2014년 무렵 매출액은 642억 규모로 국내 가발업체 가운데 1위이다.
         [[분류:한국 기업]][[분류:모발 기업]]
  • 하이큐!! . . . . 2회 일치
         단행본으로는 2015년 3월을 기준 [[일본]]에서 15권까지 발매했으며, [[한국]]에서는 [[대원씨아이]]에서 정식으로 수입하여 13권까지 정발됐다. 일본에서는 9권 발매시 [[애니메이션화]] 기념으로 [[드라마 CD]]가 동봉된 한정판도 함께 발매했으며 15권 발매시 [[점프]] 스페셜 애니메이션 페스타에서 방영된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이 동봉된 한정판을 함께 발매했다.
         기존의 배구 만화들이 에이스 스파이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던 반면, 하이큐!!는 세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점에서 신선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배구에서는 흔히 하는 말로, '[[야구]]를 [[투수]] 놀음이라 한다면 [[배구]]는 세터 놀음' 이라 한다. 그만큼 배구에서 세터란 포지션이 중요하며, 이는 작중에서 [[코즈메 켄마]]가 '세터는 가장 능력이 좋은 사람이 하는 포지션' 이란 대사로도 언급된다. 이처럼 현실 배구에서는 가장 중요한 포지션임에도 그 특성상 화려함은 떨어지는 포지션[* 아예 [[히나타 쇼요]]는 세터에 대해서 '수수하고 어려운 포지션'이라고 말한다.]이라, (시각 매체인) 만화에서 세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려면 작가의 역량이 어느 정도 받쳐줘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이큐!!는 이 세터들을 중심으로 경기를 묘사한다. 그래서인지 작중 등장하는 세터들은 유독 [[사기캐]]와 [[먼치킨]]들이 많은데, 그 정점에 본작의 투탑 주인공 중 하나인 [[카게야마 토비오]]가 있다.
  • 하지영 . . . . 2회 일치
         * [[한국교육방송공사|EBS]] 《[[과학실험 사이펀]]》 - 사회자
         * 《[[기담전설 2]] - 소름》 (2009년, [[E채널]]) - 조 작가 역
  • 학동 . . . . 2회 일치
         여담으로, 후생노동성은 한국의 보건복지부에 해당한다. 한국의 방과후학교는 교육부에서 관장한다는 점이 다르다. 교육부에 해당하는 일본의 부서는 문부과학성이다.
  • 한혜령 . . . . 2회 일치
         * [[한국체육대학교]] 졸업
         [[분류:198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하키 선수]][[분류:2008년 하계 올림픽 하키 참가 선수]][[분류:2012년 하계 올림픽 하키 참가 선수]][[분류:2014년 아시안 게임 하키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하키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하키 참가 선수]][[분류:2014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분류:아시안 게임 하키 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한국체육대학교 동문]][[분류:성주여자고등학교 동문]][[분류:성주여자중학교 동문]][[분류:성주초등학교 (경북) 동문]][[분류:2016년 하계 올림픽 하키 참가 선수]]
  • 행복회로 . . . . 2회 일치
          * 비슷한 사례로 야구 팬덤에서 쓰이는 [[한화 이글스]]의 응원가 "나는 행복합니다~♪"가 있다.
         일본 대중문화 유래의 단어가 한국에서 쓰이게 되는 경우는 흔히 있지만, 행복회로(幸福回路) 같은 제한적인 것은 정말 드물다.
  • 허지애 . . . . 2회 일치
         == 프로필 ==
         {{토막글|한국 사람}}
  • 허진(법조인) . . . . 2회 일치
         *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PPL_7KOR_A1894_1_0014528|허진|許瑨}}
         |출판사=한국일보
  • 헤이즈 (가수) . . . . 2회 일치
         === 가요 프로그램 1위 ===
         {{토막글|한국 가수}}
  • 호소키 카즈코 . . . . 2회 일치
         한국 단국대학교에 많은 장학금 기부함
         남편과 함께 한국에서 자선활동함.
  • 홍아름 . . . . 2회 일치
         * 2009년 [[SBS]] 월화드라마 《[[드림 (드라마)|드림]]》 ... 송유리 역
         * 2009년 [[KBS2]] 아침드라마 《[[다 줄거야 (드라마)|다 줄꺼야]]》 ... 공영희 역
  • 홍해성 . . . . 2회 일치
         | 설명 = 한국 근대극 최초 연출가 홍해성 흉상 제막식
         [[1935년]]에 상업연극 전문 극장인 [[동양극장]]이 개관하자, 동양극장 연출부로 이동했다. [[1943년]]에 지병으로 사임할 때까지 동양극장에서 총 400편의 작품을 연출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승방비곡》, 《검사와 사형수》, 《어머니의 힘》 등이 대표적인 흥행작이다. 본격적인 전문 연출가로서 한국에 근대극을 정착시키는데 큰 역할을 담당한데 이어, 동양극장 이적 후에는 세련된 상업 연극으로 대중극의 수준을 격상시켰다는 평이 있다.
  • 후카다 쿄코 . . . . 2회 일치
          * [[2009년]] 실사영화판 『[[얏타맨]](ヤッターマン)』에서 [[도론죠]] 역을 맡았다.
          * 오리콘 프로필 : http://www.oricon.co.jp/prof/222878/profile/
  • 히토쯔마 . . . . 2회 일치
         [[유부녀]]를 뜻하는 말. 한국에서는 한자를 그대로 [[한국 한자음]]으로 읽어서 '인처'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 1만 시간의 법칙 . . . . 1회 일치
         2009년에 발표된 책, '아웃라이어'에서 나온 이야기.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선천적 재능보다 1만 시간이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 3월의 라이온/123화 . . . . 1회 일치
          * 이부스키에 갔을 때 프로기사로서 일하는걸 보고 어엿한 성인이고 사회인임을 느낀 것.
  • A-10 선더볼트 . . . . 1회 일치
         [[http://www.boeing.com/defense/support/a-10-wing-replacement-program/index.page#/tech-spec|보잉 홈페이지의 A-10 날개 교체 프로그램 페이지]]
  • AliasPageNames . . . . 1회 일치
         HelpOnProcessors,ProcessorPlugin,Processor,Processors,프로세서
  • DQN . . . . 1회 일치
         TV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목격! 도큥(目撃!ドキュン)』에서 나와서 퍼진 단어. 이른바 [[불량배]]나 [[양키]]라 불리는 사람을 다룬 채널로서, 그들을 「도큥(ドキュン)」이라고 불렀다. [[2채널]]에서 도큥을 「DQN」이라고 표현하여 지금과 같은 표기가 되었다.
  • Europa Universalis 4 . . . . 1회 일치
         제작사가 와패니즈로 유명하다(...) 일본의 왠만한 다이묘들은 전부다 있으며, 몇몇 다이묘들은 서양에서 유명한 명군들보다 능력치가 높기도 하다. 거기다가 일본한테 붙어있는 사기 전통인 규율[* 쉽게 말해서 공격력+방어력. 규율이 높을수록 한번의 전투로 더 많은 상대군사를 잡을수 있고 더 늦게 패주한다.] 10%는 진짜(...)~~조선하면서 이것때문에 고통을 몇번 받은건지...~~[* 프로이센이 이념을 다열어야 규율 7.5%다. 이쪽은 개신교개종을 반드시 하게되있기에 2.5%추가되서 10%긴 하지만.]
  • FrontPage . . . . 1회 일치
         || '''세계관''' 혹은 '''프로젝트''' || ○○○ ||
  • HMMWV . . . . 1회 일치
         한때 [[허머]]라는 민수용 버전도 있었다. [[제너럴 모터스]]의 브랜드였는데 2009년 중국 회사에게 매각되니 마니 하다가 그대로 파기되었다.
  • K리그 승강 플레이오프/2015시즌 . . . . 1회 일치
          1. 수원 FC가 승격함으로써 [[K리그 클래식]] 사상 최초로 지역더비가 완성된 점.[* 축구역사에서 더비라는 용어는 '''지역라이벌'''을 가리키는 것이 확장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축구사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한 셈]
  • K리그 챌린지 플레이오프/2014시즌 . . . . 1회 일치
         2014 챌린지 대회는 2위였던 안산이 플레이오프로 직행, 3위 강원과 4위 광주의 준플레이오프 대결로 그 막을 열였다.
  • K리그 챌린지 플레이오프/2015시즌 . . . . 1회 일치
         대구는 [[K리그 챌린지]]에서 후반기 부진으로 [[K리그 클래식]] 자동진출권을 놓쳤기 때문에 사기가 상당히 저하된 부분이 있었다. 게다가 2015시즌 대구는 수원을 상대로 1승 1무 2패로 상성마저 최악이었는데다가 대구가 챌린지에 합류했던 2014년부터 수원 FC와의 홈경기는 '''단 1승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반전을 믿을 수 있는건 무승부로 시합을 종료하여 승강 플레이오프로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으나...
  • K리그 클래식/2016시즌 . . . . 1회 일치
         [[상주 상무 프로축구단]] - [[K리그 챌린지/2015시즌|2015시즌 K리그 챌린지]] 우승자격으로 승격
  • MoniWikiPlugins . . . . 1회 일치
          * format: 프로세서를 액션으로 이용하기위한 인터페이스 액션 (모인모인도 이 방법을 쓴다)
  • NDK . . . . 1회 일치
         TV프로그램 「가칭코(ガチンコ)」의 한 코너 「가칭코 파이트 클럽(ガチンコファイトクラブ)」에서 "전에 부모를 죽이려고 복싱을 시작했다고 말했지. 지금 어떤 기분?"이라면서 부추기며 조롱하는 발언이 나온 것이 유래이다.
  • ParagraphTemplate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
  • Suicide is Painless . . . . 1회 일치
         미국의 노래.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M*A*S*H]]의 주제곡이다.
  • T.O. 모로우 . . . . 1회 일치
         [[프로페서 아이보]]와 함께 안드로이드인 [[투모로우 우먼]]을 만들기도 했으며 이 투모로우 우먼을 이용해 [[저스티스 리그]]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 Victoria II/개혁 . . . . 1회 일치
          * 수도 프로빈스에 요새 건설
  • head to head . . . . 1회 일치
         스페인 프로축구도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2015-2016시즌 라 리가는 1위팀 바르셀로나와 2위 AT마드리드가 대회 막바지까지 승점이 같아질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이 규정에 의해 바르셀로나가 우승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 ℃-ute . . . . 1회 일치
         [[일본]]의 [[아이돌 그룹]]. [[하로프로젝트]] 일원.
  • 강대식 . . . . 1회 일치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바른미래당]] 후보로 동구청장 재선에 출마하였으나 [[자유한국당]] [[배기철]], [[더불어민주당]] 서재헌 후보에 이은 3위로 낙선하였다.
  • 강원래 . . . . 1회 일치
         *1997 한국영상음반대상 본상
  • 강중인 . . . . 1회 일치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토지문제연구위원에 임명되었고, 미군정 과도정부의 사법부 총무국장도 지냈다. 같은 해 7월에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발생하여 남로당과 미군정이 정면 충돌을 일으켰을 때 위폐 사건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았다. 남로당은 곧 불법화되었고, 강중인은 [[1949년]]에 발생한 법조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1심 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항소 중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갔다.
  • 개인용 웹페이지 저장 서비스 . . . . 1회 일치
         === 프로그램 ===
  • 거푸집 . . . . 1회 일치
         거푸집의 재료로는 [[흙]], 밀랍, 돌 등이 있다. 중국에서는 주로 흙 거푸집을 사용하고, 일본에서는 [[사암]]으로 만든 거푸집을 썻다. 고대 한국에서는 활석(滑石)으로 만든 거푸집을 사용했다.
  • 건담 동물원 . . . . 1회 일치
         >- '''이 게임 프로듀서'''(…)
  • 건어물 여동생 우마루짱/165화 . . . . 1회 일치
          * 도마 우마루(UMR모드)는 타치바나 실핀포드와 레트로한 도쿄 거리를 산책하는 Tv프로를 보고 있었다.
  • 건어물 여동생 우마루짱/175화 . . . . 1회 일치
          * 감각과 경험으로 적당 적당히 헤쳐나가는 우마루와 달리 히카리는 메뉴얼부터 정독하는 프로페셔널한 공략자였다.
  • 경비원 . . . . 1회 일치
         [[미국]] 같은데서는 경비원도 기본적으로 [[권총]] 같은걸 장비하고 다니지만 한국에서는 그런거 없다.
  • 경빈 박씨 (중종) . . . . 1회 일치
         '''경빈 박씨'''(敬嬪 朴氏, [[1492년]]? ~ [[1533년]])는 조선 왕조 제11대 임금 [[조선 중종|중종]]의 [[후궁|빈어]](嬪御)<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PPL_6JOa_A9999_2_0000310}}</ref>로, 중종의 장자인 [[복성군]]을 낳아 중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작서의 변]]에 연루되어 누명을 쓴 채 유배되었고, 결국에는 사약을 받고 죽었다.
  • 고령군 . . . . 1회 일치
         [[분류:고령군 출신|고령 출신 인물]][[분류:경상북도의 군]][[분류:1895년 설치]][[분류:한국의 옛 수도]]
  • 골 결정력 . . . . 1회 일치
         한국 축구계에서 쓰이는 단어. 골을 넣는 능력이라는 의미이다.
  • 골든 위크 . . . . 1회 일치
         [[일본]]에서 4월 말에서 5월 초에 이르는 약 일주일 가량의 장기 연휴. 줄여서 GW. [[한국]]에서는 "황금연휴"라고도 부른다.
  • 곽월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사람}}
  • 곽희성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배우}}
  • 구글 . . . . 1회 일치
         한국어 구글의 경우 세이프서치가 빡세다. [[술취한 선원]]이나 [[미무라 카나코]]가 세이프 서치에 걸린다. "주인한테 안기는 강아지"라는 검색어가 세이프서치에 걸린다는 [[트위터]]도 있었는데 해당 링크 아는 사람이 추가 바람.
  • 권혁 (기업인)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근현대사}}
  • 규동 . . . . 1회 일치
         한국 기준으로는 덮밥 종류와 비슷하지만 고기 [[비빔밥]] 처럼 생각하기에는 밥의 양이 좀 많다. 물론 고명의 양을 많이 담는 컨셉의 메뉴를 올리는 집도 일부 존재한다.
  • 그랜드 테프트 오토: 산 안드레아스/무기 . . . . 1회 일치
          * 야구방망이
  • 길은혜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배우}}
  • 김대호(축구선수) . . . . 1회 일치
         이 해 리그 13경기에 출장하며 가능성을 보인 그는 다음 시즌, 2012년 4월 3일 애들레이드 유나이티드와의 2012 ACL 경기에서 프로 데뷔골을, 6월 17일 FC 서울과의 리그 경기에서 K리그 데뷔골을 터뜨렸으며 10월 7일 전북 현대 모터스와의 경기에서는 멀티골을 넣는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실제로 2012시즌 김대호는 서울, 수원, 전북, 울산 등 강팀만을 상대로 5골을 기록하며 강팀 킬러로서 주목을 받았다. 시즌 기록은 23경기 5골[* 챔피언스리그 제외]. 2013시즌에는 28경기에 출장하며 주전 풀백으로서 입지를 확고히 했고 골은 없으나 3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였다. 비록 [[아디]]에 밀려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처음으로 K리그 대상 베스트일레븐 후보에 이름을 올리는 등 개인적으로도 뜻깊은 시즌이었다.
  • 김동석 . . . . 1회 일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선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인 [[대한국민당]] [[육홍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김우동]]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자유당 [[김우동]] 후보에 밀려 낙선한 것으로 나오자 [[재검표]] 소송을 제기하였다. 재검표 결과 당락이 뒤바뀌어 당선되었다. 같은 해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 김병준(육상) . . . . 1회 일치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 13초43 한국신기록으로 은메달을 획득하였고, [[2015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와 2017 세계육상선수권에도 참가하였다.
  • 김성곤 (1913년) . . . . 1회 일치
         [[1967년]] 김성곤은 [[길재호]], [[백남억]], [[김진만]]과 함께 [[민주공화당]] 내의 핵심인물이 된다. 그 이후 [[1971년]]에 치러진 [[대한민국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리고 [[1971년]] [[10월 2일]]에 야당과 동조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을 어기고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 건의안을 통과시켰는데 이를 [[10.2 항명 파동]]이라 한다. 그 이후 김성곤은 [[10.2 항명 파동]]의 주동인물로 지목받아 경위조사를 받고, 정계를 은퇴하게 된다. 그 뒤 [[1973년]]에는 [[대한상공회의소]] 제8대 회장을 지냈으며, [[1974년]]에는 대한양회 인수, 한국신문연구소 회장 취임을 했다. 그 뒤 [[1975년]] [[2월 25일]] 사망하였으며 가족장으로 [[국민대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가 [[1984년]] 강원도 평창에 이장되었고, 2014년 고향인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으로 재이장되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 김소희 (2000년)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배우}}
  • 김소희 (쇼트트랙 선수) . . . . 1회 일치
         김소희는 [[2003년]] 말 국가대표팀 코치로 선임되어 그 해 [[중화인민공화국|중국]]에서 열린 1, 2차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종합 우승을 거두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2004년]] [[11월 3일]] [[최은경 (쇼트트랙 선수)|최은경]], [[여수연]], [[변천사]], [[허희빈]], [[강윤미 (쇼트트랙 선수)|강윤미]], [[진선유]] 등 여자대표팀 선수 6명이 사생활 간섭<ref>{{뉴스 인용|제목 = "죽도록 두들겨 맞고…" 여자 쇼트트랙 '폭력의 얼음판' | url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ports_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20&article_id=0000269734 | 출판사 = 동아일보 | 저자 = 김성규 | 쪽 = | 날짜 = 2004-11-11 | 확인날짜 = 2014-02-16 }}</ref>, 상습적 구타<ref>{{뉴스 인용 | 제목 = 여자 쇼트트랙 구타 쇼크 "매일 무차별적으로 맞았다"- 국제대회장서도 되풀이 | url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6000000/2004/11/006000000200411101828268.html | 출판사 = 한겨레 | 저자 = 성연철 | 쪽 = | 날짜 = 2004-11-11 | 확인날짜 = 2014-02-16 }}</ref> 등 코치의 강압적인 지도 방식에 불만을 품고 [[태릉선수촌]]을 무단 이탈했다가 대한빙상연맹의 설득으로 하루 만에 복귀했다. 연맹 측은 [[11월 11일]] 상습구타 사건에 연루된 코치진이 제출한 사표를 수리했고, 7명의 부회장단도 총 사퇴했다.<ref>{{뉴스 인용 | 제목 = `선수 매질`파문..빙상聯 부회장단 사퇴 |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1&aid=0000088254 | 출판사 = 문화일보 | 저자 = 이준호 | 쪽 = | 날짜 = 2004-11-11 | 확인날짜 = 2014-02-16 }}</ref> 이후 연맹은 여자대표팀을 선수촌에서 퇴촌시켰으며, 11월 말 열린 3, 4차 월드컵 대회 출전도 정지시켰다.<ref>{{뉴스 인용 | 제목 =여자 쇼트트랙 새 사령탑 선임 | url =http://sports.hankooki.com/lpage/moresports/200411/sp2004111522171658130.htm | 출판사 = 스포츠한국 | 저자 = 허재원 | 쪽 = | 날짜 = 2004-11-15 | 확인날짜 = 2014-02-17 }}</ref> 이 사건 이후 현장 지도에는 나서지 않고 연구원으로만 활동하고 있다.
  • 김수학 (법조인) . . . . 1회 일치
         |임기2 = 2009년 2월 9일 ~ 2011년 2월 16일
  • 김연수(작가) . . . . 1회 일치
         현재, 2009년에 [[창비]]에 연재하던 바다 쪽으로 세걸음을 집필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김영한 (1900년) . . . . 1회 일치
         '''김영한'''(金永漢, [[1900년]] ~ [[1980년]]<ref>《한국일보》 (1987.12.18) [http://www.kinds.or.kr/imgdata8/1987/12/18/19871218HKM07.pdf 알뜰살림 속에 숨은 內助... "보통 부인"]</ref>)은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노태우]]의 장인이다.
  • 김우동 . . . . 1회 일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선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인 대한국민당 육홍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2년 지방선거]]에서 경상북도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 김우식 (1886년)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사람|정치인}}
  • 김유현 . . . . 1회 일치
         * [[2009년]] [[문화방송|MBC]] 수목드라마 《[[돌아온 일지매]]》 ... 모란공주 역
  • 김재엽 . . . . 1회 일치
         196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1974년 대구 [[남산초등학교]] 4학년때 유도를 처음 시작하였으며, [[대구중앙중학교]]와 [[계성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전국규모대회를 20여차례 석권하였다. 특히 계성고 3학년이던 1982년에는 100연승의 대기록을 세워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1983년 [[계명대학교]] 1학년 때 처음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태릉선수촌]]에 입촌하였으며, 1982년 6월 [[푸에르토리코]]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유도 선수권대회에서 한국유도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 김종훈 (1952년) . . . . 1회 일치
         * 2006년 6월 : [[한미자유무역협정]] 한국측 수석대표
  • 김처선 . . . . 1회 일치
          * [[김(성씨)/목록]]. [[한국사 관련 정보]]
  • 김형태(정치인) . . . . 1회 일치
         국민대학교 졸업 후인 1979년 [[한국방송공사|KBS]]에 [[기자(직업)|기자]]로 입사하였다. 2003년까지 주로 정치부,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였다.
  • 김희정 (펜싱선수) . . . . 1회 일치
         '''김희정'''(金熙正<ref>{{뉴스 인용 | 제목=<프로필> 펜싱 에폐 금메달 金熙正 | url=https://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4013398 | 출판사=연합뉴스 | 저자= | 쪽= | 날짜=1995-04-15 | 확인날짜=2018-09-14}}</ref>, [[1975년]] [[1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은퇴한 [[펜싱]] 선수로 주 종목은 [[에페]]이다. [[1996년 하계 올림픽|1996년]]과 [[2004년 하계 올림픽]]의 출전 경험이 있다.<ref name="sports-reference">{{웹 인용|url=http://www.sports-reference.com/olympics/athletes/ki/kim-hui-jeong-1.html |제목=Kim Hui-Jeong Olympic Results |확인날짜=2012년 2월 19일 |웹사이트=sports-reference.com}}</ref> 그녀는 [[2002년 아시안 게임]]에도 참가하여 개인전과 단체전 2관왕을 하기도 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20&aid=0000154716 펜싱 이승원-김희정 2관왕 찔렀다]</ref>
  • 나가 . . . . 1회 일치
         인간형의 비늘을 가진 냉혈동물로, 네 선민종족중 하나. 네신중 '물'을 상징하는 '발자국없는 여신'이란 신을 섬기며, 말을 할 수 도 있지만, 대부분 '니름'[* 마음속으로 말하는것. 프로토스의 소통방식을 생각해보면 쉽다.]으로 서로 소통하며,[* 물론 나가가 아닌 다른 종족과는 평범하게 말로 소통한다.] 이때문에 청력이 그리 좋지는 못한 편이다.[* 이때문에 음악을 즐기지 못한다.] 특이하게도 열을 볼 수 있지만 그때문에 그림을 즐기지 못한다. 그외에 냉혈동물이라 그런지 허물을 벗기기도 하고, 일정 수준이상의 온도가 제공되지 않으면 활동할 수 없다.[*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의 한계를 '한계선'이라고 하는데, 가장 짧은 간격이 200km라는듯(...)] '소드락'이란 약물을 투여하는것으로 일정시간동안 엄청난 속력과 민첩성을 보여줄 수 있다.
  • 나다카 타츠오 . . . . 1회 일치
         좋아하는 영화는 [[대부]]. 좋아하는 여배우는 [[오드리 헵번]]이며, 목표로 하는 배우는 [[멜 깁슨]]. 좋아하는 브랜드는 [[랄프로렌]].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팬이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01화 . . . . 1회 일치
          * 그녀는 분명 프로가 될 유망주. 하츠메만큼 기계를 좋아하는 학생은 없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02화 . . . . 1회 일치
          * 아이자와는 학생들을 격려하며 "임시 면허를 따면 너희들은 달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병아라, 세미 프로로 부화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18화 . . . . 1회 일치
          >너는 틀림없이 프로가 될 능력을 가지고 있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22화 . . . . 1회 일치
          * 정식으로 질문을 받자 아이자와도 입을 연다. 원래 얘기해줄 생각이었다는데. 히어로 인턴은 한마디로 말해 "정식 히어로 활동". 프로 히어로와 협력하는 직업 체험을 본격화시킨 버전이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28화 . . . . 1회 일치
          >프로의 현장에서 통감해 줘야겠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31화 . . . . 1회 일치
          * 네지레가 타깃을 쓰러뜨리자 [[우라라카 오챠코]]와 [[아스이 츠유]]가 합동기술 "메테오 파프로츠키즈"로 결판을 낸다. 우라라카가 띄운 건물 파편을 아스이가 혀로 쳐서 쏘아보내는 기술. 빌런들은 완전히 제압되고 사건이 종결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32화 . . . . 1회 일치
          * 패트껌은 자신의 미스를 잘 처리해준 타마키를 대중들 앞에 소개한다. 모여든 시민들을 향해 "기량이라면 프로 이상"이라고 추켜세운다. 그 뒤에 "멘탈은 성장하지 않았다"고 꼬리를 달지만. 시민들의 환호를 받은 타마키는 어찌할 바를 몰라한다. 그런데 그 군중 사이엔 선량한 시민들만 있는게 아니었다. 진작에 흩어져 있던 빌런조직의 쫄따구가 있었던 것이다. 녀석은 잡힌 형님들을 구해야 된다며 총을 겨눈다. 패트껌이 수상한 기척을 눈치챘지만 한 발 늦었다. 벌써 총알이 발사되었는데, 그 총알이 아주 수상하다. 이 수상한 총알이 무방비한 상태의 타마키를 맞춘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33화 . . . . 1회 일치
          어쨌든 키리시마의 고민은 이렇다. 지금 자신에겐 이거다 할 만한 뭔가가 없다. 프로가 됐을 때 바쿠고나 친구들과 어깨를 마주하려면 뭘하는게 좋을까? 듣고 있던 세로가 "너 좀 비겁하다"고 디스한다. 키리시마는 한탄이고 궁리라고 반발한다. 그때 의외로 바쿠고가 그럴 듯한 조언을 시작한다. 자신들과 맞서니 뭐니하기 전에는 "흔들리지 않는 기마" 같은 소릴 하지 않았냐면서. 그리고 그는 키리시마가 올마이트의 최후, 카미노에서의 격전에서 보여준 모습을 높이 평가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37화 . . . . 1회 일치
          * [[아이자와 쇼타]]가 교사이자 선배 히어로로서 미도리야의 각오를 확인한 그날, 다른 학생들도 거기서 참가가 결정되었다. 아이자와는 그들의 참가를 일단 허가하지만 "어차피 너희에겐 별로 활약할 여지가 없다"는 냉정한 현실을 알려준다. 물론 빅3, [[토오가타 밀리오]]와 [[하도 네지레]], [[아마지키 타마키]]는 다를 것이다. 이들은 이미 프로와 동등 이상의 평을 받고 있으니까. 하지만 1학년들은 사정이 다르다. 그러면서 미도리야는 어쨌든 나머지 셋은 자기들 의지로 여기 있는게 아니냐며 어떻게 하고 싶냐고 물었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56화 . . . . 1회 일치
          * 그때 이곳에 있을리 없는 [[미도리야 이즈쿠]]가 나타난다. 미도리야는 응원을 부르러 왔다면서 전방의 십자로 바로 밑에 타깃이 있고 그 밑에서 프로 히어로들이 시간을 벌고 있다고 알린다. 그 말을 들은 류큐는 리키야를 처리하고 선행한 일행까지 따라잡을 묘안을 떠올린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84화 . . . . 1회 일치
          * [[키리시마 에지로]]는 바쿠고 카츠키를 구하러 갈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지만 이이다 텐야를 비롯해 프로 히어로에게 맡길 것을 주장하는 학생들도 많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90화 . . . . 1회 일치
          * 증강포는 프로 히어로팀을 날려버린 것과 같은 능력으로 보인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93화 . . . . 1회 일치
          * 프로 히어로 일행은 올마이트를 도우러 온 거라며 올 포 원을 공격한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95화 . . . . 1회 일치
          * 시가라키 토무라는 프로파일링에 따르면 "아이의 발작"같은 상태. 그의 범죄는 갈 수록 정교하고 복잡해졌으며 "세간에 영향을 주는 것"을 목표로 발전했다.
  • 낙마 . . . . 1회 일치
          * 2006년 카타르 아시안 게임에서 승마 종목에 출전한 한국의 김형칠 선수가 낙마로 사망했다.
  • 날갯죽지 조르기 . . . . 1회 일치
         레슬링에서는 넬슨 홀드(Nelson hold)라고 부른다. 다양한 응용 기술이 존재하며, 아마추어 레슬링에서는 이 자세로 머리를 압박하여 공격하는 것이 기본이다. 프로레슬링에서는 이 자세를 시작하여 상대를 집어던지는 파생 기술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 남동훈 . . . . 1회 일치
         | 학력 = [[한국체육대학교]] 재학
  • 남상태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근현대사}}
  • 넌센스 . . . . 1회 일치
         한국에서는 보통 '헛소리다'라는 말을 젊잖게 돌려서 할 때 사용한다. '그 말은 헛소리다'보다 ;그 말은 넌센스다'가 좀 더 젊잖고 세련되게 느껴지며 후자는 싸움이 날 가능성이 조금 적다. 물론, 실제로는 똑같은 뜻이다.
  • 노무리쉬어 . . . . 1회 일치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에서 프로듀서 [[노무라 테츠야]]가 담당한 작품에서 나오는 표현들이, 매우 [[중2병]] 스럽기 때문에 이걸 놀리는 의미로 붙여진 말이다.
  • 노재우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사람}}
  • 뇌피셜 . . . . 1회 일치
         한국 인터넷에서 탄생했다.
  • 눈에서 비늘이 떨어진다 . . . . 1회 일치
         일본에서는 흔히 사용되는 관용어이다보니, 일본에서 써진 창작물에서도 마찬가지로 자주 쓰인다. 하지만 한국에선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역자의 주석이 따로 달려있지 않은 [[라이트 노벨]]이나 설명 자체가 배제될 가능성이 높은 [[애니메이션]]을 접할 때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하는 경우가 많다.
  • 니세코이/221화 . . . . 1회 일치
          * 치토게는 기뻐하며 프로포즈할 준비를 하다가 오노데라에게 줬던 그림책에서 마지막 장이 떨어져 나온걸 발견한다.
  • 니세코이/229화 . . . . 1회 일치
          * 이치죠는 다시 한 번 치토게에게 프로포즈하고 치토게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 니트 . . . . 1회 일치
         지구 근접 소행성 관측 프로젝트(Near-Earth Asteroid Tracking)를 줄여서 NEAT라고 하며, 여기에서 발견된 혜성에 니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 단기대학 . . . . 1회 일치
         미국의 주니어 컬리지, 혹은 커뮤니티 컬리지에 해당하며, 한국에서는 전문대에 해당. 물론 나라마다 특징이 있으므로 세세하게는 차이점이 있다. 비슷하게 전문대학과 비교되는 ‘전문학교’와 ‘단기대학’은 또 다른 것이므로…. 혼란스럽다.
  • 대구광역시 . . . . 1회 일치
         대구 소재 한국뇌연구원-첨단장비센터
  • 대구광역시/인물 . . . . 1회 일치
         * [[김근백(프로게이머)|김근백]] - 동구(대구)
  • 대군 . . . . 1회 일치
         [[분류:동음이의어]] [[분류:한국사]] [[분류:일본사]]
  • 대한민국 망명정부 야마구치 현 설치계획 . . . . 1회 일치
         [[분류:한국사]]
  • 데미안(드라마) . . . . 1회 일치
          * 프로듀서 Glen Mazzara : [[워킹 데드]] 2,3시즌을 담당. 더 쉴드에 참가했다.
  • 도균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배우}}
  • 도나우 강 . . . . 1회 일치
         한국 수자원공사 글로벌 하천관리 탐방 도나우강
  • 도야가오 . . . . 1회 일치
         본래 간사이 출신 예능인들이 쓰던 말로, 2000년 초부터 텔레비젼 프로에 유행어로 나오면서 일본에 널리 퍼졌다고 한다.
  • 독비도 . . . . 1회 일치
         [[중국]]의 무협 영화. 한국에서는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로 개봉했다. 일본에서 개봉된 제목은 편완필살검(片腕必殺剣). [[김용]]의 [[무협 소설]] 《[[신조협려]]》를 원안으로 하여 제작되었다.
  • 독이 든 성배 . . . . 1회 일치
          * 대한민국 축구감독(…) 등 성공하면 엄청난 찬사를 받지만 실패하면 엄청난 욕설을 얻어먹는 자리에 주로 사용된다. 막장을 달리는 [[프로 스포츠]] 팀의 감독 자리에 오르는 것에도 이런 표현이 사용된다.
  • 돈가스 . . . . 1회 일치
         한국인들이 시험 전에 엿먹는 것처럼 일본인들은 시험 전에 돈가스를 먹는다. 이는 돈가스를 뜻하는 トンカツ의 カツ가 승리를 뜻하는 勝つ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
  • 드라이브 스루 . . . . 1회 일치
         [[미국]]에서는 1930년대 부터 시작하여, 1950년대에 크게 발전하였다. 한국에서는 1992년에 맥도널드가 처음으로 드라이브 스루 매장을 개설했으며, 2010년대부터는 널리 퍼지고 있다.[[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9/09/2013090901478.html?Dep0=twitter (참조)]]
  • 등신대 패널 . . . . 1회 일치
         의외로 한국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는 곳이 있는데, 바로 PC방. 게임 캐릭터나 홍보모델을 본따서 만든 게임 홍보 등신대 패널은 생각보다 자주 찾아볼 수 있는 편이라 일상에서 자주 접할 가능성이 높다.
  • 디아스포라 . . . . 1회 일치
         [줌아웃] SNS 독립운동 프로젝트, Diaspora*
  • 라늬 . . . . 1회 일치
         *[[2009년]] [[언터쳐블]]- 난리부르스
  • 라마 . . . . 1회 일치
         영국의 코미디 프로그램 [[몬티 파이슨의 날으는 서커스]]에서는 강에 서식하며 꿀을 먹고 사는 위험 생물로 설명된다. Cuidado! Llamas!
  • 레드맨 . . . . 1회 일치
         [[분류:TV 프로그램]]
  • 레이나 검랑전설 . . . . 1회 일치
         [[켄류]]는 왠지 로봇이라기보다는 파워드 슈츠에 가까운 디자인이 되었다. [[바이캄프]]는 디자인 자체는 거대하고 위압적이라서 괜찮은 편이지만, 3편에서 어둠의 바이캄프로 소환되었다가 켄류도 아닌 그냥 검랑만 든 레이나에게 졌다.[* 사실 이 때 레이나가 검랑을 들면서 일단 '변신 비스무리한 연출'이 있긴 있고, 이 작품의 켄류는 로봇이 아니라 파워드슈츠 같은 것이므로 일단 켄류 비슷한 상태라고 볼 수 있을듯.]
  • 레이프 . . . . 1회 일치
         14세기에는 뭔가를 약탈, 강탈하다는 의미로 많이 쓰였다. 15세기에는 주로 여성을 성적인 목적으로 유괴한다는 의미로 쓰였으며, 지금과 비슷하게 강간이라는 의미가 나타나게 되었다. 다만 이때는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것만 '레이프'라고 불렸다. 현대는 모든 형태의 강제적 성행위가 레이프로 정의되었다.
  • 로베르 기스카르 . . . . 1회 일치
         한편 기스카르는 즉각 이탈리아로 돌아와 1083년 한여름 안에 아벨라르와 그의 형제인 에르망의 난을 진압하고, 산탄젤로성에서 외롭게 저항하고 있는 교황을 구원하기 위해 새로운 군대를 모집했고, 이듬해 초여름에 로마로 향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기스카르와 직접 싸움을 걸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그가 로마성문으로 들이닥치기 사흘전에 군대의 대부분을 거느리고 롬바르디아로 숨어버린것이다. 한편, 기스카르는 5월 27일 밤에 병력을 거느리고 조용히 도시의 북쪽으로 돌아가,섀벽에 공격을 개시했고, 순식간에 돌격대의 선봉이 플라미니우스 성문을 뜷고 도시로 진입했다. 로마 시민들은 노르만군에게게 격렬히 저항했지만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고, 마르티우스 광장 전역이 불타는 지역으로 변했다. 이후 노르만 병사들은 로마를 약탈하고, 말그대로 개판으로 만들어버렸다. 격분한 로마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한때 군중들이 기스카르를 포위해 그대로 끔살시킬뻔하기까지 했다(...) ~~아깝게도~~ 그에게는 다행히도 그의 차남인 로제르 보르사가 병력 1천명을 이끌고 그를 구원해 겨우 목숨을 건진 기스카르는 노르만군들에게 도시를 모조리 불태우라고 명령한뒤, 교황을 데리고 남이탈리아로 돌아가 비잔티움에 대한 후속 원정을 준비한다.[* 참고로 이때 기스카르의 나이는 예순 여덟이었다!! 그것도 서양식이니 한국식이면 칠순(....) 대단한 집념이라 할 수 밖에 없다.]
  • 롤 모델 . . . . 1회 일치
         아이들이 [[리그 오브 레전드]]를 하면서 동경하는 대상. 챔피언이거나 프로게이머일 수도 있다. 대개 서로의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다.
  • 롬니아 제국 흥망기 . . . . 1회 일치
         일본의 라이트 노벨로 한국에도 정발되었다. 작가는 [[마이사카 코우]]. '로마 제국'을 모티브로 한 가상의 제국 '롬니아 제국'이 초대 황제의 갑작스런 서거로 인해 혼란에 빠지는 것을 주인공 '사이파카르'가 수습하고 패업을 이뤄낸다는 내용.
  • 류원기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사람}}
  • 마~앙 . . . . 1회 일치
         여기에서 「치~잉(웃음) / ち〜ん(笑)」이 나왔는데, 이는 본래 야구팀 한신 타이거즈를 뜻하는 멸칭이었다. 한신 타이거즈의 멸칭인 「한친(犯珍)」과 치-잉을 합쳐서 한신은 끝장났다는 의미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 표현이 나온 것은 2008년으로 당시 시즌에서 한신이 10게임차 이상으로 선두를 달리다가 막판에 거인에 역전당했기 때문.
  • 마기/324화 . . . . 1회 일치
         신드바드가 어떻게 생존해 있는지는 미지수. 루프로 완전히 돌아간 걸로 보였는데 자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지상에서 다윗이 한 것처럼 그에게 접근해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여전히 성궁을 탈취할 생각인 듯 한데 "고지에 오르기 위한 포석"이라는 걸로 보아 이미 방법은 연구를 끝낸 듯. 갑작스러워 보이지만 그와 다윗이 성궁에 있기 때문에, 실제론 그들도 무한한 시간 속에서 연구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우고가 한 것처럼 보다 상위의 신으로 위상을 바꾸는 방식으로 우고를 처리하려 할 것으로 예상.
  • 마기/325화 . . . . 1회 일치
          * 우고와 아르바가 있는 성궁은 이변이 일어난다. 우고가 해파리처럼 만들어 수조에 봉해버린 다윗과 일 일라가 묘한 힘을 부리더니 루프로 환원됐던 어떤 이를 되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우고 조차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데.
  • 마기/335화 . . . . 1회 일치
          * 알라딘이 "신드바드 왕의 마법"이 뭐냐고 묻자 진들은 신드바드가 이미 세상을 루프로 환원시킬 성궁의 마법을 시동시켰다고 알려준다. 일행이 당황하자 또다른 목소리가 허공에 나타나 안심하라고 이른다.
  • 마기/348화 . . . . 1회 일치
          * 신드바드와 알라딘이 바라보는 세계, 그리고 그 개혁안은 어떤 것일까? 알리바바는 둘의 차이부터 지목한다. 우선 신드바드는 세상을 수직 구조로 보고 "세로로 연결하는 작전"이다. 계속 천장을 뚫고 올라가 거기서 운명을 쥐고 있는 신을 쳐부순다, 더이상 쳐부술 신이 없을 때까지 그걸 반복한다. 결과적으론 "운명"을 쥐고 있는 존재가 사라지지만 모든 생명이 루프로 환원된다. 알라딘이 맞장구치며 "그래서는 안 된다"고 비판하는데, 알리바바는 일단 제지하고 자신의 설명을 이어간다.
  • 마더콘 . . . . 1회 일치
         일본에서는 한국 남자는 마더콘이라는 이야기도 널리 퍼진 모양이다.[참조]
  • 마루코메 . . . . 1회 일치
         1854년에 창업한 전형적인 일본 노포이나, 정식 회사로의 발족은 2차대전 후인 1948년(...)에 했다. 또한 2000년대 이후로는 미소뿐 아니라 누룩[* 코우지, 밀을 이용하여 덩어리 형태로 만드는 한국식 누룩과 달리 낱알 형태이므로 입국(粒麴)이라고도 한다.]을 이용한 다양한 상품들을 출시하고 있다.
  • 마법소녀 리리컬 나노하 시리즈 . . . . 1회 일치
         일본 '세븐 아크스'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시리즈. 원래는 에로게(...) '트라이앵글 하트 3'의 스핀오프로 제작된 물건으로, 과거의 대부분의 마법소녀물과는 달리 포격전 등의 전투적인 묘사가 많이 들어가 화제가 되었다.
  • 맥스 페인 2: 맥스페인의 몰락 . . . . 1회 일치
          Captain Baseballbat Boy. 야구방망이를 무기로 쓰는 캡틴 베이스볼배트보이의 이야기. 캡틴 베이스볼배트보이는 인정 안하지만 애인으로 바이시클 헬멧 걸이 있으며, 맥스웰의 악마라는 적이 있다.
  • 머신맨 . . . . 1회 일치
         로봇 군인을 원한 [[미군]]의 극비계획에서 탄생한 로봇. 올리버 브로드허스트 박사의 지휘로 51대의 실험 로봇들이 프로그래밍되었고 X-51은 이 로봇들 중 하나였다. 에이블 스택 박사는 로봇이 사람처럼 생각할수 있다면 위협이 될수 있다고 생각해 자신의 안전은 무시하고 로봇 중 하나인 X-51을 데려가 아들처럼 교육시켰으며 로봇에게 인간같은 모습을 준비해줬다. 그리고 로봇에게 머신맨이라는 이름을 줬다.
  • 메디나 . . . . 1회 일치
         2016년 7월 4일 저녁(한국 시간 5일 새벽) 한 남성이 메디나에 있는 [[예언자]] [[모스크]] 부근에서 자폭하여, 보안요원 4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우디에서는 같은 날 동부 카디프, 서부 제다 항구도시의 미국 총영사관 부근에서도 자폭 테러가 발생했다. 이는 이슬람 테러 조직 [[이슬람국가]]가 [[라마단]] 기간 동안에 테러를 무슬림들에게 호소한 것에 호응한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예언자 사원을 향하던 남성을 수상하게 여긴 치안 당국자가 제지를 했는데 몸에 두르고 있던 폭발물을 터트려서 테러를 일으켰다고 한다.[[http://www.47news.jp/korean/international_diplomacy/2016/07/141460.html (참조)]]
  • 메일빙 . . . . 1회 일치
         2004년 까지는 17억 건으로 택배보다 적었으나, 2009년에는 51억 건에 달하여 매년 30억 개 정도 취급되는 택배를 능가하는 규모로 배송되고 있다.
  • 명탐정 코난 . . . . 1회 일치
         고교생 [[탐정]] [[쿠도 신이치]]가 우연히 [[검은 조직]]의 약물에 의해 몸이 어려져서 [[에도가와 코난]]이 되어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이야기다. 오랜 연재 중인 장기연재 만화이며 1000회 달성. 높은 인기를 얻어서 일본만이 아닌 한국에서도 큰 인지도를 지니고 있으며 애니메이션과 극장판도 방영하고 있다. 다만 만화에 대한 비판도 있다.
  • 몽고귀신 . . . . 1회 일치
         [[분류:도시전설]][[분류:괴담]][[분류:요괴]][[분류:한국 요괴]]
  • 무료로 책 읽는 사이트 . . . . 1회 일치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 무신 . . . . 1회 일치
         한국의 경우에도 고려시대 무신정권과 무력 쿠데타를 통한 조선 건국의 영향, 그리고 조선 초의 각종 내란으로 인해 무신에 대하여 강하게 견제를 하였고, 이러한 부분이 훗날 임진왜란 당시 초반에 왜군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한 원인이 되었다.
  • 문맹 . . . . 1회 일치
         대한민국은 문맹률이 낮은 편으로 알려져 있으나, 단순히 읽고 쓰는 게 아닌 어떠한 문장 내용을 읽고 뜻을 파악하는 '실질문맹률'이 OECD 최하위권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준 바 있다.[* OECD와 캐나다 통계청에서 만든 IALS(국제성인문해능력조사)를 한국교육개발원에서 번역하여 2001년에 조사한 결과. (다른 OECD 국가는 1994년 ~ 1998년 사이에 조사.)]
  • 문옥주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사람}}
  • 미래소년 코난 . . . . 1회 일치
          * 26화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시청자들 중에는 그 이상의 장편이었다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과거 KBS에서 몇번이나 재방송했기 때문이다. 이러다보니 후에 --달랑-- 26화인 것에 사람들이 놀라기도 했다.
  • 미이라(2017년 영화) . . . . 1회 일치
         개봉일은 2017년 6월 9일이며 한국에서는 2017년 6월 6일.
  • 박경석(1937) . . . . 1회 일치
         1981년 초 민주정의당 대변인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3월 치러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진우(1934)|이진우]] 대신 민주정의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영일군-[[울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한국당]] [[서종렬]]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 박경호 (1949년) . . . . 1회 일치
         * 한국자유총연맹 달성군지부장
  • 박기환(정치인) . . . . 1회 일치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포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의 후신 [[통합민주당(1995년)|통합민주당]]이 [[신한국당]]에 흡수되어 [[한나라당]]이 되자 한나라당에 속하였다.
  • 박부남 (1931년)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사람|의학}}
  • 박소희 (만화가) . . . . 1회 일치
         * [[2009년]] 대한민국 만화대상 인기상(통산 4회 중복 수상)
  • 박술희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사람|군인}}
  • 박준규(1925) . . . . 1회 일치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자민련]] 후보로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한국당]] [[유성환]]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박철언]]과 함께 자민련 내 대구경북세력을 대표했으며,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DJP 연합을 성사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섰는데, 이는 박준규가 1공화국과 2공화국 시절 [[김대중]]과 함께 [[민주당(1955년)|민주당]]에 몸을 담고 친밀한 관계를 맺어온 데 기인한다.~~하지만 김대중은 신파, 박준규는 구파~~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박준규는 여당으로, 김대중은 야당으로 진로를 달리 했지만 인간관계는 계속 유지되었다. 박준규의 활약은 대구경북에서 [[김대중]]의 득표율이 상승하는 데(8.7%에서 13.1%로 상승) 기여했다. 이러한 공로에다 김대중과의 친밀한 관계 덕분에 15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선거에서 공동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의 국회의장 단일후보로 지명되었고, [[경선]]에서 무려 3차 투표까지 간끝에 당시 [[한나라당]]의 반란표가 쏟아져 나오며 국회의장에 당선될 수 있었다. 박준규는 이로써 의정 사상 최초로 국회의장 3선의 고지에 올랐다. 반면 [[한나라당]]은 [[오세응]]이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패배하고 [[조순(1928)|조순]] 총재 이하 지도부 전원이 국회의장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는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 박치기 . . . . 1회 일치
         프로레슬러 [[김일]]이 이걸로 유명했다.
  • 박태준 (작곡가) . . . . 1회 일치
         본관은 [[밀양 박씨|밀양]]이며 호(號)는 귀봉(龜峯)· 산남(山南)· 계산(桂山)이고, 종교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개신교(예장통합)]]이다.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나 [[계성고등학교 (대구)|대구 계성고등보통학교]]를 나온 이후 미국 [[터스컬럼 대학교]]와 [[웨스트민스터 대학교]] 음대 및 대학원을 나왔다. 귀국 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연세대학교]] 종교 음악과를 창설하였으며, 많은 작곡을 하여 한국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예술원 음악공로상과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64년 연세대학교 음대 학장을 지냈다. 작품으로 〈오빠생각〉 〈집 생각〉 〈사우(思友)〉 등 150여 곡이 있고, 동요곡집으로 〈중 중 때때중〉, 가곡집으로 〈박태준 가곡집〉 등이 있다.
  • 박홍 (신부) . . . . 1회 일치
         개신교계에서 최대 이단으로 지목하고 있는 통일교가 주축이된 한국종교협의회는 초종교포럼을 만들어 매년 포럼을 개최하고 있다. 이 초종교포럼은 종교간 대화를 통해 종교간 통일을 모색하는 곳이다. 이 포럼의 1대 초대 강사가 예수회의 박홍신부다.<ref>{{뉴스 인용
  • 박희광 . . . . 1회 일치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 [[분류:구미시 출신 인물]][[분류:1901년 출생]][[분류:1970년 사망]]
  • 방우정 (방송인) . . . . 1회 일치
         {{토막글|방송인|한국 사람}}
  • 방이설화 . . . . 1회 일치
         [[분류:한국 설화]]
  • 배천석 . . . . 1회 일치
         포철공고 재학 시절 U-17 대표팀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였으며, 2011년 6월에는 U-22 대표팀에 선발되어 오만과의 평가전에서 2골을 넣기도 했다.<ref>{{뉴스 인용 |제목=(올림픽 평가전)'배천석 2골' 한국, 오만에 3-1 역전승 |url=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a_match&ctg=news&mod=read&office_id=003&article_id=0003888050 |출판사=뉴시스 |date={{날짜한글화|2011-06-01}} }}</ref>
  • 백계영 . . . . 1회 일치
         [[분류:생몰년 미상]][[분류:고려 사람]][[분류:13세기 한국 사람]][[분류:백씨]][[분류:청도 백씨]][[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고려 백씨]][[분류:무신정권]]
  • 백남억 . . . . 1회 일치
         그 후 1988년부터 1996년까지 [[동부화재|동부화재해상보험]]의 전신인 한국자동차보험 회장을, 1991년부터 5년간 (재)성균관대학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 백이소 . . . . 1회 일치
         [[분류:1557년 태어남]][[분류:1597년 죽음]][[분류:조선의 무신]][[분류:의병]][[분류:의병장]][[분류:조선 의병장]][[분류:임진왜란 의병장]][[분류:정유재란 참전 중 사망자]][[분류:임진왜란 관련자]][[분류:정유재란 관련자]][[분류:16세기 한국 사람]].[[분류:백씨]][[분류:청도 백씨]][[분류:문천회맹]][[분류:경주시 출신 인물]]
  • 벌교 백여우 . . . . 1회 일치
         [[분류:도시전설]][[분류:괴담]][[분류:요괴]][[분류:한국 요괴]]
  • 베타보레 . . . . 1회 일치
         사실 한국 오덕계에서 흔히 쓰는 [[메가데레]]는 실제 일본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말. 일반적으로 상대방에게 홀딱 빠졌다는 표현을 할 때는 베타보레를 쓴다.
  • 보증 . . . . 1회 일치
         일부에서는 보증 제도를 파괴하고자 보증 제도에 대하여 나쁜 프로파간다를 퍼트리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동양 사회의 인간성을 파괴하려는 서구금융자본의 음모라는 의견이 일반적이다. 현실에서는 보증을 서주는 사람을 생각하여, 보증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돈을 갚기 위하여 노력하기 마련이고, 보증 때문에 피해를 입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보증 반대론은 극소수의 예외 사례를 과장하여 말하는 것일 뿐이다.
  • 북한의 역사왜곡 . . . . 1회 일치
         6.25 전쟁을 '''"북한의 승리"라고 주장'''하면서, 7월 27일을 전승절로 기념하고 있다. 이들은 미군과 한국군이 선제 북침을 하였으나, "김일성의 전략으로 미군이 무릎을 꿇고 정전협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kim_chon_ae/seoulpyongyang-08042017101743.html (참조)]]
  • 분류:미국 드라마 . . . . 1회 일치
         [[분류:TV 프로그램]]
  • 분류:일본 드라마 . . . . 1회 일치
         [[분류:TV 프로그램]]
  • 불금 . . . . 1회 일치
         [[분류:한국어]]
  • 블랙기업 . . . . 1회 일치
         이게 일본에서 상당한 이슈를 끌었기에 [[블랙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지금 나는 한계에 도달했는지도 모른다]]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었다. 한국에서도 개봉되었으며, 원작 소설도 "블랙회사"라는 제목으로 정식 발매되었다.
  • 블루 마블 . . . . 1회 일치
         한국전쟁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해병 출신에 뛰어난 과학자다. 연구하다가 실수로 반물질을 만들어서 네거티브 존에 빠지게 되었고, 그 안의 네거티브 존 방사선에 의해 초능력을 얻게 되었다. [[슈퍼맨]]과 비슷한 능력에 [[반물질|반물질 에너지]]를 흡수하거나 조작할 수 있고, 일반적인 상태의 센트리에게 어느정도 대항하는 초음속의 스피드와 93,000톤 가량의 물체를 감당해내는 힘, [[센트리]]를 지구 밖으로 날려보낼 정도로 강력한 능력을 갖춘 초인. 같은 마블 코믹스 캐릭터인 [[하이페리온(마블 코믹스)|히페리온]], 센트리처럼 슈퍼맨과 비슷한 캐릭터.
  • 사갈 . . . . 1회 일치
         한국에서는 별로 쓰이지 않지만, 일본어에서는 비교적 일상적으로 쓰이는 표현이다.
  • 사회 . . . . 1회 일치
         한국에서 사회는 주로 후자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 산바람 . . . . 1회 일치
         한국 [[라이트 노벨]] 작가.
  • 살을 주고 뼈를 친다 . . . . 1회 일치
         한국이나 중국의 고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이며, 일본에서는 '니쿠오키라세테호네오타쓰'(肉を斬らせて骨を斷つ)'라는 표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무사 야마모토 조초(山本常朝, 1659∼1719)의 말을 기록한 책 '하가쿠레'(葉隱)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다. 여기에서는 '피부를 베어내 뼈를 끊는다'[[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09485605&code=61111111&cp=nv (참조)]][* 참고로 하가쿠레는 소위 '무사도 정신'을 체계화 시킨 문헌으로서 '무사도란 죽음에 미치는 것이다'라는 의미의 '시구루이' 역시 이 책에서 나온 것이다.]
  • 생일파티 . . . . 1회 일치
         한국에서는 [[생일빵]]이라는 관습이 있다.
  • 서든어택 2/무기 . . . . 1회 일치
         ||1969년 오스트리아군의 제식 저격소총으로 채용되어 이후 한국의 707특임대를 포함한 세계 각국의 군경에게 널리 사용된 저격소총이다. 그러나 개발된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소총이고, 주력 탄종인 7.62 NATO 역시 신형 탄약이 다수 등장한 현대에 이르러서는 저격총 탄약으로는 다소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사거리와 살상력이 부족한 편이다.||
  • 서명선 . . . . 1회 일치
          | 언어 = [[중세 한국어]]
  • 서울대공원 구미호 . . . . 1회 일치
         [[분류:도시전설]][[분류:괴담]][[분류:요괴]][[분류:한국 요괴]]
  • 서지훈 (1997년)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배우}}
  • 서태식 . . . . 1회 일치
         * 2004년~ 2008년: 한국 공인회계사회 회장
  • 석등보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사람}}
  • 선문답 . . . . 1회 일치
          * (한국어) 주어진 문제와 상관없이, 한가롭게 주고받는 불필요한 이야기.
  • 선원 . . . . 1회 일치
          * [[http://www.koswec.or.kr/|한국선원복지고용센터]]
  • 세종 . . . . 1회 일치
         '''한국사 최고의 먼치킨'''
  • 손민수(희극인) . . . . 1회 일치
         [[분류:한국 코미디언]][[분류:포항시 출신 인물]][[분류:1990년 출생]][[분류:토막글/인물]]
  • 손전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배우|영화 감독}}
  • 손철주 (1954년)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사람}}
  • 손치은 . . . . 1회 일치
         |장=김창숙 - 한국의 '마지막 선비', 그 저항의 한평생
  • 숙녀 . . . . 1회 일치
         [[한국어]]에서 '숙녀'라고 하면 '淑女'이지만, [[일본어]]에서 쥬쿠죠(じゅくじょ)라고 하면 '熟女'. 한자음이 둘 다 똑같이 '숙녀'이기 때문에 혼동하기 쉽지만 의미에는 큰 차이가 있어서….
  • 슈퍼걸(드라마)/1시즌 2화 . . . . 1회 일치
         DEO기지에서 카라와 알렉스는 대화를 나눈다. 알렉스는 카라를 위해서 준비했다며 카라를 DEO에 설치된 방으로 데려간다. 알루라의 모습을 한 홀로그램으로 대화할 수 있는 인공지능 대화 프로그램이 설치된 방이었다.
  • 슈퍼걸(드라마)/1시즌 8화 . . . . 1회 일치
         아스트라는 크립토나이트 나이프로 카라를 위협한다. 아스트라 일당은 크립토나인트 방사능 방어 장치를 만들어서 크립토나이트 나이프에도 문제가 없었다. 아스트라는 카라에게 힘을 합치라고 권유하지만 카라는 거부하고 달아난다. DEO에서 카라는 당장 아스트라와 싸우려고 하지만, 행크와 알렉스는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며 카라를 말린다. 알렉스는 행크는 아버지의 죽음과는 무관하다고 카라에게 말한다.
  • 슈퍼머슬봄버 . . . . 1회 일치
         레슬링게임이었던 전작과는 달리 링아웃, 핀, 4인대전을 없애고 1라인에서 상대방이 쓰러질때까지 1 VS 1로 싸우는 [[대전액션게임]]이 되었다. 하지만 [[프로레슬링]]을 훌륭하게 재현한 전작과는 확연히 다른 게임성으로 수많은 악평을 받으며 순식간에 게임센터에서 철수하고 그 이후로 후속작도 나오지 못하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 슈퍼히어로 . . . . 1회 일치
         ==== 한국 ====
  • 스이츠 . . . . 1회 일치
         스위츠 유행 같은 유행을 주도하는 잡지, TV프로그램에 과도하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러한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모두 받아들이는 여성을 조롱하는 말. 스위츠가 대상이 되는 것은 케이크나 과자라고 하면 좋은데, 굳이 멋을 내려고 스위츠라는 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 스트라테고스 . . . . 1회 일치
         비잔티움 제국에서 스테라테고스는 일반적으로 한 '테마'(주州)의 군사-행정 장관의 지위였으며, [[장군]]이나 [[제독]]으로 번역된다. 스테라토게스는 군사직위의 여러 분야에서 사용되었는데, 아치스테라테고스(archistrategos ,대장군), 프로토스테라테고스(protostrategos , 제1장군)이나 히포스테라테고스(hypostrategos, 하위-장군) 같은 지위가 나타나게 된다.
  • 스틸오션 . . . . 1회 일치
         8.62.4 패치로 러시아어와 한국어가 추가되었다.
  • 스틸오션/영국 . . . . 1회 일치
         >HMS 유니콘은 정비실이 설치된 항공기 수리함 겸 경항공모함이었다. 1943년 3월에 건조된 후, 대잠임무와 훈련임무에 주력해왔다. 1943년 12월, HMS 유니콘과 다른 호위항모 4척으로 구성된 V기동함대는 아발란체 작전(Operation Avalanche)에 투입되었다. 1944년, 태평양으로 보내져 MONAB(Mobile Naval Air Bases)의 창설을 도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잠시 예비역으로 있다 싱가포르에 배치되었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항공기 수송과 영연방 항모 보급 임무를 맡았다. 1953년에는 북한 해안에서 포격 당하기도 했다. 1959년 6월 퇴역하여 해체되었다.
  • 스틸오션/일본 . . . . 1회 일치
         >해대3형(海大三形, Kaidai IIIa) 잠수함은 1922년 당시 워싱턴 해군 조약 하에서 진행되던 8-8 함대 계획의 일부였다. 프로젝트 번호는 S26였다. 해대2형(海大二形, Kaidai II)에 기반을 둔 이 함급은 더 깊은 잠수한계와 추가적인 그물 절단기를 가지고 있었다. 해대3형은 제18전대와 제19전대 소속으로 자바해 전역에 배치되어 일곱척의 상선을 격침시켰다. 모든 해대3형이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 시로우토 동정 . . . . 1회 일치
          * --반댓말은 프로페셔널 동정이다.--
  • 시장경제지위 . . . . 1회 일치
         중국은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였다. 이 때 가입 조건을 놓고 회원국들과 협상을 거쳤는데, 시장경제지위 부여는 WTO 가입 15년 뒤로 연기되었다. 이후 2016년 까지 한국, 러시아, 브라질, 뉴질랜드, 스위스, 호주 등이 시장경제지위를 인정하였으나, 유럽연합, 미국, 일본, 캐나다는 인정하지 않게 된다.
  • 시카고 컵스 . . . . 1회 일치
         미국의 메이저리그 야구팀. 시카고를 연고지로 한다.
  • 식극의 소마/183화 . . . . 1회 일치
          * 정체는 "오미자" 열매. 중국과 한국에서 널리 자생하는 식물로 일본에서도 홋카이도와 혼슈 지방에서 자생한다.
  • 식극의 소마/184화 . . . . 1회 일치
          * 축제기간 중에도 시오미 세미나의 프로젝트는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으며 시오미는 새로운 예산을 따내서 기뻐한다.
  • 식극의 소마/190화 . . . . 1회 일치
          * 이 같은 상황은 당연히 시오미 준에게도 전해진다. 시오미는 당장 센트럴에서 나오라며 하야마를 타이른다. 하야마는 이 방법 말고는 프로젝트를 존속시킬 방법이 없다고 항변하지만 시오미는 어차피 아자미가 그런 걸 허용할 거라는 보장은 없다고 반박한다. 그 말은 사실이었지만 어떻게든 세미나를 유지하고 준을 지키고자 하는 하야마는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다그치던 시오미는 "이런 바보같은 짓을 하길 바라지 않았다"고까지 말하는데, 거기에 상처를 입은 하야마는 어떻게든 세미나를 지키겠다고 고집을 부리게 된다.
  • 식극의 소마/200화 . . . . 1회 일치
          이들은 합류해서 우선은 연대식극이 무엇인가 학생들에게 설명한다. 연대식극은 그저 다대다의 식극이 아니라 "팀워크"가 개입한다. 기본적으론 1대1 승부를 연속으로 치르지만 동료가 시합하고 있을 때 서포트해주는 것이 허용된다. 따라서 팀원들은 서로가 서로의 셰프이며 스테프로 팀워크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 현재 소마 일행 개개인의 역량은 십걸에 미치지 못하나, 이런 팀워크를 발휘하면 십걸을 쓰러뜨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 식극의 소마/216화 . . . . 1회 일치
          * 때는 진급시험이 있기 몇 달 전. 쿄쿠세이 기숙사에선 [[요시노 유키]]가 [[미토 이쿠미]]를 꼬셔서 오리지널 내츄럴 치즈 만들기에 도전한다. 유키에게 설득당한 이쿠미는 "확실히 집에 얘기하면 좋은 원유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만드는 노하우. 그 문제도 유키 나름대로 생각한게 있는데, 바로 발효의 전문가 [[사카키 료코]]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요키가 "언니"라고까지 부르며 달라붙지만 료코도 자기 프로젝트가 있어서 정신없이 바쁘다. 새로운 일본주 만들기에 도전 중인데 [[마루이 젠지]]까지 참가 중이라 파리한 몰골로 돌아다니고 있다. 료코는 포기하고 둘이서 어떻게 해보자고 제안하는 유키.
  • 식극의 소마/217화 . . . . 1회 일치
          언뜻 보기엔 벗겨지지 않고 양호한 패배 같지만 [[아헤가오|얼굴이 심의상 보여주기 어려운 형태]]다. 어쨌든 불쌍해서 공개하는 프로필.
  • 식극의 소마/228화 . . . . 1회 일치
          병아리콩은 물에 삶아서 준비하고 아티쵸크와 아스파라거스는 손질해서 슬라이스로 썬 뒤 버터로 소테한다. 살짝 익으면 각각 조합된 차와 함께 푸드 프로세서로 퓌레 제작. 마지막엔 버터와 후추소금으로 간을 해서 크넬 모양으로 장식. 거기에 함께 나온 카푸치노 스프를 곁들여 먹으면 맛의 그라데이션이 놀랍도록 깊어진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졌던 퓌레의 맛이 한데 모여 부드럽게 연결되는 풍미.
  • 식극의 소마/229화 . . . . 1회 일치
          그리고 제 3카드. 모든 과자의 스페셜 프로페셔널 아카네가쿠보 모모. 이에 맞서는 반역자의 출전자는 역시 타도코로 메구미. 카와시마는 메구미를 "명백히 버리는 카드"라며 평가절하했다. 관중의 여론도 비슷. 메구미 또한 가을 선발 때 베스트 8까지 갔던 인재건만 매우 평가가 박하다. 그녀에겐 아직도 "만년 낙제생"이미지가 따라다니고 있었고 사실 지금까지 거명된 라인업 중에선 가장 약체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거의 야유가 퍼부어지는 이런 상황에서도 메구미는 평소에 보이지 않던 담대한 태도를 보였다. 허둥거리지만 않으면 된다고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믿는 구석이라면 있었다. 레분 섬 결전이 시작되기 전 [[사이바 죠이치로]]와 [[도지마 긴]]이라는 양대 일류 셰프에게 특훈을 받은 바가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그녀를 안심시켜주는 훈련이 한 가지 더 있었다.
  • 신동호 (아나운서) . . . . 1회 일치
         * 2001년 한국방송대상 아나운서상
  • 신수항 (배우)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배우}}
  • 신웅 . . . . 1회 일치
         '''신경식'''(1953년 11월 30일 ~ )은 예명 '''신웅'''으로 잘 알려진 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이다. 아들은 가수 [[신유 (1982년)|신유]]이다. 현재는 아들인 신유의 프로듀서 겸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ref name="신웅">{{웹 인용|url=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495486.html|제목=뽕짝뽕짝~우리의 노래는 멈추지 않는다|웹사이트=[[한겨레]]|날짜=2011년 9월 8일}}</ref> 비공식 집계로 3,000만장의 음반을 판매하였다.<ref name="신웅"/>
  • 신은정 . . . . 1회 일치
         * [[2009년]] 《[[불신지옥]]》 ... 태환 처 역
  • 신지훈(배우) . . . . 1회 일치
         [[분류:한국 남배우]][[분류:모델]][[분류:중구(대전) 출신 인물]]
  • 신현준(군인) . . . . 1회 일치
         [[분류:일본군/조선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한국전쟁/군인]][[분류:대한민국의 군인]][[분류:김천시 출신 인물]][[분류:1915년 출생]][[분류:2007년 사망]]
  • 심판 . . . . 1회 일치
         직접 경기를 뛰는 것은 아니지만, 경기 내내 선수와 함께 하면서 플레이의 흐름을 파악해야 하므로 상당한 고충을 겪는다. [[축구]] 같은 경우는 경기시간 내내 내내 공을 쫓아다니며 뛰어야 하고, [[야구]] 같은 경우에는 공이나 방망이에 타격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 씽(마블 코믹스) . . . . 1회 일치
          * 의외로 [[말장난]]을 자주 하는 편. 자기 자신을 말할 때에는 '그림 여사의 푸른 눈 소년'이라든지, '피튜니아 고모의 사랑스런 조카' 같이 빙 둘러서 이야기 하는 말이 많고, 주로 하는 'It's clobberin time'을[* 여담으로 WWE소속 프로레슬러 [[CM 펑크]]가 등장 시 외치는 대사도 여기서 따왔다.] 가지고도 말장난을 하며, [[휴먼 토치]] II는 그 말장난에 자주 맞장구를 쳐주고 [[스파이더맨]]과는 서로 자기 유머가 더 잘났다고 싸우고 있다. 《[[월드 워 헐크]]》에서는 [[센트리]]의 힘에 대해 '폭발하는 100만 개의 태양'이라 말장난을 했는데, 여기에 낚여 센트리 최강론을 미는 사람들도 있다(...).
  • 아기발도 . . . . 1회 일치
         [[분류:한국사]]
  • 아기발도 우투리 관련설 . . . . 1회 일치
         [[분류:가설]][[분류:한국설화]]
  • 아니키 . . . . 1회 일치
          * 야구계에서는 [[한신 타이거즈]]의 카네모토 토모아키(金本知憲)의 별명이다.
  • 아마조 . . . . 1회 일치
         [[프로페서 아이보]]가 만든 안드로이드. 저스티스 리그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그만큼 강력하다.
  • 아웃 오브 안중 . . . . 1회 일치
         해당 장면을 계기로 한일 양국에서 일종의 [[밈]]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한국에서는 이걸 더 축약하여 '아오안'으로까지 불리게 되며 널리 퍼지게 된다.
  • 아타리야 . . . . 1회 일치
          * [[야구]]에서 [[안타]]를 잘 치는 선수.
  • 암살교실/번외편 1화 . . . . 1회 일치
         지난 겨울 방학 중의 에피소드. 실패했던 프로 암살자들이 살생님의 거처를 찾아나선다.
  • 야간전투기 . . . . 1회 일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이더의 발달과 함께 등장했다. 한국전쟁 이후 레이더가 발달하여 모든 전투기에 탑재가 가능해지면서 시대를 거쳐서 자연히 사라졌다.
  • 야리만 . . . . 1회 일치
         한국 속어에서 비슷한걸 찾자면 '걸레'와 비슷한 등급의 단어이다.
  • 어머니의 날 . . . . 1회 일치
         기념일의 하나. 어머니를 기념하는 날이다. 한국에서는 [[어버이날]]에 해당한다.
  • 어쌔신 크리드 III . . . . 1회 일치
         [[http://assassinscreed.wikia.com/wiki/Assassin%27s_Creed_Wiki|어쌔신 크리드 위키]] - 한국판은 번역된 양이 많지 않다.
  • 어쌔신 크리드 III/등장인물 . . . . 1회 일치
          * 벤자민 톨마지(Benjamin Tallmadge[* 한국어 표기가 오락가락하다. 제대로 아는 사람이 추가 바람.])
  • 어쌔신 크리드 III/부가요소 . . . . 1회 일치
         NPC를 상대로 벌이는 보드게임. 지도에서는 주사위로 표시된다. 죄다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한 게임이라 큰 고통을 안겨주는 물건들. 메인 스토리 상 꼭 해야하는 경우도 있다. 시-발.
  • 여자력 . . . . 1회 일치
         2009년 신어, 유행어 대상에 선정된 단어.
  • 연소조 연중조 연장조 . . . . 1회 일치
         [[일본]]에서 [[유치원]], [[보육원] 등에서 아이들을 나이대에 따라서 나누는 '반'의 이름.(조는 한국에서는 반이라는 의미)
  • 연초아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사람}}
  • 연하장 . . . . 1회 일치
         우편제도가 등장하자 우정국에서 연하장을 발매하게 되었다. 최초의 연하장은 1900년에 발매되었으며, 전통의상을 걸친 우정국 관리들의 모습을 컬러 인쇄하고, '신년을 맞이하여 한국 황실과 우정국의 임직원들은 여러분들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냅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 영창대군 . . . . 1회 일치
         그렇다고 인조가 순순히 어리고 세력도 없는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줄 사람도 아니고, 인조 역시 선조, 광해군처럼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한 인간이다. --그러니까 쿠데타 했지.--[* 인조가 쿠데타에 가담한 데에는, 동생인 능창군이 도참 때문에 사사당하여 본인 또한 생명의 위협을 겪고 있던 부분도 한몫했다.] 인조는 '죽은 영창대군'을 광해군의 잔혹함과 패륜성을 강조하는 프로파간다로서 편리하게 이용해 먹을 수 있지만, 정통성이 부족한 인조에게 강력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살아있는 영창대군'은 매우 귀찮은 애물단지에 불과하다. 거기에다 인조 시기의 대신들 간의 권력 다툼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정국 불안을 증대시킬 우려 또한 높았다. (예를 들어 이괄의 난 때, 이괄이 흥안군 따위가 아닌 영창대군을 옹립하기라도 했다면...)
  • 오경태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사람|정치인}}
  • 오니요메 . . . . 1회 일치
          * 여자 [[프로레슬러]] 호쿠토 아키라(北斗晶)가 오니요메 캐릭터로서 인기를 얻었다.
  • 오방낭 . . . . 1회 일치
         한국 무속에 쓰이는 물건. 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오방색]] 비단으로 만든 복주머니이다.
  • 오싱 . . . . 1회 일치
         1983년~1984년에 방영된 NHK드라마. 평균 시청률 52.6%로 대흥행작이다. 일본 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의 여러 나라에 수출되었다. 물론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전이므로 한국에는 수출되지 않았다. 다만 소설판이 출간되기는 했다.
  • 오은석 . . . . 1회 일치
         '''오은석'''(吳恩錫, [[1983년]] [[4월 2일]] ~ )은 [[대한민국]]의 [[펜싱]] 선수이다. [[런던]]에서 열린 [[2012년 하계 올림픽]]에서 [[구본길]], [[김정환 (펜싱 선수)|김정환]], [[원우영]]과 함께 단체전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대한민국 펜싱 역사상 처음으로 나온 단체전 금메달이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392494 '14초의 찌르기' 오은석, 金 찌른 비장의 '히든카드'], OSEN, 2012년 8월 4일.</ref> [[한국방송공사|KBS]]의 리듬체조 해설가인 [[김윤희 (체조 선수)|김윤희]]와는 부부관계이다.
  • 오하라이 . . . . 1회 일치
         [[일본]] [[신도]]의 주술 의식. 재앙이나 부정을 씻어내고 퇴치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국 무속의 [[굿]]과 비슷하며, 굿으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
  • 왓치맨 . . . . 1회 일치
         국내에서는 [[시공사]]의 정식 한국어판이 판매중이다.
  • 왝더독/줄거리 . . . . 1회 일치
         며칠이 지난 후, 영화 프로듀서 스탠리 모스가 자택에서 일광욕 중 사망했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이후 알바니아에서 테러가 발생했다는 뉴스와 함께 영화가 끝난다.
  • 외도 . . . . 1회 일치
          * (한국어) 불륜. 남편이나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하고 성관계를 맺는 것. 여담으로 일본인들에게 '불륜은 외도 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외도라고 할 정도로 사악하게 느껴지는 행위까지는 아닌 모양이다(…).[[http://ayiva.sakura.ne.jp/doc/gedou/dic/ptalk-korean.html (참조)]]
  • 요괴:니코니코니 . . . . 1회 일치
         2010년 무렵 일본에서 나타났다고 하는 요괴의 일종. 한국 등을 거쳐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 요괴:닭둘기 . . . . 1회 일치
         한국에서 1988년에 서울 올림픽을 열면서 [[비둘기]]를 널리 풀어놓았는데, 이 때 몇몇 비둘기가 성화의 불에 타 죽어서 그 원념이 닭둘기로 승화하여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다.
  • 요괴:파워블로거지 . . . . 1회 일치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 출몰했다고 알려진 요괴.
  • 우라 게시판 . . . . 1회 일치
         한국의 인터넷 환경에서는 DC 인사이드의 학교 갤러리나, [[대나무숲]]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
  • 우치벤케이 . . . . 1회 일치
          * 한국에서는 '방구석 [[여포]]'라는 말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 운제부인 . . . . 1회 일치
         [[분류:신라 사람]][[분류:신라의 왕비]][[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한국 신화]][[분류:전설]][[분류:경주 이씨]]
  • 울산광역시/인물 . . . . 1회 일치
         * [[정주현(야구선수)|정주현]] - 남구(울산)
  • 울펜슈타인 : 뉴오더 . . . . 1회 일치
          * 프로토타입 로봇(Prototype Robot)
  • 원피스/823화 . . . . 1회 일치
          * 프로덴스 왕구도 참석.
  • 원피스/840화 . . . . 1회 일치
          * 강하고 온순한데다 배신하지 못하게 프로그램된 이 병사들 여러 나라에서 탐내고 있다.
  • 원피스/847화 . . . . 1회 일치
          * 미러월드 안에 있는 샬롯 브륄레의 집. 캐럿과 쵸파는 결국 잡혔다. 브륄레는 캐럿을 토끼 수프로 만들려고 한다. 언제 들어온 건지 학기사 랜돌프와 유혹의 숲에 있던 악어도 동석. 악어는 본래 자신은 인간은 먹지 않지만 밍크족은 어찌어찌 될 거 같다며 식사를 고대하고 있다. 쵸파가 진자 토끼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항변하자 악어가 망설이는데, 브륄레는 쵸파더러 빅맘의 "컬랙션"에 들어갈 거라며 입다물고 있으라고 조롱한다.
  • 원피스/857화 . . . . 1회 일치
          나미는 독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일단은 잊겠다"며 한 발 물러나며 반드시 돌아와달라고 말한다. 그러자 죽어가는 것 같았던 상디가 "그건 프로포즈냐"며 거의 원상태로돌아온다. 루피는 마침 자신도 [[빈스모크 레이쥬]]에게 해독을 받은 일을 언급하고 일행은 빈스모크 일가를 꼭 구하기로 결정한다.
  • 원피스/859화 . . . . 1회 일치
          * 9층 빅맘의 침실에선 빅맘이 가벼운 발작을 일으킨다. 병사들이 혼비백산해서 가보니 브룩이 가짜로 바꿔치기 된 걸 눈치 못채고 "해골이 죽어버렸다"고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가 "오늘은 다과회"라고 달래자 웨딩케이크를 떠올리곤 급빵긋한다. 병사들은 온 김에 "모건즈"란 사람이 손님으로 도착했다는 소식과 다른 내빈들의 도착을 알린다.
  • 원피스/861화 . . . . 1회 일치
          * 이윽고 빵빠레가 울리며 오늘의 메인 이벤트가 시작된다. 사회자의 선언에 따라 프로메테우스가 신랑신부를 태운 거대한 찻잔을 이고 하늘에서 내려온다. 사회자는 이걸로 제르마와 빅맘 해적단이라는 악의 양가가 이어져 "세계에 악의 꽃이 미친듯이 피어나게 하리라"고 선언한다. 신랑신부를 축복하는 갈채와 환호가 어지럽게 폭발한다. 저지는 자신의 야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바라보며 웃고, 빅맘은 남몰래 그런 저지를 번뜩이는 눈으로 노려본다.
  • 원피스/868화 . . . . 1회 일치
          * 빅맘은 몰랐지만 그 사건엔 목격자가 있었고 그것도 둘 씩이나 됐다. 그들은 빅맘도 인식하지 못한 부분까지 모든 걸 목격했다. 우선 한 사람은 엘바프의 전사. 그는 양의 집과 카르멜이 신경 쓰여서 보러오던 길에 그 사건을 목격했다. 그 터무니없는 광경이라니. 그는 차마 양의 집에 와보지도 못하고 그 길로 섬을 떠났다. 엘바프로 돌아간 그는 사건의 전모를 전파했고 [[원피스/867화|이전의 사건]]에 더해서 빅맘은 거인족들에겐 그야말로 혐오스러운 존재로 낙인 찍혔다.
  • 원피스/870화 . . . . 1회 일치
          * 빅맘은 선물꾸러미가 열린 것처럼 좋아라하며 "프로메테우스"로 "헤븐리 파이어"를 갈긴다. 시저는 살기 위해 벳지를 데리고 무조건 날아오른다. 격렬한 불길이 그들의 퇴로를 지키는 빈스모크 형제들에게 쏟아진다. 레이쥬가 그 불길에 견디지 못하고 휘청거린다. [[빈스모크 니디]]가 그녀를 걱정하지만 [[빈스모크 이치디]]는 "약한게 죄"라 일축하며 임무에 집중하라 한다. 레이쥬도 "귀염성 없는 동생"에 툴툴대며 어쨌든 다시 일어선다. 이번엔 빅맘이 "제우스"를 집어든다. 이번에도 레이쥬가 견뎌낼 수 있을까?
  • 원피스/876화 . . . . 1회 일치
          * 상태가 회복된 "프로메테우스"는 제정신으로 돌아온 "제우스"를 닥달하고 있었다. 어째서 자기들까지 말려들게 했냐고 꾸짖자 제우스는 자기 뜻이 아니었다고 시무룩해했다. 조금은 반성하는 것 같더니만 금방 "그 구름 알 맛있었다"고 군침을 흘리는 걸 보니 전혀 정신을 못차렸다. 하긴 그 주인도 웨딩 케이크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판이었다.
  • 월드 인 컨플릭트/줄거리 . . . . 1회 일치
         헬리콥터가 도착한 곳은 인근 지역 모두를 볼 수 있는 48번 고지였다. 이곳 역시 민병대가 차지하고 있었기에 로마노프가 이들을 처리해야 했다. 전투 도중 레베디예프로부터 미군 제4기갑기병연대가 접근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올로프스키는 자신들이 소규모 민병대 이상의 무언가를 상대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노프는 언덕을 확보해 민병대의 공격으로부터 지켜낸다.
  • 유기농 . . . . 1회 일치
         현재 한국에서 유기농 제품은 (1) 3년 이상(다년생작물, 그외 작물은 2년) 화학비료/농약을 사용하지 않은 논/밭에서 재배되어야 함 (2) 농수산식품부에서 인정한 인증기관에서 인증을 받아야 함 이라는 두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http://hyunsoolim.com/eco-friendly/holes-of-organic-food/ 참조]
  • 유토리 . . . . 1회 일치
          * 한국에서는 '유두리', '유두리가 있게'라는 속어로 쓰인다.
  • 윤철종 . . . . 1회 일치
         그 후 2010년 5월 민트 페이퍼 프로젝트 3집 앨범 <Life>의 수록곡인 <오늘 밤은 어둠이 무서워요>로 참여. 이 곡이 그럭저럭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다가, 2010년 8월 발매한 디지털 싱글 ''''아메리카노''''가 제대로 대박을 터뜨려서[* 2010년 [[GMF]]에서는 관중들이 이 곡을 [[떼창]]했다.] 여자들이 이름만 들어도 열광하는 가수로 급부상하게 된다.[* 사실 공연에서만 들을 수 있는, 앨범화가 되지 않은 노래들이 많다. '''녹음하기 귀찮아서.'''] 이때 아메리카노로 [[뮤직뱅크]] 최고 순위 7위에 든 적도 있다.
  • 윤흔 . . . . 1회 일치
         * [http://koreandb.nate.com/history/bang/detail?sn=4502 윤양:네이트 한국학]
  • 은혼/637화 . . . . 1회 일치
          * 킨타마 꼬치가 되게 생긴 마나카가 "걍 한 번 싸웠을 뿐인데 진지하게 군다"면서 죄다 엉덩이 가볍게 생겨가지고 의외로 청순파였다고 대꾸한다. 가구라는 이것도 불편해하면서 프로불편러 츳코미역으로 각성한다.
  • 이나경(배우) . . . . 1회 일치
         | 활동기간 = [[2009년]] ~ 현재
  • 이명주 (축구선수) . . . . 1회 일치
         2013년에는 시즌 내내 에이스로 활약하며 [[포항 스틸러스|포항]]이 국내 최초로 [[더블 (축구)|더블]], 즉, [[K리그 클래식 2013|K리그 클래식]] 우승과 [[FA컵 2013|FA컵]] 우승을 이루어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러한 활약을 인정 받아 프로 데뷔 2년차에 연말 시상식에서 MVP 후보에 올랐으나 아쉽게 수상을 놓쳤고, 그 해 [[K리그 베스트 11|K리그 클래식 베스트 11]] 미드필더 부문에 선정되었다.
  • 이민아 (축구선수) . . . . 1회 일치
         * [[2012년 키프로스컵]] 국가대표
  • 이민헌 . . . . 1회 일치
         * 한국방송광고공사 관리이사
  • 이사강 . . . . 1회 일치
         * 2009년 [[2AM]] - 친구의 고백
  • 이산하(시인) . . . . 1회 일치
         1987년 3월에는 「녹두비평」이라는 잡지에 [[제주 4.3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한라산>이라는 장편서사시를 발표했다가 [[필화]]를 겪었다. 그는 [[4.3]]을 접하면서 4.3 피해자 증언을 채록한 자료집 <제주도 피의 투쟁사>[* 사실 이 책은 [[좌익]]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김봉현이라는 사람이 쓴 것이었다. 사실 4.3에 대한 탄압이 극심했던지라 이런 자료들을 접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를 출판사를 통해 비밀리에 접하고 이를 토대로 시를 썼다. 하지만 상당히 전위적이고 강력한 표현[* 시에서 드러나는 [[반미]]적 표현과 [[빨치산]]을 미화하는 듯한 표현들로 인해 진보적 성향의 작가와 평론가들도 그를 위해 증언하는 것을 주저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산하는 '진보의 기회주의자'라는 표현을 쓰며 그들에게 섭섭함을 나타냈다.] 때문에 그는 결국 1년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한편 그는 '''"문학에서 [[표현의 자유]]와 [[반공주의|반공 이데올로기]]와의 [[마지노선]]은 어디까지인가"'''를 고민하다가 "[[가즈아|던지자]]"고 결론을 내리고는 [[항소이유서]]에 [[김일성 장군의 노래]](...) 1,2절을 그대로 적어냈다고 한다. 그러자 [[변호사]]는 물론이고 [[법원]]과 [[검찰]]마저 발칵 뒤집어져, 당시 담당 [[검사(법조인)|검사]]였던 [[황교안]]은 '''"영원히 콩밥 먹게 해주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외면받았지만 국외에서는 이산하에 대한 구명운동이 있었다. 대표적인 관련 인사가 미국 펜클럽 회장이자 <[[타인의 고통]]>의 저자인 [[수전 손택]] 여사였다. 그녀는 1988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를 투옥시킨 [[노태우]] 정부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결국 이 일로 그는 10여년 동안 절필한다.
  • 이상휘 . . . . 1회 일치
         [[2009년]] 3월에 [[이명박정부]]로부터 [[청와대]] 춘추관 관장 및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으로 임명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친이|친이계]]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2012년]]에는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포항 북 지역구로 공천을 신청했으나 [[친박계]]에 의해 공천에서 탈락했다. 이후 [[2014년]]에는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2016년]]에는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을 앞두고 [[새누리당]]에서 공천을 받아 [[동작구 갑]]으로 출마했지만 국정원장이었던 [[더불어민주당]] 소속 [[김병기(정치인)|김병기]]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이후 같은 해 10월에는 [[이정현(정치인)|이정현]] 대표에 의해 새누리당 원외대변인으로 임명되었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 대변인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비박]]계 모임인 [[비상시국회의]]에 참여했다.
  • 이선미 (소설가) . . . . 1회 일치
         경성스캔들의 원작소설 경성애사가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을 표절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성애사의 이선미는 한국 로맨스 소설 작가협회 사이트 게시판에서 사과글을 게재하였다.<ref>[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0712270005&md=20100404183309_AN ‘경성스캔들’ 원작자의 표절, 인터넷 퍼오기 문화의 폐해] 헤럴드경제 10-04-04</ref>
  • 이숭인 . . . . 1회 일치
         '''이숭인'''(李崇仁, [[1347년]]~[[1392년]] [[9월 10일]]([[음력 8월 23일]]))은 [[고려]] 말의 시인, 대학자이다. 호는 도은(陶隱), 자는 자안(子安), 본관은 성주이며, [[길재]] 대신 [[삼은]]으로 꼽히기도 한다.<ref name="역대"> [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8514&pTotalSearchCount=1&pPosition=0&pRecordId=00500050004C005F00350043004F0063005F00410031003300340037005F0031005F0030003000300039003900300032&pName=C774C22DC7780028674E5D074EC10029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ref> [[포은 정몽주]]의 문하생이었다. 권신 [[이인임]]의 5촌 조카였다.
  • 이승현 (1985년 7월) . . . . 1회 일치
         [[2009년]] [[8월 12일]]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파라과이]]와의 친선경기에서 [[A매치]]에 데뷔하였다.
  • 이시영 (1882년) . . . . 1회 일치
         [[분류:1882년 태어남]][[분류:1919년 죽음]][[분류:옥사한 사람]][[분류:병사한 사람]][[분류:조선 사람]][[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경주 이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이영 (1494년) . . . . 1회 일치
         [[분류:1494년 태어남]][[분류:조선의 무신]][[분류:1563년 죽음]][[분류:조선의 군인]][[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육군 군인]][[분류:병마절도사]][[분류:병사한 사람]][[분류:영천 이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국의 장군]]
  • 이웃집 잔디는 푸르게 보인다 . . . . 1회 일치
         비슷한 한국 속담으로는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가 있다.
  • 이원석(1981년)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배우}}
  • 이은혜 (레이싱모델)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사람}}
  • 이인민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사람}}
  • 이정우 (1950년)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사람}}
  • 이제석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사람}}
  • 이종원 (1953년) . . . . 1회 일치
         '''이종원'''(李鍾元, Lee Jong Wong、[[1953년]] ~ )은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의 [[정치학자]]이다.
  • 이종진 . . . . 1회 일치
         || '''소속 정당''' || [[새누리당|자유한국당]] ||
  • 이준섭(가수) . . . . 1회 일치
         [[분류:한국 가수]][[분류:세종특별자치시 출신 인물]]
  • 이평 (1572년)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사람|조선}}
  • 일곱개의 대죄/176화 . . . . 1회 일치
          * 엘레인이 "나에게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다"고 하자 그 길로 길프로스트에게 부탁해 순간이동한다.
  • 일곱개의 대죄/177화 . . . . 1회 일치
          * 엘리자베스는 길프로스트에게 부탁해 멜리오다스가 쓰러진 현장에 도착한다.
  • 일곱개의 대죄/221화 . . . . 1회 일치
          * 봉우리 뒤편의 언덕에서 불청객이 기어나왔다. [[반(일곱 개의 대죄)|반]]과 할리퀸이 슬금슬금 일어나더니 "무슨 짓을 저질렀냐"고 은근히 힐난했다. 분명 엿듣고 있던게 분명하다. 둘은 사랑싸움이냐느니, 왕녀가 울고 있던거 같다느니 쓸데없이 참견해온다. 멜리오다스가 여긴 왠 일이냐고 묻자 반이 "킹이 요정 주제에 프로포즈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다"고 대꾸했다. 혹시 전부 들었냐고 묻자 둘은 전혀 아니라고 답했지만 반이 곧바로 "사랑 싸움의 원인은 뭐냐"고 짖궂은 얼굴로 물었다. 요즘 연애를 시작했다고 너무 기가 산 할리퀸 쪽도 "여자 마음을 좀 더 공부해야 한다"고 거들먹거린다. 부하들의 따뜻한 관심에 감격한 단장.
  • 임진숙 . . . . 1회 일치
         [[분류:1964년 태어남]][[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대구여자고등학교 동문]][[분류:대구대학교 동문]][[분류:한국방송공사의 아나운서]][[분류:살아있는 사람]]
  • 장문규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배우}}
  • 장영 (조선)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사람}}
  • 장우석 . . . . 1회 일치
         [[2004년]] 대구 평화영화제를 시작으로 대구 5.18영화제, 앞산달빛 마을영화제, [[영남대학교]] 북한영화제 등 여러 지역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를 지냈다.<ref>[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50515.010350815480001 장우석 독립영화 감독·물레책방 대표, 10월항쟁·위안부 할머니 관련 다큐 제작], 《영남일보》, 2015.5.15.</ref>
  • 장철 (1967년) . . . . 1회 일치
         * 한국경제TV 《뉴스 엔 이슈 시사토크》
  • 쟈이안 . . . . 1회 일치
         [[도라에몽]]의 등장인물. 한국명 '''퉁퉁이'''.
  • 저그 . . . . 1회 일치
         엄청난 물량전이 특기인 우주 괴물들. 다른 종족을 흡수하고, 자기식대로 만들어서 쓴다. [[테란]]과 [[프로토스]] 두 종족에게 피를 보게 만든 포지션.
  • 전라북도/인물 . . . . 1회 일치
         순창군 - [[김동진(프로게이머)|김동진]] [[고경표]] [[고소영]] [[성시경]] [[박경림]] [[임현식]]
  • 전순옥 . . . . 1회 일치
         * 2006.06 ~ 2012.03 : 한국패션봉제아카데미 대표이사
  • 절대가련 칠드런/434화 . . . . 1회 일치
          * 테오도르는 조직이 실패한 클론 칠드런 프로젝트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넣는다고 보스를 추궁한다
  • 절대가련 칠드런/463화 . . . . 1회 일치
          * 사카키가 이들을 보고 동요하지만 효부는 방법이 있다며 진정시킨다. [[아카시 카오루]]가 먼저 선글라스를 벗으며 주위를 끈다. 시호와 [[노가미 아오이]]도 다른 사람들은 신경 쓸 것 없다며 얼버무리는데 더블 페이스는 이 분야의 프로. 셋에게 신경을 빼앗기기 않고 곧바로 나머지 인원의 투시를 하려 한다. 유리가 더 강한 최면을 걸어보려고 하지만 단숨에 눈치채버린다. 모두 당황하는데 효부는 "마음의 가드를 깨면 된다"고 조언하는데.
  • 절대가련 칠드런/465화 . . . . 1회 일치
          * 그때 빔 프로젝트가 전개되면서 [[길리엄(절대가련 칠드런)|길리엄]]의 영상이 나타난다. 그는 이 상황이야 말로 자신이 원하던 것이라며 기분 나쁜 웃음을 띈다. 그는 지금부터가 특히 재미있는 장면이고 효부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하는데.
  • 절대가련 칠드런/466화 . . . . 1회 일치
          * 그때 마츠카제가 ECCM이 자동재조정되었다며 초능력이 작동한다고 외친다. 길리엄은 너무 늦었다고 비웃으며 말을 이으려하는데 카오루가 길리엄의 영상을 전송하던 프로젝트를 박살내 버린다.
  • 정승화(육군) . . . . 1회 일치
          * 세간에서는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 사건([[12.12 사태]])과 관련지어 정승화 장군을 기억하지만, 원래 군부에서 기억하는 정승화는, 휘하 장병들의 '''사격술 향상에 매우 공을 들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정승화 장군이 거쳐간 부대는 사격자세라던가, 격발 등 [[사격]] 기본이 탄탄하게 갖춰졌다는 참군인 중의 군인이라는 후문.
  • 정재안 . . . . 1회 일치
         [[성공회대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전공을 하였다. 현재는 [[새정치민주연합 서울시당 직능위원회 부위원장]]이며, 또한 한국재활용산업 발전을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 정재호 (1964년) . . . . 1회 일치
         |경력 = [[한국외환은행]] 신용카드사 노조위원장<br />[[노무현]]대통령후보 정무보좌역<br />[[참여정부]] (대한민국, 2003년~2007년) [[대통령비서실]] 정무기획비서관실 행정관, 시민사회수석실 선임행정관, 사회조정비서관, [[국무총리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br />
  • 정좌관심 . . . . 1회 일치
         정좌관심은 간화선과 같이 한 순간에 얻어지는 깨달음(돈오돈수)가 아니라 독서와 병행한 '점진적'인 깨달음(돈오점수)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중국이나 한국 불교에서 주류가 되는 [[간화선]]보다는 이후 불교계에서 쇠퇴하여 사라지는 [[묵조선]]과 유사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 정진욱(코미디언) . . . . 1회 일치
         [[분류:세종특별자치시 출신 인물]][[분류:한국 남성 코미디언]][[분류:1983년 출생]]
  • 정차온 . . . . 1회 일치
         {{토막글|한국 사람|조선}}
  • 제303전투비행중대 . . . . 1회 일치
         폴란드 공군의 [[MiG-29]] 중에는 [[https://youtu.be/15lrGI3DT8w|303비행대대의 부대마크가 등짝에 크게 그려진 기체]]도 있다. [[https://theaviationist.com/2013/05/27/mig29-special-polish/|이 기사]]에 따르면 2009년 부터 저런 도색을 사용했다고.
  • 제령 . . . . 1회 일치
         나쁜 영적 존재를 쫓아낸다는 뜻. 일본 오컬트 계통에서 자주 쓰이는 말이며, 한국에서는 그리 자주 쓰이는 말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신토 의식인 [[오하라이]]가 있다.
  • 젠 멘 . . . . 1회 일치
         DC의 경쟁사인 [[마블 코믹스]]의 [[엑스멘]] [[패러디]] 팀. '[[닥터 다이하드]](Dr. Diehard)'가 이끄는 메타휴먼 팀인데 닥터 다이하드는 [[프로페서X]] + [[매그니토]]에 젠 멘 스쿨이란 시설도 있다. 멤버들 중에도 사이클롭스나 울버린을 닮은 캐릭터 등 엑스멘을 알고 있는 독자는 한번쯤 봐봤을 얼굴이 보인다.
  • 조선 인민의 철천지 원쑤인 미제 침략자들을 소멸하라! . . . . 1회 일치
         [[조선인민군]] 차량 정면에 자주 써져있는 [[프로파간다]]성 글귀. 별 가치는 없다.
  • 존 딜린저 . . . . 1회 일치
         존 딜린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로 2009년 개봉한 [[퍼블릭 에너미]]가 있다.
  • 존 웨스트 . . . . 1회 일치
         홈페이지에서 요리 레시피를 알려주기도 하니 참고해보자. 한국인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는데.
  • 주장환 . . . . 1회 일치
         '''주장환'''(1957년 1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신문기자, [[소설가]]이다. 서울신문(스포츠서울) 세계일보 기자를 거쳐 파이낸셜뉴스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중소기업사랑 청소년글짓기 공모전 심사위원장, 대한민국장애인예술대상 문학부문 심사위원, 충효예실천운동 본부 상임위원,부총재 [[731부대]] 한국인 희생자 진상규명위원회 대변인을 거쳐 [[극동대학교]] 겸임교수를 지냈다. 하버드대학 Literati China 과정 수료. 월간조선 객원기자
  • 죽으면 부처님 . . . . 1회 일치
         이는 정치적 문제와 연결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야스쿠니 신사 문제에서 "일본에서는 죽으면 부처님. 그러니까 A급 전범 합사도 용인된다."는 식으로, 외국의 비판을 '문화적 차이'라고 실드치고 넘어가려는 움직임을 우익 논객들이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는 "한국이나 중국은 죽은 사람을 언제까지나 비난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문화차별적 주장도 곁들여진다.
  • 지소 . . . . 1회 일치
         비하적인 의미가 강하며, 한국의 인터넷 속어로는 '애자'와 비슷한 뜻이다. 물론 이런 속어들이 그렇듯이, 멍청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도 쓰이는 말이 되었다.
  • 진유현 . . . . 1회 일치
         [[분류:198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국방송공사의 아나운서]][[분류:경신고등학교 (대구) 동문]]
  • 진헌식 . . . . 1회 일치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충청남도 연기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무소속 이긍종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1년 12월부터 1952년 8월까지 관선 [[충청남도지사]]를 지냈다. 충청남도지사 임기 중이던 1952년 5월부터 1952년 8월까지 [[충남대학교]] [[총장]] [[서리]]를 [[충남대학교/역사|겸직하였다]]. 이어서 1952년 8월부터 1953년 5월까지 내무부(현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냈다가 [[곡물]] 관리상의 문제로 경질되고 구속되었다가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류지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 참군인 . . . . 1회 일치
         [[분류:한국어]]
  • 창작:6피트 계획 . . . . 1회 일치
         || 프로젝트 || 6ft 계획 ||
  • 창작:릴리퍼트 아파트 . . . . 1회 일치
         '''{{{#red 프로젝트 이름을 '코스모폴리턴'으로 변경할 예정임.}}}'''
  • 창작:블랙 마켓 . . . . 1회 일치
         그리하여 블랙 마켓 내에서는 문자 그대로 '쫓기는 자와 쫓는 자의 대결'이 실시간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범죄자들은 자신들의 [[창작:코스모폴리턴/커넥션|커넥션]]을 최대한 활용해 수익을 낸 뒤 흔적을 지웠고, 법의 집행자들은 최신 수사 기법과 함정 수사, 정보원 매수, 증인보호 프로그램 등을 이용해 범죄자들을 추적해 나갔다. 그 와중에 이 두 집단 내에서 그에 반발하는 세력, 즉 본인의 더 큰 이익을 위해 동료(?)를 팔아넘기는 배신자들과 기밀 정보를 팔아먹어 동료 형사들을 배신하는 부패경찰들이 등장하여 치고 받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여기에 이 혼란을 이용하여 정당한(?) 수익을 올리려는 일반인들까지 끼어들면서 그야말로 '''카오스'''가 된다.
  • 창작:시티 라이트 . . . . 1회 일치
         ※ 프로젝트 이름을 '''[[창작:코스모폴리턴|코스모폴리턴]]'''으로 변경했음.
  • 창작:연합 택시회사 . . . . 1회 일치
         80년대 즈음 중국계(정확히는 홍콩 출신) 미국인들이 설립했으며, 그 때문에 흔히 상상하는 노란색 미국 택시와 달리 빨간색을 사용하고 있다.[* 실제 홍콩 택시는 빨간색과 흰색을 섞어서 사용하고 있다.] 80년대 이후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다가 한국인이나 일본인 등이 합류하여 이름에 걸맞게 아시아인들의 연합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뿌리가 깊은 국적 간의 갈등이나 본토의 문제 때문에 이래저래 말도 많다고 한다.
  • 창작:왕국 . . . . 1회 일치
         || 프로젝트 || 6ft 계획 ||
  • 창작:좀비탈출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용도}}}''' || 선택지 소설 프로젝트 ||
  • 창작:좀비탈출/0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0-1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0-1-2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1-2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2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2-1-2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3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3-1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3-2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4-0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4-1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4-1-1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4-1-2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4-1-2-2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5-1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5-1-1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5-1-1-1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5-1-1-1-1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5-1-1-1-1-1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5-1-1-1-1-2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5-1-1-1-2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5-1-1-2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5-1-2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5-2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기록 . . . . 1회 일치
          여러 사람이 참여하는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설정의 충돌을 막기 위해 미리 정리해 두기 위해서이다.
  • 창작:좀비탈출/요새편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요새편/1-2-1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요새편/1-2-2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좀비탈출/학교 . . . . 1회 일치
         ||<#191970> '''{{{#white 프로젝트}}}''' || 좀비탈출 ||
  • 창작:트와일라이트 시티 . . . . 1회 일치
          * '''인디고 프로젝트(Indigo Projects)'''
  • 채윤아 . . . . 1회 일치
         [[분류:198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한국방송공사의 아나운서]][[분류:대한민국의 아나운서]][[분류:경희대학교 동문]]
  • 천안함 침몰사건 . . . . 1회 일치
         [[분류:한국사]] [[분류:사건]]
  • 철인 28호 . . . . 1회 일치
         2005년이 되면서 실사영화가 개봉. 연기력 있는 배우들이 등장하고, 한국에서도 관심을 가졌으나 아쉽게도 평가는 좋지못했다. 이후 오시이 버전인 연극판도 비슷한 평.
  • 최재혁 (음악가) . . . . 1회 일치
         [[분류:대한민국의 록 음악가]][[분류:인디 록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드럼 연주자]][[분류:197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국외국어대학교 동문]][[분류:대일외국어고등학교 동문]]
  • 카네다 쇼타로 . . . . 1회 일치
         여기에서는 자주 조종기를 뺏기는등 어수룩한 면도 보이지만 다른 로봇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이 불살을 행하고 사람을 죽였다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주인공들([[키라 야마토]]등)과 다르게 로봇에 탑승한 모든 악당들을 처절하게 끔살시키는 프로페셔널로서 재조명을 받고 있다. 과장이지만 싸울때를 보면 악당을 생포하든 죽이든 그런건 안중에 없는듯한 쿨한 마인드가 돋보인다.
  • 카마세이누 . . . . 1회 일치
          * 프로레슬링, 격투기 등에서는 오프닝 경기 등에서 별로 승산이 없이 내보이는 캐릭터에 쓰인다.
  • 카미마치 . . . . 1회 일치
         카미마치란, [[가출]]이나 기타 이유로 주거가 정해지지 않은 젊은 여성이 인터넷의 가출 사이트나 프로필 사이트를 사용하여, 숙박할 장소와 식사를 제공해줄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이를 무료로 제공해주는 사람을 '카미'='신'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카미마치란 단어를 쓰게 됐다. 다만 대가로서 뭔가를 요구하는 사람은 카미라고 불러주지 않는다. [[원조교제]]와는 달리 일단 명목상으로는 성관계 등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 카스미가세키 . . . . 1회 일치
         일본 외무성을 비롯한 많은 관청이 있다. 외무성을 뜻하는 속칭으로도 쓰인다. 한국으로 치면 "남산"이 [[국정원]]을 뜻하는 것처럼 지명이 특정 기구를 가리키는 은어가 세간에 자리잡은 사례로 볼 수 있다.
  • 칼리파 하프타르 . . . . 1회 일치
         포로 신세가 된 하프타르에게 접근한 것은 당시 카다피와 적대하던 [[미국]]이었다. 1990년 [[미국]]의 [[CIA]]는 난민 프로그램을 통하여 수단에서 하프타르와 300명의 포로 병사들을 미국으로 입국시켰다. 하프타르는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여 20년 동안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미국 정보부의 협력하여 카다피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 커맨드 앤 컨커 : 레드 얼럿 2/연합군 . . . . 1회 일치
          * 한국 전용
  • 컬트 종교 . . . . 1회 일치
         과격하고 이단적인 신흥 종교. 혹은 종교적 성향이 강한 집단. 흔히 한국에서 말하는 [[사이비 종교]]를 뜻하는 말이다. 많은 국가에서 컬트 종교는 사회적 문제로 여겨진다.
  • 케모 . . . . 1회 일치
         [[New 52]]에서는 메탈멘 관련 에피소드에서 등장. 누군가 매그너스 박사의 눈을 피해 프로토타입 리스폰스미터를 화악약품이 담긴 금속 통에 실험이라며 넣었고, 그것이 케모가 되었다. 덕분에 사람들이 위기에 처했으나 메탈멘의 희생으로 어떻게든 되었다.
  • 코난(미래소년 코난) . . . . 1회 일치
         대변동 후, 남겨진 섬(残され島)[* 한국판에서는 '홀로 남은 섬'.]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12살 소년. 문명이 멸망할 때에 추락한 로켓의 탑승자들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쟁과 대변동 끝에 멸망 직전까지 몰린 지구를 보아온 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덕분인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착한 마음의 소유자로 성장했다. 또한 풍성한 자연 속에서 자란 덕분에 살아남기 위한 여러가지 지혜와 놀라운 강함,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지니고 있다.
  • 코토부키 퇴사 . . . . 1회 일치
         한국에서도 비슷하게 결혼퇴직이라는 말이 있으나,일본과는 달리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써 받아들여진다. 아예 "결혼하면 정당한 권고해직사유"가 될 수 있는 결혼퇴직제가 존재하는 회사도 때때로 언론에 보도될 정도. 당연히 이는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라 명백한 불법이다.
  • 쿠도회 . . . . 1회 일치
         [[부산]]에서 [[마약]]과 [[권총]]을 소지하고 잠복하고 있던 간부가 검거되었다.[[http://hankookilbo.com/v/60935df6b90f43b6aac5c1a22234047c (한국일보)]]
  • 키라키라 네임 . . . . 1회 일치
         || 한국이라고 없는건 아니다. ||
  • 키모오타 . . . . 1회 일치
         기분나쁜 [[오타쿠]]라는 의미. 일본어이며 한국에서 쓰이는 [[혼모노]]와 비슷하다.
  • 타쿠마 마모루 . . . . 1회 일치
         타쿠마 마모루는 중학교에서 공업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야구부]]에 소속되었지만, 연습 태도가 나빠 상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고등학교 2학년에 [[중퇴]]했다. 중퇴 이후에는 이타미 시에서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 타타리 . . . . 1회 일치
         [[일본]]의 오컬트 용어. 한국에서 말하는 '탈이 난다.', '동티가 난다'와 유사하다.
  • 탈북자 망명정부 . . . . 1회 일치
          * 대한민국의 영토조항, 자유통일을 갈망하는 국민정서로 볼 때, 북한망명정부는 한국 정부와 국민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
  • 탐라국 여왕 . . . . 1회 일치
         [[분류:한국 신화]]
  • 토리코/370화 . . . . 1회 일치
          * 날려간 아이마루는 구하러 온 브란치에게 "가야할 곳"이 있다며 워프로드를 연다.
  • 토리코/389화 . . . . 1회 일치
          * 미도라를 코웃음을 치며 자기 자신이나 걱정하라고 하는데, 토리코가 제트 레그 나이프로 아카시아 본체를 공격한다.
  • 토탈워: 쇼군 2 - 사무라이의 몰락/유닛 . . . . 1회 일치
         초슈 번의 유신 지사 타카스키 신사쿠가 조직한 군사 조직. 한국에서는 기병대(奇兵隊)라고도 불린다.
  • 토탈워: 쇼군 2/건물 . . . . 1회 일치
          * 해당 지역에서 무역선, 야구라부네를 건조할 수 있게 됨
  • 토탈워: 쇼군 2/세력 기술 . . . . 1회 일치
          * 뎃포 코바야(Matchlock Kobaya), 야구라부네(Siege Tower Bune)를 건조할 수 있게 됨
  • 톰 최 . . . . 1회 일치
         [[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미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미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워싱턴 대학교 동문]][[분류:한국계 미국인 배우]][[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디모인 출신]]
  • 통일주체국민회의 . . . . 1회 일치
         [[분류:한국사]]
  • 트로피코 4/진영 . . . . 1회 일치
          * 핵무기 프로그램 건설
  • 특이한 세금 . . . . 1회 일치
          * 마약세 : 테네시 주. 2007년 제정, 2009년 폐지. 불법 마약을 거래하는 딜러라도 기소당할 염려없이 자신의 수익을 신고할 수 있다. 무려 150만 달러의 세수를 거뒀으나 주 대법원에 의하여 위헌으로 결정나 폐지되었다.
  • 파머보이즈 . . . . 1회 일치
         1981년, [[키프로스]]인 이민자 형제가 창립했다. 1호점의 위치는 [[캘리포니아]] 주 [[페리스]].
  •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 . . . . 1회 일치
         [[일본]]의 [[롤플레잉 게임]] 시리즈. [[한국]]에서는 통칭 '파판'.
  • 파치카스 . . . . 1회 일치
         [[일본어]]로 카스(滓, かす)는 [[앙금]],[[찌꺼기]],[[쓰레기]] 같은 의미가 있다.[* 한국에서 이런 이름의 [[맥주]]가 있다는 것이 일본인들에게는 유머(…).]
  • 판타스틱 포(2015년 실사영화) . . . . 1회 일치
         로튼토마토 지수가 20%로 시작하더니 그것이 14%로 하락했다.(...) 그리고 이후 더 하락.(...) 이외에도 각지에서 안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에서도 개봉했는데 역시 평이 안좋다. 반지닦이에서 유래해 고무닦이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 페어리 테일/508화 . . . . 1회 일치
          * 유키노 아그리아, 소라노 아그리아(엔젤) 자매도 적과 싸우고 있었는데 페어리 로로 인해서 적들이 분쇄됐다. 프로시와 렉터도 갑자기 적들이 쓰러졌다고 좋아한다. 유키노도 로그처럼 페어리 로에 대해선 모르지만 일단 적들이 사라졌다고 한숨 돌린다. 소라노는 아직도 언니라 불릴 때마다 "언니가 아니다"라고 무의미한 부정을 하는 상태.--만담이냐-- 이들은 언덕 아래 쓰러진 적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절벽 위에서 "화려한 마법을 사용했다"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 페어리 테일/509화 . . . . 1회 일치
          * 라케이드 드래그닐과 대치하고 있는 카구라 미카즈치. 제레프의 아들이라는 말에 반문한다. 라케이드는 정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제레프의 아들이라고 강조한다. 유키노 아그리아, 렉터와 프로시는 "드래그닐"이란 성을 듣고 나츠 드래그닐을 떠올린다. 라케이드는 내친 김에 그가 제레프의 동생이며 자신의 숙부에 해당한다고 폭로한다. 충격을 받는 유키노와 카구라. 라케이드는 그들에게 나츠와 만나는걸 기대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 페어리 테일/510화 . . . . 1회 일치
          * 라케이드 드래그닐은 유키노 아그리아와 카구라 미카즈치를 완전히 제압했다. 그의 쾌락 마법에 당한 유키노는 특히 상태가 좋지 않은데 완전히 탈진해서 정신이 혼미한 상태다. 렉터와 프로시도 무력하게 쓰러져 있는데, 렉터는 스팅을 부르며 도와달라고 외친다.
  • 페어리 테일/532화 . . . . 1회 일치
          * 결국 제레프는 메이비스의 애원을 무시하고 페어리 하트를 강탈, 무한한 마력을 손에 넣고 "백마도사" 제레프로 재탄생한다.
  • 페어리 테일/533화 . . . . 1회 일치
          * [[오거스트]]와 격전 이후 대성당 부근에 있던 [[길다트 클라이브]]와 [[카나 알베로나]]는 방금 전 길드쪽에서 시작돼 일대를 휩쓸고 지나간 빛의 정체가 무엇인지 골몰한다. 그것은 [[제레프 드래그닐]]이 페어리 하트를 습득, 백마도사 제레프로 각성한 여파였지만 둘이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 페이데이 2/적 . . . . 1회 일치
         이들을 살해하면 ~~프로는 불필요한 살인은 안한다는 베인의 꾸중과 함께~~뒷처리 비용을 뜯기게 되며, 구금되었을 시 어썰트 중간 쉬는시간 때 인질 교환 협상 시간도 30초 씩 길어진다. 인질 한명만 죽여도 다음 쉬는시간 때 교환될 생각은 접어야 한다. 다만 이것은 라우드 때 얘기고, 스텔스의 경우에는 스텔스를 유지하기 위해 민간인을 쏴죽이는 경우도 있다.
  • 평론을 쉽게 쓰는 법 . . . . 1회 일치
         "프로이트의 구강기 이론에 따르면", "칼 융의 집단무의식 이론에 따르면", "라캉의 거울 단계 이론에 따르면"
  • 풍계리 . . . . 1회 일치
         [[방사능]] 오염이 심각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설사 접근할 수 있다고 해도 '''절대로 접근하면 안된다.''' 이 지역 주변의 [[탈북자]]들 역시 방사능 피폭 증세를 보이고 있으며, 북한 당국이 방사능 피해에 대하여 알려주지 않은 탓에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야 자신이 피폭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 풍운 . . . . 1회 일치
         후반부 보스. 부여국의 왕. 일단 동영과 비슷하게 여러모로 왜곡되기는 했으나 한국계를 모델로 하고 있어서 국내에서 인기가 높다. 무공도 뛰어나지만 지략도 인품도 뛰어나서 카리스마가 대단한 인물. 중원정복을 위해서 조상이 봉인해둔 동방창룡의 무공을 얻으려고 했고, 이를 위해서 계략을 써서 무명을 제압하고, 풍운을 납치해온다. 하지만 동방창룡의 무공이라는게 후손을 낚기 위한 페이크(...)였고 허무하게 주화입마에 걸려서 죽고 만다.
  • 프로토스 . . . . 1회 일치
         '칼라'라는 것에 의해 종족의 정신이 이어져 있으며 브루드 워에서 등장한 암흑 기사 등은 이러한 칼라를 거부한 자들이다. 그렇기에 칼라를 중시하는 프로토스 세력과는 껄끄러운 입장.
  • 하이브리스토필리아 . . . . 1회 일치
          * 근대적인 연쇄살인범에 적용된 예로는 테드 번디가 있다. 테드 번디는 멀끔하게 생긴 외모, 괜찮은 스펙, 뛰어난 언변에다가 연쇄살인범이라는 점까지 더해져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법정에서 자신의 그루피에게 프로포즈를 하는 쇼를 보이기도 했으며, 실제로 결혼을 하였다.
  • 하이큐/213화 . . . . 1회 일치
          * 아미노산이 첨가된 드링크나 단백질, 혹은 프로틴. 당분은 바나나나 100% 오렌지 주스로 충당한다.
  • 하이큐/264화 . . . . 1회 일치
          훗날까지 "초면 프로포즈 사건"이라 회자되는 이 사건. 동기들은 세삼 그때를 떠올리며 "원래 저런 녀석"이라 납득하게 되었다. 타나카는 내일 시합을 앞둔 긴장감을 핑계대고 자리를 뜬다. 남은 동기들은 혹시 저러다 스토커가 되는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했지만 키요코가 정말로 거절하면 그렇게까진 안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타나카를 바보취급하는 분위기였지만 엔노시타가 좋은 얘길 해준다. 늘상 바보같아 보여도 언제나 한결 같은건 대단한 일이라면서.
  • 하이큐/272화 . . . . 1회 일치
          * [[오오미 타로]]는 오지로에게 "천천히 가자"고 지시한다. 이나리자키의 서브. [[스나 린타로]]와 교대해 1학년 서버 리세키가 투입된다. 이나리자키에선 그리 유명한 선수는 아니다. 중학교 시절엔 만년 벤치 신세에 딱 한 번 핀치 서버로 기용됐다가 서브 미스로 경기를 말아먹은 전력이 있다. 고등학교에선 강호 이나리자키에 들어온 건 좋으나 여전히 기회는 적었고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공산도 있다. 미스하면 본전도 없다, 이런 부담을 안고 "일단 들어가는 서브"라는 안전빵을 택한다. 하지만 이게 패착이 됐다. 우선 자군 벤치에서부터가 시들한 반응. 무난하게 아사히에게 떨어지는 것을 안전하게 리시브, 히나타의 스파이크로 이어지는데 하필이면 그게 리세키가 있는 위치로 떨어지면서 리시브까지 실패하고 만다. 간만에 손맛을 본 히나타가 기뻐날뛰려는데, 이나리자키 관중석에서 들리는 굉음으로 뻘쭘해진다. 이나리자키의 응원단이 자군 서버의 실수를 "볼보이는 안 불렀다"고 극언해가며 까대는 소리였다. 대부분 관중들은 딱히 실수한 것도 없는 자기편 선수를 디스하는걸 이해하지 못했지만 바보커플의 여자 쪽은 단숨에 알아챘다. 이른바 "이나리자키 도깨비 응원단". 소심한 플레이를 인정사정없이 욕하는 묘한 기질이 있다. 사실 프로도 아닌 고교 선수들에겐 너무나 가혹한 장외플레이. 적이라도 같은 서버인 [[야마구치 타다시]]나 키노시타마저 기를 죽일 정도로 무자비한 야유였다. 그리고 이 야유는 의외의 인물도 자극하는데, 바로 카게야마였다.
  • 한덕수 (1907년) . . . . 1회 일치
         [[분류:1907년 태어남]][[분류:2001년 죽음]][[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니혼 대학 동문]][[분류: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분류:재일 한국인]][[분류:최고인민회의 의장]][[분류:조선로동당]][[분류:최고인민회의 대의원]][[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분류: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중앙상임위원회 의장]]
  • 한동근 . . . . 1회 일치
         [[1993년]] [[5월 9일]]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다. 데뷔하기 전까지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4년 동안 공부했다.<ref>{{뉴스 인용 |저자=손수영 |제목=한동근, 데뷔 전 무슨 일 했나? "평범한 유학생이었다" |url=http://news.heraldcorp.com/culture/view.php?ud=201609092113433115096_1 |뉴스=헤럴드경제 |출판사= |위치= |날짜=2016-09-09 |확인날짜= }}</ref> 한동근은 미국 유학 도중 성가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합창을 하면서 희열을 느꼈고 피아노로 노래를 하기도 했는데 그는 이때의 경험으로 가수를 꿈꾸게 되었다고 말했다.<ref>{{뉴스 인용 |저자=김민서 |제목=‘가요광장’ 한동근 “美 유학 중 성가대 활동, 가수 된 계기” |url=http://isplus.liv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0545114&cloc=rss%7Cisplus%7Centertainment |뉴스=일간스포츠 |출판사= |위치= |날짜=2016-09-03 |확인날짜= }}</ref> [[2014년]] [[8월]] 데뷔 앨범을 준비하며 앨범에 들어갈 노래를 선정하는 자리에서 그는 《이 소설의 끝을 써보려 해》를 부르게 되었다. 데뷔 곡을 정하기 위해서 시험 삼아 노래를 부르는 자리였던 만큼 힘을 빼고 편안하게 노래했다고 그는 증언했다. 이를 "자연스럽다"며 마음에 들어한 소속사 사장의 권유에 《이 소설의 끝을 써보려 해》는 그 다음 달 발표되었다.<ref>{{뉴스 인용 |저자=양승준 |제목=카메라 없어도 노래 자처…열정이 만든 ‘역주행 신화’ |url=http://www.hankookilbo.com/v/31eb3a7aa65e4987a1b22f33592d79a6 |뉴스=한국일보 |출판사= |위치= |날짜=2016-09-01 |확인날짜= }}</ref>
  • 함대 컬렉션 . . . . 1회 일치
         한국에서는 "일본의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게임"이라며 혐오하는 사람도 많다. 실제로 몇몇 웹사이트에서는 칸코레에 대한 언급이 암묵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 핫라인 마이애미 . . . . 1회 일치
          * 야구방망이
  • 핫라인 마이애미/등장인물 . . . . 1회 일치
         === 프로듀서 ===
  • 해수투명도 . . . . 1회 일치
         한국 근해의 투명도
  • 허드슨 대학교 . . . . 1회 일치
         하도 자주 등장하다보니까 허드슨 대학은 로 앤 오드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악명 높은 장소로 찍혔다. 심지어 제작진도 이걸 알고 있어서, 프로듀서가 "당신이 절대로 배우거나 가르치러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엄청나게 높은 범죄율(It is the one place you never want to go to school or teach at. Very high crime rate.)"라고 발언했을 정도.
  • 허만하 . . . . 1회 일치
         * 2009년 제2회 [[동리·목월문학상|목월문학상]]
  • 허위 . . . . 1회 일치
         [[분류:조선 의병장]][[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구미시 출신 인물]]
  • 허화평 . . . . 1회 일치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정국이 요동치는 판에 허화평은 TV조선의 단독인터뷰에 응했다. 이 자리에서 허화평은 박근혜 대통령이 최태민의 정신적 포로라고 증언하면서, 이 같은 사건으로 한국의 정치적 후진성이 나타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http://m.news.naver.com/hotissue/read.nhn?sid1=100&cid=1051768&iid=1139394&oid=448&aid=0000186191|#]]
  • 현민 . . . . 1회 일치
         한국의 5인조 아이돌 그룹 [[대국남아]]의 멤버이자 리드보컬이다.
  • 현실문화사 . . . . 1회 일치
         이후 1990년 10월, 보안사에서 탈영한 윤석양 이병(당시 24세)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해 버렸다. 이 과정에서 보안사가 현실문화사를 운영하던게 드러난다.
  • 화염병 . . . . 1회 일치
         2006년작 한국 영화 괴물 후반부에 등장했다.
  • 황용식 . . . . 1회 일치
         '''황용식'''(黃龍植, [[1944년]] [[5월 28일]] ~ )<ref name="사전">{{서적 인용|title=한국인명사전 (연합연감 1999년판 별책) |publisher=[[연합뉴스]] |page=840 |date=1999-04-30}}</ref>은 [[대한민국]]의 외무공무원이다.
  • 휴전 . . . . 1회 일치
         * [[6.25 전쟁]] - [[한국전쟁휴전협정]]
  • 히나타 쇼요 . . . . 1회 일치
          * 한국 팬 한정으로 [[카게야마 토비오]]가 영산이로 불리는 것처럼, 히나타는 일향이로 불린다.~~겁나 예쁘다.~~
  • 히치하이킹 . . . . 1회 일치
         [[JTBC]] [[비정상회담]]에 출연한 러시아 출신 방송인 일리야의 증언에 따르면, 러시아에서는 히치하이킹이 보편적이며 아무나 다 태워준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소련]]에서는 [[택시]]가 보편화 되어 있지 않아서, 대중교통이 없는 곳이나 밤늦게 집에 갈 때는 히치하이킹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 히치하이킹이 되지 않아서 충격을 받았다고(…)[http://news.tf.co.kr/read/entertain/1476694.htm 참조]--훈훈한 소련 인심--
  • 히토모도키 . . . . 1회 일치
         [[일본]]의 [[넷 우익]]이 [[한국인]]을 '쵸우센히토모도키'라고 불렀던 [[차별용어]]에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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